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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5.26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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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뫼 김말봉은 후년에 이런저런 영예로운 이름들을 많이 얻게 되었다. 이를테면 기독교계의 여성 장로 1호였다든가, 여성 작가로서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호였다든가, 일제 말 친일문학을 거부한 절필 선언의 여성 작가였다든가, 하여튼 좋은 이름(타이틀)을 상당히 지니고 있었던 여성 작가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외부로 드러난 그런 영예로움보다는 오히려 숨겨진 어떤 어두운 면이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게 그(끝뫼)의 결혼과 관련된 일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그의 결혼생활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굳이 그의 결혼생활의 행·불행 여부를 여기서 거론하는 이유는 그의 소설 창작에 그의 그런 실제 생활체험이 크게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판단 때문이다.

 

김말봉은 부산에서 살던 시절에 전상범이란 청년을 잘 알고 있었으며 또 그를 사모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상범이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어 김경순이란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경순이란 여인은 말봉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친한 언니(소위 S언니)였다. 그 후 말봉은 하와이에 살고 있던 친언니 보배로부터 학비 부담의 언질을 받고 일본으로 가서 유학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말봉이 유학 생활을 하고 있던 그 시기에 경순 언니가 전상범의 아이들 둘을 이 세상에 남겨두고 사망하고 말았다. 전상범은 부득불 초등학교 교사인 여운영이란 여인과 재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운영의 처지에서 볼 때 그 결혼은 매우 불행한 결과만을 남겨 놓은 것에 불과하였다.)

 

이 시기에 김말봉은 그녀 자신에게 적극적이었던 이석현이란 은행원과 교회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결과 김말봉이 이석현에게 내가 당신과 결혼한 것은 전상범에 대한 반발심에서였다. 다행히 혼인신고도 되어 있지 않으니 깨끗이 헤어지기로 하자고 하여 둘은 마침내 갈라서고 말았던 것이다. 이처럼 김말봉의 첫 번째 결혼생활은 둘 사이에 상처만을 남기고 물거품이 돼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김말봉의 결혼생활이 파경에 이르게 된 사실을 알게 된 중외일보 편집국장 수주 변영로가 이들(전상범과 김말봉) 사이에 끼어들어 국면을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틀어 놓고야 말았다. 이때가 김말봉이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뒤 수주 변영로가 근무하던 중외일보에 기자로 들어가 일하던 바로 그때(1929)였다.

 

변 수주는 아직도 전상범이 김말봉을 결코 잊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김말봉 역시 전상범을 결코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수주 변영로는 개인적으로도 친분 관계가 있었던 전상범에게 김말봉이 취재차 평양으로 가고 있으니 그 경의선 열차에 올라 그녀를 만나 보라고 일러주었다.


우연을 가장하여 이 열차에 올라 김말봉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둘은 얼마 후 새 살림을 차리게 되었던 것이다. 말봉이 전상범의 세 번째 부인이 된 것이다. 이웃의 비난이 뒤따랐는데, 특히 그녀가 다니던 교회에서 책벌을 내린 것은 그녀에겐 힘겨운 일이었다. 또 여운영이 상범의 아들 홍이를 데리고 전상범의 집에서 나와 그녀가 근무하던 학교 근처로 방을 따로 얻어 나가버리고 말았다.

 

전상범이 1936년 초 급성폐렴으로 사망하자 말봉은 당시 상처를 한 재산가 이종하와 재혼하였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삶을 산 김말봉은 19612월 폐암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런 그녀의 삶의 체험이 통속작가로서의 창작생활에 그 어떤 활력소가 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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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정신과 사회사상의 변증법적 통합(3) -김말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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