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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기가 오기 전에
- 툭 - 투둑 - 아침부터 하늘이 꾸무럭 거리더니 흙냄새가 올라온다. 비가 올 것이라는 기상청 예보가 제발 빗나가길 바랐건만. 빗줄기나 햇볕을 피하기 위해 모자를 쓰고 물을 챙겨온 사람들 사이에 무릎 보호대와 목장갑을 착용하거나 피켓을 챙겨드는 이들도 보인다. 하얀 베일과 회색빛의 긴치마를 입은 수녀님들은 우의 위로 입은 보라색 조끼를 서로 묶는다. 그 뒤로 우산을 든 손에 십자가를 쥔 이들이 있다. 자세히 보니 나무결이 보이는 손십자가다. 이름들이 새겨있다. 탁! 하나 , 두울, 세엣 , 탁! 둥둥-두두두두두둥…딱! 북 소리에 맞춰 함께 기도하고 기도하는 길고 긴 행렬이 앞을 향해 나아간다. 앞선 이들은 목사님, 신부님, 스님, 교무님 그리고 ‘10.29이태원 참사 진실규명 특별법 제정하라’는 흰색 글씨가 쓰인 보라색 티셔츠를 입은 유가족들이다. 빵 빠아앙! 빵빠앙! 경찰이 행진신고에 따라 안전을 위해 합법적으로 도로교통 정리와 안내를 이어가지만 간혹 울리는 감정이 실린(것 같은) 경적소리에 행렬을 따라가는 이들의 고개가 돌아가곤 한다. 희생된 아이를 기억하며 간절히 기도의 걸음을 이어가다 유가족의 발언이 이어졌다. 그 중 두 분의 발언 일부를 풀어 싣는다. “지난 6월에도 여기에 왔었습니다. 초여름이었죠. 8월입니다. 가로수에 벌써 낙엽이 지려고 합니다. 우리 유가족의 가슴에는 가슴이 없습니다. 속이 뻥 뚫렸습니다. 어느 때는 너무 꽉 차있습니다..! 앞에서 걷는 분들 절하실 때 보면 다리가 전부 제 다리가 아닙니다. 너무너무들, 다들 아픕니다. 이렇게 한자리에 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 제 아이를 영안실에서 마주했을 때 형사 두 분이 있었습니다. 아이의 흰 천을 벗기려고 손을 내미는데, 아이의 손을 잡아보려고 내미는데 눈빛들이 너무 분주합니다. 무언의 압력입니다. 내리지 말라고 보지 말라고. 여기 계시는 시민 여러분..! 다음에 어떤 참사가 있으면 절대로, 절대로 장례를 먼저 치르지 마세요..! 흰 천을 꼭 거둬보세요..! 아이의 손을 꼭 잡아보세요..! 아이를 마지막으로 보낼 때 꼭 한 번 안아주세요. 저는 그걸 못 해 너무나, 너무나 아이한테 미안합니다. 너무나 큰 죄인이 되었습니다 …” “눈에서 피눈물이 나옵니다. 국가는 왜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고 예방할 수 있었던 참사를 외면하고 있을까요. 그때도 국가는 없었고 지금도 국가는 없습니다. 왜 우리 아이들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그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아야 했을까요. 왜 응급처치 한번 제대로 못 받아보고 왜 희생 되었을까요. 왜 다목적체육관에서 시신을 확인하고 신원을 확인하게 됐음에도 유가족들에게 신속히 인계하지 않고 그 먼 서울 각 지역으로 흩트려 놓고 우리 유가족들을 두 번이나 죽였을까요 …” 유가족들은 ‘희생자 이송 및 조치’에 대해서만도 수많은 질문을 던졌지만 책임있는 진실된 답변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 “누가 용산다목적체육관으로 희생자를 옮기라 지시 했는가? 그리고, 거기서 전국의 병원으로 희생자를 다시 옮기라고 지시했는가? / 왜? 우리 아이들이 서울 외곽 영안실에 있었나요? / 왜? 우리 아이가 영안실에서 모두 옷이 벗겨져 있었나요? / 왜? 아이 핸드폰이 용산경찰서에서 주웠다고 했는데 보호자가 주라고 하는데 수사중인 물건이라고 안주었는지? / 왜? 압사사고가 분명한데 마약검사를 진행하자고 하였는지? / 왜? 아이가 지금도 구급일지를 달라고 하는데도 확인이 안되는지? / 왜? 영안실에서 아이를 빨리 데리고 나가라고 재촉을 하였는지? / 신원확인 한 구급대원의 구급일지를 순천향병원에 아이를 인계할때 함께 인계 했음에도 변사체 처리한점 / 친구가 보호자로 구급차를 탔었고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었고 부모가 구급대원의 연락을 받고 병원밖에 있었는데도 다시 신원조회를 한 점 / 부모보다 연고지 공무원이 더 먼저 마지막 안치된 곳을 알게 된 점 / 나체로 부모에게 인계된 점 / 검안과 검시를 두번씩 한 점 / 마지막 검안 당시 부모에게 동의를 얻지 않았고 참여시키지 않은 점”(생명안전시민넷 최희천 교수-“10.29 참사의 경험을 통해 본 생명안전기본법의 의의와 필요성”중에서) 심지어 참사에 대한 책임으로 물러났던 실권자들은 복귀했다. 8월초 시민분향소 앞에서 진행된 추모와 연대기도회에서 고난함께 전남병 목사는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의 문제다. 내가 아니었어도 누군가 당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면 그것이 사회적 재난”이라 하였다. 또 “우연한 사고라 할지라도 그것을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시키느냐, 사회 전체가 숙고해야 하는 사건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수준이 결정된다. 그렇기에 10.29 이태원 참사는 우리 사회의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가늠자가 된다”고 하였다. 왜 내 가족이, 사랑하는 이가 목숨을 잃었는지 알아야 그때서야 애도가 시작될 수 있다. 부디 1주기가 오기 전에 온전한 애도를 시작할수 있도록, 다양한 그리스도인들께서 함께 기도하며 동행해 주시기를 간곡히 요청 드립니다/목사·NCCK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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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기가 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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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소수자③] 참 떡 믿음
- ◇무교병 2015년 4월, 케냐에 도착 한 후, 전임 선교사로부터 사역을 인계 받고 거의 1년 동안, 신학교 설립을 위해 부지를 매매하는 중이었다. 주일 오후에 갑자기 미국에서 전화를 받았다. 우리 부부를 파송한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는 것이었다. 혼신을 다해 충성한 종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셨는지, 60회 생일 새벽에 주님께서 데려가신 것이다. 그 목사님은 신학교 시절부터 함께 기도하며 동역해 오던 나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 일로 인해 나는 큰 충격을 받았고, 함께하던 선교 정책에도 갑자기 공백이 생겼다. 당시 케냐의 교회 지도자들을 육성하기 위해 신학교를 설립하자고 합의하여, 나는 다른 곳에 담임목사로 청빙 받은 것도 사양하고 아프리카에까지 들어 왔건만, 갑자기 혼란스러운 처지가 된 것이다. 우리의 선교 베이스캠프는 나이로비에서 서북쪽으로 약 10시간 운전 거리에 있는 해발 4,321m의 엘곤 산 중턱에 있었다. 그리고 차로 6시간 반경 안에 있는 23개의 마을에 각각 교회와 학교를 세워서 후원하고 있었다. 주중에는 현지 지도자들을 만나 공부하고 후원 사역을 하다가, 주일에는 한 교회씩 순방하며 말씀을 전하곤 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파송교회 담임목사의 유고 후 사역 방향을 위해 기도하던 중, 그 주일에는 내가 아프리카에서 처음 방문했던 티티맷마을(Titimet)에 가서 예배하기로 하였다. 당시 그 교회는 교회 건물이 없어서, 그 지역의 유일한 공공건물인 초등학교의 한 교실을 빌려 예배하던 상황이었다. 그 날 좁은 교실에 빽빽이 서서 찬양을 하는 중에, 찬양지도자가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먹먹한 내 마음에, 주님께서 요한복음 6장의 말씀과 함께 단순하고 명확하게 사역에 대한 개념을 새로이 세워주셨다. 그 날 말씀을 전하며 그 내용을 유쾌하게 선포했다. ‘오병이어’의 기적적인 음식 공급을 체험한 사람들이 돌아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떡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배부른 떡’, ‘모세의 떡’, 그리고, ‘생명의 떡’이었다. 이는 육신에 필요한 양식,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보고 모이는 무리, 그리고, 참 구원자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알아보는 참 믿음! 나는 이 세가지를 ‘CCC’, 즉, ‘Corn, Church, Christ’ 라 부르고, 이후 사역 기간 동안 선교 활동의 지침으로 삼았다. 먼저, ‘배부른 떡’으로는 양식과 의료 지원, 신발 보급 등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물리적 공급을 했다. ‘모세의 떡’으로는 교회 지도자들의 헌신과 훈련, 청소년들의 건강한 영성과 위생교육, 어린이들을 위한 복음주입을 위해 프로그램화 하였다. 그리고 그 모든 공급과 사역 활동을 통해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어 구원 받고, 주님으로 믿어 따라가는 삶, ‘참 떡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목표를 계속 상기했다. 케냐 인구의 84%가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한다. 이는 구교를 포함한 수치이지만 어느 시대에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그렇게 높은 나라는 없었고, 국제WEC(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 같은 선교단체에서도 케냐를 ‘미전도 지역’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런 곳에 왜 이렇게 많은 선교사들이 필요할까? 신앙의 고백과 표현, 찬양은 많으나, 교회 밖에서 참된 믿음 생활이 없어 혼탁한 사회에 참 복음을 ‘재계몽’시키는 선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북쪽과 동쪽은 이슬람, 내부에는 이단들의 도전들이 극심하고, 아프리카 대륙의 기독교 경계선으로서 타 종교화를 사수하는 방어 지역이기 때문이다. 또, 과거 식민지 역사와 ‘선심성’ 선교의 영향 속에 뿌리내린 기복적 신앙과 의존성을 퇴치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속 문화와 혼합된 형태의 신앙에서 ‘탈 무속화’하여, 참된 ‘예수 신앙’을 갖도록 도와줘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에게도 익숙한 모습이지 않은가? 우리와는 먼 다른 나라, 남 이야기로만 생각되지 않는 현상이다. 역사가 토인비는 “기독교인이 국민의 12%이면 그 사회를 기독교화 할 수 있다. 그러나 25%가 되어도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면, 그 나라에서의 기독교는 썩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미국은 신앙의 생활화를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한때 기독교인이 1~2%에 불과했을 때, 배가 그렇게 고픈 시절, 교회는 민족과 함께 성장을 이끌지 않았던가? 특별한 박해가 있었던 시절에 그랬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시기를 지나 부흥의 전성기를 이뤘다. 그런데 ‘배부른 떡’을 체험한 후, 세상에서 필요한, 세상 사람들이 먹어야 할 ‘생명의 떡’의 맛이 약해졌다. 기독교를 종교적인 문화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배고프고 목말랐던 시절에 먹었던 무교병이 이전처럼 감격된 눈물의 빵이 아니다. 그동안 열심히 달려왔던 교회들이 팬데믹과 전쟁 등 세계적 진통으로 위축되고, 각 사회의 대립 현상 속에 방어벽을 치며, 세대 간 갈등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동안, 교회들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교회들이 지난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신 것이다. 성도들에게 ‘생명의 떡’을 갈망하는 마음을 부어주셨다. 종교적인 ‘모세의 떡’ 맛에 질린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 하나님은 이토록 사랑하시는 세상에서, ‘생명의 떡’, 독생자 예수를 전심으로 다시 구하는 성도를 찾으신다. ‘종교성’으로 배부를수록 하나님의 백성들은 허전하다. 무교병이 다시 맛있게 느껴지도록, 광야에 앉아, 배고픔을 느껴 보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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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소수자③] 참 떡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