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8-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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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종합 검색결과

  • 인권·시민단체서 국제인권윤리 선언
      한국윤리재단(KEF), 샬롬을꿈꾸는나비행동,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자유민주시민연대(ULD), 서울대 노아팀 등은 지난 20일 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평등법(젠더법)에 대한 비판과 대응’이란 주제로 포럼을 열고 ‘국제인권윤리선언’을 발표했다.   권요한박사(사진)의 사회로 시작한 토론회에서는 이승구박사가 「장혜영 의원이 대표 발의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문제점」, 김영한박사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신학적 성찰」에 대해 발표했다. 이어 진교훈교수 「윤리학적 관점에서 본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의 문제점과 부당성」, 지영준변호사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법률적 비판」, 이상현교수가 「해외 차별금지법 집행 관련 문제점 검토」, 민성길교수가 「차별금지법에 대한 의학적 비판」에 관해 발표했다. 또 김준명교수가 「차별금지 사유로서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포함에 대한 의학적 비판」, 곽혜원박사가 「젠더정책의 도전에 직면한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과제」에 대해 발제했다. 이어 △총신대 이상원 교수 부당해임에 대한 대책과 총신대 정상화를 위한 권고문 △NCCK(기장) 등 포괄적 차별금지법 찬성에 대한 대응책 등에 현안에 대해 토론했다.   이후 발표된 선언문에서 “모든 인간이 추구하고 누리는 인권은 자유와 책임을 수반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와 책임에 근거한 윤리적 인권(윤리인권)은 생명과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 누구나 지켜야 할 보편적이고 도덕적 가치이다”며, “누구도 그 어떤 집단도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 타인의 권리를 파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우리는 누구나 사상, 양심, 종교에 대해 자유와 윤리적 책임을 갖는다. 누구나 어디서나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윤리적 인권에 반하는 거짓사상, 거짓종교, 거짓언론에 대응할 권리를 갖는다”며, “우리는 양성평등에 입각하여 결혼과 가정에 대한 남녀 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상호간의 윤리적 책임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끝으로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 태어날 때부터 상호간에 자유와 책임을 다하는 윤리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이성과 양심의 윤리적 가치와 인간존중의 관점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이를 파괴하는 반인륜적인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고 강조했다.   권요한박사는 “지금 온라인에서 인권윤리선언 서명을 받고 있다. 이 선언에 공감하시면 온라인 서명을 하시고 주위에 널리 추천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온라인 서명>  https://forms.gle/Z6MCnDxWLt5XDWMZA  
    • 교계종합
    • 일반
    2020-07-22

오피니언 검색결과

  • [독자기고] ‘차별하는’ 차별금지법
      서충원목사(샬롬누리영광교회 담임)   퀴어이론에 근거한 차별금지법은 성소수자와 이성애자 사이의 평등을 양성평등과 인종평등과 같은 차원에 두고 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양성평등이나 인종평등에 적용되었던 차별금지를 성소수자의 인권에 적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양자는 전혀 다른 범주이기 때문에 이 논리는 엄청난 법적 질서의 혼란을 가져온다. 성차별 인종차별에서는 강자와 약자가 나뉘고 강자에 의한 약자의 차별이 이루어진다. 과거 가부장제 사회에서 강자 남성이 약자 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한 것은 허용되었지만 지금은 보편적으로 부정된다. 백인우월주의 사회에서 약자 흑인이 강자 백인에 의해 억압, 차별당하는 것 역시 보편적 이성에 의해 비난을 받는다. 그런데 기독인들이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도 강자로서 약자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것으로 비난을 받아야 할까?   분명한 사실은 현대사회에서 이슬람을 제외하고서는 종교간의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즉 어떤 종교가 타종교를 억압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기독교 국가가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나 사상을 억압하고 차별하여 불이익을 준다면 기독교가 차별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종교간에는 다원주의를 인정한다. 국가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각 종교는 타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 그렇다 해도 기독교 신자는 불교를 반대하고 비판할 수 있고 불교 신자도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비판할 수 있다. 그러면 동성애를 정상으로 보는 퀴어이론은 어떤가? 비판해도 되는가? 물론이다. 동성애를 정상이라 주장하는 퀴어이론은 오늘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나 불교와 마찬가지의 하나의 상대적인 신념으로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한다. 동시에 이에 대한 비판 역시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한다. 동성애를 악으로 보는 기독교입장이 맞는지 동성애를 선으로 보는 퀴어이론이 맞는지에 대해 보편적인 이성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만일 국가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동성애를 불법화한다면 이것은 차별이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동성애를 죄라 하고 자신의 신앙에 근거하여 자신의 공동체에 동성애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이다. 교회나 기독교단체에서 스님을 직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정당하듯이 동성애자를 직원으로 채용하지 않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이다.   그런데 차별금지법은 보편적 이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급진적 현대 이데올로기를 보편적 윤리로 둔갑시켜 종교적 다양성과 자유라는 현대의 기본가치를 거슬러 기독교 신앙을 차별하고 억압한다. 오늘날 서구국가들에서 퀴어이론이 지배이데올로기로 부상하면서 기독교신앙을 불법화하는 것은 이슬람국가나 공산국가에서 기독교신앙을 불법화하는 것과 동일하게 종교의 자유라는 기본인권에 반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이다. 종교는 현대 민주국가들에서 차별과 평등과 인권의 이슈가 아니다. 종교는 다원주의와 관용과 자유를 상호간 인정하면 되고 보편적 도덕과 정의에 협력하면 된다. 동성애를 옹호한다 해도 서로 이성과 도덕에 근거하여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다. 그런데 서구에서처럼 종교가 차별금지법에 의해 통제되면 종교나 사상들이 서로 대화할 수 없는 적으로 화하고, 시대의 주류 가치를 거스르는 기독교신앙은 차별받고 억압된다. 차별을 금지하기 위한 차별금지법이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의 기독교 신앙을 차별하는 아이러니가 일어난다. 서구사회는 아마도 기독교가 타종교나 다른 사상을 박해한 역사적 과오를 속죄하는 의미에서 이런 퇴행이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는 서구가 지향한 자유, 평등 가치와 모순된 행보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 없음을 경험한 자로서 온갖 차별을 반대한다. 지금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것은 서구의 흐름에 편승한, 보편적 도덕성을 거스르는 성소수자이데올로기의 전횡을 방지하고, 관용과 평화의 민주국가로 나아가고자 함이다. 우리나라가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장소가 되길, 교회가 사회의 차별과 혐오를 각오하고 자유와 평화의 통로로서 소명을 감당하길 소망한다.
    • 오피니언
    2020-08-03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19
      ㈜삼성전자에서 수주를 받아 전자 회로판을 설계하고 제작하여 국내외 주요업체에 공급하는 대전전자를 경영하시는 이윤하대표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해외 선교와 국내 방송선교에 매진하여 (재)세계복음화협의회와 ㈜국민일보가 주관하는 선교인 국민대상을 수상하였고, 세계로부천교회의 장로로서 코로나19 정국이 지속되어 경제 상황이 녹록치 않는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생명을 구원하는 복음전파 사역에 힘껏 동역하고 있다.   이윤하 대표는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가난한 가정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무려 한 집에서 10식구가 살았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을 겪은 지 몇 년이 안 되었기에 가족의 끼니는 꽁보리밥, 옥수수, 감자가 주식의 전부였다. 그래서 그는 일찍이 서울로 가려는 마음을 먹게 되었고 그 심정을 가지고 사촌 누나의 집으로 상경하여 지인의 소개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정말 열심히 주야로 일하고 성실히 살았으며 지금의 아내 김여라 권사를 만나 결혼을 하여 딸(애란)과 아들(응주) 두 자녀를 둔 가장이 되었다.   1981년 부천시 심곡동에 전세 2백만 원으로 집을 얻어 이사를 하였는데 집 바로 앞에 심곡제일교회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이들을 교회부설 선교원에 보내더니 자신도 교회가 좋다고 등록하여 열심히 다녔다. 이윤하 대표는 그때만 해도 교회를 비판하였기에 아내가 교회에 다닌다고 야단치고 핍박을 하였지만 그의 아내는 그를 위해 계속해서 기도하고 전도하려고 노력하였다. 열심히 기도하며 새벽 제단을 쌓았는데 남편이 교회를 안 나가니 꼭 한 번만 우리아이들 재롱잔치에 가자고해서 할 수 없이 따라갔다. 그는 교인들이 친절하게 반겨주며 교회에 나오라고 해서 못이긴 척하며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신앙이 없던 그는 예배를 드리면 졸음이 쏟아져 예배 시간은 거의 졸다 오곤 하였다.   1985년 회사에서 우수사원 기술 연수차 일본으로 해외 출장을 보내주었다. 그 시기만 해도 대만과 일본의 전자회로기판 기술을 우리나라는 따라 갈 수가 없었다. 일본서 보고 느낀 대로 우리도 일본처럼 협동화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창업을 결심하여 어렵게 동업을 시작하였다. 직장동료와 둘이서 1986년 11월 25일 창업을 하였고, 박신환 담임목사님을 모시고 첫 예배를 드렸다. 회사를 시작할 때 2천만 원으로 공장을 건축하였고 모든 기계와 집기는 전부 중고로 구입했다.   개업을 하고 일을 시작한지 3개월이 지나도 거래처가 없어서 심각하게 어려운 와중에 동업하던 친구가 프레스에 손가락 3개가 절단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급히 병원에 치료를 해야 되는데, 동업자도 사업자등록증에 이윤하 대표 외 1인으로 되었기에 산재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때 담임목사가 오셔서 기도해주시고 특히 병원장하고 친분이 있으셔서 부탁하여 병원비를 할인받았다. 이윤하 대표는 그 일을 계기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겨야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이윤하 대표는 교인들하고도 잘 어울리지 못하고 주일오전 예배가 끝나면 집으로 가기 일쑤였고 신앙생활은 그것이 전부였다. 1991년 동업하던 친구가 나가면서 대진전자를 그대로 인수하여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돈을 조금 벌자 이대표는 교만과 욕심으로 교회생활보다 사회에 치중하여 방황하며 살던 중 1994년 엄청난 시련을 만났다. 그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원인 모르는 화재가 발생하였다. 많은 장비와 원자재, 사무실 집기, 종이 한 장도 못 건지고 모두 소실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대표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과 고통을 주십니까? 그 때 담임목사님께서 소중한 권면을 해주셨다. 이제부터는 제대로 십일조 생활도 하고, 앞으로는 하나님께 절대 순종으로 믿음생활을 바르게 하라고 사랑으로 말씀했다.   이런 아픔과 시련의 과정에서 이대표는 담임목사님의 기도와 성도들의 따뜻한 손길에 큰 위로를 받았다. 그 후로 목사님께 순종하며 성도들과 함께 믿음생활을 열심히 하여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나니 사업장도 주님의 은혜로 번창하여 인천광역시 남동공단으로 이전하였고 삼성전자 1차 등록업체로 선정되어 열심히 일 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   한번은 담임목사님과 태국 치앙마이 김한신 선교사의 선교지를 함께 가게 되었다. 선교지에 도착하여보니 그곳은 중국 실향민이 사는 산족마을이었다. 그곳에서 선교사의 헌신과 희생에 감동되어 현지 성도들을 위해 교회를 세우기로 작정하였다. 교회건축 할 땅을 구입하기 위해 목사님과 기도하고 선교비를 보내주었고 원주민 교회를 완공하여 입당예배를 드리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이윤하 대표는 장로임직을 받고부터는 성도의 리더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위해 청지기의 자세로 열심히 믿음생활을 위해 늘 영적으로 깨어 기도하며 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이윤하장로는 “담임목사님과 같은 비전과 꿈을 가지고 다니엘 기도의 군병으로 충성할 것이며, 민족복음화가 되는 그날까지 열심히 전도와 희생을 할 것이다”고 고백한다. 또 “하나님이 세워주신 교회와 담임목사님과 함께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고 십자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선교인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며 간증한다.   지금까지 이윤하대표가 신앙과 사업을 통해 걸어왔던 그의 발자취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독자들도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천국의 면류관을 생각하며 섬기는 교회와 직장과 사업장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혹시 다가와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혼구원을 위해 매진하자.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 오피니언
    • 칼럼
    2020-08-03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18
      사회복지와 신학을 통합한 융합목회와 광명시청, 경찰서, 몽골선교에 매진하고 있는 강문종 목사가 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명과 목회사역, 강목사의 신앙적인 이야기를 통하여 신선한 교훈을 나누고자 한다.   강목사는 인천광역시 국제공항이 들어선 영종도 섬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장성해서는 장로교 교단인 안양대학교(대신측)를 졸업하였다. 그 후 사회복지학 석사(백석대학교)와 사회복지학 박사(안양대학교, 대신측)학위를 받았고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 광산광명교회를 개척하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기독교연합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지역 사회로부터 담을 쌓는 교회가 아니라, 지역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길 닦는 교회로 목회를 하고 있다. 소통과 연합의 사역으로 자리 잡은 광명광산교회는 이케아, 아울렛 입점 등의 신흥 도시로 급부상하는 광명시에서 25년여 동안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강문종목사는 지역사회 화합과 교회연합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이 시대에 모범적인 목사이며 그의 목회활동은 좀 특별하다고 볼 수 있다. 강목사는 광명시를 사랑하는 정도가 참 남다르다.   경기도의 31개 시, 군, 중에 광명시와 같이 경찰서나 시청 안에 교회가 있는 경우는 매우 특별한 일이다. 그는 어려운 일을 만난 이들에게 “천국과 지옥이 있으니 자살하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준다.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는 강문종 목사는 참된 심리적 상담을 통해 교화로 인해 당사자가 회개를 하는 것에 무엇보다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또한, 그가 활동하고 있는 광명시 기독교연합회에서는 복지관을 운영하는데, 이곳에서 하루에 100여명의 노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으며, 주간보호센터에서는 등급을 받은 장애인들을 도와주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광명시립 요양원을 시에서 위탁받아 어르신들을 보살피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고 있다.   강목사는 항상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목회활동을 다양한 곳에서 펼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의 가교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 충실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 “제가 포함되어 있는 목사들의 사회는 개성도 강하고 독특해요, 교파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조금씩 다르죠, 이러한 분들이 모인 세계이니 하나로 어우러져 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앞으로 이런 역할을 계속 하고 싶어요. 지금처럼 사회에 공헌하고 헌신하며 공무원들을 전도하는 목회자의 꿈, 여타 목회 활동을 하시는 분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죠. 지금 복지관과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광명시에도 청소년들을 이끌 수 있는 기관들이 있는데 앞으로는 이것을 토대로 여러 목사들과 청소년 기관을 맡아서 미래에 꿈을 심어주는 사업을 구상 중이에요. 특히 다문화 청소년들을 돕고 싶습니다”라며 미래의 꿈을 심어주는 목회활동을 꾸준히 펼치고 싶다고 말한다.   이렇듯 나보다 남을 위해 더 마음을 쓰고, 마음의 벽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 목회활동을 하는 것이 천직이라고 말하는 강문종목사가 들려주는 성경말씀은 그래서 더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라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따라 해외 선교에도 활발히 활동하는 강목사는 2018년 몽골에 선교를 다녀오는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몽골기독교총연합회, 일명 몽기총과 김동근대표와의 만남으로 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예배금지라는 몽골 정부지침이 장기화됨에 따라 교회임대료를 낼 수 없게 된 한 목회자가 살고 있는 곳에서도 나와야하는 상황에 처했다. 거처마련에 고심 중인 14명 대가족의 목회자 사연을 들고 에르데넷시 대표 바이라목사는 ‘몽기총’을 방문하여 가족이 살 수 있는 게르 지원을 요청했다. 장애를 가진 목사 부부는 출산 후 모친이 사망한 불쌍한 아이를 거두어 10명의 자녀들 돌보며 지역 알콜 중독자와 유흥업소 여성을 대상으로 전문사역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안타까운 사연을 듣게 된 강문종목사는 몽기총의 몽골 복음화를 위한 활동에 함께 하기로 하고 몽골 에르데넷 예수사랑 교회와 예수사랑의 집을 건축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목회사역이라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강목사의 사역들을 살펴본 것처럼 결코 쉽지 않은 사명의 길을 걸어 왔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과 사명의 정신으로 광명시 기관과 경찰서, 목회, 사회복지의 사역, 선교의 열정을 안고 천국 확장을 위해 동분서주 뒤고 계신 강문종 목사의 발자취를 조금이나마 교훈을 받아 우리 독자들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고귀한 인생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 오피니언
    • 칼럼
    2020-07-28
  • 성상담 전문가 박종서박사의 ‘교회와 성’-1
    이 사회는 법질서라는 상징 체계위에 존립한다. 이 상징체계를 깬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 연일 이어지는 이유는 이 약속된 체계가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틀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주요 전제 조건 중의 하나는 본능을 억압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상 완전한 억압은 거의 불가능하다. 억압된 것은 환상과 망상 또는 생각지 못한 뜻밖의 행동과 같은 증상들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성불구(性不具)가 아닌 이상 성추행과 음담패설 등을 그들의 삶의 일부로 받아드리는 일에 남자들은 주저하지 않는다. 성추행사건에 심각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환상화 된 성 충동은 보통 여성에 대한 인지능력과 보편적 도덕능력을 저하시킨다. 최근 몇 년간 일어난 고급공무원들의 성추행이나 성폭력사건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억압된 것을 소산(消散)시키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실패한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바다. 하나님께 특별한 은총을 받았던 다윗도 한 순간 이 부분에서 무너지지 않았던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대부분의 남자들이 ‘성충동’과 ‘사랑’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남자들은 성충동이 자극되면 사랑에 어려움을 겪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성충동을 느끼지 못하는 분열 속에 살아간다. 이 분열을 정상으로 간주하고 양성화한 것이 과거 일본군의 ‘정신대’이다. 여기에 여자들의 인권은 없었다. 퇴폐업을 운영하는 사람들 역시 남자들의 이러한 분열을 이용하는 셈이다. 이런 분열에 대한 자본주의적인 해결방법은 돈을 주고 성(性)을 사고 파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좌파진영에서 이 문제가 자주 불거지는 이유는 성(性)을 교환거래가 아닌 순수한 사랑으로 보려는 것에 있다. 성충동에 순수함이란 없다. 남자들에게 성충동은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 준 죄 값으로 코카서스 산에서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아 먹히고 간이 다시 재생되는 프로메테우스의 반복 고통과 같다. 마치 오줌보가 차오르면 배출해야 하고 배출 후 또 다시 차오르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듯.... 남자들은 이 고통을 여자들과 함께 나누자고 한다. 다른 스트레스의 경우 소비(consumeing)와 같은 공격성의 배출을 통해서 해소가 가능하지만 성충동은 자본주의적 소비나 명예, 권력 등으로 완전한 해소가 불가능하다. 예술이나 지식활동으로도 심지어 종교적 의례로도 해결 되지 않는다. 이러한 일들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자주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모든 남자들에게 화학거세를 시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과거에는 권력가들이 이용했던 관기(官妓)제도나 해방 이후 대도시에 제한된 구역 내에 집창촌의 암묵적 허락은 퇴폐 문화가 사회전역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여성의 인권이 신장됨에 따라 최근 청량리 588지역은 몇 업소를 빼고 거의 철거가 마무리된 상태다. 청량리 주민들은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온전히 지워버리고 이곳에 새로운 현대식 건물을 올리기를 원한다. 결국 남자들의 지하운동은 온라인이나 다른 채팅 방법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과거에는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결혼의 충분한 조건이 되었지만 요즘은 치솟는 집값이나 전세값, 혼전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늦은 나이에도 결혼을 못하게 된다. 결국 성충동의 해소는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혹 결혼한다할지라도 남자들의 분열(성충동과 사랑)된 욕망의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 문제를 좌우 진영논리나 정치적 문제로 비화시키면 문제의 핵심을 겉 돌 수밖에 없게 된다. 고발하고 폭로하고 억압하고 잡아넣어도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동물적이고 원시적인 본능은 어떤 방법으로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또 다른 문화적 능력을 포기할 수도 없다. 완전한 방법은 아니지만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해 본다.   첫째, 남자들의 가부장적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과거의 가부장적 권위로는 더 이상 남자들이 이 사회를 살아갈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이다. 과거 여성들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남성과 연합하여 출산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야 했다. 여자혼자 경제활동을 하거나 독립할 수 있는 능력자체가 거의 불가능했고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남자에게 의존해야 했다. 열녀비(㤠女碑)는 그 만큼 여성들이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가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하고 춘향전의 이야기는 권력자들의 수청을 거부할 수 없었던 여성들의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역설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한국의 대도시 수도 서울의 수장(守長)이 과거 작은 고을의 현감(縣監)보다 힘이 없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그만큼 변화된 것이다. 이제는 여자들이 남자들의 가부장적 권위의식에 봉사할 이유가 없어졌고 옛날의 관기처럼 권력에 빌붙어 그들의 삶을 연명해야 할 이유도 없다. 이런 시대에 남자들이 과거의 구태의연한 성의식(性意識)으로 현대를 살아간다면 그의 마라톤은 아마 중간에서 포기되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 남자들은 자신의 몸을 부유(浮遊)하는 이물질(利物質), 곧 성충동이 어디에서 기인되었는지 성에 관한 교육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 여자들이 남자에게 의존적이고 여성의 본능 때문에 남자의 남성성을 무조건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무엇보다 남성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여성성을 살려내고 여성성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배워야만 여성과의 깊은 관계가 가능하다. 아무리 감당할 수 없는 성충동일지라도 결단코 한 인격의 주체로서의 여성을 침범할 수 없다는 윤리의식이 그들의 인격의 중심 안에서 자리잡아야 한다. 간음하지 말라는 7계가 왜 우리에게 주어졌는지 지속적으로 묵상해야 한다.   셋째,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인문학독서나 예술, 놀이 등을 통해서 성적에너지를 조금이라도 분산시키는 방법을 통해서 극단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차단해야 한다.   넷째, 우리의 욕망이 억압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결핍 때문에 왔다는 사실, 그리고 결핍은 무언가 모자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곧 존재(being)와의 분리에서 생긴 구멍, 곧 운명적인 존재론적 불안과 연관된다는 사실을 받아드려야 한다. 물론 외양적 종교 의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분주함에서 더 깊은 존재(God)의 장안으로 들어가야 함을 의미한다. C.S 루이스는 이 복잡한 설명을 “천국에서는 성적 유혹이 결코 없을 것”이라는 말로 함축했다. 그곳은 어떤 ‘정동의 불일치’나 ‘인지적 부조화’, ‘정서적 결핍’이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에서도 ‘율례나 법’이 ‘억압’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겔36:27)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5:18) 온전하지는 않지만 계명과 도덕이 억압으로 경험되지 않을 수 있는 그 세계는 아직 우리에게 열려 있다. 동물에 머물러 있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사랑과 성충동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을 말씀과 계명 그리고 신앙 안에서 찾아내야 한다. 문제는 이것이 깊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양지평안교회 박종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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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0-07-21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17
      나라를 잃은 대한민국의 백성들이 일본의 통치 아래에서 심한 고통의 생활을 하고 있었던 1934년에 김장환 목사(Dr. Billy Kim)는 경기도 수원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어려운 가정 형편 중에도 공부를 곧 잘 하였다. 당시 어려운 중학교 시험에 합격했지만, 기쁨도 잠시 지나고 부친의 소천으로 가정 경제는 더욱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계속 공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력으로 학업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다가 철도고등학교에 다니면 장학금은 물론 용돈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에 응시하게 되었다. 시험을 치르는 날이 1950년 6월 26일 이었는데, 북괴군이 남침하여 고등학교 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피난민들과 함께 한강을 건너 수원까지 어렵게 집으로 올 수 있었다. 김장환 목사는 가정의 어려운 경제를 감안하여 17세 때에 미군 하우스 보이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빌리 김(Billy Kim)이라는 미국 이름으로 미군 군복을 줄여 입으며 전쟁의 죽음이 엄습하는 극한 두려움 속에서도 성실하게 미군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고향에 있는 친구들과 그리운 어머니의 얼굴이 보고플 때는 하모니카를 불면서 마음을 달래며, 전쟁 중에도 영어공부와 미군을 위한 일에도 성실히 하였다. 매우 친절하고 정직한 그를 축복의 주인공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주님은 한 사람을 예정해 주셨다. 평상시 빌리 김의 생활을 지켜보고 있었던 파워스 상사의 도움으로 김장환 목사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버지니아 시골 외딴 곳에 위치한 칼 파워스 상사의 집에 도착한 김장환 목사는 여정을 풀고 안정을 찾는 듯했지만, 워낙 외딴 집이라 먼 곳에서 물을 길어 가며, 외로운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누구도 의지 할 수 없었던 빌리는 낮에는 고된 일을 양아버지와 함께 하면서 밤으로는 영어 공부를 시작하여 밥존스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 심성이 착하고 활발한 그는 축구부의 주장을 맡을 정도로 친구들과 친숙하게 교감을 잘 할 수 있었다. Billy Kim은 그 후 밥존스 대학교 신학과, 밥존스 신학대학원 모든 과정을 통과하고 목사가 되어 한국에 돌아오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 기쁨이 오기까지는 하나님의 은혜요, 미군 칼 파워스 상사의 7년 동안의 아낌없는 후원으로 유학생활을 마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장환 목사는 미국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1959년 12월 13일 오후 1시경에 인천항을 통하여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50년 넘게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 주고 전 세계를 누비며 복음 전파하는 일을 쉬지 않고 있다. 특히 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5일 동안 320만 명이 전국에서 모였던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주강사 세계적인 복음주의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 통역을 맡아 민족 복음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2000년 7월 5일 침례교세계연맹 본부 19대 총회장으로 전 세계 침례교인 1억 6,000만 명의 대표로서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의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섬기는 본을 보여 주셨다.   현재 김장환 목사는 극동방송 이사장, 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 YFC명예이사장으로 1년에 수개월을 외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계신다. 김 목사는 트루디 사모와의 소박한 생활은 많은 기독교인들과 일반인들에게 섬김과 나눔, 희생 그리고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하는 본을 친히 실천하고 계신다. 극동방송은 초봄에 전국의 극동방송 지사들과 함께 생방송으로 진행된 대구, 경북 우한폐렴으로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 4억을 목표로 기금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예상의 목표를 훨씬 뛰어 넘어 11억 이상을 모금하여 그 전액을 병원, 군부대, 장애인 복지관, 보건소 의료기관, 기독교연합회 여러 단체에 흘러 보냈다.   혹, 지금 어디선가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낙심하고 고민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일어서자. 미군 하우스 보이에서 침례교세계연맹 본부 19대 총회장으로 세워 주셨던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를 생각하며 다시 한 번 힘을 내자. 김장환 목사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고난의 한가운데서도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 오피니언
    2020-07-20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16
      신학대학교에서 한국교회를 위해 목회자 양성과 학자들을 배출하는 교수들이 많이 있다. 오늘은 그 중에 총신대학교와 대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나의 참 스승이신, 정성구박사의 삶에서 교훈을 얻고자한다.   정박사는 포은 정몽주 선생과 송강 정철 선생의 후손이다. 외조부는 퇴계학파의 선비로 1950년대에 안동의 도산서원 원장을 역임할 정도였으니, 좌로나 우로나 그는 유학자 가문에 출생이 맞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게도 1950년 6․25 사변 직후에 고신측 대흥교회(포항)가 그의 집에서 불과 10m 떨어진 곳에 개척되었다. 정박사는 초등학교 2학년, 개척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여 학습, 세례를 받았고, 주일학교 교사, 학생회장, 찬양대 등을 역임 했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SFC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하던 어르신들의 철저한 순교자적 신앙에 녹아져 있었던 신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정박사는 한국교계와 신학교에 잘 알려진 박윤선박사의 추천서를 받아 들고, 상도동 자택에서 박목사의 환송을 받으며, 화란의 뿌라야 대학교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유학 중에 장학금이 끊기어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코넬리우스 반틸(Dr. Corneliuse Van Til) 박사의 제자이자, 박윤선 목사의 제자란 사실을 알게 된 화란의 31조파 자유개혁파교회의 어른인 메이스터(J. Meester) 목사가 장학금 전액과 가족을 초청해주어서 박사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박윤선박사가 소천하기 1년 전에, 정성구 박사는 박목사 내외분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대부분 일 년에 한 번씩 초청했다). 그런데 1987년 그해 가을, 그는 아무래도 노인의 앞일을 알 수 없음을 직감하고 지필묵을 준비하여 “목사님 한 말씀 남겨주세요”라고 유언을 부탁 했다. 박윤선박사는 사당동 정성구박사의 집 응접실에 엎드리셔서 「기도일관(祈禱一貫)」이란 글을 써 주셨다. 박목사께서 평생 기도로 일관하신 모범을 그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부탁하신 것이다.   정성구총장은 평생을 박윤선박사에게 배운 대로 칼빈과 칼빈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전도자로, 지난 56년간 80여 권의 크고 작은 책을 집필하면서 한국과 오대양 육대주 전 세계에 말씀을 외치고 살아왔다. 특히 1985년에 출판한 「한국교회 설교사」란 책에 <박윤선 박사의 신학과 설교> 부분이 있는데, 이 책은 영어, 일어, 중국어, 대만어, 러시아, 루마니아, 체코어, 헝가리어, 포르투갈어, 벵골어 등 10여개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는 지금도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역사적 계보를 잇기 위해 구약시대, 신약시대, 교부시대, 종교개혁시대, 종교개혁 이후시대, 한국교회사료, 성경사료 등 약 1만종을 소장하고 연구하면서 ‘한국칼빈주의연구원’과 ‘칼빈박물관’을 33년째 운영하고 있다. 이 ‘한국칼빈주의연구원’은 1964년 일찍이 박윤선 목사가 개척 시무하던 동산교회에서 「칼빈주의 5대 교리 강해」란 소책자로 부터 시작했다. 그것이 벌써 반세기가 넘어 그 열매를 맺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박윤선목사가 사역했던 그 사상과 삶 그리고 박윤선목사와 정성구박사 사이에 26년간의 삶의 실제와 박윤선목사와의 뒷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객관적으로 기술함으로서 한국교회사에 역사적 사료로 남기고자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오는 세대에 박윤선박사의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한국교회에 올바로 세우기 위해서 집필 중에 있다고 말한다.   목회자나 신학생들은 한국교계와 신학대학교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정성구박사의 개혁주의적인 칼빈주의 실천신학 서적들을 한 번 이상은 읽어 봤을 것이다. 이렇듯 정성구박사는 지칠 줄 모르는 집필과 연로한 중에서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역사적인 발자취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세계적인 ‘칼빈박물관’을 운영하면서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지금도 끼치고 있다. 우리 구독 가족들도 정성구박사가 성경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 달려오신 것처럼, 바른 신학과 성경적인 신앙이 내 삶에 뿌리를 내리고 교회와 믿음의 생활을 통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기대한다.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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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4
  • 교단이 움직이면 차별금지법을 막을 수 있다
    이명진 소장(성산생명윤리연구소)   가정과 학교와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이 지난달 29일 정의당에 의해 발의되었다. 발의자 10명 중 심상정 의원만 제외하고는 모두 비례대표 출신이다. 지역구 주민들의 반발과 항의를 피해 가려는 지능적인 발의를 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치밀한 작전이 진행되고 있다. 대한민국 교회는 가정과 학교교육, 교회를 지키기 위해 한마음으로 행동해야 할 시간이 왔다.   중동 속담에 ‘낙타의 코를 때리라’는 속담이 있다. 낙타가 추위를 피하려고 주인의 천막에 코를 들이밀 때 낙타를 코를 세게 때려서 쫓아내지 않으면 낙타가 주인을 몰아내고 천막을 차지해 버린다는 뜻이다. 지금은 차별금지법이라는 코를 세게 때려 천막을 넘보지 못하게 해야 할 때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낙타의 코를 세게 때려 쫓아내야 할지 행동 방법을 알고 싶다.   일차적으로 공동발의한 의원들을 설득하여 발의를 철회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 발의한 의원 중 9명이 비례대표로 지역구 주민들의 항의와 반발을 피해 가는 교묘한 방법을 취하고 있다. 두 번째 방법은 국회입법예고 사이트에 가서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방법이다. 6일 현재 1만8200여명이 반대입장을 밝혔다. 최대한 많은 반대 서명이 필요하다. 세 번째 방법은 법사위원회 위원들을 설득하여 법안이 본 회의에 상정되지 못 하게 하는 방법이다. 18명의 법사위원 중 16명(더불어민주당 11명, 미래통합당 5명)이 지역구의 출신이다.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들을 직접 찾아가 설득하는 방법이다.  마지막 방법은 발의된 법안에 법사위원회를 통과해 본회의에 상정되었을 때 부결시키는 방법이다. 253개 지역구의원을 찾아가 설득하는 방법이다.   지역구 의원들에게 지역주민의 뜻을 분명히 전달해야 한다. 특별히 21대 국회의원 300명 중 125명이 크리스천 국회의원이다. 이분들을 꼭 설득해야 한다. 이분들에게 찾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차별금지법에 찬성하지 말라고 축복하며 권면하는 일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시간에 교단이 움직여야 한다. 교단이 움직여야 한국교회를 지켜낼 수 있다. 유럽과 서구교회가 무너진 이유는 차별금지법이 처음 들어올 때 너무 안일하게 대처했기 때문이다. 간절한 심정으로 각 교단과 소속교회에 3가지를 요청한다.   첫째, 교단별로 전국 253개 지역구 담당 교회를 지정하여 지역구 국회의원을 설득해 주시기 바란다.   둘째, 교회별로 긴급 비상 제직회를 개최하여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결의안 채택해 주시기 바란다. 채택된 결의안을 지역구 국회의원실에 목사, 장로, 남전도회장, 여전도회장이 한 팀이 되어 전달했으면 한다.   셋째, 크리스천 국회의원에게 ‘성경에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합법화시키는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절대 하지 말라. 하나님이 의원님을 에스더와 모르드개와 같이 이때를 위해 국회에 보내셨다. 민족과 교회를 구한 지도자로 남길 바란다’고 축복하며 권면해 주시기 바란다.   이런 일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지난 29일에는 ‘진정한 평등을 바라며 나쁜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전국연합’행사에서 22개교단장들이 한데 모여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기로 했다.   지난 1일 CTS 긴급대담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김태영 총회장은 2~3주 내에 500만 명 이상 서명 작업과 6만5000여 교회에 플래카드를 걸고, 매달 한 번 씩 차별금지법 반대설교와 기도를 하겠다고 했다. 예장합동 김종준 총회장은 “교단과 교회 차원의 분명한 메시지를 만들어서 각 강단에서 계속 메시지를 선포하고 일정 기간을 정해 놓고 기도회도 진행하겠다”고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두 총회장님의 구체적인 계획을 듣고 성도들이 힘을 많이 얻고 있다. 가뭄에 단비 같은 두 분의 결연한 의지와 계획이 이번 주부터 구체적으로 실행되었으면 한다.   지금은 목회자들이 나서야 할 때다. 타 교단에도 이같이 운동이 불같이 번져나가는 현상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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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6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15
      대한민국 군인으로 수 십 년 동안 국토방위에 전념하고 육군훈련소장으로 어느 지휘관보다 철저하게 맡은바 임무를 수행하여 제29회 21세기 대한민국을 빛낸 한국인상 ‘군대인문학혁신 공로대상’을 수상한 구재서 소장을 소개하고자한다.   구재서 장군은 육군사관학교 4학년까지 불교에 심취한 독실한 불자였다. 우연히 서울시내의 한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전시회에서 처음 만난 여대생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 여대생이 지금 그의 아내이다. 그는 평소에 장인어른의 철저한 기도의 응답으로서 부부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구재서 소장은 군 생활 중에 음주문화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내려오던 낡은 문화는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심지어 지휘관들의 강력한 제의로 음주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옷 속에 술을 부어 피했던 적도 있었다. 어느 날 몸이 안 좋아 병원에서 검사를 하였던 그는 뇌종양 진단을 받고 좌절에 빠질 뻔하였다. 하지만 구재서 소장은 나를 구원하신 주님께서는 이러한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예비해 주셨다고 눈물로 기도하며 아내와 처남 목사님 부부와 기도하며 심령의 안정을 갖고 극복하는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10시간이 넘는 의사의 세밀한 수술 후 군에 복귀하였다. 보통은 1년여의 임기를 하지만, 구재서 장군은 대한민국 육군훈련소장으로 3년 이상의 임기동안 반 만 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예배당을 신축 준공하고 하나님께 봉헌하는 축복을 받았다. 충남 논산에 위치한 대한민국 육군훈련소에 입영하는 풍경은 시대마다 조금씩 달라져 왔다. 지금도 그곳에는 여전히 눈물과 아쉬움, 후회와 안타까운 마음들이 공존한다. 부모님과 부대에 남게 되는 아들 사이에 수많은 감정이 교차한다. 이런 육군훈련소에 평균 1년 조금 넘게 지휘관으로 근무하는데 구재서 소장은 2016년 연말부터 2019년 연말까지 꼬박 3년을 재직했으니,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재직 중에 5,000석 규모의 세계 최대 군 교회인 ‘연무대 군인교회’가 하나님께 헌당되었다(2018. 12. 22). 육군훈련소와 군선교연합회(MEAK)가 중심이 되었고, 군에 군종목사를 파송한 대한민국 대표 10개 교단, 그리고 크고 작은 수천의 교회와 수많은 개인들의 헌신이 한데 모아져 아름다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교회와 교단이 분열을 지속해온 상황에서 ‘군선교’라는 사명 하나로 교단을 초월하여 모두가 하나 되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아닐 수 없었다. 청년이 교회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이 시대에 군선교는 특정교회나 특정 교단만의 사명이 아닌 우리 모두의 사명이기에 서로 협력해야한다.   구재서 소장이 재임했던 3년여 동안 총 21만 여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2주에 한번 꼴로 토요일에 대략 3천여 명에서 5천 명 정도의 훈련병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장면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을 다시 이 시대에 볼 수 있는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이일을 위해 휴일마다 쉼 없이 섬기고 있는 소수의 연무대 군인교회 간부와 가족들, 매주일 저녁에는 전국에서 달려와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 찬양과 악기로, 때론 연극과 무용으로 복음 전하는 수많은 분들, 주일 저녁예배에 참석하는 5천명이 넘는 훈련병들에게 주기적으로 자장면으로 섬겨주신 분들, 훈련병들에게 맛난 와플로 마음을 위로해 주신 분들의 헌신을 하나님은 기억해 주실 것이다.   훈련병들의 군 생활환경은 객관적으로 볼 때 과거보다 좋아졌다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훈련소 생활은 본인들에게는 여전히 인생의 가장 큰 장애물임에 틀림없다. 훈련받으면서 누군가로부터 마음의 위로를 필요로 하고, 정신적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게 되며, 영적으로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공간과 예수님만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삶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훈련병들은 5주간에 10번의 예배를 드리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을 알고 싶어 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자들도 점차 생겨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도 하고, 상처와 아픔의 의미를 발견하는 자들도 있다. 훈련가운데 경험한 하나님을 매주 200~300명가량이 간증한다(매주 간증 문을 접수하여 한편의 영상편지 형태로 제작하여 주일 예배 시 상영). 이 사역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훈련병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며, 젊은이들도 고난가운데 하나님을 알고 싶고, 만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이 모든 것을 멈추게 했다.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훈련과정을 마쳐야 되는 훈련병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온다고 그는 말한다.   바라기는 군선교 현장이 다시금 뜨거워지길 간구한다. 다음세대를 위해 너와 나 구분 없이, 교단의 구별 없이 마음을 모으고 협력해야 할 시대이다. 구재서 소장이 지휘관으로서 국가가 명령하면 언제든지 달려가는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평생을 거쳐 걸어온 길을 반추하며, 한국교회에서 젊은이가 떠나는 요즈음, 다시 회복되어 일어나 성령으로 뜨겁게 기도하며 예배하는 군선교의 현장이 되기를 소망한다.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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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6

교회/목회 검색결과

  • 새롭게 도약·도전하는 송전교회
      교인들의 자발적 헌신으로 110년의 교회당 내부를 리모델링   “늘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목회에 힘을 다하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송전교회는 11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송전교회는 최근 코로나 위기 속에서 모든 교인들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로 교회당을 새롭게 리모델링하고 본격적인 선교와 섬김을 준비하고 있다.   송전교회 담임 권준호목사(사진)는 “마음이 있으면 길이 있고, 마음이 없으면 핑계가 있다”며, “언제나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마음과 자세로 성도를 섬기고, 전도하고 섬기는 일에 힘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2002년 송전교회에 부임한 이후 양육과 전도와 섬김의 일에 매진해왔다. 그러다 최근 코로나 팬데믹으로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들이 일시 주춤했는데, 이 기간에 주님의 뜻 가운데 모든 성도들이 하나가 돼 교회당을 리모델링하게 됐다”며,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며, 함께 해준 성도들 덕분이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11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를 새롭게 단장하는 일은 그리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권목사가 먼저 솔선수범으로 나섰다. 다음세대를 위한 선교 차원에서 신디사이저를 헌물로 드리는 등 최선을 다해 헌신했다. 그러자 계속해서 헌물과 헌신에 동참하는 교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권목사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성도들 한 분 한 분의 자발적이고, 전폭적인 협력이 없었으면 이번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며 모든 것을 교인들의 공으로 돌렸다.   송전교회는 지역을 섬기는 교회로 유명하다. 권목사는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들의 모임으로 전도와 섬김에 힘써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다”며, “특히 교회당은 철저하게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섬기는 일에 사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목사는 이러한 목회철학 속에서 이번 리모델링을 진두지휘했다. 글씨 디자인부터 색깔 선정 등 권목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했다. 하루에 수차례 업자를 만나기가 일쑤였다. 가구를 담당했던 양정진집사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권목사님의 기도로 정말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주님의 일이라서 감사 가운데 일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양정진집사의 인터뷰   이렇게 ‘드림센터’가 결실을 맺었다. 교회 본당과 기존의 ‘비전센터’ 사이 대지에 건축한 드림센터는 건평 약 258평에 지상 3층 규모로, 1층은 식당과 ‘키즈랜드’, 2층은 ‘토크룸’, 3층은 소그룹실과 야외 옥상정원으로 구성됐다. 모든 시설은 철저하게 전도와 섬김을 위해 디자인됐다. 키즈랜드는 지역의 아이들을 위해 무료로 개방된다. 마땅한 놀이시설이 없는 지역 특성상 많은 아이들이 이용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150석 규모의 1층 식당은 무대를 마련해 공연을 할 수 있게 했다. 권목사는 “앞으로 특색 있는 콘서트를 열어 지역주민들이 편안하게 식사하면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드림센터 2층은 그야말로 ‘드림센터의 심장’이라 할 수 있다. 권목사가 독창적으로 개발해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해피코스’가 여기서 진행된다. 해피코스는 8주간 ‘토탈 전도·양육 솔루션’으로 8주간 진행하며, 하이라이트인 ‘해피코스페스티벌’에서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성령의 강한 역사 속에서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참가자들은 지루한 강의가 아닌 배꼽을 잡게 하는 유머와 삶을 터치하는 권목사의 수준급 ‘토크’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이 코스를 통해 1년에 평균적으로 70명 정도의 불신자를 전도하고 있다.   지금 송전교회에서는 전통과 현대, 농촌과 도시의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이 진행되고 있다. 권준호목사는 110년이라는 문화재급 역사 속에서 ‘코로나 시대’의 사역을 추진하고 있다. 또 도심권에서 떨어져 있는 ‘도농복합지역’이라는 지역의 특성 속에서 지역과 주민을 향해 열려 있는 사역을 통해 꾸준한 성과를 내고 있다. 권목사는 “여러 곳에서 집회 초청이 쇄도하고 있다. 나의 작은 사역에 관심을 갖고 불러주는 곳이 있다면 벽지 낙도라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복음을 전할 것이다”고 말했다.          
    • 교회/목회
    • 교회
    2020-07-29
  • 하남 은빛교회 차의출목사
      말씀이 생활화되는 삶이 되는데 촛점을 맞추어 교육 “가정생활을 교회생활처럼, 교회생활을 가정생활처럼”   하남시에 위치한 은빛교회 차의출목사(사진)는 하남시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교회부흥과 지역 선교 발전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사역 32년을 맞는 차목사는 더 열정적인 목회를 다짐했다.   특히 차목사는 하남시기독교연합회장으로서 어려운 교회들을 많이 도우며 연합과 일치를 잘 이뤘다는 평을 받았다. 이에 관해 차목사는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공동체의 모임이기에 한 지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 교회’ 또는 ‘네 교회’를 특별히 구별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다”며, “모두가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공동체이기에 힘들고 어려울 때는 서로 돕고, 좋은 점은 나누고 배워서 함께 성장해 나가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이것이 주님의 제자 된 우리가 행해야 할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차목사는 유년 시절 양친 부모를 다 잃고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자라왔다. 그래서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남 일 같지 않고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한 가족으로서 한 성도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성도들을 교육하고 있다. 은빛교회는 올해 32주년을 맞았다.   차목사는 “지난날을 돌아보면 매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한다. 목회 비전은 이 땅에 그리스도를 닮은 자들을 많이 배출해 내는 것이다. 이 비전을 위해 말씀이 생활화되는 삶이 될 수 있는데 촛점을 맞추어 성도들을 교육하며 양육하고 있다”고 전했다. 은빛교회는 ‘무모할 정도로’ 오직 기도와 말씀으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다. 오직 마음껏 기도하고 찬양할 곳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 물이 새는 지하 바닥에서 모여 기도하며 시작한 목회가 벌써 32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매일 모여서 기도하는 것을 오해하여 광신자라고 핍박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차목사는 “그 당시 나는 이런 현실이 너무 어려워 하루빨리 하나님나라로 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며, “게다가 지금에 와서는 그때 핍박했던 이들이 오히려 사과하며 나의 목회방식을 배우려고 한다”고 소감을 전했다. 또 당시 개척 멤버였던 학생들이 자라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 지금은 교회의 기둥이 되었다. 이제는 또 그들의 자녀들이 교회의 열매로 자라나고 있다. 차목사는 “은빛교회는 우리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우리 자녀들을 육성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크신 은혜로 채워 주셨음을 고백한다”고 말했다.   은빛교회는 특히 찬양사역에서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차목사는 “나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학생과 청년들에게 교육했고 또 그들의 잠재된 재능을 개발해주고 성장할 수 있도록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며, “그들이 세상에서 방황하지 않고 교회 안에서 건전하게 자신들의 끼를 발산할 수 있도록 꾸준히 기회의 장을 만들어 주었고 또 응원해줬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고 밝혔다. 또 믿음과 기도의 뒷받침 없이는 자칫 인간적으로 치우칠 수 있기에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할 수 있도록 찬양사역자들을 교육했고, 그 결과 지금의 열매를 맺었고 계속 성장하고 있다.    하남시기독교연합회장을 역임한 차목사는 ‘지나친 개교회중심주의’를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차목사는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녀들의 공동체 모임이다.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며, “이제 개교회 중심에서 벗어나서 서로 협력해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먼저 생각하며 나가, 초대교회로 돌아가 기도와 말씀이 살아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차목사는 “육신의 가족과 성도들을 똑같이 생각하고 대하며 지금까지 왔다. 가정생활을 교회 생활처럼, 교회 생활을 가정생활처럼 늘 같은 모습 속에서 생활하려고 힘쓰며 애써왔다”며, “바로 이 점이 우리 교회 성도들이 가장 나에게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 사모의 도움이 참으로 컸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사모는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옆에서 돌아보며 내가 더 넓게 생각할 수 있도록 보조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부부란 믿음의 동역자로서의 역할을 서로 감당할 때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 교회/목회
    • 목회
    2020-07-29
  • 초이화평교회 양진우목사
      1~3부 예배로 참석 인원 분산하고 2미터 거리두기로 방역 실시 공격적인 유투브, 페이스북 활용으로 최근 ‘온라인 교인’ 증가     최근 교회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속출하고 있는 가운데 철저한 방역으로 모범이 되고 있는 교회가 있어 화제이다. 경기도 하남시 소재 초이화평교회(담임=양진우목사·사진)는 지난 2월 말부터 지금까지 평일 교회당을 자진 폐쇄한 후 온라인주일예배 및 온라인수요기도회를 실시해 왔다.   이처럼 선제적, 선도적으로 온라인교회로 전환한지 3개월이 됐다. 이에 따라 기존 성도 외 온라인주일예배와 온라인수요기도회에 참여하는 온라인성도들이 늘어가고 있다. 결국 생활방역 체계로 접었다 할지라도 중직 및 입교인들 교회당 현장 예배 외에 전국 수천 명의 온라인초이화평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온라인주일예배 및 온라인수요기도회 생중계 및 녹화 송출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온라인주일예배 시청 방법은 현장 실시간 생중계를 보는 방법과 녹화 예배를 시청하면 된다. 오전 11시, 2부 주일예배 생중계는 페이스북 아이디 facebook.com/jwya ng38로 접속하면 된다. 기존 찬양예배 시간인 오후 1시 40분, 3부 주일예배 생중계는 안계정목사 페이스북 계정으로 접속하면 된다.   온라인주일예배 및 온라인수요기도회 생중계 1시간 후에 유튜브 ‘초이화평교회TV’, 트위터 ‘초이화평교회TV’, 페이스북 그룹 ‘초이화평교회’로 접속하면 시청할 수 있다. 또한 교회 홈페이지 www.chchurch.or.kr 혹은 언론사 홈페이지 www.c-herald.co.kr로 접속하면 된다.   스마트폰 기기 관계상 온라인예배 참여 불가능한 성도들은 각 가정 텔레비전에서 유튜브를 선택한 후 ‘초이화평교회TV’를 선택하시면 모든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   이외 양진우 목사 SNS 계정을 통해서 초이화평교회TV 내에 1단계 새신자양육반 및 2단계 제자훈련반을 개설할 예정이다. 안계정목사 SNS 계정을 통해서 초이화평교회 찬양대 및 찬양단 연습실을, 최영신 목회상담사 SNS 계정을 통해서 초이화평교회 주일학교를 개설할 예정이다.   한편 코로나19 슈퍼전파기에 발맞춰 초이화평교회는 온라인대심방 및 온라인새신자심방, 온라인구역예배 등을 위한 집단 화상 대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에 따라 모든 구역장 및 직원(제직회원)들을 비롯해 모든 성도들이 집단 화상 대화가 가능한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 동 교회는 생활방역 거리두기 준칙에 따라 오전 11시, 2부 주일대예배 자리가 부족해 새신자들을 오후 1시 40분, 3부 주일대예배에 참석토록 지도하고 있다. 2부 주일예배 참석자를 새신자교육부터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입교인으로 제한했다. 2부 주일대예배는 주로 당회원(목사, 장로), 안수집사회, 권사회, 서리집사 등 직원(제직회원) 급으로 올라온 성도만 예배 참석할 수 있다. 단, 2019년도 이전에 새신자 등록한 입교인도 참석 가능하다.   이에 따라 새로 등록하고자 하는 새신자 및 장기결석자 중 되돌아오고자 하는 성도는 오후 2시, 3부 주일대예배에 참석해야 한다. 처음 방문한 성도는 직분 여하를 떠나서 모두 오후 1시 ‘새신자길라잡이 8주 양육’(강사: 양진우·박미화, 8주), ‘학습·세례대상자 교육’(강사: 최영신, 임헌복, 10개월)을 참석해야 한다. 교육 직후 1시 40분 3부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   이처럼 철저하게 새신자 관리를 하는 이유는 신천지 코로나19 슈퍼 전파 사태 이후 실체가 드러난 신천지 추수꾼 접근 방지를 위해서라는 후문이 있다. 그래서 인근 작은교회에서 수평이동해 오는 성도는 입교 불허한다. 반면에 원거리 타 교회에서 이명해 오는 성도는 입교 가능하나 반드시 이명증서를 발급받아 와야 한다. 등록 후에도 3년간 제자훈련 기본 교육을 받지 않거나 6개월 이상 무단 결석할 시, 입교인 명부에서 제명한다. 단, 출장으로 인한 장기결석 사전 신고자는 제외다. 따라서 새신자는 3부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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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
    2020-07-24
  • 세계최초 달리는 버스교회, 필라장로교회
    ◇필라장로교회 김종수목사와 아내 김조이스선교사는 버스교회를 통해 한국교회에 새로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버스를 예배당으로 개조한 버스교회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 “건물 얻을 돈 없어 개척 주저하는 분들에게 희망을 준다”   세계 최초의 달리는 ‘버스교회’ 필라교회는 코로나시대로 촉발된 새로운 환경에서 교회의 존재양식에 대한 하나의 열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종수목사(사진)는 “버스교회는 빌딩과 건물에 각인된 기존의 교회관을 파괴하면서 교회의 본질은 성도의 교제라는 것을 제시한다”며, “이러한 혁신적 발상이 한국교회에 널리 알려지기를 소망한다”고 전했다.   처음 버스교회를 시작했을 때 기존의 교회들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어떤 큰 교회의 목사는 찾아와서 “교회를 하려면 상가건물을 임대해서 해야지 왜 이런 버스에서 하느냐. 이단이 아닌지 의심된다”며 시비를 걸기도 했다. 김종수목사는 “버스교회를 공격하는 것은 그만큼 한국교회의 교회론이 건물 중심, 장소 중심에 고착돼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버스에서 예배드리는 버스교회는 이단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며,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건물을 교회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는 곳이 교회이다. 건물인지 버스인지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육사출신의 김목사는 2012년부터 국제학교사역을 하면서 버스교회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학교를 홍보하기위해 전국을 투어하면서 부터이다. 김목사는 “2016년 서울 명동에서 사역을 하다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던 중 버스에서 예배를 드리라는 감동을 받았다”며, “그 후 2018년 10월 11일 헌당예배를 드리고 본격적인 버스교회 사역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버스교회는 파격 그 자체이다. 무엇보다 임대료, 전기세 같은 유지관리비가 저렴하다. 보통 건물을 임대해 개척을 하면 임대료가 만만치 않다. 거기에 관리비까지 내려면 매우 힘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개척을 시도했다가 임대료를 내지 못하고 접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또 임대료 때문에 아예 개척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버스교회는 개척을 위한 하나의 좋은 대안이다.   김종수목사의 버스교회는 일단 임대료 걱정이 없다. 주차공간만 확보하면 된다. 전기세도 들지 않는다. 태양광을 이용해 필요한 전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보험료와 차량유지비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김목사는 “버스운전을 위해 버스운전면허를 따려고 생각도 했는데, 주님께서 버스운전 경력이 있는 분을 보내주셨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하나하나 세심하게 우리를 돌보신다”고 고백했다. 버스교회가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달리는 버스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자 새로운 실험과도 같았다. 처음에는 ‘버스에서 어떻게 예배를 하고 버스가 어떻게 교회가 되나’ 반신반의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이 새로운 유형의 교회에 정착했다. 교회는 장소가 아니라 모임이라는 확고한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지금 버스교회는 영종도에 자리를 잡았다. 김목사는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영종도에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약간 공사를 해서 교육관 시설도 만들었다”며, “앞으로 2호 버스교회, 3호 버스교회가 계속 이러지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소망을 전했다. 김목사의 아내로서 함께 사역하고 있는 김조이스선교사는 “대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해 지금 약간의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복음을 전하는 버스교회 사역은 멈출 수 없다”며, “앞으로 더 큰 역사가 일어날 줄 확신하며 많은 분들의 기도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김종수목사는 ‘개척교회의 롤모델’이 되고자하는 소망이 있다. 그는 “버스교회의 뉴스가 알려지면서 여러 곳에서 버스교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앞으로 계속 제2, 제3, 제4의 버스교회가 확산되기를 바라며 나중에 버스교회 연합집회를 여는 것이 소망이다”며, “돈이 부족하다고 개척의 꿈을 포기하지 말고 버스교회를 놓고 기도하며 비전을 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미자립교회들이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아 휘청이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버스교회는 이 위기를 타파할 하나의 좋은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 교회/목회
    2020-07-07

신학/선교 검색결과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21
      여섯째날(4): 원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   모세는 1:28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바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וַיְבָרֶךְ אֹתָם אֱלֹהִים),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וַיְבָרֶךְ אֹתָוַיֹּאמֶר לָהֶם אֱלֹהִים פְּרוּ וּרְבוּ וּמִלְאוּ אֶת־הָאָרֶץ וְכִבְשֻׁהָ וּרְדוּ בִּדְגַת הַיָּם וּבְעֹוף הַשָּׁמַיִם וּבְכָל־חַיָּה הָרֹמֶשֶׂת עַל־הָאָרֶץ׃)고 말씀하셨다고 서술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처음으로 인간에게 오복을 주신 말씀이 원복음이다. 오복(五福) 중의 삼복(三福)은 다섯째 날 창조된 어류와 생물에게도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추가해서 인간에게만 주신 두 가지 복-① 땅을 정복하라 ②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은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목적에서 밝혔던 것과 같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첫 말씀으로 들려주신 원복음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인간에게 복으로 바꿔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원복음을 누리는 권리와 창조목적을 이행해야 하는 의무는 남자와 여자의 자손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인간에게 오복을 누리는 권리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행하는 의무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창조질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원복음으로 이 땅에 그의 창조의 질서를 세우시는 섭리를 시작하셨다. 원복음은 그 조건을 이행하는 인간에게는 복의 원천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죄의 원천이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인간의 죄는 그의 창조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원복음은 권리와 의무라는 양면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의 복을 공짜로 누릴 수 있도록 섭리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행하는 일을 게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 앞에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길로 가느냐, 아니면 죄악의 길로 가느냐는 선택의 기회가 항상 열려 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창조 톨레도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모세는 하나님이 선택하여 창조를 보고 기록하게 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모세의 창조 톨레도트가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전부 서술한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 과정에서 있었던 장면들을 몇 개 골라서 모세에게 보여주셨고, 모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장면들만을 보고 창조 톨레도트를 서술했다. 그러므로 모세가 본 장면들 사이에 걸린 시간을 인간의 지식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쓸데없는 오류를 더할 뿐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고, 창조 톨레도트를 기록하게 하신 목적은 그가 창조주이심을 인간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다.   창조 톨레도트를 읽어보면 시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알고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환상으로 보고 듣고 기록한 모세의 서술 사이에 이해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대인들이 모세의 창조 톨레도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 3,500년이라는 시간의 다리를 건너가서 모세 시대의 히브리어 용어의 개념과 모세의 서술 구조를 현대인의 과학적 눈으로 조명해봐야 한다. 모세가 창조 톨레도트를 기록할 당시 히브리인과 히브리어에는 현대인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과 용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창조 톨레도트에서 빛과 흑암, 궁창(라키아), 광명체(메오르트), 생물의 종류(민), 형상(찰렘)과 모양(데무트), 복(바라크) 등의 명사와 동사의 시제, 그리고 모세의 서술적 관점은 정확히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이해가 없는 기독교인이라면, 그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나 유대교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적 관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관점에서 창조 톨레도트를 비롯해 구약성경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만이 주 하나님의 창조와 그가 주신 원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면서 과학적 무신론자들에게 반론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 신학/선교
    • 신학
    2020-08-04
  • 「존 웨슬리 저널」 완역· 출판 화제
    ◇이번 프로젝트를 기회하고 추진한 김영선박사는 이번 출간은 ‘교회사적 사건’이라고 자평했다. 55년간 웨슬리가 기록한 저널을 23명의 학자들이 번역 출간 웨슬리의 신학과 신앙을 연구하는 기초자료로 활용가치 높아   세계교회사의 영적 거장이자 감리교의 창설자인 존 웨슬리의 저작 「존 웨슬리 저널」이 우리말로 번역돼 출판됐다.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추진해 소중한 결실을 맺은 김영선박사(협성대 명예교수.사진)는 “한국을 대표하는 웨슬리안 신학자 뿐 아니라 칼빈주의 학자들도 이번 번역작업에 참여했다”며, “세계의 영적 거장 웨슬리의 생생한 목소리와 생각을 직접 듣는 다는 면에서 이번 출판은 가히 한국교회사의 기념비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이번 사건은 2012년 영국에서 시작됐다. 김영선박사는 당시 ‘웨슬리 생애 탐구’의 한 과정으로 학생들과 함께 영국을 방문했고, 브리스톨에 있는 뉴룸(New Room)에서 어떤 고서를 발견했다. 순간 김박사는 약간의 홍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1909 느헤미야 커닉이 8권으로 편집한 「The Journal of John Wesley」었다. 김박사는 즉시 이 책을 구입하고 귀국하여 대학원생들과 함께 읽는 가운데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웨슬리의 이야기들을 발견하고 이 저널의 번역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번역작업에 돌입했다. 웨슬리신학연구소를 중심으로 4년에 걸쳐 23명의 학자들에 의해 번역돼 마침내 출간을 하게 된 것이다.   김박사는 “웨슬리 신학이 웨슬리 설교에 근간을 두고 있다면, 웨슬리 목회는 웨슬리 저널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며, “대부분의 웨슬리 신학은 주로 웨슬리의 설교에 의존하여 연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 웨슬리 신학에 대한 관심이 웨슬리 저널 연구로 옮겨가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면에서 본 작품은 웨슬리의 신학을 그 자신의 직접적인 진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저널은 웨슬리 자신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발전적 성찰은 물론 미국 조지아를 비롯하여 잉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 등지의 여행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풍물과 문화 등등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복음운동의 실태와 여정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김박사는 “설교하는 장소는 물론 설교의 본문과 제목 그리고 청중들의 규모와 그들의 상태와 반응, 또한 집회를 방해하려고 몰려온 폭도들이 청중을 향해 오물 등을 던지고, 온갖 저주와 욕설과 함께 막대기로 공격하는 등의 온갖 폭행과 폭력이 난무할 때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보호하셨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처신하였는지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외에도 집회 시 나타난 다양한 영적 현상, 소송을 당했을 때 겪은 사건, 간교한 사기꾼들이 목회자 모습으로 설교하고 돈을 거두어 가는 사건 등도 자세히 나온다.   김박사는 웨슬리 저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배우게 된다고 설명했다. 첫째, 웨슬리 신학은 그의 일생을 통해 발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박사는 “웨슬리는 다양한 사건과 만남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수립하였으며, 또한 성결을 목표로 하는 신학에 도달하기까지 웨슬리의 간절했던 고민과 염려 그리고 기도 등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둘째, 저널을 통해 메소디스트의 부흥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김박사는 “웨슬리가 방문하고 설교하는 곳에서 나타나는 회심, 경련, 쓰러짐, 신유 등과 같은 많은 영적 현상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 전했다. 셋째, 복음운동을 통해 영국 사회가 어떻게 변화되고 개혁되어 가는지 살펴볼 수 있다. 넷째, 웨슬리의 저널을 통해 18세기의 영국의 삶의 정황을 볼 수 있다.   김박사는 “이 사업에 관심을 주시고 후원으로 동력을 불어넣어 주신 김길수목사, 김인환목사, 노윤식목사, 윤보환목사, 이승우목사, 어형로목사, 하근수목사께 감사드린다. 또한 23명의 번역자들은 물론 간행위원장을 맡으신 김선도감독, 감수위원장을 맡으신 조종남박사를 비롯하여 여러 모양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특히 웨슬리 저널 번역 사업에 소명을 가지시고 출판을 위해 큰 힘이 되어주신 일산광림교회 박동찬목사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웨슬리 저널 출판을 결심하시고 많은 수고와 협조를 아끼지 아니한 신앙과지성사의 대표 최병천 장로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 신학/선교
    • 신학
    2020-08-03
  • 김영한박사의 신학논단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7. 목회 설교를 병행한 실천 신앙의 신학자   고봉은 일제하에서는 일본 동경에서 1930년-1944년 엘리트 목사로서 한인교회를 성공적으로 목회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으나 국내에서 교회와 신자를 대상으로 신사참배 강요가 극에 도달한 상황이라 자신도 우상숭배에 대한 강요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곧 바로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양아버지 영재형 선교사가 시무하고 있는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고봉은 고베에서 산호중앙교회(神戶中央敎會)를 개척하여 일본 교민들을 위한 목회활동을 시작하였다. 고봉은 일본 고베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영재형 선교사와 함께 차별과 냉대를 받는 교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31세 나이로 고배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일본에서 소외받고 무시받으며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던 교민들이 교회에 몰려 오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의 압제 속에 있는 모국이 멀지 않아 하나님의 역사로 해방될 것이라고 기독교 신앙을 민족 신앙으로 설교하였다. 고봉의 개척교회에 신자들이 날로 늘어나고 지역에서 교회 평판이 좋았다. 그는 1939년 40세의 나이로 동경의 대형 한인교회인 신주쿠중앙교회(新宿中央敎會)의 청빙을 받아 새로운 목회환경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고봉은 신주쿠중앙교회에서 영감으로 준비된 설교와 뜨거운 눈물의 기도로 청교도적 분위기로 교회를 이끌었다. 이 교회는 처음에는 작은 교회였으나 미국 유학갔다 온 신학박사가 목사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몰려와서 일본 전역에서 한인교회로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신주쿠중앙교회는 일본 전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교회가 되었고 조선인 유학생만 2백명 모이는 조선인교회로서는 가장 큰 교회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었다. 이곳 동경신주쿠중앙교회 목회에서 고봉은 학문과 신앙이 역동적으로 결합된 목회적 전성기요 그의 생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안양대학교 50년사』, 안양대학교 출판부, 1998, 56). 그러나 이곳에서 일본에서의 목회 사역의 한계를 느낀다. 조국이 아닌 이국에서의 목회는 영원한 일자리가 아니고 일제에 압제당한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봉은 단지 신주쿠중앙교회(新宿中央敎會) 만을 돌본 것이 아니라 양아버지인 영재형 선교사와 함께 재일교포의 선교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재일동포를 위한 순회목사 자격으로 일본의 쓰시바 · 큐슈 · 훗카이도오 · 가라후도 등지의 교회들을 돌봤으며, 1939년 동경의 잇찌(一致)신학교 강사를 겸했다.   고봉은 동경 신주쿠중앙교회 목회에서 두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는 내선일치 명목으로 일본어로 설교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둘째는 고봉의 절대적인 인기를 질투하여 담임목사직을 강탈하려는 자들이 생긴 것이다 조국 사랑을 강조하였던 고봉은 일본인들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혀 어느 날 난데없이 들이닥친 일본 경찰들에 의하여 연행되어 신주쿠(新宿)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사상범으로 구속되어 그곳에서 수개월이 지나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가 있었다. 이 일 후 고봉은 동경신주쿠중앙교회에서의 사역에 대한 커다란 회의와 실망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고봉은 자기 자리를 탐내는 자들에게 교회를 양보하고 동경신숙중앙교회에 있으면서 개척하였던 메구로(目黑) 교회로 사역지를 옮기게 된다. 다음 해인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령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 즉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었다. 1942년 8월 솔로몬 군도가 미군에 의하여 공략된 후 전세(戰勢)가 일본 쪽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고봉은 해방의 날이 가까웠음을 직감하게 된다.   그는 1944년 3월 일본에서의 사역을 정리하고 귀국하였는데 당시 그는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하자마자 당시에는 서울역 앞에 위치하여 한국의 관문이었던 남대문교회의 청빙을 받아 6대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그는 이 교회에 부임한 뒤부터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1944년 당신의 상황에서는 무척이나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교회들에서는 새벽기도회를 쉬고 있었는데 고봉은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새벽기도회를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은 서울에서는 처음 시작된 새벽기도회였다. 이처럼 열심 있는 기도와 은혜로운 설교로 인하여 남대문교회는 점점 그 교세가 확장되었고 마침내 남한에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남대문교회에서의 그의 눈물 목회는 그를 한국의 예레미아 혹은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릴만큼 그의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감동적으로 나타났다.(김치선 저, 최선 역, 『김치선 박사의 모세와 오경』(선교횃불, 2015), 297) 그는 신학자로서 목회사역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목회 설교를 병행하여 한평생 목회 사역에 동반되는 설교를 놓지 않았다. 그의 설교 특징은 18세기 영국 뉴잉글랜드의 개혁신앙의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통한 부흥, 성령의 비상한 역사를 통한 교회의 회개와 갱신, 성도의 삶의 변화를 강조하였다.   김명혁은 그가 고봉의 설교에서 받은 은혜를 간증하고 있다: “서울로 올라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김치선 목사님께서 담임하시던 창동교회(후에 대창교회로 개명)에 다녔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는 어디든지 쫓아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는데 서울의 감각산과 관악산은 물론 대구의 주암산까지 쫓아 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김명혁, “추천사: 한국교회에서 다시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와 같은 영적 거목이 나오길 간절히 기도하며,” in: 최선,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12.).   8. 자유 민주주의 사상   고봉이 전개한 3백만명 전도운동은 큰 진전을 보았는데 그에 의하여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 손양원 목사를 비롯한 70여명 이상의 목사가 참여하는 3백만명 부흥전도회가 결성되었으며, 전국 2만 8천 동네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70여명의 목사가 선교목사로 전국에 파송되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다. 복음은 반공 및 자유 사상으로 무장되어 파송 받은 선교목사들은 실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들은 공산 게릴라들의 잦은 출몰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지역까지도 거침없이 가서 전도를 하였다. 그러던 중 몇몇 전도자들은 공산 게릴라들에 의하여 목숨을 잃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사건은 공산당은 나라에 위협이 된다는 사상을 각인하였다.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다가 해방이 되자 귀국한 김구(金九)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교회에 출석하기 위해서 비서진들에게 한국 최고의 목사를 알아보라고 했는데 비서진은 남대문교회 김치선 목사를 추천했다. 이렇게 해서 김구 가족은 남대문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다. 김구는 고봉의 예레미아와 같은 눈물의 설교에 운혜를 받았다. 김구는 1주일에 한번 고봉을 경고장으로 초청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예배를 드렸다. 김구는 매일 남대문교회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고봉은 남대문교회에서 김구를 만나 민족복음화운동을 함에 있어서 해방 직후 이념의 대결이 심했던 시대에 명백하게 자유민주주의 로선을 택했다. 김구는 고봉에게 정치에 입문할 것을 종용했으나 자신은 목회자라고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한국은 1920년대 소련 볼세비키 혁명에 영향을 받은 이동휘 계열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침투되었다. 이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장악하고자 했으나 자유 민주주의 지도자 김구의 지도력에 의하여 제어되었다. 해방 이후 이들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지령을 받으면서 남한에 인민공화국을 세우고자 하였다. 따라서 고봉은 공산주의를 막는 일이 한국을 살리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고히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남한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복음과 아울러 자유민주주의를 천명하면서 민족복음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고봉은 통일 방식에 따른 김구와 이승만의 갈등에 의하여 어려움도 겪었다. 김구는 아들 김신(金信)의 결혼식 때에도 그 주례를 고봉에게 부탁하였다. 이러한 김구와의 각별한 관계 때문에 이승만 쪽에서는 언제나 고봉을 요주의 인물로 설정하고 그를 감시하였다. 심지어 한 번은 형사들이 새벽 한 시에 고봉 집에 들이 닥쳐서 그를 인천구치소로 연행하였다가 풀어준 일도 있었다. 이처럼 조국의 광복과 그로 인한 정치적인 대립은 고봉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봉이 6.25 전쟁시 교인들을 피난시키지 않고 먼저 자신이 피난했다는 사실을 들어 그가 남대문교회 사임의 이유로 보고 비난하기도 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봉이 먼저 피난한 것은 그가 투철한 반공사상과 이북출신으로 공산주의의 잔혹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당시 그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엘리트 목사였기 때문에 공산당에게 잡히면 처형 대상 1호나 포섭 이용 대상 1호였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반공주의자들은 즉결로 처형했고 이용가치가 있는 자들은 사상전향을 미끼로 공산당 선전에 이용했다. 공산당이 1950년 6월 서울로 진군했을 때 친북 사상을 가진 한상기 장로는 고봉에게 기독교연맹 가입을 권유했다고 한다: “목사님 교회로 갑시다. 북에서 '기독교 연맹'이 내려왔는데 교회만은 자기들의 지배하에 예배 보는 것을 허용하겠다고 기별이 왔습니다. 목사님들을 해하지 않겠답니다. 그러니 도망 다니시지 말고 서울로 갑시다." 한상기 장로의 말에 대하여 김치선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안됩니다. 내가 내려가면 반드시 잡히게되고, 기독교연맹에 가입하게 되니 그렇게 되면 나는 또 한 번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됩니다. 지금 비상시에 잡힐만한 사람들은, 때를 기다리고 숨어 있어야 합니다. 나는 기독교연맹에 가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 동조하여 공산당이 될 수가 없습니다."(김의선, 고봉 김치선 목사의 생애, 金致善, 1899-1968, http://blog.daum.net/rfcdrfcd/15974672). 이에 대해서 한상기 장로는 다시 한 번 서울로 내려갈 것을 청했다: “목사님, 사태는 다 기울어졌습니다. 이제 한 주일만 지나면 적화통일이 됩니다. 우리나라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수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이제는 숨을 곳이 없습니다. 어서 교회로 갑시다." 그러나 고봉의 태도는 강경했다: “아닙니다. 나는 끝가지 숨어 있다가 잡히면 순교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자 한상기 장로는 하는 수 없이 산을 내려갔다고 한다. 고봉은 공산주의의 실체와 기독교 연맹의 역할을 알고 있었고 그가 서울로 내려가서 기독교 연맹에 가입하였다면 그는 그의 말처럼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고봉은 몸을 피하여 무사히 전란(戰亂)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9. 회개를 강조한 개혁파 부흥 신앙 사상   고봉은 청교도 개혁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와 19세기 구학파를 좇아서 부흥운동을 추구하였다. 고봉의 신앙 사상에서 부흥 신앙이 중요하다. 그의 부흥운동은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역사를 인정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개 설교가 그 시대의 인본주의 사조에 맞서서 첫 번째 대각성운동(first great awakening movement)을 일으킨 것처럼 고봉 역시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한 인간의 철저한 회개를 강조한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죄인이 회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인간 삶의 본질적인 변화, 성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일제 신사참배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하였다. 1952년 4월 18일 대구중앙교회에서 “전쟁 중의 부흥”에서 “오늘 여러분 나부터 더러운 일본 우상에게 절하던 자입니다.” 1961년 8월 6일 인천교회에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됨이로다“라는 설교에서 자신의 신사참배를 고백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가 아버지를 생각지 않고 미소가라바이에게 참배할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나이까?...” 1962년 “고멜을 보라”라는 설교에서 신사참배 죄를 고백했다: “...나도 고멜과 같이 내 남편 주님을 버리고 일본 신사에 가서 그것들과 음행을 범하였습니다.”(김치선, “고멜을 보라,”(호 3장), 『김치선 박사의 설교모음집』(II), 211-212.)   고봉은 1952년 7월 10일 계성중학교 채플에서 행한 “한국의 장래”라는 설교에서 한국의 장래는 하나님이 주실 부흥운동이라고 하였다. 부흥운동이란 첫째 회개운동, 둘째, 기도, 셋째 하나님 말씀 순종, 넷째, 열심히 전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고봉은 진정한 부흥이란 회개와 갱신을 통한 회복이라고 보았다. 고봉은 참된 부흥은 인간의 프로그램과 인간의 열심있는 기도와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참된 부흥은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땅 아래로 일방적으로 임하는 신령한 사건이다.   한국전쟁 후 고봉이 남대문교회로 돌아가지 못하고 창동교회를 개척했을 때 미국 소재 순복음교단은 한국에 교단을 창립하고자 열정적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고봉에게 접근하여 순복음 교단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고봉은 이를 거절하고 장로교 전통의 회개와 기도와 말씀 실천을 통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에서도 개혁신앙의 전통을 중요시하는 고봉의 신앙 사상을 알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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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3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20
      여섯째 날(3),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자손들   모세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계획(1:26)에서 선포하신 인간과 실제 창조된 인간은 다르다. 그런 사실은 1:26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계획에서 말씀하신 ‘모양대로’가 창조된 인간을 서술한 1:27에서는 빠졌다는 점에서 드러났다. 그 대신에 창조된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바뀌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의 ‘키데무테누(모양대로)’를 반영하지 아니하셨고, 하나님의 ‘형상대로’(뻬첼레모) 남자와 여자를 나눠 창조하셨다.   히브리어 사전과 성경의 용례를 보면, ‘형상’(첼렘)은 겉모양 또는 우상 등을, ‘모양’(데무트)은 원형을 닮은 것듣을 표현하는 말로 쓰였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남성적이고 인간에게 명령하시는 분이시다. 반면에 하나님에게 여성적인 면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데무트’를 주지 않으셨는가? 인간은 그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판단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무트’의 결여는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데무트’의 결여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의 정체성이다. 모세에 의하면 인간 ‘아담’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그들’이 온 땅과 모든 생물을 다스리도록 예정하셨다. 여기서 3인칭 복수 대명사 ‘그들’은 처음 창조된 남자와 여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까지도 포괄하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아는 자들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위해 창조하신 인간과 그 자손들의 역사적 행적에서 발견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왜냐 한다면 현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각종 생물과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들의 DNA에 각각의 생명정보를 써놓으셨고, 그 생명정보가 자손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정보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게 가장 큰 죄악이 된다.   모세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이 관영함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6:5)임에 대해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서술했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서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부정하고 과학적 무신론을 추종하는 자들은 현실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무시하고, 죄악에 빠져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모세가 1:27에서 하나님이 ‘데무트’를 빼고, ‘첼렘’만으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나눠 창조하셨다고 서술한 것을 읽으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DNA에 ‘데무트’의 결여가 죄악의 본성으로 작용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된다.   DNA에 담긴 생명정보가 생물의 종류마다 다르고, 그것이 그대로 자손들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은 이미 상식이 되어 있는 시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는 물론, 그 자손들도 ‘데무트’가 결여된 DNA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그의 DNA에 ‘데무트’가 결여된 탓으로 죄악의 본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수행하는 것은 인간의 필연적인 숙명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무시하는 것은 죄악이다. ◇DNA에 담긴 생명정보는 생물마다 다르다   인간의 자손들이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은 그들을 이끌어 하나님 나라에 살게 하려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오히려 정죄하고 살해한 자들이다. 그들의 자손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이 등장했고, 현대사회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주도하고 있다. 그로 인하여 현대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하는 경향성이 나타나고 있다. 현대 기독교인이 그런 사회를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맞게 되돌리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죄악을 가리려는 자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외식하는 자이다. 그런 자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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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8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19
      ‘아담’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하나님   모세는 하나님이 창조의 마지막에 인간 ‘아담’을 만드시는 모습을 매우 극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모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 창조에 대하여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יֹּאמֶר אֱלֹהִים נַעֲשֶׂה אָדָם בְּצַלְמֵנוּ כִּדְמוּתֵנוּ וְיִרְדּוּ בִדְגַת הַיָּם וּבְעֹוף הַשָּׁמַיִם וּבַבְּהֵמָה וּבְכָל־הָאָרֶץ וּבְכָל־הָרֶמֶשׂ הָרֹמֵשׂ עַל־הָאָרֶץ׃)고 선포하셨다(1:26).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이처럼 인간을 특별하게 창조하시고, 땅과 그 안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목적과 권한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창조 톨레도트에서 인간 창조에 관한 서술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엘로힘’은 복수 명사이므로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말이나, 단수 동사를 써서 단수로 표현하는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한글성경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번역한 것에서도 보듯이, 하나님은 자신을 1인칭 복수 대명사로 표현하시고, ‘나아세’(נַעֲשֶׂה: ‘우리가...만들고’)라는 복수 동사를 쓰셨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를 줄여서 직역해보면, ‘우리가 우리들의 형상과 우리들의 모양대로 사람(단수)을 만든다. 그리고 그들(사람의 복수)이 땅과 생물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구조를 보면, ‘나아세’ 동사의 목적어 사람(인간, ‘아담’)은 뒤에 나오는 ‘웨이레뚜’(וְיִרְדּו: 다스린다) 동사의 주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만든다’의 목적어인 ‘아담’(사람)은 단수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이 주어가 되는 ‘다스린다’(웨이레뚜)는 동사는 복수형을 쓰셨다. 그렇게 되면 ‘아담’이 창조되는 과정에서 단수에서 갑자기 복수로 바뀌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의문에 대해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וַיִּבְרָא אֱלֹהִים אֶת־הָאָדָם בְּצַלְמֹו בְּצֶלֶם אֱלֹהִים בָּרָא אֹתֹו זָכָר וּנְקֵבָה)에 덧붙여 ‘그들을 창조하셨다’(בָּרָא אֹתָם׃-이 부분은 한글성경에서 번역되지 않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1:27). 모세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아담을 단수 명사 ‘첼렘’(צֶלֶם: 형상)을 반복 사용하여 강조하면서 그의 창조를 ‘이바라’((יִּבְרָא: 단수 미완료형) 동사로 표현했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그러나 모세는 ‘빠라’((בָּרָא: 단수 완료형)를 두 번이나 쓰면서 창조된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들’을 각각 단수로 서술했다. 하나님이 ‘웨이레뚜’ 동사를 복수형으로 말씀하신 이유와 구조적 의문은 인간이 남자와 여자의 복수로 창조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러나 모세는 거꾸로 남자와 여자를 단수로 표현했다.     기독교인들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분 하나님이 삼위일체로서 동일본질(consubstanialis)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삼위일체의 경륜적 일치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성자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한다고 말씀하셨다(요5:19).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는 어떤 불일치도 없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삼위일체론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동일본질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인은 창조 톨레도트(1:27)에서 어느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직접 창조하셨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 의문에 대해 기독교적인 관점은 요한의 해석에 따르는 것이다. 요한에 의하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요1:3). 요한에 의하면 그분은 창조 톨레도트에서 첫날에 빛으로 이 땅에 임재하셔서 창조를 실행하신 성자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요한의 해석과 다른 것은 기독교적인 창조론이 아니다. 그런 해석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과 유대교적 창조론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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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9
  • 정동섭교수, 김일성주체사상을 비판
    김일성을 아버지, 김정일을 아들, 김정은을 성령으로 추앙 “두개의 태양이 없듯 크리스찬 주사파란 존재할 수 없다”   상담전문가이자 종교심리학자인 정동섭박사(사진)가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학적인 관점에서 비판하는 책을 출간해서 화제이다. 정박사는 지금 북한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주체사상을 ‘기독교를 벤치마킹한 사이비종교’라고 규정했다. 정박사는 국가종교로서의 주체사상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북한의 국가종교는 교리적 차원에서 수령과 수령의 사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우고, 수령을 민족운명의 구원자이자 영생의 부여자로 고백하는 배타적 교리를 가지고 있다. 정박사는 “수령론에 따르면 김일성과 김정일은 유일신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래서 수령론은 믿음의 영역이다. 믿는 자만이 뛰어오르고 그럼으로써 유일신 사상으로 이 세례를 받는다”고 해설했다.   둘째, 북한의 국가종교는 경험적 차원에서 수령을 운명의 구원자로, 영생의 부여자로 숭배하며, 수령에게 매혹되어 그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 세계-내재적 초월경험을 가지고 있다. 정박사는 “주체사상에서는 육체적 생명은 유한하지만 정치적 생명은 대를 두고 계승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다. 주체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수령을 영생의 수여자로 숭배하는 것이다”며, “여기서 주체사상이 이단사이비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분석했다.   셋째, 북한의 국가종교는 신화적 차원에서 수령과 그 가계를 신성시하고 수령의 역사를 거룩한 이야기로 받아들여 신화화하고 있으며 한민족의 기존신화인 단군신화 등과 연결하여 김일성이 민족의 원시조인 단군의 뒤를 잇는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라고 고백하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 정박사는 “해방신화, 승리신화, 낙원신화, 통일신화, 세습신화가 수령을 절대화했다”고 분석했다.   넷째, 북한의 국가종교는 의례적인 차원에서 수령의 신화와 관련한 모든 장소를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 등으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순례의 대상으로 삼으며, 모든 관공서, 학교, 기업소, 공장 등에 예배의 장소인 ‘김일성혁명사상연구실’을 꾸려 주기적으로 주체사상의 교리와 신화를 학습하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고백하고 서로의 신앙생활을 비판하는 ‘생활총화’ 화합을 정기적으로 가지고 있다. 정박사는 “교회의 새벽기도처럼 매일 모이는 생활총화를 일일총화라하고, 주일예배 같은 것이 ‘주 생활총화’라고 한다. 한 달에 한 번의 월례회를 교회에서 모이는 것처럼 월간총화라하고, 1년에 한 번은 수련회를 하듯이 연간총화를 한다”고 설명했다.   다섯째, 북한의 국가종교는 공동체적 차원에서 조선로동당을 중심으로 외곽단체인 직맹, 여맹, 농근맹,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소년단 및 우당단체인 조선민주당, 천도교 정우당, 그리고 가가호호를 묶은 인민반 등으로 전 사회를 물샐틈없는 하나의 조직으로 만들어 놓고, 주민들의 성분을 3계층 51부류로 분류하여 관리하는 고도의 전체주의 국가조직체계를 가지고 있다.   여섯째, 북한의 국가종교는 윤리적 차원에서 수령이 베풀어주는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여 ‘충성’과 ‘효성’을 바치며, 개인보다 집단을 앞세워 집단의 최고 수뇌인 수령을 신격화하고, 무조건적으로 교리를 집행하는 것을 자발적인 신념에 의해 양심으로 생활화할 것을 요구하는 윤리를 가지고 있다. 정박사는 “기독교인은 신앙을 갖게 되면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감사하게 된다”며, “북한에서는 이것을 만2세부터 초상화를 향해 ‘아버지 원수님 고맙습니다’라고 교육시킨다”고 전했다.   정교수는 “인간의 노력과 힘에 의해서는 지상에 유토피아가 건설될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한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에 의해서만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정교수는 “기독교가 신본주의라면, 주체사상은 인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주체사상과 기독교의 차이점은 사회역사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데 있다. 주체사상은 진화론을, 기독교는 창조론을 전제로 하고 있다. 주체사상은 물질을 강조하는 유물론이고, 기독교는 정신을 물질과 함께 강조하는 유심론이다”며, “북한에서는 ‘김일성 원수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했는데, 그들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진리와 생명 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다”고 강조했다. 문의 010-3286-1988
    • 신학/선교
    • 신학
    2020-07-09
  • 김영한박사의 신학논단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3. 초지일관한 청교도적 회개 부흥 신앙 사상   고봉은 당시 캐나다에서 함흥으로 처음으로 파송된 영재형 선교사의 청교도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함경도 지역에 파송된 캐나다 선교사들은 자유주의적이었다. 영재형 선교사는 뒤늦게 파송된 진보적 선교사 윌리엄 스코트(William Scott, 1886-1979)와 심각한 신앙적 갈등을 겪었고, 이에 대해 선교부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그런데 선교부는 영재형 선교사를 신앙의 불모지인 일본으로 좌천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고봉은 일본으로 건너간 영재형 선교사를 따라서 온 가족이 일본으로 떠났다. 고봉은 일본 고베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이 때부터 영재형 선교사와 선교활동을 함께 시작하였다.(김동화, 『한국의 예레미아 김치선 박사를 추모하며- 나에게 있어 영원한 것』, 서울: 기독교 연합신문사, 1998, 45-46.) 그는 보수적 신앙을 가진 양아버지 선교사를 평생 섬기면서 그로부터 복음 사역자로서의 인격과 영성을 성실하게 닦았다.   고봉의 신앙의 열정은 10살 때 마을 서당 훈장 김응보 옹의 영향 아래 신앙으로 입문 후 흔들림없이 초지 일관하였다. 16세 때 영재영 선교사를 만나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실천하는 정통개혁신앙의 훈련을 받으면서 20세에 3.1운동에 참여하여 1년간 옥고를 치르면서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출옥 후 영생중학교에서 학업을 끝낸 후 연희전문을 거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엄재형 선교사의 권유에 따라 일본 고배신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목사 안수 후에는 미국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와 달라스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다시 고베와 동경 신주구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다. 그리고 해방전 귀국하여 남대문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대한 신학교를 설립운영하고 창동교회 개척, 한양교회 목회, 송파 중앙교회 개척과 300만 부흥전도단 창립으로 초지일관하였다. 고봉의 독특성은 최초의 미국 구약학 신학박사를 한 그의 학문적인 논리보다는 눈물로 청중의 영혼과 마음에 호소하고 감동을 주는 초지일관하는 청교도적인 신앙의 열정이었다.   고봉은 기도의 사람으로 3백만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민족 복음화운동에 앞장 섰다. 그는 6.25 한국전쟁 이후에 나타난 민족의 위기를 직접 체험하면서, 한국의 예레미아로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민족의 파수꾼이 되어 한(韓)민족과 한국교회가 범한 우상숭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그의 부흥설교의 주제는 회개, 부흥, 성령이었다. 그는 눈물로 기도하고 전국을 돌면서 전도했다. 해방 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이 민족이 살길은 오직 기도, 회개 그리고 기도뿐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는 단지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한 부흥운동이 아니라 민족을 살리기 위한 한국교회의 내면적 성장을 위하여 부흥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그의 교회 부흥운동도 말씀에 입각한 회개 운동이었기 때문에 개혁신앙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창립하고 명예회장으로 계시는 김명혁은 김치선의 설교와 열정에 대해 다음같이 피력한다. “김치선 목사님은 설교하실 때마다 회개와 은혜 사모의 메시지와 함께 전도의 메시지를 전하시곤 했습니다. 2만8천 여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시곤 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무조건 왕십리로 달려갔습니다. 왕십리 들판에 우물을 파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서울대학교 학생의 교복을 입고 전도와 목회를 계속했습니다.... 모두가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은혜와 감동과 도전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김명혁, “추천사: 한국교회에서 다시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와 같은 영적 거목이 나오길 간절히 기도하며,” in: 최선,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12-13.) 당시 한국 기독교 인구가 30만 명 정도 되고 한국 인구가 3천만 명 정도 되었을 때 1/10이라도 전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3백만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민족 복음화운동에 앞장섰다.   4. 사회개혁적 애국적인 눈물의 신앙 사상   고봉은 일제하에서 투철한 애국심을 가지고 사회개혁에도 적극적이었다.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한 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정도 옥고를 치렀다. 그는 하나님 나라와 역사의식이 분명하였다.   그의 애국 사상은 1935년 그가 고베에서 고베중앙교회(神戶中央敎會)를 개척한 목회에서 나타났다. 특히 이 교회 교인들은 모두 주일마다 한복(韓服)을 입고 교회에 나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획기적이고 용기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 대부분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기를 꺼려하여 될 수 있으면 한복을 입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봉이 시무하는 교회의 교인들이 이처럼 당당하게 한복을 입고 교회에 출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담임목사가 그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자존심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신사참배 강요와 일본의 내선일체(內鮮一體) 강요로 나타났다.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반대로 자진 폐교했다. 일본 내에서도 한인교회에 대한 일체의 탄압이 심해졌다. 그가 1938년 청빙받아 간 동경에 있는 신주쿠중앙교회(新宿中央敎會)의 강단에서 일본어로 설교해야 한다는 내선일체 규정을 준행하지 않고 한국어로 설교했다는 이유로 일본인들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힐 수밖에 없었고 결국 1940년 경찰에 사상범으로 구속 연행되어 체포되어 여러 달동안 감옥살이를 하게되었다. 신앙이 좋다는 조선인이 목사가 한국어로 설교했다고 경찰에 밀고했던 것이다. 그는 신주쿠중앙교회(新宿中央敎會)에서 개척한 메구로(目黑)교회에서 설교할 때에도 언제나 눈물로 기도하며, 눈물로 설교하였다고 한다. 그의 눈물은 단지 감정의 눈물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과 미래를 염려하는 애국자와 선구자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귀중한 눈물이었다.   미국과 일본에서 살면서 선진국을 경험한 고봉은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를 위한 미래의 소망을 다른 곳 아닌 복음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하나님 말씀만이 민족의 아픔을 달래주고 민족의 미래를 열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 복음화만이 나라의 미래를 여는 것이었다. 그는 복음주의적 투철한 개혁주의 신학사상, 삶의 현장에 대한 열정을 갖고 하나님 앞에서 민족과 교회를 가슴에 품고 복음사역을 하였다.   고봉은 1944년 귀국하여 남대문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민족 복음화를 표어로 내걸었으며, 애국심이란 “우리가 한국 사람이니 그것이 골육지친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골육지친인 것을 알아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겠다는 마음”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일제 강제점령 막바지의 위험한 상황에서 서울의 모든 교회들이 새벽기도회를 쉬고 있는 상황에서 남대문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처음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고 매일 새벽 강단에서 엎드려 민족을 위하여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는 매 새벽기도 때마다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조국이 광복과 더불어 고봉은 이제껏 그의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민족의 복음화의 열정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새벽기도 때마다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그리고 이 민족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 때부터 그가 전개한 운동이 3천만의 십일조 3백만을 하나님께 바치자는 운동이었다. 그는 매 설교 시마다 “한국에는 2만 8천의 자연부락이 있소. 동리마다 교회를 세웁시다. 우리 성도들이 집집마다 감나무 한 그루씩 심어서 그 수입을 몽땅 선교비에 투자한다면 민족복음화는 물론 세계를 복음으로 덮으리이다"하고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때부터 그를 조국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렀다.   고봉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민족의 살길은 로마서 9장 1-2절을 근거로 복음이라는 것을 설교하였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니 그것이 골육지친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골육지친인 것을 알아.” 그는 해방 후 혼란과 위기의 극복의 유일한 길이 복음을 통한 국가의 재건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국가의 재건과 민족의 구원 이라는 두 가지 목적으로 3백만 복음화 운동을 일으켰다. 3백만 복음화 운동은 복음화일꾼 양성하는 일(신학교)과 전국 2만 8천 동네에 우물파기 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구약의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아의 심정을 갖고, “눈물의 선지자”로서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여 세상을 거룩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신학교 학생들에게 영농법과 침술법도 철저히 가르쳤다. 김명혁은 그가 김치선 목사의 설교에서 받은 은혜를 간증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예레미아’라고 불리던 김치선 목사님은 새벽기도회 시간은 물론 설교 때마다 눈물을 흘리시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고, 은혜 사모와 전도의 매시지를 선포하셨는데 그 메시지들이 저의 신앙 인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재료들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김명혁, “추천사: 한국교회에서 다시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와 같은 영적 거목이 나오길 간절히 기도하며,” in: 최선,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12.)   2009년 10월 26일 경기도 안양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민족부흥 일념 고봉 김치선 목사 유업 잇자”는 세미나에서 미국에 거주 중인 고봉의 차녀 김동화씨가 ‘나의 아버지 김치선 박사’라는 제목으로 교회사에 숨겨진 여러 가지 이야기를 연대별로 펼쳐내며 “항상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모습에서 아버지가 민족과 한국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절실히 느꼈다”고 증언했다.   최선은 고봉이 민족 복음화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먼저 김치선 박사는 한국교회와 사회가 사는 길은 오직 십자가 복음 뿐이라 생각하고 초교파적으로 복음을 전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고봉은 1950년 전후에 손양원, 밥 얼스와 함께 한국 최초의 한민 연합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민족 복음화“란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그 열매가 1970년대 민족복음화 운동으로 신현균 목사에 의하여 이어졌고, 1970년 ”한국기독교 부흥협의회“가 설립되었다. 신현균으로부터 김준곤, 조용기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빌리그래함 전도대회가 1973년 ”5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로 진행되었다.   고봉은 해외유학파로 일제말에 귀국해 1944년 3월 당시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남대문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인 김구를 만나게 되어 민족적인 목회를 하게된다. 그가 본래 가졌던 복음주의적 부흥신앙과 김구의 민족주의가 결합하게 된다.(박명수, “추천사: 다시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가 나오길 기대하며,” in: 최선,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23.) 그래서 김치선은 복음으로 민족을 새롭게 하는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민족 복음화운동은 해방 후에 3백만 복음화 운동으로 나타났다. 고봉은 3천만 민족복음화를 위해서는 그중의 1/10인 3백만명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 그가 시무한 남대문교회는 민족 복음화의 구심점의 역할을 했는데 서울 역 앞에 위치해서 해방 이후에 월남한 많은 신자들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찾는 곳이었다. 그러나 3백만 명 복음화운도은 6.25 한국 동란, 장로교단의 분열, 고봉의 독자노선, 1952년 남대문교회 사임으로 역사에 묻히고 말았다.(이종전, ‘김치선과 3백만 부흥운동의 의의,“ 개혁논총 39(2016), 171; 최선,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킹덤북스, 2018, 6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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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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