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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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레모스 영성10] 광야를 닮은 소리(1)
    광야로 일컬어지는 곳을 연상할 때 떠올려지는 첫 이미지는 ‘거칠다’일 것이다. 영어표현 그대로 와일드(wildness)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약간의 의미를 덧붙여 야성(野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광야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거칠고 투박한 채로 남아 있기에 자연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문명이나 문화는 사람의 인위적 행위가 더해지게 된 결과물인데 이에 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추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창조의 세계 저 편의 암울한 파괴 현장을 목도하게도 한다.   구약 신명기는 ‘다듬지 않은 돌’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도록 하고 그러한 돌들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가르친다. 자연석에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인류의 문명사가 이어져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결코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 즉 하나님께 대한 충직한 신앙 그 자체를 성경은 ‘자연석’으로 상징하고자 했다. 곧 벧엘 야곱의 돌 그리고 요르단 강 길갈의 12개의 돌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돌, 변하지 말아야 할 돌 그래서 신앙은 그러한 돌과 함께 대대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나는 ‘광야를 닮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광야의 그 자연스러움, 꾸밈없음, 있는 그대로의 모습, 다소 거칠게 느껴지고 세련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말하면서 그 배경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과는 대조되는 순박한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우리는 광야의 풍미(風味)와 광야의 야성(野性)을 닮은 영성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이른바 광야의 소리가 주는 울림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울림을 전하고 싶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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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4) 나로 네 용모를 보게하라
    우리는 앞서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자 꽃이 피고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린다. 이를 영적으로 잘 깨달았다. 즉 장차 있을 환란과 주 재림과 천년왕국의 신비한 비밀들이다.    2:13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들이 구원의 열매를 내는 것은 무화과나무로서 푸른 무화과 열매를 내는 것이다. 또 포도 넝쿨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참 포도나무에 붙은 넝쿨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또 제자와 같은 신앙인 순교한 자들을 가리킨다.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재림하신 주께 찬송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 떠나자’는 ‘함께 떠나자’고 말씀하심과 같다. 앞의 10절에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는 신부에게 ’일어나서 함께 떠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단계를 거쳐 온 것이 13절이다. 본문에 ‘함께 떠나자'는 영적으로 계속해서 성도의 신앙을 진전시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계시한다. 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곳으로 주님과 함께 떠나자는 말씀이다.    2:14 바위틈과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 있는 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고 나로 네 음성을 듣게 하라. 네 음성은 달콤하고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오 나의 비둘기야'는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를 부르는 호칭이다. 여기서 신부 성도 될 자의 호칭이 바뀐 것은 신앙이 더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마10:16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했다. 즉 비둘기는 신부의 신앙 정절을 가리킨다. 주님이 사랑하는 신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정절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중심이 되면 ‘오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바위틈과 가파를 산 은밀한 곳에서는 깎아진 절벽 밑의 검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틈 은밀한 곳은 악한 들짐승과 바다의 짐승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써 안성맞춤이다. 이와 같은 피난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 자는 풀무 불이나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끝까지 신앙 정절을 지킨다. 우리의 피난처가 어디인가? 참 피난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라 하심은 신부의 용모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신부 얼굴에 면사포를 쓴 것과 같이 가리워서 오직 신랑 예수에게만 보여준다. 신랑 예수님만이 신부의 얼굴 위에 있는 베일을 벗겨서 보실 수 있다. 그럼 왜 신랑 예수님이 신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온몸으로 열매 맺고 이긴 것의 결과는 얼굴에 영광이 나타난다. 사람의 인격의 대표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신부의 용모를 보기 원하시는 것은 네 자신의 온몸(인격)이 변화된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도의 신앙 변화의 마디마디가 있었다.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던 때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던 때도 있었다.      앉은뱅이처럼 신앙의 침체기도 맞았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일으켜주셨다. 주님과 한 몸 되어 주님의 사랑을 채워주셨다. 계속하여 변화시키는 역사를 해주셨다. 이제 얼마나 변화됐는지 신부의 모습을 보려고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인격으로 변화된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또 주님은 신부의 음성 듣기를 원하신다. 음성은 사상을 의미한다. 주님 없이는 못산다고 울고불고하던 상사병이 고쳐진 것이다. 즉 인본적인 신앙에서 신본적인 신앙으로 바꿔진 것이다. 그 신부의 사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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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4-15
  •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
       인간은 삶의 여정에서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하지만 선택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유신론자로 살 것이냐 아니면 무신론자로 살 것이냐 일 것이다. 이는 그의 삶의 질과 영혼의 구원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인본주의인 헬레니즘과 신본주의인 헤브라이즘과의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평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던 사람과 불신앙으로 살던 사람과의 차이점은 삶 속에서 새로운 국면을 접할 때마다 그의 정체성이 드러나게 된다.    지난 냉전시대에 미국과 구소련 간에는 우주 항공분야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우주선에 탑승했던 미⋅소 양국의 우주인에게 당국에서 신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 돌아오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도 아닌데 그들은 귀환한 후에 자진하여 신의 존재에 대하여 상반된 진술을 하였다. 즉 인류역사상 최초의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대기권 밖에 진입해서 우주여행을 하였던 소련의 가가린은 “여기에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 어디를 봐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반면에 그로부터 몇 년 후 아폴로 11호를 타고 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달에 착륙하였던 미국의 우주 비행사 암스트롱은 여행 중에도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아름다운 지구와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했다. 두 사람의 이와 같은 진술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사상을 평소에 지니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현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무수하지만 그 중에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람처럼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이 거듭나지 못하고 제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해서 주님이 수난당하시기 직전까지 책망을 받던 그들이 예수의 부활과 성령체험을 하면서 불과 40여일 만에 성숙한 영성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사도행전의 주역으로 이스라엘과 열방을 향하여 선교의 지평을 열어가는 인물로 쓰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는 아우구스티누스나 존 뉴톤 같은 수많은 탕자를 만인의 숭앙을 받는 성자로 만들어 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 안에 살면서 예배생활과 성경적인 삶과 기도 생활을 중히 여기면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면 그는 이 세상에서도 이미 천국에서 누릴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부활신앙과 성령체험으로 살아계신 주님의 증인이 되어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뤄가기를 바란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선목측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4-08
  • [에레모스 영성8] 광야를 길 삼아 (2)
    이사야는 주전 8세기 경 유다 왕국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예언자였다. 그는 500여년 전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동안 조상들이 경험했던 광야를 기억에 떠올린다. 이사야 40장은 ‘광야’와 ‘길’ 이라는 두 단어를 일종의 열쇠말로 삼고 있다. 그는 메시아가 임하실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과정이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입성하듯이 그렇게 오실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그러니 그분이 오시는 길을 누군가는 먼저 앞서 나가서 길을 닦아드려야 할 것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라.”(이사야 40:3-4)   길 없는 광야를 길 삼아 순례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높은 구릉과 깊은 골짜기의 거친 길은 평지와 평탄한 길에 대한 갈망을 더욱 간절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내 뒤에 오는 이들은 나처럼 이런 고생하지 않고 좀 더 편안하게 덜 고생하면서 길을 가도록 하는 마음이 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실상 메시아는 그렇게 잘 닦아 놓은 넓고 편한 길이 아니더라도 오실 수 있다. 그분은 제 아무리 높은 봉우리라도 넘으실 것이며 제 아무리 깊은 강물이라 할지라도 빠지지 않고 건너실 것이다. 홍해라도 길을 여실 것이며 사막 한가운데라도 길을 내실 것이다. 그분의 능력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을,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다.   이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삶으로 실천한 이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다. 주전 13세기에서 주전 8세기를 거쳐서 메시아 예수 시대에 이르기까지 1300 여년에 걸쳐 ‘광야와 길’은 기억되고 역사가 되고 신앙이 되어왔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영성화(spritualize) 되어간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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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3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2) 산들을 거쳐 빨리 뛰어오신 주님
      주님이 노루, 들사슴 같으시니 그 품안에서 사랑받는 이 상황을 방해말라고 부탁한다.   2:9 나의 사랑하는 이는 노루나 어린 사슴 같나니, 보라, 그가 우리의 벽 뒤에 서서 창문으로 들여다보며 창살을 통해 몸을 내보이는도다.   주님이 노루나 어린 사슴같이 산들 위로 가볍게 뛰어서 신부 자신에게 왔다고 신부가 고백한다. 이는 주님의 목소리로 내게 깨우쳐 주신 것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성경에 계시 된 산들을 거쳐서 여기까지 빨리 뛰어오셨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성경 안에서 큰 산봉우리들로 이어진 파노라마와 같다. 좋은 소식들을 가져오며 화평을 선포하고 번영의 기쁜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선포하여 시온을 향하여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도다.” 하는 자의 발이 산들 위에 있을 때 어찌 그리도 아름다운가!(사 52:7)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있는 산, 즉 말씀이 나오는 곳이 산들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영적인 유대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뿌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순교 신앙으로 세울 때 모리아산에서 세우셨다.     이는 그가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아노라.’고 말씀하시며 아브라함을 그 산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온전하게 세우셨다. 그리고 그분이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준 곳이 어디인가? 에덴동산이다. 동산 안에서 양을 제물로 바치게 했으니 양의 가죽옷이 생긴 것이다. 에덴동산의 이 제단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에덴동산에서 주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으로 계시면서 선악과를 따먹고 죽었던 아담과 그와 함께 된 미리 아신 자들의 영들을 구원해 주신 표징이 곧 가죽옷 입은 것이다. 또 모세가 율법을 받은 산은 시내산이다.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을 받아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복된 생활을 하게 한 곳이 시내산이다. 주님이 이러한 산들, 즉 에덴동산을 거쳐 모리아산으로, 시내산으로, 그 산들을 거쳐서 뛰어오신 것이다. 그리고 작은 산들인 속죄 구원하신 갈보리산, 즉 시온산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에덴동산부터 주님이 초림 하신 때까지 4천 년이 걸렸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을 하루같이 주님은 4천 년을 나흘로 여기듯이 빨리 뛰어오셨다. 또 예수님 초림 이후 2천년이 흘렀으니 6천 년을 6일로 여기듯이 노루나 들사슴 같이 내게 빨리 오신 것이다. 마치 아사헬의 발이 노루처럼 빨랐던 것처럼(삼하 2:18) 주님이 나를 구원하신 후, 또 보기 위해서 이처럼 빨리 뛰어오신 것이다. 7절과 8절에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을 사슴으로 비유했다. 이는 내게 말씀하시는 소리가 아주 아름다운 소리로 임하는 것을 비유로 말씀한다. 창세기 49장 21절에 야곱이 납달리를 축복할 때, “너는 풀린 암사슴같이 아름다운 말을 한다.”고 했다. 오늘 우리가 듣고 있는 주님의 음성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가장 달콤한 말은 무엇인가? 주님이 나를 데리러 오신다는 말씀이다. 주님이 내게 첫째부활의 영광을 입혀서 신부로 데리러 오신다는 말씀이다. 주님이 나를 보기 위해 급히 달려오셨으니 나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면 된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의 벽뒤에 서 계신다. 주님과 나 사이에 벽이 가로막혀 있다.     이 벽은 죄악의 벽을 상징한다. 또 주님은 창살을 통해 나를 보고 계신다. 왜 창살이 놓여 있을까? 전폭적으로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신 온전한 신부로 아직 세워지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벽 너머로, 창살 틈으로 주님의 음성이 들린다. 어렴풋이 주님이 보이는 것 같지만 주님 안으로 들어가 한 몸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내가 첫째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진리를 들었으나 아직도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계13:8)에 ‘녹명’ 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절대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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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4-03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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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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