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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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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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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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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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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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백석대 이사장 박요일목사
    백석대 이사장인 박요일목사는 말씀과 기도중심의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지난 세월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고 감사한 시간이었음을 고백했다.   박목사는 고려대 법대 졸업후 총무처 문화공보부에서 공직으로 5년간 일하다가 총신대 신대원에 진학했다. 또한 성결대, 백석대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강성교회를 설립하여 41년간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16년간 백석총회 유지재단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왔다.   197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으로 출발한 강성교회는 1996년 백석총회에 가입했고, 강성교회 재산을 총회에 기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2007년 유지재단을 세웠다. 유지재단은 영안교회와 흰돌교회, 그리고 강성교회가 함께 세웠고, 박목사는 초대 이사장부터 다섯 번 연임하며 총회와 재단을 위해 봉사했다.   박목사의 설교에는 한결같은 원칙이자 철칙이 하나 있다. 설교주제를 목사의 재량으로 정하지 않고, 성경에 쓰여진 순서와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목회철학이다. 강성교회는 매 주일 새벽 5시 30분 예배, 그리고 오전 9시와 11시 예배, 오후 찬양예배가 있다. 예를 들어, 성경본문 1~5절을 새벽에 전하고, 6~10절은 오전예배때 전하고, 11~15절을 오후에 전하는 방식이다. 매 주보에는 그날 설교문이 그대로 담겨있다. 수요예배 설교는 지난 주일예배 설교를 복습하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주중에 교인들은 주보에 쓰인 지난 설교문을 읽고, 한주간 말씀 속에 살아가도록 권면한다. 또한 구역예배 인도자에게는 다음 주일 설교문을 보내주어 말씀을 예습하도록 한다.   이 원칙을 지난 40여년간 한결같이 지켜왔다. 그동안 설교가 생뚱맞거나 엉뚱한 주제가 아닌, 때마다 필요한 말씀이었다는 것. 그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고 박목사는 고백한다.   박목사는 “하나님은 고정된 말씀인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오래된 말씀이지만 그것을 전할 때 말씀은 생명력이 있고 운동력이 있어 사람을 먹이고 살리는 힘이 발휘된다”고 말한다. 그만큼 목사의 설교준비는 마치 ‘어머니가 밥을 준비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100% 무공해는 어렵지만, 저공해로 영양가 있는 밥을 지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목사는 신약과 구약을 골고루 섞어야 한다며, 어느 한쪽을 편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박목사는 “세상의 법은 오심을 방지하기 위해 3심 재판제도를 둔다. 설령 사형이 선고되더라도 사면복권이나 재심의 기회가 있다”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한번 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잘못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언제나 옳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심판을 두려워하며 평소에 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한국교회를 향해 말씀중심으로 가야할 것을 권면했다. 그는 “목회자가 깨어있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말씀중심으로 가야 한다. 성경에 모든 답이 있고, 길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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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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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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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칼럼] 이피게네이아
      ‘이피게네이아’는 트로이 전쟁때 희랍군단의 총사령관 딸의 이름이다. 희랍군대가 아우리스의 항구에 집결 되었을 때 바람이 불지 않아 나갈 수가 없을 때 점장이의 말이 총사령관의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바람이 끝내 불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집단은 한번 열광하기 시작하면 개연의 힘과 권력으로도 어쩔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때는 집단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의 힘이 아닌 것이다. 사실 군중의 힘은 이래서 무서운 것이다. 또한 군중이 전체가 하나가 되어 무슨 일을 해도 그 책임을 질 사람이 없게 된다. 이것이 무서운 힘이다. 여기서 이 시대에 시급히 깨달아야할 진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군중을 무시하고는 민중정치가 되지 않는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군중의 소리를 듣는 귀가 밝아야 한다. 성경에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스겔4장 16절)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의 힘이 되어 하나님께 부르짖어 하나님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이처럼 군중 심리를 잘 읽을 줄 아는 것이 현명한 정치가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백성이 한번 성이나면 무서우니 그 원인을 빨리 해결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다. 지금 우리 민족은 모두 지쳐 있다. 코로나19(우한폐렴)이 장기간 해결되지 않는데다 해결되지 않는 수년간의 햇볕정책, 실패한 부동산 정책으로 인한 집값 폭등, 알지도 듣지도 못한 세금 폭탄 등등 이런 상황에서 다른 방법 즉 얄팍한 속임수는 절대로 용납이 안 된다. 그러므로 수단을 쓰면 쓸수록 더 힘이 커지는 것뿐이다. 메데파사의 아하수에르 왕의 지혜가 오늘의 지혜가 되기를 바란다.   둘째로 군중이 알아야 할 것은 이 군중의 힘이 좋을 때는 선한단결의 힘이 되지만 자칫하면 걷잡을 수 없는 파괴력이 되기도 한다. 그예가 곧 예수님 앞에서 군중들이었으니 인류 역사중의 가장 뛰어난 예라고 하겠다. 문득 오늘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한다. 데모가 현대의 산물만은 아니다. 우리 역사상에도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단발령이 내렸을 때 이에 항의 하는 춘천의 유생들이 관가를 점령하고 내란으로 미화하여 결국 전국적으로 번지면서 심한 결과를 남긴 역사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꼭 알아야 한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하게 사용하여 선한 단결이 힘이 되기를 바란다.   셋째로 어느 경우나 가장 중요한 것은 다시 말하지만 군중을 성나지 않게 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 군중을 앞뒤를 안 가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궁중만을 탓 할 수는 없다. 그런 사실은 우리 민족 역사가 증거하고 있다. 그러기에 정치하는 사람들은 가장 현명한 방법 군중을 성나게 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왕이 포악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 새 노인의 교도를 버리고 소년의 가르침을 좇아 저희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은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찌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정치하리라 하니”(열왕기상 11장 13절)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강경책을 쓰므로 조그마한 나라 이스라엘은 결국 나라가 분열되는 비극을 내고 말았다. 강경책이 능사가 아니다. 민중을 성나게 하면 안 된다. 정치가는 양심의 소리 하나님의 소리 백성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이 세 가지 소리에 모두가 순복할 때 자자손손 하나님의 복을 받는 세계 제일의 나라가 됐으면 한다.          /생명의빛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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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2
  • [성경의 죽음 20] 엘리야의 마지막 날
      우리가 잘 아는 찬송, ‘병거타고 하늘에 올라간 엘리야’ 이야기는 열왕기하 2장에 나온다. 성경에서 인간의 죽음의 순간을 거치지 않고 승천한 사람은 에녹과 엘리야뿐이다. 에녹의 경우는 단 한 절로 설명한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세기 5장 24절). 그러나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는 장엄하고 드라마틱하게 소개되어 있다. 먼저 열왕기하 2장 1절에서 엘리야의 승천을 예고하였다. “여호와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라고 했다. 보통 성경에서 회오리바람을 소개할 땐 비를 수반하지 않는 폭풍을 가리킨다(시편 107편 25절). 여기서는 회오리바람이 하나님의 현현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싶다. 엘리야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참 행복한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죽음의 증인이 함께한다. 인생 누구나 대부분은 가족들이나 의료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겠지만, 때로는 외롭고 쓸쓸하게 혼자 죽음의 순간을 맞는 이들도 있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가운데 죽음을 만나지만, 그래도 한순간은 주변을 돌아보며 아쉬워할 게다.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가깝고 친절하게 지냈으면 하는 후회도 들 것이다. 살아있을 때에 가까이 있는 사람을 소중히 해야 한다. 엘리야의 경우에는 마지막 날에 끝까지 자신을 따라와 함께 하는 엘리사가 있었다. 그가 뒤를 이어 후계자로 세움 받은 사람이니 마지막 날에 임종을 함께하는 죽음의 증인이 되어도 감사한 일이다.   둘째로 자기 사역의 현장을 한 바퀴 돌아보게 하셨다. 하나님께 올라가기 전에 엘리야는 그동안 길렀던 모든 제자들을 만나고자 한다. 이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행하신 일이다. 길갈에서 출발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열왕기하 2장 2절).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열왕가하 2장 4절).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열왕기하 2장 6절). 그는 생의 마지막 날에 각지에 있는 선지학교들을 찾아가 보았고, 사역들을 회상하며 정리하는 시간을 하나님께로부터 수여받았다. 가끔 교인들 가운데 관을 들고 교회나 직장을 한 바퀴 돌고 가는 경우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고인의 손길이 닿았던 곳에서 마지막 작별의 기회를 주자는 가족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유교식 상례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지방회 목사가 죽어 장사를 지내는데 그가 목회하던 교회를 들러 간다고 ‘노제예배’를 드리겠다고 문자가 와서 놀란 적이 있다. 믿는 자에게 ‘노제’도 없거니와 죽은 후에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을 때 돌아보고, 의미 있는 기념품이나 유산을 남기는 것을 권하고 싶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그의 장례를 진행해 주셨다. 회오리바람과 불 수레와 불 말을 동원하여 그의 마지막 날을 또렷하게 만들어 주셨다(열왕기하 2장 11절). 큰 사역을 감당한 주의 종을 멋진 방법으로 세상과 이별하게 하시고 하늘로 영광스럽게 받아주시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장례는 가족이나 당사자가 매우 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고, 가볍게 지나가고 있다. 내가 남들이 하지 않았던 〈죽음예비학교〉를 시작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준비 없이 맞는 죽음은 불행한 일이다. 살아있을 때 성경의 인물들의 마지막 날을 살피면서 나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지혜로운 일이다. 엘리야는 특별한 사람이라 죽음의 순간도 그리 특별했을까? 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야고보서 5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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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0
  • [마라나타 6] 내리사랑
      형제가 내게 죄를 지었을 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지요. 자신있게 말씀드렸는데 주께서는 일곱 번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다. 나는 두세번 정도 할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을 왜 하라 하셨을까……. 결혼을 하고 아들, 딸의 부모가 되니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자녀가 잘못한 것은 일곱 번씩 일흔 번 정도 너끈히 용서할 수 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용서 정도를 넘어 그래야 한다면 목숨까지도 대신할 수 있다. 내 이웃을 내 자녀처럼 사랑한다면 일곱 번의 일흔 번이 가능할 수 있겠구나! 부모가 자녀를 위하는 내리사랑이다. 우리도 하나님을 닮아서 자식은 그렇게 사랑한다.  부모에게 자녀는 존재 자체만으로 행복하게 한다. 자식은 그의 자식을 또 그렇게 사랑한다. C.S. 루이스는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은, 그가 그 필요를 선택하셨고, 우리가 완전히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기까지 훈련하신다”다고 이야기한다. 내 안에 이미 심기워진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자라게 하는 것, 사랑과 용서는 뿌리가 같다. 마라나타 아멘 주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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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0
  • [향유옥합] 텃밭의 신비
    얼마 전 아는 지인에게서 전해 들은 그녀의 작은 텃밭의 이야기를 전해보려 한다. 그녀는 작년 가을에 먹다 남은 음식물 쓰레기를 새로 만든 텃밭의 땅에 묻어 두었다. 작은 어린이집 원장인 그녀는 워낙 야무지다. 아이들 식사와 간식을 만들다 보면 제법 음식물 쓰레기가 많아서 텃밭에 거름이 되겠거니 하고 그렇게 한 것이라 했다. 간혹 고양이들이 냄새를 맡고 와서 땅을 후비기도 하고 똥을 싸기도 했지만, 오히려 녀석들의 배변물들이 땅에 도움이 되려니 생각하고 그냥 두었다.    땅이 얼어붙은 겨울이 지나고 언제나 맞이하는 새봄이 왔을 때 텃밭에 작은 사건이 생겼다. 알뜰한 그녀는 음식물 쓰레기를 묻으면서 내년 봄 먹거리를 위해 상추를 심어 두었다. 상추가 얼마나 자랐나 보려고 옥상 텃밭에 올라갔는데, 눈 앞에 펼쳐진 풍광은 참으로 그녀가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다. 풍광이라 한 이유는 이러하다. 그녀의 텃밭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방울토마토, 큰 토마토, 호박등의 야채들이 원시의 자유로움을 드러내며 자라나고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 씨앗에서 나온 녀석들은 농장에서 줄을 맞춰 자라난 야채들과는 사뭇 달랐다.    땅속에서 얼기설기 섞여서 지내던 씨앗들(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졌던)은 자기에게 할당된 땅이 따로 없다. 그냥저냥 서로 의지하며 겨울을 지내다 봄볕이 부르는 따스함에 세상 밖으로 나오니 지금의 자연스럽고 기이한 풍광을 만든 것이다. 마치 예전에 보았던 영화 ‘오두막’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곤혹스러운 자신의 인생에 화가 나 있던 오두막의 주인공에게 신이 나타났다. 신이 데려간 정원은 얼기설기 볼품없었고 자신의 것이라고 가리킨 나무는 더 형편없었다.    그 흔한 가지치기도 주변 풀 뽑기도 없는 제멋대로 자란 풀숲 그 자체였다. 그러나 카메라를 올려 위에서 내려다본 정원의 풍광은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자연스러운 것들의 조화에서 오는 환희! 작은 텃밭의 아름다움도 그와 같은 감동을 주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세상에 생길 때 나는 자신만의 씨앗에서 태어났다. 그 씨앗의 이름은 지금의 내 이름일 테고 그 모양대로 자라서 살다 가는 게 인생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물며 버려진 텃밭의 음식물 쓰레기도 각자의 모습을 내며 이리 아름답고 오묘함을 드러내는데 인간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제도라는 큰 울타리에 들어간다. 그것이 국가든 사회든 교육이든 간에 혼자 살 수 없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안전망이 자동으로 탑재된다. 제도와 체제는 다수의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개개인의 씨앗이 자라기에는 모양과 틀이 너무 일정하다. 도덕과 가치체계는 질서 있는 삶을 제공하지만 세분된 현대인의 삶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편협하다. 이러한 일정한 틀과 편협함이 이데올로기가 되면 고귀한 인간들은 서로를 공격하며 싸운다. 자신의 땅에 침범하지 말라고, 내 생각을 흔들지 말라고, 내 삶의 질서를 뭉개지 말라고 말이다.   우리는 모두 죽으면 육신의 흔적을 땅의 거름으로, 때로는 바다 생물의 먹이로 자연에 내어준다. 또한 우리가 살았던 삶은 크건 작건 역사라는 장르 속에 다음 생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터전이 된다. 난 그 터전이 될 우리의 삶이 엉키고 설킴 속에서 조화를 만들어 가는 그런 생명력 있는 텃밭이 되길 그려본다. 들려오는 크고 작은 분쟁 속에 다음 세대에게 건내줄 그 텃밭이 관용과 수용의 텃밭이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송천교회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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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0
  • “비범하지 않은 목회자가 더 값지다” - 전 감신대 기독교 사회윤리학 박충구 교수
      감신대학교 은퇴 후에도 다양한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언론사와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글을 기고하고 있는 전 감신대 기독교 사회윤리학 박충구교수(사진)는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대중성과 진리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목사들은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지 못하면 정치가도 생존하기 어렵다”며, “특히 대형 교회 목사이기를 자랑하는 이들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방법이든지 혹은 인위적인 방법이든지 간에 대중의 심사를 건드리지 않고, 그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목회자들의 대중적 지지를 받기 위해 하는 노력들에 관해 “평범하면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 없다. 무엇인가 특이하고, 개성이 있고, 남다른 이미지가 있어야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 내고, 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며, “여기서 소위 그만의 ‘전매특허’가 나온다. 어떤 이는 24시간 주님을 바라보거나 기도하는 불가능한 삶을 주장한다. 과연 그는 주님을 24시간 바라보는 목사일까. 아니면 주님을 바라본다고 하면서 자기 생각에 골몰하는 것일까”라고 물었다.   이어 “대형교회 목사 중에서 평범성을 거부하는 독특한 전매특허를 가진 목사 중에는 ‘새벽기도’로 성공한 목사도 있다. 그는 새벽기도를 몇 부로 인도하면서 새벽기도 교인이 많기로 유명한 교회를 이루어 냈다. 그에게 있어서 새벽기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라며, “그는 측근 장로들과 짜고 신도들이 하나님께 바친 헌금에서 비자금 800억 원이나 모아둔 목사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 많은 돈을 하루아침에 모은 것은 아닐 터 그의 새벽기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라고 꼬집었다.   박교수는 “교인들이 많아지면 자기 인격과 품위가 높아진 줄 착각하는 이, 책도 읽을 시간도 없으면서 자기가 모든 것 다 아는 체 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이런 착각에 빠진 목사들은 대부분 ‘기술자들’이다”며, 그런 것 깊이 생각할 시간도 없고, 독서할 시간도 없고, 성찰할 시간도 없다. 비범한 목사들 비범할수록 더 위험하다. 비범하기를 좋아해서 탈이 난 목사들의 실상을 모르면서 너무 따라 다니지 말자. 내가 보기에는 비범함이 없어서 그저 예수만 자랑하고 내세우는 목사가 섬기는 작은 교회 다니는 이들이 더 멋지고 귀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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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0
  • 삼위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2)
      4) 복의 근원입니다. 창 12:2 에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만복의 근본이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지명하여 복의 근원이 되라고 선포하고 있는것입니다. 5) 지켜주시는 축복입니다.  24절에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라고 하였습니다. 지키다(히 샤마르) 라는 단어는 때때로 파수꾼(아 3:3), 목자(삼상 17:20), 인간을 보호해주는 하나님(시 12:8) 에게 쓰여진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이나 공포, 그리고 사탄의 지배로부터 자유케 하는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사회는 대단히 불안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불안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더군다나 경제적 불안이 가중되고 있으며, 세대간의 갈등으로 인한 불안, 고용주와 고용자간의 갈등 등의 사회적 불안도 가중되어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의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으로 인해 큰 사회적 불안이 생겼으며, 금융위기의 불안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불안이 중동에서는 이미 심화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시겠다 하시며, 보호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 가장 안전하게 의지해야 할 분이 바로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젖먹이 아이를 키우던 어머니도 곁을 떠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셔서(사 29: 15) 방황 할 때도, 우울 할 때도, 불안 할 때도 가장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축복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시 123:3) 눈동자같이(시 17:8) 지키시며 지금부터 영원까지(시 121:8)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십니다. (시 25:20) 금년 한해도 하나님이 지켜주시며(시 121:5) 보호해 주시는 축복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부 하나님의 보호케 하는 축복이 나의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위해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을 경외해야 복을 받습니다. 시 128:4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라”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다) 신앙으로 살아갈 때 복을 받습니다. 창 26:3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 신 7:13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신땅에서 네 소생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케 하시리라” ◉ 잠 8:21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을 채우게 하려함이니라” ·십일조하는 자에게 넘치는 복을 주십니다.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복의 근원 되시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2. 성자하나님은 축복의 은혜를 베푸시는 만복의 결제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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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9
  • [쉽게 배우는 한의학 20] 태열(아토피)에 관하여
      요즘 사회문제로 되어있는 ‘아토피가 옛날에는 ‘태열’이라 하여 ‘돌이 되면 낫는다’든가, ‘흙을 밟게 되면 낫는다’고 할 정도로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근래에는 태열이 있는 아기의 거의 90% 이상이 아토피로 진행하며, 아이가 아토피를 앓게 되면 온 집안이 아이 치료에 매달리게 되지만 치료가 쉽지 않다. 아토피에 대하여는 나중에 설명할 기회를 갖기로 하고, 이번에는 태열에 대하여 치료와 예방법에 대하여 알아 본다.   자연 치유되는 가벼운 태열도 있지만, 90년대 이후 부터는 미열에도 해열제와 항생제를 남용하고, 피부에 뭔가 생기면 함부로 연고(스테로이드제)를 바르는 경우가 많은데(1세 미만의 소아는 피부에 다양한 증상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면서 자연스럽게 면역기능이 자리 잡는다), 이런 행위가 짧게 끝날 수 있는 단순한 피부병을 태열과 아토피피부염으로 악화시켜 유아기뿐만 아니라 아동기를 넘어 성인이 되어도 아토피로 고생을 하게 된다.   아기들의 태열은 보통 ‘침독’이라 하여 양볼이 붉어지면서 시작되어 전신으로 진행되지만, 특히 얼굴과 머리 부위에 각질과 진물이 나고 전신으로 발병하게 된다. 침의 영향과 손대기가 쉬운 부위이기 때문이다. 피부가 부드럽고 윤기있는 사람에게는 피부질환이 생기지 않고, 건조한 아기들에게 잘 생겨서 가려움으로 피가 나도록 긁어서 상처와 진물이 나게 된다.    초기에는 가려움 완화 목적으로 스테로이드 성분이 함유된 연고제·항히스타민제와 항알레르기약을 내복하게 된다. 초기에 바로 치료되면 가장 좋은 일이지만, 계속적인 스테로이드제의 사용은 전신으로 아토피가 진행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아기들은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뒷머리부터 목과 등까지 촉촉히 땀이 나게 마련인데, 이 부위에 땀이 나지 않으면서 피부가 건조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건조한 피부는 양볼이 붉어지는 현상과 함께 태열이 생기려는 전조증으로 보고 아래의 생활관리가 필요하다.   일단 태열이 생기면 곧바로 소아과에서 치료하기 보다는 이유식과 주변환경을 개선해 보는 것이 좋다. 모유 수유중인 아기는 엄마가 음식에 신경써서 독성이 없고 신선하고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 만약 엄마가 아토피가 있거나 피부가 건조하여 좋지 않은 경우는 모유 수유를 중단하고 이유식과 아토피 반응이 없는 분유(쏘이분유, 콩분유)를 먹인다. 또한 이유식은 익힌 야채 위주로 영양의 균형을 살피고, 점차 육류의 분량을 늘려 가야 한다. 물론 과자 같은 식품첨가물이나 화학조미료는 금지해야 한다.   방안의 온도와 습도의 조절, 새로운 인테리어로 인한 실내 환경의 화학물질 제거, 새로운 가구, 차량을 이용한 장기간의 외출, 지나치게 잦은 목욕(목욕물을 너무 뜨겁지 않게해야 한다), 저자극성 세면제를 사용하여 가볍게 씻어주고 때를 밀거나 장기간의 목욕 등은 태열의 피부를 관리하는데 좋지 않다. 또한 아기는 가려움증에 대한 참을성이 없이 본능적으로 긁어서 상처를 내기 때문에 긁지않게 관리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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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9
  • [실로암] 내 삶은 주의 것
    대학생 때부터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내 뜻대로 계획을 세워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이 성공하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께 뜻을 구하지 않고 내 생각과 판단으로 생활했다. 하지만 대학교 졸업 이후 내 삶은 내 생각과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캐나다 밴쿠버에서 한 달을 지냈는데 그때의 생활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졸업 이후 해외에서 지내고 싶어 해외 인턴십을 도전했지만 되지 않았다.    계획을 바꿔 국내에서 직장 생활을 2년 정도 한 이후에 해외를 가자고 생각했다. 이후 국내 취업을 하여 직장인의 삶을 지내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다시 만났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과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깨달으니 야근이 많았던 직장 생활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학창시절 견디기 힘들었던 상황들과 환경들 또한 믿음의 자녀로 만들기 위한 계획임을 깨달았다.   매일 새벽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며 직장을 다니는 시간 동안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동행의 축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삶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20개월의 직장 생활 시간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의 시간이 되었다. 내 뜻과 계획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걸 알게 해주셨다. 그렇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일 년 정도 되었을 때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관두려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직장을 더 다니게 하셨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로새서 3장 23절)는 말씀을 주셨고 어떤 일을 하든지 상관없이 주께 하듯 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걸 알게 해주셨다.   늘 시편의 말씀을 묵상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러한 다윗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도록 기도했다. 그래서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라고 찬송했다. 다윗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라고 계속 노래하고 있다.   그렇게 말씀에 순종하며 지내다 보니 하나님께서는 직장 생활 2년 후였던 2018년에 미얀마 땅으로 인도하셨다. 가고 싶었던 캐나다는 아니였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였다. 생각해보면 직장 생활 2년 이후 해외에서 살고 싶다는 소원도 이루어 주신 것이다. 미얀마는 대한민국보다 기독교 역사가 더 길지만, 불교를 믿는 인구가 89% 이상인 곳으로 선교지 땅이다.    나는 대학생 때 봉사했던 재단에서 인턴으로 근무했다. 대학생 때 하고 싶어서 했던 봉사활동이었는데 그것을 통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임을 알 수 있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말씀에 순종할 때 알 수 있었다.   이후 기도한대로 하나님께서는 미얀마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고 7월에 다시 미얀마에 가게 되었다. 대학교 졸업 이후 지금까지 4년 동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장 9절)의 말씀이 내 삶에 실현되는 시간이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는 길이 가장 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나는 나의 앞길을 다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뜻과 계획대로가 아닌 잠언 말씀처럼 걸음을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고 싶다. 하고 싶은 대로 살았던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인인 나를 사랑해주시고 인도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빛의자녀교회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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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0-07-09
  • 기독인문학연구원 강성호연구위원
      “3·1운동과 신사참배반대,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여성운동 등 한국교회는 근현대사 전반에 걸쳐 기성 권력에 고개를 숙이는 데에 급급해하지 않았다”고 전하는 강성호연구위원(사진).   강성호연구위원은 지난해 발간한 저서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을 통해 기독교인으로서 지켜야 할 사회적 책임과 역할이 무엇인지 교회가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강연구위원은 “3·1운동 전후로 과거 한국교회는 저항의 텍스트로서 구약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며, “출애굽기가 보여 주는 탈식민주의적 서사가 일제 당시 한국인에게 저항의 텍스트로 다가왔으며, 이것이 3·1운동에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한 연유에 바탕이 되었다”고 전했다.   한국교회 역사에서 잊혔던 여성 교인들의 희생을 오늘날 발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강연구위원은 “한국교회 역사는 그간 엘리트주의적 시각에서 연구됐다는 비판에서 민중의 시각에서 교회사를 재조명하는 사례가 점차 늘고 있다”며, “민중에 관해 정의할 때 여성, 특히 ‘전도부인’을 손꼽을 수 있듯 전도부인은 전국 각지를 돌며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고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3·1운동을 비롯해 계속해서 한국교회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역사를 발굴하여 알릴 의무가 한국교회에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일제강점기 속 수탈의 역사를 들추는 과정에서 감춰졌던 일본군 정신대와 위안부 문제를 조명한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역할은 거대권력의 수탈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서 좋은 사례로 볼 수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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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2020-07-09
  • 「메이드 인 강남」의 저자 주원규작가
      “소설 〈서초동 리그〉를 작업하고 있다. 이념이나 정치적인 것을 다루기보다는 하나의 권력조직이 너무 비대해져 견제세력조차 없어진 현 사태를 비판하고 싶다. 그럼에도 항상 중도를 따라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잃지 않는 시선을 갖고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번 작업도 상상 속에서 상황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근거해서 글의 배경을 제공하기 위해 취재를 통한 자료 확보에 힘썼다”고 말하는 〈메이드 인 강남〉 저자 주원규작가(사진).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에 관해 주작가는 “극 중 검찰총장은 내부개혁을 하려고 하지만 학연·지연이 없어서 내부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고, 그를 찍어 내리려는 주변의 암투가 벌어진다”며, “그 사이에 끼어든 평검사의 시선으로 이러한 사건을 바라보았을 때의 이야기를 전하려 하고 있다. 과거 군부 독재 시절에 검찰이라는 조직은 권력의 시녀였다가 독재가 무너진 현재는 조직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이러한 생각들을 소설로 녹여보고 싶다”고 전했다.   〈서초동 리그〉의 자료 수집을 위해 주작가는 “법조계 관계자들의 인터뷰와 가능한 한 검찰 조직의 내부 인사들의 이야기를 수집하려고 노력했다”며, “쉽지는 않았지만 공청회나 수사자문회의 흐름을 파악하고, 검찰청 앞에서 시위자들의 이야기도 들어봤다. 검찰 출신 정치인들, 변호사들과 인터뷰하고, 일간지 법조 출입기자들에게도 이야기를 들었다. 검찰 조직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들과 분위기를 확인하고 글을 쓰고 싶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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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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