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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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원은 하나님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4)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또한, 기복신앙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고난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공중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필연적인 단계이자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나아갈 힘을 주고, 우리가 해야 할일들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온전히 진리로 살아갈 motivation을 줍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모든 불순물들을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여, 오히려 그것을 제거하여 우리의 영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며, 우리 삶의 앞에 놓였던 길들을 정리해서 하나의 direction으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고난은 우리 인생에 대한 온전하고 명확한 분별력을 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한편, 사탄에 속한 사람들은 사탄의 일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많은 크리스천들도 이 일에 무지불식간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이 땅에서 기복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일에 동참하게 됨을 목도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재정을 추구하는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일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소통과 교제가 안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영적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악한 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속한 자들이라고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의 영적분별력의 부재로 인해, 또한 그들의 이 땅에서의 재정과 축복을 바라는 세상적 욕심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저 내가 축복을 받고 사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삶을 전적으로 걸고,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영적전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전쟁의 삶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저 기복적인 신앙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변화되어야 할 많은 영역들이 있고, 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진리로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일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그러한 진리와 그에 따른 변화를 말씀으로 선포하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길러내고 양육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실질적으로 세상의 그 땅으로 강력히 나아가서 변화를 일으킬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충만이 강력히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은 16:15)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이루어내야 하는 구원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재정구축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서 이 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으로부터 오는 축복보다는, 재정구축으로 오는 축복이 더욱 명확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을 통치하는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통치하게 되는 과정까지도, 주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하고 거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이것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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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는 형형색색의 고무풍선을 자전거에 매달고 달리는 이색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그의 형편을 알게 되면 충분히 그의 마음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에 온 인물로 지금은 법무부 위촉 사회 통합 이민자 멘토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쟁과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은 작가는 한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지난 3월 12일 KBS의 이웃집 챨스 프로그램에 출현하여 알려지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우리가 알듯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탈레반이 있는 나라로 특히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무역 센터 알카에다 테러공격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16년 전에 한국에 왔지만 20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동신교회 집사로 봉사하고 있다. 고통을 겪은 그는 이 풍선들처럼 서로 어우러져 사랑하고 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조국의 봄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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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에레모스 영성10] 광야를 닮은 소리(1)
    광야로 일컬어지는 곳을 연상할 때 떠올려지는 첫 이미지는 ‘거칠다’일 것이다. 영어표현 그대로 와일드(wildness)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약간의 의미를 덧붙여 야성(野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광야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거칠고 투박한 채로 남아 있기에 자연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문명이나 문화는 사람의 인위적 행위가 더해지게 된 결과물인데 이에 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추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창조의 세계 저 편의 암울한 파괴 현장을 목도하게도 한다.   구약 신명기는 ‘다듬지 않은 돌’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도록 하고 그러한 돌들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가르친다. 자연석에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인류의 문명사가 이어져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결코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 즉 하나님께 대한 충직한 신앙 그 자체를 성경은 ‘자연석’으로 상징하고자 했다. 곧 벧엘 야곱의 돌 그리고 요르단 강 길갈의 12개의 돌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돌, 변하지 말아야 할 돌 그래서 신앙은 그러한 돌과 함께 대대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나는 ‘광야를 닮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광야의 그 자연스러움, 꾸밈없음, 있는 그대로의 모습, 다소 거칠게 느껴지고 세련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말하면서 그 배경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과는 대조되는 순박한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우리는 광야의 풍미(風味)와 광야의 야성(野性)을 닮은 영성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이른바 광야의 소리가 주는 울림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울림을 전하고 싶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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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 성서와 생활 [22]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만찬의 영성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지성소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림을 받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주님이 구원의 영원성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성만찬을 행함으로 구원의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기를 원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주님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갓 죽임을 당한 것”계5:6같아야 한다.    예배의 현장 속에서 성만찬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들의 축복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태도에 있다.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 자리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세상에 속하여 죄의 유혹에 빠져 의심 많은 자들을 온전케 하는 것은 십자가를 기념할 때이다. 흔들리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안전한 구원의 피난처가 된다.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십자가의 구원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어린양이 있다. 계시록이 보여주는 놀라운 사실은 어린양에 대한 영성이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원한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십자가의 새로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에서 매일 밝히 보이는 사실이 되어야만 한다. 십자가를 잃어버린다면 영적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3:1십자가를 통해 항상 감동을 받는 믿음이라야 한다. 우리의 영과 마음과 생각 속에 십자가의 사역은 살아 역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항상 새로운 길이 되어야 한다. 항상 살아 있는 영원한 십자가의 계시를 통해 감동받는 영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영성이 있다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날마다 십자가의 이상을 새롭게 볼 때 죄에 대하여 영원히 죽은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죽는 믿음의 체험을 매일 새롭게 가지게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함께 함으로 그 피가 우리를 옛 창조의 근거를 제거해 버린다. 혈과 육이 제거되니 화를 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로써 성만찬의 예식은 예배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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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4) 나로 네 용모를 보게하라
    우리는 앞서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자 꽃이 피고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린다. 이를 영적으로 잘 깨달았다. 즉 장차 있을 환란과 주 재림과 천년왕국의 신비한 비밀들이다.    2:13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들이 구원의 열매를 내는 것은 무화과나무로서 푸른 무화과 열매를 내는 것이다. 또 포도 넝쿨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참 포도나무에 붙은 넝쿨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또 제자와 같은 신앙인 순교한 자들을 가리킨다.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재림하신 주께 찬송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 떠나자’는 ‘함께 떠나자’고 말씀하심과 같다. 앞의 10절에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는 신부에게 ’일어나서 함께 떠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단계를 거쳐 온 것이 13절이다. 본문에 ‘함께 떠나자'는 영적으로 계속해서 성도의 신앙을 진전시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계시한다. 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곳으로 주님과 함께 떠나자는 말씀이다.    2:14 바위틈과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 있는 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고 나로 네 음성을 듣게 하라. 네 음성은 달콤하고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오 나의 비둘기야'는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를 부르는 호칭이다. 여기서 신부 성도 될 자의 호칭이 바뀐 것은 신앙이 더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마10:16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했다. 즉 비둘기는 신부의 신앙 정절을 가리킨다. 주님이 사랑하는 신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정절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중심이 되면 ‘오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바위틈과 가파를 산 은밀한 곳에서는 깎아진 절벽 밑의 검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틈 은밀한 곳은 악한 들짐승과 바다의 짐승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써 안성맞춤이다. 이와 같은 피난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 자는 풀무 불이나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끝까지 신앙 정절을 지킨다. 우리의 피난처가 어디인가? 참 피난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라 하심은 신부의 용모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신부 얼굴에 면사포를 쓴 것과 같이 가리워서 오직 신랑 예수에게만 보여준다. 신랑 예수님만이 신부의 얼굴 위에 있는 베일을 벗겨서 보실 수 있다. 그럼 왜 신랑 예수님이 신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온몸으로 열매 맺고 이긴 것의 결과는 얼굴에 영광이 나타난다. 사람의 인격의 대표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신부의 용모를 보기 원하시는 것은 네 자신의 온몸(인격)이 변화된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도의 신앙 변화의 마디마디가 있었다.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던 때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던 때도 있었다.      앉은뱅이처럼 신앙의 침체기도 맞았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일으켜주셨다. 주님과 한 몸 되어 주님의 사랑을 채워주셨다. 계속하여 변화시키는 역사를 해주셨다. 이제 얼마나 변화됐는지 신부의 모습을 보려고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인격으로 변화된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또 주님은 신부의 음성 듣기를 원하신다. 음성은 사상을 의미한다. 주님 없이는 못산다고 울고불고하던 상사병이 고쳐진 것이다. 즉 인본적인 신앙에서 신본적인 신앙으로 바꿔진 것이다. 그 신부의 사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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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성서와 생활 [21] 그리스도인의 영성-십자가 생명의 영성
       십자가는 주님의 사역으로 끝나지 않고 믿는 자들의 길이 되어야한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뜻은 인간 죄를 대속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을 십자가의 역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십자가는 체험을 통해 우리의 일상의 삶이 되기를 원하신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면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서 생명을 전달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2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며 예수님의 생명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자랑했다.갈6:14‘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사도 바울을 주님을 위해 모든 고난을 견디셨다. 십자가를 최고의 능력으로 여기고 주님을 위해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십자가가 바울의 삶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요 정신으로 충만하였다. 그 결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도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던 사울 바울의 삶을 배워야 한다. 주님을 위해 언제라도 죽음에 넘겨질 각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다른 사람에게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모든 말을 체험적으로 알아 성령의 통로가 될 것이다. 전하는 말과 함께 행할 능력도 줄 수 있는 십자가 생명의 삶을 살게 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8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몸에 계속 적으로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했다. 우리의 생명도 십자가의 생명을 가진 자라야 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사도 바울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는 날마다 경험하는 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들을 주님의 정신으로 견딜 수 있어야한다. 바울처럼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는 십자가의 생명으로 성령의 통로가 되어야만 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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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4-10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청소년 바로 세우기•복지사업 등 열중
        최낙중원로목사(사진)는 1972년 6월 22일 관악구 판자촌에서 개척을 시작으로 2018년 10월 14일 은퇴에 이르기까지 46년을 해오름교회에서 사역한 후 은퇴했다. 최목사는 사역하는 동안 목회자, 선교사, 신학대 교수 등 84명의 영적 지도자를 배출시키며 열정적인 사역을 이어 왔다.   최목사는 “은퇴는 했지만 나는 은퇴(retire)를 타이어를 새로 갈아 끼운다는 re-tire라 생각한다. 은퇴 이후의 삶을 그렇게 새 타이어로 새로운 길을 달리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전하며 은퇴 전부터 해오던 한국교회를 위한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목사는 사단법인 한국청소년바로세우기운동협회 이사장과 대표회장으로서 현재도 기독교 인재양성을 위한 장학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이 장학사업을 통해 프랑스 로렌 대학교 최고의 섹스포니스트와 서울대학교 음대에 최연소합격자인 바이올리니스트를 후원하고 있으며, 이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도 기도하며 지원하고 있다.   또한 차별금지법반대연대 공동대표를 맡아 차별금지법 폐지를 위한 일을 하고 있으며, 세계성시화운동본부의 서울대표회장을 맡아 세상의 빛과 소금된 교회와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의 증인된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운동을 진행 중에 있다.   최목사는 이뿐 아니라 기아대책의 이사 겸 서울지역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기아대책은 전문적인 복지사업 수행을 위해 사단법인과 함께 사단복지법인과 재단법인으로 구성해 통합운영하고 있으며, 국제구호개발과 국내복지, 대북지원사업 등을 주로 하고 있다.   또한 최목사는 관악구 기독교총연합회 총재로 약 450개 교회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 최근 동 연합회에서는 관악구청 광장에 성탄트리를 점등했다. 이날 설교를 통해 최목사는 “예수의 탄생이 세상에 기쁜 소식이었듯이 우리 교회가 세상에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한다”며, “관악구의 모든 교회가 각자 역할을 잘하고 성도 개개인이 맡겨진 일을 다 하면 지역이 변하고 세상이 변할 것”이라고 전했다.   최목사의 목회 철학은 “주의 종은 주님이 쓰는 연장이다. 연장 중에는 녹슬고 부러져서 버림받은 연장이 있고, 쓰고 또 써 닳아 없어지는 연장이 있는데, 나는 쓰임 받고 또 쓰임 받다가 없어지는 연장이 되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며, “은퇴 후에도 일이 많아져서 힘들긴 하지만, 더 열심히 힘을 내야겠다는 도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영혼을 살리고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바로 세우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목숨 걸고 살겠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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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2021-12-15
  • [향유옥합]세상에서 빛을 내며 사는 삶
        저희로 이 땅에서의 삶을 허락하시고, 주님을 알게 하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다. 하나님께서 크리스찬에게 주신 축복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주님 주신 소망을 바라보며 기쁨을 만들어내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삶을 그냥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기쁨으로 동역해 나가며 성취해 나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사람들에게 삶에 많은 보화와 보물을 숨겨두었다. 이미 우리의 삶에 많은 리소스와 축복을 숨겨놓고 계신다. 그것을 찾아 나가면서, 그때그때 주님 주신 삶의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도록 주님께서 축복하여주시기를 기도한다. 물론, 크리스천들에게도 고난과 환란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고난과 환란이 아니다. 주님과 깊은 교제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깊은 손길이다. 고난과 환란을 놓고 기도하고 예배하며 더 깊은 기쁨과 소망으로 나아간다. 삶이 한 단계 발전하고 성숙한다. 그 속에서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또한 깊어진다. 여기에 놀라운 영적 비밀이 숨겨져 있다.   우리의 삶이 주님께 계속 올려드리는 향유옥합의 예배가 되기 원한다. 주야로 기도하고, 주님과 가장 친밀한 교제를 구축하고, 우리의 삶으로 사랑으로 예배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귀한 향유로 주님께 예배 올려드리는 삶이 되게 하소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으로 밝은 빛을 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알 수 없는 빛과 생명력이 흐른다. 하나님의 생명 말씀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서 기쁨과 소망을 살아갈수록 그 빛은 더해진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 주신 진리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풀어낸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둠과 만나는 모든 곳에서 그분의 권위를 풀어낸다. 우리의 존재가 어둠의 땅에 빛을 불러온다. 하나님의 영과 말씀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명확한 영적 분별력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게 하소서. 진리에 기반한 명확한 영적 분별력을 가지려고 항상 말씀을 기반하여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여기에 사랑을 더해 더욱 풍성한 삶을 살아낼 수 있기를 기도한다.       12월을 맞이하여, 주님의 깊은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한다.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셨다면, 세상이 얼마나 삭막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결국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이 지탱되고 있지 않냐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도 크리스마스를 매년 기념하고 즐거워하는 것 아닐까? 예수님이 사랑 그 자체 시라는 것을 그들도 느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기반하여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매일 기도와 예배를 올려드리는 이 땅에 소망이 있음을 느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려오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린다. 저희의 구주 되어주시고, 십자가로 사랑을 증명하신 주님을 깊이 사랑한다. 저희의 영혼을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사를 올려드린다. 주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는 저희 되게 하소서. 저희의 채워지지 않는 마음은 주님으로밖에 채울 수 없다. 주께서 저희의 가장 깊은 곳의 사랑을 채워 주시기 원하며, 저희의 가장 깊은 사랑을 주님께 올려드리기 원한다. 12월은 주님의 달이다. 우리 모두가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과 깊은 사랑을 나누게 축복하여주소서!     /글로벌아트전시기획사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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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1-12-15
  • [프로젝트: 기후 위기 시대의 기독교 8] 코로나19 시대 환경과 신학의 과거와 미래
            안주봉 박사 비블로스성경인문학연구소 연구위원 『생태위기와 기독교』 공동 저자      코로나19 위기를 계기로 이제 기독교인들도 생태 또는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일부의 기독교인 혹은 신학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나름대로 문제 원인 진단과 대안을 제시해왔다. 이에 환경 문제와 관련된 기성 신학 혹은 기독교 담론의 성격과 그 한계, 그리고 앞으로 바람직한 기독교 생태주의 관점의 흐름을 정리하고 전망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가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만든 코로나19 팬데믹의 원인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근원지에 대한 의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조류독감』의 저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제3세계권에서 급속히 확대된 도시화 및 슬럼지구가 열악한 위생환경에 의해 바이러스 변종들의 온상이 될 것으로 봤기 때문에 중국, 동남아시아가 조류독감의 발원지가 될 수 있고 이로부터 팬데믹 현상이 지구를 덮칠 것으로 근 20년 전에 예상하였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의 세계적 분업화 발전 과정에서 이곳이 가금류와 축산물의 대량공급지가 된 때문이었다.      본래 사람들이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원인은 지구 온난화문제 때문이었다. 물론 지구 온난화의 주원인은 탄소배출 증가 때문으로, 산업화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산업화와 자본주의 발전을 분리할 수 없다. 이안 앵거스 같은 학자는 생태적 위기의 원인을 자본주의에서 찾고 정치행동과 계급투쟁이 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하였다.     레오나르도 보프의 생태신학도 인간 중심적 공리주의 패러다임을 극복할 새로운 사회모델, 신학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신비에 기초한 새로운 영성, 창조신학의 복원, 성령론의 재발견(피조물에 작용하는 성령), 기독교적 만유재신론 등이 새로운 신학의 주요 골격이었다. 그리고 그 해빙신학의 실천과 성찰의 중심에는 가난한 이들이 자리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서구의 근대적 사유와 기독교의 인식론적 한계 문제에 주목하였다. 근대철학이 그 사유에서 자연을 분리시킨 때문이었다. 칸트도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하늘의 별보다는 “내부의 윤리적 법칙”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또한 어거스틴에게서 중시된 인간의 내면에 대한 관심이 종교개혁자 루터에게까지 이어졌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한편 린 화이트(Lynn White)라는 역사학자는 생태적 위기의 원인을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지배하도록 인간에게 명령한 성서적 위임(창1:28)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발전과 기독교가 연결되면 생태위기, 환경 위기의 주범은 기독교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조지 헨드리라는 연구자는 창세기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우주와 관련된 그의 목적을 시작하시는 출발점을 땅으로 삼음으로써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외에도 근대 자연과학의 발전에 따라 현대인의 의식이 과학 입장에서 결정되면서 분석적인 사고를 가지고 탐구하고 측정하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그 때문에 인간의 총체적 실체의 상실, 의식의 주관성으로의 매몰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헨드리는 신학이 전 세계, 구원의 역사, 내적 생명 모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지금까지의 문제를 로마서 8:18-23에 나타난 사도바울의 말로 응답했다. 그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의 의식 전환을 요청하였다. 즉 성령의 도움을 받아 고통 받는 자연에 대하여 연대의식을 가질 것, 복음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세계의 완성을 창조와 연결하는 연결체요 하나님의 성실성에 대한 결정적 증거로 받아들일 것, 자연에 관련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를 위해 우리에게 부과된 책임을 인식할 것 등이었다. 그런데 그도 여전히 기성 신학의 틀에 머물면서 복음의 빛, 성령을 중시했다.    어쨌든 기성 신학 또는 기성 기독교 담론에는 시대적 인식적 한계가 나타났다. 먼저 자본주의 발전과 기독교의 관계에 관한 설명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로 제기된 이른바 베버명제에 대해 오해가 있었다. 베버명제를 둘러싼 논쟁은 결국 프로텐스탄티즘이 자본주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 것이었을 뿐이지 본질적 동력이었다고 말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 성경을 근거로 기독교인들의 정복 성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역사에는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 문화권의 사람들에게서도 수많은 정복과 팽창이 있었다. 전근대 시대의 은둔 수도사들, 순박했던 켈틱교회 전통, 베네딕트 수도원 제도, 힐데가르트의 신비주의, 프란시스코회의 영성 등은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정복과 팽창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생태주의 신학의 관점이 사회경제적 관계를 중시한다고 볼 때 20세기 말로부터 21세기로의 전환기는 사회경제적 관계 변화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 변동의 폭이 컸다. 마르크스주의의 침체가 일어났고, 소련의 붕괴가 있었다. 자유자본주의 진영도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신자유주의가 몰락하고 많은 기업이 국가적 지원이나 보호에 의존하게 되었다. 또한 탈산업사회로의 전환은 계급사망 론을 제기하였다.   한편 지식문제에 있어서는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 주관주의 철학, 주체, 독단적 이성 등으로 불리는 우상을 쓰러뜨렸다. 다만 그 대안으로 권력 문제에 집착하는 푸코나, 언어사회적 인간 문제에 집착하는 하버마스 류의 관념도 여전히 인간 중심주의 사고를 탈피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치명적인 코로나19에 대한 대책인 국가적 차원에서의 격리와 폐쇄조치는 관용의 원리 위에서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주장해온 계몽사상적 자유와 충돌하였으며. 감염자 추적을 위해 통신 정보에 위한 위치추적시스템이 활용되면서 사생활의 자유 침해 문제도 제기되었다.     이상과 같은 변동들에서 제기된 것은 결국 ‘통제’라는 관념이었다. 하지만 현대경제에 대한 통제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개념정립이 미진해 보인다. 경제의 민주화라는 용어가 그나마 현실적인 용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미래 생태주의 신학은 누구를 또는 무엇을 주체로 생각할 수 있을까?     한편 최근 에른스트 콘라디라는 연구자는 기독교에 의한 생태주의적 담론 현상들 여덟 가지로 분류하여 제시하였다. 그것을 나열하자면 성경 해석학적 생태주의 담론, 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 담론), 공정하고 참여적이며 지속가능한 사회 담론, 생태여성주의 기독교 담론, 토착 영성 관련 담론, 동물신학 담론, 선교와 지구보호 담론, 기독교와 다신앙 대화 담론 등이다.     정리하면 생태, 환경 위기를 꼭 기독교에 원죄가 있는 것처럼 볼 필요는 없다. 또한 계급적 방법으로 자본주의만 극복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여기는 태도는 유효하지 않다. 그보다는 소비주의에 오염되지 않는 민주적 시민에 의한 통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 이유야 어쨌든 지구적 환경위기 앞에서 기독교가 담당해야 할 몫이 있는 만큼 그 도전을 계기로 기독교의 담론이나 신학의 한계를 인지하고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끝으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절차와 방법이 필요하다. 즉 특단의 조치들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필자로서는 코로나 19의 위기에 대응하는 한국 정부처럼 위기의 심각성을 공유하고 공동의 위기관리 매뉴얼을 통해 범세계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 프로젝트: 기후 위기 시대의 기독교 ; 생태신학 녹색교회 생명목회를 위하여 -  - 공동주최: 기독인문학연구원-이음사회문화연구원 ·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 · 에이치투그룹 주식회사 - 후원 및 연대기관: 주)천일식품 · 한국교회생명신학포럼 · 비블로스성경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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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4
  • [향유옥합] 내가 주님께 품는 구체적인 소망
    요즘 따라 여학생 시절의 고향 동네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해지는데 시간상으로는 칠십년 대 후반부터 시작된다. 소도시였던 경남 밀양의 우리 동네엔 왜 그리 흰머리에 비녀를 꽂은 과부 할머니가 많았던지, 지금 생각하면 희한한 일이지만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내게 주어진 세계가 당연한 것이고 완전한 것인 양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바로 옆집엔 진주댁 할머니가 살았다. 둘째 아들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한 달에 한 번 편지가 배달된 날이면 수십 번도 더 우리 집을 들락날락했다. 학교를 간 내가 와야 편지를 읽어주고 답장까지 써주는 대역을 군말 없이 해주기 때문에. 할매는 내가 써준 편지가 제일 맘에 든다면서 두세 번 낭독을 시키고는 내내 울먹거렸다.    그 옆집은 곰박상할매, 곰박상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경상도 사투리는 경상도 사람들 간에도 발음과 표기가 제각각이다. 어쨌거나 곰박상할매는 한 평도 못 될 점방을 운영하며 동네 할머니들한테 화투판 자리를 제공했다.   우리 앞집은 무더기할머니가 세 들어 살면서 길 쪽으로 점방을 내고 풀빵을 굽고 튀김거리를 팔며 매상을 올렸다. 외아들 이름이 천무덕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무더기빵이라했고 무더기할매로 불렀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았던 난경이할매,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동포였고 아버지는 이십년 넘도록 방세 한번 안 받고 공짜로 살게 해주었다. 난경이할매도 과부! 음담패설 배틀의 우승자, 할배가 우리 집에서 돌아가신 덕에 과부서열로는 맨 꼴찌다. 그래서 그런지 곰박상할매의 평상에서 선배과부들의 시린 옆구리를 걸쭉한 음담패설로 달래주는 역을 했다.      우리 집안을 한번 들여다보면 할아버지가 사형제였는데 우리 할머니만 남편보다 먼저 돌아가셨고 나머지 세 분 할매, 모두 과부였다. 한 분 뿐인 아버지의 손위, 우리 고모도 과부였다. 6.25 동란에 고모부는 쫓겨 다니다가 삼랑진 집 대문 밖에 서 있던 큰 감나무 근처에서 인민군한테 총을 맞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외가 쪽으로는 첫째인 큰이모도 젊어 과부가 됐는데 친구 민영희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너거 집은 와 그래 과부가 많노?” 그랬다. 영리한 나는 즉각 대꾸했다. “너거 엄마도 과부면서?” 한동안 우리는 깔깔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교복을 입고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하교하는 시간이면 집으로 들어서기까지 어김없이 열 명이 훨씬 넘는 과부할매들을 통과해야 했다. “학교 갔다 왔슴미더.” 할매가 먼저 “학교 갔다오나?”하고 인사를 해주기도 했다. 국회의원 사모님 표밭다지기인가!    미적분을 풀고 성문종합영어를 풀면서 나는 성가신 과부할매들이 득실거리는 동네가 점점 식상해졌고 하루빨리 이 동네를 벗어나고 싶다는 야심을 품게 되었다.    “Boys, be ambitious!”   드디어 나는 “과부할매들이여, 안녕!”하고 대학으로 가는 열차를 집어타고 야반도주했다. 그 길로 순식간에 삼사년이란 시간이 뭉텅이로 흘러가버렸고 십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그 많던 과부할매들이 다 어디로 갔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음이 허무했고 할매들한테 너무 미안하고 너무 보고 싶었다. 과부할매가 과부가 된 아픔을, 개인적인 상처든 시대적인 상처든 주님은 토닥여주고 땅에서 사는 동안 욕봤다고 위로해주시고 계실 거다. 언젠가는 과부할매들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나는 주님께 빌고 바라고 주님께 의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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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9
  • 참된 사랑을 실천했던 간호사
      얼마 전 뉴스에서 모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기숙사에서 자살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한지 7개월 밖에 되지 않은 신입 간호사인데 그녀의 자살 이유가 23명이나 되는 환자를 혼자 돌봐야만 했던 살인적인 노동과 선배 간호사들의 소위 ‘태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태움’이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로, 주로 선배 간호사가 후배 간호사를 괴롭히는 악습을 일컫는 은어라고 한다. 백의의 천사라는 간호사들 사이에 이런 악습이 존재한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이 뉴스를 보면서 120여 년 전 외국인으로 이 땅에 와서 40년 넘게 간호사로 머물다 떠난 한 여성 간호선교사가 떠올랐다. 에스더 쉴즈(1868-1940)라는 이름의 이 여성간호사는 간호선교사로 이 땅에 와서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다만 병원을 찾아온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한국 사람들을 섬기다 삶을 마쳤다.   “우리 병원 정문 혹은 입구에서 한 명 이상의 나병환자를 보지 않고 보낸 날이 거의 없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그리고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1931년 5월에 그녀가 쓴 글의 일부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자신의 모국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세브란스병원에 간호학교를 세우고 간호사를 양성했으며 이후 우리나라 간호사들의 권리와 발전을 위해 간호사협회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에서 입국한 최초의 간호사 안나 P. 제이콥슨(1866-1897)이나 서서평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쉐핑(1880-1934) 간호선교사 역시 많은 사랑으로 간호사와 선교사의 임무를 다하다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 세상을 떠난 분들이다. 특히 제이콥슨 선교사는 원래 노르웨이에서 태어났지만 선교사가 되기 위해 미국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지원하여 1895년 간호선교사로 서울에 파송을 받은 분으로 제중원(현재의 세브란스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간호하며 전도를 감당했던 무척이나 신실하고 성실한 간호사였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이나 바람과 달리 그녀는 한국에서 1년 반 밖에 활동하지 못했는데 이질과 말라리아를 앓았고 결국 치명적인 간농양으로 31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뒤를 이어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간호선교사가 바로 에스더 쉴즈인데, 쉴즈는 1897년 미국 북장로교에서 한국으로 파송 받아서 1938년 만 70세로 은퇴할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만 40여 년, 의료선교와 복음전도 그리고 간호교육과 사회사업으로 일생을 바쳤다.   “나는 의학적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 심한 병에 걸린 후 회복된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항상 편안하다. 약 15년 전 4명의 아이를 가진 과부가 진료소를 찾아왔는데 어머니와 생후 1개월 된 작은 아기는 즉시 입원했다. 어머니는 급성신장염을 앓고 있었다. 약 한 달 동안 치료를 잘 받았고 우리는 아기를 돌보아 주었으며 그녀는 회복되었다.” 쉴즈의 선교 보고서에는 이런 기록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쉴즈는 한국 사람들에게 ‘세브란스의 천사’(angel of Severance), 혹은 ‘한국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렸다. 그녀가 병원의 간호부장으로 일하면서 자기의 봉급 전부를 세브란스병원에 찾아온 빈궁한 환자들을 위해 바쳤기 때문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던 그녀를 위해 병원의 교직원들이 회갑연을 베풀어 주었을 때 “세브란스병원의 천사 같은 어머니”였던 그녀는 병들고 가난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던 사람들이 마지막 희망으로 병원을 찾아왔을 때 누구나 병원에서 편안히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분수식 급수대를 설치하는데 사용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초기 간호사들은 일생을 바쳐 구제와 사랑의 손길을 그치지 않았는데 오늘 우리 사회는 ‘태움’으로 보답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평택대 교수, (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12-08
  • 한교총 총회의 파행을 우려한다
    지난 2일 열린 한국교회총연합 총회가 파행으로 끝났다. 다음 회의의 일정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한국교회을 대표한다는 한교총의 총회가 파행으로 끝난 근본 이유는 현 공동대표 체제를 여러명 대표 체제로 바꾸려는 정관개정 시도했었다. 공동대표를 1인 대표로 바꾸려는 이유는 정부와의 협상에서 대표성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밝혔다.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교총의 존재 이유가 정부와의 협상에 있는가? 국무총리나 정당대표의 방문을 받기 위해 한교총 대표회장을 하려는가? 물론 정부와의 협상도 한국교회 연합기관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한교총은 스스로 그 정관에서 밝히듯이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해 있다. 그래서 여러 교단이 가입해서 적지 않은 회비를 내는 것이다.   한교총은 한기총의 대안으로 시작됐다. 한교총은 한기총과 달리 공동대표회장 체제를 채택했다. 왜 그런가? 한기총이 1인 대표회장을 뽑기 위해 금권선거로 타락했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한교총이 다시 한기총이 걸었던 그 타락과 불통 과정을 걸으려고 한다.   이번 한교총 총회의 파행은 한국교회에 큰 실망감을 안겨줬다. 이번 파행이 책임은 지금 한교총을 이끌고 있는 지도부에게 있다. 지도부는 이번 파행의 원인을 잘 살피고, 이를 매듭지어야 한다. 결자해지해야 하다.   한교총의 대표회장은 섬기고 봉사하는 자리이다. 더 높아지려고 하는 권력과 탐욕의 자리가 아니다. 선거 때가 되면 찾아오는 고위 공무원이나 정당대표와 만나 환담하면서 무엇을 말해야하는지 숙고해야 한다. 높은 정치인들을 만난다고 해서 스스로 권력의 맛에 취하면 안 된다. 낮아지고, 섬기는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한교총의 이번 파행은 현 지도부에게 책임이 있다. 권력과 정치가 아닌 섬김과 겸손의 모습이 한교총에 있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12-08
  • ‘사랑의 실천’·‘교회의 연합운동’ 추구 - 본지 창간 56주년에
    기독교신문이 창간 56주년을 맞았다. 1965년 12월 12일 「사랑의 실천」을 사시로 한국교회와 국가발전, 그리고 세계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창간되었다. 창간 당시에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리고 국가와 민족적으로 중요한 전환기였다. 제1차의 농업혁명과 제2차의 산업혁명을 지나 제3차의 중공업혁명의 단계에 이르는 시기였다. 특히 남북한의 군사대치 상황은 불안을 고조시키는 시기였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교인이 2백만명, 교회는 6천개 정도였다. 경제성장과 함께 교회도 급성장의 시기였다.   본지는 이러한 시기에 창간되었다. 교회가 사랑의 실천으로 성장시키고, 국가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창간정신을 추구해 왔다. 또한 「사랑의 실천」과 함께 「교회연합과 일치」도 추구해 왔다. 사랑의 실천으로 한국교회를 위한 연합운동과 일치운동도 전개해 왔다.   이러한 본지는 사랑의 실천에 대한 기사를 발굴하고 기획하여 신학적으로 선교적으로 주장해 왔다. 사랑은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윤리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의 성육으로서 역동적이고 실천적인 것이다. 사랑은 기독교 안에서의 윤리라는 한계를 넘어서 우리의 사회와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운동이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보도해 왔다. 「사랑의 실천」은 기독교의 윤리 안에서만 머문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회와 국가에도 널리 퍼지도록 노력한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운동, 그리고 교회개혁에도 앞장 섰었다. 기독교는 고대로 중세기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교회로 발전하여 확장하였다. 제11세기에는 희랍의 정교회가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하였다. 제16세기에는 프로테스탄트교가 로마 가톨릭에서 종교개혁을 하여 민족중심의 교회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분열을 거듭해 왔다. 이 분열된 교회를 일치시키고 연합할 수 있도록 갱신과 개혁운동도 함께 전개해 왔다. 교회는 일치와 연합운동으로 하나가 돼야 하고, 갱신과 개혁으로 새로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12-08
  • 역경을 이기는 그리스도인
    항해 중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게 되면 보통 세 가지 방법 중에 하나를 택하게 된다고 한다. 하나는 속히 배를 돌려서 태풍이 불어오는 반대방향으로 도피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태풍의 풍속이 어떠한 쾌속정보다 빠르기 때문에 실패를 한다. 두 번째는 왼쪽이나 오른 쪽으로 배의 방향을 트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도 더 큰 위험을 초래한다. 배의 방향을 틀면 태풍을 맞는 면이 더 커져서 배가 전복되기가 쉽기 때문이다. 세 번째 방법으로 지혜롭고 경험이 많은 선장은  배의 모든 창문을 단단히 닫고 전속력으로 풍향과 균형을 맞추어 태풍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정면 돌파하는 길을 택한다고 한다. 태풍의 기세가 가장 강한 곳이 가장 거리가 짧은 곳이며 태풍으로 인한 손상을 적게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풍을 피하지 않고 직접 맞서면 오히려 짧은 시간 내에 태풍의 피해를 줄이면서 위험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우리세대는 지금 전 세계가 코로나라는 태풍을 만나 질병의 고통과 경제적인 압박, 심리 적 불안 등의 위기를 맞고 있는 실정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인간 최고의 가치인 믿음을 상실한 채 회복의 의지마저도 포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대사회에 몰아치는 세대주의와 질병과 물질만능, 과학만능의 풍속에 떠밀려 실종되어가는 성도들, 무너져 가는 교회, 변질된 신학과 신앙을 기도와 말씀,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 원수와 맞서 싸워서 승리해야 한다.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다시 일어나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도전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고 했고, 히브리서기자는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라고 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믿음과 성경과 예배의 가치를 부각시킬 뿐만 아니라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어서 교회에 모임이 제한되거나 비대면 사회가 지속될 경우를 대비해서 전 성도를 사명자로 세워서, 개개인이 가족 목회자의 역할을 하도록 양육시켜야한다.  /예장 합동선목총회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12-08
  • 죽은 나사로가 살아남
    히브리서 11장 35절에 여자가 죽은 자를 부활로 받았다. 이는 마리아가 죽은 오라비 나사로를 부활로 받은 것이다.(요11:39-44) 베다니 사람 나사로가 병들어 누이들이 주님께 사람을 보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급히 알린다. 이럴 때 주님은 보통 어떻게 하셨는가? 즉시 달려가시어 병을 고쳐주셨다. 아니면 요한복음 4장 50절에서와 같이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라는 말씀으로 치료해 주셨을 것이다. 이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시니 그 전능하신 능력은 시공간, 장소를 초월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4절에서 “이 병은 하나님 영광을 위한 것이라.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일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또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15스타디온쯤 되니라” 이는 무슨 뜻인가? 나사로가 예루살렘이 가까우니 자주 드나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의 유대교 지도자들인 율법주의자들을 자주 만나 그 교훈을 자주 들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나사로는 예수 믿는 자요,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였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이 그를 불러내고 잘못 가르친 것이다. 즉 예수 믿음의 의를 버리고 율법의 행함의 의를 내세우게 한 것이다. 그것이 병든 것이요, 결국 죽게 된 나사로이다. 마치 니골라가 믿음에서 떠나 유대교로 다시 개종한 것과 같이 되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9절에서 “많은 유대인이 유족들에게 위로하러 왔더라” 유대인들이 무엇을 위로할까? 나사로는 율법을 잘 지켜 행함으로 의인 됐고 구원받았다고 헛소리로 조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오늘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믿느냐?”고 질문하신다. 주님은 무덤에 가시어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니 죽었던 자가 무덤에서 나오더라. 죽었던 자가 수의로 손발이 동여지고 얼굴이 수건에 가려진 채 나온다. 무엇을 계시하시는가? 율법의 수의와 율법의 수건으로 죽었음을, 또 이 죽은 자를 주님이 풀어주어 다니게 하신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결박과 가림이 다 풀려지고 자유롭게 된다(고후3:14-18). 이로써 나사로가 영생의 열매 맺는 몸으로 다시 살아났다. 이런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계속됨을 계시한다. (YouTube‘주사랑교회CLL’참조) /예장 진리측 총회장 · 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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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8
  • 스마트 시대의 디지털 치매 (1)
    지난 주말, 사용하던 스마트폰을 초기화하느라 몇 시간 동안 사용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약속 시각이 다가왔고 30분 정도 운전해서 가는 장소인데, 자주 가던 그 길도, 그 길을 물어볼 친구의 전화번호도 알 길이 없었다.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이 세상에 혼자가 된 것 같은 느낌, 비록 얼마간이었지만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그 시간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얼마나 스마트기기에 의존하며 살고 있는지, 그만큼 내가 얼마나 무력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는지 깨닫는 경험이었다.   2016년 한국정보화진흥원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17.8%가 스마트폰 중독이고, 청소년의 경우에는 30.6%로 나타났다. 스마트폰에 중독된다는 것은, 스마트폰 사용에 몰두하고 이로 인해 심리적, 신체적,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문제가 나타나고, 자율적인 조절이 실패하는 등의 특징을 보이는 경우를 말한다.   물론 스마트폰이 유용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무언가가 궁금하면 인터넷 검색으로 단번에 해결된다. 하지만 문제를 고민하고 책을 찾아 읽고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해결하는 일은 점점 줄어든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길러지지 않는다. 검색엔진과 저장해놓은 자료에 의존하니 외울 필요도 없다. 독일의 뇌과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만프레드 스피처가 그의 저서 “디지털 치매”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는 머리를 쓰지 않는 똑똑한 바보들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가족의 전화번호도 외우지 못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   요즘 멀티태스킹의 시대라고 한다. 바쁘고 할 일이 많은 현대사회에서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며 산다는 뜻이다. 멀티태스킹이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진정한 멀티태스킹이 가능한지도 잘 모르겠다. 우리가 책 두 권을 동시에 읽거나 두 사람과 한꺼번에 대화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뇌는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정보가 들어오면 문을 닫고 정지된다. 너무 많은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학교 수업 시간에는 넋 놓고 있는 것처럼 뇌가 더 정보를 다루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이것이 스트레스가 된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스마트폰 사용 시간이 많은 사람일수록 불면증, 비만, 당뇨의 위험성이 높아지는 악순환의 연결고리가 생긴다.   우리 뇌는 태어난 후 소리, 색, 촉각, 냄새 등 다양한 자극을 받으며 신경세포들이 연결되고 조직화하며 성장한다. 이때 현실 세계와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 이것은 디지털 세상에서 입력되는 경험과는 다르다. 스마트기기에 일찍부터 노출된 아이들의 두뇌는 완전히 성장하기 어렵다.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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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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