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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물들의 메아리 없는 항변(하) -이청준의

임영천의 '한국 기독교소설 산책'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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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09.05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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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동안 진범이 체포되었고, 그 범인이 바로 아들이 다니던 주산학원의 원장 선생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알암이 어머니는 격렬한 증오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럴 때 다시 김 집사가 나타나 범인을 증오로 대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써 대할 것을 권고해 온다. 그러는 김 집사의 말에 반발심을 느끼던 그녀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을 바꿔 먹고 범인을 용서해 주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결국 그녀는 사형수를 찾아가 용서의 증거를 보여 주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열려 가던 그녀의 마음은 갑자기 꽉 닫히고 말았다. 그 이유는 사형수가 처형을 앞두고 기독교에 귀의해 마음의 평안을 이미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그녀를 절망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그 일을 그녀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한 그녀는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그녀는 자기보다 먼저 그 범인을 용서해버린 하나님에 대해서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은 자기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가더니 이제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할 수 있는 기회마저 빼앗아 버렸다고 하는 데 대한 분노가 신(神)을 향해 치솟았던 것이다.

 

주님께서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아가 버렸으므로 다시 그를 용서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것이 신의 공평한 사랑이라면 자신은 차라리 신의 저주를 택하고 말겠노라고 외쳐대고 있다. 그 범인에 대한 처형 소식이 들려온 직후 그녀는 자신의 너무도 인간적인 절망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진(自盡)하고 만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한 마리의 벌레처럼 신의 발뒤꿈치에 밟혀 죽고 만 셈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화자, 즉 그녀의 남편은 그 처지가 ‘벌레’의 것과 얼마나 다를 것인가. 아들이 죽고, 뒤이어 아내마저 잃은, 넋 잃을 수밖에 다른 길이 없게 된 남편 역시 미물과도 같은 미약한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작품은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많은 문제점을 제기해 주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신에 대해 저항하고 있다. 부조리한 현실과 그에 대한 해결책이 따로 없는 현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을 마치 당연지사라는 듯이 바라보고만 있는 침묵의 신에 대해 작가는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은혜니 섭리니 사랑이니 하는 추상적 관념으로 감싸져 있는 기독교의 교리나 계율에 대하여 작가는 도전하고 있다. 그는 알암이 이야기와 알암이 어머니 이야기를 내세웠고 그것을 ‘벌레 이야기’라고 하면서도 그러나 이 미물(들)의 외침에 제발 좀 귀 기울이시라고 외쳐대고 있는 것이다. 이쯤 이야기하고 보면 ‘벌레’라는 말의 함축적 의미가 매우 넓게 확대되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벌레 이야기〉는 단지 알암이와 그 어미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다. 그런 처지에 처해 있는 오늘의 미약한 신앙인, 나아가 우리 인간 모두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벌레 이야기〉인 셈이다.

 

별 신앙 없이 교회에 나다니고 헌금을 하곤 했던 기복신앙의 소유자 알암이 어머니에 대하여 독자들, 특히 기독교 신도인 독자들은 별로 호감을 가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결국 범인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말하자면 불신앙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애초에 그렇게 나약한, 곧 벌레와도 같은 존재라고 하는 이해를 가지고 그녀에게 접근할 때 그녀의 고통과 아픔을 깨닫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인간의 너무도 다양한 고통의 양상들을 지금껏 종교가 너무 안일하게 다루어 온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차제에 해봄직도 하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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