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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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종합 검색결과

  • [정론]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
      1982년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신앙과 직제위원회(Faith and Order Commission)가 페루 리마에서 발표한 리마문서(Lima Document)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가시적 성과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문서는 전 세계 수많은 교회들이 세례와 성찬과 사역에 대해 수십 년간 이어 온 연구와 대화의 결과이며 교회의 본질에 대한 공통 분모를 확인하고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수많은 교회들이 리마문서에 대해 각 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처한 상황에 따라 적극적으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자신의 공동체가 부족했던 부분을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고백한 이들이 다수였지만 이 문서의 신학적 생경함과 모호함을 토로한 교회도 있었다. 심지어 내용에 대한 찬반(贊反) 사이의 첨예한 대립도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다채로운 견해들을 마주하며 세계의 교회들은 하나님이 교회에 허락하신 다양성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되었다. 연합과 일치를 위해 심은 씨앗이 다양성의 발현이라는 예기치 않은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자연스럽게 세례와 성찬과 사역에 대한 논의가 이전보다 훨씬 깊어지고 넓어지게 되었다. 물론 교회의 연합과 일치로 향하는 길에 여전히 장애물은 있지만 진정한 연합과 일치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새삼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서로의 다름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갈등의 요소가 아니라 성찰과 성숙의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 연합과 일치를 절대적인 기준 아래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오해한다. 연합과 일치는 인위적인 획일화와 결코 동의어일 수 없다. 진정한 연합과 일치는 내 의견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입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자세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신념에 대한 지나친 애정이나 집착으로 대화가 힘들었던 경험이 있는가?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절대화하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는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 진리이지 절대적 신념이 아니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가들은 복음의 본질은 공유하되 신학적 입장이나 교회 생활의 실천에서는 제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성찬에 대한 의견도 다양하고, 예술에 대한 견해도 판이하다. 프랑스 학자 자크 엘륄(Jacques Ellul)의 표현처럼 로마 가톨릭은 하나의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체계를 추구한 반면, 개신교 사상은 모순과 다양성을 그대로 인정한다.    연합과 일치는 천편일률적인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으로 이루어지기보다 “하나하나”가 주님 안에서 모두 소중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로부터 시작된다. 다른 의견과 주장을 마음을 열어 경청하는 겸손함, 타인의 이야기를 아름답고 소중하게 여기는 넉넉함과 온유함이 연합과 일치를 꿈꾸고 소망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그분의 마음을 품을 때(빌 2:5)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잔불도 꺼버리지 않으시며, 지극히 작은 생명 있는 것들의 소소한 감정조차도 세심하게 살피시는 그분,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신을 내던져 종의 형체를 가지사 인간이 되신 그 사건이야말로(빌 2:7-8) 교회와 성도가 흐트러짐 없이 하나 되어 따라야 할 명백한 대상이며 확고한 기준이다.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교계종합
    2024-01-30

오피니언 검색결과

  • 성서와 생활 [15] 그리스도인의 영성예절의 영성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고전14:3 아니시다. 우리도 하나님을 따라 ‘품위있고 질서있는 삶’고전14:40을 살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사랑의 생명을 주셨다. 이 사랑의 생명은 고린도전서에 이름과 같이 선한 열매를 풍성히 나타내는 능력이다. 그 중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고전13:5 라는 말씀이 있다. 사랑은 예절을 알게 한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예절이 없다는 말이며 이것은 곧 혼란과 무질서를 의미한다. 사랑의 생명이 있는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으로 예절을 잃지 않게 한다.    이러한 질서에는 말의 예절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부터 예의 있는 말을 배워야 한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라는 말의 예절을 통해 가정에 천국의 질서를 세워야한다. 부부의 관계 속에서도 이러한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할 부부의 도리가 된다.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렇게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상대방의 의사를 물어보고 결정해야한다. 이러한 가정은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는 예의 바른 가정이 되게한다.    행동과 태도와 의복에도 마땅한 예절이 있어야 함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의복을 가정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입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상대방을 향한 예의이다. 특별히 문둥병에 걸린 옷과 같은 형태나 남녀 구분이 없는 옷을 피해야한다.신22:5 물건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때에는 던지지 말아야한다. 쟁반에 받히거나 공손히 손으로 전달해야한다. 칼이나 가위 등은 위험한 부분을 돌려서 전달하는 예의가 필요하다. 특별히 가정 안에서 이러한 예의를 잘 행하여 평안한 가정을 세워야한다. 가장 친밀한 가족 간에 마땅한 예절이 실종되면 악한 본능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예절에는 음성의 예절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말의 내용과 방법에 따라 음성에 미움과 사랑이 드러난다. 악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기 보다는 합당한 음성의 예절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의 말에는 부드러운 어조가 필요하다. 함부로 말하거나 거짓된 것을 말해서는 안된다. 거친 어조와 교만한 억양도 예의가 없다. 자신을 동정하는 억양이나 자신을 사랑하는 억양도 합당한 표현이 되기 어렵다. 자신의 희생을 나타내는 표현도 합당하지 않다. 오직 사랑의 생명에서 나오는 무례하지 않은 언어의 영성을 갖춘 예절을 필요로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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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0
  • [변두리 소수자13] 억울한 빛과 소금
      어느 사회에서나 타 인종과 타 문화권의 소수자에게 차별적인 마음과 우월적인 자세를 보이는 개인들이 있다. 그러나 친절하고 포용하는 자세로 사회를 좋게 하려는 좋은 분들도 많이 있다.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도 그들은 사회에서 빛으로, 살맛 없는 세상에서 ‘맛소금’이 되고자 힘을 내는 이들이다.   이 세상에서 나는 건강한 마음을 가진 좋은 시민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역차별하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공존하는 사회에서 누구든지 그 마음의 관리 상태에 따라 ‘갑질’ 아니면 ‘을질’을 저지르는 당사자가 될 수 있다. 갑질이나 차별적 경험, 혹은 나의 오해와 편견을 다스리지 않은 행동은 역차별을 가하는 원인이 된다.   미국 대학원 시절에 한인 학생회장을 맡은 적이 있다. 당시, 한인 학생들로부터 학교의 행정 담당자 한 사람이 유독 한인들을 향해 너무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적인 자세를 보인다는 말을 수차례 들었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과의 면담을 위해 그분의 사무실이 있는 행정 건물에 찾아갔다. 먼저 비서가 나에게, 그를 찾아 온 이유를 물었다. 이유를 들은 비서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그분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윽고 내가 만나려는 분이 나왔다. 그분은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한 후, 나를 사무실로 정중하게 인도를 하고, 착석을 권했다. 예상치 못한 그의 친절한 모습에 나는 내 소개를 우물쭈물하고 앉았다. 그가 내 말을 가만히 듣고는, 고마워하는 마음이 진심으로 느껴졌다.   그분과 마주앉아 대화하는 동안, 다른 이들에게 들었던 대로, 그 분은 나를 보지 않고, 눈을 감고 말을 하였다. 이는 그의 습관인데, 이를 문제로 말한 학생들은 자신들을 하대한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분도 오해를 감내하며 사는 한 사람이었다. 이 경우에 ‘인종 차별을 당했다’라는 ‘마음 상태(State of Mind)’는 ‘피해 의식(Victim Mentality)’이며, 그 대상자는 ‘역차별(Reverse Discrimination)’을 받은 피해자라고 나는 해석된다.   비슷한 다른 경험도 있었다. 캠퍼스 안밖의 기숙사들과 아파트의 제공은 학생들에게 너무 감사한 혜택이었다. 그런데 매년 졸업 때가 되면, 졸업하는 한인 학생들에게 같은 이슈가 반복 되었다. 학교의 건물을 배정하고 관리하는 사무실에서 한인 학생들에게 불공정한 행정 집행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사무실을 찾아가, 그 담당자와 이를 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나비넥타이를 한 그 분은 감정을 잘 조절하며 점잖게 설명을 해 주었다.   학교는 신입생과 졸업생 숫자를 계산하여 모집을 하고, 기숙사와 아파트도 그에 따라 배정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3년의 석사 과정이 끝난 학생의 아파트는 같은 과정의 신입생 가정을 위해 배정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마치고 1년의 다른 과정을 하려는 한인 학생들이 통보를 받고도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 현상을 인종 차별처럼 이슈화 하니 화가 난다는 것이다. 오해도 아니었고, 오히려 역차별과 민폐가 될 수도 있는 일인데 찾아갔던 나는 미안하기까지 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학생들에게 그 설명을 하였다. 그런데, 몇 학생이 ‘그래도 인종 차별이 맞다’고 하며, 나에게 ‘무슨 특혜를 받았느냐?’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갑’은 가해자로, ‘을’은 피해자로 공식화 되는 경우를 의외로 많이 본다. ‘약자는 희생자’라는 인식은 오히려 무능한 가해자를 만들 수 있다. 고마운 혜택이 악용되거나, 책임에 충실한 사람들이 오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혜택을 받은 피선교인이 선교사를 고소하여 이윤을 취하는 극단적인 사건들도 있다. 때문에 선교사들이 사랑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사회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계속 보게 된다면, 누구나 경계해야 하는 사안이 되지 않겠는가? ‘이래도 괜찮을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또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며 선행의 용기에 영향을 받는다. 마지막 때에 사랑이 식어지는 현상들은 사랑의 용기를 주저하게 하는 그런 망설임들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우리가 어두운 세상에 그저 있으니, 더욱더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나 보다. 억울하게 오해를 받으면서, 역차별을 당하면서, 그래도 소명을 다하는 이들이 빛과 소금인 것 같다. /목사·새빛다문화센터장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3)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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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6
  • [에레모스 영성 3] 광야의 의미
      시베리아 하면 하얀 설원이 떠오르고, 몽골 하면 푸른 초원이 연상되며, 스위스 하면 알프스의 높은 봉우리가 그려진다. 이스라엘은 광야로 둘러싸인 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북쪽 지방의 헤르몬 산지와 갈릴리 호수가 있기는 해도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이어지는 유대 산악지대는 일컬어서 광야로 불려진다.    광야는 연단과 시험의 현장이다. 용광로에서 달구어진 쇠붙이가 풀무질과 담금질을 거쳐 강한 철근으로 만들어지듯이 사람에게도 때때로 그러한 과정이 요구된다. 유대 민족이 선택의 집단이 되고 택하신 분의 뜻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 그러한 집단 훈련 장소로서의 광야가 필요하였으며, 세례요한이 본격적으로 요르단 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사역을 하기 전에도 광야의 삶이 요구 되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 기도, 그 안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40년 광야 생활이 농축 되어있으며 세례 요한의 오랜 광야 수도 기간이 함유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품고 세례자 요한을 품고 인류역사와 더불어 하늘의 뜻을 품을 수 있었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쳐야 하는 시험대 위에 그분 자신도 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이 땅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인간 조건, 인생 여정, 삶의 애환을 모두 한 몸에 쓸어 담으셨다. 곧 체화, 체득, 체휼의 영성을 쌓아갔던 것이다.   겹겹 첩첩의 토양과 토질 그리고 다양하고 다채로운 색감을 대하며 이런 것이 마치 우리네 삶의 인생여정이 아닐까 하는 상념을 잠시나마 가져보았다. 지난여름 방문했던 유대 광야에서.  /가락재 영성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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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6
  • [건강교실] 신장 이식 (하)
      신장이식을 받은 환자의 예후는 어떨까?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에서 매년 보고되고 있는 통계에 따르면, 국내신장이식을 받은 환자의 생존율은 신장이식 기증자와의 관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혈연이나 비혈연간의 생체 이식에서는 5년 이상 환자 생존율이 약 96.01%이고, 뇌사자 신장이식에서는 약 90.27%로 보고되고 있다.   ‘신장이식 환자의 이식신 생존율’은 이식을 한 신장의 정상기능 여부에 따른 확률을 가리킨다. 이 역시 신장이식 기증자와의 관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5년에 약 85.4%로, 이는 미국 장기이식관리센터(UNOS)가 발표한 이식신 생존율인 1년에 98.5%, 5년에 90%, 10년에 77.1%과 대등한 수준이다.   또한 이식 신장의 거부반응으로 기능을 잃었더라도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는 드물며, 다시 투석을 하거나 신장이식을 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신장이식을 받은 후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신장 이식은 수술만으로 치료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장이식을 받고 나면 투석으로부터 해방되지만, 수술 이후에 조심하시고 신경써야 할 부분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우선 수술 후 회복기에는 몸의 변화에 대해서 적응하고 안정화 되는 기간이 필요하다. 수술 후 영양 관리도 중요하다. 적절한 열량과 단백질의 공급, 충분한 수분섭취를 통한 안정된 체중 유지가 매우 중요하다.   이식수술 후에는 이식된 신장이 우리 몸의 면역체계로부터 공격받지 않기 위해 면역억제제를 복용하게 된다. 이 때문에 감염에 특히 취약한 시기들을 거칠 수밖에 없다. 초기에 예방적 항생제, 항바이러스 치료를 잘 받더라도 거대세포바이러스나 BK 바이러스처럼, 감염이 빈번히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손 씻기, 가글, 마스크 착용 등 위생에 주의해야 한다. 또한 익히지 않은 해산물이나 고기를 주의해야 하며, 예방접종은 의료진과 상의하여 진행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면역억제제를 거르지 않고 잘 챙겨 먹으며, 정기적으로 외래진료를 받는 것이다. 규칙적인 복용, 즉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용량의 약을 잘 복용해야 하며, 적절한 혈중 농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정기적인 혈액검사를 통해 적정 복용량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이처럼 수술도 중요하나, 수술 후 관리가 더 중요한 치료라 할 수 있겠다.   끝으로, 말기신부전이 진행되어 이에 대한 투석은 노폐물을 제거하는 신장의 기증을 어느정도 대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신장이 하는 모든 기능을 대체할 수는 없는 한계점이 있다. 하지만 신장이식의 경우는 이식된 신장이 기능을 함으로써 평균수명의 연장, 투석과 신부전의 진행으로 인한 다양한 합병증의 진행을 막는다. 또 투석으로 인한 시간, 비용, 불편함이 해소되는 부분이 있어 삶의 질이 향상되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금기사항이 없는 경우에는 가장 근본적인 치료라고 할 수 있기에, 신장이식에 대한 좀더 적극적인 관심과 고려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병원 간이식팀은 생체 간이식뿐만 아니라 응급으로 진행되는 뇌사 간이식 또한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는 의료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다. 또한, 기증자 간 절제 수술을 100% 복강경으로 시행하고 있다. /한양대병원 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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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6
  • [건강교실] 신장 이식 (상)
      신장 이식은 말기신부전 환자를 대상으로 한다. 사구체 여과율이 15~29%로 감소되는 4단계부터는 신장내과 의사의 진료를 받고 투석 혹은 이식과 같은 신장 대체요법에 대해 준비 및 시작을 고려해야한다. 하지만 투석을 시행하더라도 점차적으로 말기신부전은 진행이 되고, 이로 인한 심혈관 병증과 같은 여러 합병증들이 발생하여 사망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신장 이식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공여자는 수혜자와 어떤 조건이 맞아야 할까? 이식을 고려하게 되면, 우선 신장 내과나 이식 외과 진료 후 장기이식센터의 전문 간호사에게 상담을 받게 된다. 공여자가 있는 경우 생체 신장이식을 시행하게 된다. 이 경우 공여자, 수혜자가 충분히 결정할 시간을 준다. 이식 진행을 결정하게 되면 기증자, 수혜자 각각 건강상태에 대한 검사를 시행한다. 또한 사회복지사가 이식대상자와 기증자 간의 서류심사 및 상담을 통해 이식의 순수성에 대한 상담 평가 후 공여자가 이식이 가능하다. 또, 수혜자가 이식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면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의 승인 후 수술을 진행한다.   우선 공여자와 수혜자 간의 면역학적 일치가 어느정도 되는지 검사를 시행하고, 전신건강상태에 대해 평가한다. 신장 기증자는 만 16세~65세 사이, 신체검사 상 건강한 자로, 신장기증을 자의로 원해야만 한다. 또한 검사를 통해 신장이 해부학적 및 기능적으로 정상인 것이 확인되어야 하며, 당뇨병, 심한 고혈압, 간염, 악성 종양, 정신과적 문제가 없어야 한다. 최근에는 신장기증을 위하여 혈액형이 일치할 필요는 없게 됐나, 조직 적합성 교차 반응 검사에서는 거부 반응이 없어야 한다.   적절한 이식 공여자가 없는 경우 투석을 시작한 후,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에 등록하여 뇌사공여자이식 즉 뇌사자 이식을 기다리게 된다. 가족이나 친척 등이 기증하는 ‘생체 신장이식’도 흔히 이루어지고 있다. 장 한쪽을 기증한 공여자의 경우 일상 생활에 문제는 없을까? 신장 한쪽을 기증한 공여자의 경우에는 한쪽 신장을 기증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약 70-80%까지 기능이 회복된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말기 콩팥질환으로 진행하게 될 가능성은 매우 낮고 수술 후 기대수명 또한 일반인보다 짧지 않다. 대부분의 기증자의 경우 기증을 하더라도 안전하다. 그럼에도 주기적으로 신기능 및 전신상태에 대한 추적관찰은 필요하다.   신장이식 수술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우선 전신마취를 시행 후, 피부는 서혜부에서 우측이나 좌측 하복부를 따라 20∼25㎝ 정도 비스듬히 절제하게 된다. 신장 이식할 위치로 가장 좋은 곳은 장골와 부위이다. 양측 하복부의 서혜부와 방광이 가까워서 이식신장의 동정맥과 요관을 환자의 동정맥과 방광에 연결하기 쉽다.   기증자에서 떼어낸 신장은, 동맥은 동맥끼리, 정맥은 정맥끼리 그리고 요관은 방광에 연결되어 이식된다. 수술은 보통 4시간 가량 소요되나 상황에 따라서 더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다. 또한 최근에는 환자의 나이나 상황에 따라 적응증이 올 가능성이 높은 경우, 기존의 절개 방법이 아닌 로봇을 이용한 수술도 시행되고 있다. /한양대병원 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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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6) 주님은 엔게디 포도원의 캠퍼 송이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눈을 가지면 순전한 눈이 되어진다   주님은 내게 영원히 썩지 않는 몰약향이 되신다. 또 온 밤을 이기는 주님의 몰약 주머니가 내게 있도다.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에 있는 캠퍼 송이로다. 포도원은 교회를 상징한다. 엔게디는 다윗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사울을 피하여 숨었던 엔게디 광야에 있는 요새를 가리킨다(삼상23:29). 나의 사랑하는 이 예수님이 내게 엔게디 포도원이라는 것은 다윗의 경우와 같이 예수님이 나의 피난처이다. 또 요새요, 요새 교회가 되시는 것을 말한다. 신랑 예수님이 나를 신부 되도록 세우시고 보호하시고 승리케 하시는 것이 엔게디 포도원이다.     이는 요한계시록 2장, 3장의 금촛대교회이다. 종말에 그리스도 신부 세우는 금촛대교회이다. 또 주님은 엔게디 포도원의 캠퍼송이라고 했다. 캠퍼송이(고벨화)는 중동지역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다. 마치 우리나라에 봉숭아꽃과 비슷하다. 캠퍼송이는 꽃잎이 노랑 빨강 흰색이 있다. 그중에 노란색은 평화를 상징합니다. 주님은 내게 노란 캠퍼송이와 같이 평화·평강이 되심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시며 평강의 왕이시다. 그분은 '먼저 지옥 갈 염려가 없이 구원해주신 평강이다. 또한 환란날에 배도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하게 해 주실 평강이 되신다. 흰색 캠퍼송이는 성결·거룩을 상징한다. 주님이 우리를 거룩한 존재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드시는 분이므로 내게 흰 캠퍼송이시다. 빨간색 캠퍼송이는 사랑을 상징한다. 마치 홍보석 같다고 말씀했고 주님의 보혈을 쏟으시어 날 사랑하신다. 또 성령을 부어주시되 일곱 영으로까지 충만히 부어주시어 예언의 철장권세도 주신다. 또 순교도 하게 하시니 사랑의 캠퍼송이로다.   1:15 보라 나의 사랑아, 너는 어여쁘도다. 보라, 너는 어여쁘며 너는 비둘기의 눈을가졌도다. 주님이 성도를 보고 어여쁘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그리스도의 것이 되면 어여쁘게 보신다. 우리 자신은 죄악과 부패성만 나오는 존재다. 그러나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주님의 마음·생각·성품으로 일치 되어져 가면 주님이 어여쁘게 보시는 것이다. 내 안에 예수가 계시므로 나의 신앙이 자라고, 내 안에 주님이 엔게디 포도원의 캠퍼송이가 되시어 나를 순교케 하신다. 주님이 내게 신랑이 되어지면 주님이 '오 나의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아름답구나' 하시는 것이다. 어여쁜 성도의 눈이 비둘기의 눈과 같다는 것은 비둘기의 속성을 통해 영적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하신다(마 10:16). 제자들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양의 옷을 입고 양들의 영적 생명을 죽이는 이리들에게로 보내는 것이다. 보냄받은 제자들이 사명 감당하다가 이리들에 의해 죽임당하지만 끝까지 신앙 정절을 지키는 것이 비둘기처럼 순결한 것이다. 이와같이 나의 사랑하는 어여쁜 자는 비둘기의 눈을 가져서 순결한 신앙 안목으로, 신앙의 절개가 있다는 것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였다. 네 눈이 순전하면 네온 몸이 빛으로 가득 찰 것이다. 만일 네 눈이 악하면 네 온 몸도 어두워 질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눈을 가지면 순전한 눈이 되어진다. 비둘기의 눈을 가지면 예수님의 눈을 가진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되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희생하시기까지 신실하시고 순종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가? 환경과 상황에 따라 많이 바뀐다. 처음 믿을 때와 중간, 끝이 다른 경우가 많다. 우리 모두는 주님이 칭찬하시는 비둘기 눈을 가지기를 바란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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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5
  • 성서와 생활 [14] 그리스도인의 영성-생명의 영성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이 생명을 가진 자 마다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에 대해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만 구원하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죄의 세력으로부터 건지시기 위해 그의 생명을 우리 속에 부어주신 것이다. 이러한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아는 것이 장성한 자의 믿음인 것이다.롬8:9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한다.잠19:3.이 생명은 우리 안에 없는 새로운 생명인 것이다. 이 생명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믿는 자는 이미 이 생명이 있음을 아는 것이 영적이 자녀라고 볼 수 있다. 이 생명은 우리 육체로부터 오는 사망의 생명과 싸워 이기게 한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가 될 뿐 만이 아니라 그의 생명도 얻게 하시려는 것을요20:31아는 것이 우리의 완전한 믿음이다. 또한 이 생명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은 더 큰 구원으로 나아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한다.   생명이 왕노릇하는 권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생명이시다.약1:12.죄가 주장하지 못하는 생명을 사모하는 자마다 모든 시험을 견디게 된다. 이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므로 주님께서 얻으신 부활의 생명에 이르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고난보다 주님의 생명이 나타나서 인내함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참된 생명을 얻고자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되어야한다. 참된 생명은 죄가 주장하지 못하는 주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받고자 하는 자 마다 계:2:10 생명의 왕노릇 하는 길을 가야한다. 이 세상에서 믿음의 길을 가는 동안 참된 생명딤전6:19을 확보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마다 생명이 왕노릇하도록 사망과 싸워 이길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불신과 불안의 육적 생각을 영(말씀)이 주는 확신과 기쁨의 생각을 따라롬8:6생명의 법을 적용하는 길이다. 이러한 신앙의 훈련은 우리의 삶을 보다 힘있고 소망적인 길로 안내하여 생명이 왕노릇하는 영성을 미리 누리게 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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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5
  • [향유옥합] 슬퍼하는 복
      우리 저마다 기억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있을 겁니다. 제게는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의 풍경들이 그런데요. 그 중 한 곳은 강원도 삼척입니다. 매년 봄이면 유채꽃 축제를 보러 우리는 맹방 해변에 갔습니다. 그곳은 노란 유채꽃이 바다만큼, 시리게 푸른 바다가 하늘만큼 펼쳐진 곳이었죠. 제가 사랑하는 기억들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제가 최근 방문한 삼척의 모습은 제 기억과 아주 달랐습니다. 깎여나간 해안선과 흉물스러운 구조물들, 헤집어진 산이 보였습니다. 지금 삼척에는 국내 마지막 석탄발전소인 삼척블루파워가 가동 시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석탄 이송터널 등 부대시설 마련을 위해 맹방해변은 파괴되고 있고, 삼척주민들은 대기오염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달라진 삼척의 모습과, 기후위기 시대에 새롭게 가동을 시작한다는 블루파워 석탄발전소의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저는 대학시절 스쳐지나갔던 시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예수의 산상수훈을 모티브로 한 윤동주의 「팔복」입니다. 마태복음은 복 있는 사람을 열거하며, 그 중 하나로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는데 이는 위로함을 받을 것이기 때문(마태 5:4)’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윤동주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여덟 번 반복하곤 마지막 문장을 거듭 퇴고하다 결국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로 맺습니다. 학생이던 시절에는 이해되지 않던 이 시가 활동가로 현장을 다니다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슬퍼하는 자는 참 복이 있는데,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영원히 슬퍼할 수밖에 없겠다 싶었습니다.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땅 어딘가에 슬퍼하는 단 한 존재라도 있는 한 슬플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발생한 방사성 오염수 방류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했을 때, 오염과 피폭을 염려하는 일본 시민들과 후쿠시마 어민들을 만났습니다. 방사성 오염수뿐 아니라 오염토와 원전 재가동, 핵연료 재처리 시설 등으로 다시금 핵부흥을 꿈꾸는 일본정부는 후쿠시마를 기억하며 원전과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일본의 시민들은 경주 월성원전 지역에서 만난 주민들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피폭으로 갑상선 암에 걸리고, 어린이들의 몸에서 높은 농도의 삼중수소가 검출되어도 ‘문제없다, 안전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정부는 수명만료 된 원전을 더 사용하려 하고, 그것도 모자라 새로 짓겠다고 하고 있으니 말이죠. 같은 슬픔의 얼굴들은 경주 외에도 울진, 울산, 부산, 영광에도 있습니다. 이 발전소에서부터 출발하는 송전탑 아래 마을주민들의 눈물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우리는 슬퍼할 여유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만 슬퍼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자녀의 축복과 재산, 건강 등의 복을 기도하지만, 예수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또 윤동주가 말한 것처럼 여러분께 슬퍼하는 복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행동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다면 바꿀 수 있습니다. 비록 슬퍼할 것이 너무도 많아 영원할지라도, 여러분의 슬픔은 크고 작은 아름다운 것들을 구할 것입니다.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기억하며, 올해 3월 16일 토요일에는 원자력 발전과 석탄발전을 넘어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위해 시민들이 모입니다. 또 9월에는 기후위기를 자신의 위기로 느끼는 이들이 모여 행동합니다. 슬픔에 동참하고, 행동으로 바꿔내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이 현장으로 초대합니다. /한국YWCA 시민운동국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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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5
  • [사랑의 실천] 선한 목자 리더십
        성서에 나오는 여러 비유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슴뭉클한 비유가 있다. 바로 목자와 양떼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속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외에 더 깊은 내용이 있다. 바로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가 앞서가면 따라간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양떼가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은 단순한 꼴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 목자에게 맡길만큼 절대적으로 목자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 목자에 대한 백퍼센트의 신뢰가 없다면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무시할 것이다. 그때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전적인 신뢰로 그 목자를 따를 수 있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이름 몇 번 불러주고 엉덩이 서너번 두드려 주었다고 양떼들에게 그 목자의 음성을 믿고 따르는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기 까지는 생명을 나누는 전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목자는 아침마다 우리에 들어가 양들을 쓰다듬으며 잠에서 깨웠을 것이다. 더러운 양들은 목욕을 시켜 주었을 것이고 상처난 양은 싸매주고 치료해 주었을 것이다. 눈꼽 낀 양은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 주었을 것이다. 더러는 약한 양이나 병든 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목자는 밤새도록 그 양을 가슴에 안고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양들이 위급에 처하면 언제라도 달려와서 구해주었을 것이다.        그 목자는 양들이 잠들기 전에는 먼저 잘 수 없었고 양들이 먹기 전에는 먼저 식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양들은 목자를 믿게 되고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속에서 작은 목자이다.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목자이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이 목자이다. 직원들에게는 사장님이 목자이다. 백성들에게는 대통령을 포함하는 모든 지도자들이 목자이다. 조만간 나라의 일군을 뽑는 국회의원선거가 있다.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지도자, 백성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려주는 지도자, 백성들이 전폭적으로 그 음성을 듣고 의심없이 따라가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 그런 참으로 선한 목자같은 나라의 일군들을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한 마리 양떼의 과욕일까?/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05
  • [에레모스 영성 2] 광야의 의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도록 하기 위한 여정은 광야였다. 광야는 길이었고 삶이었고 훈련이었고 깨달음이었다. 광야 생활 40년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온 세상에 그분의 뜻을 펼치도록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테스트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은 그 연단의 터전을 광야로 삼으셨다. 수르 광야, 신 광야, 시내 광야, 바란 광야가 바로 그러한 장소였다. 광야를 히브리어로는 ‘미드바르’(מדבר)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말씀’을 뜻하는 ‘다바르’(דבר)와 어원을 같이 한다. 신명기 1장은 이렇게 시작 한다.   “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숩 맞은 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   이 한 구절에는 광야(미드바르)와 말씀(다바르)이 함께 나온다. 해석하면 하나님은 광야에 있는 이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뜻이 된다. 달리말해서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말씀의 지성소이다. (*참고로 지성소를 ‘드비르’(דביר)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도록 하시는데 그 장소를 광야로 택하시는 것이다.    광야는 ‘있음’과 ‘없음‘의 구별이 뚜렷한 곳이다. 즉 존재와 무의 개념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그분은 ‘없음’을 통하여 ‘있음’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다. 무엇이 있으며 무엇이 없는가? 하나님은 광야에서 우리의 눈을 감게 하시고 우리의 입을 닫게 하시고 그 대신 우리의 귀를 열게 하신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듣게 하기 위함이다.   광야는 길 없는 길이며, 길 아닌 길이다. 그리고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그런 길이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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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2-05

교회/목회 검색결과

  • 달콤한 소통(사도행전 5장 38절에서 42절)
       오늘 사도행전 이야기는 오순절 성령강림 후 사도들의 변화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령강림 전에는 두려워하고 절망하면서 다락방에 스스로 유폐되어 있던 제자들이 성령강림 후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요 우리의 구세주라고 목소리 높여 선포하기 시작했고, 앉은뱅이나 눈이 먼 사람들을 치유해주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소리를 높여서 사회의 권력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분개해서 제자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중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원로답게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여러 번 보아왔듯이 제자들의 주장이 거짓이라면 하나님께서 곧 없어지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좀 두고 보자. 이렇게 제자들을 해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말렸습니다. 그 대신 제자들을 채찍질한 다음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투옥되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채찍 맞고 걸어 나오는 제자들이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고통 속에서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보통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기독교인들만의 특별한 모습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편해졌을 때 망합니다. 신앙은 마침내 부활이요 승리지만 그전에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생략한 부활·행복·생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에서 고난을 생략하면 기독교는 망했습니다.  옛날에는 교회 가는 것이 전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주일만 되면 일을 시키거나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해서 그것을 뚫고 교회 나오는 것은 매주 전쟁이었습니다. 때로는 빗자루로 얻어맞고 여성들은 머리도 막 잘리면서도 교회에 갔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신앙이 진짜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교회 가는 것 때문에 아무런 고난이 없습니다. 다 편합니다. 교회에 와도 목회자가 쓴소리하기 어렵습니다, 교회 안 나올까 봐. 결국, 희생이나 헌신 없이 달콤한 열매만 추구하게 되면 그 신앙도 죽고 교회도 죽습니다. 우리 교회가 움직여지고 선교 공동체로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많은 성도의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정상적입니다. 너무 합리적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복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시간과 건강과 노동과 물질을 드리면 나는 당장 힘들고 어렵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몸이 아프고 다른 일도 하지 못하고 돈 쓸 곳이 여러 군데인데 못 쓰니 고통입니다. 근데 그 고통을 기뻐하게 된다는 것은 거룩한 중독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어떤 고통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전통입니다. 이걸 다시 찾아야 합니다. 달콤한 고통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주민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02-05
  • [금주의말씀] 교회에서 찾을 영광
       신학교 재학 시절, 캠퍼스 안에 기숙하고 있던 학생들과 ‘뉴욕 곰탕집’에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신학교로 돌아오면서, 차 안의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모두들 맛있게 드셨어요?” 모두들 잘 먹었다고 하는데 한 학생만 “아니요!”라고 답을 합니다. “왜?” 되물었더니, “짜장면이 맛이 없어요” “아니, 곰탕집에 갔으면, 곰탕을 먹어야지, 짜장면을 먹고 맛이 없다고?”하며 모두 웃었던 일이 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썼던 C.S 루이스는 크리스천으로 회심을 한 후에도 오랫동안, 교회를 나가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교회에 대한 역할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동물원에 가는 것만큼이나 교회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집단의식에서 시작 된 것으로 신경이 무척 쓰이는 ‘같이하기’ 행사였다”고 하며, 교회를 좋게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크리스천의 생활은 개인적인 탐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교회에 임재하신다. 그리고 교회는 크리스천의 삶이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인간으로서,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여, 어디에 속할 필요가 있다.”   파스칼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신을 찾는 자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교회 안에 분명한 표징을 두었다.” 그러면, 교회에만 있는 그 무엇, 교회에서 찾아야 할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를 찾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2c-3절 말씀처럼,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저희 앞에서 변형 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변형’(transfigured)의 뜻은 ‘안으로부터 나오는 모습’입니다. 즉,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문화와 사회의 상황과 각자의 생활 속에 바쁘게 살면서, 예수님도 그 모든 영향 속에 있음을 믿습니다. 마음과 시간과 공간을 구별하여 모인 교회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4-6절 말씀처럼, 성경 속의 인물·사건·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체험합니다. 7절에서 그동안 배웠던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제자들은 그동안 배웠던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영광된 체험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가 어디입니까? 변화 산 자체가 특별하고, 유명한 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서 변화 산입니다. 어느 교회이든지, 하나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시면, 하나님의 영광 된 교회입니다.   또한 2절에 ‘따로’, ‘높은’, ‘올라가셨더니’의 단어처럼, 우리는 예배의 시간과 장소를 특별히 구별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생활 중에, 나를 따로 구별하는 예배가 필요합니다. 또 8절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에 현실에 충실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영광된 변화 산과 교회에서, 생활 현실로 돌아와 충실 하십시오. 내 생활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소명이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맛을 보았으면, 그 힘으로 내 삶이 영광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고, 세상에서, 일상생활에서 그 영광의 능력을 발휘하시길 축원합니다./목사·새빛다문화센터장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01-30

신학/선교/해외 검색결과

  • 필한국선교협서 희년 선포식 성황
    필리핀한국선교협의회는 필리핀 한국선교 50주년을 기념하는 희년대회 선포식을 가졌다     필리핀 전역에서 선교사역하는 30개 교단과 단체 등 행사참여 1974년 마닐라한인연합교회서 선교시작, 4천여 선교사 활동 이영석대회장 김상호공동대회장                         필리핀 한국선교협의회(회장=이영석선교사)와 필리핀 한국선교 50주년 희년 준비위원회(대회장=윤만영회장)는 필리핀 한국선교 50주년을 기념하는 희년대회 선포식을 지난달 29일 가졌다. 1974년, 50년전 첫 예배를 드렸던 마닐라 한인연합교회 본당에서 거행 하고, 대회장에 이영석선교사(주필리핀한국선교협의회 회장), 공동대표 대회장에 김상호선교사(주필리핀한국선교협의회 부회장)을 추대했다. 이 자리에는 필리핀 최남단 민다나오 디바오에서부터, 최 북부 바기오에 이르기까지, 필리핀 전역에서 사역하는 한국 선교단체, 교단, 지선협등 30개 단체 관계자들과, 주 필리핀 한인 총연합회(회장=윤만영)와 함께 하였다.    이날 1부 감사예배는 이용수선교사(부회장)의 사회와, 이영석선교사의 설교, 정찬선 선교사(사무총장)의 축도 김성무선교사(민다나오 선교사협의회 회장)순서로 진행 되었다.    회장 이영석선교사는 「2024년, 바로 그해」라는 제목으로 메세지를 전하였다. 이영석 선교사는 필리핀 한국 선교는 1974년 마닐라 한인 연합교회에서 시작되었고, 대한민국이 228개의 선교 단체와 교단을 통해 169개국에 2만 3천여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필리핀에 약 4천여 선교사들이 있고, 세계 3대 선교 대국이다”고, KRIM(한국 선교 연구원)과 IMB(미남침례교 선교부)의 2022년 현황 수치를 인용 하였다.    이영석선교사는 “지난 50년간 하나님께서 필리핀을 사랑하시고, 한국 선교사들을 복음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셨다. 이제 50주년 희년이다. 희년의 정의는 레위기 25장 10절 말씀대로 자유의 기쁨, 해방의 기쁨을 선포하고, 원상복귀시키는 것이다. 희년은 하나님이 주인이고 우리는 단지 청지기라는 의미와, 본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하고, 모두가 공평하게 다시 시작하는 해”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선교사는 “우리는 2024년은 주의 은혜의 해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해로 삼자”고 역설하였다.    2부 선포식은 호프미션크리스찬스쿨 학생들에 의해 교단 단체 지선협 로고로 만들어진 30개 깃발 입장, 오상훈선교사(직전 부회장)의 기도, 이영석선교사의 50주년 희년선포, 희년 양각나팔, 김영권선교사(부사무총장)의 50주년 희년영상, 5월과 9월, 12월에 있을 50주년 3대 희년 행사에 관해 김성원선교사, 이설웅선교사, 김영권선교사가 차례로 브리핑하였다. 김상호선교사(부회장)의 환영사, 임명장 수여와 선서에 이어, 윤만영회장의 축사, 박근식목사(마닐라 한인 연합 교회)의 축사, 김종한선교사(증경 회장)의 격려사, 신용기장로 (마닐라 한인연합교회 원로), 호프미션크리스찬스쿨의 합창에 이어, 50주년 희년 주제가 (희년을 향한 우리의 행진) 합창 등 순서로 진행했다. 이 50주년 희년 대회 발대식엔 특히 마닐라신학대학, 마닐라의과대학 총장인 최창환선교사, 베데스다 한방병원과 베데스다한방대학 총장인 최성봉선교사, 3대 증경 회장인 김종한선교사, 마닐라 은광교회 담임목사이며 증경회장인 김관형선교사, 증경회장인 황양곤선교사, 증경회장인 배흥규선교사 등 50년 역사속에 선교의 모범을 보이며 수고한 시니어 선교사들이 대거 참석하여 자리를 함께 했다.    필리핀한국선교50주년희년준비위원회 임원은 다음과 같다. 명예대회장=윤만영, 고문단장=김관형, 대회장=이영석, 공동대회장=김상호·고광태·장재중·박일경·임종원·박근식·신용기, 대외협력회장=신성호·노준환·이동철·이동백·이용돌, 자문위원회 위원회=최창환, 집행위원장=정찬선
    • 신학/선교/해외
    • 선교
    2024-02-15

출판/문화/여성 검색결과

  • [한국기독교소설산책] 사랑과 정의, 그 변증법적 통일의 낙원 ⑤ - 백도기의
    로마의 극한적 억압 속에서 민족적 활로를 찾고자 노력해온 유대인들에게 당대의 유대 나라가 정의가 사라진 사회로 인식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였다. 이러한 때에 그들의 신 야훼의 응답이 전무한 사실에 그들 자신이 전율하고 있었음도 또한 사실이었다. 그들은 침묵의 하나님께 정의가 강물같이, 공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나라가 되게 해 주십사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되돌아온 응답으로 그들에게 보인 것이라곤 불의한 일들뿐이었다. 이런 갈급한 백성들에게 거의 혜성 같은 존재로 등장한 분이 예수였다.   그의 기적 행사가 지니는 놀라운 능력이 더욱 그로 하여금 메시아로 추앙받기에 족한 조건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민중들 앞에 나타난 예수는 줄곧 사랑만을 설파하였다. 원수에게까지 베풀어야 할 사랑을…. 그 때문에 여기서 정의와 사랑의 첨예한 대립이 일어나게 된다. 이 충돌의 일각을 가룟 유다가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유다는 문자 그대로 유다(유대 나라)의 한 대표적 인물로 등장하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유다가 아니었더라도 허다한 유다들이 거의 가룟 유다와 같은 처지에 처해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정의의 실현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이 소설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유다는 오늘의 처지에서 볼 때 행동적 테러리스트나 마르크시스트에 해당할 것이다. 마르크시스트의 혁명이 결코 이 땅 위에 낙원을 건설할 수 없었듯이, 가룟 유다의 정의 추구도 단지 염원과 열정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럴 때에 사랑의 문제가 대두될 수 있지 않겠는가. 예수는 그러므로 상호 모순적이라고 할까, 상극적이라고 할까, 두 가지의 가치 개념(정의와 사랑)이 상호 충돌하는 시기에 사랑을 들고 나와 불가피한 충돌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면서도 한편 가장 효과적인 메시지, 곧 사랑의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었다고 하는 이율배반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선포되었을 당시의 일부 거센 반발은 불가피한 것이었으리라. 왜냐면 민족 해방이란 뚜렷한 대의명분 앞에 그 가치 개념, 곧 사랑이란 것이 민중들에게 곧바로 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겠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대나라의 역사 전개 과정을 참고해 볼 때, 특히 주후 60년대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던 유대 독립(민족해방) 운동가들, 곧 ‘기스칼라의 요한’의 젤롯당이나 예루살렘 시민군 총수 ‘시몬 바 기오라’ 등의 투사들이 적(원수)인 로마군과, 때로는 동족 간에 서로 투쟁을 한 실상을 보면 예수의 사랑의 메시지가 현장에서 액면 그대로 먹혀들어갈 리 만무했으리라 보인다.   오히려 그 사랑의 메시지는 그 후세의 역사 발전, 다시 말해서 기독교회의 발전 도상에서나 옹호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예수는 곧 선견자요 선지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유다의 무리는 멀리 내다보는 것을 참고 기다릴 수 있을 만한 그런 형안(炯眼)을 가진 자들은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교훈은 오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랑은 먼 미래에만 갈구되어야 할 내용은 아니다. 사랑이 오늘에 요구될 수도 있고, 또한 정의가 미래에 기대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양자가 개념상 꼭 충돌해야만 하는 내용도 아니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그 무엇이다. 그리고 그러한 통일적 연합 속에서만 우리가 기대하는 오늘의 유토피아는 건설될 수도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4-02-16
  • [한국기독교소설산책] 사랑과 정의, 그 변증법적 통일의 낙원 ④ - 백도기의
    가룟 유다는 스승 예수와의 일대 접전을 작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목숨을 건 도박’이라고까지 스스로 표현한 그런 접전을…. 유다는 이 땅에서의 자유를 그 누구보다도 갈구하는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이 땅이 하늘나라보다는 몇 백만 배 더 소중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는 제 뜻대로 무슨 결심을 실현시키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이런 그 자신의 뜻을 그는 고우(故友) 시므온에게 다음과 같이 털어 놓았다.    “여보게, 시므온. 스승은 너무나 순진해. 이 세상의 악이 얼마나 견고하고 교활하고 뿌리 깊은 것인지를 모르고 있네. 나는 스승을 그 악과 직접 대결시켜 보고 싶었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말일세. 그러면 사랑이란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절감할 수 있게 되겠지.”   가룟 유다는 불가사의한 인물, 곧 신과 같은 인간 예수가 그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왜 유대 민족을 위해 원수들에게 사용하지 않는지 알 수 없어 하였다. 결국 그는 그 수수께끼라도 풀려는 듯 자기 스승을 은 삼십 냥에 대제사장 가야바(안나스의 사위)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리고 이 일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그의 스승이 어떤 행동적 반응을 보일 것을 기대하고 있는 성싶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그러한 기대는 결과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대신 그가 예상하지도 못했던 예수의 유죄 판결이 결정 나자 그는 전에 받았던 은 삼십 냥을 원주인에게 되돌려줘 버리고 어딘가로 잠적하고 말았다. 예수는 석방을 위한 빌라도의 흥정에서 지고 말아 마침내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각에 시온의 언덕 골짜기에서도 한 사내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가룟 유다, 바로 그 사람이었다. 예수의 운명 장면을 목도하고 나서 시므온은 무엇인가를 깨닫고 있었다. 그는 그 점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우리는 비로소 그가 왜 죽음을 향해서 치달아왔는지, 왜 죽음을 수납했는지, 왜 그처럼 불가사의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어떤 놀라운 섭리가 우리들의 역사 속에 개입해 들어왔는지, 그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타이센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에 나오는 첩자 안드레아가 뒤에 서서히 예수의 인격에 동화되어 갔던 것처럼, 백도기의 이 작품 속의 첩자 시므온도 종국에 가서는 예수의 인격에 감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시므온은 자신이 유다를 책임지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후회를 한 것이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억지로라도 그를 이끌고 골고다로 갔었더라면… 그는 스승의 죽음을 통하여 보여준 행동에서 사랑만이 모든 악덕과 불의와 부자유와 고통을 몰아낼 수 있는 영원한 힘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예수를 철저히 따라다니던 유다는, 이제 오히려 예수를 잡기 위한 목적으로 침투되었던 한 밀정(시므온)에 의해 심판받는 자리에까지 떨어지게 된 셈이다. 글쎄, 이것도 먼저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그 성경 말씀(막10:31)의 원리에 해당될는지? 어떻든 시므온에게도 새로운 열림의 세계가 다가오고 있음은 사실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유다의 ‘정의’와 예수의 ‘사랑’이 서로 충돌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로마의 극한적 억압 속에서 민족적 활로를 찾고자 노력해온 므나헴의 시카리당이나 기스칼라 요한의 젤롯당의 처지에서 볼 때, 당대의 유대나라가 정의가 매몰된 사회로 인식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였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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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4-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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