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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③ - 세계 속에 우뚝 선 한국교회의 모습
    ▲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5·4운동(좌)과 간디의 사티아그라하(우) 3·1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건네고자 했던 메시지는 비록 그들이 희망했던 방향으로 흐르지 못했지만, 전 세계 기독교인이 따르고자 했던 이상에 부합했다.   시대적 한계에 직면했던 이웃교회의 상황이해 필요 민족으로 시작한 한국교회, 세계와 보편애로 일치 추구 20세기 한민족 역사 가운데 3·1운동이 지닌 위치는 그 어떠한 사건보다 중요하다. 힘의 논리 앞에 민족과 개인의 자주성을 상실하고 식민지인으로서 온갖 굴욕에 시달려야 했던 이들에게 자유와 독립은 그 어떠한 가치보다 숭고한 의미를 지녔다. 한국교회 또한 이와 마찬가지였다. 민족구원과 하나님나라를 위해 헌신해 왔던 당시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일제의 무단점령과 폭압정치는 하나님의 역사와 절대적으로 일치하지 않은 길로 여겨졌다. 민족을 분열시키고 결사와 언론, 표현의 자유를 모두 억압했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어를 국어로 교육하고 한국어는 일본어 화자와의 소통을 위한 통·번역 위주로 체계를 세워 가르쳤다. 프랑스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언어가 인간의 사유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우리는 국가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언어 속에서 살아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조국이다’ 3·1운동 이후 잠시 완화되지만, 일제는 한순간도 민족 정체성 제거를 위한 고삐를 풀지 않았다. 이에 한국교회는 바빌론 포로기 유대인들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영하면서 일제에 맞서는 것이야말로 2천 년을 넘어 하나님께서 한민족에게 전하시는 계시로 이해하였고, 유대인의 방식을 따라 일제에 항거했다. 결과적으로 3·1운동 당시 한국교회의 선택은 옳았다. 그들이 희망했던 만큼 일찍 성취하지 못했고 또 다른 강대국들의 대리전을 치르는 아픔을 겪었지만, 민족의 독립과 자유가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질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3·1운동과 당시 한국교회의 모습을 본 이웃들의 시선은 어땠는가? 그들에게 3·1운동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일제와 충돌 인정한 선교사들 일제강점기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은 정치 문제에서는 어떠한 언급도 피한 채 조선총독부와 일제로부터 치외법권을 확보해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관점에서 3·1운동은 어떠한 전조도 느끼지 못했던 예측불발의 사건이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으로 재직했었던 고 송길섭박사는 기독교사상 제249호에 게재한 「선교사들이 본 3·1운동」을 통해 당시 선교사들이 3·1운동을 어떻게 느꼈는지 전했다. “일본이 3·1운동을 선교사와 관련시키려고 하나 우리가 아는 한에 있어서는 선교사들은 이 운동에 처음부터 관여한 바도 없고 또 자세히 아는 바도 없었다. 3·1운동이 터짐으로 일본제국만 놀란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도 깜짝 놀랐다. …… 어느 장로교 선교회의 보고서는 이 운동이 그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이 왔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불현듯 찾아온 3·1운동으로 인해 외국인 선교사들은 적잖은 당황을 표했다. 교회 담임목사들과 선교부 직원들이 대거 투옥되고 교인들이 뒤따라 가는 등 교회 운영에 차질이 생기자 선교사들은 큰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폭압정치를 오랫동안 지켜본 선교사들은 기독교와 일제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당시 한국감리교회 감독이었던 허버트 웰치목사는 “분명히 일본관리사회는 기독교사업에 대하여 불안해하고 있다”며,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의 영도하에 있거나 최소한 외국인의 영향하에 있다는 것 또는 교인들은 일반대중보다는 더 각성하여 있다는 것 그리고 기독교의 이상은 필연적으로 군사정부에는 참으로 귀찮은 존재라는 사실은 모두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고 밝혔다. 일제 통치에 비판적인 시야를 품던 선교사들은 일본이 추구하는 가치가 기독교와 화합을 이룰 수 없음을 알았고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을 설득해달라는 조선총독부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를 통해 비록 자신들에게까지 비밀에 부치며 진행한 만세운동이었지만, 3·1운동에 대한 암묵적 지지를 통해 한국교회가 민족교회로서 자주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일왕 사이에 선 일본 한반도 현지에 머물면서 일제의 가혹한 처사를 몸소 겪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태도는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3·1운동에 많은 호감을 표했다. 하지만 일본교회의 태도는 이와 사뭇 대조적이었다. 도히 아키오교수(일본 도시샤대)의 「3·1독립운동과 일본 기독교」에 따르면 일본 기독교인들 중 상당수는 3·1운동을 조선총독부의 무단정치로 인해 생긴 폐해의 반발로 인식했다. 학교교육에서 일어나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나 무력에 의한 동화정책, 불평등한 토지정책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국가주의적 관점을 지닌 일본 기독교인의 경우 한국교회의 저변에 깔린 편협한 유대적 애국심으로 3·1운동이 촉발됐다고 풀어내기도 했다. 특이한 점으로는 군산교회의 스즈키 타카시목사의 3·1운동 인식이다. 스즈키목사의 관점에 대해 아키오교수는 “일본인의 제국주의적 사고방식과 행동이 그러한 독립운동을 도출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스즈키목사는) 술회하고 있다”고 밝혔다. 스즈키 타카시목사는 3·1운동에 대해 “일부에서는 폭동적인 성격을 지녔던 지역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독립선언’으로 보기에 합당하다”며, “그들을 폭도로 부른다거나 폭동이라고 말하는 일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까”고 밝혔다. 이에 대해 아키오교수는 “필히 그는 3·1운동이 시작되는 모양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며, “그는 3·1독립선언문을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을 면밀히 읽고 운동의 진행경과를 객관적으로 지켜봄으로 당연히 그런 표현이 가능했다고 짐작된다”고 피력했다. 안타깝게도 스즈키목사의 바람과 달리 3·1운동에 대한 일본교회의 관점은 점차 부정적으로 변해갔다. 외국인 선교사들을 변호하던 이시자카 카메지목사는 “이번의 운동은 종교상의 신앙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며, “한국 민중의 입장에서 혹은 한국 민족의 입장에서부터 어떤 의식이 표출되어 나온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선교사들은 한국 독립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며, “그래서 한국인들이 ‘민족자결’이라는 유행어에 미혹되어 독립운동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그들을 설득하여 복귀시켰다”고 밝혔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 아키오교수는 안타까움을 표하고 “(과거 일본교회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채 이 문제를 자각하지 못했다”며, “일본인 기독교인은 왜 천황제와 그 이데올로기 안에 사로잡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그 문제이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3·1독립운동에 있어서의 일본인 기독교인들의 대응의 문제성을 보다 깊이 살펴야 한다고 믿는다”고 전했다.   톨스토이로 묶인 아시아 계획부터 시작, 발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가치가 3·1운동 전반에 깊숙이 들어가 비폭력·평화주의 운동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한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한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중국인들이 5·4운동을 전개한 일은 매우 유명한 일이다. 하지만 3·1운동 속에 깃든 기독교 정신이 5·4운동과 아시아 독립운동에 어떤 연관성을 지녔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와다 하루키교수(일본 도쿄대)는 「아시아 해방사에 3·1독립운동」이란 논문을 통해 3·1독립선언서가 지닌 특이한 점을 확인했다.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면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겠다는 윤리적 각성 촉구와 탄압을 각오하는 3·1독립선언서 속 비폭력혁명사상은 레프 톨스토이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하루키교수는 “선언의 기초자인 최남선은 합병 직전에 잡지 〈소년〉을 경영했는데 잠시 정간처분을 받았다. …… 정간처분 해제 후 처음 호에 그는 장시 ‘톨스토이 선생을 울림’을 발표했다”며, “윤리적 소생의 호소, 비폭력혁명의 입장은 일본 측으로부터 가혹한 물리적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3·1운동의 그 거족적인 결집을 가능케 했던 것은 (톨스토이가 생전 주창했던) 높은 도덕성과 넓은 원칙성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흐름은 다른 나라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5·4운동을 이끌면서 3·1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베이징대 학생들은 성명을 통해 일본인의 윤리적 각성을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전했다. “우리 중국 민족은 대일본 보이콧 운동 중에서 삼가 피눈물을 흘리며 일본 국민에게 충고하는 바이다. 눈을 떠라. 그리고 우리 나라 인민들과 손을 잡고 나아가 저 인도주의의 해충, 평화의 장해인 침략주의자들을 절멸시키고 평화와 행복의 동아 신천지를 건설하자” 이 당시 베이징대 학생들의 중심에는 천두슈를 비롯한 신문화운동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비폭력주의 아나키스트인 크로포트킨과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왔음을 자주 밝혀왔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무저항 평화주의 운동 또한 같은 아시아 국가로서 3·1운동과 기독교가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간디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한국교회가 강조한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하루키교수에 따르면 간디는 사티아그라하로 명명한 이 운동에 대한 견해를 톨스토이로부터 직접 배웠다고 밝혔다. 아시아 사회가 받아들인 기독교는 한국교회가 강조했던 민족주의적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3·1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세계 곳곳에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한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민족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가 하나 되는 범인류적 공동체의 실현이라 정의할 수 있다.   서구사회의 냉대 속 희망 미국 현지에 3·1운동 전개상황과 일제가 자행한 학살 등 탄압을 알리기도 한 프랭크 스코필드박사의 헌신이 있었지만, 당대 서구사회에서 3·1운동이 큰 의미를 지니지는 못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1919년 진행된 파리강화회담에서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미 국무부 또한 주일대사에게 미국 정부는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계획 수행에 일절 도움을 주지 않았으며 독립운동에 동조한다는 의심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과 유럽교회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반도에 있던 선교사들은 3·1운동 이후로도 계속해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지만 이에 응하는 어떠한 답변이나 조치를 발견할 수 없다. 이런 반응의 원인은 다음 2가지 사항으로 손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동아시아 끝자락에 있는 식민지 교회에서 일어난 일, 두 번째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피폐해진 서구 교회의 상황. 시대적 한계로 인해 서구교회가 한국교회에 시선을 두지 못했던 점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해외교회에 충분한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3·1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해외 교회에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고 여길 수는 없다. 당시에는 이루지 못했지만, 끝끝내 독립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도 민족애를 바탕으로 하는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헌신 덕분이었다. 일본인 최초의 대한민국 건국훈장 수여자인 후세 다쓰지가 한국 독립이라는 시대의 부름에 응답한 이유도 그가 열렬히 사랑했던 기독교 정신에 바탕에 있었다. 송길섭박사는 말했다. “카이로회의에 한국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특별조항으로 한국의 일본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승인·결의한 것은 20여 년 전에 한국교회와 한민족의 독립의지의 결의를 전 세계에 과시했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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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12
  •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② - 기독교정신으로 촉발된 2·8독립운동
    ▲ 2·8독립운동은 유학생들의 혈기만이 아니라 기독교 정신에 따른 민족애·조국애로 뛰어든 열정의 산물이었다.   조선기독교청년회서 근촌 백관수 등 독립의지 천명 기독청년으로서 사회화를 도모하는 신앙공동체 건설 민족혼을 지키고 자주독립과 평화를 도모했던 3·1운동이 100년이 지났다. 한국사회 곳곳에서는 이날 민족애로 몸을 불살랐던 순국선열들을 기리고자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3·1운동을 주도했던 한국교회 또한 마찬가지로 믿음의 선조들을 본보기로 삼고자 그날의 함성을 되새기고 있다. 한반도를 뒤흔든 만세삼창은 교회와 사회를 구분하지 않고 한민족 마음속에 깊이 새겨 있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2·8독립운동에 대한 사회 각계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3·1운동의 전조로 평가하기엔 2·8독립운동이 한민족에게 지닌 의미는 각별하다. 근촌 백관수선생을 비롯해 2·8독립선언서가 제시한 비전은 세계의 역사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한민족이 좇아야만 했던 근대적 미래가치를 정확하게 제시했다. 또한 한반도에 건설될 사회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명확하게 짚었던 나침반이었고, 눈물 속에서 민족의 독립과 세계의 화평을 염원한 이날의 기도는 비단 한국교회가 계승해야 할 신앙이라 할 수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2·8독립운동에 대한 평가가 날로 높아지는 지금, 사회와 교계 전반에 걸쳐 2·8독립운동에 대해 조명하는 행사가 늘어나고 있는 현 추이는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8독립운동과 기독교 2·8독립선언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공동위원장=이종걸국회의원, 표용은목사)는 지난달 22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2·8獨立宣言 - 지나온 100년과 이어갈 100년」이란 주제로 2·8독립운동 100주년기념 학술심포지엄과 국민 대토론회를 진행한 바 있다. 이날 개회식에서 이종걸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은 “2·8독립운동은 절망적이었던 일제강점기 속에서 굳은 의지와 신앙심으로 민족독립을 민족 독립을 이끌었다”며, “조선기독교청년회의 선각자를 비롯한 항일 열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상기하면서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겠다”고 전했다. 또한 김인복이사장(서울YMCA)은 “일본의 중심인 도쿄에서 대한민국의 독립과 주권의 회복을 위해 2·8독립운동을 결연했던 우리 애국선열들의 거룩한 외침을 다시 돌이켜보면 실로 가슴이 벅차고 그 울림에 숙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귀한 밀알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개회사에서 언급하듯 2·8독립운동은 민족애와 독립의지만을 바탕으로 두지 않고 있다. 오히려 굳건한 기독교 신앙을 중심으로 거칠게 쏘아 올랐던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이명화위원(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은 「재일본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의 활동과 항일운동」란 주제로 일본에 머물고 있던 조선인 유학생들이 기독교 신앙을 뿌리에 두고 한민족의 독립을 꿈꿨는지 말했다. 이위원은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은 일본인들의 천시를 받고 적대시되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강한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품었다”며, “기독교 단체로서 재일본도쿄기독교청년회는 조선인 유학생들의 정신적 안식처이면서 유학생 사회를 이끌었던 민족운동의 지렛대 역할을 수행했다”고 전했다. 이어 “재일본도쿄기독교청년회는 일본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고난의 시대를 함께하며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켜온 곳이다”며, “그곳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기독청년으로서 사회화를 도모하는 신앙 공동체를 건설했다”고 덧붙였다.   자유·평화 꿈꾼 2·8독립운동 이렇듯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유학생 사회에서 지니고 있던 재일본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근촌 백관수선생과 2·8독립운동을 계획한 독립운동가들이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위해 조선기독교회관에 모인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평할 수 있다. 2·8독립운동에 대해 정치역학적 관점을 통해 해석하는 한편 국제 기독교계가 이를 어떻게 받아드렸는지 알아보는 것 또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김숭배상임연구위원(연세대 통일연구원)은 「한국/조선 민족자결의 발현과 지속 - 2·8독립선언의 응집성」이란 주제로 정치역학적 관점에서 2·8독립운동은 한민족의 자기결정을 발현시켰다고 강조했다. 김위원은 “2·8독립운동은 단순히 3·1운동의 밑바탕이 아니다. 1919년을 기점으로 민족을 지탱했던 역사였고, 민족의 자결을 천명한 것이었다”며, “2·8독립운동을 이끌고 참가한 이들은 타지에 온 조선인 유학생이라는 신분과 우드로 윌슨으로 대표할 수 있는 세계사의 조류를 인지했음은 물론 기독교 사상이라는 배경이 맞물려 거사를 도모했던 것이다”고 역설했다. 또한 2·8독립운동을 필두로 독립운동 근간에 기독교가 버팀목 역할을 했음을 이명화위원은 피력했다. 이위원은 “조선기독교청년회는 각기 다른 배경과 계층을 지녔던 조선인 유학생을 하나로 잇는 연결고리가 되었고 2·8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됐다”며, “이를 통해 조선기독교청년회는 종교적 친목 단체를 넘어 민족공동체의 장이 됐다”고 밝혔다. 이어 “이들의 활동은 기독교 정신과 배치되지 않았기에 일본을 포함해 국제기독교청년회의 지지와 협력을 받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한편으로는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기 힘들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여기에 좌절하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꿈꿨던 조선인 유학생들의 기치를 높게 평가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김석근수석연구위원(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민족’과 ‘독립’과 ‘평화’ - 2·8독립선언의 사상사적 위상과 함의」란 주제로 2·8독립운동이 지닌 사상사적 위치에 대해 밝혔다. 김위원은 “윤치호는 2·8독립운동에 대해 조선인들 마음속에 민족 본능이 살아있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평가했다”며, “조선청년독립단이 독립이라는 단어를 직접 내걸었다는 점은 과감한 결단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해외의 독립지사와 소통하고 있던 유학생들은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가 조선과 한민족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며, “그러나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조선인들이 주체적으로 독립을 선언해 국제사회의 원조를 이끌어내고자 독립운동을 감행했다”고 덧붙였다.   도쿄 기독교청년회의 오늘 수많은 전문가들이 전했듯 2·8독립운동의 배경에는 기독교 정신과 기독교 공동체가 서 있다. 특히 도쿄에 있던 조선기독교청년회는 2·8독립운동의 산실이자 한국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의 후신인 도쿄 재일본한국기독교청년회는 2·8독립운동의 정신을 잇기 위해 매년 2·8독립운동 기념식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지난 2008년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2·8독립운동 기념박물관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으며, 2017년부터 총 8차례 진행한 2·8독립운동 공개 세미나 자료를 책으로 발간할 계획이다. 2·8독립운동 기념박물관은 2·8독립운동 관련 서적과 신문, 사진 등을 일본어와 한국어를 병기해 전시하고 있다. 또한 독립운동 기념비를 세워 당시 독립운동을 통해 조선인 유학생들이 잇길 바랐던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2·8독립운동을 누구보다 가장 숭고하게 기리고 있는 도쿄 재일본한국기독교청년회는 올해 2·8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박물관 자료실 재개관과 영상물 제작,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열기 위해 모금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2·8독립운동 기념박물관 실장 타츠키 카즈히사는 1천만 엔을 목표로 세워 작년 가을부터 진행한 2·8독립운동 100주년 모금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타츠키실장은 “2·8독립운동은 식민지 시대 지배국의 수도인 도쿄에서 목숨을 바쳐가며 독립을 외쳤던 용감한 역사이다”며, “2·8독립운동 기념박물관은 한국과 일본 젊은이들이 찾아와 과거에 대한 반성과 화해를 통해 미래를 바라보길 희망하는 곳이다”고 밝혔다. 또한 “2·8독립운동이 일본의 청소년들에게 알려져 과거를 마주 보고 역사 인식이 미비한 일본의 현실을 극복하는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며, “2·8독립운동 기념박물관이 이를 돕는 공간이 되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3·1운동으로 교회갱신 1919년 민족의 자유를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신앙의 선조들을 기리고자 교계 각지에선 이를 기념할 준비로 분주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이홍정목사)와 한국교회총연합(공동회장=이승희목사, 김성복목사, 박종철목사)은 오는 3월 1일 정동제일교회(담임=송기성목사)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연합예배를 진행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총회장=림형석목사)과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측(총회장=김성복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감독회장=전명구목사) 등 주요 교단들도 각각 3·1운동 100주년 연합예배와 3·1운동 만세길 걷기 등 기념행사를 다채롭게 준비하고 있다. YMCA는 오는 3월 1일 정오에 광화문광장에서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 개최해 한반도 평화로 나아갈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또한 오는 7일부터 9일까지 재일본한국기독교청년회에서 2·8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진행하는 전야제와 기념식, 심포지엄에 한국교회 대표단이 대거 참석한다. 과거 믿음의 선진들이 바랐던 민족독립의 염원은 지금 대한민국과 한국교회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잠들었던 한민족의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그날의 외침에 대해 이성희회장(교회협)은 “3·1정신이 외쳤던 억강부약의 질서는 성서가 말하는 산이 낮아지고 골짜기가 메워지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위로와 맞닿아 있다”며, “3·1운동 100주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사회 건설의 기회였다”고 전한 바 있다. 폭압의 화염 속으로 몸을 내던졌던 믿음의 선배들이 뿌렸던 씨앗이 지금의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날의 함성 속에 깃들었던 민족애를 한국교회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또한 이번 3·1운동 기념행사들이 단발성으로 거창하기만 축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사를 계기로 과거 교파 간 차이를 넘었던 모습을 따라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 갱신을 위한 도약의 발판이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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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30
  •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① -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2·8독립선언
    ▲ 2·8독립운동 선언서를 낭독하는 모습의 근촌 백관수선생 동상 이 동상은 백선생의 고향인 전북 고창에 건립되었으며, 1983년 8월 15일 제막식을 거행했다.(제막식 날 백선생 가족과 친지들·왼쪽부터 다섯 번째는 백선생 자녀 부부인 백경순여사와 한양대학교 설립자인 김연준박사)   근촌 백관수 등 2·8독립운동 정신을 잇는 미래상 제시 실천적·혁신적·지성적인 성격의 독립운동으로 평가 100년 전 한민족은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한 3·1운동을 통해 일제의 폭거에 저항하고 세계만방에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내비쳤다. 이때 한국교회는 만세운동을 이끌면서 초교파적인 단합을 통한 민족헌신의 모습을 보였다. 이에 한국교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민족의 독립과 자주정신을 일깨웠던 믿음의 선조들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교회를 향한 일반사회의 시선은 냉랭하기만 하다. 과거와 달리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만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한 3·1운동 당시 기독교계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는 여론이 점차 대두되고 있다. 민족종교로서의 기독교 3·1운동 당시 한반도내 종교인 중 기독교인 수는 2%가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민족애로 하나되어 민족혼을 지키는 데에 앞장섰다. 이에 대해 이덕주교수(감신대)는 「3·1운동과 기독교 - 준비단계에서 이루어진 종교연대를 중심으로」란 논문을 통해 한국교회가 3·1운동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첫째는 한국교회가 민족주의 성격을 띤 채 성장했다는 점이다. 기독교를 통해 전해진 자유와 평등 사상의 유입은 수평적 시민사회를 구현하는데 중심이 됐다. 구한말 한민족의 근대화에 기여한 기독교가 일제의 억압통치로부터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구현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자명한 결과였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는 민족문제에 관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족주의 성향을 띠게 됐다. 둘째는 한국교회가 식민통치 상황에서 민족문제를 논의하는 민족운동의 공간이 된 점이다. 당시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보호아래 치외법권적 영역이 되었고, 총회와 연회, 지방회나 노회를 중심으로 총독부의 발길이 닿지 않는 연락망을 갖추었다.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대한 자료가 지방에 전해져 전국적인 시위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전국 각지에 퍼진 연락망 덕분이다. 셋째는 초교파적 연합운동이 전 민족적 독립운동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1903~1907년에 일어난 부흥운동의 여파로 초교파 연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이러한 연합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3·1운동 당시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은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했고, 각 지방에서 교파를 초월해 만세운동을 진행했다. 이렇듯 3·1운동 당시 교계 지도자들은 민족교회로서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시대적 사명을 저버리지 않았다. 민족을 사랑했던 이들에게 있어서 교파의 벽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는 점, 또한 한국교회에 큰 메시지를 건네고 있다. 3·1운동을 기념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본받는다면, 그들의 의지 또한 이어야 하겠다. 한편 최근 3·1운동이 진행되는 데에 기폭제가 됐던 2·8 독립선언에서 기독교계가 큰 역할을 맡은 사실이 조명을 받고 있다. 3·1운동의 기폭제 2·8독립운동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진행한 2·8독립운동은 근촌 백관수선생이 단장으로 있었던 조선청년독립단에 의해 주도됐다. 이전까지의 독립운동은 민족 전반의 관심을 받지 못했거나 일부 지역에 국한된 저항에 그쳤다. 하지만 2·8독립운동은 처음으로 한민족 전체의 의지를 담아 일제에 저항한 항쟁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근촌 백관수선생은 선언서낭독을 통해 “비록 다년간 전제정치하의 해독과 좋지 않은 사정의 불행으로 오늘과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선진국의 규범에 따라 신국가를 건설한 후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민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함에 있을 줄을 확신하노라”고 말했다. 또한 “최후의 1인까지 자유를 위한 뜨거운 피를 흘릴지니 어찌 동양평화의 화근이 아니리요”라며,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리라”고 선언했다. 2·8독립선언서가 지닌 논조에 대해 윤재근박사(전 한양대학교 교수·문학평론가)는 2·8독립운동의 참여한 이들이 품고 있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감이 우러나온 것으로 보았다. 윤박사는 “2·8독립선언서는 패기와 열정을 가득 안고 있다”며, “근촌 백관수선생이 낭독한 2·8독립선언서는 민족 사랑으로 가득 찬 애가이자 민족의 진일보와 일제에 대한 저항을 눌러담은 명문이다”고 역설했다. 이어 “2·8독립운동은 춘원 이광수를 포함해 독립선언에 함께한 이들의 역량이 합쳐진 결과이다”며, “이를 위해 2·8독립운동을 위해 주도적으로 선언문을 작성하고 조직을 이끌었던 근촌 백관수선생의 선구자적 식견을 간과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또한 “2·8독립운동은 3·1운동으로 계승되어 한민족이 더는 식민지배의 압제에서 벗어나 일어날 것을 주문했다”며, “2·8독립운동은 독립 이후 한민족이 건설해야 할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짚은 민족의 나침반이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2·8독립운동과 근촌 백관수선생 1919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평화회의에 조선인 대표로 이승만과 민찬호, 정한경 등이 참석해 일제의 침략 행위를 알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인 유학생들 사이에 독립열망이 퍼져갔다. 이에 메이지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던 근촌 백관수선생은 최원순과 정광호, 김안식, 김현준과 함께 조선 유학생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 독립의사를 천명하기로 했다. 이에 근촌 백관수선생은 1919년 1월 6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 웅변대회를 열고, 조선 독립의 달성에 앞장설 것을 천명하고 유학생들과 함께 조국 독립의 방법을 논의했다. 이후 2·8독립선언서의 작성을 위해 이광수에게 선언서 저술을 요청했다. 이광수의 독립선언서 초안을 본 근촌은 사상과 이념 부분에서 자신이 생각한 것과 차이가 있다고 보고 고심 끝에 세 차례에 걸쳐 선언서를 다듬었다. 훗날 근촌 백관수선생은 「조선청년독립단 2·8선언 약사」를 통해 “선언서는 본인이 담당하여 이광수군에게 하여금 기초해 재삼차 수정 완료했다”고 밝혔다. 2·8독립선언서 작성을 마친 근촌 백관수선생은 독립운동이 고립되면 성공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보성중학교를 나왔던 송계백을 서울로 보내 독립선언서를 전송했다. 당시 전달된 2·8독립선언서는 여러 과정을 거쳐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에게까지 전달됐다. 선언서를 읽은 손병희는 교단 회의를 통해 3·1운동 궐기를 결의했다. 한편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 독립운동을 더욱 조직화하기 위해 근촌 백관수선생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창설했다. 단장으로 추대된 근촌 백관수선생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쟁취한 세계만국의 앞에 독립을 기필코 이루기를 선언하노라. …… 우리 민족은 일본의 국군주의적 야심의 사기 폭력하에 우리 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운명을 당했으니 정의로 세계를 개조하는 이 시기에 당연히 바로 잡을 것을 세계에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또 세계 개조의 주인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과 영국은 보호와 합병을 솔선 승인하였으므로 이 시기에 구악을 대속할 의무가 있다” 이 선언문을 통해 근촌 백관수선생은 일본이 제기한 대동아공영권의 허위를 비판하고 조선 독립의 이념과 당위성을 전개했다. 기미독립선언서와 달리 근촌 백관수선생의 2·8독립선언서는 민족애와 젊은이의 열정을 바탕으로 두는 독립 의지를 눌러 담았다. 최팔용과 윤창석, 서 춘, 송계백 등 일본에 머물고 있던 유학생 500여 명이 모여 진행된 2·8독립운동은 조국을 잃었던 서러움과 독립의 환희가 뒤섞여 통곡과 오열의 장으로 바뀌었다. 일본 경찰들은 강당으로 진입하고자 했고, 경찰들의 진입을 막고자 수많은 학생들이 그들과 다툼을 벌였다. 당시 사회를 보고 있던 유창석은 기도를 올렸고 눈물을 흘리던 학생들과 고함치며 폭력을 행사하던 일본 경찰마저 고요해졌다. 유창석의 기도가 끝나자 근촌 백관수선생은 앞장서서 강당에 모여 있던 학생들을 이끌고 도쿄 거리를 누비며 독립만세를 외치고자 했다. 그러나 기도로 인해 잠시 주춤하고 있던 일본 경찰들이 그들을 덮쳤다. 2·8독립운동의 의의 일본 경찰들의 난입으로 강제 해산에 그쳤지만, 2·8독립운동은 1910년 을사조약 이후 독립운동의 의지가 한 데 모여 민족의 등불을 밝힌 거사로 인정받고 있다. 윤재근박사는 2.8독립선언에 대해 논하면서 “2·8독립운동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3·1운동과 비교했을 때 실천적이고 혁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며, “2·8독립선언서에서 볼 수 있듯 2·8독립운동은 지성적이면서 활력이 넘치는 측면이 강하다”고 밝혔다. 또한 “근촌 백관수선생을 비롯해 당시 유학생 신분으로 도쿄에 머물던 이들이 느끼고 있던 역사적 의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며, “이들이 꿈꿨던 민족국가의 모습은 자유주의를 뿌리로 하는 근대국가로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희망찬 미래사회를 그린 것이다”고 평했다. 즉 2·8 독립선언서는 한민족 전체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기초로 한 자유주의국가 건설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봉건질서 타파와 근대이념의 대중화를 역설했다. 이는 한국교회 초창기 선교사를 시작으로 한국교회가 이루고자 한 가치세계와 맥을 같이 한다.
    • 교계종합
    • 기획
    2019-01-22
  • 신년특집2. 새해 부흥운동의 전망
      한국교회의 퇴보위기를 강력한 부흥운동 전개로 타개해야 ‘부흥운동 사역자’ 발굴하고 육성해서 성장동력으로 삼아야 한국교회의 성장이 멈췄다. 그리고 지금은 감소의 위기에 처해있다. 곳곳에서 경보음이 울리고 있다. 성도 수는 급격히 줄고 있고, 문을 닫는 교회도 속출하고 있다. 무리하게 건축했다고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하는 교회도 있고, 이단에 넘어가는 교회도 생기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사회에서 한국교회의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한다. 이 말은 한국교회의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아무리 전도지를 돌리고, 전도용품을 나눠줘도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그동안 한국교회의 부흥을 추동했던 부흥운동이 침체됐다는데 있다.   ‘광장 부흥회’의 전통회복 지난해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에 하나는 10월 28일 열렸던 ‘신사참배 결의 80주년 회개 및 3.1운동 100주년을 위한 한국교회 일천만 기도대성회’였다. 이날 광화문 사거리 일대에 대략 1만 명의 성도들이 모여 회개와 결단의 기도를 했다. 과거 수십만의 성도가 모여 아스팔트 위에서 부르짖던 규모에 비하면 그야말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대중부흥집회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기도대성회의 대표회장을 맡은 이영훈목사는 대회사에서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 민족의 고난 중에 일제의 총칼 앞에 굴복해 우상에게 절하는 죄악을 범했다”며, “또한 영적 자만에 빠져 주님의 몸을 찢는 교회 분열의 과오를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또 “서울 광화문 광장에 1천만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모여 시대적 사명을 바로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죄를 통회 자복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거룩한 교회로 회복하기위해 기도대성회를 갖게 됐다”며 의미를 밝혔다. 이렇게 광장에서의 참회와 결단은 새로운 부흥과 회복의 원동력이다. 게다가 이날 기도대성회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국기독교연합, 한국교회총연합,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세계한국인기독교총연합회 등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제외한 한국교회 연합기관들이 모두 동참했다. 특히 소강석목사는 기도에서 “회개와 기도와 부흥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차이도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하나님과의 실존적 관계라는 신앙의 본질에서 있어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명제를 던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광장에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는 ‘광장 부흥회’는 한국교회의 기도열정과 부흥성장을 보여주는 단적인 모습이었다. 대표적인 것인 1973년 여의도광장에서 열렸던 빌리 그레이엄목사의 부흥집회이다. 이때 100만 명의 성도가 모여 기도했다. ‘광장 부흥회’의 전형을 보여주는 모습으로 한국의 역사에서 이렇게 한 종교의 행사에 100만이라는 신도가 모인 것은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이후 이러한 광장 부흥회에 수십만의 성도가 운집해서 기도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하나의 일상과 같았다. 이를 통해 새로운 결신자가 계속 생겼고, 이에 따라 한국교회는 가파르게 성장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광장 부흥회의 전통을 다시 살리는 일에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그래서 광장 부흥회 운동을 전면에서 이끌었던 조용기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는 “한국교회 1천만 성도가 광장에서 모두 모여 함께 회개하며 기도하는 일은 지금도 가능하다. 왜내하면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역설하고 있다.   한국 부흥운동의 절정과 쇠퇴 한국교회가 그동안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탁월한 영성을 갖춘 ‘부흥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교회 초창기에 장로교에서는 길선주목사, 감리교에서는 이용도목사, 성결교에서는 이성봉목사 등이 전국을 돌며 부흥회를 인도했고,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교인이 됐다. 한마디로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던 것이다. 이후 새로운 부흥사 세대가 등장했다. 조용기목사, 한경직목사, 신현균목사, 윤석전목사 등 카리스마적 능력을 갖춘 부흥사들의 활약으로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최고의 절정기를 맞게 됐다. 이를 통해 한국교회의 성장 곡선은 계속해서 상승했다. 어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면 주변의 많은 성도들이 함께 참여해서 ‘은혜를 받는 것’은 아주 흔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2000년 대 들어서면서부터 부흥운동은 점차 그 활력을 잃어가게 됐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부흥운동을 이끌고 갈 다음 세대가 준비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전형준교수(백석대 실천신학)는 “부흥운동은 그 중심에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있기 마련이다.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이분들이 주도했다. 그런데 부흥운동의 열기를 절정으로 이끌었던 부흥사 2세대가 은퇴하고 별세하면서 공백이 생겼고, 이 공백을 바르게 메우지 못했다. 여기서 부흥운동의 열기가 퇴조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이른바 부흥사의 윤리적 타락이다. 사실 한국교회에서 ‘부흥사’에 대한 특별한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교단에서 특별하게 기준을 두고 관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보니 곳곳에서 많은 부흥사들이 생겨났고, 이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됐다. 대표적인 것이 윤리적 문제이다. 부흥회를 하면서 부흥사들이 돈 문제, 여자 문제 등에 결부되게 된 것이다. ‘성령충만’을 누구보다 강조하는 부흥사들이 성령충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행위를 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기독교부흥협희회(한기부) 직전 대표회장을 역임한 윤보환감독은 “민족의 암흑기 때 부흥사들이 힘을 불어 넣었는데 우리 부흥사들이 그런 역할을 다시 잘 감당하길 원한다”며, “영적 부흥운동에 앞장서는 부흥사는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성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기부 대표회장 임준식목사 역시 일부 ‘저질 부흥사’의 문제를 지적하며 “한기부가 더욱 성령운동에 매진해 한국교회와 세계를 살리는 사명을 힘차게 감당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따라서 좀 더 체계적으로 ‘부흥운동 사역자’를 발굴하고 육성해야할 필요성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한기부 같은 연합단체에서 합리적인 프로그램을 만들고 운영한다면 한국교회이 부흥운동은 새로운 전거를 다시 마련할 수 있다. 또한 교단이나 연합단체에서도 계속해서 광장에서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부르짖는 연합성회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렇게 될 때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다시 타오를 것이고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 교계종합
    • 기획
    2018-12-31
  • 신년특집. 3 2019년 교회연합운동의 전망과 과제
     중심으로 급부상한 ‘한교총’은 ‘한기총’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3.1운동 100주년’에 각 단체들의 연합으로 행사 가져야    지난 해 교회연합운동의 흐름을 살폈을 때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은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의 대약진과 안정화를 꼽을 수 있다. 반면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개신교의 ‘맹주’ 역할을 하던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은 세와 영향력 면에서 예전 같지 못하다. ‘신흥 강자’ 한교총과 ‘전통의 강자’ 한기총 사이에서 지난해 말 한국기독교연합에서 다시 ‘한국교회연합’으로 바꾼 한교연은 어정쩡한 모양새다. 올해 출범 3년째를 맞는 한교총이 명실상부한 한국교회의 대표적 연합기관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개신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와 한교총의 양대 대표기구로 재편될 전망이다. 한편 교단 중심의 연합과 함께 지역의 교회들이 연합하는 방식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교단 중심이 ‘위로부터의 연합’이라면, 교회 중심은 지역의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연합이다. 이 방향이 서로 조합을 잘 이룰 때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가시적 성과를 낼 수 있다.   3년차의 한교총, 최대 연합기관으로 성장 한교총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 전체교회의 90%가 가입돼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주장은 ‘이론상’으로는 틀린 것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한국교회의 ‘빅3교단’인 예장합동과 예장통합과 기감이 한교총의 중심이다. 여기에 백석, 고신, 합신, 개혁 등 주요 장로교단과 기독교성결총회, 예수교성결 총회, 나사렛성결 총회 등 성결교단과 그리스도의교회, 루터교회 등도 가입한 상태이다. 게다가 지난 해 12월 통합총회를 개최했던 기하성(여의도 측과 서대문 측) 교단 역시 합류할 것으로 관측된다. 한교총 빼고 나면 한국에는 기독교장로회만 남는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지난 해 12월 6일 한교총은 제2차 정기총회를 갖고 성공적으로 지도부를 개편하는 데 성공했다. 새 공동대표회장에 이승희목사(예장합동 총회장), 박종철목사(기침 총회장), 김성복목사(예장고신 총회장)를 추대했다. 또 공동대표회장단과 함께 주요 의사결정 조직인 11명의 상임회장단도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잡음’이나 ‘불상사’도 없었다. 교단 크기에 상관없이 회원교단의 수장이 돌아가면서 지도부를 구성하다보니 과거 한기총이 보여주던 ‘금권선거’ 시비 같은 구태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평이다. 게다가 한교총은 △민족의 화해, 조국의 평화공존과 통일을 위해 헌신 △사회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어려운 이웃 돌봄 △병역거부자로 인해 발생하는 역차별 우려 △동성애 옹호하는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 반대 △헌법적 가치인 종교의 자유 수호 △새로운 한국교회 연합운동 추진을 천명함으로써 ‘덩치’만이 불린 것이 아니라 ‘생각’도 제대로 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있어서 한교총은 그 이전의 한기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한교총의 미래가 장밋빛 일색만은 아니다. 가입교단의 신학적 스펙트럼이 넓다보니 민감한 이슈에 있어서는 교단의 ‘색깔’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핫이슈’가 바로 차별금지법이다. 한교총은 공식적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한다고 천명했다. 반면 교회협은 인권을 내세워 차별금지법에 긍정하는 입장이다. 문제는 두 연합기관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통합과 기감 같은 ‘이중가입 교단’이다. 여기에 집단지도부 체제는 내부의 지나친 ‘권력투쟁’을 근본적으로 없앤다는 장점이 있지만 책임소재가 불분명하고 긴급한 사안에 대해 빠르게 대처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게다가 교단장의 임기는 보통 1년이다. 그래서 1년 동안 대표회장으로 ‘얼굴’만 비추다가 물러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당연히 통일적이고 지속적인 연합사업을 추진하기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회협처럼 확실한 임기와 권한을 갖는 ‘총무’ 중심으로 지도체제를 꾸려야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대세’ 한교총은 한기총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익명을 요구한 ‘교회개혁연대’의 한 관계자는 “이제 한기총은 사실상 군소교단 연합체이다”고 잘라 말했다. 역시 익명을 요구한 한기총의 한 관계자는 “그나마 있는 회원 교단도 다들 어렵다보니 회비도 잘 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기총의 약화는 올해 더 가속될 전망이다. 한기총의 ‘대안’임을 부르짖으며 호기롭게 등장했던 한교연은 그 동안 수차례 한교총과의 통합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두 기관의 통합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통합될 가능성을 높게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중요한 것은 ‘대세’인 한교총에게 한기총과 한교연은 ‘반면교사’라는 점이다. 한국교회의 원로 김명혁박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교회의 건강한 일치와 연합을 위해 한교총은 한기총의 실패를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기총의 주축이던 합동과 통합이 한기총을 탈퇴한 ‘공식적’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단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금권선거 문제였다. 물론 ‘교단정치’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해보려는 개인적 욕망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두 교단이 ‘이혼장’에 도장을 찍으며 내건 이유는 이단과 금권선거였다. 한기총의 ‘이단 시비’는 지난 해 12월 ‘한국교회의 밤’ 행사에서 또 한 번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날 한기총은 교회발전에 공이 있다며 여러 수상자를 발표했고, 이 명단에 류광수목사가 올랐다. 그런데 류목사는 예장합동이 신학적으로 문제 삼는 대표적인 ‘이단’이다. 이에 대해 한 합동측 관계자는 “우리가 이단으로 규정한 집단에게 버젓이 상을 주는 한기총과 어떻게 손을 잡을 수가 있겠냐”며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일부에서는 대형교단의 탈퇴로 재정이 어려워지자 한기총이 이단으로 규정된 집단과 ‘뒷거래’를 하고 있다는 소문마저 들리고 있다. 한기총의 또 다른 문제는 각종 금권선거이다. 대표회장 자리를 놓고 돈으로 표를 사는 바람에 교회가 세상정치보다 더 하다는 조롱을 샀다. 곳곳에서 한기총의 금권선거에 대한 비난과 비판이 이어졌고 결국 이 문제는 한기총에서 당시 한교연이 갈라져나가는 ‘방아쇠’가 되고 말았다는 분석이다. 따라서 교회협과 함께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연합기관으로 자리를 잡은 한교총은 한기총의 추락에서 값진 교훈을 얻어야 한다. 무엇보다 금권선거라는 구태를 완전히 벗어던져야 한다. 다행인 것은 한교총이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교단 크기에 상관없이 교단장이 돌아가면서 대표회장을 맡다보니 금권선거는 발붙일 틈이 없다. 이런 점에서 한교총은 한기총의 추락에서 많은 것을 배운 셈이다. 또한 한교총은 신학의 문제에 전략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한교총은 ‘한기총이 무분별하게 이단을 풀어준다’고 강하게 성토하면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단을 풀어준다면 결국 같은 이단’이라는 것이 한교총의 논리이다. 그러나 한교총 내부의 신학 차이는 ‘숨어 있는 폭탄’과도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WCC 문제가 내부에서 불거진다면 한교총은 다시 사분오열될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예장합동 증경총회장 김선규목사는 2017년 한교총에 가입할 당시 교단내부의 반발을 의식해 “한교총에 참여한다고 우리 합동의 신학과 전통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연합해 대응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 때문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적극 해명한 바 있다. 따라서 한교총이 성공하려면 내부에 잠재돼 있는 신학적 차이 또는 대립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라는 고도의 전략적 사고와 정치력이 필요하다. 특히 한교총이 지도부가 이러한 실험에 성공한다면 한교총은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교회협과 한교총 함께 ‘3.1운동 100주년’ 행사 교회협은 여전히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중요한 한 축이다. 교회협은 세계교회협의(WCC)의 일원으로서 한국에서 에큐메니칼 정신에 입각한 진보적 신학을 대표한다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가입교단은 통합, 기감, 기장, 구세군, 성공회, 루터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한국복음교단, 한국정교회 대교구 등 9개 교단이다. 그런데 교회협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통합과 기감은 한교총에도 가입한 상태이다. 이른바 ‘이중 가입’을 한 것이다. 교회협 입장에서 보자면 반가울 리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한교총과 교회협의 ‘공통집합’인 이 두 교단은 한국교회의 연합에서 있어서 일종의 ‘캐스팅보트’의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관측된다. 한마디로 통합과 기감이 없는 교회협 또는 한교총은 그 존재감이 전혀 다르게 된다. 따라서 두 교단은 교회협과 한교총이라는 한국교회 연합기구의 양대 축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이 역할의 첫 시험대는 ‘3.1운동 백주년’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매우 의미 깊은 해이다. 이 행사를 위해 교회협은 이미 2017년 11월부터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계속해서 준비작업을 벌여왔다. 한국YMCA전국연맹, 한국YWCA연합회가 함께 조직한 ‘한국기독교3.1운동100주년위원회(위원장=윤경로)’가 중심에 서 있으며 올해 100주년 예배를 통해 다시 한 번 한국교회의 화합을 이룰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한교총도 마찬가지이다. 한교총 관계자는 지난 해 12월 “한국교회 3.1운동 100주년 기념예배는 한국교회 전체 교단이 참여하는 기념예배로서 3.1운동의 정신과 내용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행사로 준비 중”이며, “이 공동예배는 한교총 회원교단 소속 전국 5만 4천여 교회가 2019년 2월 24일 주일예배를 3.1절 기념예배로 드리면서 설교문 및 대표기도문, 선언문을 공유하는 방향으로 준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교총이라는 이름 아래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등의 교파가 하나가 돼 함께 대한민국과 한국교회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고 값진 일이다. 그러나 교회협과 한교총이 함께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교회협과 한교총이 독자적으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 지금 당장 함께 하는 행사를 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촉박하다. 그러나 두 기관의 수장들이 모여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에 대한 공통의 의견을 모으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지역과 교회 중심의 연합 중앙의 교단 중심의 연합운동도 중요하지만 지역의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연합운동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또 한국의 많은 지역에서는 한기총이니 한교총이니 하는 교단중심 연합 기관에 상관없이 상당히 자율적으로 지역 기독교연합회를 결성해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대표적인 모델이 서울 염리동의 교회연합회이다. 이곳은 서울의 대표적인 재개발 지역에 속한다. 새로운 아파트가 분양되면서 많은 사람이 이사했다. 그런데 이 지역의 교회들은 각자 교회의 전도지를 돌리지 않고 연합회 차원에서 함께 자기 교회를 소개하는 전도지를 만들어 돌리는 사역을 전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광염교회 김창주목사는 “서로 경쟁하지 않고 함께 공통의 전도지를 만들어 돌리니 받는 사람들도 반응이 훨씬 좋은 것 같다. 지역에서 이런 움직임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교단 중심의 연합도 중요하지만 지역의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연합활동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례이다. 이렇게 위로부터의 연합과 아래로부터의 연합이 함께 될 때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은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 교계종합
    • 기획
    2018-12-31
  • [송년특집] 2018 사건일지 10대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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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계종합
    • 기획
    2018-12-27
  • [송년특집] 2018 사건일지 10대 뉴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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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계종합
    • 기획
    2018-12-27
  • 기독교문화, 대중화된 콘텐츠 보급 필요
      뉴미디어 시대, 정보화시대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다양한 문화와 매체 속에서 각각 개인의 선호에 따라 매체를 선택하고 문화를 향유한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기독교문화는 부흥했다. 국내 CCM시장은 큰 호황을 맞았고 뮤지컬, 연극 등 각종 기독교 공연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기독교잡지도 발간되었다. 하지만 2010년대에 들어와 기독교문화 시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CCM 기획사들은 문을 닫았고 기독교잡지들도 상당 수 폐간 내지는 휴간 상태에 돌입했다. 기독교 뮤지컬이나 연극 등의 공연 소식도 예전과 같이 빈번하게 들려오지 않고 있다.   과거 문화의 선구자 역할을 담당했던 교회는 이제 대중문화의 파도에 밀려 뒷전으로 밀려나 점점 그 힘을 잃게 되어 이제는 교회가 대중문화를 따라가는 역전에 이르게 됐다. 대중문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침투해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기독교 복음과 메시지를 전하는 기독교문화는 외면 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기독교문화는 효과적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하고, 문화의 변화 속에서 과연 기독교문화는 시대에 맞는 콘텐츠를 생산해내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교인들만 소비하는 기독교문화 기독교문화는 교인들만 소비하는 특성이 강하다. 그러나 문화의 주 소비자층인 10대와 20대가 교회 내에서 점차 감소하고 있어 기독교문화산업은 더욱 큰 어려움을 맞고 있다. 전반적으로 한국교회 교인수가 감소되고, 교인들의 연령대가 노령화되면서 기독교문화의 수요는 더욱 줄고 있는 실정이다. 2005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1995년에 비해 기독교인 10〜24세 60만명이 교회를 떠났다. 또한 지난 2017년 한국갤럽은 ‘한국인의 종교’에서 20대 기독교 인구는 10년 전에 비해 5% 포인트 낮은 18%라고 발표했다.    이렇게 수요가 줄게 되면 문화를 생산할 때 질 높은 콘텐츠를 만들기 어려워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나니아의 옷장’이라는 공간을 통해 기독교문화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이재윤목사(주님의숲교회)는 좋은 기독교 콘텐츠가 나오기 위해서는 콘텐츠에 정당한 값을 매기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전했다.   이목사는 “수백 회의 공연을 진행하며 느끼는 점은 요즘 사람들은 싸게 판다고 더 많이 공연을 보러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티켓 값이 쌀수록 공연을 얕잡아보고 보러오지 않는 경향마저 있다”며, “요즘 사람들은 취향이 확실하다. 관심이 없으면 공짜표를 줘도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크리스찬 문화콘텐츠 창작자들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정당한 가격을 매기고 당당히 소비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모인 금액으로 더 질 높은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재투자하면 될 것이다”고 전했다.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 시급 기독교문화는 그동안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가치를 추구하고 인내, 겸손, 사랑, 신뢰 등의 덕목을 바탕으로 만들어져왔다. 이것에 기반하여 만들어지는 기독교문화도 이러한 가치관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창의적이고 과감한 도전보다 원초적이고 반복적인 메시지 전달을 하기에 급급했다. 기독교라는 절대 진리와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특성이 있지만, 기독교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콘텐츠와 성경 속 이야기가 주를 이뤄 대중들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했다.   영화 「노아」, 「바울」, 「막달라마리아」, 「벤허」 등 성경인물로 한 영화들은 작품성과 배우들의 연기는 인정 받았지만 기독교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비기독교인들에게는 다가가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기독교 공연들도 기존의 성경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면서 대중들의 이목을 끌지는 못했다.     대중적 기독교 문화공간 창출 기독교문화사역단체 소금당의 신경재대표는 기독교의 문화선교가 더욱 활발히 일어나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신대표는 “우리는 전도에 있어 너무 1차원적으로 접근하지 않나 싶다. 안 믿는 분들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우리가 맞춰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진리’라고 말하면서, 우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기독교문화가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소명을 실천할 수 있는 인력을 양성하여 경쟁력 있는 기독교 문화산업 개발이 가능하도록 지원이 필요하다. 신대표는 기독교문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사역자를 키워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 기독교에 가장 필요한 부분은 ‘육성’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문화 분야에서는 교회에서의 육성 체계가 전혀 없다. 방송사 등에서 CCM 오디션을 하지만, 기업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며, “서로 어려운 가운데 돕는 것과 재단이 있는 것은 전혀 다르다. 육성과 발굴은 자원이 있는 곳에서 해야 한다. 일반 문화계에서 CJ가 문화에 전폭적으로 투자하듯 문화로 복음을 전하고 싶어하는 곳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몇몇 기독교단체들은 기독교의 가치관을 기반으로 하면서, 대중문화를 접목하여 비기독교인들도 참여할 수 있는 문화매체와 문화공간을 만들었다. 서울 신촌에 위치한 필름포럼(대표=성 현)은 영화관이자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독교신앙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를 선정하여 상영하는 영화관의 기능과, 카페와 갤러리,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의 기능을 동시에 하고 있다. 특히 필름포럼은 매년 ‘서울국제사랑영화제’를 열면서, ‘사랑’을 바탕으로 제작된 예술영화들을 소개하며 간접적으로 기독교의 가치인 사랑을 전하고 있다. 필름포럼 대표 성 현박사는 “필름포럼이라는 공간은 신앙의 구도자들과 ‘가나안’ 성도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필요와 이곳에서 누리는 혜택 때문에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곳이다”며, “필름포럼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와 복음 선포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지만, 교회 밖 환대 공간으로 역할을 적극 감당하고 싶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처음부터 기독교인이 아니거나 어떤 이유로든 교회를 더 이상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필름포럼에 오면, 자연스럽게 필름포럼이 표방하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마주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또한 문화행동 아트리(대표=김관영목사)는 전문화된 문화사역으로 공연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다.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기독뮤지컬전용관 ‘작은극장 광야’에서 복음의 메시지와 대중성이 가미된 창작뮤지컬을 제작하여 무대에 올리고 있다. 특히 성경적 배경의 스토리였던 기존의 기독교뮤지컬과는 달리 현대의 배경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을 법한 상황들을 스토리로 삼아 대중들의 공감과 흥미를 이끌어내고 있다.     기독교문화의 대중화 필요성 이처럼 기독교문화는 교회 내에서만 소비되고, 교인들만 이해할 수 있는 콘텐츠로 제작되기 보다 좀 더 세상 가운데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는 대중문화가 자리잡고 있지만, 기독교만이 가진 가치관으로 세상의 대중문화를 변혁시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또한 기독교문화를 통해 교회도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문화의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   이제 기독교문화는 세상 속에서 세상의 언어로 통용될 수 있는 열린 문화로서 나아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 시대의 언어로 각색해내는데 최선의 도구로서 존재해야 될 것이다. 또한 기독교문화는 더 이상 기독교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로 거듭나야 한다. 기독교
    • 교계종합
    • 기획
    2018-10-21
  • 고사 위기 기독교 대학들, "혁신만이 살길이다"
     2034년까지 전국 180여개 대학 중 70여개 대학 폐교위기 종교학교 인식에 학생들 지원 기피, 해외 학생교류도 제한   ▲ 올해부터 대학정원이 고교졸업자수를 초과하면서 대학간 학생모집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출생아수는 35만7700명으로 1970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사상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40만6200명)보다 4만8500명(11.9%) 줄어든 것으로 출생아수가 40만명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감소가 여러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가운데, 학령인구 감소로 인해 대학간 학생을 선점하기 위한 무한 경쟁체제가 날이 갈수록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이는 학생부족으로 인한 재정난으로 대학운영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학과존폐의 위기를 넘어 대학이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심각한 사태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과 같은 저출산 기조가 계속 이어질 경우 2034년에 이르면 전국 180여개 대학 중 70여 대학이 폐교 될 것으로 예상되어 교육부 대학평가와 더불어 각 대학들은 사활을 걸고 대학 체질개선과 경쟁력 확보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당장 올해부터 고교 졸업자가 대학의 입학정원을 초과한 상태로, 2023년에는 고교졸업자가 40만명에 불과할 것이라는 통계도 나온 상태다. 대학 입학정원 대비 16만명이 부족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 상황에서 올해 각 대학들은 2019학년도 학생모집에서 정원을 채우는 일이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특히 대학별로 미달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학과 홍보를 비롯하여 고교방문을 통해 입학생을 모집하는 등 학생모집에 비상을 걸고 대책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일부 대학들은 지난해 정시모집에서 미달사태가 일어나 추가모집을 통해 정원을 채운 경험으로 올해는 더욱 절실히 정원 채우기에 나서고 있다.    대학 간 학생확보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현실에서 기독교 대학들은 일반대학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다. 학생수 감소와 경쟁력 하락으로 인해 고사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학과 학생 지원율은 물론 신학과에 지원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급감하면서 학교운영이 어려워지고, 이에 따라 정부의 재정지원대상에서도 제외되는 등 이중고를 겪고 있다.   종교대학 이미지로 학생모집 난항   이들 대학의 가장 큰 문제는 기독교적 교명으로 인해 학생들이 종교인 양성기관으로 인식하면서 지원을 기피하는 등 학생모집 자체가 힘들다는 점에 있다. 신학과가 아닌 일반학과 학생모집도 어려워지고 있으며  입시 경쟁률도 매년 하락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정시에서 각 기독교 대학들의 신학과 지원율이 감신대(0.99:1)를 비롯하여 한영대(0.81:1) 고신대(0.92:1) 침신대(0.79:1) 아신대(0.81:1) 등으로 낮은 경쟁률을 보여 일반학과에 비해 더욱 지원자 수가 적었다.   이처럼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고자 수년전부터 기독교 대학들이 적극 활로로 삼고 있는 대안 중 하나는 해외 유학생 유치다. 10년 전 8만여명 규모였던 외국인 유학생 수는 지난해 10만여명이 넘게 증가되는 등 국내 외국인 유학생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학생자원 감소를 외국인 학생들로 채운다는 것이다.   이같은 전략은 대학 입학생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2주기 대학구조 개혁에서 대학 정원수를 감축하겠다고 발표한 교육부가 정원 외 순수 외국인 입학생에 해당하는 외국인 신입학생의 경우 교육부의 정원 감축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 더욱 강화됐다.   해외 유학생 모집은 원활한 학생모집 방법으로 수년간 기독교 대학들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으나, 최근 이 또한 암초를 만났다. 현재 국가별 외국인 유학생 유치 현황을 보면 중국과 일본, 대만, 미국 순으로 외국인 학생의 분포가 아시아 대륙에서 거의 85%를 차지할 정도로 편중 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한국대학을 찾는 중국 유학생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많은 상황에서 최근 중국정부가 반 기독교 정책으로 기독교 학교들과의 학생교류를 금지하면서 유학생들의 발길이 끊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내 몇몇 기독교 대학들은 중국유학생들과의 교류를 위해 수년전까지 학생교류를 비롯한 다양한 학사관리를 해왔으나, 최근 기독교 대학에 학생 유학을 금지한 중국정부로 인해 번번히 유학생 유치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이들이 기독교 대학이 아닌 일반 종합대학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기독교 대학들은 일반종합대학에 비해 더욱 경영난에 처한 상태다.   취업시장에서 상대적으로 불리   학생모집 뿐아니라 취업시장에서도 기독교 대학들은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과거 기독교 대학들은 신학과 학생들이 일반대학과 다른 특수성으로 인해 졸업 후 교회에서 일하며 4대보험 등을 적용받지 못하면서 취업률 통계에서 빠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교회 인력을 양성하는 학과의 특수성이 단순히 직장 건강보험 데이터베이스만을 토대로 산정되는 취업률 등에 반영되지 않으면서 대외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취업률에 민감한 예비대학생들이 지원을 꺼리는 원인이 된 것이다.   ▲ 취업시장에서 종교대학 학생들은 종교적 편견으로 인해 일반대학에 비해 차별받고 있다고 답했다.   실제로 취업난으로 인해 취업정보를 활발히 공유하는 취업포털 카페에는 이같은 고민을 털어놓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취준생 카페에서 활동하는 A학생은 “기독교 재단이 운영하는 대학에 재학 중인데 나는 종교가 없다. 신학과도 아니라 일반학과다. 이제 4학년인데 종교적 편견으로 다른 일반대학 출신 학생들에 비해 면접에서 불리할까봐 걱정이다”라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기독교 학생들 사이에서도 취업에 대한 불안감이 감돌고 있다. 대전의 기독교 대학 재활상담학과에 재학 중인 김소은씨는 “주위의 동기나 선후배들에게 종교대학 이미지가 강한 학교라 아무래도 취업에 불리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학교 특성상 채플과 기독교 관련 수업을 필수로 들어야 하는데 기업 인사담당자가 안 좋게 볼까봐 걱정이다”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특성화로 대학경쟁력 확보 시도   이처럼 대외적 여건이 어려운 가운데에도 일부 기독교 대학들은 정원에 비해 부족한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해 대학운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미래에도 대학의 존속을 위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추진 중이다.   특히 생존을 위한 활로로 대학 특성화를 추진하고 있는 대학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대학 특성화를 살리는 것만이 교육개방의 장벽을 넘고 경쟁력 있는 대학으로 발돋움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공감대에 따른 것으로, 대학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대학의 전문적인 분야를 특성화시키고 집중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고신대의 경우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의과대학인증 평가인증에서도 6년(2014년 2월∼2020년 2월)을 획득해 의학교육의 경쟁력 강화 및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동대도 지속가능 에너지·환경 융합부분을 특성화 하고 있다. 특성화 융합 교육과정 성과 관리와 교수법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운용하고 융합 교육 교수법 역량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나사렛대는 1995년 국내 최초로 신설된 인간재활학과를 비롯해 재활공학, 언어치료, 수화통역, 심리재활, 특수체육, 특수교육, 사회복지 등 복지와 재활 분야 학과를 중점적으로 개설해 장애인 재활복지와 인권분야 전문대학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한영대는 재활복지에서 미래비전을 찾고 있다. 재활복지학과를 신설하고, 아동학과를 유아특수재활학과로, 상담심리학과는 재활상담심리학로 각각 이름을 바꾸는 등 재활복지 선도에 앞장선다는 계획이다.   △한세대 또한 2014년 국내 최초로 산업보안학과를 개설하는 등 산업보안 커리큘럼 개발과 실무형·현장형 교육, 산업보안실습실 마련 및 디지털 포렌식, 물리보안 시뮬레이터 등 실습장비 구축 등 보안분야에서 특성화 교육에 주력하고 있다.   △서울기독대는 ‘휴먼서비스’를 기반으로 한 특성화를 추진하고 있다. 신학과와 상담학과 사회복지학과 예체능학과 간의 융합을 통해 복지 콘텐츠를 개발한다는 것이다.   탄력있는 대학운영의 자율성 중요   전문가들은 기독교 대학들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대학교육시스템의 유연성 제고와 자율성 확대 △대학별 기능과 역할에 대한 재검토와 특성화 △교수법 개선과 문제해결능력 통한 융합교육 강화 △대학의 자원공유와 통합 △대학의 국제경쟁력 확보와 입학자원 확대 등을 제시하고 있다.   저출산으로 사회경제의 축소와 생산력 저하로 인해 대학이 학령인구 감소와 학생들의 취업난 문제를 동시에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와 같은 교육시스템으로는 미래사회의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하며 학생구성과 학과의 입학 및 학과의 전·출입 등을 자유롭게 설계하고 탄력있는 운용이 가능하도록 대학교육시스템의 유연성 제고가 필수적임을 뜻한다.   특히 대학별로 주어진 여건과 환경에 따라 인재상을 구체화 및 재정립하여 특화된 인재를 육성해야 하며, 부족한 입학자원은 해외 유학생의 유치·충원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또한 기독교대학의 정체성은 살리면서 비 기독교 학생들도 모집할 수 있는 이미지 변화도 필수적임을 지적하고, 현재도 많은 유학생이 국내 대학에 진학하고 있으나 기독교 대학들이 선교적 관점에서 양적 질적 확대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 교계종합
    • 기획
    2018-07-24
  • 학생모집·대외협력 위해 ‘기독’, ‘신학’ 등 교명 변경하는 대학 증가
    교직원과 학생, 동문들 대상으로 공모전과 공청회 등 개최 “입학자원 감소에 따른 대학의 위기극복 위한 최선의 선택” ▲ 기독교 대학들은 종교적 편견을 극복하고 대학 경쟁력 확보와 원활한 학생수급을 위해 교명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의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듀크, 다트머스, 보스톤, 그리고 영국의 옥스퍼드, 캠브리지 대학 등과 같이 세계 유명 대학들은 신학대학에서 시작하여 세계적인 명문으로 성장했다. 한국도 연세대와 한양대, 이화여대, 숭실대 등 초기 창립정신이 기독교 정신에 기반하여 설립된 대학들은 현재까지도 이 같은 설립정신을 바탕으로 종합대학으로 자리매김한 경우다. 이러한 현실에서 출산율 저하로 인한 입학자원 감소와 대학 간 무한경쟁의 심화, 수업연한의 다양화, 대학구조개혁 등으로 큰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현실에서 중소규모의 기독교 대학들은 대학 경쟁력 높이기 위한 노력에 사활을 걸고 있다.     특히 ‘특성화학과 중심의 경쟁력 강화’, ‘취업중심대학으로 도약’,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대학’ 등 발전을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하고 있으나, 현재까지 ‘신학’이나 ‘기독교’ 관련 교명을 가진 대학들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종교적 편견으로 인해 학생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등 학교경영 차원에서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일부 기독교 대학들은 종교인 양성기관 이미지가 강한 교명으로 인해 정부와의 협력사업 등에서 후순위로 밀리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어, 점차 치열해지고 있는 대학 간 경쟁과 대외적 인지도 상승, 브랜드화를 위한 ‘교명 변경’이 각 대학별로 활발히 논의중이다.     대학가에 불고 있는 교명 변경 바람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구)그리스도대학교는 지난 2015년 교명을 KC대로 바꿔 달았다. 이미 1995년 신학대에서 종합대로 승격한 뒤 20년이 지났지만 교명이 이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판단에서다.   대학측은 “개교 당시 신학교로 출발했지만 이후 여러 학과가 개설되면서 종합대로 승격됐지만 ‘그리스도대’란 이름 때문에 여전히 신학대란 이미지가 강해 KC대로 변경하게 됐다”며, “신학대학의 이미지가 강해 MOU체결이나 학생 취업시 불리한 점이 많았다”고 변경 이유를 설명했다.   (구)한영신학대학교도 2017년 서울한영대학교(총장=한영훈목사)로 교명을 변경했다. (구)한영신대는 교육부의 최종 승인을 얻어 지난해부터 새 교명을 사용하고 있다. 동 대학은 교명 변경을 통해 인재확보와 경쟁력 제고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교명 변경은 변경된 새 이름의 홍보와 이미지 구축에 따른 브랜드 상승의 장점과 타 대학의 차별화에 큰 이점 있다. 역사적으로 교명을 변경한 기독교 대학교는 △조선신학대->한신대 △광주신학교->광신대 △천안대->백석대 △계명기독대->계명대 △대전신학대->목원대 △피어선대->평택대 △천신신학교->성공회대 △순복음신학교->한세대 △장로회신학교->총신대 △그리스도대->KC대 △한영신대->서울한영대 등이다. 교명을 변경한 대학들은 공통적으로 신학대학의 이미지를 뺀 명칭을 선택했고, 종교적 이미지 대신 종합대학의 느낌을 강화했다.   교명을 변경하는 것은 신학대학 뿐 아니라 일반대학에서도 꾸준하게 시도되었던 일이다. 종교적 고정관념으로 인해 교명 변경을 추진한 기독교 대학들처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대’란 이름에서 일반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한 대학들도 많다.   상명대는 1937년 세워진 상명여자고등기예학원이 모체로, 1983년 사범대학에서 일반대학으로 전환됐다. 이후 상명여자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으며, 1996년 교명을 현재 이름으로 변경했다. 세종대는 1940년 5월 경성인문학원에서 1954년 2년제 수도여자사범대학으로 개편했다가 1979년 남녀공학으로 개편하면서 세종대학으로 이름을 개칭했다.   신라대는 1954년 설립된 부산여자대숙을 시작으로 1964년 부산여자초급대학을 거쳐 1969년 부산여자대학으로 승격했다. 1997년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면서 교명을 신라대로 바꿨다. 한성대는 1972년 한성여자대학에서 교명을 한성대학으로 변경했다.   최근 성신대학교로 교명 변경을 추진하고 있는 성신여자대학교 김봉수학생처장은 교명 변경의 당위성에 대해 “대학의 이름을 바꾸려는 것은 지금까지 해 오던 관행에서 벗어나 전 세계 모든 대학과 경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며 교명 변경이 새로운 대학경쟁력의 확보의 방안으로 여겨질 수 있음을 강조했다.   종교대학에서 특성화대학으로 성장   교명 변경을 선택한 대학은 길게는 수십 년 쌓아온 대학 이미지를 포기하고 새로운 대학 이름 홍보를 위해 예산과 행정인력을 투입해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럼에도 이같은 시도가 이어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대학의 위기 극복을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명을 변경하면서까지 종합대학화를 시도하는 신학대학들이 증가하고 있는 이유에 관해 대학 관계자들은 현대에는 신학만으로는 대학으로서의 경쟁력을 확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최근 교명을 변경한 모 대학 관계자는 “교명을 변경하는 것은 큰 모험이지만 학생 수 감소에 따른 대학의 위기극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일 수 밖에 없다”며, “정부의 대학정책 방향에 부응하고 기존의 종교대학에서 벗어나 특성화 대학으로 성장해 나가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다”라고 전했다.   단순한 ‘신학대’가 아닌 신학을 중심으로 학문의 폭을 넓혀 다방면의 인재를 양성하는 ‘기독교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명 변경으로 입시경쟁률이 높아진 학교로 백석대가 있다. (구)천안대학교였던 동 대학은 교명 변경당시 교명 변경을 위해 재학생과 동문, 교직원 등 총 6천 4백 30명이 교명 변경 공모 내용을 조회하고 참여하여 타 교명에 비해 압도적 지지를 얻은 ‘백석대학교’를 최종 선정했다.   서울신학대학교도 오랫동안 교명 변경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2010년 개교 백주년을 맞아 교명 변경을 고려했으며, 지난 2015년에도 당시 유석성총장이 “글로벌 기독교 대학에 걸맞는 학교 이름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히며, “‘신학 대학’이라는 이름 때문에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종교대학으로 스스로 이름에 갇히기보다는 좀 더 열린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라는 의견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경영과 기독교정신 두 마리 토끼 잡아야 일반대학보다 기독교 대학의 경우 신앙 정체성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교명 변경에 더욱 신중한 입장이다. 대학 경영과 기독교 정신 모두를 발전시키며 계승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교명 변경 공청회를 개최한 서울기독대학교(총장=이강평목사)도 1928년 10월 9일에 개교한 미국 호프국제대학교의 전신인 (구)태평양 성경신학교가 교명을 변경하면서 크게 성장한 모습을 들어 대학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 미국 호프국제대학교 이강평총장은 “기독교 대학의 목적은 복음화에 있다. 안 믿는 학생들이 공부하며 영성과 지성, 덕성이 기독교화되는 것이 참된 신앙교육이다”며 “일반 학생들이 ‘기독’이나 ‘신학’등의 교명으로 인해 지원을 망설이는 경우가 상당하다. 인구절벽 시대를 맞아 기독교 학생만 지원하는 학교는 성장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또 “국제적으로도 기독교를 배척하는 국가의 대학과 학생교류를 추진할 때 학교이름 때문에 무산되는 경우가 많다”며, “학교이름의 종교성 여부를 떠나서 미래를 보고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커리큘럼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교계종합
    • 기획
    2018-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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