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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여! 내가 믿나이다 (58)
    ▲ 정성진목사  거룩하신 성품에서 나오는 율법은 죄인의 죽음을 요구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길 마련   어떤 사람의 인생이든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큼 시급한 일도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결코 용납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죄인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진노의 손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1장12절에서 “여호와는 눈이 정결하시어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죄악을 차마 보지 못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상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외면하고 애써 피한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죄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까지 그를 줄곧 따라 다니며 정죄를 선포하고 죄 값을 반드시 치러야 한다고 소리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서 나오는 율법은 죄인의 죽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죄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죄는 반드시 죽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 값으로 범죄자인 우리가 죽어야 한다면 모든 희망은 사라져 버리는 것인데 용서받는 길은 없는 것입니까? 죄로 절망하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 오셨습니다. 그 분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18절에서 시몬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시어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불의한 우리 대신 죄 범한 대가를 치루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단 한번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21절에서도 이 점에 관한 진술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하나님이 죄를 알지 못하는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여기에 용서가 있고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용서가 필요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 없는 어떤 안정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엄중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제 의인으로써 불의한 자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사건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죄 용서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는 확신 없이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말갛게 씻기시며, 용서 받은 자로써 받아주신다는 것을 믿기에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보좌는 거룩한 보좌요, 의의 보좌이기 때문에 죄인이 접근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므로 그 피를 의지하여 나아가면 그 보좌는 구원과 용서와 평화가 넘치는 은혜의 보좌인 것입니다. /지석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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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8-05-16
  • 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13)
    ▲ 최종인목사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경험하게 된다. 늘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그들 덕분에 우리가 존재하고 사는 줄 알면서 더욱 감사하게 된다. 반면에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들을 만나면 무언가 어려운 일이 생기고, 마음이 상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사람인 것이다. 영적으로도 혼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공격적인 사람들이다. 3절과 같이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공격하는 사람이다. 담이 넘어지거나 울타리가 넘어지면 지나는 사람이 위험하다. 그런 이들은 폭력적인 언행으로 사람을 위협하고 괴롭히는 사람이다. 툭하면 고함을 치거나 불평을 늘어놓는다든지, 주변의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드는 공격적 성향의 인물이다. 최대한 그들과 함께 하는 기회를 피해야 한다. 신경 쓰지 말고 회피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좋다.   모함하는 사람이다. 4절에 나오는 인물처럼 상대를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려 하는” 사람이 꼭 있다. 남에게 험담을 유도하거나 본인은 직접 표현하지 않지만, 나중에 교묘하게 소문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앞에서는 선의로 대하는 척 포장한다. 그러나 다른 쪽으로는 들어나지 않게 비방한다. 그런 사람에게 당했다고 마음 아파하지 말자. 오히려 그런 이들을 불쌍하게 여겨야 한다. 그런 이들과 싸워 이기려하지 말자. 나를 모함하는 사람을 위해 오히려 기도해 주자.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된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다. 역시 4절에, “거짓을 즐겨하니”라고 했다. UCLA의 브라이언 킹(Brian King) 박사가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다가 거짓말을 분석하게 되었다. 그가 연구한 바로는 성인이 보통 일주일 동안 열 세 번의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 첫째, 속이는 거짓말. 나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는 말이다. 사기꾼들의 거짓말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 감상적인 거짓말. 내가 느낀 감정을 마치 사실처럼 말하는 것이다. 꿈과 현실을 혼동할 때, 자신이 들은 말을 자신의 느낌으로 바꾸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때 이런 거짓말을 한다. 흔히 설교자들도 이런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셋째, 과장하는 거짓말. 조금씩 보태는 것이다 과장인 것이다. 학력위조, 경력위조자들 역시 과장하는 사람이다. 넷째, 둘러대는 거짓말. 남들로부터 비난받기 두려워서 이런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비밀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 드러나면 곤란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더라는 것, 살면서 이런 이들을 만나면 괴롭다. 우리를 혼란하게 하고, 마음을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4절을 계속 읽자.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심하게 말하면 이중인격자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그런 이들을 만나면 믿음이 안가고 피하게 된다.   다윗은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경험했고, 흔드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자신만의 비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그렇다. 사람들을 만나면 상처를 입게 되고, 사람에게 기대하면 실망하게 된다. 오히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좋다. 둘째, 하나님을 반석으로, 인생의 기초로 삼는다. 그러므로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2절). 셋째, 인생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9절에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고 했다. 입김보다 가벼운 인생들을 의지할쏘냐? 그런데 말씀을 읽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을 의지하고 있다. 넷째, 내 인생은 하나님이 진행하신다고 믿는다. 11절을 보라.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권능뿐이랴? 내 모든 인생의 길은 하나님께 속했다. 당장에 한 두 마디 들었다고 흔들리지 말자. 인생 누구나 경험하는 실패를 한 두 번 경험했다고 포기하지 말자. 인생이 강하기도하고 때로 약하기도 하다. 한 두마디에 흔들릴때가 얼머나 많은가? 그러나 하나님 말씀으로 든든할 수 있다. (commission@naver.com) /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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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8-05-16
  • 저울대 위에 올려진 인간 실존
    ▲ 김 진 하   고대는 신이 만물의 척도였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모든 사물에도 신의 이름을 붙였다. 신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하여서는 그리스와 로마 신들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는 대표적인 12신이 있었는데 그들 외에 수많은 님프라 불리는 요정들이 있었다.   고대가 신이 만물의 척도였다면 현대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되었다. 본 훼퍼는 말하기를 ‘현대는 무종교의 시대’라고 했고 니체는 한 술 더 떠서 ‘신은 죽었다’, 칼 막스는 ‘신은 없다’ 싸르트르는 ‘신은 부재중’이라고 하며 웃어넘겼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도다’ (시 14:1)  지금부터 2600년 전인 기원 전 6세기에 바벨로니아 나라에 벨사살 왕이 하루는 대규모의 잔치를 열었다. 잔치가 무르익어 흥이 돋우어질 무렵 왕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탈취해온 성전 그릇들을 창고에서 꺼내오게 명한 후에 그 그릇에 술을 따라 마시게 했다.  이때 왕의 맞은편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왕의 온몸은 사시나무 떨듯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고 벽에 씌어진 그 글씨를 해석하려 했으나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다니엘이 그 글씨를 읽고 해석을 하였는데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였다는 뜻’ 이라고 했다. 그날 밤으로 벨사살 왕의 생애는 끝났고 바벨론이란 나라는 분열되어 페르샤에 합병되고 말았다.  주님은 오늘날도 우리를 저울에 달아보시고 함량을 저울질하실 것이다. 유명세를 떨치던 목사도, 장로도, 성도들도, 돈 많은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모두 그 저울 위에 겸손히 설 날이 올 것이다.   요즘처럼 목사된 것이 부끄러운 적이 없다. 한 치 오차도 없는 하나님의 공의의 저울이 예비 되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지…. 하나님의 추는 정확하고 오차가 없어 자기가 믿은 대로, 자기가 행한 대로, 자기가 심은 그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예장 합동 평양노회 증경노회장·예수사랑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18-05-16
  • 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12)
    ▲ 최종인목사   현대인들 가운데 탈진(burnout)을 경험하는 이들이 많다. 직무수행과정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외 긴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업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감정적 반응이다. 탈진감은 대인관계에서 지속적, 반복적 관계를 중시하는 간호사, 사회복지사, 텔레마케터 등의 직종에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리적 환경은 탈진하게 만든다. 즉 근무환경이나 직무의 위험 정도가 종사자들을 압박하는 것이다. 때로 직무 요구가 과도한 부담을 주기도 한다. 업무량이 증가한다든지, 시간적 압박을 느끼게 되거나, 업무 중단 사태에 이른다는지, 직무불안정, 즉 구직 기회가 적거나, 고용불안정한 상태에서는 책임이나 직무에서 오는 과도한 부담이 탈진하게 만든다.     육체적 피로는 쉽게 탈진감을 느끼게 한다. 인간의 몸에는 업무를 수행하는데 한계가 있는데, 때로는 조직내에서 자신에게만 더 많은 업무량이 부가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직무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육체적, 심리적으로 힘들어지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육체적 피로는 직무만족과 직무동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때로는 직무자율성의 결여가 탈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의사결정의 권한이 없거나, 조직에서 자신의 직무 재량이 낮을때 쉽게 피로하고 탈진하게 된다. 특히 고수준의 직무요구를 받으면서도 직무자율권이 낮은 종사자들은 심리적으로 긴장하게 되어 탈진감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가장 많은 비율은 조직내에서의 갈등이 탈진감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상급자 및 동료간의 협조, 지지부족 등 대인관계의 문제는 쉽게 탈진에 이르게 한다. 경직성이 있는 조직이나 가정, 단체에서 불평등한 관계를 조장하고, 상급자의 일방적 지시를 강요할 때, 인격이 무시되거나 소통이 안될때는 심리적 탈진을 느끼는 경우가 잦다.   보상이 부적절한 경우도 탈진하게 만든다. 개인을 무시하거나, 기대에 부적합한다든지 하는 내적 동기의 결여가 보상 성취감을 낮게 만들고, 자기실현욕구가 좌절될 때, 성장욕구가 거절될 때 탈진감을 느끼게 된다. 대부분 직장문화는 서구와 다르게 한국만의 고유특성을 갖고 있어서 집단주의, 권위주의, 불신, 의사소통의 비합리성, 비공식적 조직문화 등에 반발하게 되면 쉽게 탈진에 빠진다.   시편 56편은 탈진감에 빠질때 다시 일어서게 하는 말씀으로 가득하다. 우선 시인이 경험하는 탈진 상황은 어떤가? 2절에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고 탄식”한다.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가 힘들게 한다(3절).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 괴롭다(4절). “두려움, 떨림, 공포가 나를 덮었다”(5절).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 편히 쉬고 싶다(6절).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원수가 아니라 오히려 내 친구들이다(13절).     탈진 상황에서 부르짖어야 한다(17절).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기도하는 것이다.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는 것이 탈진에서 해방되는 비결이다. 우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탈진에서 이기게 한다.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18절). 평안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내 힘든 상황에서 이기게 하시고 평안하게 하신다. 어리석은 사람은 탈진 상황에서 도울 사람을 붙든다. 그러나 성도는 탈진 상황을 만날 때 믿음을 붙든다. 탈진 상황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22절). 하나님께 맡기는 자는 하나님이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허락지 아니하신다. 현대사회의 특성상 어린아이, 학생, 청년, 장년, 노년 할것없이 일터로 내몰리고, 학교에서도 심각한 경쟁을 가져야 한다. 그러다보니 탈진하기 쉽다. 그러나 탈진의 원인을 찾고, 고충을 공유하고 해소 방법을 만들고,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탈진감이 찾아올 때 쉬어야 한다. 가급적이면 탈진상황에 노출되지 않도록 갈등을 줄여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만나고 해결받자. 탈진에서 해방되는 성도들이 되길 소원한다.  (commission@naver.com) /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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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8-05-10
  • 주여! 내가 믿나이다 (57)
      ▲ 장성진목사   죄 용서를 받아 죄의 문제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이 우선 예수님은 병 고침에 앞서 죄 사함을 먼저 말씀하셨던 것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오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깨끗케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로 가면 온 몸이 중풍 병으로 마비된 자신의 몸도 정상을 찾을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온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건강한 몸을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을 메고 온 사람들 역시 중풍병자의 병을 낫게 하고자 하는 바램 때문이었습니다만 예수님은 병 고침에 앞서 죄 사함을 먼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예수님의 제 1차적 관심사는 이 사람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를 받아 죄의 문제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죄 문제가 다른 어느 것보다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죄가 가진 파괴성에 있습니다. 죄는 관계를 파괴하고 생명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멀리 달아나고 싶어 하는 것이며, 결국 이런 현실은 생명의 주님과 단절되어 죽음이라는 극단적 상황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더할 나위 없는 절망에 이르고야 마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거나, 건강을 잃어 버리고 살게 되는 것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가난을 벗어나 잘 살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건강한 몸으로 살아갈 것인가? 등에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 때문에 가난하면 저주를 받은 것 같고, 또 부자를 보면 굉장한 부러움을 느끼고, 가난하다는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열등감까지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사람들에게 본질적인 것은 이것들이 아닙니다.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실존적 영향에서 해방되고야 행복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시편32편의 기자는 한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해결 받은 사람이라고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에게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32:1~2)”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그가 인생에서 누리는 그 어떤 것도 그에게 유익하다고 할 수 없고, 그가 소유한 모든 것도 그에게 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대답을 얻기 전까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씩 영원한 멸망의 장소인 지옥을 향하고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용서를 받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 복음의 중심 내용이 ‘죄 용서’였습니다.   오순절 성령감림 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과 대면하여 결단을 촉구한 내용 가운데 하나가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0)”   이 외에도 사도행전 13장 38절과 22장 16절도 역시 죄로부터 용서받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 것이 ‘죄를 용서함 받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지석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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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10
  • 주여! 내가 믿나이다 (56)
    ▲ 정성진 목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사람들죄를 범한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이 중요  죄를 사해 주시는 것을 믿는다고 할 때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고백입니다. 죄가 없고, 죄인이 아닌데 죄를 사해 주시는 것을 믿는다고 한다면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죄’라는 것이 있고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면 그 죄에 대한 용서가 있어야 한다는 요청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로마서3장23절에서 사도바울은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어느 지역이나 특정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안고 있는 보편적인 현실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죄 범한 사람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엄연한 실존입니다.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이 죄의 실존을 받아들이고 성경에서 평가하는 것처럼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 사회에 만연하여 있는 일반적 현상에 대하여 “죄는 사람들이 원치 않는 어떤 것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만 죄는 사람들이 부정한다고 해서 없어지거나 원치 않는 것에 대한 상징적 묘사로 몰아낼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죄는 사실이요, 엄연한 실존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죄를 지었느냐?”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하거나 외면한다고 명백한 사실이 없어지거나 지워지기라도 하던가요? 병든 사람이 자기 안에 침투해 들어 온 병균의 존재를 애써 없는 것으로 부정한다고 질병 그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부정하는 그 순간에도 병균은 자기 안에서 여전히 그 존재를 지속해 나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질병에서 치유받기 위해서 먼저 해야 될 일은 자신이 병들었음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병들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것도 인정치 않으려는 태도를 취할 것이 아니라 일단은 죄 범한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부터 죄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교육이나, 경제, 정치나 건강 등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생이 안고 있는 치명적인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 가운데 드러난 모든 잘못된 현상들을 보면 문제가 현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원인에 기인하는 것인데 나타난 결과에만 관심을 기울이려고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한 집안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 네 명의 사람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서 고침을 받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운집하였던지 도저히 예수님께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중풍 환자를 메고 지붕 위에 올라가 지붕을 뚫고 침상 채로 예수님께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정상적인 루트로는 접근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이런 변칙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고서 “인자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석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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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8-05-02
  • 최종인 목사의 시편과 정신건강(11)
    ▲ 최종인목사    교회안에 고령자들이 늘어난다. 젊은 층은 잘 믿으려 하지 않거나, 기존 출석자들도 출석율이 줄어들고 더구나 출생율저하로 다음세대들이 들어오지 않아 교회마다 비상이다. 그렇다고 고령자들을 내버려두고 젊은 층만 쫓아갈 수는 없다. 고령자를 위한 목회에 최선을 다할 때 그나마 후손들 가운데 주께로 돌아오는 이들이 있음을 본다. 나는 우리교회 성도들, 특히 고령자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오늘 시편을 통해 그것을 나누려 한다.   나이들어갈수록 이사하거나 교회를 바꾸면 안된다. 고령자가 되면 변화에 적응하기 쉽지 않다. 낯선 환경이나 익숙하지 않은 교회로 이전하게 되면 그것도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다. 친구와 노래는 익숙할 수록 좋다는 말은 신앙생활에도 적용된다. 가능하다면 교회 근처에 거주하면서 기존의 성도들과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교회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신앙에 유익하다.   조직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부흥이 어렵다고 기존 구역조직을 셀이나 목장조직으로 바꾸는 교회가 많다. 젊은 층이 많다면 쉽게 적응될 수 있다. 고령자들에게는 오히려 혼동이 될 수 있다. 그동안 친근했던 얼굴들을 바꾼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 필요하다. 만약 꼭 필요해서 바꾸어야 한다면 기존의 조직 사람들이 고령자들을 자주 접촉하여 저들의 불만을 들어주고 이해시켜 주어야 한다.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고령자들은 보통 세가지에 익숙하다. 예배, 기도, 교제다. 예배 형식이 바뀌거나 예배가 소홀하면 금방 느낀다. 기도회에 고령자들의 참여가 높다면 기도제목이나 기도회 방식에 대해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고령자들의 친구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점점 소원해지기 쉬운 세상에서 그나마 교회 친구들이 남아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된다. 고령자들에게 교제의 장을 만들어 주어야 편안하게 신앙할 수 있다.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은퇴했다 해도 교회 안에서는 여전히 할일이 많다. 임무를 주는 것은 단순히 교회의 필요 때문만은 아니다. 고령자들에게도 안정감을 준다. 역할부여는 고령자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소외감을 줄여준다. 역할을 맡길때는 3가지를 고려한다. 첫째, 예전에 하던 일을 계속하게 한다. 둘째, 현재의 신체 기능이나 정신능력에 가능한 범위내에서 일하게 한다. 셋째, 주위로부터 인정받는 것은 중요하다. 자신감을 갖도록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칭찬해줄 필요가 있다.   인간관계를 잘 가져야 한다. 고령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세 친구가 있다. 첫째, 공감하는 친구이다. 문제를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다. 둘째, 규범을 제시하는 친구다. 화내거나 짜증내지 않고 규범을 제시해주는 친구다. 셋째, 긴급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다. 절박한 상황에도 기댈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교회생활에 힘이 된다.   시편에 나오는 내 친구를 소개하고 싶다. 그는 나를 변호하는 친구다(1절), 정말 황당한 경험, 억울한 경험, 어디 말 못할 경험을 할때 변호해 주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친구다(2절). 답답할 때 꼭 해결까지는 아니어도 들어만 주는 친구가 있다면 정신건강에 유익하다. 내게 진정한 돕는 자가 된다(4절). 막막할 때 도움이 없다는 것은 살기 어려운 일이다. 목마를때 물 한잔 건네주는 친구가 필요하다. 큰 돈이 아니어도 푼돈이 절실할 때 손을 내밀어준다면 진정 도움이 된다. 내 대신 싸워주는 친구가 좋다(5절).   나는 목사이지만 어쩌다 욕하고 싶은 사람을 만난다. 하지만 직접 내뱉지 않는데, 대신 누군가 욕을 해주면 마음이 시원해질 것 같다. 나는 천상 싸움을 못한다. 아니 싸우는 자리를 의도적으로 피한다. 그러나 그 친구는 내 대신 싸워준다. 내 친구, 얼마나 좋은가? 그 친구는 오늘도 내 곁에 있어 든든하다. “하나님, 내 친구되셔서 감사해요”  (commission@naver.com) /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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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02
  • 남북통일의 바람이 불어온다
    ▲ 박종근목사   한반도에 바람이 불고 있다. 기분 좋은 바람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핵실험과 미사일을 쏘아 미국과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던 북한이 하루아침에 급변하여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전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평창동계올림픽에 전격 참가를 선언하고 북한의 고위층과 선수들 그리고 응원단이 참가하여 금년 초부터 남과 북은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었고 급기야 남북정상회담, 그것도 분단의 상징적 장소이며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판문점에서 두 지도자들이 만나 아주 많은 주제들을 가지고 대화를 했다. 그리고 곧 이어 북미정상 회담을 하기로 되어 있다.   이 즈음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있다. 무엇보다 통일감상론에 빠져서는 안 된다. 마치 통일이 다 된 것처럼 착각하고 섣불리 샴페인을 터트리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물론 남북의 정상들이 만난 것만으로도 뉴스거리이며 한동안 언론과 세계는 한반도에 과도할 만큼의 관심이 집중될 것이다. 아직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남북화해와 한반도에 영구적인 평화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운을 뗐고 물길이 열려지기 시작했을 뿐이고 얼굴을 맞대었을 뿐이다. 이제부터 더 연구하고 더 확인하고 작은 것이라도 섣불리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70여 년 간 우리민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상처를 두 지도자가 만났다고 해서 그냥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음지에서 수고하고 땀 흘린 이들이 있다. 그러기에 남과 북의 통일 문제에 대해서도 독선이나 독단적인 행태를 보여서는 안 된다. 여태껏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이 통일문제를 다루었듯이 앞으로도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하고 통일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피차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제는 독과점 시대는 지나갔다. 어느 누구라도 통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러기에 나는 이제 일어나는 통일은 국민적 혁명으로 승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농촌이나 소외계층의 사람들에게도 통일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남북평화통일 문제에 대해서만은 어느 누구라도 절대적인 자는 없다. 우리 정부가 주도적으로 하더라도 결코 정부독점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상이나 이념을 아우르고 참여시키는 통전적인 통일운동을 펼쳐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온 나라와 각계각층이 남북문제에 고심하며 참여하고 있는데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과거로부터 한국교회는 북한선교, 북한지원, 북한 살리기 등등 엄청난 구호를 외치며 섬겨온 것이 사실이다. 또한 남모르게 북한동포들을 위한 헌신이 작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북한에 대한 한국교회의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다 보다는 남북문제에 대해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 말하자면 표준을 높여야 한다. 교단마다 새로운 통일전략을 세우고 적어도 금년 가을 교단총회에서는 모든 교단들이 남북통일에 대한 하나 된 입장이 발표되고 적어도 한국교회가 남북통일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정부와 국민 앞에 대안을 구체적으로 내 놓아야 한다. 그리고 남북통일문제에 대해서만은 일치된 마음으로 포용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끝으로 한국교회의 반성이다. 반성은 하나다. 교회가 탐욕을 버려야 한다. 탐심은 우상숭배다. 돈과 물질이 우상이 되면 쫄딱 망해도 내려놓지 않는다.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쥐꼬리만큼 내놓으면서 큰소리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말없이 힘껏 섬겨야 한다. 남북통일의 출발점은 회개다. 한국교회가 탐욕과 자기중심 우상을 버리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무임승차해서는 안 된다.   /서울모자이크교회 목사·북한지원단체 (사)모두함께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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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02
  • 주여! 내가 믿나이다 (55)
    ▲ 정성진목사   연합하는 무리 안에서 영생 선포하시는 일을 하심 성도 상호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관계로 부르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인데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 나가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까? 참으로 그리스도인은 빠져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귀한 사역에 걸리는 사람입니다. 결혼이 시사하는 바가 이런 의미에서 아주 크다 하겠습니다. 결혼식 서약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슬플 때나 기쁠 때, 언제든지 함께 하겠습니까?” 이 질문을 받고 신랑, 신부는 “예”라고 대답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동고동락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함께 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에 동고동락하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교통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교회)에서 고독한 그리스도인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구세주’로 하여 영원한 생명의 관계를 맺게 되고 하나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과 긴밀한 교제 가운데 놓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통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동일한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오해한 사람들 중에 “혼자만 잘 믿으면 된다”고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관계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성도간의 교제를 피하고 은둔자처럼 생활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부르셨을 때는 그리스도 안의 일원으로 부르신 것이고,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은 성도 상호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관계로의 부르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욱 하나님께서는 이 교제 안에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나타내시고, 이 연합하는 무리 안에서 영생을 선포하시는 일을 계속하여 나가시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들이 교제하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연합한 자이며, 이 연합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적인 관심과 공동적인 목적과 목표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혼자로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교제를 통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교통은 반드시 구원 받은 자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 고독한 존재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결단코 공동체 내에서 소외되어서는 안 되며 혼자 내버려진 사람들이 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거룩하게 된 무리(성도)들과 하나를 이루어 서로 사랑하며 거룩한 교류가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이미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이 죄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 주시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도신경에서“죄를 사해 주시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죄 용서가 정말 필요한 일이며, 죄 용서를 받아들일 때 진정한 행복과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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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18
  • 교회는 성소의 침탈을 용인할 것인가?
    ▲ 김경호목사  부활절을 준비하던 강남향린교회에 느닷없이 집달관들이 들이닥쳤다. 성금요일에 성소는 침탈되었고 예배당에서 십자가는 내려졌다. 교회는 철제담장으로 폐쇄되었다. 이런 신성 모독의 사건이 최소한 법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예고조차 없이 집행되었다.  교회에 보상금은 터무니없게 낮게 책정되었다. 그 금액으로는 근처에 땅 조차도 마련할 수 없어 소송이 진행중이다. 그러나 교회는 소송과는 별도로 이사할 곳도 마련했다. 4월에 잔금을 치르고 곧 이사할 것이라는 것을 조합도 알고 있었다. 종교 시설의 경우엔 강제집행 시점이 임박하더도 지역 내 역할 및 사회적 의미 등을 고려해 가장 후순위로 집행하는 것이 관례이다.  이런 폭거를 왜 감행했을까? 조합장이 동부지청 집행관실에 보낸 탄원서는 “재개발 사업을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서는 강남향린교회가 우선 명도가 되어야 후속임무를 진행할 수 있으므로, 강제집행을 예고하게 되면 교회 신도들의 강력한 저항이 예상되기 때문에 예고를 하지 않고 신속하게 집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른 미 이주자들에게도 집행이 임박했음을 알 릴 수 있고… ”라고 한다.  교인들이 밖에 나와 예배를 하고 시끄럽게 하면 미 철거자들이 서두를 것이라는 꾀를 냈다는 것이 충격적이고 이를 법원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통상 강제집행이 결정될 시 법원은 계고장을 발송해 집행 사실을 예고한다. 1~2주 간 자진 철거 기간을 두고 있음에도 이런 절차를 모두 무시했다.  시행사는 대개 재벌이다. 거여지구는 롯데건설이다. 시행사인 재벌은 법원, 구청, 경찰등과 단단하게 연대되어 있다. 이들에게는 예배가 계속되어야 하고 거룩한 것들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서울시는 2009년 ‘서울시 뉴타운 지구 등 종교시설 처리방안’을 내놓은 적이 있다. 처리방안의 주요 내용으로는 △이전계획 수립시 관련 종교단체와 협의 △기존 부지와 이전 예정부지는 ‘대토 원칙 △현 종교시설 실제 건물 연면적에 상당하는 건축비용 조합 부담(성물 등 가치가 큰 종교물품에 대한 제작설치비 고려) △사업기간 동안 종교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임시장소 마련·이전비용 등을 고려하여 보상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원칙은 대개 지켜지지 않고 작은 교회들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마련한 교회당을 빼앗기고 교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떠나 보다 싼 건물로 이주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일들이 재개발 지구 내에 있는 교회들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신앙의 신성함이 한낮 조롱거리가 되는 일을 교회는 그냥 당하고 있어야만 하나? 작은 교회들이 거대 재벌과 맞서서 싸우다가 만신창이가 되어도 그 부담을 고스란히 해당 교회 교인들만 져야하는가? 교회가 폐쇄되고 성소가 침탈되는 것에 대해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서 교계전체가 연대된 힘으로 막아내야 한다. 그래야 교회 스스로의 권리를 지켜나갈 수 있다. 이런 사례가 전체 교계에는 엄청난 숫자가 될 것인데 교계는 숫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십년 전 용산참사 때도 그랬듯이 정권은 바뀌었어도 건설사와 조합, 법원, 경찰의 부당한 연대는 계속되고 적폐세력들이 도처에서 결탁하여 가난한 서민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있다. 적폐청산이 이제는 민생의 자리로 내려와야 한다. 이들의 부당한 유착관계를 들추어 내 일벌백계해야 한다. 더우기 교회가 하나 둘씩 거대자본에 밀려 폐쇄되는 것에 대해 교계의 연대된 힘이 강력하게 요청된다. 더 이상 성소가 침탈되고 조롱거리가 되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원치 않으실 것이다.  /들꽃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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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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