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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중앙교회 김영규목사

복지와 섬김으로 모범적 모델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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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05.0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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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 복지시설, 총 80명의 직원 있는 복지재단으로 성장

“지역과 함께하는 목회가 앞으로 중요한 트렌드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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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에 위치한 화계중앙교회 김영규목사(사진)는 그가 속한 교단 안팎에서 이른바 ‘강성 인물’로 알려져 있다. 교단통합, 신학교 등 교단의 첨예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김목사는 가장 앞장서서 가장 큰 자기 목소리를 내왔다. 이로 인해 ‘김영규’란 이름 석 자는 ‘비타협적 투사’와 등치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세간의 생각과 실제 김영규목사는 매우 다른 면이 있다. 일상에서 그는 머리에 붉은 띠를 동여맨 투사가 아니라 봄에는 밭에 옥수수를 심고, 가을에는 사과를 수확하는 홍천 산자락의 ‘시골 목사’이다. 심지어 오랜 세월 그와 함께했던 동네 주민들은 투쟁에 앞장 서는 그의 모습을 보면 깜짝 놀라기 일쑤이다. 

 

본인 스스로도 “솔직히 말해서 총회나 교단의 일만 아니면 나는 순박한 시골 목사이다. 새벽기도 끝나면 밭에 나가 곡식을 심고, 김 메는 것이 내 일이다”고 말한다. 실제로 김목사는 페이스북에 아주 서정적인 수필을 쓰는데, 이는 자연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감성적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김목사의 이러한 야누스적 ‘두 모습’은 어떻게 태어난 것일까?

 

김영규목사는 1982년 5월 5일 마포구 성산동에서 처음 개척교회를 설립했다. 만 21살, 신학교 2학년 때였다. 총각 전도사가 목회하는 교회는 150명이 출석하는 큰 부흥을 이뤘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목사는 “그때까지 잘 나가는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김목사의 목회여정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대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바로 1985년 봄의 ‘대한신학교 사태’였다. 한국의 예레미야로 불리는 김치선박사가 학장으로 있던 대한신학교가 교단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인사에게 넘어가게 됐고, 당시 학생들은 이를 반대하며 데모를 전개했다. 김목사는 남대문시장에서 베를 사서 상복을 만들어 입고 가장 앞장서서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대한신학교의 ‘매각’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김목사는 제적됐다. 일가친지와 함께 졸업식에 갔는데, 졸업생 명단에 그의 이름은 빠져있던 것이다. 한마디로 ‘잘린 것’이었다. 순탄하지 않은 그의 목회인생의 출발이었다. 김목사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불의한 일에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 나는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청산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 대한신학교는 대신대가 됐고, 대신대는 안양대가 됐다. 그리고 대한신학교에서 자라난 선후배들은 안양대가 기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종교재단에 또 다시 매각될 것을 막겠다며 또 다시 ‘매각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신적인 섭리는 김영규목사를 통합측 교단의 한 장로가 운영하는 경기도 이천의 양로원에 전도사 겸 관리인으로 보냈다. 서울 올림픽의 열기가 한참 뜨겁던 1988년이었다. 거기서 김목사는 하루에 70개의 연탄을 갈아야 했다. 그러다 가스에 중독돼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그런데 그 처절한 노동이 지금 그가 전개하고 있는 ‘노인복지목회’의 밑거름이 됐다. 김목사는 “그때 내가 갈았던 연탄 한 장 한 장을 주님께서 지금 요양원과 주간보호소의 기초돌이 되게 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시간은 흘렀다. 1991년 4월 5일 김목사는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홍천의 한 폐가에 보따리를 풀었다. 홍천에 아무 연고도 없었다. 단지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강원도란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수의 말처럼 ‘신의 섭리는 잔혹하지만 정확하다. 그리고 은혜롭다’.

 

당장 생계가 막막했다. 도시에서 목회하는 선배들을 찾아가 ‘시골서 개척했으니 지원해 달라’고 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대신 몸으로 부딪혔다. 시골서 할 수 있는 것은 농사 외 에는 없었다. ‘모방농사’를 시작했다. 하루는 다른 사람의 농사를 해주고 배운 그대로 자신의 밭에 이식했다. 

 

그러다 2년 정도 읍내의 어린이집 운전기사로 취직했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돼 1994년 어린이집을 시작했다. 얼마 후 어린이집은 150명까지 성장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됐다.   

 

그러다 김목사의 목회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노인복지에 눈을 돌린 것이다. 김목사는 “2000년에 들어서서 한 통계를 보게 됐다. 영아출생이 70명씩 줄고, 노인은 150명씩 늘어난다는 통계였다. 다시 말해 고령사회를 너머 초고령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노인복지가 목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김목사의 선견지명은 적중했다.  

2000년 12월 김목사는 교회의 한 공간을 활용해 노인을 위한 주간보호센터를 열었다. 강원도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고, 당시는 요양보호사도 없던 시절이었다. 김목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노인복지에 대해 공부했다.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시작됐다. 김목사의 노인사역은 시범사업으로 선정됐고, 2010년 너브네 골짜기에 ‘너브네 노인전문요양원’을 개원했다. 현재 노인요양원 외에도 어린이집과 주간보호센터, 소규모 전문요양원 등 총 5개의 복지시설을 설립해 운영 중에 있다. 이 시설에서 근무하는 직원은 총 80명에 이르고 있다. 이는 홍천에서 일자리 창출로 10위 안에 드는 것이다. 

   

김목사는 “처음 홍천에 내려와 농사를 짓고 노인복지를 했을 때 주위로부터 목사가 목회는 안 하고 딴 짓하는 ‘미친놈’ 취급을 받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우리 교회를 부러워한다”며, “지금 목회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지역과 함께하는 목회가 앞으로의 중요한 트렌드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김목사는 예장 대신총회와 교단을 위한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김목사는 “대신교단은 백석교단과의 통합문제를 두고 갈등했고, 결국 지금은 사분오열된 상태이다. 종종 내가 가장 적극적인 통합반대론자로 아는데 그렇지 않다. 나는 점진적인 통합을 주장했다”며, “출산률 저하에 코로나 여파로 목회상황은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 그래서 분열되기보다는 힘을 합쳐 하나가 되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고난과 역경의 길을 헤쳐 나온 김영규목사의 목회는 복지와 섬김으로 큰 열매를 맺었다. 김목사와 화계중앙교회의 가는 길은 코로나시대에 교회가 어떤 모습을 가져야하는지 하나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안계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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