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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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종합 검색결과

  • 웨슬리신학연구소서 3월 신학세미나
       서울신학대학교 웨슬리신학연구소(소장=김성원교수)는 지난 20일 온라인을 통해 「성결목회론」이란 주제로 신학세미나를 진행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성서적 성결복음을 전할 성별회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제기됐다. 이날 발제를 한 성결복음선교회 대표 신상철목사는 “목회자가 강단에서 성결의 복음에 관해 능력 있게 설교하려면 △설교자 자신이 먼저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고 날마다 순간마다 성결의 은혜를 잘 유지해야만 한다 △성서적 성결에 대한 분명한 지식과 신학을 확고히 정립하고 있어야 한다 △성결체험의 성서적 원칙을 정확히 이해하고 신뢰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설교를 통한 성결목회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성별회라고 주장했다.    신목사는 “한국 성결교회 역사학자 이응호박사의 기록을 보면 성서학원 대강당에서 매 주일 오후 2시 이러한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은 서울 시내에 있는 성결교회 교역자와 신자들, 다른 교파 교역자와 신자도 참석했다”면서, “이렇게 일어난 성별회 운동이 지역 복음전도관에 까지 번졌다. 예전처럼 매주 성별회를 갖기는 힘들 것이다. 우선 한 달에 한 주만이라도 성서적 성결의 복음을 집중적으로 전하고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도록 인도하는 ‘성별회’를 갖는 것은 설교를 통한 성결체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소그룹 성경공부를 통해 일대 일로 성결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웨슬리도 소그룹 모임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성결의 신앙을 고취시켜 주었다. 그러나 소그룹을 통한 신앙지도방법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선구자는 예수 그리스도시다”면서, “소그릅을 통한 신앙지도 원리를 성결체험과 유지를 위한 신앙지도방법에 접목시킨 방법으로서 성결반 성경공부가 있다. 이 방법은 교역자가 소그룹으로 운영할 때에 목회자와 성도간의 인격적인 접촉을 통해 개인을 향한 세부적인 영적관리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 교계종합
    • 일반
    2024-03-27

오피니언 검색결과

  • 성서와 생활 [18] 그리스도인의 영성- 십자가 죽음의 영성
       사순절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시 한번 십자가를 묵상하는 기간이 된다. 묵상이란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존 파이퍼는 <성경읽기>란 책에서 한 신학자의 의견을 제시한다.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라...스스로 신이 되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십자가를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 이상의 체험적 믿음에 이르는 것이다. 십자가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과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과 선포하는 것 그 이상이 필요할 것이다. 바로 십자가를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을 우리가 온전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십자가를 우러러 봄으로 죄에 대하여 자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옛사람’이 죽은 것이며(롬6:6), ‘죄의 몸’이 죽은 것이다. 육신의 ‘정욕과 탐심’(갈5:24)이 못 박혔기 때문에 자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갈6:14)라고 말한바 세상에 대하여도 죽은 것이다. 이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바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세상에서 건짐받아 세상에 대하여 목마름이 없는 상태를 체험하게 하신다.    ‘죄에게 종노릇 하지’(롬6:6)않는 삶을 살기 위해 죄에 대하여 알아야한다. 여기서의 의미는 주님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벗어난 그 이상을 의미한다.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피해야 할 죄를 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매일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자 하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힌 역사를 믿어야만 한다. 아담에게서 나온 죄의 성향을 십자가로 이겨야 한다. 이러한 죄의 터전이 자신의 선한 의지대도 살려는 자아를 또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라는 바울의 체험을 가져야 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고전2:2) 우리가 더 구할 것이 없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지금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매우 안전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보기만 한다면, 알기만 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위험에 놓여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피를 문설주에 발라야 한다. 보혈의 공로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보신 것을 알고 믿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은 죄와 무관한 안전함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체험하는 길이 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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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13

신학/선교/해외 검색결과

  • 교회여성사연구팀, ‘전도부인’ 세미나
    ◇교회여성사연구팀은 「선교140주년에 돌아보는 한국선교와 전도부인」이란 세미나가 진행했다.     복음전파위한 사역에 삶 바친 두 전도부인의 사명을 조명 타문화권에서 사역하고,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한 모습 공유    교회여성사연구팀이 주최하고, 에큐메니컬 선교연구회가 주관한 세미나가 연동교회(담임=김주용목사)에서 지난 7일 「선교 140주년에 돌아보는 한국선교와 전도부인」이란 주제로 열렸다. 이날 세미나는 복음전파사역에 힘쓴 두 전도부인의 삶을 살피고, 그 의미를 모색했다.    「캐나다장로교회 선교와 전도부인」이란 제목으로 발제한 서선영박사는 시베리아 최초의 전도부인인 오한나를 소개했다. 서박사는 “오한나는 1907년 한반도를 휩쓸었던 대각성의 시기에 성령의 역사를 충만하게 체험하게 되고 단순한 부인권서에서 전도부인으로 성장했다”면서, “ 그러던 중 1910년에는 블라디보스크토크에 있는 조선인교회에서 복음을 전해달라는 최관흘의 강력한 요청을 받고 함흥을 비롯한 함경도지역의 교회여성들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거기서 최소 6개월에서 최대 1년 동안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소학회를 세워 남녀 학생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조직화하는데 힘써 수행했다”면서, “함경도로 돌아온 이후로는 전도부인의 일과 마르다 윌슨기념 여자성경학원의 기숙사 사감직을 병행하며, 계속해서 루이즈 맥컬리와 짝을 이뤄 일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캐나다장로교회 선교부는 간도와 시베리아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실상을 파악한 뒤 그곳으로 선교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1910년에 유능한 전도부인 오한나를 과감하게 파송해 시배리아 조선인교회를 도왔다”면서, “비록 오한나가 총회의 결의를 거쳐 파송되지 않았으나 1926년 총회의 결의로 파송된 한가자보다 16년 앞선 1910년에 시베리아로 갔던 그에게 시베리아 최초의 여성선교사라는 타이틀을 붙여 본다”고 말했다.   「정동에서 연못골로 온 선교부: 미북장로교회 선교와 전도부인」이란 제목으로 발제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여교역자회 사무총장 김은정목사는 “신마리아는 1873년 태어나 신여성의 시대가 본격화된 1921년에 세상을 떠났다. 신마리아는 정신여학교의 기초를 다지고 초기역사를 만들어간 교사였다”면서, “그리고 신마리아는 선교사의 고용인에서 전도부인과 교사로 나중에는 기독교여성 지도자로 성장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신마리아는 1910년을 전후해서 평양여자 성경학교를 수학했다. 성경학교 졸업생들은 전도부인으로 사경회를 인도하거나 중등 수준의 여학교에서 가르치는 성경 교사가 될 수 있었다. 성경공부는 개인의 삶을 위로할 뿐 아니라 배움의 동기를 자극했고 삶의 고통을 배움과 성장의 동력으로 바꾸어 기독교 사역을 비롯한 사회활동으로 이끌었다”면서, “그리고 성경학교 참여는 여성의 가족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다른 지역의 기독교 여성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여성의 활동공간을 확장했다”고 말했다.    김목사는 “신마리아는 옛 삶의 방식을 유지하면서 기독교적 신여성이 되어가는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면서, “그럼에도 신마리아는 개종 초기부터 남다른 행동과 실천이 기독교 신앙에서 나오는 것임을 분명히 말했다. 선교사들이 신마리아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가족과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변화시키는 설득력 있는 삶의 태도에 있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신마리아는 헤론 부인의 성경반에서 신앙을 고백한 후 30여 년에 걸쳐서 기독교 안에서 개인적 삶의 고통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배움을 추구했다”면서, “여선교사들은 신마리아가 교회와 학교를 통해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쌓는 기회를 계속 만들어나가면서 맡은 업무에 맞게 역량을 키워나가도록 도왔다. 이렇게 해서 신마리아는 예측 불가능한 삶에서 좀 더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자신의 불행을 돌파할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 신학/선교/해외
    • 선교
    2024-03-10

출판/문화/여성 검색결과

  • 교회여성사연구팀, ‘전도부인’ 세미나
    ◇교회여성사연구팀은 「선교140주년에 돌아보는 한국선교와 전도부인」이란 세미나가 진행했다.     복음전파위한 사역에 삶 바친 두 전도부인의 사명을 조명 타문화권에서 사역하고,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한 모습 공유    교회여성사연구팀이 주최하고, 에큐메니컬 선교연구회가 주관한 세미나가 연동교회(담임=김주용목사)에서 지난 7일 「선교 140주년에 돌아보는 한국선교와 전도부인」이란 주제로 열렸다. 이날 세미나는 복음전파사역에 힘쓴 두 전도부인의 삶을 살피고, 그 의미를 모색했다.    「캐나다장로교회 선교와 전도부인」이란 제목으로 발제한 서선영박사는 시베리아 최초의 전도부인인 오한나를 소개했다. 서박사는 “오한나는 1907년 한반도를 휩쓸었던 대각성의 시기에 성령의 역사를 충만하게 체험하게 되고 단순한 부인권서에서 전도부인으로 성장했다”면서, “ 그러던 중 1910년에는 블라디보스크토크에 있는 조선인교회에서 복음을 전해달라는 최관흘의 강력한 요청을 받고 함흥을 비롯한 함경도지역의 교회여성들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거기서 최소 6개월에서 최대 1년 동안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소학회를 세워 남녀 학생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조직화하는데 힘써 수행했다”면서, “함경도로 돌아온 이후로는 전도부인의 일과 마르다 윌슨기념 여자성경학원의 기숙사 사감직을 병행하며, 계속해서 루이즈 맥컬리와 짝을 이뤄 일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캐나다장로교회 선교부는 간도와 시베리아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실상을 파악한 뒤 그곳으로 선교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1910년에 유능한 전도부인 오한나를 과감하게 파송해 시배리아 조선인교회를 도왔다”면서, “비록 오한나가 총회의 결의를 거쳐 파송되지 않았으나 1926년 총회의 결의로 파송된 한가자보다 16년 앞선 1910년에 시베리아로 갔던 그에게 시베리아 최초의 여성선교사라는 타이틀을 붙여 본다”고 말했다.   「정동에서 연못골로 온 선교부: 미북장로교회 선교와 전도부인」이란 제목으로 발제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여교역자회 사무총장 김은정목사는 “신마리아는 1873년 태어나 신여성의 시대가 본격화된 1921년에 세상을 떠났다. 신마리아는 정신여학교의 기초를 다지고 초기역사를 만들어간 교사였다”면서, “그리고 신마리아는 선교사의 고용인에서 전도부인과 교사로 나중에는 기독교여성 지도자로 성장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신마리아는 1910년을 전후해서 평양여자 성경학교를 수학했다. 성경학교 졸업생들은 전도부인으로 사경회를 인도하거나 중등 수준의 여학교에서 가르치는 성경 교사가 될 수 있었다. 성경공부는 개인의 삶을 위로할 뿐 아니라 배움의 동기를 자극했고 삶의 고통을 배움과 성장의 동력으로 바꾸어 기독교 사역을 비롯한 사회활동으로 이끌었다”면서, “그리고 성경학교 참여는 여성의 가족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다른 지역의 기독교 여성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여성의 활동공간을 확장했다”고 말했다.    김목사는 “신마리아는 옛 삶의 방식을 유지하면서 기독교적 신여성이 되어가는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면서, “그럼에도 신마리아는 개종 초기부터 남다른 행동과 실천이 기독교 신앙에서 나오는 것임을 분명히 말했다. 선교사들이 신마리아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가족과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변화시키는 설득력 있는 삶의 태도에 있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신마리아는 헤론 부인의 성경반에서 신앙을 고백한 후 30여 년에 걸쳐서 기독교 안에서 개인적 삶의 고통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배움을 추구했다”면서, “여선교사들은 신마리아가 교회와 학교를 통해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쌓는 기회를 계속 만들어나가면서 맡은 업무에 맞게 역량을 키워나가도록 도왔다. 이렇게 해서 신마리아는 예측 불가능한 삶에서 좀 더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자신의 불행을 돌파할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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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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