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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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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에레모스 영성6] 시험의 땅, 광야
    광야에서 예수에게 다가온 3번째 유혹은 이 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 즉 권력에 관한 것이었다. 나에게 절을 하면 이 땅의 통치권을 넘겨주겠다는 것이다. 메시아의 역할을 하려면 권력이 필요할 것이고 이것이 현재는 나에게 속해 있으니 내게 절을 하면 너에게 넘기겠다는 말이다. 왕국의 통치권은 왕에게 있고 공화국의 통치권이 국민에게 있듯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은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이 보낸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기름이 부어지고 보냄을 받은 권력 수임자가 바로 메시아이다. 따라서 메시아라는 개념에는 이미 정치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내가 당신에게 통치권을 넘겨주겠다. 여기에 따라오는 영광스러움도 알고 있을 것이다”라는 사탄의 말을 해석하면 이 세상을 통치하는 권력은 현재 사탄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이고 이를 넘겨받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사실상 거짓이며 속임수이다. 왜냐하면 이를 한 번 더 생각해보자. 고대의 정치체제를 예로 들자면, 사탄을 천자국의 황제로 삼고 그 밑에서 제후국이나 부마국의 왕 자격으로 통치권을 행사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를테면 로마 황제와 분봉왕 헤롯의 관계에 해당 될 것이다.   통치를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권력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굴종과 타협이 필요하다. 바람직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은 때때로 합리화 될 수 있다. 이는 오늘의 정치가들에게도 끊임없이 요구되는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 섬기라.”는 신명기의 말씀으로(6:13).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리며 이렇게 마무리 한다. “나라(kingdom)와 권세(power)와 영광(glory)이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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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4
  • [에레모스 영성 5] 시험의 땅, 광야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난 뒤 곧 바로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마태 3:17)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예수에게는 메시아에 대한 구별된 의식 생겨났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 메시아 자의식이 재확인이 되는 일은 광야에서이다. 이 과정에서 사탄은 이렇게 시험한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당신을 다치지 않도록 할 것 아니냐. 이것보다 더 좋은 메시아에 대한 증명 방법이 어디 있겠느냐는 그럴듯한 속삼임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메시아의 사적 단계에서 다음 공적 단계로 객관화되는 아주 좋은 계기일터이니까.   그러나 예수는 즉시 이것이 영적 유혹임을 알아차렸다. 이런 짓은 하늘 아버지를 인간의 얄팍한 방법으로 시험해보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눈에 그럴듯한 형상으로 보여져야 하는 분이 아니고 그럴듯한 소리로 들려져야 하는 분이 아니다. 그렇게 보여지고 들려지도록 만들어 놓은 것은 다름 아닌 우상이다. 그래서 우상은 우리 인간의 필요에 따라 그때마다 보여지고 그때마다 들려진다. 우상 숭배는 그 옛날 이집트 땅이나 가나안 땅이나 로마 땅이나 페르시아 땅에 거대한 신상으로만 세워져 있지 않는다. 우리 마음 한 가운데에도 세워질 수 있는 것이다. 참 신은 우리 눈에 아니 보이고 우리 눈에 아니 들려도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이시다.   수많은 대중들 보이는 그 한가운데 뛰어내리면서 메시아의 존재를 확인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이냐. 이 양자택일의 요구는 예수에게도 쉽게 풀 수 없는 유혹이고 시험이었다. 뛰어내려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중명해 보라는 은근한 귀뜀은 예수님 공생애 3년의 기간 뿐 아니라 끝내 십자가에 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나 예수는 그 요구를 거절하시고 못 박혀 죽음으로 맡겨진 메시아로서의 본분을 다 할 수 있었기에 대속자 구원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라는 파라독스를 통하여 비로소 구원의 길에 이르게 되었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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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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