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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3)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으니
- 주님의 음성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달콤한 말씀은 나를 신부로 데리러 오신다는 말씀이다. 2:10 나의 사랑하는 이가 내게 일러 말하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 자.” 9절에서 발생된 문제점들을 10~12절에서 고쳐주시면서 신앙을 바르게 세워 가신다. ‘일어나 떠나자’ 하는 것은 주님이 주저앉아 있는 자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앉은뱅이는 다윗성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다(삼하 5:8). 다윗성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셔서 세우시는 천년왕국의 그림자로 계시한 것이다. 신부로 세우시는 과정에서 영적 상태가 주저앉아 있는 자이나 그 중심은 어여쁜 자이다. 재림 주님을 신랑으로 맞이하고 그분과 함께 천년왕국의 기업을 받는 자가 되려면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으키신다.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말씀하신다. 9절에서 보여준바 뭉개고 앉아있는 신앙에서 탈피해 첫째부활의 영광의 자리로 함께 나아가자는 것이다. 2:11 보라.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쳐 사라졌으며 2:12 땅에는 꽃들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는 때가 왔도다. 산비둘기의 소리가 우리의 땅에서 들리는도다. 11~12절의 내용은 장차 될 일을 예언한 것이다. 9절에서 주님과 함께 일어나 떠난 자에게 해당된다. ‘보라’는 영적인 눈으로 보고 깨달으라는 말씀이다. ‘겨울도 지나고’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봄에는 복음의 씨를 받아서 예수를 믿게 된다. 여름에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 계속 열매를 맺어간다. 가을에는 결실이 되고, 겨울에는 결실된 것을 저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름과 같은 지금의 은혜시대 때 결실하여 순교의 신앙에 세워진다. 그리하여 대환란의 겨울에 순교케 되어진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그 핵심이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을 뗄 때에 전개되는 일들이요, 곧 환란 날의 사건들이다. 이 계시록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때가 곧 겨울이다. 비도 그쳐 사라졌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 심판의 때가 끝났다는 의미이다. 노아 홍수 때 내린 비는 심판의 비였다. 이윽고 7년 환란과 하나님의 심판이 끝난 후 땅에는 꽃들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는 때가 왔도다. 주의 재림으로 세워지는 새 하늘 새 땅, 즉 천년왕국의 때를 가리킨다. 모든 것이 꽁꽁 얼고 푸르른 것이 전혀 없는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이 겨울의 7년 환란이 지나면 에덴동산 같이 새롭게 회복되는 때가 오리라. 땅에는 꽃들이 핀다. 바로 이 땅에 꽃이 피는 것이 나와 직접 관계됨을 믿고 깨달아야 한다. 꽃이 피는 것은 내가 영광을 입은 존재가 될 것을 계시한다. 그리고 새들이 노래하는 것은 내가 새처럼 노래하는 자가 될 것을 계시한다. 즉 내가 입게 될 영광으로 인해 새와 같이 노래하리라. 두 날개로 날개 짓하며 찬송하며 감사드리는 것을 말한다. 산비둘기의 소리가 들린다. 이는 주님이 재림하신 이후에 천년왕국에서 기뻐하는 소리를 가리킨다. 비둘기같이(마10:16) 신앙의 정절을 끝까지 지켜 순교함으로써 천년왕국의 복을 받게 됐으니 기뻐하며 찬송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땅’의 우리는 아1:11의 ‘우리’와 같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 아버지가 이미 영광, 즉 천년왕국의 분깃을 내게 주려고 예비하신 그대로 다 이루어졌으니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땅이다. 또 예수님 안에서 이루셨다. 주님의 피로 우리의 죄들을 사해 주셨다. 또 주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부어주시고, 일곱 단계까지 성령 충만케 하시어 일곱 영까지 부어주신다. 환란 날에 이 일곱영으로 순교케 해서 천년왕국의 복을 받게 해주셨으니 주님의 땅이 된 것이다. 또 성령인 일곱 영으로 순교케 하여 구원해 주셨으므로 성령 하나님의 땅이 된 것이다. 이와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땅, 즉 우리의 땅이 되었다. 천년왕국의 복을 받게 된 자가 곧 우리의 땅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 · 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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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3)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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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2) 산들을 거쳐 빨리 뛰어오신 주님
- 주님이 노루, 들사슴 같으시니 그 품안에서 사랑받는 이 상황을 방해말라고 부탁한다. 2:9 나의 사랑하는 이는 노루나 어린 사슴 같나니, 보라, 그가 우리의 벽 뒤에 서서 창문으로 들여다보며 창살을 통해 몸을 내보이는도다. 주님이 노루나 어린 사슴같이 산들 위로 가볍게 뛰어서 신부 자신에게 왔다고 신부가 고백한다. 이는 주님의 목소리로 내게 깨우쳐 주신 것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성경에 계시 된 산들을 거쳐서 여기까지 빨리 뛰어오셨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성경 안에서 큰 산봉우리들로 이어진 파노라마와 같다. 좋은 소식들을 가져오며 화평을 선포하고 번영의 기쁜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선포하여 시온을 향하여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도다.” 하는 자의 발이 산들 위에 있을 때 어찌 그리도 아름다운가!(사 52:7)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있는 산, 즉 말씀이 나오는 곳이 산들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영적인 유대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뿌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순교 신앙으로 세울 때 모리아산에서 세우셨다. 이는 그가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아노라.’고 말씀하시며 아브라함을 그 산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온전하게 세우셨다. 그리고 그분이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준 곳이 어디인가? 에덴동산이다. 동산 안에서 양을 제물로 바치게 했으니 양의 가죽옷이 생긴 것이다. 에덴동산의 이 제단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에덴동산에서 주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으로 계시면서 선악과를 따먹고 죽었던 아담과 그와 함께 된 미리 아신 자들의 영들을 구원해 주신 표징이 곧 가죽옷 입은 것이다. 또 모세가 율법을 받은 산은 시내산이다.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을 받아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복된 생활을 하게 한 곳이 시내산이다. 주님이 이러한 산들, 즉 에덴동산을 거쳐 모리아산으로, 시내산으로, 그 산들을 거쳐서 뛰어오신 것이다. 그리고 작은 산들인 속죄 구원하신 갈보리산, 즉 시온산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에덴동산부터 주님이 초림 하신 때까지 4천 년이 걸렸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을 하루같이 주님은 4천 년을 나흘로 여기듯이 빨리 뛰어오셨다. 또 예수님 초림 이후 2천년이 흘렀으니 6천 년을 6일로 여기듯이 노루나 들사슴 같이 내게 빨리 오신 것이다. 마치 아사헬의 발이 노루처럼 빨랐던 것처럼(삼하 2:18) 주님이 나를 구원하신 후, 또 보기 위해서 이처럼 빨리 뛰어오신 것이다. 7절과 8절에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을 사슴으로 비유했다. 이는 내게 말씀하시는 소리가 아주 아름다운 소리로 임하는 것을 비유로 말씀한다. 창세기 49장 21절에 야곱이 납달리를 축복할 때, “너는 풀린 암사슴같이 아름다운 말을 한다.”고 했다. 오늘 우리가 듣고 있는 주님의 음성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가장 달콤한 말은 무엇인가? 주님이 나를 데리러 오신다는 말씀이다. 주님이 내게 첫째부활의 영광을 입혀서 신부로 데리러 오신다는 말씀이다. 주님이 나를 보기 위해 급히 달려오셨으니 나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면 된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의 벽뒤에 서 계신다. 주님과 나 사이에 벽이 가로막혀 있다. 이 벽은 죄악의 벽을 상징한다. 또 주님은 창살을 통해 나를 보고 계신다. 왜 창살이 놓여 있을까? 전폭적으로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신 온전한 신부로 아직 세워지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벽 너머로, 창살 틈으로 주님의 음성이 들린다. 어렴풋이 주님이 보이는 것 같지만 주님 안으로 들어가 한 몸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내가 첫째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진리를 들었으나 아직도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계13:8)에 ‘녹명’ 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절대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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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2) 산들을 거쳐 빨리 뛰어오신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