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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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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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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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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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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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백석대 이사장 박요일목사
    백석대 이사장인 박요일목사는 말씀과 기도중심의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지난 세월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고 감사한 시간이었음을 고백했다.   박목사는 고려대 법대 졸업후 총무처 문화공보부에서 공직으로 5년간 일하다가 총신대 신대원에 진학했다. 또한 성결대, 백석대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강성교회를 설립하여 41년간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16년간 백석총회 유지재단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왔다.   197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으로 출발한 강성교회는 1996년 백석총회에 가입했고, 강성교회 재산을 총회에 기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2007년 유지재단을 세웠다. 유지재단은 영안교회와 흰돌교회, 그리고 강성교회가 함께 세웠고, 박목사는 초대 이사장부터 다섯 번 연임하며 총회와 재단을 위해 봉사했다.   박목사의 설교에는 한결같은 원칙이자 철칙이 하나 있다. 설교주제를 목사의 재량으로 정하지 않고, 성경에 쓰여진 순서와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목회철학이다. 강성교회는 매 주일 새벽 5시 30분 예배, 그리고 오전 9시와 11시 예배, 오후 찬양예배가 있다. 예를 들어, 성경본문 1~5절을 새벽에 전하고, 6~10절은 오전예배때 전하고, 11~15절을 오후에 전하는 방식이다. 매 주보에는 그날 설교문이 그대로 담겨있다. 수요예배 설교는 지난 주일예배 설교를 복습하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주중에 교인들은 주보에 쓰인 지난 설교문을 읽고, 한주간 말씀 속에 살아가도록 권면한다. 또한 구역예배 인도자에게는 다음 주일 설교문을 보내주어 말씀을 예습하도록 한다.   이 원칙을 지난 40여년간 한결같이 지켜왔다. 그동안 설교가 생뚱맞거나 엉뚱한 주제가 아닌, 때마다 필요한 말씀이었다는 것. 그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고 박목사는 고백한다.   박목사는 “하나님은 고정된 말씀인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오래된 말씀이지만 그것을 전할 때 말씀은 생명력이 있고 운동력이 있어 사람을 먹이고 살리는 힘이 발휘된다”고 말한다. 그만큼 목사의 설교준비는 마치 ‘어머니가 밥을 준비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100% 무공해는 어렵지만, 저공해로 영양가 있는 밥을 지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목사는 신약과 구약을 골고루 섞어야 한다며, 어느 한쪽을 편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박목사는 “세상의 법은 오심을 방지하기 위해 3심 재판제도를 둔다. 설령 사형이 선고되더라도 사면복권이나 재심의 기회가 있다”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한번 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잘못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언제나 옳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심판을 두려워하며 평소에 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한국교회를 향해 말씀중심으로 가야할 것을 권면했다. 그는 “목회자가 깨어있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말씀중심으로 가야 한다. 성경에 모든 답이 있고, 길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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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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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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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를 위하여 돌을 던지고 있나요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소속인 명성교회는 현재 원로목사님이신 김삼환목사님이 미사리 해양교회에서 쫓겨나다시피 피난 나와 강동구 명일동 미개발지역인 버스종점 조그만 상가건물 2층에서 1980년 7월 6일 십자가를 세우고 “칠년을 하루같이” 와 “오직주님”을 표제로 세우고 개척한 교회이다.   원로목사님의 간절하신 새벽기도를 주님께서 알아 들으셨는지 주변에 대형 아파트들이 건설되면서 짧은 기간에 비약적인 성장을 하여,국내 장로교 역사상 최초로 10만 이상의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초대형교회로 도약 하였다.   김삼환 원로목사님은 매일 새벽기도를 드리며, 낮은 자세로 강단에 엎드려서 눈물로 기도 하면서 오직 십자가의 사명을 다하는 종교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40년간 주변눈치를 안보시고 묵묵히 실행하신 분이다. 교회를 부흥 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복음화 운동에도 앞장서서 전 세계 수십개 오지국가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기독교 복음화에도 앞장서 왔다. 또한 세계 최초로 여주에 민간인이 운영하는 소망교도소(아가페교도소)의 건립에 기독교 지도자들의 힘을 하나로 화합 시키고 추진해서, 주변 반대를 잘 극복하고, 어렵사리 교도소를 무난하게 완공하여, 한순간의 실수로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온 죄수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복음화 시키어, 출소 후 또다시 죄를 짖고 재수감이 안 되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교화 시키고 있다.   요즘 언론에서 크게 다루고 있는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위안부로 끌려가서 꽃다운 인생을 바친 할머니들의 노년을 편하게 생활 하시도록 ‘나눔의 집’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관리비용도 수십 년간 제공 하였다. 그리고 국내 전국도시에 장학관을 건립하여, 어렵게 배우는 인재들을 키워서 국내 및 세계 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육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재로 양성 하였다.   따라서 명성교회가 국내 기독교의 부흥 발전은 물론 국내 정치, 경제발전의 지도자들을 양성한 것도 사실이다. 최근 원로목사님이 은퇴 하면서,명성교회에 대해서 사회 및 기독교내에서 세습을 강행 하였다는 수많은 비판을 하는 것도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한사람으로서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명성교회소속 교인들이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80프로 가까운 찬성으로 김하나목사를 초빙하는데 동의하여 어쩔 수 없이 강행하였음을 다시 한 번 부언헤 드린다.   물론 통합장로교 교단에서 교회헌법에 위배 된다고 극렬한 반대를 한 것도 인정한다. 그래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경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예수님 생전에 하신 말씀을 상기 하여 보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말씀에 답이 있다고 본다. 돌을 들고 치라고 하던 군중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고 스스로 돌을 내려놓고 한순간에 도망가다시피 살아졌다.   이제는 더 이상 불협화음을 내지 말고 율법으로만 정제하고자 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을 불살라 버리고 진정한 회개와 용서를 통하여 긍휼을 베풀고 하나로 뭉치는 장로교로서 거듭나길 기도한다. 주님의 보이지 않는 힘으로 모든 것을 이겨 낼 수 있는 장로교회가 되길 소원한다.  /명성교회 안수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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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2
  • 피부질환 고통을 해방시키는 병원 추구
    ▲ 경희신창한의원은 피부질환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이들을 치료해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아토피·건선·습진 등 난치성 질환치료 위한 병원 운영 “우울증까지 일으키는 피부질환서 해방되길 희망한다”   윤종성박사(사진)는 서울시 강남구에서 경희신창한의원을 운영하면서 피부건강과 미용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이 시대에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피부건강 한약제품을 제조하며 시대적 요구를 선도하고 있다. 경희신창한의원은 통상적인 한방진료는 물론 세계 최고의 피부 전문클리닉을 목표로 아토피와 건선, 습진 등 난치성 피부질환을 집중적으로 치료하는 한의원이다. 난치성 피부질환 치료를 위해 신창피부과학연구소를 설립, 난치성 피부질환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피부질환 치료특허를 2개 보유할 수 있게 됐으며 양의학을 통해 피부질환이 치료되지 않은 이들이 찾아와 수개월 만에 호전되는 등 피부질환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희망이 되고 있다. 윤종성박사는 피부질환의 고통을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윤박사는 “아토피는 ‘애매모호한’, ‘무언가 잘 모르는’, ‘불확실한’이라는 뜻의 헬라어 아토포스가 어원이다”며, “아토피는 말 그대로 원인을 알 수 없지만, 목이나 팔목, 무릎 언저리 등 움직임이 많은 부위에 가려움증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생기는 질환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아토피 질환자들이 느끼는 가려운 정도는 아토피를 겪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다”며, “저녁 10시에 잠자리에 누운 환자가 밤새 몸을 긁는 경우가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아토피가 발병한 부위의 피부가 완전히 드러나 피가 나와도 그 고통을 참으면서까지 긁는 사람도 많다”며, “얼굴이나 목 등 타인에게 흔히 보이는 부위에 난치성 피부질환이 발병하면 고통은 고통대로 찾아오면서 다른 사람에게 흉한 모습으로 보이며 스트레스에 우울증이 나타나는 일도 제법 있다”고 밝혔다. 윤박사는 사람마다 난치성 피부질환의 발병 원인이 다양하기에 특정 치료 방법만을 고집하는 것은 더욱 병을 키울 수 있음을 우려했다. 윤박사는 “피부질환은 유전적 배경에서 음식 알레르기, 면역학적 이상, 피부장벽의 이상, 환경적·사회적 인자, 심인성 스트레스 등이 서로 복합적으로 연관되어 발병한다”며, “스테로이드제와 항히스타민제를 통한 양방 치료는 체질에 맞지 않아 큰 부작용이 발생하거나 증상을 악화하는 때도 있다. 사람의 체질에 따라 다른 처방으로 치료하는 한방에서도 치료율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현실이다”고 밝혔다. 이어 “난치성 피부질환의 근본원인을 면역력 교란과 환자의 먹는 음식에 있다고 보았다”며, “체질개선을 통한 면역력 조절과 몸에 맞지 않는 음식들을 찾아내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오랜 기간 연구 끝에 화식면역요법을 개발했다”고 강조했다. 음식을 생으로 먹는 것을 지양하라고 윤박사는 충고했다. 윤박사는 “자연계에 있는 모든 식품은 독성이 있다. 이를 섭취할 때 몸에 맞으면 약이 되고 맞지 않으면 독이 된다”며, “자연에서 흔히 먹는 음식에 있는 성분은 미약한 편이지만 몸이 민감한 사람에게는 그것마저 피부질환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된다”고 전했다. 이어 “음식 속 성분을 중화하는 좋은 방법은 음식을 익혀 먹는 것이다”며, “채식 위주의 식단을 꾸리는 것이 좋고 여기에 발효 식품을 첨가하는 것도 좋다. 육식은 가능하다면 피하며 기름을 자연스럽게 많이 섭취하는 음식은 무조건 멀리하는 편이 좋다”고 지적했다. 또한 “안타깝게도 식단 조절만으로 아토피를 치료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치료는 결국 약이 할 수밖에 없다”며, “아토피를 비롯해 피부질환으로 더는 고통받지 말고 이를 치료해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도록 계속해서 돕고자 한다”고 말했다. ▲ 난치성 피부질환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환자들에게 윤종성박사는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 것을 강조했다.      
    • 오피니언
    • 인터뷰
    2020-07-01
  • 차별금지법은 신앙의 자유를 훼손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을 내세우는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사람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에 동조할 것이 아니라 신앙을 중시하는 신본주의의 차원에서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 헌법은 차별금지를 보장하는데, 2019년 8월에 문재인정부의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소위 포괄적 차별금지법인 NAP(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는 양성을 명시한 헌법 32조와 양성평등기본법을 전면적으로 무시한 위헌적이고 위법적인 결의로, 표현과 신앙의 자유를 현저하게 훼손하고 있다. NAP 정책은 인권이 아니라, 실상은 차별금지를 빙자한 한국교회를 향한 규제법이다. 차별금지법에 있는 독소 조항가운데 성적 지향과 성별정체성인 젠더문제는 성혁명을 숨기고서 반성경적이고 비윤리적 속임수로 한국교회를 공격하고, 거짓 인권으로 신앙과 표현의 자유를 압살하기에 동성애독재를 통한 반민주적이다.   성경이 ‘가증한 것’(히브리어 토에바)으로 여기는 동성애는 호전적이다. 인본주의는 동성애를 이용한다. 한국교회는 ‘사람이 먼저다’라는 좌파프레임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동성애를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원리대로 교회를 지켜야할 신앙이 먼저이기에 성경적 복음의 진리를 굳게 수호하고, 신학생은 동성애가 빠른 속도로 번져 가고 있기에 홍대와 이태원의 거리로 나가서 동성애자에게 전도해야한다. 동성애의 세력이 커질수록 기독교는 무너진다. 동성애는 신앙과 교회를 파괴하는 힘이 있어서 서구신학교는 이미 무너졌다.   플라톤의 ‘대화록’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향연’은 에로스를 동성애의 최고신으로 극찬한다. 성인남자가 미소년과 동성애를 나누면서 후견인이 되는 일은 그리스 신화에서 기원한다. 후견인과 수혜자 관계가 로마 세계에 그대로 전해져서 예수의 시대에는 동성애가 이방신전의 제사뿐만 아니라, 일상에까지 깊이 들어왔다. 식탁교제인 향연이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서 심포지엄으로 일상화되었는데, 그 내막을 살펴보면 동성애 문화에 뿌리를 둔 것이다.   아이들이 자극적인 이야기에 끌려서 좋아하는 그리스 신화에서 에로스는 사람에게 동성애 사랑이라는 화살을 쏘아서 성인남성이 미소년을 사랑하게 유혹한다. 헬라어 에라스테스는 성인남성으로 파이데카 혹은 에로메노스인 미소년을 의미한다. 곧 에라스테스는 40세 미만 성인남성을 일컫는 단어이고, 에로메노스는 미소년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로써 그리스에는 에라스테스가 돈과 경륜으로 에로메노스를 사서 남성끼리 쾌락을 추구하는 동성애 문화가 만연하였다. 고대교육에 동성애의 뿌리가 있다. 헬라어 아레테는 ‘덕목’이지만, 원래는 ‘탁월함’이란 단어이다. 성인남성이 미소년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사랑을 하면서 후견이 되고 평생 도움을 준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 파이드로스, ‘교육’(pedagogy)이다. 페도필리아가 교육사랑이 아니라, 소아성애라는 뜻인 것도 동성애교육과 관계가 있다. 동성애에 눈을 뜨다보니, 변태성욕과 성도착증에 가까운 왜곡된 심리적 질병 혹은 정신병과 같은 강박관념이 소아성애를 유발하기 때문에 페도필리아가 된다.   고대교육은 동성애의 미궁 속에서 혼란스럽다. 미소년 때는 성인후견인과 동성애자의 관계에 있다가, 성년이 되어 미소년과 동성애에 빠지고, 결혼 후에는 한 여인과 자녀를 낳는 이성애자가 된다. 인생에서 두 번 동성애자가 되고 한 번 이성애자가 되는 동성애와 양성애의 교육에 그대로 노출되어 자녀들이 자라는 것이 고대 다신론적 사회이다. 동성애교육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신앙교육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에로스가 부추기는 성인남성이 미소년을 사랑하는 소년애를 의미하는 파이데라스피아라는 단어도 헬라어에서 교육치료나 소아치료가 아니라, 소아성애의 뜻으로 따로 발전한다. 성인남성인 에라스테스는 자식과 같은 파이스 혹은 에로메노스인 미소년과 동성애에 빠진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런 동성애교육으로 길들여진 도시국가인 테베의 전사가 모두 동성애자로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와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전멸한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세 개의 성인 자웅동체의 성과 남성과 여성이 존재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남녀를 창조하신 것과는 달리, 다신론적 배경 속에 있는 그리스 신화에서 에로스의 제자인 제우스가 사람을 창조했다. 처음부터 남성과 여성이 따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자웅동체로 한 몸인 둥그런 달에서 태어났기에, 반쪽으로 나뉘어져서 서로를 그리워한다. 남성은 태양에서 태어났고, 여성은 대지에서 태어났다. 이런 연유로 태양과 대지는 천지차이가 나므로, 남성은 남성을 여성은 여성을 본능적으로 동성애 사랑을 한다.   에베소에 소아성애의 상징인 에로스 점토상이 많다. 에로스가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에 창궐하던 성창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이방신전에서 한 평생 성관계를 이성애자에서 동성애자로 그리고 다시 양성애자로 옮겨가는 여성을 헤타이라 곧 창녀로 일컬으며 우상을 섬기는 이방신전에서 성창으로 일하게 하였는데, 지중해 세계를 27년 동안 다니면서 복음을 전한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런 음란한 문화를 예수말씀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동성애와 양성애와 성전환을 이단이라고 규정을 하였다. 이단이라는 헬라어가 하이레시스로 고대 창녀인 헤타이라와 연관되어 있다. 이단은 이방신전에 가득한 동성애를 유발하는 우상숭배이기에, 바울은 동성애를 악덕목록에 넣어서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는 것으로 죄악시하였다. 그래서 2018년 제103회 통합총회가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이단’을 결의했다.   스웨덴의 증오표현금지법은 원래 유대인을 공격하는 신나치주의자들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법인데, 지금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성경을 인용하거나 설교를 금지하는 법으로 악용되고 있다. 동성애독재의 파고 속에서 목사까지도 성소수자를 인권이란 미명하에 보호해야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입장에 동조한다. 인본주의와 퀴어(괴상한) 신학으로 인해서 한국교회가 성경적 복음의 본질에서 멀리 벗어나다. 인권을 앞세우다가 신앙을 다 잃는다. 동성애독재는 인권이란 미명하에 성장한다. 인권문제로 사람에게 집중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래 인간의 모습을 소홀히 하는 반성경적 입장으로 나간다. 인권은 인본주의인 좌파의 옷을 입고 유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섭리가운데 인생을 대하신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반신앙적 행위이다. 교회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성애자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동성애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순종하도록 일깨워야 한다.   /소기천(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성서신학교수/예수의 토라*소기천TV 유투버)   ◇종교.시민단체들은 차별금지법발의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 오피니언
    2020-06-29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14
      세계로부천교회 ‘새 생명 초청 전도축제’에서 성도들에게 찬양과 간증을 통해 큰 은혜를 끼쳤으며, 지금도 복음사역에 매진하고 있는 찬양사역자 김민석 갓페라 가수를 소개한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주님의 은혜로 살아왔던 그의 삶들을 알아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한다.   김민석은 교육자(교사)가정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할아버지가 작은 할머니를 얻으셨는데, 무당이었다. 김민석이 어릴 때에는 무당할머니가 굿판, 푸닥거리를 하면 먹을거리가 많아 좋았지만, 철이 들어 교회를 다니면서 영적인 전쟁이 일어났다. 무당 할머니가 있는 가정에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고 2때 부흥회를 통해 5대양 6대주를 다니며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응답을 통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무당집에서 신학대학에 가기란 불가능한 것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들이 몰래 신학교에 입학한 사실을 아신 아버지는 불같이 진노하셨다. 그러나 그는 죽기로 결심하고 3일간 단식투쟁을 하자 아버지는 결국 신학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을 허락해주셨다.   김민석은 신학을 하면서 찬양이 너무 좋아 해외 선교를 시작했고, 1992년 제11회 전국복음성가경연대회 동상을 수상하면서 찬양 사역의 길을 걷게 되었다. 동상을 수상하고 극동방송 공개방송에 찬양 사역자로 처음 초대 받았는데, 진행하시는 최미 찬양사역자(사모)가 교통사고가 나서 오지 못했다. 바로 그가 대타로 얼떨결에 방송을 진행하면서 김민석 사역자는 지금까지 방송진행자로 28년 동안 쉼 없이 극동방송과 기독교방송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있다.   김민석 전도사는 신학을 마치고 방송 진행자로 열심히 살아가다, 35살에 돌연 성악을 전공하겠다고 침례신학대학원 음악목회 대학원에 입학했다. 성악가들 대부분은 교회 출신인데, 이들은 오페라 아니면 팝페라(팝+오페라 묶음)의 꿈을 갖고 있다. 그가 찬양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새로운 장르는 없을까 고민하다 새로운 장르 갓페라(가스펠+오페라 묶음)를 만들어 보겠다고 도전하게 된 것이다.   김민석은 “주님 부족한 제가 세상 적으로 실력이 뒤지지 않을 때 갓페라를 만들어 보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은 민 14장 28절 말씀으로 응답하셨다. 그는 이 말씀 붙들고 이태리 로마로 유학길에 올랐다. “내 말이 네 귀에 들린 대로 내가 시행하리라”, 그는 5년간 유학하면서 국제 콩쿨 3개 입상을 했고, 갓페라가 탄생하게 되었다.   유학 간지 6개월 만에 국제 콩쿨에서 보기 좋게 떨어지자 낙심이 되었지만, 그 다음날부터 24시간 음악을 때어 놓고 산적이 없을 정도로 갈망하고 간절히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3번씩이나 발성법을 가르쳐 주셨다. 다시 6개월 후 12월 팔레르모 국제 콩쿨에서 3차까지 모두 통과하고 입상을 했다. 5년 간 유학을 마치면서 김민석은 의기양양하게 한국으로 귀국했다. 귀국 독창회 마치고 바로 갓페라 앨범을 내고 싶었다. 그러나 갓페라 음반을 만들고 싶어 시작하면 일이 터지고 또 터지고 해서 4번 만에 나오기까지 10년이 걸렸다.   김민석 찬양가수는 답답한 마음에 믿음의 아버지, 대전 한밭제일교회 이영환 목사님을 찾아갔다. 그의 믿음의 아버지는 단 한마디를 하셨다. “사역자가 살길이 무엇인지 아니? 겸손이야.” 그는 이 한마디에 그 동안의 사역이 주마등처럼 지나가자 그 자리에서 자복하고 회개하였다. 그리고 일천번제를 드리기 시작하자, 새벽예배가 다시 살아났고, 하나님은 영적인 삶뿐만 아니라 육적인 삶도 회복시키시고 응답 하셨다. “세상을 살리고 생명을 살려라”. 그래서 10년 만에 응답하신 갓페라 음반이 나오게 되었다.   이후 하나님은 김민석 사역자가 늦은 비를 통해 축복하신다는 말씀처럼 사용하기 시작하셨다. 영적인 삶이 회복되면서 지경이 넓어지는 축복을 주셨다. SBS스타킹ㆍKBS 단짝 . MBC컬투의 배란다쇼 등 많은 지상파에 출연하게 되었고, 갓페라 음반이 나오기 전 지상파를 통해 사역을 열어주시고 갓페라가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김민석 가수는 2018년 5월 20일 이날을 잊을 수 없다. 오전과 오후 집회를 하는데,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계속 반복이 되었다. 기억 상실....... 이날 하루 생각을 모두 사라지게 한 날...... 부족한 그를 살리시려 계획하신 하나님의 시간이었다. 유럽으로 성지순례가신 이영환 목사님께 울면서 전화한 그의 아내..... 유럽은 인터넷이 잘 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김민석 사역자가 익산 원광대학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악한 사탄을 결박하는 기도를 받고 병원에 도착해서 종합 검진을 받았는데, 결과는 어떤 이상도 없게 하셨다. 이 병은 뇌출혈이나 뇌경색 또는 정신병을 동반하는데 아무 이상이 없게 치료하셨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김민석 찬양가수는 늘 고백한다. “찬양하며 순교하길 원합니다. 다윗이 찬양 할 때 악신이 물러가고 바울과 실라가 찬양 할 때 묶인 것이 풀린 것처럼 부족한 저의 찬양을 통해 동일한 역사를 베풀어 주소서.” 김민석 갓페라 찬양가수가 걸어온 그 길에 성령 하나님은 항상 신실하게 인도하셨던 것처럼, 독자 모두의 삶속에도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고난의 시간을 맞이했더라도 지금 바로 일어나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하길 소망한다.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 오피니언
    • 칼럼
    2020-06-29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13
      동방의 끝 작은 나라 한반도에 복음을 들고 입국한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다.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스코틀랜드, 뉴질랜드 등 선진국에서 생명의 진리, 예수그리스도를 전해 주었고 학교와 고아원, 병원, 사회복지 시설들을 우리나라에 세워주었다.   우리나라 초기 여러 선교사들 가운데, 아더 태펀 피어선(Arthur Tappan Pierson(皮漁鮮)선교사를 소개하며, 선교의 헌신에 대한 열매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그는 1837년 3월 6일 ~ 1911년 6월 3일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지구촌 곳곳을 다니며 생명의 말씀을 전했다. 피어선 박사는 미국의 장로교 목회자이자, 성경교사 양성가이며, 선교운동을 활력 있게 펼쳤던 예수님의 참 제자였다. 그는 피어선성경기념학원(현 평택대학교)을 세우는데 중요한 기반을 놓았던 인물이다. 피어선 선교사는 우리나라가 복음을 받아들이던 근대 복음주의 선교운동 이론가로 한국교회에 많이 알려져 있다.   피어선 박사는 일만 삼천 개 이상의 설교문과 연설문 등을 집필하였다. 심지어 60권 이상의 책을 집필 할 정도로 활발한 작가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때에는 선교사들에게 적지 않은 지성과 영성으로 큰 영향력을 미쳤던 기독교 지식인 중에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피어선 박사는 특히 한국교회가 기억하는 언더우드와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이자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회사가 로버트 엘리엇 스피어(R.E.Speer) 교수, 이슬람 선교의 개척자 사무엘 M. 즈웨머(Samuel Zwemer), 기독교청년회(YMCA) 운동과 에큐메니컬운동의 지도자로 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존 모트(John R. Mott), 한국의 선교사였던 제임스 게일(J. S. Gale)박사 등을 크고 작은 선교적 지원으로 도왔고, 그들과 선교 동역을 하였다. 그는 이렇게 우리나라 수많은 선교사와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887년 새문안교회가 시작된 해에 언더우드는 피어선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예배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편지를 보내며 깊은 교제를 시작하였다. 언더우드는 피어선이 편집장으로 있었던 세계선교평론의 조선 거주 편집통신원으로 활동하다가, 후에 ‘피어선성경기념학원’의 초대 이사장으로서 학교설립을 주도하였고 초대 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피어선 선교사는 절친한 친구인 무디와 함께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을 주도하며 1886년 미국 노스필드에서 학생자원운동(SVM) 단체를 창설하여 셔우드 에디(Sherwood Eddy), 존 모트(John R. Mott), 헨리 윈터스 루스(Henry Winters Luce), 타임지 잡지 창설자 Henry R. Luce의 아버지와 같은 수많은 대학 청년들에게 선교의 비전을 심어 주었다. 미국의 학생들은 여기에 도전을 받아 조선과 청나라,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에 십자가 복음을 들고 머나먼 이방인의 나라들까지 선교사로 떠나갔다.   피어선 선교사는 매우 열악한 여건에서도 성경을 공부하는 조선인들의 모습에 크게 감동 받아서 성경학교 설립을 약속하였는데, 병세가 악화되어 1911년 1월 조선을 떠나 일본, 미국 LA를 거쳐 뉴욕으로 돌아간 후 1911년 6월 3일 74세로 이 땅에서의 복음 전파 사명을 다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영생이 있는 천국으로 가셨다. 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조선에 성경학교를 세우라”였다.   피어선 선교사의 유족과 친구들, 후원자들이 피어선 박사의 유언을 따라 조선에 초교파적 성경학교를 설립한 것이 1912년 서울 서대문구 협성신학교 내에서 시작된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이다. 이 성경학원을 전신으로 하여 1980년 조기흥 전 총장에 의해 대학설립인가를 받았고, 1981년 평택으로 학교를 옮겨 피어선성서신학교로 개교하였다. 1990년 12월,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여 피어선대학으로 개명하였으며, 1996년에 근거지명을 따라 평택대학교로 재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의 어두운 영적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지병을 안고 있으면서도 우리나라에 복음을 들고 찾아온 피어선 선교사의 충성스러운 예수의 제자 정신을 깊이 생각한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과 피어선 선교사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힘들고 어려운 코로나19 사태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지만, 아더 태펀 피어선 박사가 십자가의 길로 걸어갔던 발자취를 반추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반드시 승리하는 신앙의 길로 나아가자.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피어선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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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0-06-29
  • [쉽게 배우는 한의학 19] 변증후란 무엇인가?
      항생제의 빈번한 사용은 면역력 감퇴의 원인 소아 ‘변증’은 태독을 흩으고 형제 이루는 과정 산후조리 방법은 이정도로 마무리 하고, 아기를 키우다 보면 잦은 잔병으로 힘들어할 때가 많다. 특히 감기 장염 설사 발열 열성경련 태열(胎熱) 등으로 부모의 마음은 새카맣게 타들어 간다. 예쁜 아기가 먹고 자고, 먹고 자고를 반복하면서 건강하게 잘 자라주면 오죽 좋으련만.   옛날 엄마들은 아기에게 열이 나면 조금은 기다려보고 치료하고자 했으나, 요즘은 조금의 미열만 생겨도 해열제와 항생제를 먹이는 경우가 많은데, 참으로 걱정스럽다. 항생제를 자주 사용하면, 질병을 일으키는 유해한 세균뿐만 아니라 뱃속의 유산균 같은 유익한 장내 세균도 함께 사라지게 되어 질병에 대한 저항력(면역력)이 부족해져서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사라지게 된다.    아기를 키우다 보면 대략 한 달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열이 나게 된다. 이 열은 아기가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한 몸부림이다(변증 ; 변하기 위하여 몸이 쪄지는 열이 난다). 누에가 한 잠을 자고 나면 성장하고, 뱀도 성장 주기 마다 허물을 벗듯이, 아기가 한 달을 주기로(정확히는 32일 마다) 열이 나면서 성장하는 것을 “변증후(變蒸候)”라고 한다. 이런 변증열은 해열제를 복용하지 않고 그냥 두어도 저절로 사라지는데, 해열제를 먹이면 성장하다가 중단하는 격이 된다.   소아의 변증(變蒸)은 태독(胎毒)이 흩어지는 것이며, 음양(陰陽)과 수화(水火)가 혈혈기(血氣)에 증울(蒸鬱)해서 하여금 형체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오장(五臟)의 기를 변화시키고, 칠정(七情, 감정)이 비로소 생기는 것이다. 변증은 아이의 시기를 끝마치고 사람(인간)이 되는 것이다. 변(變)은 변해서 오장을 낳는 것이고 증(蒸)은 육부(六腑)를 기르는 것이다. 변은 기가 오르는 것이고 증은 몸에 열이 나는 것으로 경증(輕症)은 열이 나고 약간 땀이 나는데 마치 놀란 것과 비슷하고, 중증(重症)은 열이 심하고 맥이 어지러우면서 빠르고, 토하기도 하고 땀이 나기도 하며, 답답하여 울고 갈증을 느낀다.    경증은 5일이면 사라지고 중증은 7,8일이면 사라진다. 그 증상은 감기와 비슷한데, 단지 변증(變蒸)은 귀와 꽁무니가 차갑고 윗입술 중간에 물고기눈알 같은 흰색의 수포가 생긴다. 치료는 화평한 약으로 약간 땀을 내던가, 치료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으니 경솔하게 약을 쓰지 말아야 한다.   32일마다 변증열이 나고, 매번 변증을 할 때마다 성정(性情)을 깨우쳐 이전과 다른 행동을 하게 되는데 오장육부와 의지가 성장해서 그런 것이다. 세속의 말에 ‘아이는 아프면서 큰다, 아기가 아프고 나면 안하던 짓을 한 가지씩 한다’고 하는 것이 모두 이런 뜻이다. 처음 32일 만에 열이 나는 변증을 하면 신장이 완성되어 공포 두려움 같은 겁이 생기고 뼈가 속에서 단단해져서 목을 가누게 된다.. 실제로 생후 1달이면 아이가 깜짝깜짝 놀라는데 이상한 물체보다는 소리에 반응을 해서 움찔거리게 된다.    64일에 열이 나서 신장의 표리(表裏) 장부인 방광이 완성된다. 96일에는 심장이 완성되어 웃기 시작하고 혈맥이 소통하기 시작한다. 대개 100일 전후한 백일잔치할 때가 되면 아기가 방긋방긋 웃어주는 모습에 온 집안에는 웃음꽃이 만발하게 되고, 어른들은 아기의 웃는 모습을 보고싶어서 얼르느라 정신이 없게 된다.  /경희신창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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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5
  • [실로암] 소외가 없는 교회를 꿈꾼다
    요즘은 ‘소외’가 어디서나 일어난다. 결코 이런 소외문제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종교공동체 안에서도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인간소외’의 문제들이 ‘악’이라는 의식조차 들지 못하게끔 우리 사회 저변에, 그리고 교회의 저변에 파고 들었다. 이미 무의식화 되어 버린 인간소외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나, 나 스스로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느껴지는 사람을 소외시키는 것에 우리는 아무런 불편을 못 느낀다. 나의 느낌에 따라 무차별적으로 일어나는 소외는 사회적으로 타인들의 지지를 얻게 된다면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된다. 나에게 불편을 주는 사람들을 우리는 이렇게 간단하게 소외시켜 버린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나를 불쾌하게 하는 사람들,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가 그들을 미워하는 만큼, 더욱 더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기 위해 기도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께서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셨듯, 우리가 다 죄인이라면 우리는 타자에게 돌을 던지며 그들을 소외시킬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감싸고 아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타자를 소외시키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도 않고, 그 어떤 진리를 담고 있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저 ‘개인감정’일 뿐이다. 그것도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일 뿐이다. 그러한 감정은 ‘소모’라는 형용이 참 잘 어울린다. 우리는 왜 타자를 미워하며 적대시하고 소외시키는 감정에 우리 스스로를 소모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소외와 감정소모가 언제나 정의의 탈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나 기독교인들에게서는 이러한 현상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동성애인들이나 소수 종교인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그것도 하나님의 정의를 이유로 소외시킨다. 이러한 소외와 공격을 그들 스스로는 전혀 공격과 소외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부모가 아이의 일탈을 바로 잡듯 스스로 타자의 일탈 훈육한다고 망상한다.    이러한 망상과 선동은 그 누구에게 득이 되는가. 이런 소외를 담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정의를 외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개인적 감정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들의 신념이 훼손되는 것이 불쾌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인생 전체를 부정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정상인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치장한다.    과거 세대 사람들은 이런 논리가 통했을지 모르지만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는 이런 논리가 더 이상 안 통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외 논리가 통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청년으로서 이러한 타자를 향한 공격을 기독교인들이 멈춰주길 기대한다.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지만.   기독교인들이 타인들을 쉽게 재단하고 정죄하며 공격하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그 정도만 해도 교회 다니는 것이 덜 부끄러울 것 같다. 지금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가끔은 미안하기도 하다. 교회가 약자들을 공격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나도 그 무리에서 함께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예수소망교회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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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5
  • 공명현상과 감사의 에너지(4)
      2) 타인의 존재에 대해 감사해야합니다. 타인이 없으면 우리의 존재까지도 무의미합니다. 타인이 존재하기에 나의 가치도 돋보이고 남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3) 자신의 환경이나 직장에 감사를 해야 합니다. △우리 동네에 교회가 있다는 것 △우리 가정이 있다는 것 △우리 자녀가 있다는 것 감사가 없으면 그 사람은 불평 하는 것이 따놓은 밥상이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습니다. 오늘저녁 이 시간 감사를 찾아 주께 감사를 하면 무한대의 축복을 주신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4) 나를 만드셨고 환경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일반계시 : 달, 별, 땅 / 자연계시 △특별계시 / 성경계시 ※ 감사 Note를 만들어라 (일기장)  •자신  •이웃(자녀, 친구, 타인)  •환경  •하나님   감사를 하다보면 더 큰 감사를 얻게 됩니다. 감사는 무한대의 복입니다. 감사는 에너지입니다. 이 에너지는 공명현상을 통해 축복을 일으키는 원동력입니다. 감사의 에너지는 파동으로 전달되어 더 많은 축복의 원동력이 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이 땅과 하나님 나라의 축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영화롭게 하는 길이 바로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을 이루는 첩경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는 현재를 보장하는 축복이요 •감사는 건강을 보장하는 축복이요 •감사는 미래를 보장하는 축복입니다.    오늘도 감사의 복을 심어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의 보고를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경기大 상담·심리치료 전문 硏교수·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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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5
  • [성경의 죽음 18] 하나님의 사람 다윗
      아무리 위대한 인물도 성경에서는 한두 줄로 그의 인생의 종말을 기술할 뿐이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사무엘도 그랬다. 그럼에도 현대인들이 죽음 이후를 거창하게 꾸미거나, 혹은 후손들이 고인의 죽음을 놓고 화려하게 묘사하려는 것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죽어 어디에 묻힌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살아있을 때 열심히 잘 살지 죽은 후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의 일생이 풀과 같고 꽃과 같이 시드는 인생인데 이 땅에서 얼마나 영화를 기대하는가? 등의 생각들이 머리에 스친다.   다윗 왕의 죽음 기사도 마찬가지이다. 그 위대한 다윗, 이스라엘의 성군으로 불릴만한 다윗도 막상 죽음 묘사는 단 두 줄뿐이다. “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성에 장사되니,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십 년이라 헤브론에서 칠 년 동안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심삼 년 동안 다스렸더라”(열왕기상 2장 10~11절). 다윗은 30세에 왕위에 올라 40년간을 다스리다가 나이 70세가 되어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그는 목자였다. 아버지의 목장에서 양을 치던 목동이었는데 사무엘을 만나 기름 부음을 받고 훗날 왕 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목자들 대부분이 그렇듯, 신분도 미약하고 천한 사람이었으나 대부분 성실하고 겸손한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다윗 역시 그러했다. 그는 적들에게는 담대하고 용맹한 사람이었으나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는 겸손하고 애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음악가였다. 고향 베들레헴의 들판에서 양떼를 돌보며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지었다. 심지어는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 쫓겨 다닐 때도 노래를 만들었다. 왕 위에 오른 후에도 성가대를 조직하고 찬양을 불렀던 음악가였다. 그래서 그의 노래 상당 부분이 시편에 수록되어 있다. 히브리어로 ‘킨노르’라 불리던 악기, 한글 성경에는 수금, 영어로는 하프라 불리는 악기를 연주했다. 사무엘상 16장 23절에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라고 할 정도로 상당한 연주력이 있었다. 다윗은 자신을 향하여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노라’(사무엘하 23장 1절)고 스스로 고백할 정도였다.   그는 사랑받는 자였다. 그의 이름 ‘다윗’의 뜻 그대로 그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다. 다윗은 미갈 공주의 사랑을 받았으며, 미갈의 오빠인 요나단도 다윗을 사랑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윗을 사랑했고, 평생 그를 죽이고자 했던 사울 왕도 최초에는 그를 사랑하였다. 베들레헴의 우물에서 물을 마시고 싶다 했더니 용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을 뚫고 달려가 물을 길어왔을 정도로 동료 군사들도 그를 사랑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만나서 마음에 꼭 드는 자라고 할 정도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죽음의 순간에도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면 말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사람이다.    그렇게 용맹스러웠던 다윗이 생을 마감한다. 그는 아들 솔로몬에게 두 가지 유언을 한다. 하나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는 유언이며, 다른 하나는 끝까지 말씀을 지켜 하나님을 섬기라는 유언이다(열왕기상 2장 2~3절). 아들에게 주는 유언인 동시에 그 자신의 삶의 요약이기도 했다. 그는 후퇴를 모르는 용맹한 대장부였고,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던 인물이다. 아들에게 그런 유언처럼 살았던 인물이다. /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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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5
  • [마라나타 4] 축복의 땅 가나안
      지난 2017년 가을 이스라엘을 다녀왔다. 갈릴리는 아름다웠다. 사해는 더 아름답다. 그런데 유다 광야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예루살렘을 나서자 곧바로 광야였다. 바다 같이 넓은 푸른 갈릴리가 있고 요단강이 흐르고 지구상 가장 낮은 곳이라 더 이상 흘려 보낼 곳이 없으니 죽음의 바다라 불리우는 사해는 에메랄드 고은빛 가득하고 두팔 벌려 누우면 꿈같이 두둥실 떠오른다.    아브라함에게 축복으로 약속해 주신 땅이 이곳이고, 이곳에 가뭄이 들어 애굽으로 피난 가게 하시고, 다시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 열두 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꺾어서 막대기에 꿰어 두 사람이 메고 와서 말하기를 “그곳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그곳 사람들은 거인들이어서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고 주눅 들게 한 곳이 이곳이다. 벌거벗은 황토산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 산은 산인데 허허벌판 위에 황토와 바람뿐이다.    엄청난 태풍이 불어 눈에 보이는 곳 전부가 산사태로 무너져내려 붉은 흙과 돌덩어리 산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다. 절벽 위 작은 길가에 삐뚤삐뚤 끊어 질듯 말듯 아슬아슬 짧은 풀들이 돋아나 있고 누런 양 몇 마리 서로 궁둥이 붙이고 목자를 기다린다. 사망의 음침한 흙벽 골짜기에 돌짝 뿐이다. 생명도 없고 희망도 없고 목자를 잃으면 죽음뿐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을 시작하시기 전 40일 금식 하신 곳이 유대 광야 이곳이고 낮의 해를 가려줄 나무 한 그루, 밤의 이슬을 막아줄 바위 하나 없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축복이 아니고 주와 함께 걷는 것이 축복이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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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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