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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생명의전화, 생명사랑 캠페인
    ▲ 한국생명의전화 워크인 서포터즈는 ‘사람사랑 생명사랑 캠페인’을 진행했다.   한국생명의전화(원장=하상훈) 워크인 서포터즈는 지난 19일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시민들과 함께 하는 ‘사람사랑 생명사랑 캠페인’을 진행하고, 「나, 너, 우리를 위한 응원」이란 주제로 △자살예방 OX퀴즈 △아이러브미챌린지 포토 이벤트 △자살예방의 첫 걸음-공감의 이심전심 △지친 마음을 위로하는 마음약방 △생명사랑 나무 만들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시민교육을 실시했다.   동 단체와 삼성생명은 공동으로 하루 34명, 연간 12,463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현실을 자각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전하기 위해 동 캠페인을 진행했고, 여의도 한강공원을 방문한 많은 시민들은 본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주최측은 “워크인 서포터즈는 ‘한 걸음 한 걸음 희망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며, “올바른 생명존중 문화를 확산시키고 자살예방에 대한 인식개선을 이루어 나가는 대학생 서포터즈로서 자살예방은 어려운 일이 아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나와 내 주위 사람을 지키는 일임을 알리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동 단체는 오는 31일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 너른들판에서 ‘2019 사람사랑 생명사랑 밤길걷기 캠페인’을 진행하고, 참가자들은 5km, 10km, 34km 3개 코스를 선택하여 걷게 된다. 특히 34km 코스는 하루에 34명씩 자살하는 현실을 반영한 코스로 해질녘부터 동틀 때까지 무박 2일간 서울 도심을 걸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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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21
  • [탐방] 최모세목사를 만나다
      세계최초로 성경 66권 1,189장 전장과 요한계시록을 비교분석한 최모세목사(사진)의 요한계시록세미나가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오전 11시부터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위치한 서울성경전문박사원에서 열리고 있다. 문자적, 역사적, 원어적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계시은사를 통해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성경 전체를 열어주는 이 세미나는,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성경전체의 난해한 귀절들을 명쾌하게 풀어주어 설교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세미나다. 기독교대한감리회 부흥사와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한국기독교영풍회 등에서 오랫동안 부흥강사로 활동해온 최모세목사는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난해구절 없이 풀어내어 성경박사라고 불리기도 하며, 미주TV 크리스천 헤럴드 방송의 설교 중 순위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요한계시록 진수〉 20권과 〈성경66권 전장과 요한계시록 비교분석〉 16권 등 약 50여권의 책을 저술한 요한계시록의 대가이기도 하다. ▲계시록 강해는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시작하시게 되었는지요 =하나님은 나에게 1964년 5월 20일 아침 5시 10분 경 부흥회에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오순절 사건처럼 성령의 불을 주시고, 소명 또한 주셨습니다. 그 때 이후 하나님께서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마음을 주셔서 연구를 시작했고, 50년이 지난 지금도 매일 1독 이상씩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500여회의 요한계시록 강해 세미나를 하셨는데 최목사님만의 세미나 특징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요 =저희 세미나는 하나님의 일곱 영에 의해서 가감하지 않은 요한계시록을 열어주셔서 하는 세미나입니다. 이 세미나는 요한계시록만 다루지 않습니다. 저희 세미나는 요한계시록을 기초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를 다루는 세미나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과 연결된 모든 성경구절을 연결해서 완전히 성경의 뿌리까지 보게 하는 세미나입니다. 여러 명의 계시록 강해 목사님들이 계시지만 가감하지 않은 요한계시록을 강해하는 세미나는 저희가 유일할겁니다. 현재는 더 나아가 가감하지 않은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성경전체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가감하지 않는 요한계시록을 깨닫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일곱 영에 의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 일곱 영을 다루지 않고 요한계시록을 바라보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진리의 영과 일곱 영을 구분해 주실 수 있는지요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세미나에 주로 참석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진리의 영은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모든 성경을 깨닫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일곱 영은 그 중에서 요한계시록을 온전히 깨닫게 해주십니다. 요한복음 16:13절에 보면 ‘진리의 성령이 임하면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장래의 일’이 요한계시록을 말합니다. 저희가 한 해에 약 200회 정도 집회를 하고, 한 해 약 만 명의 성도가 이 세미나에 참석을 합니다. 지금까지 총 15만 명 정도의 사람이 거쳐 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미나에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목회자들입니다. 성도들을 잘 양육하기 위하여 말씀을 사모하는 분들이라 한분 한분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계시록은 성경 66권 전체를 알아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어 문자적 해석을 넘어 그 속의 복음과 하나님의 경륜을 드러내 ▲성경 66권 중 모든 말씀이 다 중요하겠지만 특별히 성경에서 계시록이 차지하는 비중과 또 어떤 관점에서 계시록을 읽어야 합니까? =역사적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여러 관점을 가지고 해석하는데, 요한계시록은 인류 역사 마지막 칠년 환난 시대의 배경이라는 미래사적 관점을 가지고 해석해야 합니다. 이를 설명하는 구절이 요한계시록 1장 19절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 66권의 열매이고, 결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시대가 끝나고 다가올 환난시대에 요한계시록은 영생을 얻을 필수과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은 비유와 상징적인 표현들이 많은데 어떻게 해야 올바른 해석이 되는지요 =일곱 영에 의한 계시의 은사를 받아야만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단들이 생겨나는 이유는 이 일곱 영을 받지 않고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요한계시록의 결론이 나타나는데, 요한계시록은 해석이 다양하지 않고, 정답이 있습니다. 그것이 가감하지 않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이는 일곱 영에 의한 계시의 은사를 받은 사람만 가능합니다. 저는 그 체험자입니다. 성령시대의 바울사도는 계시의 은사로 깨달음을 받았는데, 그 바울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을 저주를 받는다고 말한 것처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곱 영에 의해서 계시의 은사를 통해 깨달은 요한계시록이 아니면 가감한 요한계시록이 됩니다. 지금은 환난시대를 준비하는 성령시대의 끝 무렵입니다. 지금 우리는 라오디게아교회 시대를 살고 있다고 봅니다. ▲전천년, 후천년, 무천년, 세대주의천년 등 여러 설들이 있는데 목사님의 견해는 어떤지요 =저는 예수님 재림하시고 천년왕국이 이뤄진다는 ‘역사적전천년주의’의 견해를 따릅니다. 여기서 천년은 실제적인 숫자이고, 칠년 환난의 칠년도 실제적인 숫자를 말합니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일곱 영의 계시를 통해 열려야 ▲계시록의 난해구절인 십사만사천, 육백육십육, 칠년 대환난,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두 증인, 적그리스도 등에 대해 간단히 말씀해 주십시오 =십사만사천은 당연히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도의 수가 아니라, 환난시대에 역사할 남, 여 종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숫자가 유대인에서만 나온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다른 주장이며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서 환난시대에 역사할 상징적인 종들의 수입니다. 육백육십육은 화폐가 없어질 미래에 생길 매매수단이며, 칠년 대환난은 실제 7년을 의미합니다. EU와 이스라엘이 7년 평화조약을 맺는 그 자가 적그리스도라고 보고있습니다. 그 때부터 7년 환난이 시작됩니다. 일곱인은 칠년 환난의 총론, 일곱 나팔은 칠년 환난의 본론, 그리고 일곱 대접은 칠년 환난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환난시대에 역사할 주의 종을 7장에서는 십사만사천으로, 11장에서는 두 증인라고 했습니다. 두 증인은 집합명사로써 여러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누구인지는 때가 되면 밝히 드러나겠지만 EU와 이스라엘의 평화조약을 맺는 사람이 바로 적그리스도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50여권의 저서를 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근래에 출간한 ‘진리로 무장하라’, ‘진리로 경계하라’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요. = 신앙생활의 목적은 결국 천국에 입성하는 것입니다. 이 두 권의 책은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나침반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보조적으로 꼭 보았으면 합니다. 계속해서 ‘진리’ 시리즈로 출간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과 모든 성경을 비교 분석한 16권의 책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장과 비교분석한 세계 최초의 책입니다. 그리고 ‘진리로사역하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는데 곧 출판 예정입니다. ▲미국 크리스천헤럴드 티비방송을 통해 설교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헤럴드방송은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방송을 하는 티비입니다. 한국의 많은 목사님들, 뉴욕, LA의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설교가 방송이 되고 있습니다. 그 설교중 제 설교가 방송순위 1위이고, 장수프로그램입니다. 그리고 유튜브에서도 조회수가 높게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LA의 대형교회에서도 함께 세미나를 하자고 요청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사역이 너무 바빠서 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간단히 말씀해 주십시요 =이제 곧 환난시대가 다가오는데, 요한계시록은 필수입니다. 가감하지 않은 요한계시록으로 무장하여 영의 양식을 공급받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적을 알아야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의 적인 적그리스도에 대해 명백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아야 칠년 대환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명백히 말씀드리는 것은 가감하지 않은 요한계시록은 ‘환난통과설’이고, 이는 인내로 환난을 버텨내서 통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난을 통과해야 할 우리는 요한계시록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 환난에는 적그리스도가 지상왕국을 건설해서 왕 노릇을 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요한계시록으로 무장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인내’로 칠년 대환난을 이겨내야 환난 전 휴거설, 환난 중 휴거설 등 여러 설들이 있는데, 이와는 달리 ‘환난통과설’이 저의 견해입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14장 9-12절을 근거로 들 수 있는데요, 그 중 12절에 보면 ‘성도들의 인내’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여기서 ‘인내’라는 것은 환난을 견디어 통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덧붙여 마태복음 24장 13절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구절이 있는 있는데 이 또한 환난을 통과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다음은 성도의 인내에 관한 구절입니다. 계 3/10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13/10 :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계 14/12 :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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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5
  • 7월2일, ‘한미준21’서 교회영역포럼
      ▲ 한미준21 대표 정성진목사   교회 밖 성도에게 다가가 함께 예배하는 전도활동 전개 전통적 교회를 보완하는 다양하고 새로운 교회모습 모색   한미준21(공동대표=정성진목사)이 주최하는 교회영역 포럼이 「새로운 교회의 존재 양식. 교회의 신선한 표현들」이란 주제로 7월 2일 분당 할렐루야교회에서 진행된다. 이번 포럼에서는 교회의 다양한 표현들에 대한 한국 교계의 이해, 격려와 확산을 도모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세속화 시대에 현대문화 속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새로운 교회 운동을 고민하고 이를 위해 영국 Fresh Expressions of Church 운동의 대부인 필립 포터목사와 마이클 모이나박사가 강사로 나선다. 7월 2일에는 포럼, 4일에는 워크숍, 8일에는 토론회가 열릴 예정이다. 사무총장 허종학장로는 “교회의 신선한 표현(Fresh Expressions: FX) 운동은 전통적 교회를 보완하는 다양하고 새로운 교회운동으로 영국에서 시작되어 미국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며, “한국의 많은 사역자들도 저마다의 다양한 형태의 선교적 교회를 이루어 가고 있다”고 밝혔다. 이 운동은 영국에서 2005년 9월 잉글랜드 성공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전통적 교회 생활을 아직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복음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도록 일상 속으로 들어간다. 마을, 농장, 도서관, 빵집, 카페, 거리에서, 등산 클럽, 스포츠 그룹, 문화 예술가 그룹 등에서, 또한 셀 교회, 인터넷 교회, 네트워크 교회, 청년 중심의 교회 등의 모습으로 교회를 이루어 가고 있다. 이러한 운동들을 통해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재정의해 가고 있다. 현재 한국은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크리스천,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교회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미 현장에서는 새로운 시도들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허 사무총장은 “그동안 ‘기다리는 교회, 데려오는 교회’의 패러다임에 익숙한 한국교회는 이제 교회 밖 성도, 복음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가 섬기고, 함께 예배하는 교회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며, “이 운동이 그동안 영국에서 어떤 과정과 성과를 내 왔는지, 한국에서 적용할 점은 무엇인지 논의하는 이번 행사에 많은 목회자와 예비 목회자, 평신도 리더 등이 참가해 진지하게 토론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포럼 당일 오전에 정성진목사(한미준21 대표, 거룩한빛광성교회)와 김상복목사(변혁한국 초대의장, 할렐루야교회)가 축하의 인사를 할 예정이다. 황성주박사(변혁한국 의장)가 「왜 FX운동인가」란 제목으로 기조발제를 하고, 포터목사(Archbishop Commissioner & Team Leader of Fresh Expressions) 가 「새로운 형태의 교회」란 제목으로 발표한다. 오후에는 조용중선교사(KWMA사무총장)의 사회로 모이나박사가 「선교적 접근의 새 방향성」에 대해 발표하고, 퍼터목사와 모이나박사가 함께 「한국교회이 새로운 미래」에 대해 발표한다. 이후 나도움목사와 김상인목사가 구체적인 사례를 전할 예정이다. 한미준 21은 21세기를 맞아 인본주의로 치닫고 있는 세상 속에서 진정한 교회의 개혁과 회복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대표 정성진목사는 “세상의 가치가 교회를 흔들수록 교회는 본질을 지키며 신앙의 회복을 도와야 한다”며, “한미준21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고 변화를 통찰하며 목회사역의 전반적인 문제들을 제시, 공유, 해결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또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인적네트워크의 확장과 교류에 힘써 목회자들의 사역을 실제적으로, 효과적으로 지원할 방침이다”고 강조했다. ▲ 새로운 교회의 존재양식을 모색하는 이번 한미준21 세미나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사진은 지난 세미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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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26
  • 교회 청년층 ‘비혼’으로 가정축소 위기
    ▲ 교회 내 많은 청년들이 비혼을 선택하면서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문화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청년들, 현실에 부딪혀 성경적 가치관 벗어나 비혼 선택 결혼과 가정의 소망을 가지도록 행복한 가정상 제시해야 최근 한국사회에서 결혼적령기라 불리는 연령에 속하는 청년 세대들 중 많은 이들이 ‘비혼’을 선택하고 있다. ‘비혼’이란 결혼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으로, 이로 인해 1인가구가 점점 늘어나고 혼인율과 출산율은 날마다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전 기성세대와 다르게 젊은세대들이 결혼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여기면서, 여성들의 경제적 활동 또한 활발해졌다. 이러한 세대의 가치관 변화는 교회에 있는 청년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많은 크리스천 미혼남녀들이 가정을 꾸리기를 기피하고, 자신의 삶을 중요시 하는 개인주의적인 사고를 갖게 되었다. 이제 청년들에게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아닌 자신의 장래를 막는 장애물이 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가정이 줄어들고 다음세대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사회적 문제로 결혼 기피 지난 2017년에 실시한 통계청 인구동향조사에 의하면 1990년에 남성 27.7세, 여성 24.7세이던 평균초혼연령은 꾸준히 상승하여 2000년에 들어와서는 남성 29.3세, 여성 26.5세로, 2010년에는 남성 31.8세, 여성 28.9세로 증가하였다. 2016년에는 남성은 32.8세, 여성은 30.1세로 평균초혼연령 30대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현재 한국사회는 혼인연령이 점점 높아지는 만혼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결혼을 하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1990년 9.3%이던 조혼인율(인구 1천명당 혼인건수)은 2000년 7.0%, 2010년 6.5%로 점점 하락하여 2017년에는 5.2%까지 떨어졌다. 이는 1970년 통계작성 이후 사상 최저를 기록한 것으로, 이는 비혼 집단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한국사회에서 결혼을 기피하는 비혼 문화가 확산하게 된 것은 경제적 불확실성, 여성들의 경제 활동 진출, 주거비 등 결혼 초기 비용 상승, 결혼에 관련된 사회적 통념의 약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개인주의적 가치의 확대 등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특히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부담으로 꼽을 수 있는데, 서울시의회의에서 실시한 ‘서울시 1인 가구 대책 정책연구’에 따르면, 경제적 여건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20대는 39.7%, 30대는 39.2%에 달했다. 2030세대 1인 가구 10명 중 4명이 결혼 자금이나 혼수, 집 마련 등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 내에서도 비혼문화 확산 이러한 결혼 기피 문화는 교회 내에서도 만연해져 많은 크리스천 미혼남녀들은 결혼과 가정을 꾸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비혼을 선택하게 됐다. 결혼적령기에 있는 청년들이 결혼을 미루거나 비혼을 선택하면서, 대다수 청년부는 고령화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미혼그룹인 청년부와 부부로 이루어진 장년부 사이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비혼 크리스천 남녀들은 교회 공동체까지 포기하고 개인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사례 또한 적지 않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는 것이 창조질서 속에서 축복받은 섭리로 여겨졌다. 이와 함께 교회 자체가 결혼 중심의 교회 공동체 구조와 체제가 굳어져 있어 비혼을 선택한 크리스천 남녀들은 교회에서 더욱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비혼을 선택한 크리스천 여성 A씨는 “교회에서 청년부는 ‘빨리 결혼해서 떠나야 하는 곳’이 됐다. 비혼자들은 청년부에 속하기도 애매한 모호한 사람들이 됐다”며, “비혼을 선택했거나 결혼한 뒤에도 경제·사회적 사정으로 아이를 갖지 않은 이들은 교회 내 어느 공동체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교회를 떠난다”고 말했다. 또 다른 30대 후반의 비혼 크리스천 여성 B씨는 “이제 올해, 내년까지만 청년부 모임에 갈수 있는데 청년부 모임에 안 나가면 삶을 나누는 모임이 없으니 밖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며, “이제 이 나이가 되니까 교회 모임이란게 대부분 부부나 가족 중심이고, 그렇다고 여자들만 모이는 여전도회 간다고 해도 그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전했다.   ‘젊은가정’ 사라져 다음세대 감소 결혼하는 2030 크리스천 남녀들이 점차 사라지면서, 한국교회의 ‘젊은가정’들이 줄어들고 있다. 가정이 줄어듦과 동시에 출산율도 하락해 한국교회를 이어갈 다음세대까지 영향을 받고 있다. 예장 통합측 총회(총회장=림형석목사) 조사에 따르면 교회학교 전체 학생 수는 10년 전에 비해 16만 3,356명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2006년 27만 3,824명이던 아동부 학생 수는 2015년 말 16만 5,785명에 불과해 10년 만에 10만 8,039명이 감소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교회교육 전문가들은 다음세대를 위한 대응책으로 교회교육의 질을 높이고, 가정에서도 체계적인 신앙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하지만 가정이 더 이상 세워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대응책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 박종석교수(실천신대)는 “이제는 교회에사회적 분위기에 알맞은 커리큘럼 필요한 때다. 다음세대 감소 원인을 교회 내부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비혼족 증가와 결혼 후 출산을 기피하는 현상 등 사회적 원인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고 밝혔다.   행복한 가정의 모범상 필요 이처럼 기독교 청년들의 비혼으로 가정이 줄어들게 되면서 한국교회는 여러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청년들의 시대적 상황을 공감하며, 그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집중적으로 양육하고 성경적인 가정상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임귀복목사(주사랑교회)는 “현재 한국교회는 성장 중심적인 목회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청년들이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보다 더욱 많은 교인들을 데리고 오는데 혈안이 되어있다”며, “하지만 성경은 창세기부터 ‘생육하고 번성하라’며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나갈 것을 명령하고 있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말씀대로 가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임목사는 한국교회가 구시대적인 사고로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교회의 일꾼으로만 사용한다고 전했다. 그는 “흔히 한국교회는 청년들이 연애와 결혼에 성공해 가정을 이루도록 적절한 교육을 진행하기보다 그들을 교회 일꾼으로, 교회 성장을 위한 도구로 바라보고 있다”며, “이런 교회들은 청년들에게 ‘맡은 직분을 열심히 하면 언젠가 주님이 좋은 청년을 눈앞에 나타나게 하실 것’이란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다”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김향숙대표(하이패밀리)는 청년들에게 성경적인 가정상을 실제로 눈에서 보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대표는 “청년들이 결혼하겠다는 꿈을 가질 수 있도록 윗세대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먼저 보여야 한다. 비혼이라는 가치관은 쉽게 변하지 않지만 눈으로 보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느낀다면 분명 바뀔 수 있다”고 전했다. 이어 “미혼남녀들이 짝을 만날 수 있도록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교회는 시대적 사명을 안고 있다고 보는데 한때는 정말 많은 선교사를 해외로 파송해 열정적으로 사역을 감당했다”며, “그러나 지금은 비혼이 늘면서 출산 빙하시대를 맞고 있다. 이로 인해 국가적으로 위기를 겪고 있다면 당연히 교회는 이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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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20
  • 교회 내 청년층 ‘결혼기피’ 문화 심각
    ▲ 비혼문화의 확산으로 교회 내 미혼 교인의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최근 한국사회의 많은 청년들이 결혼을 기피하면서 가정을 꾸리지 않아 이른바 ‘비혼문화’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 과거 미혼남녀들은 ‘혼자 사는 게 좋아서’, ‘결혼시기를 놓쳐서’와 같은 이유들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최근에는 결혼비용, 육아, 사회적차별 등의 이유로 개인의 자발성에 의한것 보다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의해 비혼을 선택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이러한 사회변화는 교회 내에서도 나타나 크리스천 미혼 남녀 중에서도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가진 이들이 늘어났다. 사회적 차별, 경제적 부담 등 비자발적으로 ‘비혼’ 선택 성경적인 가정상 제시하며 기성세대가 롤모델 되어야 ◆사회구조적 문제로 비혼 선택·통계청이 지난 2017년에 실시한 혼인건수 조사에 따르면 2014년 30.5만 건, 2015년 30.2만 건, 2016년 28.2만 건으로 해마다 줄고 있으며, 2017년 26.5만 건으로 그 수치가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 또한 통계청이 전국 만 13세 이상 3만9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8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결혼은 필수’라고 응답한 응답자가 절반도 되지 않아 ‘결혼은 꼭 해야 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48.1%에 그쳤다. 이로 인해 출산율은 0.97%로 사상 최저를 기록하고, 한국의 1인 가구 비중은 27.2%로 전체 가구 중 4분의 1을 넘어섰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가정이 줄어들고, 다음세대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비혼을 선택하는 크리스천 미혼남녀가 많아짐에 따라 자연스레 ‘젊은 부부’들이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결혼 기피문화가 심화되면 교회가 기성세대들의 공간으로만 여겨질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 되고 있다. ◆교회 청년층의 고령화 심각·이렇게 청년들은 결혼에 대해 점점 회의적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뒤따랐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미혼자들에게 늦게 결혼하거나 혹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 중 ‘결혼생활을 유지할 정도로 수입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아서’가 84%로 가장 높았다. 또 ‘직장을 구하지 못하거나 안정된 직장을 가지기 어려워서’가 82.4%, ‘집 장만 등 결혼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77%)가 그 뒤를 이었다. 이러한 사회풍조는 교회 내에서도 만연해져 가고 있으며, 크리스천 미혼남녀들도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30대 이상의 나이가 되면서 젊은 청년부와 부부가 다수인 장년부 둘 다 속할 수 없게 되면서 교회 활동에서도 뒤로 물러나고 있다. 대부분 교회 청년부는 20살부터 결혼하기 전까지의 청년들이 소속되는 부서이기에 교회 내에 30대 이상 비혼 남녀들은 교회 내에 그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어디에도 섞이지 못해 교회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몇몇 교회에서는 미혼자들이 속한 청년부와 부부들이 속한 장년부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나이대별로 청년부를 재편성하고 있다. 남서울교회(담임=화종부목사)의 경우 청년 1부는 만 26세까지로 제한하고 2부는 30대, 3부는 40대가 주류가 되어 활동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이가 많은 비혼 청년들이 늘었고 이들을 위한 공동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올바른 가정의 롤모델 제시해야·삼일교회(담임=송태근목사) 역시 20대·30대·40대 등 나이 별로 묶어 청년부를 재편했다. 대학청년부 박수관목사는 “나이와 관계없이 잘 적응하는 청년도 있지만 나이 차 때문에 소통하기 어려워하는 청년들도 종종 있었다”며, “공감대가 많은 세대끼리 묶어 나눔과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청년부 재편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청년 사역자들은 교회가 청년문제를 품기 위해서는 기존 교회의 패러다임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문제를 기도와 믿음, 신앙으로 풀어가는 종교적인 접근 방식이 아닌 청년들이 겪고 있는 시대적 상황과 아픔을 공감하는 접근 방식으로 다가가야 한다.  또한 이들에게 성경적인 가정상을 제시하며, 교회의 기성세대들이 결혼의 롤모델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전한다. 김향숙대표(하이패밀리)는 “최근 미디어와 사회에서는 ‘혼자 사는 것이 더 편하고 행복하다’는 메시지를 계속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비혼을 택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며, “행복한 결혼에 대한 롤모델이 부재한 상황에서 ‘결혼을 해야 된다’라고 하는 교회의 언어는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고 말했다. 
    • 교계종합
    • 기획
    2019-03-20
  •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한국교회
    ▲ 3·1운동은 계획부터 거사준비, 만세운동 진행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중심이 되어 진행됐다(사진은 승동교회(좌), 정동제일교회(가운데), 병천교회(우)의 현재 모습).   만세운동 위해 적극 협력한 한국교회 모습 기억해야 민족교회 정체성 회복위한 교회연합의 중요성 대두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외친 선조들의 마음을 품에 안은 채 교계가 준비하는 각종 3·1운동 100주년 행사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 세계평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아갔던 믿음의 선조들을 계승하고자 연합단체들과 주요 교단에서 여러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이홍정목사)와 한국교회총연합(공동회장=이승희목사, 김성복목사, 박종철목사)은 오는 3월 1일 정동제일교회(담임=송기성목사)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연합예배를 준비하는가 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총회장=림형석목사)과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측(총회장=김성복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감독회장=전명구목사) 등 교단들도 각각 기념행사를 다채롭게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다. YMCA 또한 3월 1일 광화문광장에서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를 통해 1919년 울려 퍼졌던 외침을 다시 한번 부르며 한민족의 희망찬 새로운 100년을 희망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한편으로는 한국교회 교인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3·1운동과 관련된 교회 유적지를 찾아가 둘러보면서 민족애를 품에 안고 일제에 저항했던 3·1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이에 연합단체들과 교계에서 준비 중인 3·1운동과 연관 있는 교계 유적지와 장소에 대한 소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학생운동의 중심지, 승동교회 오화영목사와 이필주목사, 양전백목사, 이승훈장로 등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 낭독 후 조선총독부에 연락해 자진하여 경찰에게 연행됐다. 이들의 구속으로 인해 3·1운동을 이끌 지도자가 사라진 상황에 빠졌지만,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이 전개된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학생들이 민족대표 33인과는 별개로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과 이들이 승동교회에 모여 독립운동을 준비했었다는 점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승동교회 청년면려회장을 맡고 있던 김원벽을 비롯한 학생대표들은 1919년 2월 20일 승동교회 기도실에서 학생지도자대회를 열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당시 학생대표들은 학생들이 모두 모여 앞으로 진행할 독립운동을 앞장서자며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2월 23일 승동교회에 다시 모인 학생대표들은 그간 작성하고 있던 독립선언문을 소각하여 없앤 뒤 민족대표들이 준비하던 독립운동에 함께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학생대표들은 독립운동을 이끌 학생조직을 구성했고 2월 28일 승동교회로 독립선언문 1,500장이 도착하자 김원벽과 학생대표들은 밤새 서울 곳곳에 이를 나누어 전달하며 3·1운동을 준비했다. 거사 당일 민족대표들이 탑골공원으로 오지 않자 학생대표들은 자체적으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3·1운동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김원벽과 여러 승동교회 교인들이 감옥에 갇히고 당시 승동교회 당회장이었던 차상진목사 또한 ‘십이인등의 장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한 일로 투옥됐다. 서울에서 활동한 학생대표들이 승동교회에 주로 모인 점은 김원벽 등이 교회 교인인 사실 외에도 탑골공원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운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일제의 감시가 교회까지 잘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학생대표들이 교회로 발걸음을 쉽게 할 수 있었다는 점으로 꼽을 수 있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 승동교회에는 ‘3·1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학생대표들이 모의하였던 곳’이라고 적힌 3·1독립운동 기념터 비석이 세워져 당시 학생대표들의 헌신을 기리고 있다. 3·1운동의 본산, 정동제일교회 이필주목사와 박동완전도사 등 민족대표 33인 중 2명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정동제일교회는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3·1운동 역사 전체를 들춰보아도 이례가 없는 곳이다. 정동제일교회는 인근에 있는 이필주목사 사택터와 함께 3·1운동의 본산이라 불리며 독립운동 사적지로서 3·1운동의 본산이라 불리고 있다.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하기 전인 2월 25일과 26일 당시 정동제일교회를 시무하고 있던 이필주목사는 자신의 사택으로 학생단 간부들을 모아 두 차례 회의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26일 기독교계 인사들을 교회 사무실로 불러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에 동의하도록 하고 기독교계 민족대표를 선정하도록 했으며 이튿날인 27일 기독교계 대표자회의를 진행해 박동완전도사가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리도록 도왔다. 유관순열사를 비롯해 3·1운동의 핵심 참가자들이었던 이화학당과 배화학당 학생들 대다수가 정동교회 교인이었던 점은 3·1운동이 더욱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고 활동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되었다. 배재학당 교사로 일하고 있었던 김진호전도사와 이화학당 하란사교수 모두 3·1운동 당시 정동제일교회를 다니고 있었으며 이들은 학생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도록 조직화 작업을 했다. 이윽고 3·1운동이 시작되자 이필주목사와 정득성장로, 박동완전도사 등 교회 지도자는 물론 정동제일교회 교인들 전원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거리에 나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조선총독부는 경찰을 동원해 이들을 체포했으며 많은 이들이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정동제일교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그해 3월부터 8월까지 일제의 감시를 피해 파이프오르간 송풍실에 등사기를 설치해 〈독립신문〉을 배포했다. 민족독립을 위해 전 교인이 하나 되어 싸운 정동제일교회의 모습에 대해 임용택목사(안양교회)는 기독교사상 제487호에 게재한 「정동제일교회와 애국독립운동」이란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19년까지만 해도 정동교회 교인들 사이에는 시대의 사명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 사명을 앞장서서 완수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개인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쓸뿐 아니라 사회와 민족이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한국 민족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다” 아우내운동의 숨은 주역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진행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진행된 독립만세운동을 보고 온 유관순열사를 중심으로 천안 병천시장에 있던 군중 약 3,000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민족독립과 식민지배 반대를 외쳤던 사건으로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교육사업을 통해 병천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성공회 소속 병천교회와 진명학교가 큰 역할을 맡았던 사실은 조명이 되지 않고 있다. 전해주신부(성공회)는 「성공회 병천교회의 3·1 아우내 만세운동에 대한 기여」이란 주제로 낸 논문을 통해 진명학교 교사였던 김구응의사의 지도로 지역유지들과 교인 학생들이 아우내장터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했음을 밝혔다. 해당 논문에 따르면 대도시에 집중되었던 신학문 교육기관이 마을에 있었을 정도로 지역민들의 교육열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통해 진명학교는 지역 유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병천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망의 중심이 되었다. 3·1운동에 직접 참가하고 고향으로 온 유관순열사의 존재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짧은 기간 안에 조직을 새로 꾸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에 대해 전해주신부는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했던 때도 아니고 기껏해야 사람의 입과 발에 의존하던 시절에 조직적인 거사 준비르ㄹ했다는 것은 이를 총괄하고 조정하던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며, “만세운동을 위한 공동체가 조직되었을리는 없을 것이며 기존에 있던 것을 이용했으리라는 것이다. 당시 병천에 그만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공동체는 성공회와 진명학교뿐이었다”고 밝혔다. 김구응의사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은 1920년 김병조선생이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사략〉에서도 알 수 있다. 김병조선생은 “천안군 병천시장에서 김구응선생이 남녀 6,400명을 소집해 독립선언을 할 때 일본헌병이 조선인의 기수를 해치고자 했다”며, “일본헌병이 이들의 복부를 칼로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라 김구응이 일본헌병의 잔인함을 꾸짖자 돌연 총구를 김구응에게 돌려 그 자리에서 즉사케 했다”고 기록했다. 비록 만세운동 당일 죽음을 맞이했지만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한 마음을 품고 총칼 앞에 섰던 김구응의사와 병천교회 교인들의 헌신을 유관순열사만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과거처럼 교회연합 이뤄야 서울에서 시작한 3·1운동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심지어 일본과 연해주, 미국 등 해외로까지 번져 만세운동이 진행됐다. 임종국선생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60일간 만세운동이 총 1,214회 벌어졌으며, 신복룡교수는 3·1운동 당시 46만 3,000여 명이 참가했다고 밝혔다. 근촌 백관수선생을 비롯한 2·8독립운동의 주역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수감된 상태였기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건네준 자유와 민족독립의 의지를 고스란히 받은 3·1운동은 을사조약 이후 일제에 의해 억눌렸던 자유를 갈망하는 성토의 장이 되었다. 한국YMCA전국연맹과 함께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이홍정총무(교회협)는 “3·1운동은 민족마다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것이 권리임으로 이를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이 주도한 민주주의 운동이다”며, “황권과 국권을 상실했지만 민권을 살아있다는 믿음으로 한민족은 세계 도처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했다”고 전했다. 또한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 땅의 아름다움이 발휘되어 많은 이들이 국권 재민의 권리를 지니고 앞으로 나아갔다”며, “100년 전 그날 종파와 계층, 지역을 초월해 민족의 자주독립을 성취하고자 했던 이때의 함성을 재현하자”고 밝혔다. 아우내장터와 제암리, 곽산 등 일제의 학살극으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민족애로 뭉쳐 하나가 되었던 3·1운동 당시 모습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어떻게 해야 연합을 도모할 수 있는지 짚어준다. 100년의 시간을 기념하기 위해 모이는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3·1운동을 기억하고 정신을 계승한다면 그때처럼 진정한 교회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때의 함성이 전국에서 다시 울리길 희망한다.
    • 교계종합
    • 기획
    2019-02-24
  • 총신대 총장후보 공개소견발표회
    총신대학교 총장후보들이 21일 총신대학교 강당에서 자신들의 소견을 발표했다. 1차 심사를 통과한 7명의 후보는 한목소리로 총신대의 위기를 타파할 혁신과 개혁을 부르짖었다. 먼저 기호 1번 이한수교수는 “위기의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총장 자신의 솔선수범이다”며, “총장으로서 학교재정구조 개선을 위해 급여 일부를 일정 부분 반납할 것이고 전국교회를 돌며 학교를 위한 홍보와 모금에 발 벗고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또 “학내사태로 많은 교직원들 사이에 갈등구조가 심화됐는데, 대화를 통해 화합을 이루겠다”며, “복지부동하거나 줄서기 또는 정치하는 교직원에게는 엄정한 신상필벌을 가하겠다”고 강조했다. 기호 2번 김광열교수는 “작년 총신사태의 위기는 이제 기회의 시간으로 다가오고 있다”며, “총장직무대행으로서 3개월 간 학교행정을 이끌었는데, 이것이 큰 자산이다”고 자신의 강점을 부각시켰다. 또 “총신대는 2019년 12억의 적자가 예상되며, 입학정원 감소로 연간 16억의 적자가 계속될 전망이다”며, “긴축재정으로 몸집 줄이기에 돌입해야한다”고 분석했다. 김교수는 “총신의 당면한 재정위기 극복을 위해 총신 백만 후원운동의 활성화, 기여이사제도 도입, 장로교육원 및 평신도 교육원 활성화 등을 펼치겠다”고 공약했다. 기호 3번 김성태교수는 “총신대는 두 번의 대학평가 결과 학부정원 17%감축이라는 통보를 받아 개교 이래 가장 큰 위기에 봉착했다”며, “미미한 총회의 학교지원 재정, 부족한 재단전입금, 100만 기도후원금의 급감 등이 위기를 더 확산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재단이사회가 구성될 때 전입금에 실질적 기여를 하는 이사를 확충하고, 합동총회 인재양성기금 5억 원이 빨리 학교로 들어오게 하고, 직원 행정구조조정위원회를 만들어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약속했다. 기호 4번 김성삼목사는 5대 자질과 5대 비전을 약속했다. 또 특성화를 통해 총신대를 최고의 신학대학으로 육성하겠고, 경영과 교육의 혁신을 통해 학교발전을 이루겠다고 강조했다. 기호 5번 김재호목사는 “Reformation, Rebuilding, Respect 3R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약속했다. 김목사는 “Reformation, 개혁을 통해 총신대를 건강하고 깨끗한 학교로 만들겠다. Rebuilding, 세움운동을 통해 위기에 처한 총신을 다시 세우겠다. Respect, 존중운동을 통해 서로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는 학교의 풍토를 만들겠다”고 설명했다. 기호 6번 이상원교수는 “총신대사태는 전 총장의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인 학사운영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며, “윤리적 원칙과 법적 정당성에 근거한 운영으로 학교의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밝혔다. 또 “적재적소의 인사와 자율권 부여, 위원회와 교수회의 활성화, 총장의 활발한 사회활동 등을 이용한 대사회적 지평확대를 통해 학교를 발전시키겠다”고 강조했다. 재정확충 방안으로 이교수는 100만 기도후원 배가 운동, 교단 내 기독실업인회 구성, 목회자 정기 신학공개강좌, 교회음악 아카데미 활성화 등을 제시했다. 또 “7년 장학금으로 총신 학부와 신대원을 졸업했다는 부채의식이 남아 있다. 이 빚을 갚는다는 사명감으로 총장의 직무를 감당할 것이다”고 의지를 다졌다. 마지막으로 기호 7번 이재서교수는 “공정, 투명, 소통”을 강조했다. 이교수는 “총신의 기본이 무너졌다. 학교구성원이 자부심을 갖고 있지 못하니 애사심, 애교심 없다. 이 비극적 현실을 종식시키겠다”고 역설했다. 또 “지금 총신은 합동총회와 법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다. 이 현실을 바로잡을 것이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비가역적 구도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재원확보 방안에 대해서는 “필요하면 모금 전문가를 영입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정견발표회에서 후보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은 재정위기 극복과 교직원의 화합이었다. 현재 총신대는 연간 16억 원의 적자가 발생되는 재정적 위기에 봉착해 있으며, 교직원 사이에는 깊은 갈등의 골이 존재하고 있다. 모두 작년 ‘총신사태’에서 비롯된 결과들이다. 공청회에 참가했던 한 학생은 “학교의 여러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지혜롭고 능력 있는 총장님이 선출되기를 기도한다”고 소망을 전했다. ▲ 총장후보정견발표회에서 기호1번에서 7번까지의 후보들이 나와서 학교위기 극복을 위한 다양한 의견과 정책을 제시했다.
    • 교계종합
    • 기획
    2019-02-21
  •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④ -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한국교회
    ▲ 3·1운동은 계획부터 거사준비, 만세운동 진행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중심이 되어 진행됐다(사진은 승동교회(좌), 정동제일교회(가운데), 병천교회(우)의 현재 모습).   만세운동 위해 적극 협력한 한국교회 모습 기억해야 민족교회 정체성 회복위한 교회연합의 중요성 대두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외친 선조들의 마음을 품에 안은 채 교계가 준비하는 각종 3·1운동 100주년 행사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 세계평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아갔던 믿음의 선조들을 계승하고자 연합단체들과 주요 교단에서 여러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이홍정목사)와 한국교회총연합(공동회장=이승희목사, 김성복목사, 박종철목사)은 오는 3월 1일 정동제일교회(담임=송기성목사)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연합예배를 준비하는가 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총회장=림형석목사)과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측(총회장=김성복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감독회장=전명구목사) 등 교단들도 각각 기념행사를 다채롭게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다. YMCA 또한 3월 1일 광화문광장에서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를 통해 1919년 울려 퍼졌던 외침을 다시 한번 부르며 한민족의 희망찬 새로운 100년을 희망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한편으로는 한국교회 교인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3·1운동과 관련된 교회 유적지를 찾아가 둘러보면서 민족애를 품에 안고 일제에 저항했던 3·1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이에 연합단체들과 교계에서 준비 중인 3·1운동과 연관 있는 교계 유적지와 장소에 대한 소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학생운동의 중심지, 승동교회 오화영목사와 이필주목사, 양전백목사, 이승훈장로 등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 낭독 후 조선총독부에 연락해 자진하여 경찰에게 연행됐다. 이들의 구속으로 인해 3·1운동을 이끌 지도자가 사라진 상황에 빠졌지만,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이 전개된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학생들이 민족대표 33인과는 별개로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과 이들이 승동교회에 모여 독립운동을 준비했었다는 점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승동교회 청년면려회장을 맡고 있던 김원벽을 비롯한 학생대표들은 1919년 2월 20일 승동교회 기도실에서 학생지도자대회를 열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당시 학생대표들은 학생들이 모두 모여 앞으로 진행할 독립운동을 앞장서자며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2월 23일 승동교회에 다시 모인 학생대표들은 그간 작성하고 있던 독립선언문을 소각하여 없앤 뒤 민족대표들이 준비하던 독립운동에 함께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학생대표들은 독립운동을 이끌 학생조직을 구성했고 2월 28일 승동교회로 독립선언문 1,500장이 도착하자 김원벽과 학생대표들은 밤새 서울 곳곳에 이를 나누어 전달하며 3·1운동을 준비했다. 거사 당일 민족대표들이 탑골공원으로 오지 않자 학생대표들은 자체적으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3·1운동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김원벽과 여러 승동교회 교인들이 감옥에 갇히고 당시 승동교회 당회장이었던 차상진목사 또한 ‘십이인등의 장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한 일로 투옥됐다. 서울에서 활동한 학생대표들이 승동교회에 주로 모인 점은 김원벽 등이 교회 교인인 사실 외에도 탑골공원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운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일제의 감시가 교회까지 잘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학생대표들이 교회로 발걸음을 쉽게 할 수 있었다는 점으로 꼽을 수 있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 승동교회에는 ‘3·1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학생대표들이 모의하였던 곳’이라고 적힌 3·1독립운동 기념터 비석이 세워져 당시 학생대표들의 헌신을 기리고 있다. 3·1운동의 본산, 정동제일교회 이필주목사와 박동완전도사 등 민족대표 33인 중 2명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정동제일교회는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3·1운동 역사 전체를 들춰보아도 이례가 없는 곳이다. 정동제일교회는 인근에 있는 이필주목사 사택터와 함께 3·1운동의 본산이라 불리며 독립운동 사적지로서 3·1운동의 본산이라 불리고 있다.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하기 전인 2월 25일과 26일 당시 정동제일교회를 시무하고 있던 이필주목사는 자신의 사택으로 학생단 간부들을 모아 두 차례 회의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26일 기독교계 인사들을 교회 사무실로 불러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에 동의하도록 하고 기독교계 민족대표를 선정하도록 했으며 이튿날인 27일 기독교계 대표자회의를 진행해 박동완전도사가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리도록 도왔다. 유관순열사를 비롯해 3·1운동의 핵심 참가자들이었던 이화학당과 배화학당 학생들 대다수가 정동교회 교인이었던 점은 3·1운동이 더욱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고 활동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되었다. 배재학당 교사로 일하고 있었던 김진호전도사와 이화학당 하란사교수 모두 3·1운동 당시 정동제일교회를 다니고 있었으며 이들은 학생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도록 조직화 작업을 했다. 이윽고 3·1운동이 시작되자 이필주목사와 정득성장로, 박동완전도사 등 교회 지도자는 물론 정동제일교회 교인들 전원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거리에 나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조선총독부는 경찰을 동원해 이들을 체포했으며 많은 이들이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정동제일교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그해 3월부터 8월까지 일제의 감시를 피해 파이프오르간 송풍실에 등사기를 설치해 〈독립신문〉을 배포했다. 민족독립을 위해 전 교인이 하나 되어 싸운 정동제일교회의 모습에 대해 임용택목사(안양교회)는 기독교사상 제487호에 게재한 「정동제일교회와 애국독립운동」이란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19년까지만 해도 정동교회 교인들 사이에는 시대의 사명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 사명을 앞장서서 완수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개인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쓸뿐 아니라 사회와 민족이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한국 민족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다” 아우내운동의 숨은 주역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진행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진행된 독립만세운동을 보고 온 유관순열사를 중심으로 천안 병천시장에 있던 군중 약 3,000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민족독립과 식민지배 반대를 외쳤던 사건으로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교육사업을 통해 병천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성공회 소속 병천교회와 진명학교가 큰 역할을 맡았던 사실은 조명이 되지 않고 있다. 전해주신부(성공회)는 「성공회 병천교회의 3·1 아우내 만세운동에 대한 기여」이란 주제로 낸 논문을 통해 진명학교 교사였던 김구응의사의 지도로 지역유지들과 교인 학생들이 아우내장터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했음을 밝혔다. 해당 논문에 따르면 대도시에 집중되었던 신학문 교육기관이 마을에 있었을 정도로 지역민들의 교육열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통해 진명학교는 지역 유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병천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망의 중심이 되었다. 3·1운동에 직접 참가하고 고향으로 온 유관순열사의 존재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짧은 기간 안에 조직을 새로 꾸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에 대해 전해주신부는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했던 때도 아니고 기껏해야 사람의 입과 발에 의존하던 시절에 조직적인 거사 준비르ㄹ했다는 것은 이를 총괄하고 조정하던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며, “만세운동을 위한 공동체가 조직되었을리는 없을 것이며 기존에 있던 것을 이용했으리라는 것이다. 당시 병천에 그만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공동체는 성공회와 진명학교뿐이었다”고 밝혔다. 김구응의사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은 1920년 김병조선생이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사략〉에서도 알 수 있다. 김병조선생은 “천안군 병천시장에서 김구응선생이 남녀 6,400명을 소집해 독립선언을 할 때 일본헌병이 조선인의 기수를 해치고자 했다”며, “일본헌병이 이들의 복부를 칼로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라 김구응이 일본헌병의 잔인함을 꾸짖자 돌연 총구를 김구응에게 돌려 그 자리에서 즉사케 했다”고 기록했다. 비록 만세운동 당일 죽음을 맞이했지만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한 마음을 품고 총칼 앞에 섰던 김구응의사와 병천교회 교인들의 헌신을 유관순열사만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과거처럼 교회연합 이뤄야 서울에서 시작한 3·1운동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심지어 일본과 연해주, 미국 등 해외로까지 번져 만세운동이 진행됐다. 임종국선생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60일간 만세운동이 총 1,214회 벌어졌으며, 신복룡교수는 3·1운동 당시 46만 3,000여 명이 참가했다고 밝혔다. 근촌 백관수선생을 비롯한 2·8독립운동의 주역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수감된 상태였기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건네준 자유와 민족독립의 의지를 고스란히 받은 3·1운동은 을사조약 이후 일제에 의해 억눌렸던 자유를 갈망하는 성토의 장이 되었다. 한국YMCA전국연맹과 함께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이홍정총무(교회협)는 “3·1운동은 민족마다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것이 권리임으로 이를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이 주도한 민주주의 운동이다”며, “황권과 국권을 상실했지만 민권을 살아있다는 믿음으로 한민족은 세계 도처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했다”고 전했다. 또한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 땅의 아름다움이 발휘되어 많은 이들이 국권 재민의 권리를 지니고 앞으로 나아갔다”며, “100년 전 그날 종파와 계층, 지역을 초월해 민족의 자주독립을 성취하고자 했던 이때의 함성을 재현하자”고 밝혔다. 아우내장터와 제암리, 곽산 등 일제의 학살극으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민족애로 뭉쳐 하나가 되었던 3·1운동 당시 모습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어떻게 해야 연합을 도모할 수 있는지 짚어준다. 100년의 시간을 기념하기 위해 모이는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3·1운동을 기억하고 정신을 계승한다면 그때처럼 진정한 교회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때의 함성이 전국에서 다시 울리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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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2019-02-20
  •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③ - 세계 속에 우뚝 선 한국교회의 모습
    ▲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5·4운동(좌)과 간디의 사티아그라하(우) 3·1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건네고자 했던 메시지는 비록 그들이 희망했던 방향으로 흐르지 못했지만, 전 세계 기독교인이 따르고자 했던 이상에 부합했다.   시대적 한계에 직면했던 이웃교회의 상황이해 필요 민족으로 시작한 한국교회, 세계와 보편애로 일치 추구 20세기 한민족 역사 가운데 3·1운동이 지닌 위치는 그 어떠한 사건보다 중요하다. 힘의 논리 앞에 민족과 개인의 자주성을 상실하고 식민지인으로서 온갖 굴욕에 시달려야 했던 이들에게 자유와 독립은 그 어떠한 가치보다 숭고한 의미를 지녔다. 한국교회 또한 이와 마찬가지였다. 민족구원과 하나님나라를 위해 헌신해 왔던 당시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일제의 무단점령과 폭압정치는 하나님의 역사와 절대적으로 일치하지 않은 길로 여겨졌다. 민족을 분열시키고 결사와 언론, 표현의 자유를 모두 억압했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어를 국어로 교육하고 한국어는 일본어 화자와의 소통을 위한 통·번역 위주로 체계를 세워 가르쳤다. 프랑스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언어가 인간의 사유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우리는 국가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언어 속에서 살아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조국이다’ 3·1운동 이후 잠시 완화되지만, 일제는 한순간도 민족 정체성 제거를 위한 고삐를 풀지 않았다. 이에 한국교회는 바빌론 포로기 유대인들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영하면서 일제에 맞서는 것이야말로 2천 년을 넘어 하나님께서 한민족에게 전하시는 계시로 이해하였고, 유대인의 방식을 따라 일제에 항거했다. 결과적으로 3·1운동 당시 한국교회의 선택은 옳았다. 그들이 희망했던 만큼 일찍 성취하지 못했고 또 다른 강대국들의 대리전을 치르는 아픔을 겪었지만, 민족의 독립과 자유가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질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3·1운동과 당시 한국교회의 모습을 본 이웃들의 시선은 어땠는가? 그들에게 3·1운동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일제와 충돌 인정한 선교사들 일제강점기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은 정치 문제에서는 어떠한 언급도 피한 채 조선총독부와 일제로부터 치외법권을 확보해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관점에서 3·1운동은 어떠한 전조도 느끼지 못했던 예측불발의 사건이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으로 재직했었던 고 송길섭박사는 기독교사상 제249호에 게재한 「선교사들이 본 3·1운동」을 통해 당시 선교사들이 3·1운동을 어떻게 느꼈는지 전했다. “일본이 3·1운동을 선교사와 관련시키려고 하나 우리가 아는 한에 있어서는 선교사들은 이 운동에 처음부터 관여한 바도 없고 또 자세히 아는 바도 없었다. 3·1운동이 터짐으로 일본제국만 놀란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도 깜짝 놀랐다. …… 어느 장로교 선교회의 보고서는 이 운동이 그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이 왔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불현듯 찾아온 3·1운동으로 인해 외국인 선교사들은 적잖은 당황을 표했다. 교회 담임목사들과 선교부 직원들이 대거 투옥되고 교인들이 뒤따라 가는 등 교회 운영에 차질이 생기자 선교사들은 큰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폭압정치를 오랫동안 지켜본 선교사들은 기독교와 일제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당시 한국감리교회 감독이었던 허버트 웰치목사는 “분명히 일본관리사회는 기독교사업에 대하여 불안해하고 있다”며,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의 영도하에 있거나 최소한 외국인의 영향하에 있다는 것 또는 교인들은 일반대중보다는 더 각성하여 있다는 것 그리고 기독교의 이상은 필연적으로 군사정부에는 참으로 귀찮은 존재라는 사실은 모두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고 밝혔다. 일제 통치에 비판적인 시야를 품던 선교사들은 일본이 추구하는 가치가 기독교와 화합을 이룰 수 없음을 알았고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을 설득해달라는 조선총독부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를 통해 비록 자신들에게까지 비밀에 부치며 진행한 만세운동이었지만, 3·1운동에 대한 암묵적 지지를 통해 한국교회가 민족교회로서 자주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일왕 사이에 선 일본 한반도 현지에 머물면서 일제의 가혹한 처사를 몸소 겪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태도는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3·1운동에 많은 호감을 표했다. 하지만 일본교회의 태도는 이와 사뭇 대조적이었다. 도히 아키오교수(일본 도시샤대)의 「3·1독립운동과 일본 기독교」에 따르면 일본 기독교인들 중 상당수는 3·1운동을 조선총독부의 무단정치로 인해 생긴 폐해의 반발로 인식했다. 학교교육에서 일어나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나 무력에 의한 동화정책, 불평등한 토지정책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국가주의적 관점을 지닌 일본 기독교인의 경우 한국교회의 저변에 깔린 편협한 유대적 애국심으로 3·1운동이 촉발됐다고 풀어내기도 했다. 특이한 점으로는 군산교회의 스즈키 타카시목사의 3·1운동 인식이다. 스즈키목사의 관점에 대해 아키오교수는 “일본인의 제국주의적 사고방식과 행동이 그러한 독립운동을 도출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스즈키목사는) 술회하고 있다”고 밝혔다. 스즈키 타카시목사는 3·1운동에 대해 “일부에서는 폭동적인 성격을 지녔던 지역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독립선언’으로 보기에 합당하다”며, “그들을 폭도로 부른다거나 폭동이라고 말하는 일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까”고 밝혔다. 이에 대해 아키오교수는 “필히 그는 3·1운동이 시작되는 모양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며, “그는 3·1독립선언문을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을 면밀히 읽고 운동의 진행경과를 객관적으로 지켜봄으로 당연히 그런 표현이 가능했다고 짐작된다”고 피력했다. 안타깝게도 스즈키목사의 바람과 달리 3·1운동에 대한 일본교회의 관점은 점차 부정적으로 변해갔다. 외국인 선교사들을 변호하던 이시자카 카메지목사는 “이번의 운동은 종교상의 신앙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며, “한국 민중의 입장에서 혹은 한국 민족의 입장에서부터 어떤 의식이 표출되어 나온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선교사들은 한국 독립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며, “그래서 한국인들이 ‘민족자결’이라는 유행어에 미혹되어 독립운동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그들을 설득하여 복귀시켰다”고 밝혔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 아키오교수는 안타까움을 표하고 “(과거 일본교회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채 이 문제를 자각하지 못했다”며, “일본인 기독교인은 왜 천황제와 그 이데올로기 안에 사로잡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그 문제이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3·1독립운동에 있어서의 일본인 기독교인들의 대응의 문제성을 보다 깊이 살펴야 한다고 믿는다”고 전했다.   톨스토이로 묶인 아시아 계획부터 시작, 발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가치가 3·1운동 전반에 깊숙이 들어가 비폭력·평화주의 운동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한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한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중국인들이 5·4운동을 전개한 일은 매우 유명한 일이다. 하지만 3·1운동 속에 깃든 기독교 정신이 5·4운동과 아시아 독립운동에 어떤 연관성을 지녔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와다 하루키교수(일본 도쿄대)는 「아시아 해방사에 3·1독립운동」이란 논문을 통해 3·1독립선언서가 지닌 특이한 점을 확인했다.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면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겠다는 윤리적 각성 촉구와 탄압을 각오하는 3·1독립선언서 속 비폭력혁명사상은 레프 톨스토이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하루키교수는 “선언의 기초자인 최남선은 합병 직전에 잡지 〈소년〉을 경영했는데 잠시 정간처분을 받았다. …… 정간처분 해제 후 처음 호에 그는 장시 ‘톨스토이 선생을 울림’을 발표했다”며, “윤리적 소생의 호소, 비폭력혁명의 입장은 일본 측으로부터 가혹한 물리적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3·1운동의 그 거족적인 결집을 가능케 했던 것은 (톨스토이가 생전 주창했던) 높은 도덕성과 넓은 원칙성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흐름은 다른 나라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5·4운동을 이끌면서 3·1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베이징대 학생들은 성명을 통해 일본인의 윤리적 각성을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전했다. “우리 중국 민족은 대일본 보이콧 운동 중에서 삼가 피눈물을 흘리며 일본 국민에게 충고하는 바이다. 눈을 떠라. 그리고 우리 나라 인민들과 손을 잡고 나아가 저 인도주의의 해충, 평화의 장해인 침략주의자들을 절멸시키고 평화와 행복의 동아 신천지를 건설하자” 이 당시 베이징대 학생들의 중심에는 천두슈를 비롯한 신문화운동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비폭력주의 아나키스트인 크로포트킨과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왔음을 자주 밝혀왔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무저항 평화주의 운동 또한 같은 아시아 국가로서 3·1운동과 기독교가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간디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한국교회가 강조한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하루키교수에 따르면 간디는 사티아그라하로 명명한 이 운동에 대한 견해를 톨스토이로부터 직접 배웠다고 밝혔다. 아시아 사회가 받아들인 기독교는 한국교회가 강조했던 민족주의적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3·1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세계 곳곳에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한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민족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가 하나 되는 범인류적 공동체의 실현이라 정의할 수 있다.   서구사회의 냉대 속 희망 미국 현지에 3·1운동 전개상황과 일제가 자행한 학살 등 탄압을 알리기도 한 프랭크 스코필드박사의 헌신이 있었지만, 당대 서구사회에서 3·1운동이 큰 의미를 지니지는 못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1919년 진행된 파리강화회담에서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미 국무부 또한 주일대사에게 미국 정부는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계획 수행에 일절 도움을 주지 않았으며 독립운동에 동조한다는 의심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과 유럽교회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반도에 있던 선교사들은 3·1운동 이후로도 계속해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지만 이에 응하는 어떠한 답변이나 조치를 발견할 수 없다. 이런 반응의 원인은 다음 2가지 사항으로 손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동아시아 끝자락에 있는 식민지 교회에서 일어난 일, 두 번째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피폐해진 서구 교회의 상황. 시대적 한계로 인해 서구교회가 한국교회에 시선을 두지 못했던 점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해외교회에 충분한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3·1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해외 교회에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고 여길 수는 없다. 당시에는 이루지 못했지만, 끝끝내 독립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도 민족애를 바탕으로 하는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헌신 덕분이었다. 일본인 최초의 대한민국 건국훈장 수여자인 후세 다쓰지가 한국 독립이라는 시대의 부름에 응답한 이유도 그가 열렬히 사랑했던 기독교 정신에 바탕에 있었다. 송길섭박사는 말했다. “카이로회의에 한국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특별조항으로 한국의 일본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승인·결의한 것은 20여 년 전에 한국교회와 한민족의 독립의지의 결의를 전 세계에 과시했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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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12
  •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② - 기독교정신으로 촉발된 2·8독립운동
    ▲ 2·8독립운동은 유학생들의 혈기만이 아니라 기독교 정신에 따른 민족애·조국애로 뛰어든 열정의 산물이었다.   조선기독교청년회서 근촌 백관수 등 독립의지 천명 기독청년으로서 사회화를 도모하는 신앙공동체 건설 민족혼을 지키고 자주독립과 평화를 도모했던 3·1운동이 100년이 지났다. 한국사회 곳곳에서는 이날 민족애로 몸을 불살랐던 순국선열들을 기리고자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3·1운동을 주도했던 한국교회 또한 마찬가지로 믿음의 선조들을 본보기로 삼고자 그날의 함성을 되새기고 있다. 한반도를 뒤흔든 만세삼창은 교회와 사회를 구분하지 않고 한민족 마음속에 깊이 새겨 있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2·8독립운동에 대한 사회 각계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3·1운동의 전조로 평가하기엔 2·8독립운동이 한민족에게 지닌 의미는 각별하다. 근촌 백관수선생을 비롯해 2·8독립선언서가 제시한 비전은 세계의 역사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한민족이 좇아야만 했던 근대적 미래가치를 정확하게 제시했다. 또한 한반도에 건설될 사회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명확하게 짚었던 나침반이었고, 눈물 속에서 민족의 독립과 세계의 화평을 염원한 이날의 기도는 비단 한국교회가 계승해야 할 신앙이라 할 수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2·8독립운동에 대한 평가가 날로 높아지는 지금, 사회와 교계 전반에 걸쳐 2·8독립운동에 대해 조명하는 행사가 늘어나고 있는 현 추이는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8독립운동과 기독교 2·8독립선언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공동위원장=이종걸국회의원, 표용은목사)는 지난달 22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2·8獨立宣言 - 지나온 100년과 이어갈 100년」이란 주제로 2·8독립운동 100주년기념 학술심포지엄과 국민 대토론회를 진행한 바 있다. 이날 개회식에서 이종걸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은 “2·8독립운동은 절망적이었던 일제강점기 속에서 굳은 의지와 신앙심으로 민족독립을 민족 독립을 이끌었다”며, “조선기독교청년회의 선각자를 비롯한 항일 열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상기하면서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겠다”고 전했다. 또한 김인복이사장(서울YMCA)은 “일본의 중심인 도쿄에서 대한민국의 독립과 주권의 회복을 위해 2·8독립운동을 결연했던 우리 애국선열들의 거룩한 외침을 다시 돌이켜보면 실로 가슴이 벅차고 그 울림에 숙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귀한 밀알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개회사에서 언급하듯 2·8독립운동은 민족애와 독립의지만을 바탕으로 두지 않고 있다. 오히려 굳건한 기독교 신앙을 중심으로 거칠게 쏘아 올랐던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이명화위원(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은 「재일본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의 활동과 항일운동」란 주제로 일본에 머물고 있던 조선인 유학생들이 기독교 신앙을 뿌리에 두고 한민족의 독립을 꿈꿨는지 말했다. 이위원은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은 일본인들의 천시를 받고 적대시되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강한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품었다”며, “기독교 단체로서 재일본도쿄기독교청년회는 조선인 유학생들의 정신적 안식처이면서 유학생 사회를 이끌었던 민족운동의 지렛대 역할을 수행했다”고 전했다. 이어 “재일본도쿄기독교청년회는 일본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고난의 시대를 함께하며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켜온 곳이다”며, “그곳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기독청년으로서 사회화를 도모하는 신앙 공동체를 건설했다”고 덧붙였다.   자유·평화 꿈꾼 2·8독립운동 이렇듯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유학생 사회에서 지니고 있던 재일본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근촌 백관수선생과 2·8독립운동을 계획한 독립운동가들이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위해 조선기독교회관에 모인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평할 수 있다. 2·8독립운동에 대해 정치역학적 관점을 통해 해석하는 한편 국제 기독교계가 이를 어떻게 받아드렸는지 알아보는 것 또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김숭배상임연구위원(연세대 통일연구원)은 「한국/조선 민족자결의 발현과 지속 - 2·8독립선언의 응집성」이란 주제로 정치역학적 관점에서 2·8독립운동은 한민족의 자기결정을 발현시켰다고 강조했다. 김위원은 “2·8독립운동은 단순히 3·1운동의 밑바탕이 아니다. 1919년을 기점으로 민족을 지탱했던 역사였고, 민족의 자결을 천명한 것이었다”며, “2·8독립운동을 이끌고 참가한 이들은 타지에 온 조선인 유학생이라는 신분과 우드로 윌슨으로 대표할 수 있는 세계사의 조류를 인지했음은 물론 기독교 사상이라는 배경이 맞물려 거사를 도모했던 것이다”고 역설했다. 또한 2·8독립운동을 필두로 독립운동 근간에 기독교가 버팀목 역할을 했음을 이명화위원은 피력했다. 이위원은 “조선기독교청년회는 각기 다른 배경과 계층을 지녔던 조선인 유학생을 하나로 잇는 연결고리가 되었고 2·8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됐다”며, “이를 통해 조선기독교청년회는 종교적 친목 단체를 넘어 민족공동체의 장이 됐다”고 밝혔다. 이어 “이들의 활동은 기독교 정신과 배치되지 않았기에 일본을 포함해 국제기독교청년회의 지지와 협력을 받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한편으로는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기 힘들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여기에 좌절하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꿈꿨던 조선인 유학생들의 기치를 높게 평가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김석근수석연구위원(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민족’과 ‘독립’과 ‘평화’ - 2·8독립선언의 사상사적 위상과 함의」란 주제로 2·8독립운동이 지닌 사상사적 위치에 대해 밝혔다. 김위원은 “윤치호는 2·8독립운동에 대해 조선인들 마음속에 민족 본능이 살아있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평가했다”며, “조선청년독립단이 독립이라는 단어를 직접 내걸었다는 점은 과감한 결단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해외의 독립지사와 소통하고 있던 유학생들은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가 조선과 한민족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며, “그러나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조선인들이 주체적으로 독립을 선언해 국제사회의 원조를 이끌어내고자 독립운동을 감행했다”고 덧붙였다.   도쿄 기독교청년회의 오늘 수많은 전문가들이 전했듯 2·8독립운동의 배경에는 기독교 정신과 기독교 공동체가 서 있다. 특히 도쿄에 있던 조선기독교청년회는 2·8독립운동의 산실이자 한국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의 후신인 도쿄 재일본한국기독교청년회는 2·8독립운동의 정신을 잇기 위해 매년 2·8독립운동 기념식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지난 2008년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2·8독립운동 기념박물관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으며, 2017년부터 총 8차례 진행한 2·8독립운동 공개 세미나 자료를 책으로 발간할 계획이다. 2·8독립운동 기념박물관은 2·8독립운동 관련 서적과 신문, 사진 등을 일본어와 한국어를 병기해 전시하고 있다. 또한 독립운동 기념비를 세워 당시 독립운동을 통해 조선인 유학생들이 잇길 바랐던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2·8독립운동을 누구보다 가장 숭고하게 기리고 있는 도쿄 재일본한국기독교청년회는 올해 2·8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박물관 자료실 재개관과 영상물 제작,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열기 위해 모금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2·8독립운동 기념박물관 실장 타츠키 카즈히사는 1천만 엔을 목표로 세워 작년 가을부터 진행한 2·8독립운동 100주년 모금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타츠키실장은 “2·8독립운동은 식민지 시대 지배국의 수도인 도쿄에서 목숨을 바쳐가며 독립을 외쳤던 용감한 역사이다”며, “2·8독립운동 기념박물관은 한국과 일본 젊은이들이 찾아와 과거에 대한 반성과 화해를 통해 미래를 바라보길 희망하는 곳이다”고 밝혔다. 또한 “2·8독립운동이 일본의 청소년들에게 알려져 과거를 마주 보고 역사 인식이 미비한 일본의 현실을 극복하는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며, “2·8독립운동 기념박물관이 이를 돕는 공간이 되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3·1운동으로 교회갱신 1919년 민족의 자유를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신앙의 선조들을 기리고자 교계 각지에선 이를 기념할 준비로 분주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이홍정목사)와 한국교회총연합(공동회장=이승희목사, 김성복목사, 박종철목사)은 오는 3월 1일 정동제일교회(담임=송기성목사)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연합예배를 진행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총회장=림형석목사)과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측(총회장=김성복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감독회장=전명구목사) 등 주요 교단들도 각각 3·1운동 100주년 연합예배와 3·1운동 만세길 걷기 등 기념행사를 다채롭게 준비하고 있다. YMCA는 오는 3월 1일 정오에 광화문광장에서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 개최해 한반도 평화로 나아갈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또한 오는 7일부터 9일까지 재일본한국기독교청년회에서 2·8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진행하는 전야제와 기념식, 심포지엄에 한국교회 대표단이 대거 참석한다. 과거 믿음의 선진들이 바랐던 민족독립의 염원은 지금 대한민국과 한국교회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잠들었던 한민족의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그날의 외침에 대해 이성희회장(교회협)은 “3·1정신이 외쳤던 억강부약의 질서는 성서가 말하는 산이 낮아지고 골짜기가 메워지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위로와 맞닿아 있다”며, “3·1운동 100주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사회 건설의 기회였다”고 전한 바 있다. 폭압의 화염 속으로 몸을 내던졌던 믿음의 선배들이 뿌렸던 씨앗이 지금의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날의 함성 속에 깃들었던 민족애를 한국교회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또한 이번 3·1운동 기념행사들이 단발성으로 거창하기만 축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사를 계기로 과거 교파 간 차이를 넘었던 모습을 따라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 갱신을 위한 도약의 발판이 되길 희망한다.
    • 교계종합
    • 기획
    20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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