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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교단서 미자립교회 실태 보고
한국교회에 미자립교회의 비율이 커짐에 따라 목회자의 생계문제도 함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한 연구보고에 따르면 1년 예산 3,000만 원 이하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의 월 평균소득은 80만 원 이하이다. 이정도의 목회자 사례비로는 목회자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거기에 더해 대부분 교단들이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의 이중직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에 미자립교회 목회자 가정의 삶의 고충이 커져가고 있다. 이에 교단차원에서 미자립교회와 교회의 목회자 가정을 위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생활 환경을 만들기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다수의 목회자 가정 100만원 이하 사례비로 생계 유지 교단 차원의 미자립교회 목회자 최저생계비 보장 절실 ◆ 주요 교단 미자립교회 현황·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총회장=김종준목사)은 지난 2018년 교단 소속 8,637개 교회를 설문조사한 결과 3,690교회가 연간 예산 3,500만 원 이하의 미자립 상태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교단의 공식적 통계에 잡히지 않는 미자립교회도 있는 만큼 실제 비율은 이보다 높다는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단관계자는 “교단 교회 10개 중 6개는 미자립교회로 봐야한다”고 전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총회장=김태영목사)은 2018년 교단 소속 교회의 평균 자립률을 65%로 보고했다. 지역별로 보면 수도권의 경우는 2,236개 교회 중 1,460개 교회가 자립(65%)이었고, 그 절반 정도인 776개 교회는 미자립 상태(35%)였다. 반면 충청권의 경우 931개 교회 중 579개가 자립(62%), 352개가 미자립(38%%)이었고, 전라도는 2,254개 교회 중 1,377개가 자립(61%), 877개가 미자립 상태(39%)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러한 수치도 과장된 측면이 있고, 실제 합동측의 경우처럼 미자립교회의 비율이 공식적 통계보다 훨씬 높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감독회장직무대행=윤보환목사)의 경우 2019년 보고에 의하면 미자립교회의 비율은 48%에 달하며 자립교회들 중에서도 많은 교회들이 1년 예산 3,000원 만원의 자립교회 기준을 간신히 넘긴 상태였다. ◆목회자 가정 생계문제 심각·한국교회에 미자립교회가 증가됨에 따라 그에 소속된 목회자 가정의 열악한 환경이 심각한 교계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교회갱신협의회의 2017년 보고에 따르면 60%에 가까운 목회자들이 100만 원 이하의 사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019년 4인 가구 최저생계비가 약 460만 원인 것임을 감안하면 미자립교회 목회자 가정의 생계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열악한 목회환경 속에서 각 교단이 목회자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기에 목회자 스스로가 경제활동을 통해 자신의 가정을 돌보는 이중직 목회자의 수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 한 미자립교회 목회자는 “밤에 대리운전을 하고 있다. 나와 같이 밤에 운전을 하는 목회자를 찾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교회 수와 목회자 수급에 실패한 한국교회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전문기술이나 지식이 부재한 상황에서 대리운전이나 용역 등의 불안정한 직종 외에는 선택할 수 있는 직업군이 없고, 이러한 일마저도 다른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편견으로 인해 이중직을 숨기며 일하고 있는 목회자가 대다수인 현실이다. ◆교단차원의 미자립교회 지원·이에 각 교단은 미자립교회와 목회자들을 돕기 위한 단체들을 설립하고 대책마련을 위해 노력해 왔다. 합동측은 지난 2015년 100회 총회에서 미자립교회를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교회자립개발원’을 신설했고, 통합측도 지난 2007년부터 ‘교회자립위원회’라는 기구를 통해 ‘1:1 집중지원’ 방식으로 미자립교회를 지원하고 있다. 감리회도 이제까지 장정에서 금지되었던 이중직 목회를 허용하고, 목회자 처우 개선을 위해 활발한 토의를 벌이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은 많은 부분에서 부족한 지점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특히 이 문제에 관해 감리회에서 활발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는데 감리회새물결은 △교단 차원에서 목회자 최저생계비 보장 △감리회 소속 목회자 전원에 대한 사례비 교단에서 지급에 관해 연구 중에 있다. 또한 교단차원에서 이중직 목회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적극 지지하여 목회자들의 직업교육까지도 해야한다는 주장도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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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54주년 특집] 교회 신뢰상실·양적쇠퇴 등 적신호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며 한국교회는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세속화와 개인주의 문화의 발달, 번영신앙의 부흥으로 이웃사랑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정신을 잃어 사회적 신뢰도를 상실하고 있는 상황에 빠졌다. 개인·사회구원 간 균형 잡힌 신앙실천통해 교회 공공성 회복해야 135년 전 호러스 뉴턴 알렌선교사가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시작한 한국교회의 역사는 한국 근대사와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아 선교사역에 매진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신정변으로 중상을 입은 민영익의 수술을 집도한 알렌은 고종 황제의 신임을 얻어 제중원 설립을 승인받았다. 이어 입국한 언더우드가 제중원 교사를 맡고 아펜젤러가 배제학당을 설립하면서 조선 정부의 신뢰를 얻은 선교사들은 민족 복음화와 더불어 근대화를 돕는 일에 매진했다. 사농공상의 계급 사회가 지속됐던 조선 사회에 만민 평등을 부르짖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며 여성을 천대하던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께선 여성과 단둘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셨다며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진행하는 등 당대로서는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변화를 촉구했다. 서구 열강에서 유입된 종교라는 점과 선진적 기술과 의식, 제도를 바탕으로 한국사회에 빠른 속도로 정착한 기독교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도 사회적 의무를 모두 짊어지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구한말 보여 주었던 기독교의 개혁적 태도는 당대 사람들의 시선에서 매우 우호적으로 비쳤다. 이러한 인식은 기독교를 향한 신뢰와 긍정적 인식으로 이어지면서 6·25전쟁이 끝난 후 60~70년대 급격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한국교회 또한 폭발적인 양적 성장을 일구는 데에 이바지했다. 1960년대 전국에서 집계된 교회는 5천여 개로 4년 동안 치른 전쟁으로 인해 그간 쌓아 올린 물리적·인적 기반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다. 하지만 전쟁 전후 서구권 교회의 지원에 힘입어 펼친 아동·빈민 구호사역과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남기셨던 복음전파와 사랑의 실천을 위해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던 손양원목사와 문준경전도사 등 수많은 순교자의 역사가 민족적 수난으로 아픔을 겪고 있던 이들의 마음을 교회로 이끌도록 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의 대외적 이미지는 역사상 가장 좋지 않은 상태에 이르렀다. 과거와 달리 세속화와 개인주의 성향의 발달, 다양한 문화 콘텐츠의 발전으로 인한 다문화 사회로의 변이 등 한국사회는 지난 세기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와 달리 교회는 집단주의와 산업화, 관료적 위계질서 등 근대사회를 대표하는 조직으로서 비치며 반민주적이고 반개인주의적 단체로 치부된다. 이는 교인들의 내적 성장을 충분히 이루지 못한 채 양적 성장에 집중하고 일반 대중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아내지 못하는 고립화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갈수록 잃어가는 교회 신뢰도 교회의 급격한 양적 성장은 이전부터 펼쳐왔던 대민지원 등 교회사역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면서 이 사회에 계속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이로 인해 1990~2000년대 교인 수를 7~900만이라고 추산할 정도로 경이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하지만 구한말 보여 주었던 개혁적 태도만이 대중의 시선에서 매력적이라고 여긴 것은 아니었다. 1960년부터 이촌 향도 현상과 도시 밀집화, 산업화 등 급격하게 이뤄진 경제·사회적 변화는 심리적 불안감을 조성했고 몇십 년간 지속됐던 군부독재 체제 아래에서 겪었던 정치적 공포와 타성적 질서 강요 문화는 마음속에 음울한 공상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제 몸 하나 건져내기 쉽지 않았던 시절 사회적 고립감을 느끼던 이들에게 십자가는 단순히 종교적 상징을 넘어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견뎌낼 한 줄기 빛과 같은 모습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교회는 십자가의 고난과 시련을 통한 정의를 앞세우기보다 재정적 부흥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전조를 맛보는 데에 치중한 가르침을 펼쳐왔다.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이 교회에 열광하도록 했지만, 역설적으로 오늘날 교회가 겪고 있는 가장 큰 돌부리가 바로 이 점이다. 1980년대를 거치며 대한민국이 완전한 민주국가로 자리를 잡고 경제 또한 선진국 반열에 들어자 한국교회의 양적 부흥은 멈추기 시작했다. 문화·경제·정치적 발달로 인한 기성 종교의 쇠퇴는 유럽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경향이지만, 유럽교회의 양적 감소는 교회의 대외적 이미지가 손상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유럽의 경우 세속적 개인주의 문화의 발달, 신이교주의를 비롯한 대체 종교의 창립과 동양권 종교의 유입, 반종교 담론의 급증 등 여러 가지 외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와 달리 한국교회의 교인 감소 현상은 교회의 외적 이미지의 손상이 최우선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으며 이는 소위 ‘번영신앙’을 필두로 쉬쉬했던 내적 부패가 교회 공동체 바깥으로까지 노출된 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의 이미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지난 201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발표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기독교를 ‘신뢰한다’고 응답한 이는 20.2%를 기록했지만,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이는 51.2%로 두 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결과를 보여 주었다. 이는 그간 한국교회가 치켜세워왔던 대민사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한국교회가 사회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관해 묻자 응답자 중 40%도 안 되는 사람만이 이를 긍정했으며 교회 밖 세상과 잘 소통하고 있는지 묻는 말에선 38.7%만이, 사회문제 해결·사회통합에 교회가 기여하는지 묻는 질문에는 33.3%만이 긍정적이라고 응답했다. 해당 통계에 따르면 한국교회의 대외적 이미지 손상에 가장 큰 원인으로 재정 투명성을 꼽는 결과가 나온 것은 필연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가 신뢰받기 위해 시행해야 할 개선점을 선택하라는 질문에서 응답자들은 불투명한 재정사용이라는 대답에 26.1%가 긍정하며 가장 높은 선택률을 기록했다. 또한 교회 지도자의 삶이 17.2%로 교회 바깥을 향한 포용과 더불어 목회자 개인의 윤리성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던져주었다. 교회개혁을 요구하는 평신도들 새맘교회 목회 사역을 맡기도 했던 박득훈장로는 그의 저서 <돈에서 해방된 교회>를 통해 번영신앙의 모순과 문제를 지적한다. ‘많이 벌어서 좋은 일 하자’로 대표되는 번영신앙의 기저에는 하나님을 수단화하여 개인의 물리적 축복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깔려있다. 이에 관해 박장로는 ‘네 마음이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하신 첫 번째 계명이 무너지게 되어 벌어진 일이라고 풀이한다. 하나님을 향유하고 돈을 이용하는 것이 올바른 관념이지만, 돈을 향유하고자 하나님을 이용하고 이를 무마하고자 자신이 누리는 물질을 하나님의 선물이자 축복으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눈속임은 복음전파와 이웃돌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더더욱 포장되어 한국교회 곳곳에 뿌리내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교회 바깥에 있는 이웃을 위한 행동이 무엇인지 자숙하는 신앙이 상실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 때문에 교회를 질타하는 이들의 의견을 살펴보면 오늘날 교회가 제 기능을 상실한 채 교권제일주의와 목회자의 권위를 치켜세우는 데에 급급하다고 지적한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지적은 교회 바깥만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지용근대표(목회데이터연구소)는 「목사와 평신도, 인식의 갭」이란 주제로 작성한 글을 통해 오늘날 한국교회의 내적 문제가 무엇인지 분석한 바 있다. 지대표는 “한국교회에는 수만 개의 지역교회가 개교회주의라는 틀 안에서 리더인 목사와 팔로워인 평신도 간 나름의 관계성을 형성하면서 사역을 펼쳐나가고 있다”며, “어떤 교회는 목사와 평신도 간에 생각의 차이를 줄여가면서 성장해 나가기도 하고, 어떤 교회는 두 그룹 간의 차이가 심해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교회도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국민일보에서 발표한 ‘교회와 사회개혁을 위한 개신교인·목회자 여론조사’ 결과를 분석하다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며, “평신도보다 목회자 그룹에서 훨씬 더 긍정적인 인식을 보였다. 두 그룹 간의 인식을 좁히는 것이 교회개혁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다”고 덧붙였다. 해당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항목별 평가’에서 평신도 대다수가 ‘구제·봉사활동 등 대사회적 역할을 잘하고 있다’나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선다’, ‘믿지 않는 사람을 따뜻하게 대한다’, ‘목회자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잘 대응하고 있다’ 등 항목에서 적게는 23%, 많게는 32%가량 부정적으로 응답했다. 이어 한국교회의 개혁실천 과제로 우선 필요한 활동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목회자들은 ‘교인의 실제 생활에 대한 방향 제시’와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 ‘청년층을 비롯한 미래 세대 이탈 방지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던 반면 평신도는 ‘목회자 권위주의·교권주의적 태도의 변화’와 ‘자기 교회 중심에서 지역사회로 공공성 지향’, ‘양적팽창·외형중심 성장 지양’에 무게를 두었다. 이에 지대표는 “과거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통해 교회의 대형화를 이뤘던 시대를 뒤로하고 한국교회에도 ‘탈권위주의·탈교권주의’를 평신도들이 요구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며, “그러나 목회자들은 탈권위주의보다는 교인들의 실제 생활의 방향 제시를 개혁과제로 지적해 두 그룹 간 인식의 갭이 큼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끝으로 “‘기독교인의 윤리·도덕 수준’에 관한 평가에서는 평신도들은 ‘일반인보다 낮다’는 응답이 높은 반면 목회자들은 ‘일반인보다 높다’는 응답이 높았다”며, “목회자들의 이러한 인식은 교인들에게 윤리의식교육의 절실함을 갖기 어렵게 한다. 정작 교인들은 기독교인의 윤리의식이 교회 밖 사람들보다 못하다고 인식하고 있는데 말이다”고 전했다. 탈권위·탈성장적 신학교육 필요 한편 교계 곳곳에선 지금까지 관행처럼 되풀이되던 목회자 권위 강화와 개교회 제일주의적 태도를 비판하고 이를 시급히 갱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한국복음주의신학회(회장=원종천교수)에서 개최한 ‘위기시대의 목회’ 토론을 대표적인 경종으로 볼 수 있다. 토론회에 참가한 이정익목사(신촌교회 원로)는 “그간 한국교회를 비롯해 이 사회를 지배한 사고를 한 가지 손꼽아본다면 단연 경제성장 제일주의이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지금까지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생각해왔다”며, “하지만 경제성장을 우선한다는 이유로 생명과 가정, 자연환경의 파괴를 묵인하고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조장하는데 일조했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교회도 이러한 태도를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번영신학의 논리로 교회 성장을 이해했다”며, “오늘날 교회에서 읽고 되새기는 간증과 수기를 보면 대다수가 외형적 성공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를 보고 들은 교인과 목회자들이 외적 성장과 성공이 교회의 성장이자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방정식으로 이어지게 됐다”고 전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분위기가 탈권위주의로 흘러가고 있다고 강조한 이목사는 “한국기독청년협의회가 실시한 다음세대 교회·종교의식 설문조사에 따르면 오늘날 청년들은 탈권위 시대를 살아감에 있어 개인의 권위를 강조하는 교회에 남아 있을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며, “그간 교회가 품어왔던 권위주의는 성장제일주의와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여러 개발도상국이 급격한 경제적 성장을 이룬 데에는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독재정치가 바탕에 깔려있다”며, “과거 한국의 경제적 고도성장과 이촌향도 현상은 교회 급성장의 원인이 되었으며 교회에서도 카리스마를 갖춘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대형교회의 토대가 마련됐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목사는 “오늘날 교계 전반에 걸쳐 교인의 숫자가 줄어드는 데에 반해 목회자는 늘어나고 있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며, “교회는 신학을 통한 비판적 성찰 없이 교회성장제일주의에 빠지고 이를 시정해야 할 신학이 교회와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복음의 공공성 실천운동 절실 이렇듯 성장제일주의에서 벗어나 목회자 교육의 건전성을 회복하고 탈권위주의적 태도를 교회가 견지할 때에 비로소 세속화된 한국사회에서 기독교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국교회가 사회와 소통하는 공동체로 변모해 사회 참여형 공공사역을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는 의견이 일고 있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의 공공성 회복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한국공공정책개발연구원의 장헌일목사(신생명나무교회)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복음에 관한 태도를 올바른 신학적 기초 위에 세워 실천하는 데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장목사는 “주님께서 공생애 전반에 걸쳐 보이셨던 복음의 메시지는 갈릴리 사역이라고 볼 수 있다”며, “고아와 나그네, 과부 등 사회가 돌보지 못하는 이들을 찾아가 그들을 돌보고 치유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는 일이 교회가 해야 할 복음의 핵심이다”고 전했다. 이어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께서 전하고자 하셨던 복음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 하나라는 사실이다”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믿고 고백하는 모든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예배자로 살아야 한다. 이는 주기도문에서 나타나듯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이뤄져야 하며 교인들의 삶 속에서 복음으로 변화된 삶을 삶으로써 개인의 공교회성이 회복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가 공교회성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고 덧붙였다.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단일성이 회복된다면 교회가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고 제언한 장목사는 “지역에 있는 개교회가 정부나 지자체의 행정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찾아 그곳에 있는 이들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며, “복지가 열악하거나 자연환경이 피폐하거나 사회구조가 붕괴하는 등 지역마다 요구하는 요소가 다양하다. 이를 교회가 알아내어 채워주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보여주기식 활동보다는 진정성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도록 노력해 약자의 아픔을 공감하고 공유하다 보면 성령의 감동을 통해 전도 또한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이다”며, “그간 한국교회가 펼쳤던 독선적 전도방식은 지양해야 한다. 행정의 사각지대를 찾아가 하면서 진정성 있는 활동을 펼치는 것이 오늘날 시대의 요구이자 하나님의 부르심이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사회와 교회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강조하는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고 교회가 정직함을 회복하면서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언어를 세속의 언어로 바꾸어 사용할 때 교회 바깥에 있는 이들과 진정한 소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바로 세우실 것이기에 교회에 실망할 필요는 없지만, 교인들이 삶 속에서 복음을 실천하고 예배자로서 살아갈 때 교회의 신뢰가 회복되고 되살아날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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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 ‘성적지향 차별금지’ 삭제 요구
성적지향 대표사례인 ‘동성애’ 지지·반대 자유보장 필요 진보 기독교계 인사들 ‘성적지향 차별금지법’ 강력 지지 반동성애연대와 인사들이 지난달 26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성적지향 차별금지’ 삭제 촉구대회를 열고, 차별금지법을 삭제해야만 하는 이유들에 대해 발표했다. 특히 소광석목사(새에덴교회)가 성적지향 차별금지 조항의 부당성을 고발했다. 소목사는 “동성애가 에이즈 감염의 경로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과학·의학적 근거가 있다”며, “에이즈 감염은 거의 모두가 성접촉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매년 신규 에이즈 감염인 중 남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93%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에이즈가 동성간 성접촉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잘 나타낸다. 보건복지부 자료도 분명하게 국내 에이즈의 주요 감염경로는 남성간 성접촉이라고 기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질환으로서 또는 잘못된 선택으로서 동성애에 대한 경고를 지속하면서 동성애자의 치유 내지 회복을 돕는 것과 방임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판단해보라”며, “동성애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동성애 행위에 대한 혐오와 동성애자에 대한 안타까움을 구별하고 있다. 즉 동성애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과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을 명백히 구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날 집회 주최측은 ‘성적지향’을 삭제하는 이유에 대해 △성적지향의 대표사례인 동성애 지지와 반대의 자유 보장 필요 △‘법률 명확성의 원칙’ 어긋남 △‘성적지향’으로 동성애자 에이즈 국가의 환자 진료비 급증 △마약자나 흡연자, 소아성애, 수간, 근친상간도 소수자라 주장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 또한 주최측은 “유엔인권 이사회가 몇 개국의 주장에 의하여 동성애를 인권으로 보호할 것을 결의하고 각국에 권고한 것은 사실이다”며, “하지만 유엔의 권고는 구속력이 없고, 유엔이 1948년 ‘세계 인권선언’을 통해 각국의 전통문화와 도덕, 남녀전통가정의 보호를 우선시 한다고 하는 결의에도 위배된다. 마약자나 도박자와 같이 자율적 의지로 사회적 폐해를 끼치는 동성애자를 사회적 소수자란 프레임에 넣어서는 안된다”고 피력했다. 한편 진보측 기독교계의 많은 사람들은 ‘성적지향 차별금지법’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보수 기독교계가 내세우고 있는 동성애 반대 주장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고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진보 기독교인들은 큰 틀에서 혐오발언과 차별을 금지하는 법 의의에 초점을 맞추어 지지하고 있어 이 문제를 둘러싼 공방이 지속될 전망이다. 박일준교수(감신대)는 “극우 기독교와 정치계가 한목소리로 소수자를 공격하고 있는 것에는 숨겨진 이유가 있다고 보여진다”며, “정작 기독교가 비판해야만 하는 대상은 세습과 부정부패를 하나님 이름으로 장사를 하는 이들이고, 부패한 정치권력인데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시선을 소수자에 대한 공격으로 돌려놓는다. 극우 성향의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약자를 괴롭히는 모습을 볼 때면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깊은 자괴감을 느낀다”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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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기기 확산에 성경보급 계속 정체
한국교회는 1899년 5월 7일부터 전국적으로 ‘성서공회 주일’을 지키기 시작해서 1900년부터 12월 둘째 주를 ‘성서주일’로 지켰다. 성서주일에 교회는 성경의 가치와 중요성을 깊이 생각하며 국내를 넘어 해외에까지 성서보급을 위한 기도와 헌금에 동참해 왔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디지털 기기의 발달이나 출판시장 축소 등의 문제로 성서보급률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다음 세대는 점점 성경을 멀리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대한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줄어든 성서보급 확대위한 한국교회 전체의 관심이 중요 젊은 세대에 맞는 다양한 ‘다매체’ 성경콘텐츠 개발 시급 ◆성서보급률 감소추세·대한성서공회(사장=권의현목사)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 성서보급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서 4만2,760부 증가한 33만 4,790부인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상반기 보급된 33만 4,790부 성경 가운데 개역개정판 성경은 27만 8,927부가 인쇄돼, 지금까지 성서공회를 통해서 1,017만 4,697부가 보급된 것으로 조사됐다. 또 그동안 국내 성경 출판사들이 성서공회로부터 개역개정판 본문 사용에 대한 저작권 허락을 받아 출판한 주석 성경 1,252만 6,985부를 포함하면, 개역개정판 성경은 총 2,200만 부가 넘게 보급됐다. 해외 성서 보급의 경우 올해 상반기 76개 나라에 107개 언어로 지난해 동기간과 비슷한 규모인 195만 1,240부의 성서를 제작해 보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2011년 같은 기간에 약 74만 부가 인쇄된 것에 비교한다면 거의 절반이 줄어든 셈이다. 또 해를 거듭해도 74만 부 수준을 회복하고 있지 못하다. 이를 반영하 듯 주일에 성경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찾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편의주의 신앙의 문제·한국교회에 만연하기 시작한 편의주의 신앙은 한국교회 부흥의 원동력이던 ‘성서중심 신앙’을 위협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스마트폰의 등장이다. 지금은 스마트폰에서 무료로 성경 앱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성경 앱 개발자들은 저작권료를 지불하지만 일반인들은 사실상 무료로 이용하는 실정이다. 그렇다 보니 더 이상 교회에 갈 때 성경책을 들고 다닐 필요성이 사라졌다. 교회예배 시간에도 사정은 비슷하다. 성경본문을 스크린으로 송출하기 때문에 더 이상 성경책을 펼쳐서 읽을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다. 성경책이 교회에 있지만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예배에서조차 성경책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기독교신앙의 토대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이다. 칼빈대 김근수총장은 “편한 것을 추구하는 편의주의 신앙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한국교회의 소중한 전통을 위협하고 있다. 예배시간에 말씀을 스크린으로 다 쏴주는데 누가 성경을 읽으려 하겠는가”라며, “디지털 기술의 발전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편의주의 확산을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성경중심 신앙 회복 과제·한국교회 부흥의 원천은 사경회 운동을 통해서 얻게 된 ‘성경 중심’의 신앙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은 말한다. 성서주일을 맞아 이러한 소중한 전통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성서공회 권의현사장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수많은 도전들 앞에 있는 개인과 공동체가 ‘성경 중심’의 신앙을 회복할 수 있도록, 본 공회에서는 금년에도 널리 성경을 보급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특히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과 다매체(multimedia) 시대의 우리말 사용자들을 위한 ‘새한글 성경전서’(가칭)의 번역 작업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고 말했다. 여기에 성경 본문 해설이나 사진 그림 지도 동영상 등의 자료들을 개발하여, 기존 성도들뿐만 아니라 특히 디지털 세대의 젊은이들이 다양한 매체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성서공회의 이러한 노력에 한국전체가 후원하고 동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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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 사단법인 설립한 한국기독교문인협회 ‘법인 초대이사장’ 김영진시인
이 땅에 ‘기독교문학’ 정착에 주도, 문학을 통한 하나님나라 확장도 기독교문학, 문학사적인 측면서 논의할 만큼 질적·양적으로 풍성 ▲우리의 현대문학 속에서 기독교문학은 큰 맥락을 형성해 왔습니다. 기독교는 신문학 초창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선구자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신문학이후 지금까지의 기독교문학은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논의할 만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풍성한 오늘입니다. 그러나 시를 비롯한 장르별로 문학적인 가치성을 지닌 작품들이 창작되어 왔으나, 대부분 외면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한국교회 자체가 외면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성장과 부흥에만 주력해 왔고, 기독교문학을 비롯한 기독교문화의 발전이나 확산문제는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한국 기독교문학을 주도해 온 한국기독교문인협회가 ‘사단법인’허가를 받아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담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땅의 ‘기독교문학’ 향상과 확산 주도 — 한국기독교문인협회는 지금까지 임의단체로 활동해 왔으나, 이제는 서울특별시와 문화체육관광부의 공적인 단체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본협회는 2016년에 창립 50주년을 맞았었습니다. 한국문인협회 초대 이사장을 지낸 늘봄 전영택목사를 중심으로 주태익, 이종환, 임옥인, 김현승, 박목월, 황금찬, 이범선, 박화목 등 그 당시 문단의 거목들이 창립에 앞장 섰습니다. 1967년 1월 21일 창립된 본 협회의 지난 50년은 순탄한 역사로 기록될 수 없었습니다. 침체와 위기 속에서 계속 발전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도 이 땅에 기독교문학을 정착시켜 왔습니다. 이제는 기독교문학을 통한 하나님나라 확장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 한국기독교문인협회가 창립된 이후 한국 기독교문학을 주도해 왔습니다. 한국 기독교문학의 향상과 확산에 주력했고, 무엇보다도 한국문학의 중심인물들이 한국기독교문인협회를 이끌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기독교문인협회는 1967년 한국크리스찬문학가협회로 출범했습니다. 그 이후 시대적 상황에 따라 1994년 제27회 총회에서 한국기독교문인협회로 개칭했습니다. 그 당시 김영삼정부인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군사정권시대를 청산하기 위한 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들이닥칠 때였습니다. 본 협회도 지난날의 잘못된 행태를 회개하고 하나님나라 확장의 도구가 되기 위해 개혁의 차원에서 개칭하게 된 것입니다. 본 협회의 역대 회장이나 회원 중에는 한국문학과 한국문단을 이끌어 왔던 주역들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로 창립총회 당시에 명예회장인 전영택목사는 1962년 창립된 한국문인협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고, 제2대 회장인 이종환작가는 상임이사로 한국문인협회를 이끌어 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3대와 4대 회장인 임옥인작가는 1965년 여성문학인회 회장을 지냈고, 제7·8대 회장인 박목월시인은 1969년부터 1978년 3월까지 9대에 걸쳐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본 협회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사업은 세미나와 연간집 〈기독교문학〉의 발행, 송년모임 혹은 신년하례회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1983년부터 한국기독교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해 오고 있으며, 1994년부터는 기독교문학을 확산시키는 방안으로 전국교회를 순회하며 문학사랑방을 진행해 오는 것이 본 협회 사업의 특징입니다. 기독교, 우리나라 신문학에 큰 영향 ▲ 우리나라 신문학은 기독교가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성서번역을 통한 한글대중화는 우리나라 현대문학 발전과 한글을 전용하는 기풍조성에 크게 기여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한글성서가 문학사적으로 의의를 갖는 것은 1882년부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역간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헬라어 원문을 한글로 표기하는 데에 있어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이 성서는 전도용으로 사용되어 한글대중화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한글성서는 우리 글에 대한 자각을 통해 한글문화를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번역성서를 통해 한글의 대중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순한글로 된 책과 번역물이 발간되었습니다. 그것은 한글위주의 생활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더욱이나 성서의 한글번역과 한글의 대중화는 서구의 사고방식, 즉 서구문화를 터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에 의해 전달된 한글성서는 근대 시민사회를 이루는 계몽의 언어로서 서구의 신문화를 매개하는 데 주력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신문학사상 최초의 번역작품인 1895년의 〈천로역정〉은 우리 문학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김희보는 1979년 현대사상사가 펴낸 〈한국문학과 기독교〉에서 “〈천로역정〉 번역은 우리나라 신문학사상 최초의 번역작품이라는 의의를 지닙니다. 우리나라 사람의 손에 의한 최초의 번안소설인 〈은세계〉가 이해조에 의해 나온 것이 1898년임을 미루어 볼 때, 이 〈천로역정〉의 간행연대가 얼마나 앞섰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고 밝혔습니다. —이 〈천로역정〉은 신문학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영향으로 한국 신문학의 신시운동은 창가로 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창가는 찬송가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백 철은 〈신문학사조사〉에서 “우리는 본시 창가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할 때, 그것이 처음에는 기독교의 찬송가에서 왔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고 밝혔습니다. 이 창가문학은 1896년부터 1908년까지 10여년에 걸쳐 그 전성기를 이뤘습니다. 이러한 초기의 기독교활동은 성서번역을 계기로 한글성서 및 찬송가의 보급, 존 번연의 〈천로역정〉등의 번역물이 한국 신문학의 태동기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문학에 대한 형성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육당·춘원도 기독교영향 받아 창작 ▲1908년 〈소년〉을 창간한 육당 최남선이나 춘원 이광수의 작품에 기독교적 영향을 받은 작품이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1919년 신문학사상 최초의 순문예지로 창간된 〈창조〉의 주요동인인 김동인과 전영택, 주요한 모두가 한결같이 기독교적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김동인의 경우 1919년의 「약한 자의 슬픔」, 1920년의 「마음의 얕은 자여」, 1930년의 「유서」 등 기독교적인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약한 자의 슬픔」은 〈창조〉 창간호에 발표되었으며, 신문학기에 최초의 리얼리즘 작품으로 기독교적 재생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요한의 시에서도 기독교정신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가의 기도」 등 시들은 기독교가정에서 성장한 데서 비롯되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영택은 감리교목사로 신문학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창조〉 5호부터 7호까지 연재된 「생명의 봄」과 1925년 1월 〈조선문단〉에 발표된 「화수분」 등 작품에서 기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정신의 회복을 위한 박애, 인도주의적인 세계를 추구했습니다. 또한 그는 이 땅에서의 기독교문학의 가능성을 맨 처음 실험해 보인 작가입니다. ▲한국기독교문학사적인 측면에서 서술할 경우 1919년에 창간된 순문예지 〈창조〉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 기독교문학도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논의해야 할 필요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소재를 창작하는 문인들이 계속 늘어나고, 문학적 평가도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된 초기부터 근대화의 물결을 가져왔던 것처럼, 한국문학 속의 기독교는 건강한 뿌리를 내린 것도 기독교의 모든 행위가 생활화, 즉 신앙이 육화되어 가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현대문학 속에 새로운 체계를 세우고 있는 기독교문학은 큰 맥락을 형성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사상이 우리의 생활 속에 그대로 뿌리를 내리고, 건강한 정신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인복은 1987년 1월호 〈월간문학〉에서 「한국소설에 수용된 기독교사상 연구」란 논문을 통해 기독교사상은 “우리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의 소재와 주제면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이제 남의 것이 아니요, 바로 내 것의 일부로서 만일에 기독교를 제외한다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일부를 상실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분석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한국 기독교문학의 형성은 당연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대문학에 ‘기독교문학’ 큰 맥락 형성 —우리나라 현대문학 속에서의 기독교는 과소 평가할 수 없을 만큼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근대의식이 기독교문화로 부터 싹튼 것과 기독교가 이 땅에 남긴 공적은 오늘의 사회저변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확대되는 데에서 연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서보급을 통한 한글대중화는 우리나라 현대문학 발전과 한글을 전용하는 기풍조성에 공적이 많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문화 속에서 기독교는 이미 단순한 외래사조나 외래종교가 아닌 것으로 정착되었고, 모두의 생활 속에 용해되어 있습니다. ▲한국기독교문인협회의 사단법인 설립과 한국 기독교문학의 실상에 대해 들려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기독교문학에 대해 하시고 싶은 말씀을 주셨으면 합니다. —바라건대 ‘큰 바위얼굴’ 같은 세계적인 그림을 그려 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회원들은 문학을 통한 사역자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탈리아 시인 단테의 〈신곡〉, 영국 존 밀턴의 대서사시 〈실낙원〉,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부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같은 위대한 기독교문학 작품이 나올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열심히 그 사역을 잘 감당하기 위해 기도하고 다짐합니다. ▲좋은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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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내 청년층 ‘결혼기피’ 문화 심각
- ▲ 비혼문화의 확산으로 교회 내 미혼 교인의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최근 한국사회의 많은 청년들이 결혼을 기피하면서 가정을 꾸리지 않아 이른바 ‘비혼문화’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 과거 미혼남녀들은 ‘혼자 사는 게 좋아서’, ‘결혼시기를 놓쳐서’와 같은 이유들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최근에는 결혼비용, 육아, 사회적차별 등의 이유로 개인의 자발성에 의한것 보다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의해 비혼을 선택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이러한 사회변화는 교회 내에서도 나타나 크리스천 미혼 남녀 중에서도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가진 이들이 늘어났다. 사회적 차별, 경제적 부담 등 비자발적으로 ‘비혼’ 선택 성경적인 가정상 제시하며 기성세대가 롤모델 되어야 ◆사회구조적 문제로 비혼 선택·통계청이 지난 2017년에 실시한 혼인건수 조사에 따르면 2014년 30.5만 건, 2015년 30.2만 건, 2016년 28.2만 건으로 해마다 줄고 있으며, 2017년 26.5만 건으로 그 수치가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 또한 통계청이 전국 만 13세 이상 3만9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8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결혼은 필수’라고 응답한 응답자가 절반도 되지 않아 ‘결혼은 꼭 해야 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48.1%에 그쳤다. 이로 인해 출산율은 0.97%로 사상 최저를 기록하고, 한국의 1인 가구 비중은 27.2%로 전체 가구 중 4분의 1을 넘어섰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가정이 줄어들고, 다음세대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비혼을 선택하는 크리스천 미혼남녀가 많아짐에 따라 자연스레 ‘젊은 부부’들이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결혼 기피문화가 심화되면 교회가 기성세대들의 공간으로만 여겨질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 되고 있다. ◆교회 청년층의 고령화 심각·이렇게 청년들은 결혼에 대해 점점 회의적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뒤따랐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미혼자들에게 늦게 결혼하거나 혹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 중 ‘결혼생활을 유지할 정도로 수입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아서’가 84%로 가장 높았다. 또 ‘직장을 구하지 못하거나 안정된 직장을 가지기 어려워서’가 82.4%, ‘집 장만 등 결혼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77%)가 그 뒤를 이었다. 이러한 사회풍조는 교회 내에서도 만연해져 가고 있으며, 크리스천 미혼남녀들도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30대 이상의 나이가 되면서 젊은 청년부와 부부가 다수인 장년부 둘 다 속할 수 없게 되면서 교회 활동에서도 뒤로 물러나고 있다. 대부분 교회 청년부는 20살부터 결혼하기 전까지의 청년들이 소속되는 부서이기에 교회 내에 30대 이상 비혼 남녀들은 교회 내에 그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어디에도 섞이지 못해 교회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몇몇 교회에서는 미혼자들이 속한 청년부와 부부들이 속한 장년부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나이대별로 청년부를 재편성하고 있다. 남서울교회(담임=화종부목사)의 경우 청년 1부는 만 26세까지로 제한하고 2부는 30대, 3부는 40대가 주류가 되어 활동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이가 많은 비혼 청년들이 늘었고 이들을 위한 공동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올바른 가정의 롤모델 제시해야·삼일교회(담임=송태근목사) 역시 20대·30대·40대 등 나이 별로 묶어 청년부를 재편했다. 대학청년부 박수관목사는 “나이와 관계없이 잘 적응하는 청년도 있지만 나이 차 때문에 소통하기 어려워하는 청년들도 종종 있었다”며, “공감대가 많은 세대끼리 묶어 나눔과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청년부 재편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청년 사역자들은 교회가 청년문제를 품기 위해서는 기존 교회의 패러다임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문제를 기도와 믿음, 신앙으로 풀어가는 종교적인 접근 방식이 아닌 청년들이 겪고 있는 시대적 상황과 아픔을 공감하는 접근 방식으로 다가가야 한다. 또한 이들에게 성경적인 가정상을 제시하며, 교회의 기성세대들이 결혼의 롤모델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전한다. 김향숙대표(하이패밀리)는 “최근 미디어와 사회에서는 ‘혼자 사는 것이 더 편하고 행복하다’는 메시지를 계속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비혼을 택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며, “행복한 결혼에 대한 롤모델이 부재한 상황에서 ‘결혼을 해야 된다’라고 하는 교회의 언어는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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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계종합
-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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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내 청년층 ‘결혼기피’ 문화 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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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한국교회
- ▲ 3·1운동은 계획부터 거사준비, 만세운동 진행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중심이 되어 진행됐다(사진은 승동교회(좌), 정동제일교회(가운데), 병천교회(우)의 현재 모습). 만세운동 위해 적극 협력한 한국교회 모습 기억해야 민족교회 정체성 회복위한 교회연합의 중요성 대두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외친 선조들의 마음을 품에 안은 채 교계가 준비하는 각종 3·1운동 100주년 행사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 세계평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아갔던 믿음의 선조들을 계승하고자 연합단체들과 주요 교단에서 여러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이홍정목사)와 한국교회총연합(공동회장=이승희목사, 김성복목사, 박종철목사)은 오는 3월 1일 정동제일교회(담임=송기성목사)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연합예배를 준비하는가 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총회장=림형석목사)과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측(총회장=김성복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감독회장=전명구목사) 등 교단들도 각각 기념행사를 다채롭게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다. YMCA 또한 3월 1일 광화문광장에서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를 통해 1919년 울려 퍼졌던 외침을 다시 한번 부르며 한민족의 희망찬 새로운 100년을 희망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한편으로는 한국교회 교인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3·1운동과 관련된 교회 유적지를 찾아가 둘러보면서 민족애를 품에 안고 일제에 저항했던 3·1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이에 연합단체들과 교계에서 준비 중인 3·1운동과 연관 있는 교계 유적지와 장소에 대한 소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학생운동의 중심지, 승동교회 오화영목사와 이필주목사, 양전백목사, 이승훈장로 등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 낭독 후 조선총독부에 연락해 자진하여 경찰에게 연행됐다. 이들의 구속으로 인해 3·1운동을 이끌 지도자가 사라진 상황에 빠졌지만,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이 전개된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학생들이 민족대표 33인과는 별개로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과 이들이 승동교회에 모여 독립운동을 준비했었다는 점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승동교회 청년면려회장을 맡고 있던 김원벽을 비롯한 학생대표들은 1919년 2월 20일 승동교회 기도실에서 학생지도자대회를 열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당시 학생대표들은 학생들이 모두 모여 앞으로 진행할 독립운동을 앞장서자며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2월 23일 승동교회에 다시 모인 학생대표들은 그간 작성하고 있던 독립선언문을 소각하여 없앤 뒤 민족대표들이 준비하던 독립운동에 함께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학생대표들은 독립운동을 이끌 학생조직을 구성했고 2월 28일 승동교회로 독립선언문 1,500장이 도착하자 김원벽과 학생대표들은 밤새 서울 곳곳에 이를 나누어 전달하며 3·1운동을 준비했다. 거사 당일 민족대표들이 탑골공원으로 오지 않자 학생대표들은 자체적으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3·1운동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김원벽과 여러 승동교회 교인들이 감옥에 갇히고 당시 승동교회 당회장이었던 차상진목사 또한 ‘십이인등의 장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한 일로 투옥됐다. 서울에서 활동한 학생대표들이 승동교회에 주로 모인 점은 김원벽 등이 교회 교인인 사실 외에도 탑골공원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운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일제의 감시가 교회까지 잘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학생대표들이 교회로 발걸음을 쉽게 할 수 있었다는 점으로 꼽을 수 있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 승동교회에는 ‘3·1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학생대표들이 모의하였던 곳’이라고 적힌 3·1독립운동 기념터 비석이 세워져 당시 학생대표들의 헌신을 기리고 있다. 3·1운동의 본산, 정동제일교회 이필주목사와 박동완전도사 등 민족대표 33인 중 2명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정동제일교회는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3·1운동 역사 전체를 들춰보아도 이례가 없는 곳이다. 정동제일교회는 인근에 있는 이필주목사 사택터와 함께 3·1운동의 본산이라 불리며 독립운동 사적지로서 3·1운동의 본산이라 불리고 있다.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하기 전인 2월 25일과 26일 당시 정동제일교회를 시무하고 있던 이필주목사는 자신의 사택으로 학생단 간부들을 모아 두 차례 회의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26일 기독교계 인사들을 교회 사무실로 불러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에 동의하도록 하고 기독교계 민족대표를 선정하도록 했으며 이튿날인 27일 기독교계 대표자회의를 진행해 박동완전도사가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리도록 도왔다. 유관순열사를 비롯해 3·1운동의 핵심 참가자들이었던 이화학당과 배화학당 학생들 대다수가 정동교회 교인이었던 점은 3·1운동이 더욱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고 활동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되었다. 배재학당 교사로 일하고 있었던 김진호전도사와 이화학당 하란사교수 모두 3·1운동 당시 정동제일교회를 다니고 있었으며 이들은 학생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도록 조직화 작업을 했다. 이윽고 3·1운동이 시작되자 이필주목사와 정득성장로, 박동완전도사 등 교회 지도자는 물론 정동제일교회 교인들 전원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거리에 나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조선총독부는 경찰을 동원해 이들을 체포했으며 많은 이들이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정동제일교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그해 3월부터 8월까지 일제의 감시를 피해 파이프오르간 송풍실에 등사기를 설치해 〈독립신문〉을 배포했다. 민족독립을 위해 전 교인이 하나 되어 싸운 정동제일교회의 모습에 대해 임용택목사(안양교회)는 기독교사상 제487호에 게재한 「정동제일교회와 애국독립운동」이란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19년까지만 해도 정동교회 교인들 사이에는 시대의 사명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 사명을 앞장서서 완수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개인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쓸뿐 아니라 사회와 민족이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한국 민족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다” 아우내운동의 숨은 주역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진행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진행된 독립만세운동을 보고 온 유관순열사를 중심으로 천안 병천시장에 있던 군중 약 3,000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민족독립과 식민지배 반대를 외쳤던 사건으로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교육사업을 통해 병천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성공회 소속 병천교회와 진명학교가 큰 역할을 맡았던 사실은 조명이 되지 않고 있다. 전해주신부(성공회)는 「성공회 병천교회의 3·1 아우내 만세운동에 대한 기여」이란 주제로 낸 논문을 통해 진명학교 교사였던 김구응의사의 지도로 지역유지들과 교인 학생들이 아우내장터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했음을 밝혔다. 해당 논문에 따르면 대도시에 집중되었던 신학문 교육기관이 마을에 있었을 정도로 지역민들의 교육열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통해 진명학교는 지역 유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병천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망의 중심이 되었다. 3·1운동에 직접 참가하고 고향으로 온 유관순열사의 존재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짧은 기간 안에 조직을 새로 꾸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에 대해 전해주신부는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했던 때도 아니고 기껏해야 사람의 입과 발에 의존하던 시절에 조직적인 거사 준비르ㄹ했다는 것은 이를 총괄하고 조정하던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며, “만세운동을 위한 공동체가 조직되었을리는 없을 것이며 기존에 있던 것을 이용했으리라는 것이다. 당시 병천에 그만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공동체는 성공회와 진명학교뿐이었다”고 밝혔다. 김구응의사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은 1920년 김병조선생이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사략〉에서도 알 수 있다. 김병조선생은 “천안군 병천시장에서 김구응선생이 남녀 6,400명을 소집해 독립선언을 할 때 일본헌병이 조선인의 기수를 해치고자 했다”며, “일본헌병이 이들의 복부를 칼로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라 김구응이 일본헌병의 잔인함을 꾸짖자 돌연 총구를 김구응에게 돌려 그 자리에서 즉사케 했다”고 기록했다. 비록 만세운동 당일 죽음을 맞이했지만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한 마음을 품고 총칼 앞에 섰던 김구응의사와 병천교회 교인들의 헌신을 유관순열사만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과거처럼 교회연합 이뤄야 서울에서 시작한 3·1운동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심지어 일본과 연해주, 미국 등 해외로까지 번져 만세운동이 진행됐다. 임종국선생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60일간 만세운동이 총 1,214회 벌어졌으며, 신복룡교수는 3·1운동 당시 46만 3,000여 명이 참가했다고 밝혔다. 근촌 백관수선생을 비롯한 2·8독립운동의 주역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수감된 상태였기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건네준 자유와 민족독립의 의지를 고스란히 받은 3·1운동은 을사조약 이후 일제에 의해 억눌렸던 자유를 갈망하는 성토의 장이 되었다. 한국YMCA전국연맹과 함께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이홍정총무(교회협)는 “3·1운동은 민족마다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것이 권리임으로 이를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이 주도한 민주주의 운동이다”며, “황권과 국권을 상실했지만 민권을 살아있다는 믿음으로 한민족은 세계 도처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했다”고 전했다. 또한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 땅의 아름다움이 발휘되어 많은 이들이 국권 재민의 권리를 지니고 앞으로 나아갔다”며, “100년 전 그날 종파와 계층, 지역을 초월해 민족의 자주독립을 성취하고자 했던 이때의 함성을 재현하자”고 밝혔다. 아우내장터와 제암리, 곽산 등 일제의 학살극으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민족애로 뭉쳐 하나가 되었던 3·1운동 당시 모습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어떻게 해야 연합을 도모할 수 있는지 짚어준다. 100년의 시간을 기념하기 위해 모이는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3·1운동을 기억하고 정신을 계승한다면 그때처럼 진정한 교회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때의 함성이 전국에서 다시 울리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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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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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총장후보 공개소견발표회
- 총신대학교 총장후보들이 21일 총신대학교 강당에서 자신들의 소견을 발표했다. 1차 심사를 통과한 7명의 후보는 한목소리로 총신대의 위기를 타파할 혁신과 개혁을 부르짖었다. 먼저 기호 1번 이한수교수는 “위기의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총장 자신의 솔선수범이다”며, “총장으로서 학교재정구조 개선을 위해 급여 일부를 일정 부분 반납할 것이고 전국교회를 돌며 학교를 위한 홍보와 모금에 발 벗고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또 “학내사태로 많은 교직원들 사이에 갈등구조가 심화됐는데, 대화를 통해 화합을 이루겠다”며, “복지부동하거나 줄서기 또는 정치하는 교직원에게는 엄정한 신상필벌을 가하겠다”고 강조했다. 기호 2번 김광열교수는 “작년 총신사태의 위기는 이제 기회의 시간으로 다가오고 있다”며, “총장직무대행으로서 3개월 간 학교행정을 이끌었는데, 이것이 큰 자산이다”고 자신의 강점을 부각시켰다. 또 “총신대는 2019년 12억의 적자가 예상되며, 입학정원 감소로 연간 16억의 적자가 계속될 전망이다”며, “긴축재정으로 몸집 줄이기에 돌입해야한다”고 분석했다. 김교수는 “총신의 당면한 재정위기 극복을 위해 총신 백만 후원운동의 활성화, 기여이사제도 도입, 장로교육원 및 평신도 교육원 활성화 등을 펼치겠다”고 공약했다. 기호 3번 김성태교수는 “총신대는 두 번의 대학평가 결과 학부정원 17%감축이라는 통보를 받아 개교 이래 가장 큰 위기에 봉착했다”며, “미미한 총회의 학교지원 재정, 부족한 재단전입금, 100만 기도후원금의 급감 등이 위기를 더 확산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재단이사회가 구성될 때 전입금에 실질적 기여를 하는 이사를 확충하고, 합동총회 인재양성기금 5억 원이 빨리 학교로 들어오게 하고, 직원 행정구조조정위원회를 만들어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약속했다. 기호 4번 김성삼목사는 5대 자질과 5대 비전을 약속했다. 또 특성화를 통해 총신대를 최고의 신학대학으로 육성하겠고, 경영과 교육의 혁신을 통해 학교발전을 이루겠다고 강조했다. 기호 5번 김재호목사는 “Reformation, Rebuilding, Respect 3R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약속했다. 김목사는 “Reformation, 개혁을 통해 총신대를 건강하고 깨끗한 학교로 만들겠다. Rebuilding, 세움운동을 통해 위기에 처한 총신을 다시 세우겠다. Respect, 존중운동을 통해 서로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는 학교의 풍토를 만들겠다”고 설명했다. 기호 6번 이상원교수는 “총신대사태는 전 총장의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인 학사운영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며, “윤리적 원칙과 법적 정당성에 근거한 운영으로 학교의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밝혔다. 또 “적재적소의 인사와 자율권 부여, 위원회와 교수회의 활성화, 총장의 활발한 사회활동 등을 이용한 대사회적 지평확대를 통해 학교를 발전시키겠다”고 강조했다. 재정확충 방안으로 이교수는 100만 기도후원 배가 운동, 교단 내 기독실업인회 구성, 목회자 정기 신학공개강좌, 교회음악 아카데미 활성화 등을 제시했다. 또 “7년 장학금으로 총신 학부와 신대원을 졸업했다는 부채의식이 남아 있다. 이 빚을 갚는다는 사명감으로 총장의 직무를 감당할 것이다”고 의지를 다졌다. 마지막으로 기호 7번 이재서교수는 “공정, 투명, 소통”을 강조했다. 이교수는 “총신의 기본이 무너졌다. 학교구성원이 자부심을 갖고 있지 못하니 애사심, 애교심 없다. 이 비극적 현실을 종식시키겠다”고 역설했다. 또 “지금 총신은 합동총회와 법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다. 이 현실을 바로잡을 것이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비가역적 구도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재원확보 방안에 대해서는 “필요하면 모금 전문가를 영입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정견발표회에서 후보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은 재정위기 극복과 교직원의 화합이었다. 현재 총신대는 연간 16억 원의 적자가 발생되는 재정적 위기에 봉착해 있으며, 교직원 사이에는 깊은 갈등의 골이 존재하고 있다. 모두 작년 ‘총신사태’에서 비롯된 결과들이다. 공청회에 참가했던 한 학생은 “학교의 여러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지혜롭고 능력 있는 총장님이 선출되기를 기도한다”고 소망을 전했다. ▲ 총장후보정견발표회에서 기호1번에서 7번까지의 후보들이 나와서 학교위기 극복을 위한 다양한 의견과 정책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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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총장후보 공개소견발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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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④ -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한국교회
- ▲ 3·1운동은 계획부터 거사준비, 만세운동 진행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중심이 되어 진행됐다(사진은 승동교회(좌), 정동제일교회(가운데), 병천교회(우)의 현재 모습). 만세운동 위해 적극 협력한 한국교회 모습 기억해야 민족교회 정체성 회복위한 교회연합의 중요성 대두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외친 선조들의 마음을 품에 안은 채 교계가 준비하는 각종 3·1운동 100주년 행사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 세계평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아갔던 믿음의 선조들을 계승하고자 연합단체들과 주요 교단에서 여러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이홍정목사)와 한국교회총연합(공동회장=이승희목사, 김성복목사, 박종철목사)은 오는 3월 1일 정동제일교회(담임=송기성목사)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연합예배를 준비하는가 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총회장=림형석목사)과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측(총회장=김성복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감독회장=전명구목사) 등 교단들도 각각 기념행사를 다채롭게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다. YMCA 또한 3월 1일 광화문광장에서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를 통해 1919년 울려 퍼졌던 외침을 다시 한번 부르며 한민족의 희망찬 새로운 100년을 희망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한편으로는 한국교회 교인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3·1운동과 관련된 교회 유적지를 찾아가 둘러보면서 민족애를 품에 안고 일제에 저항했던 3·1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이에 연합단체들과 교계에서 준비 중인 3·1운동과 연관 있는 교계 유적지와 장소에 대한 소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학생운동의 중심지, 승동교회 오화영목사와 이필주목사, 양전백목사, 이승훈장로 등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 낭독 후 조선총독부에 연락해 자진하여 경찰에게 연행됐다. 이들의 구속으로 인해 3·1운동을 이끌 지도자가 사라진 상황에 빠졌지만,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이 전개된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학생들이 민족대표 33인과는 별개로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과 이들이 승동교회에 모여 독립운동을 준비했었다는 점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승동교회 청년면려회장을 맡고 있던 김원벽을 비롯한 학생대표들은 1919년 2월 20일 승동교회 기도실에서 학생지도자대회를 열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당시 학생대표들은 학생들이 모두 모여 앞으로 진행할 독립운동을 앞장서자며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2월 23일 승동교회에 다시 모인 학생대표들은 그간 작성하고 있던 독립선언문을 소각하여 없앤 뒤 민족대표들이 준비하던 독립운동에 함께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학생대표들은 독립운동을 이끌 학생조직을 구성했고 2월 28일 승동교회로 독립선언문 1,500장이 도착하자 김원벽과 학생대표들은 밤새 서울 곳곳에 이를 나누어 전달하며 3·1운동을 준비했다. 거사 당일 민족대표들이 탑골공원으로 오지 않자 학생대표들은 자체적으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3·1운동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김원벽과 여러 승동교회 교인들이 감옥에 갇히고 당시 승동교회 당회장이었던 차상진목사 또한 ‘십이인등의 장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한 일로 투옥됐다. 서울에서 활동한 학생대표들이 승동교회에 주로 모인 점은 김원벽 등이 교회 교인인 사실 외에도 탑골공원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운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일제의 감시가 교회까지 잘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학생대표들이 교회로 발걸음을 쉽게 할 수 있었다는 점으로 꼽을 수 있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 승동교회에는 ‘3·1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학생대표들이 모의하였던 곳’이라고 적힌 3·1독립운동 기념터 비석이 세워져 당시 학생대표들의 헌신을 기리고 있다. 3·1운동의 본산, 정동제일교회 이필주목사와 박동완전도사 등 민족대표 33인 중 2명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정동제일교회는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3·1운동 역사 전체를 들춰보아도 이례가 없는 곳이다. 정동제일교회는 인근에 있는 이필주목사 사택터와 함께 3·1운동의 본산이라 불리며 독립운동 사적지로서 3·1운동의 본산이라 불리고 있다.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하기 전인 2월 25일과 26일 당시 정동제일교회를 시무하고 있던 이필주목사는 자신의 사택으로 학생단 간부들을 모아 두 차례 회의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26일 기독교계 인사들을 교회 사무실로 불러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에 동의하도록 하고 기독교계 민족대표를 선정하도록 했으며 이튿날인 27일 기독교계 대표자회의를 진행해 박동완전도사가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리도록 도왔다. 유관순열사를 비롯해 3·1운동의 핵심 참가자들이었던 이화학당과 배화학당 학생들 대다수가 정동교회 교인이었던 점은 3·1운동이 더욱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고 활동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되었다. 배재학당 교사로 일하고 있었던 김진호전도사와 이화학당 하란사교수 모두 3·1운동 당시 정동제일교회를 다니고 있었으며 이들은 학생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도록 조직화 작업을 했다. 이윽고 3·1운동이 시작되자 이필주목사와 정득성장로, 박동완전도사 등 교회 지도자는 물론 정동제일교회 교인들 전원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거리에 나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조선총독부는 경찰을 동원해 이들을 체포했으며 많은 이들이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정동제일교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그해 3월부터 8월까지 일제의 감시를 피해 파이프오르간 송풍실에 등사기를 설치해 〈독립신문〉을 배포했다. 민족독립을 위해 전 교인이 하나 되어 싸운 정동제일교회의 모습에 대해 임용택목사(안양교회)는 기독교사상 제487호에 게재한 「정동제일교회와 애국독립운동」이란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19년까지만 해도 정동교회 교인들 사이에는 시대의 사명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 사명을 앞장서서 완수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개인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쓸뿐 아니라 사회와 민족이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한국 민족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다” 아우내운동의 숨은 주역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진행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진행된 독립만세운동을 보고 온 유관순열사를 중심으로 천안 병천시장에 있던 군중 약 3,000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민족독립과 식민지배 반대를 외쳤던 사건으로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교육사업을 통해 병천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성공회 소속 병천교회와 진명학교가 큰 역할을 맡았던 사실은 조명이 되지 않고 있다. 전해주신부(성공회)는 「성공회 병천교회의 3·1 아우내 만세운동에 대한 기여」이란 주제로 낸 논문을 통해 진명학교 교사였던 김구응의사의 지도로 지역유지들과 교인 학생들이 아우내장터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했음을 밝혔다. 해당 논문에 따르면 대도시에 집중되었던 신학문 교육기관이 마을에 있었을 정도로 지역민들의 교육열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통해 진명학교는 지역 유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병천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망의 중심이 되었다. 3·1운동에 직접 참가하고 고향으로 온 유관순열사의 존재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짧은 기간 안에 조직을 새로 꾸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에 대해 전해주신부는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했던 때도 아니고 기껏해야 사람의 입과 발에 의존하던 시절에 조직적인 거사 준비르ㄹ했다는 것은 이를 총괄하고 조정하던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며, “만세운동을 위한 공동체가 조직되었을리는 없을 것이며 기존에 있던 것을 이용했으리라는 것이다. 당시 병천에 그만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공동체는 성공회와 진명학교뿐이었다”고 밝혔다. 김구응의사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은 1920년 김병조선생이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사략〉에서도 알 수 있다. 김병조선생은 “천안군 병천시장에서 김구응선생이 남녀 6,400명을 소집해 독립선언을 할 때 일본헌병이 조선인의 기수를 해치고자 했다”며, “일본헌병이 이들의 복부를 칼로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라 김구응이 일본헌병의 잔인함을 꾸짖자 돌연 총구를 김구응에게 돌려 그 자리에서 즉사케 했다”고 기록했다. 비록 만세운동 당일 죽음을 맞이했지만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한 마음을 품고 총칼 앞에 섰던 김구응의사와 병천교회 교인들의 헌신을 유관순열사만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과거처럼 교회연합 이뤄야 서울에서 시작한 3·1운동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심지어 일본과 연해주, 미국 등 해외로까지 번져 만세운동이 진행됐다. 임종국선생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60일간 만세운동이 총 1,214회 벌어졌으며, 신복룡교수는 3·1운동 당시 46만 3,000여 명이 참가했다고 밝혔다. 근촌 백관수선생을 비롯한 2·8독립운동의 주역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수감된 상태였기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건네준 자유와 민족독립의 의지를 고스란히 받은 3·1운동은 을사조약 이후 일제에 의해 억눌렸던 자유를 갈망하는 성토의 장이 되었다. 한국YMCA전국연맹과 함께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이홍정총무(교회협)는 “3·1운동은 민족마다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것이 권리임으로 이를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이 주도한 민주주의 운동이다”며, “황권과 국권을 상실했지만 민권을 살아있다는 믿음으로 한민족은 세계 도처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했다”고 전했다. 또한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 땅의 아름다움이 발휘되어 많은 이들이 국권 재민의 권리를 지니고 앞으로 나아갔다”며, “100년 전 그날 종파와 계층, 지역을 초월해 민족의 자주독립을 성취하고자 했던 이때의 함성을 재현하자”고 밝혔다. 아우내장터와 제암리, 곽산 등 일제의 학살극으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민족애로 뭉쳐 하나가 되었던 3·1운동 당시 모습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어떻게 해야 연합을 도모할 수 있는지 짚어준다. 100년의 시간을 기념하기 위해 모이는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3·1운동을 기억하고 정신을 계승한다면 그때처럼 진정한 교회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때의 함성이 전국에서 다시 울리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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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④ -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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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③ - 세계 속에 우뚝 선 한국교회의 모습
- ▲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5·4운동(좌)과 간디의 사티아그라하(우) 3·1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건네고자 했던 메시지는 비록 그들이 희망했던 방향으로 흐르지 못했지만, 전 세계 기독교인이 따르고자 했던 이상에 부합했다. 시대적 한계에 직면했던 이웃교회의 상황이해 필요 민족으로 시작한 한국교회, 세계와 보편애로 일치 추구 20세기 한민족 역사 가운데 3·1운동이 지닌 위치는 그 어떠한 사건보다 중요하다. 힘의 논리 앞에 민족과 개인의 자주성을 상실하고 식민지인으로서 온갖 굴욕에 시달려야 했던 이들에게 자유와 독립은 그 어떠한 가치보다 숭고한 의미를 지녔다. 한국교회 또한 이와 마찬가지였다. 민족구원과 하나님나라를 위해 헌신해 왔던 당시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일제의 무단점령과 폭압정치는 하나님의 역사와 절대적으로 일치하지 않은 길로 여겨졌다. 민족을 분열시키고 결사와 언론, 표현의 자유를 모두 억압했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어를 국어로 교육하고 한국어는 일본어 화자와의 소통을 위한 통·번역 위주로 체계를 세워 가르쳤다. 프랑스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언어가 인간의 사유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우리는 국가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언어 속에서 살아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조국이다’ 3·1운동 이후 잠시 완화되지만, 일제는 한순간도 민족 정체성 제거를 위한 고삐를 풀지 않았다. 이에 한국교회는 바빌론 포로기 유대인들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영하면서 일제에 맞서는 것이야말로 2천 년을 넘어 하나님께서 한민족에게 전하시는 계시로 이해하였고, 유대인의 방식을 따라 일제에 항거했다. 결과적으로 3·1운동 당시 한국교회의 선택은 옳았다. 그들이 희망했던 만큼 일찍 성취하지 못했고 또 다른 강대국들의 대리전을 치르는 아픔을 겪었지만, 민족의 독립과 자유가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질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3·1운동과 당시 한국교회의 모습을 본 이웃들의 시선은 어땠는가? 그들에게 3·1운동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일제와 충돌 인정한 선교사들 일제강점기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은 정치 문제에서는 어떠한 언급도 피한 채 조선총독부와 일제로부터 치외법권을 확보해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관점에서 3·1운동은 어떠한 전조도 느끼지 못했던 예측불발의 사건이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으로 재직했었던 고 송길섭박사는 기독교사상 제249호에 게재한 「선교사들이 본 3·1운동」을 통해 당시 선교사들이 3·1운동을 어떻게 느꼈는지 전했다. “일본이 3·1운동을 선교사와 관련시키려고 하나 우리가 아는 한에 있어서는 선교사들은 이 운동에 처음부터 관여한 바도 없고 또 자세히 아는 바도 없었다. 3·1운동이 터짐으로 일본제국만 놀란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도 깜짝 놀랐다. …… 어느 장로교 선교회의 보고서는 이 운동이 그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이 왔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불현듯 찾아온 3·1운동으로 인해 외국인 선교사들은 적잖은 당황을 표했다. 교회 담임목사들과 선교부 직원들이 대거 투옥되고 교인들이 뒤따라 가는 등 교회 운영에 차질이 생기자 선교사들은 큰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폭압정치를 오랫동안 지켜본 선교사들은 기독교와 일제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당시 한국감리교회 감독이었던 허버트 웰치목사는 “분명히 일본관리사회는 기독교사업에 대하여 불안해하고 있다”며,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의 영도하에 있거나 최소한 외국인의 영향하에 있다는 것 또는 교인들은 일반대중보다는 더 각성하여 있다는 것 그리고 기독교의 이상은 필연적으로 군사정부에는 참으로 귀찮은 존재라는 사실은 모두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고 밝혔다. 일제 통치에 비판적인 시야를 품던 선교사들은 일본이 추구하는 가치가 기독교와 화합을 이룰 수 없음을 알았고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을 설득해달라는 조선총독부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를 통해 비록 자신들에게까지 비밀에 부치며 진행한 만세운동이었지만, 3·1운동에 대한 암묵적 지지를 통해 한국교회가 민족교회로서 자주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일왕 사이에 선 일본 한반도 현지에 머물면서 일제의 가혹한 처사를 몸소 겪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태도는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3·1운동에 많은 호감을 표했다. 하지만 일본교회의 태도는 이와 사뭇 대조적이었다. 도히 아키오교수(일본 도시샤대)의 「3·1독립운동과 일본 기독교」에 따르면 일본 기독교인들 중 상당수는 3·1운동을 조선총독부의 무단정치로 인해 생긴 폐해의 반발로 인식했다. 학교교육에서 일어나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나 무력에 의한 동화정책, 불평등한 토지정책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국가주의적 관점을 지닌 일본 기독교인의 경우 한국교회의 저변에 깔린 편협한 유대적 애국심으로 3·1운동이 촉발됐다고 풀어내기도 했다. 특이한 점으로는 군산교회의 스즈키 타카시목사의 3·1운동 인식이다. 스즈키목사의 관점에 대해 아키오교수는 “일본인의 제국주의적 사고방식과 행동이 그러한 독립운동을 도출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스즈키목사는) 술회하고 있다”고 밝혔다. 스즈키 타카시목사는 3·1운동에 대해 “일부에서는 폭동적인 성격을 지녔던 지역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독립선언’으로 보기에 합당하다”며, “그들을 폭도로 부른다거나 폭동이라고 말하는 일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까”고 밝혔다. 이에 대해 아키오교수는 “필히 그는 3·1운동이 시작되는 모양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며, “그는 3·1독립선언문을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을 면밀히 읽고 운동의 진행경과를 객관적으로 지켜봄으로 당연히 그런 표현이 가능했다고 짐작된다”고 피력했다. 안타깝게도 스즈키목사의 바람과 달리 3·1운동에 대한 일본교회의 관점은 점차 부정적으로 변해갔다. 외국인 선교사들을 변호하던 이시자카 카메지목사는 “이번의 운동은 종교상의 신앙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며, “한국 민중의 입장에서 혹은 한국 민족의 입장에서부터 어떤 의식이 표출되어 나온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선교사들은 한국 독립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며, “그래서 한국인들이 ‘민족자결’이라는 유행어에 미혹되어 독립운동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그들을 설득하여 복귀시켰다”고 밝혔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 아키오교수는 안타까움을 표하고 “(과거 일본교회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채 이 문제를 자각하지 못했다”며, “일본인 기독교인은 왜 천황제와 그 이데올로기 안에 사로잡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그 문제이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3·1독립운동에 있어서의 일본인 기독교인들의 대응의 문제성을 보다 깊이 살펴야 한다고 믿는다”고 전했다. 톨스토이로 묶인 아시아 계획부터 시작, 발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가치가 3·1운동 전반에 깊숙이 들어가 비폭력·평화주의 운동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한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한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중국인들이 5·4운동을 전개한 일은 매우 유명한 일이다. 하지만 3·1운동 속에 깃든 기독교 정신이 5·4운동과 아시아 독립운동에 어떤 연관성을 지녔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와다 하루키교수(일본 도쿄대)는 「아시아 해방사에 3·1독립운동」이란 논문을 통해 3·1독립선언서가 지닌 특이한 점을 확인했다.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면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겠다는 윤리적 각성 촉구와 탄압을 각오하는 3·1독립선언서 속 비폭력혁명사상은 레프 톨스토이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하루키교수는 “선언의 기초자인 최남선은 합병 직전에 잡지 〈소년〉을 경영했는데 잠시 정간처분을 받았다. …… 정간처분 해제 후 처음 호에 그는 장시 ‘톨스토이 선생을 울림’을 발표했다”며, “윤리적 소생의 호소, 비폭력혁명의 입장은 일본 측으로부터 가혹한 물리적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3·1운동의 그 거족적인 결집을 가능케 했던 것은 (톨스토이가 생전 주창했던) 높은 도덕성과 넓은 원칙성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흐름은 다른 나라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5·4운동을 이끌면서 3·1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베이징대 학생들은 성명을 통해 일본인의 윤리적 각성을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전했다. “우리 중국 민족은 대일본 보이콧 운동 중에서 삼가 피눈물을 흘리며 일본 국민에게 충고하는 바이다. 눈을 떠라. 그리고 우리 나라 인민들과 손을 잡고 나아가 저 인도주의의 해충, 평화의 장해인 침략주의자들을 절멸시키고 평화와 행복의 동아 신천지를 건설하자” 이 당시 베이징대 학생들의 중심에는 천두슈를 비롯한 신문화운동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비폭력주의 아나키스트인 크로포트킨과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왔음을 자주 밝혀왔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무저항 평화주의 운동 또한 같은 아시아 국가로서 3·1운동과 기독교가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간디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한국교회가 강조한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하루키교수에 따르면 간디는 사티아그라하로 명명한 이 운동에 대한 견해를 톨스토이로부터 직접 배웠다고 밝혔다. 아시아 사회가 받아들인 기독교는 한국교회가 강조했던 민족주의적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3·1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세계 곳곳에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한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민족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가 하나 되는 범인류적 공동체의 실현이라 정의할 수 있다. 서구사회의 냉대 속 희망 미국 현지에 3·1운동 전개상황과 일제가 자행한 학살 등 탄압을 알리기도 한 프랭크 스코필드박사의 헌신이 있었지만, 당대 서구사회에서 3·1운동이 큰 의미를 지니지는 못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1919년 진행된 파리강화회담에서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미 국무부 또한 주일대사에게 미국 정부는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계획 수행에 일절 도움을 주지 않았으며 독립운동에 동조한다는 의심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과 유럽교회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반도에 있던 선교사들은 3·1운동 이후로도 계속해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지만 이에 응하는 어떠한 답변이나 조치를 발견할 수 없다. 이런 반응의 원인은 다음 2가지 사항으로 손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동아시아 끝자락에 있는 식민지 교회에서 일어난 일, 두 번째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피폐해진 서구 교회의 상황. 시대적 한계로 인해 서구교회가 한국교회에 시선을 두지 못했던 점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해외교회에 충분한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3·1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해외 교회에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고 여길 수는 없다. 당시에는 이루지 못했지만, 끝끝내 독립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도 민족애를 바탕으로 하는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헌신 덕분이었다. 일본인 최초의 대한민국 건국훈장 수여자인 후세 다쓰지가 한국 독립이라는 시대의 부름에 응답한 이유도 그가 열렬히 사랑했던 기독교 정신에 바탕에 있었다. 송길섭박사는 말했다. “카이로회의에 한국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특별조항으로 한국의 일본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승인·결의한 것은 20여 년 전에 한국교회와 한민족의 독립의지의 결의를 전 세계에 과시했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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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③ - 세계 속에 우뚝 선 한국교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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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② - 기독교정신으로 촉발된 2·8독립운동
- ▲ 2·8독립운동은 유학생들의 혈기만이 아니라 기독교 정신에 따른 민족애·조국애로 뛰어든 열정의 산물이었다. 조선기독교청년회서 근촌 백관수 등 독립의지 천명 기독청년으로서 사회화를 도모하는 신앙공동체 건설 민족혼을 지키고 자주독립과 평화를 도모했던 3·1운동이 100년이 지났다. 한국사회 곳곳에서는 이날 민족애로 몸을 불살랐던 순국선열들을 기리고자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3·1운동을 주도했던 한국교회 또한 마찬가지로 믿음의 선조들을 본보기로 삼고자 그날의 함성을 되새기고 있다. 한반도를 뒤흔든 만세삼창은 교회와 사회를 구분하지 않고 한민족 마음속에 깊이 새겨 있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2·8독립운동에 대한 사회 각계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3·1운동의 전조로 평가하기엔 2·8독립운동이 한민족에게 지닌 의미는 각별하다. 근촌 백관수선생을 비롯해 2·8독립선언서가 제시한 비전은 세계의 역사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한민족이 좇아야만 했던 근대적 미래가치를 정확하게 제시했다. 또한 한반도에 건설될 사회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명확하게 짚었던 나침반이었고, 눈물 속에서 민족의 독립과 세계의 화평을 염원한 이날의 기도는 비단 한국교회가 계승해야 할 신앙이라 할 수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2·8독립운동에 대한 평가가 날로 높아지는 지금, 사회와 교계 전반에 걸쳐 2·8독립운동에 대해 조명하는 행사가 늘어나고 있는 현 추이는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8독립운동과 기독교 2·8독립선언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공동위원장=이종걸국회의원, 표용은목사)는 지난달 22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2·8獨立宣言 - 지나온 100년과 이어갈 100년」이란 주제로 2·8독립운동 100주년기념 학술심포지엄과 국민 대토론회를 진행한 바 있다. 이날 개회식에서 이종걸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은 “2·8독립운동은 절망적이었던 일제강점기 속에서 굳은 의지와 신앙심으로 민족독립을 민족 독립을 이끌었다”며, “조선기독교청년회의 선각자를 비롯한 항일 열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상기하면서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겠다”고 전했다. 또한 김인복이사장(서울YMCA)은 “일본의 중심인 도쿄에서 대한민국의 독립과 주권의 회복을 위해 2·8독립운동을 결연했던 우리 애국선열들의 거룩한 외침을 다시 돌이켜보면 실로 가슴이 벅차고 그 울림에 숙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귀한 밀알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개회사에서 언급하듯 2·8독립운동은 민족애와 독립의지만을 바탕으로 두지 않고 있다. 오히려 굳건한 기독교 신앙을 중심으로 거칠게 쏘아 올랐던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이명화위원(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은 「재일본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의 활동과 항일운동」란 주제로 일본에 머물고 있던 조선인 유학생들이 기독교 신앙을 뿌리에 두고 한민족의 독립을 꿈꿨는지 말했다. 이위원은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은 일본인들의 천시를 받고 적대시되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강한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품었다”며, “기독교 단체로서 재일본도쿄기독교청년회는 조선인 유학생들의 정신적 안식처이면서 유학생 사회를 이끌었던 민족운동의 지렛대 역할을 수행했다”고 전했다. 이어 “재일본도쿄기독교청년회는 일본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고난의 시대를 함께하며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켜온 곳이다”며, “그곳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기독청년으로서 사회화를 도모하는 신앙 공동체를 건설했다”고 덧붙였다. 자유·평화 꿈꾼 2·8독립운동 이렇듯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유학생 사회에서 지니고 있던 재일본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근촌 백관수선생과 2·8독립운동을 계획한 독립운동가들이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위해 조선기독교회관에 모인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평할 수 있다. 2·8독립운동에 대해 정치역학적 관점을 통해 해석하는 한편 국제 기독교계가 이를 어떻게 받아드렸는지 알아보는 것 또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김숭배상임연구위원(연세대 통일연구원)은 「한국/조선 민족자결의 발현과 지속 - 2·8독립선언의 응집성」이란 주제로 정치역학적 관점에서 2·8독립운동은 한민족의 자기결정을 발현시켰다고 강조했다. 김위원은 “2·8독립운동은 단순히 3·1운동의 밑바탕이 아니다. 1919년을 기점으로 민족을 지탱했던 역사였고, 민족의 자결을 천명한 것이었다”며, “2·8독립운동을 이끌고 참가한 이들은 타지에 온 조선인 유학생이라는 신분과 우드로 윌슨으로 대표할 수 있는 세계사의 조류를 인지했음은 물론 기독교 사상이라는 배경이 맞물려 거사를 도모했던 것이다”고 역설했다. 또한 2·8독립운동을 필두로 독립운동 근간에 기독교가 버팀목 역할을 했음을 이명화위원은 피력했다. 이위원은 “조선기독교청년회는 각기 다른 배경과 계층을 지녔던 조선인 유학생을 하나로 잇는 연결고리가 되었고 2·8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됐다”며, “이를 통해 조선기독교청년회는 종교적 친목 단체를 넘어 민족공동체의 장이 됐다”고 밝혔다. 이어 “이들의 활동은 기독교 정신과 배치되지 않았기에 일본을 포함해 국제기독교청년회의 지지와 협력을 받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한편으로는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기 힘들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여기에 좌절하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꿈꿨던 조선인 유학생들의 기치를 높게 평가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김석근수석연구위원(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민족’과 ‘독립’과 ‘평화’ - 2·8독립선언의 사상사적 위상과 함의」란 주제로 2·8독립운동이 지닌 사상사적 위치에 대해 밝혔다. 김위원은 “윤치호는 2·8독립운동에 대해 조선인들 마음속에 민족 본능이 살아있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평가했다”며, “조선청년독립단이 독립이라는 단어를 직접 내걸었다는 점은 과감한 결단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해외의 독립지사와 소통하고 있던 유학생들은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가 조선과 한민족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며, “그러나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조선인들이 주체적으로 독립을 선언해 국제사회의 원조를 이끌어내고자 독립운동을 감행했다”고 덧붙였다. 도쿄 기독교청년회의 오늘 수많은 전문가들이 전했듯 2·8독립운동의 배경에는 기독교 정신과 기독교 공동체가 서 있다. 특히 도쿄에 있던 조선기독교청년회는 2·8독립운동의 산실이자 한국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의 후신인 도쿄 재일본한국기독교청년회는 2·8독립운동의 정신을 잇기 위해 매년 2·8독립운동 기념식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지난 2008년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2·8독립운동 기념박물관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으며, 2017년부터 총 8차례 진행한 2·8독립운동 공개 세미나 자료를 책으로 발간할 계획이다. 2·8독립운동 기념박물관은 2·8독립운동 관련 서적과 신문, 사진 등을 일본어와 한국어를 병기해 전시하고 있다. 또한 독립운동 기념비를 세워 당시 독립운동을 통해 조선인 유학생들이 잇길 바랐던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2·8독립운동을 누구보다 가장 숭고하게 기리고 있는 도쿄 재일본한국기독교청년회는 올해 2·8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박물관 자료실 재개관과 영상물 제작,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열기 위해 모금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2·8독립운동 기념박물관 실장 타츠키 카즈히사는 1천만 엔을 목표로 세워 작년 가을부터 진행한 2·8독립운동 100주년 모금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타츠키실장은 “2·8독립운동은 식민지 시대 지배국의 수도인 도쿄에서 목숨을 바쳐가며 독립을 외쳤던 용감한 역사이다”며, “2·8독립운동 기념박물관은 한국과 일본 젊은이들이 찾아와 과거에 대한 반성과 화해를 통해 미래를 바라보길 희망하는 곳이다”고 밝혔다. 또한 “2·8독립운동이 일본의 청소년들에게 알려져 과거를 마주 보고 역사 인식이 미비한 일본의 현실을 극복하는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며, “2·8독립운동 기념박물관이 이를 돕는 공간이 되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3·1운동으로 교회갱신 1919년 민족의 자유를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신앙의 선조들을 기리고자 교계 각지에선 이를 기념할 준비로 분주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이홍정목사)와 한국교회총연합(공동회장=이승희목사, 김성복목사, 박종철목사)은 오는 3월 1일 정동제일교회(담임=송기성목사)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연합예배를 진행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총회장=림형석목사)과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측(총회장=김성복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감독회장=전명구목사) 등 주요 교단들도 각각 3·1운동 100주년 연합예배와 3·1운동 만세길 걷기 등 기념행사를 다채롭게 준비하고 있다. YMCA는 오는 3월 1일 정오에 광화문광장에서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 개최해 한반도 평화로 나아갈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또한 오는 7일부터 9일까지 재일본한국기독교청년회에서 2·8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진행하는 전야제와 기념식, 심포지엄에 한국교회 대표단이 대거 참석한다. 과거 믿음의 선진들이 바랐던 민족독립의 염원은 지금 대한민국과 한국교회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잠들었던 한민족의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그날의 외침에 대해 이성희회장(교회협)은 “3·1정신이 외쳤던 억강부약의 질서는 성서가 말하는 산이 낮아지고 골짜기가 메워지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위로와 맞닿아 있다”며, “3·1운동 100주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사회 건설의 기회였다”고 전한 바 있다. 폭압의 화염 속으로 몸을 내던졌던 믿음의 선배들이 뿌렸던 씨앗이 지금의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날의 함성 속에 깃들었던 민족애를 한국교회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또한 이번 3·1운동 기념행사들이 단발성으로 거창하기만 축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사를 계기로 과거 교파 간 차이를 넘었던 모습을 따라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 갱신을 위한 도약의 발판이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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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계종합
-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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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② - 기독교정신으로 촉발된 2·8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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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① -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2·8독립선언
- ▲ 2·8독립운동 선언서를 낭독하는 모습의 근촌 백관수선생 동상 이 동상은 백선생의 고향인 전북 고창에 건립되었으며, 1983년 8월 15일 제막식을 거행했다.(제막식 날 백선생 가족과 친지들·왼쪽부터 다섯 번째는 백선생 자녀 부부인 백경순여사와 한양대학교 설립자인 김연준박사) 근촌 백관수 등 2·8독립운동 정신을 잇는 미래상 제시 실천적·혁신적·지성적인 성격의 독립운동으로 평가 100년 전 한민족은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한 3·1운동을 통해 일제의 폭거에 저항하고 세계만방에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내비쳤다. 이때 한국교회는 만세운동을 이끌면서 초교파적인 단합을 통한 민족헌신의 모습을 보였다. 이에 한국교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민족의 독립과 자주정신을 일깨웠던 믿음의 선조들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교회를 향한 일반사회의 시선은 냉랭하기만 하다. 과거와 달리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만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한 3·1운동 당시 기독교계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는 여론이 점차 대두되고 있다. 민족종교로서의 기독교 3·1운동 당시 한반도내 종교인 중 기독교인 수는 2%가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민족애로 하나되어 민족혼을 지키는 데에 앞장섰다. 이에 대해 이덕주교수(감신대)는 「3·1운동과 기독교 - 준비단계에서 이루어진 종교연대를 중심으로」란 논문을 통해 한국교회가 3·1운동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첫째는 한국교회가 민족주의 성격을 띤 채 성장했다는 점이다. 기독교를 통해 전해진 자유와 평등 사상의 유입은 수평적 시민사회를 구현하는데 중심이 됐다. 구한말 한민족의 근대화에 기여한 기독교가 일제의 억압통치로부터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구현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자명한 결과였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는 민족문제에 관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족주의 성향을 띠게 됐다. 둘째는 한국교회가 식민통치 상황에서 민족문제를 논의하는 민족운동의 공간이 된 점이다. 당시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보호아래 치외법권적 영역이 되었고, 총회와 연회, 지방회나 노회를 중심으로 총독부의 발길이 닿지 않는 연락망을 갖추었다.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대한 자료가 지방에 전해져 전국적인 시위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전국 각지에 퍼진 연락망 덕분이다. 셋째는 초교파적 연합운동이 전 민족적 독립운동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1903~1907년에 일어난 부흥운동의 여파로 초교파 연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이러한 연합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3·1운동 당시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은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했고, 각 지방에서 교파를 초월해 만세운동을 진행했다. 이렇듯 3·1운동 당시 교계 지도자들은 민족교회로서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시대적 사명을 저버리지 않았다. 민족을 사랑했던 이들에게 있어서 교파의 벽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는 점, 또한 한국교회에 큰 메시지를 건네고 있다. 3·1운동을 기념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본받는다면, 그들의 의지 또한 이어야 하겠다. 한편 최근 3·1운동이 진행되는 데에 기폭제가 됐던 2·8 독립선언에서 기독교계가 큰 역할을 맡은 사실이 조명을 받고 있다. 3·1운동의 기폭제 2·8독립운동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진행한 2·8독립운동은 근촌 백관수선생이 단장으로 있었던 조선청년독립단에 의해 주도됐다. 이전까지의 독립운동은 민족 전반의 관심을 받지 못했거나 일부 지역에 국한된 저항에 그쳤다. 하지만 2·8독립운동은 처음으로 한민족 전체의 의지를 담아 일제에 저항한 항쟁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근촌 백관수선생은 선언서낭독을 통해 “비록 다년간 전제정치하의 해독과 좋지 않은 사정의 불행으로 오늘과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선진국의 규범에 따라 신국가를 건설한 후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민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함에 있을 줄을 확신하노라”고 말했다. 또한 “최후의 1인까지 자유를 위한 뜨거운 피를 흘릴지니 어찌 동양평화의 화근이 아니리요”라며,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리라”고 선언했다. 2·8독립선언서가 지닌 논조에 대해 윤재근박사(전 한양대학교 교수·문학평론가)는 2·8독립운동의 참여한 이들이 품고 있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감이 우러나온 것으로 보았다. 윤박사는 “2·8독립선언서는 패기와 열정을 가득 안고 있다”며, “근촌 백관수선생이 낭독한 2·8독립선언서는 민족 사랑으로 가득 찬 애가이자 민족의 진일보와 일제에 대한 저항을 눌러담은 명문이다”고 역설했다. 이어 “2·8독립운동은 춘원 이광수를 포함해 독립선언에 함께한 이들의 역량이 합쳐진 결과이다”며, “이를 위해 2·8독립운동을 위해 주도적으로 선언문을 작성하고 조직을 이끌었던 근촌 백관수선생의 선구자적 식견을 간과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또한 “2·8독립운동은 3·1운동으로 계승되어 한민족이 더는 식민지배의 압제에서 벗어나 일어날 것을 주문했다”며, “2·8독립운동은 독립 이후 한민족이 건설해야 할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짚은 민족의 나침반이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2·8독립운동과 근촌 백관수선생 1919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평화회의에 조선인 대표로 이승만과 민찬호, 정한경 등이 참석해 일제의 침략 행위를 알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인 유학생들 사이에 독립열망이 퍼져갔다. 이에 메이지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던 근촌 백관수선생은 최원순과 정광호, 김안식, 김현준과 함께 조선 유학생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 독립의사를 천명하기로 했다. 이에 근촌 백관수선생은 1919년 1월 6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 웅변대회를 열고, 조선 독립의 달성에 앞장설 것을 천명하고 유학생들과 함께 조국 독립의 방법을 논의했다. 이후 2·8독립선언서의 작성을 위해 이광수에게 선언서 저술을 요청했다. 이광수의 독립선언서 초안을 본 근촌은 사상과 이념 부분에서 자신이 생각한 것과 차이가 있다고 보고 고심 끝에 세 차례에 걸쳐 선언서를 다듬었다. 훗날 근촌 백관수선생은 「조선청년독립단 2·8선언 약사」를 통해 “선언서는 본인이 담당하여 이광수군에게 하여금 기초해 재삼차 수정 완료했다”고 밝혔다. 2·8독립선언서 작성을 마친 근촌 백관수선생은 독립운동이 고립되면 성공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보성중학교를 나왔던 송계백을 서울로 보내 독립선언서를 전송했다. 당시 전달된 2·8독립선언서는 여러 과정을 거쳐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에게까지 전달됐다. 선언서를 읽은 손병희는 교단 회의를 통해 3·1운동 궐기를 결의했다. 한편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 독립운동을 더욱 조직화하기 위해 근촌 백관수선생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창설했다. 단장으로 추대된 근촌 백관수선생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쟁취한 세계만국의 앞에 독립을 기필코 이루기를 선언하노라. …… 우리 민족은 일본의 국군주의적 야심의 사기 폭력하에 우리 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운명을 당했으니 정의로 세계를 개조하는 이 시기에 당연히 바로 잡을 것을 세계에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또 세계 개조의 주인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과 영국은 보호와 합병을 솔선 승인하였으므로 이 시기에 구악을 대속할 의무가 있다” 이 선언문을 통해 근촌 백관수선생은 일본이 제기한 대동아공영권의 허위를 비판하고 조선 독립의 이념과 당위성을 전개했다. 기미독립선언서와 달리 근촌 백관수선생의 2·8독립선언서는 민족애와 젊은이의 열정을 바탕으로 두는 독립 의지를 눌러 담았다. 최팔용과 윤창석, 서 춘, 송계백 등 일본에 머물고 있던 유학생 500여 명이 모여 진행된 2·8독립운동은 조국을 잃었던 서러움과 독립의 환희가 뒤섞여 통곡과 오열의 장으로 바뀌었다. 일본 경찰들은 강당으로 진입하고자 했고, 경찰들의 진입을 막고자 수많은 학생들이 그들과 다툼을 벌였다. 당시 사회를 보고 있던 유창석은 기도를 올렸고 눈물을 흘리던 학생들과 고함치며 폭력을 행사하던 일본 경찰마저 고요해졌다. 유창석의 기도가 끝나자 근촌 백관수선생은 앞장서서 강당에 모여 있던 학생들을 이끌고 도쿄 거리를 누비며 독립만세를 외치고자 했다. 그러나 기도로 인해 잠시 주춤하고 있던 일본 경찰들이 그들을 덮쳤다. 2·8독립운동의 의의 일본 경찰들의 난입으로 강제 해산에 그쳤지만, 2·8독립운동은 1910년 을사조약 이후 독립운동의 의지가 한 데 모여 민족의 등불을 밝힌 거사로 인정받고 있다. 윤재근박사는 2.8독립선언에 대해 논하면서 “2·8독립운동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3·1운동과 비교했을 때 실천적이고 혁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며, “2·8독립선언서에서 볼 수 있듯 2·8독립운동은 지성적이면서 활력이 넘치는 측면이 강하다”고 밝혔다. 또한 “근촌 백관수선생을 비롯해 당시 유학생 신분으로 도쿄에 머물던 이들이 느끼고 있던 역사적 의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며, “이들이 꿈꿨던 민족국가의 모습은 자유주의를 뿌리로 하는 근대국가로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희망찬 미래사회를 그린 것이다”고 평했다. 즉 2·8 독립선언서는 한민족 전체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기초로 한 자유주의국가 건설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봉건질서 타파와 근대이념의 대중화를 역설했다. 이는 한국교회 초창기 선교사를 시작으로 한국교회가 이루고자 한 가치세계와 맥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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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① -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2·8독립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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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2. 새해 부흥운동의 전망
- 한국교회의 퇴보위기를 강력한 부흥운동 전개로 타개해야 ‘부흥운동 사역자’ 발굴하고 육성해서 성장동력으로 삼아야 한국교회의 성장이 멈췄다. 그리고 지금은 감소의 위기에 처해있다. 곳곳에서 경보음이 울리고 있다. 성도 수는 급격히 줄고 있고, 문을 닫는 교회도 속출하고 있다. 무리하게 건축했다고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하는 교회도 있고, 이단에 넘어가는 교회도 생기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사회에서 한국교회의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한다. 이 말은 한국교회의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아무리 전도지를 돌리고, 전도용품을 나눠줘도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그동안 한국교회의 부흥을 추동했던 부흥운동이 침체됐다는데 있다. ‘광장 부흥회’의 전통회복 지난해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에 하나는 10월 28일 열렸던 ‘신사참배 결의 80주년 회개 및 3.1운동 100주년을 위한 한국교회 일천만 기도대성회’였다. 이날 광화문 사거리 일대에 대략 1만 명의 성도들이 모여 회개와 결단의 기도를 했다. 과거 수십만의 성도가 모여 아스팔트 위에서 부르짖던 규모에 비하면 그야말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대중부흥집회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기도대성회의 대표회장을 맡은 이영훈목사는 대회사에서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 민족의 고난 중에 일제의 총칼 앞에 굴복해 우상에게 절하는 죄악을 범했다”며, “또한 영적 자만에 빠져 주님의 몸을 찢는 교회 분열의 과오를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또 “서울 광화문 광장에 1천만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모여 시대적 사명을 바로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죄를 통회 자복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거룩한 교회로 회복하기위해 기도대성회를 갖게 됐다”며 의미를 밝혔다. 이렇게 광장에서의 참회와 결단은 새로운 부흥과 회복의 원동력이다. 게다가 이날 기도대성회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국기독교연합, 한국교회총연합,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세계한국인기독교총연합회 등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제외한 한국교회 연합기관들이 모두 동참했다. 특히 소강석목사는 기도에서 “회개와 기도와 부흥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차이도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하나님과의 실존적 관계라는 신앙의 본질에서 있어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명제를 던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광장에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는 ‘광장 부흥회’는 한국교회의 기도열정과 부흥성장을 보여주는 단적인 모습이었다. 대표적인 것인 1973년 여의도광장에서 열렸던 빌리 그레이엄목사의 부흥집회이다. 이때 100만 명의 성도가 모여 기도했다. ‘광장 부흥회’의 전형을 보여주는 모습으로 한국의 역사에서 이렇게 한 종교의 행사에 100만이라는 신도가 모인 것은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이후 이러한 광장 부흥회에 수십만의 성도가 운집해서 기도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하나의 일상과 같았다. 이를 통해 새로운 결신자가 계속 생겼고, 이에 따라 한국교회는 가파르게 성장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광장 부흥회의 전통을 다시 살리는 일에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그래서 광장 부흥회 운동을 전면에서 이끌었던 조용기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는 “한국교회 1천만 성도가 광장에서 모두 모여 함께 회개하며 기도하는 일은 지금도 가능하다. 왜내하면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역설하고 있다. 한국 부흥운동의 절정과 쇠퇴 한국교회가 그동안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탁월한 영성을 갖춘 ‘부흥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교회 초창기에 장로교에서는 길선주목사, 감리교에서는 이용도목사, 성결교에서는 이성봉목사 등이 전국을 돌며 부흥회를 인도했고,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교인이 됐다. 한마디로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던 것이다. 이후 새로운 부흥사 세대가 등장했다. 조용기목사, 한경직목사, 신현균목사, 윤석전목사 등 카리스마적 능력을 갖춘 부흥사들의 활약으로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최고의 절정기를 맞게 됐다. 이를 통해 한국교회의 성장 곡선은 계속해서 상승했다. 어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면 주변의 많은 성도들이 함께 참여해서 ‘은혜를 받는 것’은 아주 흔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2000년 대 들어서면서부터 부흥운동은 점차 그 활력을 잃어가게 됐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부흥운동을 이끌고 갈 다음 세대가 준비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전형준교수(백석대 실천신학)는 “부흥운동은 그 중심에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있기 마련이다.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이분들이 주도했다. 그런데 부흥운동의 열기를 절정으로 이끌었던 부흥사 2세대가 은퇴하고 별세하면서 공백이 생겼고, 이 공백을 바르게 메우지 못했다. 여기서 부흥운동의 열기가 퇴조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이른바 부흥사의 윤리적 타락이다. 사실 한국교회에서 ‘부흥사’에 대한 특별한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교단에서 특별하게 기준을 두고 관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보니 곳곳에서 많은 부흥사들이 생겨났고, 이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됐다. 대표적인 것이 윤리적 문제이다. 부흥회를 하면서 부흥사들이 돈 문제, 여자 문제 등에 결부되게 된 것이다. ‘성령충만’을 누구보다 강조하는 부흥사들이 성령충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행위를 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기독교부흥협희회(한기부) 직전 대표회장을 역임한 윤보환감독은 “민족의 암흑기 때 부흥사들이 힘을 불어 넣었는데 우리 부흥사들이 그런 역할을 다시 잘 감당하길 원한다”며, “영적 부흥운동에 앞장서는 부흥사는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성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기부 대표회장 임준식목사 역시 일부 ‘저질 부흥사’의 문제를 지적하며 “한기부가 더욱 성령운동에 매진해 한국교회와 세계를 살리는 사명을 힘차게 감당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따라서 좀 더 체계적으로 ‘부흥운동 사역자’를 발굴하고 육성해야할 필요성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한기부 같은 연합단체에서 합리적인 프로그램을 만들고 운영한다면 한국교회이 부흥운동은 새로운 전거를 다시 마련할 수 있다. 또한 교단이나 연합단체에서도 계속해서 광장에서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부르짖는 연합성회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렇게 될 때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다시 타오를 것이고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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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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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2. 새해 부흥운동의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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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3 2019년 교회연합운동의 전망과 과제
- 중심으로 급부상한 ‘한교총’은 ‘한기총’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3.1운동 100주년’에 각 단체들의 연합으로 행사 가져야 지난 해 교회연합운동의 흐름을 살폈을 때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은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의 대약진과 안정화를 꼽을 수 있다. 반면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개신교의 ‘맹주’ 역할을 하던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은 세와 영향력 면에서 예전 같지 못하다. ‘신흥 강자’ 한교총과 ‘전통의 강자’ 한기총 사이에서 지난해 말 한국기독교연합에서 다시 ‘한국교회연합’으로 바꾼 한교연은 어정쩡한 모양새다. 올해 출범 3년째를 맞는 한교총이 명실상부한 한국교회의 대표적 연합기관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개신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와 한교총의 양대 대표기구로 재편될 전망이다. 한편 교단 중심의 연합과 함께 지역의 교회들이 연합하는 방식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교단 중심이 ‘위로부터의 연합’이라면, 교회 중심은 지역의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연합이다. 이 방향이 서로 조합을 잘 이룰 때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가시적 성과를 낼 수 있다. 3년차의 한교총, 최대 연합기관으로 성장 한교총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 전체교회의 90%가 가입돼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주장은 ‘이론상’으로는 틀린 것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한국교회의 ‘빅3교단’인 예장합동과 예장통합과 기감이 한교총의 중심이다. 여기에 백석, 고신, 합신, 개혁 등 주요 장로교단과 기독교성결총회, 예수교성결 총회, 나사렛성결 총회 등 성결교단과 그리스도의교회, 루터교회 등도 가입한 상태이다. 게다가 지난 해 12월 통합총회를 개최했던 기하성(여의도 측과 서대문 측) 교단 역시 합류할 것으로 관측된다. 한교총 빼고 나면 한국에는 기독교장로회만 남는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지난 해 12월 6일 한교총은 제2차 정기총회를 갖고 성공적으로 지도부를 개편하는 데 성공했다. 새 공동대표회장에 이승희목사(예장합동 총회장), 박종철목사(기침 총회장), 김성복목사(예장고신 총회장)를 추대했다. 또 공동대표회장단과 함께 주요 의사결정 조직인 11명의 상임회장단도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잡음’이나 ‘불상사’도 없었다. 교단 크기에 상관없이 회원교단의 수장이 돌아가면서 지도부를 구성하다보니 과거 한기총이 보여주던 ‘금권선거’ 시비 같은 구태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평이다. 게다가 한교총은 △민족의 화해, 조국의 평화공존과 통일을 위해 헌신 △사회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어려운 이웃 돌봄 △병역거부자로 인해 발생하는 역차별 우려 △동성애 옹호하는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 반대 △헌법적 가치인 종교의 자유 수호 △새로운 한국교회 연합운동 추진을 천명함으로써 ‘덩치’만이 불린 것이 아니라 ‘생각’도 제대로 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있어서 한교총은 그 이전의 한기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한교총의 미래가 장밋빛 일색만은 아니다. 가입교단의 신학적 스펙트럼이 넓다보니 민감한 이슈에 있어서는 교단의 ‘색깔’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핫이슈’가 바로 차별금지법이다. 한교총은 공식적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한다고 천명했다. 반면 교회협은 인권을 내세워 차별금지법에 긍정하는 입장이다. 문제는 두 연합기관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통합과 기감 같은 ‘이중가입 교단’이다. 여기에 집단지도부 체제는 내부의 지나친 ‘권력투쟁’을 근본적으로 없앤다는 장점이 있지만 책임소재가 불분명하고 긴급한 사안에 대해 빠르게 대처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게다가 교단장의 임기는 보통 1년이다. 그래서 1년 동안 대표회장으로 ‘얼굴’만 비추다가 물러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당연히 통일적이고 지속적인 연합사업을 추진하기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회협처럼 확실한 임기와 권한을 갖는 ‘총무’ 중심으로 지도체제를 꾸려야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대세’ 한교총은 한기총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익명을 요구한 ‘교회개혁연대’의 한 관계자는 “이제 한기총은 사실상 군소교단 연합체이다”고 잘라 말했다. 역시 익명을 요구한 한기총의 한 관계자는 “그나마 있는 회원 교단도 다들 어렵다보니 회비도 잘 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기총의 약화는 올해 더 가속될 전망이다. 한기총의 ‘대안’임을 부르짖으며 호기롭게 등장했던 한교연은 그 동안 수차례 한교총과의 통합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두 기관의 통합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통합될 가능성을 높게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중요한 것은 ‘대세’인 한교총에게 한기총과 한교연은 ‘반면교사’라는 점이다. 한국교회의 원로 김명혁박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교회의 건강한 일치와 연합을 위해 한교총은 한기총의 실패를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기총의 주축이던 합동과 통합이 한기총을 탈퇴한 ‘공식적’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단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금권선거 문제였다. 물론 ‘교단정치’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해보려는 개인적 욕망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두 교단이 ‘이혼장’에 도장을 찍으며 내건 이유는 이단과 금권선거였다. 한기총의 ‘이단 시비’는 지난 해 12월 ‘한국교회의 밤’ 행사에서 또 한 번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날 한기총은 교회발전에 공이 있다며 여러 수상자를 발표했고, 이 명단에 류광수목사가 올랐다. 그런데 류목사는 예장합동이 신학적으로 문제 삼는 대표적인 ‘이단’이다. 이에 대해 한 합동측 관계자는 “우리가 이단으로 규정한 집단에게 버젓이 상을 주는 한기총과 어떻게 손을 잡을 수가 있겠냐”며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일부에서는 대형교단의 탈퇴로 재정이 어려워지자 한기총이 이단으로 규정된 집단과 ‘뒷거래’를 하고 있다는 소문마저 들리고 있다. 한기총의 또 다른 문제는 각종 금권선거이다. 대표회장 자리를 놓고 돈으로 표를 사는 바람에 교회가 세상정치보다 더 하다는 조롱을 샀다. 곳곳에서 한기총의 금권선거에 대한 비난과 비판이 이어졌고 결국 이 문제는 한기총에서 당시 한교연이 갈라져나가는 ‘방아쇠’가 되고 말았다는 분석이다. 따라서 교회협과 함께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연합기관으로 자리를 잡은 한교총은 한기총의 추락에서 값진 교훈을 얻어야 한다. 무엇보다 금권선거라는 구태를 완전히 벗어던져야 한다. 다행인 것은 한교총이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교단 크기에 상관없이 교단장이 돌아가면서 대표회장을 맡다보니 금권선거는 발붙일 틈이 없다. 이런 점에서 한교총은 한기총의 추락에서 많은 것을 배운 셈이다. 또한 한교총은 신학의 문제에 전략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한교총은 ‘한기총이 무분별하게 이단을 풀어준다’고 강하게 성토하면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단을 풀어준다면 결국 같은 이단’이라는 것이 한교총의 논리이다. 그러나 한교총 내부의 신학 차이는 ‘숨어 있는 폭탄’과도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WCC 문제가 내부에서 불거진다면 한교총은 다시 사분오열될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예장합동 증경총회장 김선규목사는 2017년 한교총에 가입할 당시 교단내부의 반발을 의식해 “한교총에 참여한다고 우리 합동의 신학과 전통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연합해 대응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 때문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적극 해명한 바 있다. 따라서 한교총이 성공하려면 내부에 잠재돼 있는 신학적 차이 또는 대립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라는 고도의 전략적 사고와 정치력이 필요하다. 특히 한교총이 지도부가 이러한 실험에 성공한다면 한교총은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교회협과 한교총 함께 ‘3.1운동 100주년’ 행사 교회협은 여전히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중요한 한 축이다. 교회협은 세계교회협의(WCC)의 일원으로서 한국에서 에큐메니칼 정신에 입각한 진보적 신학을 대표한다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가입교단은 통합, 기감, 기장, 구세군, 성공회, 루터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한국복음교단, 한국정교회 대교구 등 9개 교단이다. 그런데 교회협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통합과 기감은 한교총에도 가입한 상태이다. 이른바 ‘이중 가입’을 한 것이다. 교회협 입장에서 보자면 반가울 리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한교총과 교회협의 ‘공통집합’인 이 두 교단은 한국교회의 연합에서 있어서 일종의 ‘캐스팅보트’의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관측된다. 한마디로 통합과 기감이 없는 교회협 또는 한교총은 그 존재감이 전혀 다르게 된다. 따라서 두 교단은 교회협과 한교총이라는 한국교회 연합기구의 양대 축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이 역할의 첫 시험대는 ‘3.1운동 백주년’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매우 의미 깊은 해이다. 이 행사를 위해 교회협은 이미 2017년 11월부터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계속해서 준비작업을 벌여왔다. 한국YMCA전국연맹, 한국YWCA연합회가 함께 조직한 ‘한국기독교3.1운동100주년위원회(위원장=윤경로)’가 중심에 서 있으며 올해 100주년 예배를 통해 다시 한 번 한국교회의 화합을 이룰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한교총도 마찬가지이다. 한교총 관계자는 지난 해 12월 “한국교회 3.1운동 100주년 기념예배는 한국교회 전체 교단이 참여하는 기념예배로서 3.1운동의 정신과 내용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행사로 준비 중”이며, “이 공동예배는 한교총 회원교단 소속 전국 5만 4천여 교회가 2019년 2월 24일 주일예배를 3.1절 기념예배로 드리면서 설교문 및 대표기도문, 선언문을 공유하는 방향으로 준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교총이라는 이름 아래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등의 교파가 하나가 돼 함께 대한민국과 한국교회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고 값진 일이다. 그러나 교회협과 한교총이 함께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교회협과 한교총이 독자적으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 지금 당장 함께 하는 행사를 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촉박하다. 그러나 두 기관의 수장들이 모여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에 대한 공통의 의견을 모으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지역과 교회 중심의 연합 중앙의 교단 중심의 연합운동도 중요하지만 지역의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연합운동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또 한국의 많은 지역에서는 한기총이니 한교총이니 하는 교단중심 연합 기관에 상관없이 상당히 자율적으로 지역 기독교연합회를 결성해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대표적인 모델이 서울 염리동의 교회연합회이다. 이곳은 서울의 대표적인 재개발 지역에 속한다. 새로운 아파트가 분양되면서 많은 사람이 이사했다. 그런데 이 지역의 교회들은 각자 교회의 전도지를 돌리지 않고 연합회 차원에서 함께 자기 교회를 소개하는 전도지를 만들어 돌리는 사역을 전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광염교회 김창주목사는 “서로 경쟁하지 않고 함께 공통의 전도지를 만들어 돌리니 받는 사람들도 반응이 훨씬 좋은 것 같다. 지역에서 이런 움직임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교단 중심의 연합도 중요하지만 지역의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연합활동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례이다. 이렇게 위로부터의 연합과 아래로부터의 연합이 함께 될 때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은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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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계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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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3 2019년 교회연합운동의 전망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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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특집] 2018 사건일지 10대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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