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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병원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 출간서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예수병원(병원장 신충식)은 전 김민철 예수병원장의 출간서가 2023 세종 도서 교양 부문 추천도서에 선정되었다고 7일 밝혔다.  이번 선정된 ‘의사 주보선’은 삶으로 선교를 보여준 한 의료선교사의 삶과 유산을 기록했으며, 김민철 저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선교 의료병원인 예수병원에서 내과 수련을 받는 동안 주보선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예수병원 병원장을 역임(2004~2010년) 했으며 한국누가회(CMF)이사장과 밴쿠버기독교 세계관 대학원(VIEW) 생명윤리 객원 교수직을 겸했다.   현재 인턴 서브 코리아 이사장이며 저서로 '성경의 눈으로 본 첨단의학과 의료'(아바서원,2014)가 있고, '상처받은 세상, 상처받은 치유자들'(IVP) 외 여러 권의 책을 번역 출간했다.  김병선 예수병원 홍보실장은 “우리는 예수병원 의사 주보선을 통해 환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진지한 의사의 태도를 배웠다.”며 “의료선교병원으로서 생명존중과 기독의사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성장하는데 주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밝혔다.  한편 세종도서는 매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양서 출판 활성화와 독서문화 증진을 목표로 교양 부문과 학술 부문의 우수도서를 선정해 발표하고 있으며 이는 공공도서관, 작은도서관, 대학도서관과 사회복지시설 등에 무료로 보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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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7
  • [부활절특집: 부활절 에세이] 부활이 가져온 능력
      진실로 ‘성령 받은 자’가 숨길수 없는 능력은 바로 죄 사함의 권세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오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라는 말씀으로 축복하셨다.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평강을 주셨다. 평강의 생명이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될 때 흔들림이 없는 믿음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축복은 제자들의 모임 중에 받은 기름부음이었다. 제자들이 서로 교제하는 곳에 평강이 임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의 교회도 제자들처럼 모임에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본능이다. 성도들이 서로 모이기를 힘쓰는 것은 영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생활이 영적인 현상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지체는 서로 교통하며 연합하기를 기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개별적인 역할을 위해 택함 받지 않고 주님의 지체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의 순기능에 속한다. “모이기를 힘쓰는~”(행2:46),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히10:25)는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평강의 축복임을 알수 있다. 성령을 받으라  부활하신 주님의 두 번째 축복은 바로 주님의 생명을 우리 속에 부은 것이다. 숨을 내쉬며 주님께서 불어 넣으신 것은 성령의 생명이시다. 이 생명을 주심으로써 저들을 우리 중에 하나와 같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한 일이 성취되었다.(요17:11) 성령을 주심으로 주님의 옆구리에서 흘리신 물의 역사를 증거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로 인해 주님의 생명을 받았음을 알게 하신다.(요일5:13)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의지하여 천국 시민의 삶인 거룩한 생활을 살게 된다.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성령의 능력이 상실된 힘없는 믿음이 될 뿐이다. 옛사람을 의지하는 본능적인 삶을 떠나 성령이 인도하는 새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 부활생명은 믿는 자 누구든지 새사람의 삶이 가능하도록 축복하셨다. 죄 사함의 권세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명령하셨다. 성령을 받은 자가 행하는 일이 기사와 이적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진실로 성령을 받은 자가 숨길 수 없는 능력은 바로 죄 사함의 권세이다.   만약 우리들의 믿음으로 엄청난 역사를 이룬다 해도 이 죄 사함의 권세가 없다면 성령의 속성을 약화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3). 죄 사함의 권세는 성령께서 하시는 역사이다. 주님은 주기도문에 주님의 나라와 영광과 권세를 구하기 전에 죄 사함받는 길을 가게 하셨다.    우리는 매일 죄를 사하는 권세를 사용해야 한다. 이 권세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죄의 세력 앞에 무력한 신자들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죄사함의 권세로 형제를 용납하는 만큼 용서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며 악의 사슬이 끊어지는 죄 사함의 권세를 회복하는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하자.   이러한 일에 놀라운 영성과 축복의 주인이 바로 베드로였다. 베드로의 영성은 앞으로 지을 죄도 용서받은 죄 사함의 권세에 있었다. 부활의 아침을 새롭게 맞이하기 위해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 이 세 가지의 축복이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대전 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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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6
  • 이해경시집 「사랑의 향기」 화제
      이해경시인(사진)의 시집 〈삶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사랑의 향기〉를 도서출판 사랑의 장막에서 펴내 화제가 되고 있다. 이시인은 2013년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노래〉란 첫 시집과 함께 등단했다. 그러나 2018년 『시선』 신인추천으로 재 등단한 것이다. 그는 시인이면서 목사이며, 간호사와 상담사, 선교사란 직책을 지니고 있다.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들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형상화 행복한 삶의 여정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길로 인도      ‘끝없는 사랑’의 길   이해경시인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 그 사랑은 순수한 사랑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오늘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의 근원’인 아가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늘은/산 너머 있는 것을/보라고 일러 준다//그 말이/너무도 어려워/깨닫지를 못한다//가보지 않았기에/그 곳을 상상할 수가 없다//하늘은/또다시산 너머 있는 것을/보라고 일러 준다//이제야/그 말의 의미를/조금씩 깨닫는 오늘이다 -「하늘의 사랑」의 전문     이 시에서는 ‘하늘’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하나님에 대한 화자의 깨달음을 표현했다. 첫연은 하나님의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은 “보라고 일러 준다”는 구절처럼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됨을 보여 준다. 제2연과 제3연은 첫 연의 가르침에 대한 깨닫지 못한 상황이다. 제4연은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에 의한 가르침이다. 하나님은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않고 또다시 가르쳐 주고, 제5연에서 이제야 깨닫는 것이다. 첫 연에서 “산 너머 있는 것을”이란 구절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세계’를 말한다. 화자가 위치한 바로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 너머’란 장소를 지칭한 것은 ‘산’이 주는 신비스러움으로 ‘산 너머’를 신비스럽게 격상시켜 준다. 그 ‘산 너머’에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 너머 있는 것을/보라고 일러 준다”란 구절은 제1연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연유한 가르침이다. 제2연과 3연은 결과이다. “그 말이/너무도 어려워/깨닫지를 못한다”(제2연)거나, “가보지 않았기에/그 곳을 상상할 수가 없다”(제3연)고 하나님을 향한 초보적인 신앙을 표현한 것이다.    행복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   기독교인의 행복한 삶은 일반적으로 의에 대한 보상으로써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주어지는 즐겁고 복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으로 몸과 마음이 흐뭇하고 만족하여 부족이나 불만이 없는 삶이다. 성경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나와 있다     다음의 시는 행복주의적인 삶을 볼수 있다. 행동과 행위에 의해 성취되는 삶이며, 윤리적 목적 및 궁극적 목표가 행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대 앞에서/오늘의 무릎을 꿇는다/세상의 눈을 감고/세상의 귀를 닫고/빛의 음성을 듣는다//그의 앞에서/오늘의 무릎을 꿇는다/빛의 눈을 뜨고/빛의 귀를 열고/빛의 옷을 입는다.  - 「그대 곁에서」의 전문     이 시에서의 ‘그대’는 하나님을 가르킨다. 첫 연의 ‘빛’과 제2연의 ‘빛’의 의미가 다르다. 첫 연의 ‘빛’은 하나님을 지칭하고, 제2연의 ‘빛’은 화자의 ‘신앙’을 의미한다. 화자는 신앙적인 삶 속에서 행위의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을 신앙에 두고 실행하고 있다. 그것은 행복주의 자의 삶이다. 첫 연에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나, 세상의 눈을 감고 귀를 닫는 것,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연에서 그대 앞에서 무릎을 꿇거나, 신앙의 눈을 뜨고 귀를 여는 것, 신앙의 옷을 입는 것이다.    어머니·아버지의 삶 속에 나타난 사랑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시들은 ‘사랑’으로 귀결되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 그 자체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고, 그것은 사랑에 연유한 것임을 보여 준다. 그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임을 보여 준다.      「어머니의 하루」란 시는 어머니의 일상적인 삶을 간결하게 형상화했다. 오직 가족을 위한 삶이었음을 보여 준다. “차가운 하루의 문을 열고”란 구절의 ‘차가운 하루’는 어머니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을 함축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삶이다. 또한 “우리의 밭을 일구셨다”란 구절의 ‘우리’란 화자를 비롯한 가족을 의미하고, ‘밭’은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때로는 비바람이 되고”나, “때로는 햇빛이 되어”서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인 ‘밭’을 일구신 것이다. 이 ‘비바람’과 ‘햇빛’은 어머니의 희생에 대한 표현이다. 화자는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희생을 떠올리는 오늘이다. “어머니의 의자에 앉아”란 구절은, 어머니의 삶을 돌아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버지의 무게」란 시는 가정을 위한 아버지의 삶을 형상화했다. 아버지의 삶을 ‘무게’로 표현했다. 무거울수록 힘든 생활임을 보여 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부터는 아버지가 가장(家長)이 되고, 가정을 이끌어 가기 때문에 아버지의 무게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세상의 세찬 비바람에”란 구절로 집약된 삶에 대한 어려운 환경이고, 그 어려움은 “쌓이고 쌓인 아픔의 세월”인 것이다. 그래서 밤마다 가족들 몰래 눈물을 흘린다. 주위 환경으로 인해 “날마다 무게를 더하고”란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가족을 위한 아버지의 삶을 극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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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16
  • ‘광고’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다, 복음의전함서 전도 플랫폼 세미나
    ◇광교선교단체 복음의전함은 들어볼까 세미나를 연다. 사진은 인천지역 세미나.   유명인 간증과 목회자들이 풀어낸 콘텐츠를 짧은 영상에 담아 지역별 각 교회서 「들어볼까」란 세미나로 새로운 전도법 소개   사단법인 복음의전함(이사장=고정민)은 광고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다음달 13일까지 전국의 교회에서 「들어볼까 세미나」를 진행한다. 코로나 팬데믹의 완화와 함께 이전에 참여했던 교회들의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7개 지역 교회에서 열린다. 7월 5일 10시에 고양시 일산광림교회를 비롯한 7월 7일 10시에 서울시 여의도침례교회, 7월 8일 10시에 서울시 광림교회, 7월 8일 20시에 춘천시 순복음춘천교회, 7월 11일 10시에 강릉시 강남성결교회, 7월 12일 10시에 부산시 포도원교회, 7월 13일 10시에 용인시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가진다.   세미나는 동 단체 고정민이사장이 대표연사로 참여한다. 전도 플랫폼 「들어볼까」 구성을 안내하고, 새신자를 교회에 오게 하는 「들어볼까」의 활용방법을 설명한다. 또한 코로나19를 겪으며 온라인 위주로 바뀐 문화의 흐름에 따라 SNS 등 미디어를 활용한 실질적인 전도 방법을 제안한다.   세미나 참석 교회에 제공되는 특별혜택도 있다. 「들어볼까」 내에 지역교회 연결 서비스인 ‘교회찾기’에 교회를 무료로 등록할 수 있다. 또한 명함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명함을 받은 사람이 교회로 찾아올 수 있게 하는 ‘복음명함’의 원본 디자인 파일이 무상으로 제공된다. 미자립교회에 제공되는 혜택도 있다. 세미나에 사전 신청한 미자립교회 중 각 지역 선착순 30교회에 복음 광고 전도지가 무료 제공될 예정이다.   동 단체 고정민이사장은 “결국 복음을 전하는 일은 교회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세미나를 통해 미디어 전도가 전국 각지 교회에서 시작되어 5천만 국민 전도운동으로 이어지고, 주님의 복음이 곳곳으로 흘러가 대한민국 교회가 새롭게 믿음을 가진 이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고 전국 교회의 참여를 독려했다. 「들어볼까」를 통해 제안되는 새로운 전도 방식은 대한민국 복음의 불씨를 다시 한번 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편 동 단체는 지난해 12월 새로운 전도플랫폼 「들어볼까」를 공개했다. 「들어볼까」에는 유명인의 간증과 목회자들이 알기 쉽게 풀어낸 기독교 교리 콘텐츠가 5분짜리 짧은 영상으로 담겨있다. 동 단체는 “교회에 한 번도 가본 적 없거나,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거부감 없이 올바르게 소개하고 전도하기 위해 「들어볼까」를 제작했다”고 밝혔다.   동 단체는 교회에서 「들어볼까」로 복음을 전파하는 데 활용할 수 있도록 교회 대상으로 설명회를 계속 개최해 오고 있다. 기존 설명회는 사전신청한 교회를 대상으로 줌 온라인 설명회로 개최됐었다.     이전 설명회에 참여했던 목사들은 “전도에 대한 막막함이 있었는데 너무 좋은 정보와 콘텐츠를 알게 되어서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며,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쉬운 콘텐츠를 이용해서 비신자들과의 접촉점을 찾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감사하고 기대된다”고 소감을 밝혔다.   사단법인 복음의 전함은 광고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비영리 광고선교단체다. 광고라는 도구를 통하여 비신도들을 대상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노출하고 사람들의 생활권 안에서 녹아든 세상을 만들기 위해 광고선교사역의 사명을 감당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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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4
  • 기독정신과 사회사상의 변증법적 통합(5) -김말봉의
       일본에서 귀국한 청년 윤창섭은 언니 허윤숙의 애인이었다. 윤창섭의 돌연한 출현이 최순애의 생활에 일종의 활기를 불어넣어준 것이다. 언니의 애인이 왜 순애의 삶에 활력소가 되었을까. 윤창섭은 말하자면 염상섭의 <삼대> 속의 김병화와 같은 인물이었다. 당시의 유행어로 ‘마르크스 보이’인 셈이다.     그 청년 앞에서 순애는 돌연 <삼대> 속의 홍경애의 위치로 변해버린다. 술집 바커스의 여급 신분이었던 홍경애가 김병화(마르크스 보이)와의 관계를 성숙시켜 가면서 여걸의 위치로 점차 격상되듯이, 최순애 역시 윤창섭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새로운 여성 사회운동가로 서서히 변화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참다운 동지를 얻게 되어 기뻤던 윤창섭은 최순애에게 처음엔 동지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더니, 다음에는 자기 애인 허윤숙과의 합의를 거쳐서인지 윤숙의 언질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구혼 공세를 해 온 것이다. 언니(윤숙이)가 자기 애인 윤창섭을 최순애에게 넘겨주기로 작심해 버렸다는 뜻이었다.     순애가 반신반의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아마도 언니 허윤숙은 주의자(主義者)로서의 윤창섭이 동지애로 긴밀히 결속되어 있는 최순애와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 두 사람, 또는 세 사람 모두에게 결과적으로 좋을 일이라고 하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망명녀>(1932)에서의 이런 상황 전개는 그보다 1년 앞서 나온 염상섭의 <삼대>(1931)에서의 경우와 상당히 닮아 있다. 지금껏 보아온 윤창섭·허윤숙·최순애의 삼각관계는 <삼대>에서의 이필순·김병화·조덕기의 삼각관계의 변이형태라고 볼 수 있다.     <망명녀>에선 남성 윤창섭을 가운데에 놓고 두 여성이 서로 사랑을 양보하는 모습이지만, <삼대>에서는 여성 이필순을 가운데에 놓고 남성들이 사랑을 양보하는 형국이다. <삼대>의 이런 국면이 <망명녀>에 와서 하나의 변이형태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망명녀>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면, 어떻든 결과는 세 사람 모두가 순조로운 합의에 이르게 되고, 한 쌍의 남녀는 결혼 날짜까지 잡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식 당일에 이르러 의외의 돌발 사태가 일어나고야 말았다. 최순애가 각기 두 사람 앞으로 쓴 편지들을 남겨둔 채 어디론가 잠적해버리고 만 것이다.     순애는 윤창섭의 동지들로부터 날아온 어떤 지령(암호문)을 접한 뒤, 자기 예비 신랑을 대신해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제 스스로 일방적 파혼 선언을 해버린 뒤 목적지를 향해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소설 <망명녀>는 한마디로 ‘사랑의 노래’이다. 이 사랑의 노래는 결코 애가(哀歌)일 수 없고, 찬가(讚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랑의 비극을 다룬 것이 아니라 사랑의 승리를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외국의 모처에서 망명녀의 신세로 살아가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최순애는 자신이 바라서 스스로 그런 지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조금도 비극적이지 않다.     윤창섭은 결혼식 당일에 신부가 될 여인이 잠적해 버리는 불행에 잠시 처해지기는 하지만, 이 경우에도 결코 비극적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윤창섭이 최순애의 지극한 사랑을 당시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양보하였던 사랑을 되찾게 된 허윤숙의 경우도 결코 비극에 이른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약간의 해프닝을 치른 코믹한 감정에 그녀가 빠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또 그들 세 사람 중에 어느 누구가 그런 것 외에 다른 경망한 감정에 휘둘린 일은 있었던가? 아니, 세 사람 모두가 매우 엄숙하리만큼 진지하기만 할 뿐이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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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1
  • 기독정신과 사회사상의 변증법적 통합(4)-김말봉의
        김경순, 여운영 등에 이어서 전상범의 세 번째 부인이 된 바 있었고, 또한 이석현, 전상범에 이어서 세 번째 남자 이종하와 또다시 결혼을 한 바 있는 김말봉은, 이 모든 사실이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속칭 인생의 쓴맛과 단맛은 다 경험해 본 바 있는, 어찌 보면 최적의 통속(대중) 작가 감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그 결실이 바로 그녀의 공식적인 데뷔작 <망명녀>(1932)였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망명녀>를 무슨 통속소설의 샘플(모범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기에는 그 작품 자체가 결코 허락하지 않는, 그 결과 어느 정도의 품위는 스스로 지니고 있는 소설 작품이라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 이 소설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 보기로 하겠다. 김말봉의 작품 <망명녀>에는 세 명의 남녀 젊은이들이 등장하여 ‘사랑’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다. 여기서 세 명의 젊은이들이란 최순애(산호주), 허윤숙, 윤창섭 등, 두 명의 여성들과 한 명의 남성이다. 이들 세 사람 사이에는 일종의 ‘애정의 삼각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생 신분인 산호주(최순애)는 요리집 명월관에서 남자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야 하는 힘겨운 하루하루의 삶을 버텨 나간다.   그런데 오 주사의 몰인정과 행패를 견디다 못한 그녀는 오 주사에게 폭력적 자세로 맞서게 되고, 그 결과 순사에게 끌려가기까지에 이른다. 얼마 뒤 훈방되어 집으로 돌아와 보니 허윤숙의 명함이 놓여 있었고, 저녁때 만나자고 하는 내용의 글발도 거기에 함께 적혀 있었다. 허윤숙은 최순애(산호주)의 여학교 시절 상급생 언니였는데, 그동안 외국 유학을 갔다가 그 과정을 마치고 얼마 전 귀국했던 것이다. 이 허윤숙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산호주(최순애)는 8년 전의 과거사를 회상해 보게 된다.   C여학교 3학년 시절, 최순애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돈 십 원을 훔친 것이 발각되어 그 학교에서 퇴학당했고, 딸(그녀) 때문에 직장마저 잃어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자기(그녀)가 직접 직업전선에 나서게 되었으며, 그 결과 지금의 신분, 곧 명월관의 기생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갑자기 허윤숙이 나타나 산호주에게 “너는 이제부터 자유의 몸이다.”라고 선언하였다. 내용인즉슨, 허윤숙이 요리집 명월관 주인의 요구대로 몸값 3백 원을 지불하고 산호주를 기생 신분에서 해방시켰던 것이다.   그 후 최순애는 언니 허윤숙을 따라 그녀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녀는 점차로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명월관에서 나온 이래 잠깐 잊고 있었던 모르핀 주입의 악습마저 되살아나게 되었다. 궐련을 자기(언니) 면전에서 빨고 몰래 모르핀 주사도 맞는 최순애를 구원하기 위해 언니 허윤숙은 그녀를 데리고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석 달을 겨우 넘기고 최순애는 교회 출석마저 그만둬 버렸고, 하나님 앞에서의 간구(기도)까지도 ‘아이들의 숨바꼭질 장난’ 정도로 여겨 중지하고 말았다. 최순애는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자기신세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점차로 자학적인 몽상에 사로잡히고, 더할 수 없는 자신의 비운을 저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 갑작스런 어떤 새로운 인물의 출현으로 그녀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 그 새로운 인물이란 일본에서 최근 귀국한 윤창섭이란 이름의 청년이었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2-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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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교자의 희생양(속죄양) 의식(3)-김은국의 〈순교자〉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신 목사는 동료목사들을 배반한 일이 없었다. 신 목사 자신이 그 사실을 증언하지 않았으므로 잘 알 수 없었지만, 국군에 의해 포로로 잡힌 정 소좌(인민군)에 의해서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났으므로 신 목사가 혐의가 없다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만일 정 소좌의 증언이 없었더라면 신 목사의 혐의는 끊임없이 추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가정컨대 신 목사 자신이 자기는 동료 목사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고 스스로를 변호했다고 하더라도, 살아남은 목사의 그 발언을 액면 그대로 믿어줄 사람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든 신 목사는 자신을 변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자신을 변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가 배신자노라고 청중 앞에 공언하기까지 하였다. 명백히 이 발언은 사실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도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신 목사를 규탄하고 해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들은 시위를 통하여 신 목사를 “유다!”라고 지탄했던 것이다. 예수를 판 가룟 유다처럼 동료 목사들을 배반하고 자기만 살아남은 뻔뻔한 인간이란 식으로 신 목사를 대했던 것이다.   신 목사가 그러면 어떻게 살아남았었던가? 정 소좌의 말에서 드러난 것이었지만 모든 목사들이 인민군에 굴복하여 살려 달라고 애걸하고 동료 목사를 불리하게 만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 목사만은 떳떳하고 의연하게 그 취조하는 인민군 심문관에게 대들었던 것이다. 그 담대한 모습에 감탄한 심문관이 신 목사는 살려주고 나머지 열두 목사들은 총살하고 말았던 것이다(이때 한 젊은 목사는 정신이상 증세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 결과 총살은 면했다고 한다).   이렇게 살아남아 있었던 신 목사이지만 신도들 앞에 결코 자기의 의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가 현장에 자신은 없었다고 거짓말했던 것도 실은 사실을 말하지 않으려고 그리 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죽은 동료 목사들의 추태를 말하거나 상대적으로 신 목사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거나 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그리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다음 그 자신이 현장에 있었고 자기가 배신자라고 뒤에 번복하고 나온 것은 자신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희생자가 되겠다는 각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그런 과정을 통해 상대적으로 열두 목사들의 위치를 공고히 해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신목사의 의연한 자세가 바로 순교자의 자세라고 작가는 말하려고 한다. 이러한 신목사의 자기희생적 태도는 박계주의 <순애보>에 나오는, ‘또 하나의 십자가’ 편의 피엘 신부의 태도와도 방불하다고 하겠다.   동족상잔의 폐허 속에서 극단으로 주리고 병든 신도들이 자신들의 절망감을 이기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자기들이 지금껏 신뢰해 왔던 목자의 떳떳하고 의연한 순교라고 할 때, 그 신도들에게 절망감을 배가시킬 것이 뻔한 그 사실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는 게 신목사의 기본 입장이었던 것이다. 만일 사실대로 말한다면 그들이 이 고난의 현실을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를 생각할 때 도저히 신 목사 자신으로서는 그리 할 엄두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신 목사에 의하면 누구나 다 십자기를 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와 같은 사람이 십자가는 지고, 대신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들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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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1-10-03
  • 순교자의 희생양(속죄양) 의식(2) - 김은국의
       신이 제 구실을 할 때의 순교자와 그렇지 못할 때의 순교자는 그 개념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전자의 순교자가 전통적인 것이라면 후자의 순교자는 탈전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두 부류의 순교자들이 제시되는데, 하나는 12명의 죽은 순교자들이고, 또 하나는 1명의 산 순교자(신 목사)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열두 명의 죽은 목사들이 진정한 의미의 순교자냐 하면, 또한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에(다시 말하면 순교자로서 떳떳한 죽음을 한 목사들이 아니었으므로) 이 작품에서의 실질적인 순교자는 신 목사 한 사람에 국한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살아있는 사람이 어떻게 순교자가 될 수 있느냐는 의문만은 계속 남아있게 하는 위력을 발하는 이 작품은, 그러므로 여기서 순교자가 누구냐 하는 데 대한 어떤 정답을 제시하는 일에는 별 흥미를 보이지 않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의 정치적 탄압이 어떻게 기독자들의 자기정체성을 잃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체험기로 루마니아 목사 R. 범브란트의 <하나님의 지하운동>과 불가리아 목사 H. 포포프의 <믿음 때문에 당한 고문> 등을 들 수 있다. 범브란트 목사나 포포프 목사의 수기 속에서 동료 목사를 배신하는 이들이 불가불 출현했던 것처럼, <순교자>의 정치적 상황 하에서 배신자들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 배신자들이 자신의 영달이나 편의를 위해 그리 한 것이라기보다는 너무도 심한 육체적 고통을 이겨낼 길이 없는 나머지, 인간의 약점에 스스로 굴복해   그리된 것이므로 이런 행위에 악의적 해석을 내릴 수만은 없는 것인 줄 안다.    이런 실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 배신자들의 치부를 숨겨주려고 한다. 그 두 사람이 다름 아닌 신 목사와 장 대령이다. 그러나 결과야 같다 치더라도 동기 면에서 볼 때 두 사람의 관용의 성격은 전혀 다르다. 신 목사의 경우, 그 자신이 목도한 배신자들의 추태를 덮어주려고 하는 데에는 문자 그대로 ‘종교적’ 순수성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정보장교인 장 대령이 배신자들의 실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그 사실을 덮어주려고 하는 데에는 그 어떤 정치적 목적의식이 뚜렷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장 대령도 그런 은폐 작업을 통해 무슨 악의적인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저의를 지녔다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자신이 필요로 하는 어떤 정치적 의도에 그 사건을 짜 맞추려는 기본 입장만은 견지했다고 하는 데서 두 사람의 ‘종교적’ 동기와 ‘정치적’(군사적) 동기가 동일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사정 모두를 다 알고 있는 독자에게 신 목사는 그렇게 비쳐지지만, 그 내막을 정확히 알 수 없었던 신도들이나 일부 목사들에게 신 목사는 오히려 배반자로 몰리고 있다. 그가 이런 오해를 받는 것은 공산군에게 잡혀간 목사들 열네 명 가운데서, 열두 명이 죽고 두 명은 살아남게 되었을 때 그 살게 된 두 명 중의 하나가 바로 신 목사였기 때문이다(그중 한 명은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렸으므로 크게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신 목사는 처음 동료 목사들이 살해될 때 자신은 그 현장에 없었노라고 말했다가, 후에 그 말을 번복하고서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무언가 뒤가 구린 데가 있는 사람으로 평양 신도들에게는 비쳐졌던 모양이다. 물론 이때의 신도들이란 대개 자신들의 담임목사를 졸지에 잃게 된 슬픈 양떼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가뜩이나 목자를 잃은 허전함에 싸여 있다가 자신의 약점을 보이는 신 목사를 목격하게 되면서 신도들은 극도의 분노에 떨게 되었고 급기야는 신 목사의 거처를 습격하는 일까지 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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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2021-09-13
  • 순교자의 희생양(속죄양) 의식(1) -김은국의 〈순교자〉
      순교 또는 배교의 문제는 문학의 영원한 주제가 아닌가 싶다. 이 문제를 주제로 삼아 쓴 소설들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외국의 작품들로는 아무래도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 〈위대한 몰락〉, 〈여자의 일생〉 등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국내 작품으로는 서기원의 〈조선백자 마리아상〉과 김성일의 〈제국과 천국〉 등을 들 수 있을 것으로 보는데, 이 대열에 좀 애매한 위치로 서게 될 김은국의 〈순교자〉도 한 몫 끼게 될는지 모른다. 이 말은 〈순교자〉가 국내 작품으로 인정되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생존 시에 김은국 작가가 미국 국적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김은국의 〈순교자〉는 국내 작품으로 거론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외국(미국) 작품으로 치기도 석연찮은, 참으로 국적 미명의 작품으로 우리에게 인상 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그(김 작가)를 제쳐놓고 한국 기독교소설을 운위하기가 매우 궁색하다는 이유로 그를 끌어안기로 한 것이다. 이유는 이렇다. 어떻든 그는 한국 혈통의 작가요, 한국인의 숨결과 정신이 강하게 느껴지는 그의 작품 세계, 그리고 한국적 배경을 떠나서 그의 소설 세계가 성립되기 어려웠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 등에 불가피하게 끌렸기 때문이다.   1964년에 나온 이 작품(원작)은 그 2년 뒤(1966)에 나온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과 많은 면에서 비교되어야 할 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회가 극도의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될 때 거기서 순교와 배교의 문제가 발생하며, 자동적으로 순교자와 배교자의 출현도 있게 된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 시절의 노바티아누스파와 도나투스파가 겪었던 일들이 이의 가장 고전적인 사례가 된다고 보겠지만, 그 후 교회의 역사에서 이런 일들은 무수히 반복됐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순교와 배교의 문제를 공통적으로 다루었다는 면에서(만) 〈순교자〉와 〈침묵〉이 유사하다는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중반에 나온 이 소설들은 그 공통의 주제, 곧 순교와 배교의 문제를 다루되 앞서 프랑스 문학에서 유행하던 일종의 ‘신 부재의 문학’, 또는 ‘신 침묵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 정신에 기초하여 작품들을 생산해 냈다고 하는 면에서 두 작품은 상호 크게 유사한 데가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은 역시 당대에 유행하던 ‘신 부재(침묵)’의 사상이나 ‘신 죽음의 신학’이라고 할 기독교 신학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런 유(類)의 문학 작품들이 다분히 종교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수긍하게 만든다고 하겠다. 슈사쿠의 작품 〈침묵〉은 그러니까 ‘신의 침묵’이라고 할 때의 그 ‘침묵’의 의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김은국은 그의 〈순교자〉 속에서 주인공 신 목사의 입을 통하여, 전통적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신성 모독적 발언을 해 대는 것이다. 말하자면 목사 신분인 사람에게서 저런 발언이 다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일반 독자들이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치명적 발언을 해 댄다는 것이다. 이는 신 목사에 의해서 신은 인간의 영역에 개입할 수 있는 면적을 거의 잃어가는 대신, 그만큼 그 잃어진 자리를 ‘인간’ 스스로가 메꾸고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신의 침묵의 시대에, 또는 신 부재(내지는 죽음)의 시대에 할 수 있는 인간의 일이란, 그 부재(또는 죽음)의 신의 영역을 인간 스스로 보완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신 목사는 그의 실천행위로써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그 때문에 신 목사의 언어나 행동이 초월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9-08
  • 미물들의 메아리 없는 항변(하) -이청준의
    그러는 동안 진범이 체포되었고, 그 범인이 바로 아들이 다니던 주산학원의 원장 선생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알암이 어머니는 격렬한 증오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럴 때 다시 김 집사가 나타나 범인을 증오로 대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써 대할 것을 권고해 온다. 그러는 김 집사의 말에 반발심을 느끼던 그녀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을 바꿔 먹고 범인을 용서해 주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결국 그녀는 사형수를 찾아가 용서의 증거를 보여 주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열려 가던 그녀의 마음은 갑자기 꽉 닫히고 말았다. 그 이유는 사형수가 처형을 앞두고 기독교에 귀의해 마음의 평안을 이미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그녀를 절망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그 일을 그녀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한 그녀는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그녀는 자기보다 먼저 그 범인을 용서해버린 하나님에 대해서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은 자기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가더니 이제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할 수 있는 기회마저 빼앗아 버렸다고 하는 데 대한 분노가 신(神)을 향해 치솟았던 것이다.   주님께서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아가 버렸으므로 다시 그를 용서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것이 신의 공평한 사랑이라면 자신은 차라리 신의 저주를 택하고 말겠노라고 외쳐대고 있다. 그 범인에 대한 처형 소식이 들려온 직후 그녀는 자신의 너무도 인간적인 절망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진(自盡)하고 만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한 마리의 벌레처럼 신의 발뒤꿈치에 밟혀 죽고 만 셈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화자, 즉 그녀의 남편은 그 처지가 ‘벌레’의 것과 얼마나 다를 것인가. 아들이 죽고, 뒤이어 아내마저 잃은, 넋 잃을 수밖에 다른 길이 없게 된 남편 역시 미물과도 같은 미약한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작품은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많은 문제점을 제기해 주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신에 대해 저항하고 있다. 부조리한 현실과 그에 대한 해결책이 따로 없는 현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을 마치 당연지사라는 듯이 바라보고만 있는 침묵의 신에 대해 작가는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은혜니 섭리니 사랑이니 하는 추상적 관념으로 감싸져 있는 기독교의 교리나 계율에 대하여 작가는 도전하고 있다. 그는 알암이 이야기와 알암이 어머니 이야기를 내세웠고 그것을 ‘벌레 이야기’라고 하면서도 그러나 이 미물(들)의 외침에 제발 좀 귀 기울이시라고 외쳐대고 있는 것이다. 이쯤 이야기하고 보면 ‘벌레’라는 말의 함축적 의미가 매우 넓게 확대되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벌레 이야기〉는 단지 알암이와 그 어미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다. 그런 처지에 처해 있는 오늘의 미약한 신앙인, 나아가 우리 인간 모두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벌레 이야기〉인 셈이다.   별 신앙 없이 교회에 나다니고 헌금을 하곤 했던 기복신앙의 소유자 알암이 어머니에 대하여 독자들, 특히 기독교 신도인 독자들은 별로 호감을 가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결국 범인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말하자면 불신앙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애초에 그렇게 나약한, 곧 벌레와도 같은 존재라고 하는 이해를 가지고 그녀에게 접근할 때 그녀의 고통과 아픔을 깨닫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인간의 너무도 다양한 고통의 양상들을 지금껏 종교가 너무 안일하게 다루어 온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차제에 해봄직도 하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9-05
  • 미물들의 메아리없는 항변(상) - 이청준의
      작가 이청준의 소설집 〈벌레 이야기〉(심지, 1988) 속에 수록되어 있는 표제작 〈벌레 이야기〉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선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작품의 제목 속에 보이는 ‘벌레’ 이야기는 작품 자체 속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변신〉에 나오는 무슨 벌레[갑충]의 모습 같은 것을 이 소설은 조금치도 보여주지 않는다. 결국 독자는 이 작품을 다 읽고 나서야 여기에서의 벌레란, 미물(곤충)과도 같은 하찮은 존재인 인간을 비유한 말임을 알게 된다.    이 작품 속에 미물과도 같은(‘벌레’와도 같은) 존재는 화자인 남편(‘나’)에 의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 알암이 어머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미 현세의 여인은 아니다. 그녀는 벌써 생명을 잃은 존재로서, 그녀가 어떻게 해서 궁극적으로 그 귀한 생명을 잃게 되었는가의 과정을 이 작품은 진술해 보여주고 있다. 결과를 이야기한다면, 알암이 어머니는 이를테면 신의 횡포에 의해 그녀의 생명을 잃었던 것이다. 적어도 작가의 의중은 이 점을 분명히 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신에 의해 벌레와도 같은 미물로 취급되어 죽음에 처하게 된 여인이 바로 알암이 어머니라는 것이다.    이런 결론적인 면을 염두에 두고 이 작품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이 작품이 기독교 세계관을 옹호하고자 하여 쓴 것은 결코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은 오히려 기독교적 계율에 도전하려는 의도를 더 많이 지니고 쓴 작가의 문학적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설을 기독교문학 작품이라고 강변하려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 작품이 기독교문학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면 이 소설은 기독교적 소재를 갖고 씌어졌으며, 또 기독교의 문제에 대하여 심도 있게 논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기독교의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하여 매우 심각하고도 진지한 물음을 묻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간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질문은 비기독교적인 세계에서는 논의되기 힘들 것이 아니겠는가.    초등학교 4학년의 아들(알암이)을 유괴당해 결국 피살체로 목도하게 된 아내의 고통스런 모습과 막바지에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처절한 아픔을 남편인 ‘나’의 시점에서 묘사한 작품이 〈벌레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4학년에 갓 올라온 순진무구한 소년 알암이가 아무런 죄 없이 주산학원 원장 선생, 곧 알암이의 스승에 의해 납치되어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현장을 보고 독자들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벌레 이야기〉라는 제목에 보이는 벌레는 죽은 알암이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이 작품 속에는 두 마리(?)의 벌레가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미물인 벌레가(어린 알암이가) 속절없이 죽어갔으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서 전혀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아내 역시 불가피한 미물이겠지만, 그러나 그녀가 자살을 감행하기 전까지는 굳이 그녀에게 미물이란 표현을 쓸 만한 사정은 아니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피살체로 발견되고 나서 그 사실을 목도한 아내가 겪는 심적 고통은 극한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그녀에게 이웃집에 사는 김 집사 아주머니가 끈질기게 접근하여, 기독교 신앙에 의지해 살아갈 것을 권고한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김 집사로서는 결코 악의 없는 접근이요, 친절이기도 하였다. 처음엔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알암이 어머니는 그 정성에 감복했던지 마침내 동의하고 교회에도 나가게 된다.  /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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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6
  • 김대건 신부의 적극적인 순교 자세(중) - 이병주의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고(故) 이병주 작가의 이 가톨릭 역사소설의 이해를 위해 잠깐 그 시대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대건은 1821년 태생(충남 당진)으로 1836년 프랑스 신부 모오방으로부터 영세를 받고 그해 12월 최방제, 최양업 등과 함께 유학길에 올라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하여 신학 수업을 받게 된다. 1845년(8월)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 후 1846년(9월)에 사형선고를 받아 새남터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6세였다. 말하자면 1820년대부터 1840년대 중반까지의 20수 년 간이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되어 있다.       여기까지 이르기는 데 두어 차례의 박해가 앞서 있었다. 신해년의 박해(1791) 및 신유년(1801)의 大박해, 곧 신유사옥(辛酉邪獄) 등이었다. (이들 중 특히 후자, 즉 신유박해에 대해서는 서기원의 역사소설 〈조선백자 마리아 상〉을 통해 그 실상이 어떠했던가를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런데, 김대건이 모오방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은 뒤 마카오로 떠날 때(1836)까지 그 어간에는 별 박해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마카오에서 정신없이 신학 수업에 열중하고 있었던 1839년에 이르러 고국 조선 땅에서는 무서운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실상을 신학수업 중이었던 김대건 소년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일은 1839년 1월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이때까지는 조선 땅에 세 명의 외국 신부들이 들어와 있었다. 앵베르 주교, 모오방 신부, 샤스땅 신부 등 프랑스 출신 성직자들이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조선에는 약 1만 명 정도로 신도들이 불어나 있었다. 그러나 무서운 박해가 일어나게 되자 많은 신도들이 풍전등화의 신세가 되어버렸다. 국가 권력이 단순하게 교회를 박해한다고만 해도 많은 이들이 다칠 것이었지만, 사정은 그렇게 단순하게만 진행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세도가(勢道家)들 간의 알력과 당쟁의 와중에 기독교도들이 일종의 희생물로 제단에 바쳐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헌종 5년 기해년(1839)에 일어난 박해, 곧 기해사옥(己亥邪獄)의 배후에는 어떤 정치적 복선이 깔려 있었던가? 선왕 순조의 비(순원왕후)는 안동 김씨로서, 헌종이 어린 나이로 등극하였을 때 대왕대비로 섭정을 맡아보고 있었다. 그녀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온건한 정책을 써 왔는데, 그 이유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를 천주교도였던 정약용이 의술로 치료를 해 준 일이 있었고, 더욱이 효명세자가 서거하자 그 일이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인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효명세자의 부인은 풍양 조씨였고, 이 조씨 일파에서는 김 대비의 대(對) 천주교 온건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교회를 박해함으로써 결국은 김씨 세도의 축출까지를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순원왕후 김씨의 오라버니 김유근 역시 천주교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사람이었지만, 그가 정계에서 물러나고 행정의 실권이 우의정 이지연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을 때, 새 정승 이지연이 천주교 박멸을 주창했으므로, 섭정 순원왕후는 본의 아니게 대세에 몰려 이를 허락함으로써 박해의 분위기가 전국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때 고관들이나 하급 관리들도 이지연 정승에게 영합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천주교 탄압도 말하자면 그 움직임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14세의 소년으로부터 79세의 노파에 이르기까지 이 고난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고, 전국적으로 파급된 박해에 의해 체포된 자의 수가 300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 박해가 끝날 즈음에는 순교자의 숫자만도 113명에 이르고 있었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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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 김대건 신부의 적극적인 순교 자세(상)-이병주의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작가 이병주(1921-92)의 실명소설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는 ‘소설 김대건’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역사상의 실재 인물인 김대건 신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처럼 교역자(성직자) 신분의 실재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소설 작품으로 완성한 일들이 ‘소설 김대건’의 출현 이전에 몇 작가들에 의해 시도된 바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연희 작가의 〈내 잔이 넘치나이다〉(1983)란 제목의 소설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작품은 중공군 포로수용소에서의 특수 목회에 종사한 맹의순 전도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기 때문에서인지 독자들에게 주는 감동도 그만큼 컸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 작품이 나온 바로 다음 해(1984)에 이병주의 작품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가 나왔다.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와 서로 유사한 점이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이 두 작품들이 1인칭 시점의 작품들 못지않은 간증적 효과를 크게 거두고 있는 것은 두 작품들의 후반에 삽입된, 주인공들 자신의 서간문들이 상당한 분량으로 배열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면서도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가 〈내 잔이 넘치나이다〉와 확연히 다른 점은 이 작품이 일종의 역사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지나치게 역사적 사실에만 충실한 탓인지, 이 작품이 소설인지 아니면 전기(傳記)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독자들로 하여금 갖도록 만들고 있다.   1838년부터 시작된 마카오 경리부에서의 신학수업 장면들만 아니었더라면 이 작품은 분명히 하나의 ‘김대건 전기’로 되어 버렸을 개연성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후반의 많은 편지글들의 나열이 더욱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왜냐면 허다히 나열된 김대건의 서간문들은 그것이 결코 작가에 의해서 소설적으로 꾸며진 것이 아니라 김대건 자신에 의한 편지글 자체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양의 신부들에게 김대건 자신이 보낸 거의 비슷비슷한 서간들, 아니라면, 얼마간은 완전히 똑같은 내용의 서간들을 거듭 나열한 것은 독자들에게 매우 지루한 느낌을 가져다주기까지 하지 않았나 하는 비판을 금치 못하게 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하나의 전기 작품이 독자들에게 주는 감동 그 이상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게 되었으리란 짐작을 하게 한다. 결과를 두고 말하자면 사실이 그러하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의 첫 번째 신부인 김대건이 살았던 시대(19세기)의 역동성을 살리고, 그 속에서의 우리 민족의 비운과 천주교의 전래에 따른 신도들의 수난, 그리고 그러한 여건 하에서의 김 신부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의 고뇌와 순교라는 차원에서 심층적으로, 밀도 있게 다룰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독자들의 그런 기대에는 미흡한 작품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저 전기적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처리한 속에서 약간의 소설적 요소를 가미시킨 정도에 머무르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다. 차라리 그러려면 아예 ‘김대건전’을 처음부터 시도하는 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만큼 이 소설은 이런 유(類)의 작품들이 대체로 테마로 삼게 되는 어떤 순교나 배교 등의 문제에 정면 도전을 하고 있지도 못하고, 또 김대건 신부 자신의 개인적 고뇌나 아니면 신앙적 승리의 개선을 부각시키는 일에도 결코 득의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결국 주제의식이 희박한 소설이 기독교문학 작품으로서 성공하기가 매우 어려우리라는 교훈을 이 작품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고 하겠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8-06
  • 경북 김천 황악문학회 활동 활발
    김천과 상주지역 목회자와 평신도 시인들이 모여 정기모임 작품 속에 기독교적 색채 드러내 문학을 통한 신앙의 삶 표현     경상북도 김천지역의 기독교시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시인 배명식목사(모동제일교회)를 비롯한 목회자와 평신도 시인과 앞으로 등단을 준비하는 20여명이 지난해부터 모여 황악문학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김천에 위치한 복전교회(민길성목사)의 사모가 운영하는 ‘로뎀나무’란 커피숍에서 모여 문화교류를 하고 있다.   문학회 회장인 시인 배명식목사(사진)는 황악문학회에 대해 “경북 김천과 충북 영동에 걸쳐 있는 황악산 주변 지역에서 평소 문학에 관심을 가진 담임목회자와 평신도들이 모여 정기적인 시낭송회와 작품품평회로 모이는 문학모임”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배목사는 “문학을 통해 신앙의 삶을 표현하고 그 작품으로 전도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모임은 상주 모동제일교회에 부임한 배목사가 지역 내에서 시인이라는 소문이 돌며 주위에서 문학에 관심을 가진 목사들이 개인적인 교제를 가지면서 시작되었고, 김천 복전교회 민길성목사의 사모가 운영하는 ‘로뎀나무’ 커피숍에서 2020년 11월부터 정기적으로 모이기 시작해 문학회가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모임의 역사는 짧지만 회원들의 열정적인 활동으로 단단한 문학회로 성장하고 있다. 회원은 20여명 정도이나, 벌써 민길성목사와 이상원목사(상주영오교회)가 문단에 등단하였다. 또한, 박연수목사 등 몇 사람이 등단을 준비하고 있다. 회원들은 네이버 밴드 ‘황악문학‘밴드에 수시로 글을 올리고, 매달 셋째 주 목요일 오후 2시에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문학공부와, 시낭송회, 그리고 품평회를 하고 있다. 현재는 코로나로 인하여 회원 전체가 모이는 정기모임은 자제하고 있으나 몇 사람이 모이는 ‘번개모임’과 황악산 일대의 거주하는 기존 등단시인을 찾아가는 ‘시인순레’를 통해 문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지니고 시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그리고 네이버밴드 ‘황악문학.시낭송회’에서 시와 사진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모임의 구성원이 목회자가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독교 사상을 작품 속에 녹여 작품을 창작하고 있다. 앞으로 기독교 문단의 빛나는 인재들로 활동해 갈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일반 회원으로는 김천의 김정숙시인과 구미 선산의 김정자시인도 함께 활동하고 있다.   황악문학회 회장인 시인 배명식목사는 “시작품에서 드러나는 순수 서정이 시골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들의 정서를 반영하면서 자연스럽게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과 꽃들에 대한 작품을 다듬어 가고 있다”면서 “문학을 통한 ‘신앙의 삶’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7-11
  • 배교자의 역설적인 ‘적극적 순교’ 자세(하)
    11면 기독교 소설 산책14   우리는 이제 이 작품의 주인공의 믿음 또는 배교의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여기서는 역사적 인물이 아닌, 가공인물 김신봉이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는 사기장이 직업을 가진 청년이다. 원래 여주 땅에서 사기장이 노릇을 하다가 그 마을의 가마들이 아궁이를 닫는 바람에 그곳을 떠나 광주 땅으로 향하던 도중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 이 운길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그릇들을 만들면서 생활에의 의욕을 불태운다. 김신봉은 자신이 만든 그릇을 가지고 마재 마을의 정 부사 댁으로 갔다가 그의 아들 정약종을 거기서 만나게 되고, 그 집의 하인인 은돌이도 만나게 된다. 하룻밤 신세를 그 집에서 지게 되면서 신봉이는 하인 은돌이의 전도를 받게 되고, 후에 그는 천주교인이 되는 것이다. 김신봉의 신앙인으로의 변화는, 거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그의 친구 덕환이가 끝내 신도가 되지 못한 것과는 완전히 대조된다고 하겠는데, 성서의 모델로 말하면, 김신봉이 예수의 좌우에 달렸던 강도 둘 중에서 곧 회개하고 구원의 대열에 들어간 한 인물에 해당한다고 할 때, 친구 덕환이는 그중에서도 끝까지 예수의 구세주 됨을 부인하고 오히려 모욕적인 언동을 일삼은 다른 한 강도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도 덕환이는 후에 운길 마을의 천주교도들을 관아에 알리는 밀고자로 변해버렸으니 말이다.) 한편 무녀인 장모와 그녀의 딸인 아내가 끝까지 김신봉의 기독교 신앙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장모와 아내는, 온갖 고문 속에서도 결사적으로 배교를 거부하던 이 주인공(신봉)으로 하여금 결국엔 맥없이 배신을 하게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로 하여금 배교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그의 아내에게 가해진 무서운 매질 소리와 그에 따른 갓난 아들의 울음소리였다. 이 작품 속의 다른 주요인물은 이가환인데, 그는 신도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이가환이 천주교도들을 고문하는 장면이 이 작품 속에서는 가장 생생하다고 할 만큼 그 장면은 작가에 의해 박진감 있게 묘사되고 있다. 가히 극단적 매저키스트라 할 가학적 행위가 이가환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 그의 무서운 고문 때문에 결국 사기장이 김신봉은 배교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불신앙이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아직도 화로의 불씨처럼 신앙의 불씨가 소멸되지 않고 살아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는 곳마다 배척을 당한다. 신자들 속에서는 배교자로 배척당하고 그래서 그는 다시 사기장촌으로 들어가 볼까 했지만 거기서는 그를 신자로 알고 두려워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찾아갈 곳이 어디인가? 이제 그는 신(神)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에 빠진 나머지 단단히 결심하고 좌포청의 포졸들 앞에 나서게 된 것이다. 자기를 천주교도로 치죄해 달라고 자수를 한 것이다. 말하자면 순교를 자청한 셈이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배교자의 명단에 이미 그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이 확인되자 심문관은 그에게 방면(석방)을 선포해 버린 것이다. “네 놈은 이미 천주장이가 아니야. 여기 명단에 네 이름이 버젓이 올라 있다. 알겠느냐?” 그리고 그 군관은 신봉이의 품에서 빼앗은 ‘백자 마리아 상’을 디딤돌에다 냅다 내동댕이쳤다. 그것들이 반짝이는 사기 조각들로 뜰 안에 어지러이 흩어지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이 소설은 그 대미(大尾)를 장식한다. 배교자로 한 번 낙인찍힌 신도가 온전히 정상적인 신자의 위치로 회복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 작품은, 그 의도와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문학평론가, 조선대 명예교수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7-09
  • 글은 무엇인가
    아침에 일어나면 마주보고 웃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녀가 그렇고 사라가 그렇다. 얼마 전 내가 쓴 글이 활자화 되어 나왔다. 카톡이라는 감옥 속에 갇혀 있던 글이 생명을 가지고 꽃이 피었다. 물론 그 글이 나오기까진 산파의 아름다운 손길 사랑과 도움이 있었다. 사라는 말했다. “읽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고. 그 글을 읽는 데는 2분 정도 걸릴 거다. 그런데 나는 안다 가슴 뛰며 쓴 글은 친구의 가슴도 뛰게 된다는 것을. 한때는 시를 쓴다고 글을 다듬었다. 그것은 마음을 다듬는 것이었다. 그때는 마음을 보이는 것도 글을 주는 것도 쉽게 하는 일이 아니었다. 편지나 책이라서 지금처럼 바로 날아가는 속사포가아니라 종이비행기, 종이배였다. 지식과 지혜 감성의 글들은 인터넷의 문을 열면 가득 차있다. 과거 세계역사 시작이래로 오늘까지 모든 것이 저장되어있고, 오늘 지금도 수많은 글이 생산되어 마치 나이아가라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다. 우리의 생각은 미궁 속에서 나온다. 마치 아기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나오 듯 수많은 글, 수많은 책들이 수산시장의 생선처럼 산채로 펄펄뛰면서 날마다 나오고 있고, 채소가게의 채소처럼 생산되고 있다. 우리의 글도 ‘농사지은 농부의 노고의 결과인가? 저 푸른 대양에서 건져 올린 생선인가?’ 아니면 ‘그를 만든 신의 산물인가? 우리의 생각은 어디서 오며 우리의 글은 또 어디서 오는 건가?’ 데이브호킨스는 고민했다. ‘인간의 행복은 왜 이렇게 한자리에 있지 못하고 늘 깨어지며 옮겨 다닐까?’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유도하는 감정, 그 감정은 생각과 경험에서 만들어지고, 그 생각으로 감정의 애착관계가 만들어진다. 호킨스는 인간의 모든 고통은 애착에서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것은 본인의 의존성에 문제가 있지만 독재자와 같이 사람을 노예화 시키는 부류의 인간이 있다. 성경은 말한다.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 도둑과 악마는 돈을 노리고 물질을 노리는 것 같으나 사람의 마음을 먼저 강탈하고 영혼을 고통 속으로 집어넣는다. 양의 탈을 쓴 이리가 달콤한 말로 사람을 속이고 마음을 약탈하듯 수많은 시스템과 기술, 글들도 이와 같이 본마음을 숨기고 장사하는 것이 많다. 오늘은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남의글로 양털 옷을 입고 다가서는 세상, 어쩌면 더 악랄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아침마다 성경을 읽는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자기생각을 버리고 자기내면을 남의 글이나 말로 포장하며 사는 세상, 그래서 수많은 위선자가 생긴다. 보통세상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말만하는 사람들이라 말한다. 말과 글 대신 푸른 나무 잎을 읽어본다. 나는 “인간이 발견한 것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이 책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위대함도 구별해야한다. 참과 진리처럼~. ‘글은 그 사람의 생각인가?’ 글은 사람의 인격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이제 세대가 달라져서 수많은 글이 일초도 안 되어 복사되어 나온다. 성경을 인용하고 왜곡하며 자신의 배를 채우는 사람들,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권력을 만드는 인간들, 개탄해야하는 세대에 나는 산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 하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때문에 ‘뿌리 깊은 나무’도 생겼다. 그런데 생각을 내려놓고, 감정을 내려놓고, 욕망을 내려놓고 사는 길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레팅 고 서렌더>라는 기전도 결국 글이라는 매체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좋은 방법이다. 글, 글, 글, 글에서도 정직하자. /화가, 여행작가
    • 출판/문화/여성
    • 문학
    2021-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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