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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원은 하나님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4)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또한, 기복신앙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고난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공중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필연적인 단계이자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나아갈 힘을 주고, 우리가 해야 할일들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온전히 진리로 살아갈 motivation을 줍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모든 불순물들을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여, 오히려 그것을 제거하여 우리의 영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며, 우리 삶의 앞에 놓였던 길들을 정리해서 하나의 direction으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고난은 우리 인생에 대한 온전하고 명확한 분별력을 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한편, 사탄에 속한 사람들은 사탄의 일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많은 크리스천들도 이 일에 무지불식간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이 땅에서 기복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일에 동참하게 됨을 목도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재정을 추구하는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일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소통과 교제가 안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영적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악한 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속한 자들이라고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의 영적분별력의 부재로 인해, 또한 그들의 이 땅에서의 재정과 축복을 바라는 세상적 욕심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저 내가 축복을 받고 사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삶을 전적으로 걸고,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영적전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전쟁의 삶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저 기복적인 신앙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변화되어야 할 많은 영역들이 있고, 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진리로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일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그러한 진리와 그에 따른 변화를 말씀으로 선포하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길러내고 양육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실질적으로 세상의 그 땅으로 강력히 나아가서 변화를 일으킬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충만이 강력히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은 16:15)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이루어내야 하는 구원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재정구축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서 이 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으로부터 오는 축복보다는, 재정구축으로 오는 축복이 더욱 명확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을 통치하는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통치하게 되는 과정까지도, 주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하고 거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이것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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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는 형형색색의 고무풍선을 자전거에 매달고 달리는 이색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그의 형편을 알게 되면 충분히 그의 마음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에 온 인물로 지금은 법무부 위촉 사회 통합 이민자 멘토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쟁과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은 작가는 한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지난 3월 12일 KBS의 이웃집 챨스 프로그램에 출현하여 알려지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우리가 알듯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탈레반이 있는 나라로 특히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무역 센터 알카에다 테러공격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16년 전에 한국에 왔지만 20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동신교회 집사로 봉사하고 있다. 고통을 겪은 그는 이 풍선들처럼 서로 어우러져 사랑하고 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조국의 봄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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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에레모스 영성10] 광야를 닮은 소리(1)
    광야로 일컬어지는 곳을 연상할 때 떠올려지는 첫 이미지는 ‘거칠다’일 것이다. 영어표현 그대로 와일드(wildness)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약간의 의미를 덧붙여 야성(野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광야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거칠고 투박한 채로 남아 있기에 자연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문명이나 문화는 사람의 인위적 행위가 더해지게 된 결과물인데 이에 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추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창조의 세계 저 편의 암울한 파괴 현장을 목도하게도 한다.   구약 신명기는 ‘다듬지 않은 돌’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도록 하고 그러한 돌들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가르친다. 자연석에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인류의 문명사가 이어져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결코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 즉 하나님께 대한 충직한 신앙 그 자체를 성경은 ‘자연석’으로 상징하고자 했다. 곧 벧엘 야곱의 돌 그리고 요르단 강 길갈의 12개의 돌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돌, 변하지 말아야 할 돌 그래서 신앙은 그러한 돌과 함께 대대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나는 ‘광야를 닮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광야의 그 자연스러움, 꾸밈없음, 있는 그대로의 모습, 다소 거칠게 느껴지고 세련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말하면서 그 배경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과는 대조되는 순박한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우리는 광야의 풍미(風味)와 광야의 야성(野性)을 닮은 영성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이른바 광야의 소리가 주는 울림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울림을 전하고 싶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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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 성서와 생활 [22]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만찬의 영성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지성소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림을 받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주님이 구원의 영원성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성만찬을 행함으로 구원의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기를 원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주님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갓 죽임을 당한 것”계5:6같아야 한다.    예배의 현장 속에서 성만찬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들의 축복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태도에 있다.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 자리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세상에 속하여 죄의 유혹에 빠져 의심 많은 자들을 온전케 하는 것은 십자가를 기념할 때이다. 흔들리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안전한 구원의 피난처가 된다.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십자가의 구원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어린양이 있다. 계시록이 보여주는 놀라운 사실은 어린양에 대한 영성이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원한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십자가의 새로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에서 매일 밝히 보이는 사실이 되어야만 한다. 십자가를 잃어버린다면 영적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3:1십자가를 통해 항상 감동을 받는 믿음이라야 한다. 우리의 영과 마음과 생각 속에 십자가의 사역은 살아 역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항상 새로운 길이 되어야 한다. 항상 살아 있는 영원한 십자가의 계시를 통해 감동받는 영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영성이 있다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날마다 십자가의 이상을 새롭게 볼 때 죄에 대하여 영원히 죽은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죽는 믿음의 체험을 매일 새롭게 가지게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함께 함으로 그 피가 우리를 옛 창조의 근거를 제거해 버린다. 혈과 육이 제거되니 화를 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로써 성만찬의 예식은 예배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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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4) 나로 네 용모를 보게하라
    우리는 앞서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자 꽃이 피고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린다. 이를 영적으로 잘 깨달았다. 즉 장차 있을 환란과 주 재림과 천년왕국의 신비한 비밀들이다.    2:13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들이 구원의 열매를 내는 것은 무화과나무로서 푸른 무화과 열매를 내는 것이다. 또 포도 넝쿨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참 포도나무에 붙은 넝쿨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또 제자와 같은 신앙인 순교한 자들을 가리킨다.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재림하신 주께 찬송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 떠나자’는 ‘함께 떠나자’고 말씀하심과 같다. 앞의 10절에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는 신부에게 ’일어나서 함께 떠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단계를 거쳐 온 것이 13절이다. 본문에 ‘함께 떠나자'는 영적으로 계속해서 성도의 신앙을 진전시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계시한다. 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곳으로 주님과 함께 떠나자는 말씀이다.    2:14 바위틈과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 있는 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고 나로 네 음성을 듣게 하라. 네 음성은 달콤하고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오 나의 비둘기야'는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를 부르는 호칭이다. 여기서 신부 성도 될 자의 호칭이 바뀐 것은 신앙이 더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마10:16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했다. 즉 비둘기는 신부의 신앙 정절을 가리킨다. 주님이 사랑하는 신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정절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중심이 되면 ‘오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바위틈과 가파를 산 은밀한 곳에서는 깎아진 절벽 밑의 검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틈 은밀한 곳은 악한 들짐승과 바다의 짐승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써 안성맞춤이다. 이와 같은 피난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 자는 풀무 불이나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끝까지 신앙 정절을 지킨다. 우리의 피난처가 어디인가? 참 피난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라 하심은 신부의 용모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신부 얼굴에 면사포를 쓴 것과 같이 가리워서 오직 신랑 예수에게만 보여준다. 신랑 예수님만이 신부의 얼굴 위에 있는 베일을 벗겨서 보실 수 있다. 그럼 왜 신랑 예수님이 신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온몸으로 열매 맺고 이긴 것의 결과는 얼굴에 영광이 나타난다. 사람의 인격의 대표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신부의 용모를 보기 원하시는 것은 네 자신의 온몸(인격)이 변화된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도의 신앙 변화의 마디마디가 있었다.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던 때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던 때도 있었다.      앉은뱅이처럼 신앙의 침체기도 맞았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일으켜주셨다. 주님과 한 몸 되어 주님의 사랑을 채워주셨다. 계속하여 변화시키는 역사를 해주셨다. 이제 얼마나 변화됐는지 신부의 모습을 보려고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인격으로 변화된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또 주님은 신부의 음성 듣기를 원하신다. 음성은 사상을 의미한다. 주님 없이는 못산다고 울고불고하던 상사병이 고쳐진 것이다. 즉 인본적인 신앙에서 신본적인 신앙으로 바꿔진 것이다. 그 신부의 사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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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성서와 생활 [21] 그리스도인의 영성-십자가 생명의 영성
       십자가는 주님의 사역으로 끝나지 않고 믿는 자들의 길이 되어야한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뜻은 인간 죄를 대속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을 십자가의 역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십자가는 체험을 통해 우리의 일상의 삶이 되기를 원하신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면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서 생명을 전달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2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며 예수님의 생명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자랑했다.갈6:14‘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사도 바울을 주님을 위해 모든 고난을 견디셨다. 십자가를 최고의 능력으로 여기고 주님을 위해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십자가가 바울의 삶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요 정신으로 충만하였다. 그 결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도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던 사울 바울의 삶을 배워야 한다. 주님을 위해 언제라도 죽음에 넘겨질 각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다른 사람에게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모든 말을 체험적으로 알아 성령의 통로가 될 것이다. 전하는 말과 함께 행할 능력도 줄 수 있는 십자가 생명의 삶을 살게 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8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몸에 계속 적으로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했다. 우리의 생명도 십자가의 생명을 가진 자라야 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사도 바울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는 날마다 경험하는 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들을 주님의 정신으로 견딜 수 있어야한다. 바울처럼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는 십자가의 생명으로 성령의 통로가 되어야만 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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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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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봉현작가의 「예수」
        류봉현작가의 「예수」는 단조로운 바탕에 가시 관을 쓰신 예수님의 모습이 감동 있게 표현되어 있다. 조금만 있으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 많은 모든 인류의 제물로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 할 일을 생각하고 계신 듯한 표정이다. 극히 단조로운 구도에 단조로운 색채는 독자들의 시선을 몰입하게 만든다. 로마의 빌라도 총독이 잘못된 판결을 내림으로 왕복을 상징하는 홍포를 입혔다. 벗기고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씌우고 침을 뱉는 등 희롱을 당할 때 예수님의 모습은 한결같이 맑고 깨끗하게만 느껴진다. 맞서서 욕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은 독자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마태복음 27:28~31의 장면과 마가복음 15:16-20의 장면을 심도 있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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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0
  • 장춘옥성도의 「하나님의 기쁨」 화제
    ◇장춘옥작가가 최근 출간한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의 의미로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제시     새맘출판사 대표이자 작가인 장춘옥성도(사진)가 최근 7번째 저서 <하나님의 기쁨>을 출간했다. 이 책은 유대인들에게 주신 언약사상에 대한 책으로 아브라함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의 기쁨에 이르는 길을 다루고 있다. 장작가의 신앙에는 조부 장익용장로와 계약신학대학원장으로 있었던 이영훈목사의 영향이 있었다. 장작가는 “할아버지는 아현교회 등 다양한 교회를 섬기신 장익용장로였다. 특히 할아버지는 부산 제3영도교회와 청량리 동도교회 초대장로님이셨다. 할아버지는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사명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할아버지의 신앙이 나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면서, “창광교회에서 청년부활동을 할 때 이영훈목사의 지도를 받았다. 그분은 온몸으로 사랑을 실천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언약사상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장작가는 이번에 출간한 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과 원래 의도하신 내용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 한 사람 아브라함이 어떠한 인물인지 다루고 있다”면서, “그와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의 의미를 알게 됨므로 인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에 감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또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는 성경구절이 눈에 들어온 적이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졌는데 그 믿음이 무엇일까 진정한 믿음이 무엇일까 묵상하게 됐다”면서, “그렇게 묵상을 하면서 나오게 된 책이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책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축복이라는 언약을 주신다. 아브라함은 이 언약을 계속 붙들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또 “그냥 말로만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옛사람으로는 마음으로 믿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면서, “새 언약은 돌에다 주는 것이 아닌 마음에다 주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마음으로 창조하셔서 부활하신 예수님 몸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이다”고 말했다. 장작가는 “지금까지 7권의 책을 썼다. 이 책들은 내 힘으로 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할 수 있었다. 쓰고 보니 깊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다”면서, “앞으로의 소망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을 알리는 것이다. 특히 목사님들이 이 사실을 더 깊이 알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책을 무료로 기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성도들에게도 교회 가는 것인 신앙생활에 전부가 아님을 알리고 싶다. 종교행위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면서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이 중요함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장작가는 “<하나님의 기쁨>을 읽고 자신이 보기에 그냥 읽고 넘길 내용이 아니라고 여기시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면서, “그분들과 책을 함께 나누는 만남을 통해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모시고 가는 귀한 문서사역을 감당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장작가는 서울교육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약 9년간 초등교사로 재직하다 현재는 퇴직해 새맘출판사를 세우고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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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0
  • [변두리 소수자 14] 소탐대실
      징기스칸이 멀고 넓은 아시아 대륙과 유럽까지 정복할 수 있었던 비법은 육포로 개발된 식량, 그리고, 서양의 말과 다르게 훈련된 말 때문이었다고 한다. 잘 달리기만 하는 높은 말 위에 앉은 유럽의 기사들은 앞뒤 좌우로 움직이는 말을 타고 싸우는 몽골인들을 당할 수가 없었다. 산들을 경계하고 살았던 유럽인들과 달리, 넓은 평야와 하늘 사이에 살던 몽골인들의 시력도 달랐다. 먼 거리에서 사물과 자연을 먼저 식별하는 안목이 있었다.   유럽 대륙과 아일랜드를, 나중에는 북미까지 진출했던 바이킹 족에게도 그들만의 비법이 있었다고 한다. 유럽 대륙을 벗어나 북미까지 항해를 할 수 있는 그들만의 항해술과 염장 기술, 즉 소금에 절인 대구를 식량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그 비법으로 콜롬버스보다 500년이나 먼저 북미대륙에 도착했다. 그들의 앞선 항해술은 유럽의 이웃 나라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나중에 유럽이 해상을 장악하는 힘이 되었다.   콜롬버스가 도착하기 전의 북미 연안은 당시에 유럽에서 활발하게 거래되는 대구의 황금 어장이었다. 그런데, 그 지역에 먼저 와 있던 바이킹 족은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그들 끼리만 상권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자기들끼리만의 유익을 지켜 내려고 힘을 쓰는 동안, 원주민들과 늘어나는 유럽인들을 당해 낼 수 없게 된다. 그 후, 영국은 북미 대륙을 영국령으로 선포하고, 먼저 왔던 바이킹 족의 노르웨이 대신 영국 국기를 꽂게 된다.   만일 바이킹 족이 그 당시에, 남들이 모르는 비밀과 엄청난 수입으로 국가를 이루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남들보다 앞서 가졌던 항해술과 염장술, 그리고, 그들만의 전투력으로 먼저 대륙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유럽 대륙과 아일랜드, 미 대륙까지…. 그러나 당시의 엄청난 수입원인 대구 어장만 지키다가, 미 대륙 전체를 놓쳤다. 몇 세기 동안, 무적의 투사들로 이름을 날리던 그들은, 야만족과 약탈자, 해적으로 기억되고 말았다.   오랜 역사 속에, 우리나라도 외세로부터 시달릴 때 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힘을 보이기도 했다. 위기 때마다 나타난 위대한 지도자들도 있었고, 순진하게 살아왔던 국민들이 용감하게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끼리 싸우다가, 나라를 빼앗기기도 했다. ‘소탐대실 (小貪大失)’이다.   지금처럼 70여년의 긴 세월 동안, 대한민국, 한반도에 전쟁이 없이 평화로웠던 시절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최첨단의 인프라가 구축이 되고, 잘 먹고, 잘 살고, 잘 입고, 인기 있는 나라가 된 것 같다. 그렇게 살기 좋은 나라의 정치인들은 국정에 헌신하기보다 정쟁에 혼신을 다하는 모습이다.국민들은 너무 힘들게 살아 내고 있으면서 정치인들의 이념 전쟁을 걱정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주변 나라들이 이렇게 오래 놔 두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보호하사, 1,000 여 번 이상의 외침에도 지켜졌었다. 한국은 국민끼리 하나되면 세계를 이끌 영적 문화국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때로는 동물들에게도 귀한 교훈을 얻는다. 나는 언젠가 동남 아시아에서 원숭이를 사냥하는 방법을 듣고웃다가 심각해 졌다. 그 방법은 이러다. 입목이 좁은 항아리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곡식을 넣고, 원숭이가 다니는 길목에 놓는다. 원숭이는 항아리에 가까이 와서 그 안에 손을 넣고, 곡식을 움켜진다. 이를 보며 기다렸던 사람은 그 항아리만 들고 오면 된다. 원숭이가 움켜진 주먹을 펴지 않기 때문이다. 멀리서 사자가 전력 질주하며 달려오고 있는데, 두 마리의 사슴이 싸우다가 먹히는 장면도 기억난다.   ‘우리끼리’의 대립 때문에, 큰 일을 당하는 소탐대실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 나 또한 나의 좁은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과 이루시려는 뜻이 제한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우리의 믿음으로, 이 땅에서도 하늘의 뜻을 펼치고자 하신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을 구하려 하다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막히면 안 되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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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8
  • [정론] 교회, 하수구가 되다
      민대홍 목사   ‘고난’을 주제로 한국 역사와 자신의 일생을 성찰한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나 있는 역사서이다. 그는 ‘고난이야말로 한국이 쓰는 가시면류관’이라고 설명하며, 구약의 히브리 민족사와 우리 역사를 연결지어 이해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 수많은 외침을 받은 사사기 시대, 남과 북으로 나라가 나뉘고 결국 강대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 고난의 역사가 우리 민족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함석헌은 1901년 평안도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오롯이 겪었다.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당한 설움과 고통은 개인 만의 것이 아니었다. 고난은 그 시대를 함께 산 모든 한국 사람들의 공통 분모였다. 그 시기에 나온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조선인들을 위로했다. 고난에는 뜻이 있다고, 그저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말이다. 그는 조선을 세계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준비한 ‘하수구’로 보았다. 하수구가 있어야 일상의 삶이 청결해지듯, 우리가 강력하고 혼탁한 폭력을 받아내는 하수구가 됨으로서 이웃 민족들의 평안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인들이여 이 하수구(조선)에 감사하라. 그대들로 하여금 즐거움의 궁전에 놀게 하는 것은 이 하수가 아닌가? 그대의 자녀를 특별한 운명에서 난 것처럼 자존심 속에 기르게 하는 것이 이 하수가 아닌가? 그대의 눈에 보기 싫은 것은 언제나 달게 받아 치워주는 것이 이 하수구 아닌가? 그리고 그대들의 그 살찐 육체와 그 문명한 머리를 길러주는 곡식과 채소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또한 이 하수가 아닌가? 아, 너 위대한 세계사의 하수구여!”- <뜻으로 본 한국역사> 에서.   이러한 함석헌의 생각은 책 제목이 이야기하듯이 성서의 관점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그’를 ‘예수 그리스도’로 본 신약시대 신앙인들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온 인류에게 자유와 구원이 주어졌다고 선언한다. 함석헌은 이러한 예수가 하수구의 역할을 오롯이 감당했다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되새기는 사순절, 그 끝에 고난주간이 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유대 종교는 하나님의 뜻을 온당히 받들지 못했고, 그 결과 수많은 ‘죄인들’을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로마 식민통치 시기. 안 그래도 팍팍한 삶에 종교마저 자유가 아닌 무거운 짐이 되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을 때, 예수는 그들의 고난을 함께 짊어졌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고발과 로마 법정에서의 사형판결, 예수는 뭇 백성들의 하수구가 되어 그들의 고난을 대신 짊어졌다. 예수의 제자들도, 제자들이 세운 교회 공동체도 그 길을 걸었다. 이제 바통은 우리들에게 넘겨졌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세상의 온갖 더럽고 추한 죄를 짊어지는 하수구가 되기를,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뼈를 꺾은 고난을 지낸 후 부활하신 것처럼,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서로교회 목사, 서로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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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8
  • [에레모스 영성 5] 시험의 땅, 광야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난 뒤 곧 바로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마태 3:17)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예수에게는 메시아에 대한 구별된 의식 생겨났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 메시아 자의식이 재확인이 되는 일은 광야에서이다. 이 과정에서 사탄은 이렇게 시험한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당신을 다치지 않도록 할 것 아니냐. 이것보다 더 좋은 메시아에 대한 증명 방법이 어디 있겠느냐는 그럴듯한 속삼임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메시아의 사적 단계에서 다음 공적 단계로 객관화되는 아주 좋은 계기일터이니까.   그러나 예수는 즉시 이것이 영적 유혹임을 알아차렸다. 이런 짓은 하늘 아버지를 인간의 얄팍한 방법으로 시험해보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눈에 그럴듯한 형상으로 보여져야 하는 분이 아니고 그럴듯한 소리로 들려져야 하는 분이 아니다. 그렇게 보여지고 들려지도록 만들어 놓은 것은 다름 아닌 우상이다. 그래서 우상은 우리 인간의 필요에 따라 그때마다 보여지고 그때마다 들려진다. 우상 숭배는 그 옛날 이집트 땅이나 가나안 땅이나 로마 땅이나 페르시아 땅에 거대한 신상으로만 세워져 있지 않는다. 우리 마음 한 가운데에도 세워질 수 있는 것이다. 참 신은 우리 눈에 아니 보이고 우리 눈에 아니 들려도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이시다.   수많은 대중들 보이는 그 한가운데 뛰어내리면서 메시아의 존재를 확인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이냐. 이 양자택일의 요구는 예수에게도 쉽게 풀 수 없는 유혹이고 시험이었다. 뛰어내려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중명해 보라는 은근한 귀뜀은 예수님 공생애 3년의 기간 뿐 아니라 끝내 십자가에 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나 예수는 그 요구를 거절하시고 못 박혀 죽음으로 맡겨진 메시아로서의 본분을 다 할 수 있었기에 대속자 구원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라는 파라독스를 통하여 비로소 구원의 길에 이르게 되었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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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7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9) 내 위에 나부끼는 그의 깃발은 사랑이었다
      나를 영원히 책임져주시고 또 복되게 하시는 유일한 분     우리가 골짜기의 백합화가 되어지면 주님의 이름을 지극히 높이는 자로서 순교하게 되리라. 2:3 숲의 나무들 가운데 사과나무처럼 나의 사랑하는 자도 아들들 가운데 그러하도다. 내가 큰 기쁨으로 그의 그늘 아래 앉았으니, 그의 과일은 내 입에 달콤하였도다. ‘나의 사랑하는 주님은 숲의 나무들 가운데 사과나무처럼 특별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 ‘숲의 나무들’과 ‘아들들’은 동격이다. 이는 훌륭한 사람들, 즉 성인으로 칭송받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런 사람들이 숲의 나무들같이 많다는 것이다. 공자, 맹자와 같은 성인이나 훌륭한 철학자, 신학자가 숲의 나무들, 즉 아들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숲에 속한 나무들은 씨가 없고 사과 열매에는 씨가 있다. 그 씨는 영생에 관한 것을 의미한다. 내게 영생을 주시는 분을 사과나무로 비유한 것이다. 내 영혼을 살려주시고, 내 영혼에 하늘나라의 영생을 주시는 주님이 사과나무와 같다는 것이다. 성인군자들의 훌륭한 교훈과 가르침이 내 영혼을 살리지 못하고 영생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 신랑이 되지 못한다. 숲의 나무들 가운데 진정으로 내 영혼을 살리며 영생을 주시고 나를 영원히 책임져주는 나의 참 신랑은 누구인가? 바로 사과나무인 주님이시다. 그분은 나에게 첫째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그 영광이 영생이 되도록 나를 영원히 책임져주시고 또 복되게 하시는 유일한 분이다. 이는 바로 숲의 모든나무들 가운데 사과나무뿐이다. 주님의 존재가 내게 사과나무이며, 주님의 말씀도 내게 사과나무인 것이다. 주님이 내게 이러한 분량과 위치로 다가와 계신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내 몸이 아플 때 찾고 의지했던 그 주님이 병을 낫게 해주셨다.     내 마음에 평안을 얻기 위해 찾았던 그 주님이 평안을 주셨다. 내가 가난하고 어려울 때 형편을 피게 해주셨다.’라고 하는 주님은 사과나무가 아닌 것이다. 사과나무인 예수님이 그늘이 되어주시고 나는 그 그늘아래 앉아서 큰 기쁨으로 있다는 것은 사과나무 같은 주님이 친히 나와 함께 임마누엘 하신다. 내게 임마누엘하신 그분 안에서 내가 평안히 안식을 누리고 있는 것이 그분의 그늘아래 앉아있는 것이 되므로 근심, 걱정, 염려, 수고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기쁜 것이다. 주님이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데 내가 아무리 예수님이 나의 신랑이라고 외쳐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사과나무의 열매로 내 입에 달콤한 것은 사과나무인 예수님이 내게 임마누엘하여 계시고 그분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릴 때 큰 기쁨이요. 찬송이 터진다. 그것이 결국 열매가 되어진다. 감사와 찬송의 열매를 맺게 되면 주님은 그것을 받으시고 내게 영원히 누릴 영광으로 입혀주신다. 그것이 내게 달콤한 과일이다. 그러나 세상의 복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쓴 것을 단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사 5:20).   2:4 그가 나를 잔칫집으로 안내하였으니, 내 위에 나부끼는 그의 깃발은 사랑이었도다. 신부에게 가장 좋은 잔칫집은 혼인잔치 자리이다. 신랑 예수님이 나를 신부로 데리러 오셔서 신랑 예수님과 신부인 내가 혼인식을 하는 것이 최고의 잔치이다. 잔칫집에 초대된 모든 사람들이 신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닿는 눈부신 하얀 드레스와 면사포를 쓰고 신랑 예수님과 함께 입장하는 찬란한 모습을 보게 된다. 깃발' 은 전쟁에서 이긴 나라가 승리의 깃발을 꽂는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은 내 위에 나부끼는 깃발과 같다는 것은 나의 사랑하는 분이 나를 승리하게 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거짓된 것, 악한 것을 깨뜨려 부수고 계속 이기게 해 주시는 분이 나의 사랑하는 자이다. 그분이 나를 어디까지 승리하게 해주실까? 환란날에 적그리스도까지도 승리하게 해주신다. 그래서 결국 육신은 적그리스도에게 목베임 당하지만 영적으로는 승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사람은 내위에 나부끼는 깃발과 같다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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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5
  • [정론]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의 실천
     20세기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이면에는 교단, 교파 분열이라는 아픈 상처도 있었다. 21세기 들어서 한국교회는 급격한 쇠퇴와 정체를 경험하면서 한국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어 왔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되살리기 위해 100주년이 되는 2007년에는 ‘어게인 1907 평양대부흥’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많은 교계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아직 진행형이다.    사변화된 신학을 극복하고 개혁주의신학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은 회개용서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실천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제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서로 다른 위격이시면서도 한 분 하나님이시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서로 다른 인격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바로 하나님을 닮는 일이며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다. 종교개혁교회들은 중세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에 맞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 교회들은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성찬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지님으로써 루터파, 칼빈파, 츠빙글리파 등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그래서 로마가톨릭으로부터 교회의 본질인 하나됨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참된 교회가 아니라는 비난을 받았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열 개의 바다라도 건너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성찬 교리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를 떠나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물고 있던 개혁파 회중들이 루터파 교회의 성찬에 참여해도 되는가라고 물었을 때 루터파의 공재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개혁파의 영적 임재설을 받아들이는 개혁파 회중들에게 루터파 교회의 성찬에 참여해도 된다고 답변했다. 성찬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성찬을 통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삼위일체론이나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교리와 같이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았다.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사람은 이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은 구원론이나 교회론, 성찬론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지녔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본질에 영향을 주지 않는 비본질적 교리의 경우 그러한 교리 차이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막지는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장로교와 감리교, 오순절교회, 침례교 등은 비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지만, 그것이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막을 수는 없다. 한 가정의 형제 자매가 서로 다르게 생겼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많이 닮아 한 가족임을 알 수 있듯이, 형제 간의 미세한 차이가 가족됨을 해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교회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분열과 대립의 상태에 있다면 교회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지 못할 것이며 세상은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의 분열과 대립의 이면에는 십자가와 희생 없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기 우상화가 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죄를 회개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십자가를 통해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는 부활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 연합과 일치로 나아가고자 한다. 모든 생명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겨울을 지나 새싹이 움트는 봄을 맞이하면서 한국교회가 진정한 회개와 용서를 통해 다시 연합과 일치를 회복하기를 기도한다. 2024년 부활절연합예배가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회복하고 전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백석대학교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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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3-05
  • 성서와 생활 [17] 그리스도인의 영성- 진리의 영성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악을 미워하는 자들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니라’ 잠8:13이는 악을 미워할 뿐만 아니라 악에서 떠난 자라야한다. 멀리해야 할 악의 종류에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말한다. 교만한 자의 말은 완악하며 무례하며 거짓될 뿐이다. 시31:18거짓말은 마귀의 영에서 비롯된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요8:44오직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자들이다. 약3:14 거짓에 속한 자들은 진리를 행할 수가 없다.요일1:6.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사실에 속한 말에 주목하였다. 참과 진실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에 입각하여 심판을 한다.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레24:20‘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신19:21율법은 현상을 중요하게 다루는 법률이 지배적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현상과 사실에만 집중한다면 긍휼없는 심판자가 될 것이다. 사실을 제대로 볼 줄 아는 것은 그 다음 단계인 은혜로 가기 위함이어야한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율법적인 현상과 말의 단계를 완성하시려고 오셨다. 주님은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사11:3 라는 사역을 완성하셨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자를 ‘돌로 치라’는요8:5모세의 명령에 대하여 주님은 사실대로 그 여인을 심판하지 않으셨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요8:7고 하시면서 사람의 참된 양심의 법에 호소함으로써 정죄하지 않으셨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사실에 입각한 말보다는 선한 말과 엡4:29덕스러운 말로 벧후1:3,5,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벧전2:9    그리스도인들은 말에 실수가 없는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 약3:2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잠8:7에 속하기 때문디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에 이르러 완전한 자유를 누리도록 하셨다. 요8:32진리의 영을 통해 주님처럼 말씀하고 찬미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진리의 사람이 되게 하신다.‘~진리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사65:16거짓말은 마귀로부터 사실의 말은 율법으로 선한 말은 은혜로 부터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이신 주님의 권세 있는 말을 하는 단계에 이르러야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5
  • [사랑의 실천] 후안무치의 세대
         우리는 염치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은 허탈함을 넘어 절망에 이르는 수준이다. 국민소득 삼만불·경제대국·일류아이티산업·조선산업·K문화 등 정량적 면에서 선진국에 가까워졌으나, 정상적 면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이러한 괴리가 오늘 진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월 10일 22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성취를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정치꾼들·법률보다 이념에 따라 판결하는 판관들·저울을 속이는 장사꾼들·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환자들을 나 몰라라하는 의사들·사람을 쉽게 죽이고도 자책이 없는 살인자들 그리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큰소리 쳐대도 아무렇지 않는 세대에 우리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정말 인간다움을 포기한 듯한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모습일까! 생명경시·물질만능·이기주의·도덕불감증·가치관상실 등 이런 것들의 극복없이는 사회의 병폐는 치유될 수 없으며 국가의 밝은 미래는 담보되지 못한다.    이제 교회가 하여야할 일은 뚜렷해졌다. 우리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성경적 가치관 회복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이 붕괴되고 가정교육마저 상실된 현시점에서는 교회교육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 공공의 선이 우선되는 가치관·너와 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통합·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건설·각자의 깨끗한 삶과 정직한 삶 그리고 나라사랑함,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고 교회도 존재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한국교회가 이 일을 감당함에 있어 절대적 명제는 하나님께 의뢰함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나는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이 나라를 보우하사 아름답고 튼튼하고 정의로운 나라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실 세계사적 사명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나라되게 하소서 아멘” /서울신대 전 총장·한기총 전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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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5
  • 이춘선작가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춘선작가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매일 만족하셔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는 기록들을 볼수 있는데 6일동안 만물을 지으시고 7째 날에 쉬신 것이다. 물론 6일이라는 시간이 사람들이 계산 하는 시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시간과 다름을 학자들이 말하고 지질 연구가들이나 과학자들이 말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것을 알라고 했다.(벧후 3:8 ) 하나님의 영원하신 시간에는 천 년이 한 점에 불과한 것을 얘기하고 있다. 여기의 작품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생기 넘치는 만물 들 위에 무지개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노아의 홀수 때 노아와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견고하듯이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이 영원하여 보시기에 더 좋을 것을 약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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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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