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뉴스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 오피니언
    • 칼럼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 오피니언
    • 칼럼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4-03-26
  •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백석대 이사장 박요일목사
    백석대 이사장인 박요일목사는 말씀과 기도중심의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지난 세월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고 감사한 시간이었음을 고백했다.   박목사는 고려대 법대 졸업후 총무처 문화공보부에서 공직으로 5년간 일하다가 총신대 신대원에 진학했다. 또한 성결대, 백석대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강성교회를 설립하여 41년간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16년간 백석총회 유지재단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왔다.   197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으로 출발한 강성교회는 1996년 백석총회에 가입했고, 강성교회 재산을 총회에 기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2007년 유지재단을 세웠다. 유지재단은 영안교회와 흰돌교회, 그리고 강성교회가 함께 세웠고, 박목사는 초대 이사장부터 다섯 번 연임하며 총회와 재단을 위해 봉사했다.   박목사의 설교에는 한결같은 원칙이자 철칙이 하나 있다. 설교주제를 목사의 재량으로 정하지 않고, 성경에 쓰여진 순서와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목회철학이다. 강성교회는 매 주일 새벽 5시 30분 예배, 그리고 오전 9시와 11시 예배, 오후 찬양예배가 있다. 예를 들어, 성경본문 1~5절을 새벽에 전하고, 6~10절은 오전예배때 전하고, 11~15절을 오후에 전하는 방식이다. 매 주보에는 그날 설교문이 그대로 담겨있다. 수요예배 설교는 지난 주일예배 설교를 복습하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주중에 교인들은 주보에 쓰인 지난 설교문을 읽고, 한주간 말씀 속에 살아가도록 권면한다. 또한 구역예배 인도자에게는 다음 주일 설교문을 보내주어 말씀을 예습하도록 한다.   이 원칙을 지난 40여년간 한결같이 지켜왔다. 그동안 설교가 생뚱맞거나 엉뚱한 주제가 아닌, 때마다 필요한 말씀이었다는 것. 그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고 박목사는 고백한다.   박목사는 “하나님은 고정된 말씀인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오래된 말씀이지만 그것을 전할 때 말씀은 생명력이 있고 운동력이 있어 사람을 먹이고 살리는 힘이 발휘된다”고 말한다. 그만큼 목사의 설교준비는 마치 ‘어머니가 밥을 준비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100% 무공해는 어렵지만, 저공해로 영양가 있는 밥을 지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목사는 신약과 구약을 골고루 섞어야 한다며, 어느 한쪽을 편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박목사는 “세상의 법은 오심을 방지하기 위해 3심 재판제도를 둔다. 설령 사형이 선고되더라도 사면복권이나 재심의 기회가 있다”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한번 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잘못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언제나 옳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심판을 두려워하며 평소에 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한국교회를 향해 말씀중심으로 가야할 것을 권면했다. 그는 “목회자가 깨어있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말씀중심으로 가야 한다. 성경에 모든 답이 있고, 길이 있다”고 말했다.  
    • 오피니언
    • 인터뷰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4-03-26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교회의 부활
      오늘날 전 세계가 코로나라는 바이러스의 공습에 시달리고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될지 모르는 바이러스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극대화시켰다. 세계 경제뿐 아니라 한국 교회도 큰 타격을 입혔다.   함께 모여 즐겁게 드리는 예배는 바이러스로 인한 거리낌 속에 진행되고 있다. 성경공부 프로그램 운영은 바이러스가 확산되게 하는 통로가 될 수 있기에 대부분 중단하고 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서로 사랑의 교제를 위해 만나던 일도 마음에 불편한 일이 되었다. 중소교회는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를 함께 운영해야 하는 것은 부담을 안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와 예배의 정의를 새롭게 정의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교회는 예배하기 위해 정해진 장소에 모이는 곳에서 잠시 흩어지거나 적게 모여야 하는 곳이 되었다. 왜 이렇게 교회가 살얼음판을 조심스레 걸어야 하는가? 국가에서 제정한 방역 규정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효율적인 복음 전도를 위해서다. 교회가 모든 활동을 활발하게 하면 어떻게 될까? 바이러스를 확산시키는 주범이 될 수 있다. 그럴 경우 언론의 공격을 받고 불신자에게 덕이 되지 않을 수 있고 결국에는 복음 전도에 방해가 된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교회는 어느 때보다 조용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 조용함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시기를 넘어 도약으로 나아가는 기간이 되어야 한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어려운 시기에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한 단어가 무엇일까? 부활이다. 코로나로 인한 위기에 직면하여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교회의 새로운 동력은 예배와 프로그램 운영의 디지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넘어 서로 교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익한 방법은 온라인을 활용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온라인 교회의 확장이 요구된다. 더 이상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이라야 한다는 장소적인 문제를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이번 기회에 교회 예배와 프로그램 운영의 디지털화 및 온라인화를 통해 한국교회가 새로운 성장을 도모하는 제2의 탄생을 하였으면 한다. /한영대 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4-02
  • 한 자리에 모여 부활절예배를 드리자
    한국교회는 부활절때마다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려 왔다. 진보와 보수, 교단과 단체를 구별하지 않고 한 자리에 모였다.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로 하나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부활절에는 하나가 되었던 연합단체들이 몇 년전부터 단체별로 드리고 있다. 한국교회는 부활절연합예배마저 하나되지 못하고, 분열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부활절연합예배는 1947년부터 매년 드려졌다. 제1회는 1947년 부활절인 새벽 5시 일본의 신사참배 본산이었던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터에서 1만5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경직목사의 설교로 드렸다. 그후 6.25한국전쟁으로 인해 부산 등 지역에서 드렸다가, 1954년 서울 남산으로 복귀해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1962년에는 보수와 진보측으로 분열됨으로써 따로 드리게 되었고, 1965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교단이 또다시 별도의 부활절예배를 드림으로써 세군데로 분열된 결과를 초래했다.    1973년에 이르러 진보와 보수측 교단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연합움직임이 일어나 그 해 연합예배는 오랫동안의 분열을 청산하고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1975년부터는 여의도광장으로 장소를 바꾸어 대대적인 연합예배를 드렸다. 이러한 결과로 서울지역 뿐만 아니라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 대도시별로 드려 왔다. 그러나 지난 해에 이어 금년에도 한 자리에 모여 드리지 않는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나 한국기독교교단장협의회가 따로 드리고 있다. 1973년 진보와 보수가 한 자리에 모여 드렸던 것처럼, 내년부터는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도록 교단과 단체가 협의해 나가야 한다.    한국교회는 연합과 일치로 하나되는 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 그 결과로 부활절에는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교회 밖에는 단합된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분열의 역사로 인식되었던 모습을 연합과 일치로 하나되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04-02
  • ‘춘래불사춘’과 교회
       서울의 벚꽃이 100년 만에 가장 일찍 피었다는 꽃소식과 함께 그 어느 때보다 봄이 빨리 우리 곁에 찾아왔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춘래불사춘’이다. 봄이 와도 봄이 아닌 것이다. 그동안 교회는 욕을 먹어도 너무 많이 먹었다. 세상 사람들이 무지막지하게 욕을 하고 싸잡아 비난을 해도 교회는 묵묵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코로나 펜데믹의 가장 큰 희생자가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 2021년 부활절을 맞았다. 화창한 봄과 더불어 찾아온 부활절이다. 하지만 교회는 조용하고 잠잠하다. 기독교 최대의 축일인 부활절을 앞두고 냉냉하기만 하다. 교회의 사회적 위상과 권위가 크게 떨어지고, 교회에 대한 불신과 비난의 소리가 드높아도 숨을 죽이고 있다. 자칫 말 한마디라도 꺼내면, 세상 사람들이 온통 달아오른다. 어쩌다 교회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단순히 코로나 때문일까?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 때문일까? 아니면, 교회에 대한 매스컴의 부정적 보도 때문일까? 혹은 일부 정치인들의 반기독교적인 정서 때문일까? 물론 이런 저런 나름대로의 그럴듯한 이유를 우리는 찾을 수 있고, 그러한 것들이 교회의 불신을 조장하는 여건이 되기도 한다는 것은 일면 수긍이 간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일부 교회지도자들의 이같은 의혹들은 오늘의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들은 코로나 사태를 맞이하면서, 여러 학자들과 전문가들을 통하여 코로나 이후의 교회에 대하여 심도있게 논의하며, 다양한 대안과 해법을 모색하였다. 그 중에서 특히 ‘교회의 공공성’의 이슈가 집중적으로 부각되었다. 대한민국 교회가 사회적 위상과 영적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현실은 “과연 교회가 세상에서 대안이 될 수 있는가?”를 직시하게 하고, 교회로 하여금 심각한 자기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공공성은 “교회가 진정으로 섬김의 공동체가 되느냐?” 라는 물음과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갈 것인가?” 라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물론 이 두 가지 물음은 새로운 물음이 아니다. 이미 2천년전 초대교회부터 끊임없이 물어왔던 질문이다.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신선한 삶의 충격과 새로운 변화의 도전이 되었다. 곧 교회가 세상에서 ‘대안공동체’가 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이질적이고 배타적인 종교집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그들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면서 교회의 공공성이 절실한 이 때, 교회는 이 물음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가져야 한다. 과연 교회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한 해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사람이 달라져도 교회는 ‘다른 복음’ ‘다른 십자가’를 전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를 종교적 표상과 기복의 도구로 삼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금 십자가, 은 십자가’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큰 십자가, 작은 십자가’를 말해서도 안 된다.    교회는 이기적인 욕망과 탐욕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주저하지 말고 십자가를 져야 하며, 섬김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야 한다. 그렇다. 교회가 진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가 살고, 교회가 세상을 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께서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부하신다. “너희는 부활의 능력으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에 나아가라.” /동부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04-02
  • 부활의 예수를 증거하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한낱 과거의 역사적 사건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반복되어야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새로운 삶과 영원한 삶을 인류에게 주셨다. 사람은 죽음으로써 종말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 영원한 영의 삶이 계속되는 것이다. 죽음 후의 영원한 삶은 그리스도의 심판과 구원에 연결되는 것이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세의 삶에 있어서도 희망을 가지지만, 죽은 후에 미래의 삶에 있어서도 영원한 희망을 가진다. 미래의 희망은 현재의 삶에 확신과 용기를 주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인류는 종말을 가져오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인류는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 나라에 대한 희망의 삶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의 미래의 완성을 믿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고 산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의 희망과 다르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세속적인 희망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인내와 기대를 갖고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좌절하고 절망하였다. 그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나타나서 새로운 신앙과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난 제자들은 이전보다도 더 새로운 신앙과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민족과 인류에게 평화를 주셨다. 오늘날 세계는 민족간이나 국가간에 대립과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사랑하는 평화의 정신없이는 세계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 세계의 민족과 인류는 부활의 주인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주신 평화로 일치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곳에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신앙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교회가 형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중심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선교의 역사를 창조해 나가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04-02
  • 좋은 동화와 동시쓰기, 책읽기 열중 - 전 한국찬송가공회 이사장 엄문용 장로
    한국찬송가공회와 대한기독교서회 이사장을 지낸 엄문용원로장로(87세·아현감리교회)는 “요즘은 글쓰기와 책읽기에 열중하고 있다. 좋은 동화와 동시 창작에도 전념하고 있다”면서, “그동안 운영해 왔던 출판사인 ‘비전사’에서 기독교서적 출판에도 심혈을 기우리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엄장로는 15년전에 중국의 조선족 어린이들의 선교를 위한 북방문화선교회를 조직하고, 지금도 연변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선교회는 중국의 연길을 비롯한 용정, 도문, 훈춘지역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창작의욕을 북돋아주고, 문학인으로 양성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해마다 꼬마작가상 시상식과 장학금 수여 등 활동을 해오고 있다. 특히 10년전 중국 하얼빈조선족민족출판사에서 엄장로의 동화집인 〈푸른 하늘처럼 높고 푸르게〉를 출판하기도 했다. 이 동화집은 중국의 소학교에서 부교재로 사용하고, 이 지역의 어린이들에게 글짓기에 대한 교재가 되고 있다.   엄장로는 “조선족 어린이들에게 글짓기를 통해 꿈을 심어주고, 밝은 내일을 소망할 수 있도록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삶이다”면서, “중국의 조선족은 우리 동포이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해야할 사명이 있다”면서, “바른 어린이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덧붙혔다.   엄장로는 2001년 〈아동문학〉으로 등단했다. 그 이전인 60년대에 최효섭목사를 비롯한 최영일목사, 윤춘병목사, 이봉구목사, 안성진목사, 유영희장로, 이태선장로와 함께 해바라기문학회 동인활동을 했다. 그 당시부터 아동문학을 창작해 왔으나, 우리나라 문단풍토가 등단해야 하기 때문에 뒤늦게 등단절차를 밟은 것이다.   엄장로는 앞으로도 “어린이들에게 밝은 동심의 세계를 지닐 수 있는 창작에 열중하겠다”면서, “동화와 동시를 통해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지닐 수 있도록 창작하고 있다”고 덧붙혔다. 이러한 엄장로는 동화집과 동시집 등 149권을 펴내기도 했다.   금년에 장로장립 50주년을 맞은 엄장로는 “무엇보다도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상실했다는 언론보도에 가슴이 아프다”면서, “한국교회가 이 사회를 위해 봉사와 헌신을 하고 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 안타깝다”고 강조했다.   엄장로는 한국아동문학작가상과 한국장로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한국문인협회와 한국기독교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오피니언
    • 인터뷰
    2021-04-02
  • [부활절 에세이] 부활의 실상
    세상의 쾌락도 삼가고 겸손한 길을…거룩한 삶으로 부활생명을 찬미하자   ◆부활 안에는 4가지가 없다  온 세상이 부활절 생명의 환희로 밝아지기를 소망한다. 코로나의 위기로 지구의 많은 생명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에 2021년의 부활절엔 더 뜻깊은 부활생명을 묵상하며 누려야 됨을 인식하게 된다. 이 부활의 생명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며 또한 교회의 생명이며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이다. 이 생명 안에는 사망이 결코 있을 수 없다. 이 생명으로 인해 교회 안에는 사망이 있을 수 없다. 그리스인의 삶 속에도 사망이 있을 수 없다. 부활 생명이 충만한 날을 ‘~사망이 없고~’(계21:4)라고 말한다. 이 때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라고 이른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날인가. 눈물을 흘려 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또 이 세상 살면서 눈물 흘릴 일이 얼마나 많은가? 부활생명이 충만한 나라가 이를 때는 우리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시니 사망이 없고, 애통도 없고,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사망이 지배하는 계절이 다 지나가고 만물을 새롭게 함은 주님의 부활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주님의 부활 안에서 사망, 애통, 곡, 아픔, 4가지가 없는 새로운 만물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다.    ◆믿음이 실상이 되게 하라  이러한 사실을 믿는 것을 믿음의 실상(히11:1)이라고 한다. “믿음은 바라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처럼 오직 우리는 믿음으로만이 그 세상을 볼 수 있다. 3차원에 사는 우리들은 믿음이 아니고는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세상을 볼 수 없다. 이 세상의 원리로는 볼 수 없는 것을 믿음으로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서 말씀으로 이루는 세상을 누리며 가져 올 수 있다. 여기에 기도가 있다. 기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 주님과 친히 교통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는 통로이다. 우리는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보지 못하는 것을 듣는 차원에 속한 사람들이다. 기도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 준다. 믿기만 하고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다면 믿음의 실상을 누리는 것은 어려운 현실이다. 그러나 반드시 온 세상에 크리스마스가 축제가 되어 주님의 나심을 기뻐하듯이 온 세상에 사망이 사라지고 부활생명을 기뻐하는 시대가 오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 부활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거룩히 자신을 구별한 예수님처럼 이제 우리도 거룩히 구별함으로 부활을 기뻐해야 한다.   ◆거룩한 자, 눈물도 흘릴 수 없다  레위기 10장에서 아론의 두 자녀가 다른 불을 드림으로 죽임을 당하자 모세는 아론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리라”(10:3)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봉사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길을 가야한다. 이 때 사사로운 인간의 감정이나 애정을 따라 행동한다면 우리는 다만 육에 속한 자들이 될 뿐이다. 혈육이 죽었을 때 마땅히 애통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아론을 향하여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러면 죽음을 면하고~”(6절)라고 분부하신다. 아 ! 얼마나 거룩하고도 놀라운 명령이신가? 우리는 당연히 애통하고 곡하는 것만이 인간의 길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우러러 보게 하신다. 구별된 자들은 눈물을 흘려도 죽음이 임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의 실상을 보게 된다. 부활의 권능을 우러러 보는 자들은 이미 눈물을 그칠 줄 아는 사람들인 것이다.   ◆거룩한 자는 쾌락을 삼간다  천성이 흠도 없도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억제 하고 거룩하게 삼가신 것은 오늘 우리의 거룩의 길이 되기 위함이었다. 이제 우리도 거룩함으로 부활의 권능 안에 거할 때이다. 많을 일을 삼가며 많은 말을 그치고 합당한 주장도 내려놓고 의식주도 세상의 쾌락도 삼가며 겸손한 길을 가야한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교만하고 흠이 많기에 많은 것에서 겸손히 절제해야 마땅하다. 감정의 흥분도 애정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권위에 우리의 구주 예수님처럼 복종해야 한다.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주님의 거룩한 길을 따를 때 주께서 부활의 영광을 온 땅에 가져오실 것이다. 거룩한 삶으로 부활 생명을 찬미하자.  /대전 반석교회 담임목사·수필가
    • 오피니언
    • 칼럼
    2021-04-02
  • ['동행'의 삶 깊은 앎] 부활의 주를 좇는 섬김
      주께서 구약의 예언대로 육신을 입고 오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을 나타내 보이심은, 모든 인류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는 창조주로서 유일하신 영혼구원자임을 믿고 좇아 새 생명을 얻도록 주 되심의 확증이며, 새 언약대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은혜와 사랑이시다.   곧 주님은 요한복음6장51~58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하심을 이루시어 대속 제물로 오심과 십자가 사역을 이루시는 예수의 하나님 되심을 믿고 교훈을 좇아 구원의 도를 지키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심판주 하나님 되심의 증거이다. 하지만 주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시며 순복으로 십자가를 지심은 주님의 자취를 좇아 주를 섬기도록 본을 보이심이며, 주님의 거룩하심과 온전하심을 닮는 자기부인과 제 십자가를 지고 계명들을 지키는 영혼 구원의 길임을 확증해 주심이다. 곧 아버지의 뜻대로 순복하신 주님의 온유와 겸손은,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셔야 할 십자가 사역에 순종이기에 도덕과 윤리가 아닌 영이요 생명의 말씀으로 적용임을 깨닫게 하신다.  그러므로 구원의 좁은 길은 부활하신 예수의 주 되심을 증거하여 전도로 온 인류가 영생에 들어갈 수 있도록 열어 놓으신 영혼 구원의 길과 신앙의 지침에 온유와 겸손의 순복으로 이루어가는 주의 나라 확장이다.  요한복음17장21절은 부활의 주님을 믿고 영생에 소망을 둔 자들이 세상에 소금과 빛의 직임을 감당하여 모든 민족이 주의 백성들로 회복되어 주의 몸을 이루는 하나 됨이 주님의 뜻이며 제자들에게 요구하심임을 확증한다.  이와같이 주님의 십자가 사역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도 주의 친 백성으로 회복하시려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순복의 본을 보이신 주님의 자취를 좇아  섬김을 본받게 하신다.  주를 섬김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라는 의미와 이웃을 사랑하여 주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주의 백성으로의 회복을 하나로 연계하여 확증케 한다. 더불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시어 이웃 사랑하는 선을 인하여 주의 백성들이 많아지도록 전도로 제자화 하는 자는 영생의 복을 받는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몫임을 증거한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하심과 같이 주와 이웃 사랑으로 이루어 가시는 주의 섭리에 주의 나라가 흥왕되이 세워져 주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는 섬김으로 인한 제자화이다. 즉 진리의 말씀 위에 주의 지체들이 한 몸을 이루어 이웃에게 주의 백성이 되도록 복음을 전하고 주와 이웃이 화평케 되는 영적 구속사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 능력은 생명과 희락과 평강으로 성령과 동행하는 사랑이 더욱 풍성한 주 안에 삶으로 앎이 더해가 섬김의 모든 믿는 자의 마지막 날이 부활의 기쁨임을 확증케 한다.  곧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증거 하심과 같이 주님을 섬김은 앎이 성령과 동행하는 믿음이 되어 전도로 사람에게 생명을 얻게 하는 주 경외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오이코스대학 객원교수, 아테아지도자개발연합회 선임연구원
    • 오피니언
    • 칼럼
    2021-04-02
  • [마라나타 38]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1974년경 여름이었다. 어느 주일 미국인들 십여 명이 예배가 끝날 때쯤 들어와 뒷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다. 내용을 들어보니 자신들은 옆에 있는 외인 아파트 주민들인데 성도들끼리 예배를 드릴 수는 있는데 목사님이 아직 못 오셔서 축도를 받을 수 없으므로 우리 교회에 와서 한강교회 목사님의 축도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두 달 정도 오시더니 이제 목사님이 오시었다고 목사님 댁 아파트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몇 달이 지난 후 교인들이 많아져서 혹시 우리 교회를 빌려 예배드릴 수 있는가 문의가 와서 오후 2시, 3부 예배를 외국인 영어 예배로 드리게 되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을까? 당시에는 한강 변이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아파트언덕 자갈밭을 내려가면 모래밭을 지나 곧바로 한강이었다. 여름이었고, 예배드리는 중에 목사님의 어린 아들이 혼자 물놀이 하다 변을 당했다고 했다. 반백의 목사님은 늦은 나이에 아들을 두셔서 애지중지 키우셨다. 온 교인은 슬픔에 잠겼다. 언어의 소통도 어려웠지만 감히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 없었다. 서로들 발끝만 내려다보며 눈물만 흘렸다. 일주일이 지나고 주보에 Bob Hornsby 목사님 설교 제목이다.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을 알고, 믿고, 그분의 사랑하심을 믿는다. ( 마 10:30 ) 마라나타! 아멘 주여 오시옵소서. 
    • 오피니언
    • 칼럼
    2021-04-02
  • 삼위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3)
      본문 25절에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의 “여호와”는 성자 하나님을 가리킨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은혜아래 있습니다 (롬6:14) 그 은혜 속에서 자라나고 (벧후 3:18) 은혜속에서 강하여지며 (딤후 2:1) 그 은혜를 남에게 끼치기도 합니다 (벧전 4:29)   1) 축복을 결제 해주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축복의 통로이자 축복의 중재자이십니다.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예수님이 결제해야 됩니다. 그래서 엡1:3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라고 하였습니다. 빌 4:19 에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하였습니다.   2)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시는 은혜입니다. 본문에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취사...’ 라고 하였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주의 얼굴을 친히 우리에게 비추어서 어둠의 세계를 비취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지난 한해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은 불행의 시대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50대 이상은 38.6%, 자영업자는 44%, 저소득층은 50%가 불행하다고 응답하였습니다.  불행을 느끼는 우리들에게 주의 얼굴을 비추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치유가 일어나고 소망이 일어나고 건강해집니다. 주의 얼굴을 비추어야할 근심과 걱정이 있습니까?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되면서 참 기쁨을 누리게 되는 축복이 일어납니다. 주의 얼굴을 비추시면 우리의 어두운 곳이 밝아집니다.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어집니다. 분노가 기쁨으로 바뀌어집니다.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어집니다.    3) 주의 풍성한 축복을 받는 은혜입니다. 본문 25절에 “여호와는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라고 하였습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호의와 사랑을 의미합니다. 믿음도(행 8:27) 은혜요, 구원도(행 15:11) 은혜입니다. 칭의도(딤 3:2) 은혜요, 위로와 소망(살후 2:16)도 은혜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이 은혜는 말로 형용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복은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히 6:14 에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은혜는 믿는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 6:24) “이 모든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라 할지니라” (고후 8:7) 이러한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살전 2:13) 과 기도(욥 33:28) 에 의해 더욱 풍성하게 됩니다.   3.성령하나님은 평강의 축복을 누리며 살게하십니다. 본문 26절에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샬롬) 주시기를 원하노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여호와는 성령 하나님을 가르킨 단어입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교리를 가르켜 “성령의 발출설”이라고 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2021-04-02
  • 종교인 세금에 관한 모든 것(12)
    문 112. 종교단체의 세무, 고유번호와 사업자 등록번호란 무었인가? 답) 종교단체는 종교활동 등 고유목적사업만 영위하는 경우에는 “고유번호”를 발급받는다. 수익사업을 하는 경우에는 기부금 영수증 등을 발급하거나 종교인소득 등 원천징수 의무를 이행한다 문 113. 종교단체용 주차장은 어떠합니까? 답) 직선거리 300m이내 곡선거리 600m이내 무료로 사용할 때 지방세를 비과세 한다 문 114. 담임목사의 선교목적용 1주택은? 답) 취득세, 재산세, 종합부동산세 비과세한다 문 115. 부 교역자가 사용한 사택은? 답) 취득세, 재산세가 과세된다 문 116. 선교사 주택은 어떠한가? 답) 취득세, 재산세가 과세된다 문 117. 지방세를 감면받으려는 자는 지방세 감면신청은? 답) 지방세 감면신청을 하여야 합니다 문 118. 종교단체의 부동산 매각시 비과세하는 세금은? 답) 종교단체가 고유목적에 3년 이상 계속하여 사용할 때에 부동산을 매각하면 양도소득세나 지방소득세, 법인세를 비과세 한다 문 119. 종교법인의 부동산 양도차익, 법인세 과세제외 요건은? 답 ) 1. 처분일부터 소급해 3년 이상 계속2. 정관에 규정된 고유목적사업에 직접 사용3. 부득이한 미사용등 정당한 사유 불인정 /세무사·법학박사
    • 오피니언
    • 칼럼
    2021-04-0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