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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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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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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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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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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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백석대 이사장 박요일목사
    백석대 이사장인 박요일목사는 말씀과 기도중심의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지난 세월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고 감사한 시간이었음을 고백했다.   박목사는 고려대 법대 졸업후 총무처 문화공보부에서 공직으로 5년간 일하다가 총신대 신대원에 진학했다. 또한 성결대, 백석대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강성교회를 설립하여 41년간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16년간 백석총회 유지재단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왔다.   197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으로 출발한 강성교회는 1996년 백석총회에 가입했고, 강성교회 재산을 총회에 기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2007년 유지재단을 세웠다. 유지재단은 영안교회와 흰돌교회, 그리고 강성교회가 함께 세웠고, 박목사는 초대 이사장부터 다섯 번 연임하며 총회와 재단을 위해 봉사했다.   박목사의 설교에는 한결같은 원칙이자 철칙이 하나 있다. 설교주제를 목사의 재량으로 정하지 않고, 성경에 쓰여진 순서와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목회철학이다. 강성교회는 매 주일 새벽 5시 30분 예배, 그리고 오전 9시와 11시 예배, 오후 찬양예배가 있다. 예를 들어, 성경본문 1~5절을 새벽에 전하고, 6~10절은 오전예배때 전하고, 11~15절을 오후에 전하는 방식이다. 매 주보에는 그날 설교문이 그대로 담겨있다. 수요예배 설교는 지난 주일예배 설교를 복습하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주중에 교인들은 주보에 쓰인 지난 설교문을 읽고, 한주간 말씀 속에 살아가도록 권면한다. 또한 구역예배 인도자에게는 다음 주일 설교문을 보내주어 말씀을 예습하도록 한다.   이 원칙을 지난 40여년간 한결같이 지켜왔다. 그동안 설교가 생뚱맞거나 엉뚱한 주제가 아닌, 때마다 필요한 말씀이었다는 것. 그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고 박목사는 고백한다.   박목사는 “하나님은 고정된 말씀인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오래된 말씀이지만 그것을 전할 때 말씀은 생명력이 있고 운동력이 있어 사람을 먹이고 살리는 힘이 발휘된다”고 말한다. 그만큼 목사의 설교준비는 마치 ‘어머니가 밥을 준비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100% 무공해는 어렵지만, 저공해로 영양가 있는 밥을 지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목사는 신약과 구약을 골고루 섞어야 한다며, 어느 한쪽을 편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박목사는 “세상의 법은 오심을 방지하기 위해 3심 재판제도를 둔다. 설령 사형이 선고되더라도 사면복권이나 재심의 기회가 있다”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한번 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잘못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언제나 옳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심판을 두려워하며 평소에 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한국교회를 향해 말씀중심으로 가야할 것을 권면했다. 그는 “목회자가 깨어있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말씀중심으로 가야 한다. 성경에 모든 답이 있고, 길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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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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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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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의 저변확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고스란히 신학대학의 위기로 전가되어 급기야 대부분의 신학대 정시 모집이 미달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신학대학에 지원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신학에 대한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목회자에 대한 사회적 비호감도가 이렇게 높아진 상황에서 신학대에 지원하는 학생들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에 더해 저출산 문제는 신학대 위기를 부추기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와 신학대는 신학의 의미를 사회에 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는 철학과 신학 등의 인문학적 가치가 멸시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고, 취직을 보장하지 못하는 학과는 인기 없이 소외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신학은 그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예정된 결과다. 먼저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전공을 이리도 천대하는 상황에서 비전공자가 신학을 존중할리는 만무하고, 이에 더해 적지 않은 수의 목회자들이 신학적 소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어 그러한 목회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한국 교계가 신학의 의미를 퇴색시킬 것은 자명하다. 목회자들부터 신학생들에게 신학이 아닌 교회에서의 사역을 배울 것을 강조하는 것만 봐도 이러한 분위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학이 그 실천적 의미를 부재하면서도 이공계의 가장 중요한 학문으로 취급되는 것처럼 신학은 그 실효성이 없음에도 인문학에서 근원적이고 중요한 학문으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취직을 목적으로 수학과와 철학과에 진학하지 않듯이 목회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도 신학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있어야 한다. 신학은 교회에 실용되기 이전에 하나의 근원적이고 추상적인 학문이다. 물론 추상적 학문의 의미를 세속적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토록 초월과 반세속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목회자들이 추상적 학문의 최고봉인 신학을 멸시하는 현실을 보면 참혹한 감정마저 든다. 한국교회는 신학의 의미를 알리는일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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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03-05
  • 저출산 대비를 위한 교계 대책 절실하다
    우리 사회의 저출산 문제는 아주 복합적인 요인을 갖고 있다. 근본적인 이유는 정부 정책의 미진한 부분도 있었지만, 우리 사회의 지나친 소득 격차와 지나친 경쟁, 지나친 집중에 있다. 결혼과 출산의 가장 큰 관건은 안정된 직장, 안정된 일자리가 있어야 한다. 저출산 문제는 사회문화적인 환경과 관련되어 있다. 정책적인 출산 장려금, 양육비 지원과 같은 경제적 부담의 완화도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별에 관계없이 출산, 육아, 일을 병행할 수 있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제도적으로 확립하면서 사회적 인식 그리고 사회는 물론 기업 문화의 개선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재계와 여성출산을 둘러싼 모든 사회 주체들이 자녀 양육 비용을 분담하는 ‘사회적 육아체계’의 구축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본래 ‘출산’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위대한 창조의 축복이다. 창조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에 생명의 기운을 공급하시어 존재하게 하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게, 땅을 정복하게,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복은 하나님의 절대명령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반드시 성취됨을 전제한다. 그 가운데 사람의 ‘출산’이 축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들이 첫째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는 자기중심의 문화를 만들어 감으로써 진정한 복을 잊어버렸다. 이른바 저출산이라는 산아제한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반하는 것이다. 교회는 이에 부응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경쟁보다 이웃의 아픔을 보듬는 문화를 창달하여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회복되는 사회를 만들어 가도록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이웃과 함께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03-05
  • 기독교와 사랑
      기독교에는 심오한 신학적 깊이가 있어 세계적인 석학이라도 감히 자긍하지 못할 지식의 심연이 만고의 비밀을 품은 채, 지심까지 잇닿은 호수처럼 고여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신학에 조예를 갖지 못한 평신도로서는 신학보다도 생활에서 이해되는 사랑의 종교가 기독교라고 나는 믿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요한은 말했으며,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제일이란 것을 노래했다. 내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통달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으며, 내가 내 소유를 다 털어 희사한다 할지라도 사랑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다. 이제 우리 평신도의 입장에서 요청하고 싶은 것은 부디 그리스도의 본 모습인 사랑의 생활로 돌아가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끼리, 교인끼리만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 당시에 교회에 충실한 신자였다고 볼 수 있는 바리새인들보다도 죄인들이라 할 수 있는 창기, 거지, 문둥병자 등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음식을 같이하며 친구가 되며, 그들에게 그의 숭고한 사랑을 나눴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교회 밖에 있는 ‘어린양’들에게 더 많이 쏠려야 할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기독교의 생활 강령이라면 그것은 무척 간단한 종교라 하겠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뜻을 따라 우리도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계명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이웃이 누군가’라고 제자가 반문했을 때, 예수는 ‘원수라도 네가 그를 사랑하면 그가 네 이웃이 될 거다’라고 대답했다. 사랑만 한다면 이웃은 얼마든지 만들어진다는 얘기이다. 내 이웃이 누군가하고 망설일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나 이웃이 되어야 하겠다고 용감하게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사랑으로 맺어지는 인간관계의 넓이는 그야말로 내 인격의 넓이여서 아무것으로도 박탈할 수 없는 내 영광이 된다.  /본지 전 발행인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3-05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46
      일제의 탄압과 포악한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우리 한민족 겨레가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3.1만세 운동을 벌인지 올해로 102주년이 되었다.   3대 독립선언 중 가장 먼저 대한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것은 해외에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독립운동 인사들이 하였다. 1919년 2월 1일에 이승만, 안창호, 김좌진 외 36명이 만주 지린에서 만주와 연해주 및 중국, 미국, 일본 등에서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의 합방 동기는 그들의 소위 법일본주의를 아시아에서 실행함이니, 이는 동아시아의 적이다.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강박과 무력폭행을 구비하였으니, 이는 국제법규의 악마이다. 일본의 합병 결과는 군경의 야만적 힘과 경제의 압박으로 종족을 마멸하며, 종교를 억압하고 핍박하며,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 문화를 저지하고 장애하였으니 이는 인류의 적이다.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와 공동체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되면 3천리 옥토가 자가의 소유이니 일가를 희생하라”고 선포하였다. 무오독립선언 직후 조소앙(본명 조용은)이 일본으로 동경으로 파견되어 이광수, 백관수 등을 지도하면서 동년 2월 8일에 재일본 동경 ‘조선청년독립단’ 12명이 2.8독립선언을 하였다.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획득한 세계의 만국 앞에 독립을 선언하노라”고 선언문을 작성하면서 “한일합병이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에서 나오지 않고 우리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뒤흔들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한다는 4개 항목을 결의하고 발표하였다.   2.8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아 한성(서울)에서 3월 1일 민족 대표 길선주 목사 외 32인은 기미독립선어서와 함께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민족대표들은 공약 삼장에서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는 3개 항목을 발표하면서 서울에 있는 태화관에 모여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하는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 이것으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것으로써 자손만대에 알려 겨레가 스스로 존재하는 마땅한 권리를 영원히 우리도록 하노라”는 기미 독립 선언문을 조선총독부에 보내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일본 경찰에 스스로 체포되었다. 그 당시 전국에서 올라온 많은 백성들과 특히 젊은이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시내를 행진하며 대한독립 만세를 목청을 높이며 서울 하늘을 찌르듯 우렁차고 당당히 목이 쉬도록 힘차게 외쳤다.   3.1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독립을 향한 강력한 외침의 횃불을 든 확산의 불길은 서울을 비롯하여 충남 천안의 아우내 장터 등 거의 석 달 동안 전국 도시와 농어촌으로 퍼져갔으며 심지어 일본과 연해주 그리고 미국 등 해외에서도 1년 여 동안 지속되었다. 이 독립운동은 세계사적으로 보면 중국의 5.4 운동, 인도의 반영운동 및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독립운동 등에 직간접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3·1운동은 한국인의 순결, 자유, 평등, 존엄성과 자주권, 평화 등의 기본권을 되찾으려는 민족적 거시적인 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하고 아시아 공영을 통해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자 한 비폭력 저항 운동이었다. 역사적인 이 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의 바탕을 이루는 정신이 되었던 것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사회는 무엇보다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고 102주년을 맞아 3.1운동의 가치를 되살리는 큰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기본적인 3.1운동의 핵심 정신은 자유, 평등, 사랑, 자주, 평화 등과 같은 사람의 기본권의 회복을 위한 합리적이고 강력한 투쟁이었다. 이러한 고귀한 운동에 일제는 한국 사람이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종교 등의 자유를 갖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상적이고 지극히 가벼운 죄에 대해서도 가혹한 형벌로 인간의 기본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러한 비인도적인 일본의 처우에 대해 우리백성들은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민족 의지가 저항 운동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일제로부터 해방 76년을 맞는 오늘날 한국은 자유 민주 사회로서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이룩하였으나 공의와 공평의 정신은 상실되고 공권력이 남용되기도 하며, 최소한의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는 비인도적인 사건들이 나타나고 있다.   아직도 사회의 구석구석에서는 가정과 직장, 어린 아이들과 소수의 사람들마저 정서적, 신체적인 학대와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르는 사례가 발견되면서 현대인들의 경각심을 더욱더 높아 가고 있는 실정에 있다. 과잉 민주주의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자유가 과거보다 남용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3.1정신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자유와 평등, 사랑과 자주의 기본권이 보장되는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타당한 바람직한 사회를 이룩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개인과 공동체에서 불통에서 벗어나 서로 소통하고 통합하는 사회를 이뤄야 할 것이다. 애초에 3.1운동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몇 개의 종교 단체와 교육기관이 추진하였으나, 나중에는 전 민족적이고 일원화된 운동을 벌이기 위해 천도교, 기독교, 불교, 및 유림 등의 교단과 기관이 총망라되어 서로 소통하고 통합하였다. 그 결과 지식인과 학생을 비롯한 노동자, 농민, 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이억 말리 떨어져 살고 있는 해외에 동포들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2021년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사회는 코로나19 정국으로 국민들은 최소한의 기본권마저 상실하였고 상공인들은 절망에 빠졌으며 일상생활에 심각하게 불편을 주는 상황까지 다가온 상태이다. 특히 좌우 이념적, 노사분규, 빈부격차, 세대차이, 계층 간의 사이에서 대립과 반목이 대단히 극심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것 때문에 사회 계층 사이에 위화감이 깊어가고 사회 기반이 흔들리게 되는 위험이 초래되었다. 이제 우리 사회가 이처럼 다양한 아픔과 상처를 갖고 있는 모순적인 시점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은 공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극한적인 갈등을 넘어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연합해야 할 것이다. 어떠한 폭력도 허용되지 않는 평화로운 인간 존엄성의 공동체 사회를 반드시 이루어 가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과거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조선을 강점한 뒤 사회 전 분야에서 억압과 수탈을 일삼는 폭력통치를 일삼았다. 이유 없는 트집을 잡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장기적으로 투옥시켰다. 3.1운동은 이러한 일제의 무력통치에 맞서 질서 있는 평화적인 만세운동으로 만천하에 선포하고 승리를 위한 나팔을 힘주어 외쳤던 것이다. 위와 같은 슬픈 현실은 오늘날 우리 사회 전반에 아직도 폭력이 아주 다양한 형태로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폭력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기는 중대한 죄인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이것은 사람이 최고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사람의 존엄성은 자유, 평등, 정의 및 공동체성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폭력은 사람이 가지는 존엄성과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건전한 공동체성을 위협하고 있다. 폭력은 사람다운 삶과 사회의 기반을 흔드는 위험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3.1운동의 평화정신을 바탕으로 우리사회의 폭력성을 단호하게 극복해야 할 것이다.   3.1운동 102주년을 맞는 3월에 한국교회는 회개와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더 나은 미래를 향하여 깊이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팬데믹 코로나19 사태가 2년째로 접어들고 있는 우리사회가 통합되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서 섬겨야하기 때문이다. 3.1운동 때 기독교인은 겨레의 자주독립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다른 종파보다 더 많이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연합을 이루며 노력을 기울였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인 계층 간의 극한적인 질시와 반목 및 대립의 문제를 푸는 일에 앞장 서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한민족 겨레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드높이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독립 국가를 이루는데 기여하는 실제적인 길이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 일을 위해서 내가 먼저 실천하고 서로 존중하고 섬기며 하나를 이루어 감으로써 사회에 연합하는 공동체의 본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가난하며 억압받고 소외된 이들을 내 몸같이 돌아보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만 할 것이다. 끝으로 한국교회는 사회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성경이 가르치는 가치와 삶의 원리에 따라 해결되도록 확실한 방향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복지대학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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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2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45
    복음은 전해졌으나 한국교회가 출발이 되고 안정적으로 정착되지 못했던 당시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부흥의 불길이 불타올랐던 일제강점기에 내한하여 한국 최초 음악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에 다양한 모습으로 선교에 기여한 이를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바로 그가 마두원(馬斗元, Dwight R. Malsbary)선교사이다. 마박사는 1899년 5월 22일 미국 캘리포니아 스타카튼에서에서 출생했으며, 1920년 캘리포니아주 프레스노 초급대학을 마치고 1924년 시카고 셔우드 음악대학교를 졸업한 후 1929년 미국 북장로교의 교육(음악)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1936년에 일본은 우리나라 국민들과 외국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하게 요구했다. 일제의 칼날이 시퍼렇게 물들었던 무렵 마두원 선교사는 평양숭실전문학교와 평양외국인학교에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는 신앙적으로 실망하지 않고 학생들과 함께 하나님께 철저히 무릎 끓고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 무렵에 함께 그와 했던 학생들이 고 방지일 목사, 고 박윤선 목사와 같은 신실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해방 후에는 목사의 신분으로 1948년에 돌아온 마두원 선교사는 고려신학교(현 고신대학교)에서 강의하였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방송전도와 음악교육을 진취적으로 병행하면서 선교사역에 매진하였다.   이처럼 일제시대부터 대한민국의 음악과 한국교회 음악발달에 지대하게 공헌을 했던 마두원 박사의 삶과 선교사역을 생각해 보는 것은 21세기 한국교회와 지금의 사회적으로 어려운 때에 참 의미가 있다고 사료된다. 또한 그분의 고귀한 삶들을 본받아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지금도 해외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귀한 선교사들의 노고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갖고 지속적으로 한국교회가 복음을 열방에 전해야 하는 동기가 될 것을 기대하면서 그의 사역들에 대하여 조명해 보고 교훈을 삼고자 한다. 마두원 박사가 가르쳤던 인물 중에는 대한민국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를 비롯해 ‘가고파’의 김동진, ‘고향생각’의 현제명,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박태준 교수, 오페라가수 채리숙, 피아니스트 한동일, 백건우, 김애자 등이 있다. 이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 잘 알고 있는 이들이 마두원 선교사의 애제자들이다.   한국교회사적으로 마두원 선교사가 남겼던 선교사역의 열매 일부는 강원도 홍천군 일대에 무려 27개의 교회를 설립하여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열약한 환경인 강원도 홍천에서 사역을 펼쳤다는 것은 그의 영혼사랑이 남달리 뜨거웠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한국인을 위해 홍천읍과 도촌면, 속초시에 제이드(Jade)병원도 3개 설립하여 낙후된 강원도 의료선교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를 기억하면서 후대에 역사에 남기도록 ‘음악선교사 마두원 기념 음반’을 펴낸 피아니스트 김애자가 있다. 영창악기 설립자 김재창 대표의 딸로 그녀는 마두원선교사에게 피아노를 직접 배웠다. 그녀는 “반세기가 더 지난 지금 그의 음악을 소리로 남가지 않으면 귀중한 유산이 잊혀질 것 같다는 긴박감 때문에 음반을 냈다”고 말했다. 마선교사의 찬송피아노편곡집을 재해석하고 연주앨범을 펴낸 것이다.   그녀는 명문 비엔나 국립음대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석사, 택사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국내와 카네기홀, 러시아 모스크바 집회에서 소명을 받고 찬양사역자로 한국과 미국에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인물이다. 또한 마두원 선교사가 한국교회사에서 역량을 끼친 것 중에 하나는 1961년에 대한신한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김치선 박사와 함께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 교단을 공동으로 창립하고 현재의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교단으로 발전시킨 사실이다. 이처럼 위에서 언급한 것 같이 마두원 선교사는 일제 강점기 심히 고난의 세월을 걷고 있었던 1929년에 한국인을 위해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삶을 위해 이름도 빛도 없이 살았으며, 특별히 영혼을 구원하려는 목적을 갖고 의료 기관을 설립하고 한국음악, 교회음악의 발전을 위해 전문 음악인을 양성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안타깝게도 선교 현장을 방문하던 1977년 7월 30일, 78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거둘 때까지 전 생애를 한국을 위해 헌신하고 이 땅에서의 사명을 다하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1977년 8월 5일 파주시 기독교일산공원묘지에 안장하고 있었던 마두원 선교사의 묘를 2018년 8월 27일에 김광섭 원로목사와 그에게 배웠던 수많은 제자들이 홍천 희망교회 희망동산으로 이장하면서 허필홍 군수, 김재근 군의장, 허남진 군의원, 많은 교인들도 동행하면서 특히 허군수는 “마두원 선교사의 헌신적인 삶은 홍천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고 하였다. 아울러 그의 숭고한 뜻과 정신을 재조명하면서 매년마다 추모의 행사를 하고 있다. 마두원 박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중 미국에서 교육선교사로 일제 강점기에 내한하여 학교와 병원 그리고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는 김치선 박사와 함께 공동으로 ‘대신교단’을 창립하였고, 특별히 금년은 대신교단 60주년을 맞으며 영적 의미가 있는 한국교회사에 역사의 흔적을 남겼다. 여전히 그의 선교의 열매는 지금도 물이 흐르듯 후대들을 통하여 전국과 해외에서 아름다운 영혼 구원의 꽃을 피우고 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사명을 갖고 있다. 힘들고 어려운 코로나19의 시련 속에서 대한민국 국민들과 한국교회 기독교인들은 마두원 선교사의 발자취를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개인과 가정, 교회, 사회, 국가에 어떠한 시련과 고통이 나의 삶의 현장에 도래한다 하여도 절대 실망하지 말고 마두원 박사가 걸어갔던 발자취를 반추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복지대학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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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1-02-26
  • 김남준목사 정론
    “불교에 귀의하다”라는 말은 사용해도 “기독교에 귀의한다”는 표현은 잘 안쓴다. 그 대신 “예수 믿는다”라는 말이 널리 쓰인다. 왜 그럴까? 예수 믿는다는 말이 더 좋을까? 아니면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표현이 더 좋을까?   예수 믿는다는 뜻은 예수를 구원자로 인정하고 찬동하고 신뢰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귀의라는 말은 무엇으로 돌아가 몸을 의탁한다는 뜻인데, 이것이 종교와 관련될 때는 종교적 절대자나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여 삶을 거기에 기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믿는다는 것은 구원의 조건을 강조한 것이고, 귀의한다는 것은 그 이후에 그의 삶이 누구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가운데 특별한 세계관과 인생관으로 일관된 생활을 해나간다는 포괄적인 개념을 담고 있다. 무슨 말인가? 신자는 믿은 후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일관된 세계관을 가지고 신념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믿는 것이야말로 귀의하는 것이고, 믿지 아니하면 귀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귀의하지 않으면 믿는다는 말이 허언(虛言)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기독교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신앙은 가슴이나 머리로, 혹은 손발 중 하나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빗나간 열정주의자나, 이성주의자나 혹은 율법주의자가 될 것이다. 기독교신앙은 믿는 바에, 사람이 되는 바, 사는 바를 일치시키는 데서 그 힘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삼위일체』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 삼위일체를 상기해내고 관조하고 사랑하려면... (그렇게 함에 있어서) 삼위일체를 사랑하는 데 자기 전체를 연관시키지 않으면 안된다.”(15.20.39)   예수를 믿는 것은 사실상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으로 그분께 귀의한 거룩한 삶을 살아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아가 자연 만물을 선대하여 그것들이 쉼과 평안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 아닌가? 하나님께 대한 삶에 귀의가 없는 예수께 대한 믿음이 과연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이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어떤 식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셨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분께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지 심리적 집중이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와 삶을 사랑을 바쳐 그분의 뜻에 귀의한 삶이었다. 그리스도에게는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 아까워 뒤로 빼돌려 감추신 것이 아무 것도 없으셨다. 이러한 사실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마지막으로 남은 자신의 영혼까지 아버지께서 받아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로 나타났다.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 23:46).   기독교가 사회에서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갑자기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자 호들갑 떨진 말자. 비난하는 사람들 원망하지 말자. 우리의 잘못에 대해 구차히 변명하지도 말자. 예수는 믿는다고 떠들면서 삶으로 귀의하지는 않았던 우리의 위선을 돌아보자. 우리 각자가 어디에 있든지, 있는 그 자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교부들이 피를 토하며 고백했던 그 고백을 다시 드리자. “저의 잘못, 저의 크나큰 잘못 때문이옵나이다”(Mea culpa, maxima culpa).      /열린교회 담임목사. 총신대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1-02-25
  • 3.1운동과 한국교회의 미래
      올해는 102주년 3.1독립만세 기념해이다. 3.1운동은 단지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민족적 저항의 날만이 아니다. 이 독립만세 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전 국민들의 저항 정신이 한데로 모아져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생겨나게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을 다시 복구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창립하게된 것이다. 황제가 중심이 되는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중심이 되는 나라 창립으로서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그 정신이 계승되어 독립운동이 지속되었고, 일제가 패망하자 대한민국이 1948년 새로운 국가로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3.1운동은 일제 식민지로부터 나라뺏긴 국민들의 독립운동을 가동시킨 동력을 제공했다. 1910년 당시의 군국주의 일본에 반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대한제국의 국무위원들이 일본에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통해 군사권과 외교권을 빼앗긴 후 형식적으로 남은 국가의 권력까지 일본에 문서적으로 넘겼다. 5백년 지속된 한 나라가 한일한방 조약에 의하여 일본에 국가의 옥쇄를 넘긴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청나라의 국력이 다하고, 일본이 개화로 군사대국이 된 것도 파악하지 못한채 19세기의 서구 열강의 식민지주의에 아무런 대항할 힘이 없었다. 이러한 19세기 말의 식민주의 시대에 대한제국의 황제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관리들은 탐관오리로 가난한 서민들을 착취하고 민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군대도 없었고, 경제력도 없었다. 이때 서구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은 조선 민초들의 보호자요, 선교사 저택은 민초들의 도피처였다.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만주일대를 손아귀에 넣었고, 1905년 로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양도받았다. 1910년 한일합방하고 10년이 지나면서 조선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국민으로 일제로부터 각종 억압과 천대를 받았다.   조선의 전통 종교인 불교와 유교가 무력하여 일본 식민지 정책에 감히 대항할 엄두를 갖지 못하게 할 때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창조주에 의하여 평등하며 자유롭게 지음을 받았다는 자유와 평등사상을 고취시켜주었다. 서양 기독교 선교사들은 복음을 들고 와서 민초들의 상담자가 되어 신문물인 의료와 교육을 가져다 주었다. 하나님 앞에 평등사상과 자유와 독립사상을 불어 넣어주었고 교회를 세워 지도자들을 양육했다. 그리고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바로 독립을 되찾아야한다는 독립정신을 점화시켜주었다. 1919년 3월 1일 한국인은 국가와 민족의식이 깨어있는 민족임을 입증했다. 양반, 상놈, 천대받는 기생까지 독립 만세를 외쳤다. 망국이 다 나의 책임이라고 고백한 민족적 고해성사였다. 3.1절은 한국이라는 나라와 국민이 없어진 데서 살아난 날이었다. 국가의 주권이란 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선언하면서 3.1운동은 임시정부수립으로 이어졌고, 새로운 나라는 더 이상 황제의 나라가 아니라 국민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한민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구약 성경으로부터 모세와 다니엘, 느헤미야, 에스더의 신앙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독교 신앙이 애국사상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정교분리를 내세운 선교사들 모르게 독립운동을 모의하게 되었다. 교회의 전국적 조직은 당시 집회결사의 자유가 금지되었던 시대에 유일한 전국적 연락망이 가능하게 되었다. 당시 3.1운동에 참가한 기독교는 약 20만명으로 전국민의 약1.5%에 불과했으나 2천만의 마음을 움직이는 독립운동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가장 큰 박해와 피해를 입었다. 그 대가로 기독교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제일의 종교가 된 것이다. 오늘날 코로나로 인하여 지구촌과 우리사회가 어려움 가운데 있다. 한국교회의 미래란 3.1정신을 계승하여 방역에 최선을 다하여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코로나 퇴치에 앞장 선 종교임을 보여주는데 있다.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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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23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44
      지인들과 함께 인천광역시 강화도 주문도에 있는 서도중앙교회를 다녀왔다. 강화도 외포리에서 주문도로 가는 배를 타고 1시간 30분가량 가다보니 바다 주변에 크고 작은 섬들이 눈에 들어왔다. 주문도 주변의 섬들은 우리나라 서해안 군사적인 요충지로 매우 중요한 지역 중에 하나이다. 강화도는 조선 후기에 들어와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는데, 그곳은 19세기 말 우리나라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할 때 그 전진적 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고, 따라서 서양인들의 선교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진 섬이다.   서도중앙교회는 1902년에 창립이 되었으니 119년의 긴 역사를 훌쩍 뛰어넘는 기독교 건축 자료의 중요한 문화재인 것이다. 그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7월에 인천광역시 문화재 자료 14호로 지정되었다. 교회의 첫 이름은 진촌교회였으며, 교회건물을 정면에서 보면 2층 종루(鐘樓) 형태의 지붕을 가지고 있다. 본당 안쪽은 일반 한옥 형태로 팔각지붕으로 설계되어 건축되었다. 우리나라 전통 목조 건물의 가구형식을 바탕으로 해서 서양교회가 지어진 희귀한 건축물이기에 지금도 찾는 이들에게 고풍스럽고 멋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1923년 어렵고 힘든 일제 강점기 시절에 온 교인들의 건축헌금으로 세워진 한옥 예배당으로, 특별한 건축형식을 띠고 있었다. 바로 2고주(高柱), 5량가(梁架)의 가구구조를 가진 팔작지붕에 홑처마집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평면 구성은 중세 초기 서양교회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동시에 재미있는 것은 예배당 내의 창문 구조에 숨겨진 과학의 원리가 있다. 예배당 안에 있는 성도들이 답답하지 않고 여름에는 곰팡이가 피지 않게 통풍을 원활하게 흘러가도록 좌우 창문은 서로 어긋나게 설치했다는 것에서 조상들의 지혜를 알 수 있다.   단순히 교회건축물에 대한 자부심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의의는 초기 신앙의 성도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믿음이다. 119년 전 강화도 주문도에 복음이 들어온 후 성도들은 선교사들의 도움이 전혀 없이 순수한 자체적으로 교회를 지었다는 사실이다. 서도중앙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박형복 목사는 “당시 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650여 성도들이 1원씩 건축헌금을 드려서 교회를 지었다”고 하였다. 그렇게 7,000원이 건축헌금으로 모였으니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7억 원 가량 된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돈을 버는 경제 인구는 매우 적었고 어린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성도들의 헌신이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특히나 강화도 본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교회건축에 필요한 목재라든가 기와가 있지 않으니 이 모든 것을 육지에서 배로 들여와야 했기에 건축자재 값이 상당했을 것이다. 박목사의 설명을 들을수록 당시 성도들의 수고가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이와 같은 수고와 땀 흘림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일까? 주문도 주민의 90%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였다.   119년이 넘은 이 교회는 지금도 새벽예배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좌우로 두 곳인데, 오른쪽 문은 여자가, 왼쪽 문은 남자가 이용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 궁금해서 여쭈어보니 예전의 습관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문뿐이 아니었다. “지금도 이곳 성도들은 강단에서 볼 때 오른쪽 기둥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남자들이 앉아서 예배드리고 밥을 먹고, 왼편에는 여자들이 앉아 예배드리고 밥을 먹는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초기 복음의 토착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옛 습관이 21세기인 지금도 아름답고 정겨운 광경으로 다가온다.   우리나라는 국가적인 위기냐, 기회냐 중대한 시점에 놓여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대한민국을 통치하시고 보호하고 계심을 확실히 믿는다. 코로나19 정국이 지속되는 시점에 교우들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한국교회 역사적인 산실인 기독교 역사 탐방을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신앙의 역사성을 찾아 답답한 시국에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생활과 섬기는 교회에 행복이 가득한 가정, 직장, 교회가 되시기를 기대한다.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복지대학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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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7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43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시골에서 전답(田畓)없이 어머니 한 분이 가정 경제를 이끌어 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가 6.25 한국전쟁이 끝나고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상황에서 군사 정권이 들어서고 경제개발에 고삐를 틀어 매고 있었다. 그 시절에 경남 김해로부터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손현보 목사의 삶과 그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복음을 전하며 영혼구원에 전력하는 생애 속에 역사하셨던 삶의 훈훈한 교훈을 갖고자 한다.   그는 경남 김해시 생림면 무척산(703.m)기도원(1940년대 일제강점기에 고신측 한상동목사를 비롯한 목회자, 성도 애국지사들이 구국기도회를 하였던 장소) 아랫동네에서 태어났다. 어린나이에 아버지 이름을 불러보지도 못하고 자랐다. 논과 밭도 없이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 둘째 부인으로 낮, 밤에도 일하시고 쉼 없이 무엇인가 일손을 놓지 않으며 4명의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존을 위한 노력을 하였다. 그러함에도 그의 가정에는 경제적인 빈곤은 해결되지 못했고 심지어 중학교 때에는 몇 천 명의 전교학생들 중에 자신만이 말표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옆 친구가 선생님에게 짝을 바꾸어 달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열등감 속에 중학교를 다녔다.   그렇지만 그는 10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시골마을에서 미래에 대한 꿈을 꾸었다. 너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홀어머니와 아무것도 없는 그에게 희망을 찾기란 불가능한 상태였다. 어머니는 “돈이 다 어디 갔나? 그 돈 먹어 보고 죽고 싶다”라며 한탄을 밥 먹듯이 하였다. 예수 믿기를 권고 받았지만 거부하였던 그가 정신적으로 헤매던 중학교 3학년 때 마음 따뜻한 친구의 전도로 20여 명 정도 모이는 시골 작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는 교회에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없이 살아왔는데,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니 참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겠습니다.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작은 교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겼다.   손목사는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어머니의 일손을 도우며 진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시간을 내어 성경을 많이 읽고 교회를 섬기면서 자신의 신앙생활에 전력하였다. 특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소원을 품고 있으면 그것을 이루어 주신다.”라는 말씀을 의지하고 힘든 생활을 견디며 집에서 703M가 되는 산 중턱에 있는 무척산기도원까지 반가마니의 쌀과 생활용품 등을 지개로 옮겨 주며 모은 품을 용돈으로 중, 고교까지 사용하였다.   그가 입학원서를 갖고 접수하여 고신대학교에 합격은 하였는데, 어머니는 워낙 가난한 집안에 등록금을 낼만한 형편이 안 되어 걱정을 하였다. 특히 외사촌들은 전부 동아대, 부산대를 졸업하였는데 외삼촌은 “논 30마지기가 있어야 그 수익으로 공부를 하지. 논도 없는 가난한 네가 어떻게 대학교를 다니냐”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삼촌에게 담대하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분명히 제가 대학교를 졸업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입학금을 위해 매일 기도하는 중이었다. 평소에 인사를 나누던 부산 주례 삼거리 철길 위에 올라가면 불현사가 있는데 승려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승려가 “어 자네 웬일인가? 그래 대학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어떻게 되었나?”고 묻자 “예 합격했습니다.”고 했다. “요즘 등록금은 비싸지?”라 묻자, “60만원입니다.”고 답했다. “그럼 등록금은 있나?”고 하자, “없습니다.”고 했다. “그래…저기 가서 놀다가라.” 네, 하고 그는 언덕을 넘어 산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내일이 등록 마감 날인데...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소원을 갖고 있으면 이루어 주신다 하셨는데...” 하며 2시간동안 찬송하며 뜨겁게 기도하고 내려왔다.    시골 아주머니가 절에서 일하시는 분을 만났는데, 그럼 승려를 만나 인사를 하고 가라고 하였다. 승려를 만나 인사를 하는데, “자네 등록금 낼 돈이 없지?” 라며 60만원을 주고 격려를 해 주셨다. 그러나 자신은 갚을 능력이 없다고 고사하였으나 그냥 주는 것일세. 신학대학교에 입학은 하였으나 숙식할 곳을 못 찾자 그는 다시 절로 들어갔다. 불현사찰에서 잠을 자고 1년 동안 통학을 했다는 손목사는 그 당시 도와 주셨던 승려를 참으로 고마워했다.   일반적으로 청년들은 군대가 ”잃어버린 시간, 없어져야 하는 시간“이라고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위하여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라며 기도했다. 신학대학 12월 3일 전 날까지 학기말 고사를 치루고 군입대를 하였다. 손목사는 논산육군훈련소에서 차출되어 701 특공대에 배치됐다. 그곳에서 교회에 간다고 하면 선임들이 피터지게 구타하고 기압을 주었다. 그래도 그는 교회에 갔다. 후에는 입술과 머리가 터지고 다리가 절뚝거리는 상황에서도 교회에 갔다. 나중에는 본인만 갔다가 전도하여 소대 전체가 복음화 되었고 대장까지 예수 믿고 집사가 되는 축복을 받았다.   그가 특공대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었다. 태권도, 특공무술도 자신이 없었다. 하루는 장군, 중령 등의 지휘관이 입회하는 특공대 공수교육 행군이 있었다. 이 때 하나님이 자신을 이곳에 부르신 뜻을 발견하였다. 쓰러진 동료 2명 중에 한 명 것 25kg을 앞으로 메고 자신의 것은 뒤로 완전무장 한 채 다리에 마비가 날 정도의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완주하여 최고 지휘관들이 기다리고 있는 최종지점까지 달려 1등을 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러나 동료가 과로하여 부대에서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를 기점으로 손목사는 특공부대 대장으로부터 특공모범상을 받고 군부대에 도서관을 만들며 장병들의 정서와 교양을 위해 노력을 하고 군생활에서 소대 전체를 복음화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인간적으로 볼 때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매우 부족한 사람임에도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고 꿈을 발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소망을 갖고 살기로 작정하였다. 부산에서 시골마을에 다섯 번의 교회 건축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예배당을 완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드렸다.   우리는 지금까지 손현보 목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멋진 역사를 목격하였다. 누구나 개인적인 삶의 여정은 다르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고 원망하며 희망을 잃고 삶을 포기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우리는 예수 안에서 희망을 품자. 주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소원을 갖고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이 시기를 당당히 극복하며 살아가자.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복지대학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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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0
  • 사법개혁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
      나의 사법투쟁 21년, 그것은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을 위한 길이었다. 이는 인생의 절벽 앞에 있던 평범한 다윗이라는 양치기 소년이 거대한 골리앗을 상대했던 상황과 무척 닮아 있다. 보잘것없던 나의 삶을 잊고 늘 목표를 향했던 진실의 씨앗은 내가 미래에 거둘 희망의 열매였다. 내가 처한 온갖 시련과 역경의 긴 시간은 어느새 소리 없이 지나갔고, 그 희망의 씨앗이 되어 나의 미래 열매가 된 것이다. 그것은 나와 우리 모두의 희망가였으며, 하나님의 정의의 부분적 실현이었다. 그래서 겪게 된 고난과 고통의 삶은 폭풍 같았지만, 결국 고요해질 파도였고, 언제나 나를 꿈과 용기로 가득 채웠던 영혼 성장의 무대였다.   나에게 무소불위인 검찰.사법부는 평범했던 다윗 앞에 일개 거대한 골리앗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삶 속에서 실제로 당신은 어떤 절망 앞에 서보았는가? 살면서 이런저런 고통과 시련을 상대할 수도 있겠지만, 국민을 억울하게 하는 검찰.사법부의 불법은 없어야 한다. 그것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해야 할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다. 국민을 억울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도 아니요, 진실과 정의를 지켜야 할 검찰.사법부의 본분은 더더욱 아니다.   나의 모든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 21년의 사법투쟁 길은 평탄하던 나의 삶을 멸시천대 십자가의 길로 바꿨다. 이 시련과 고통 속에서, 사법개혁을 위한 길에서 내가 굳건할 수 있었던 것은 내 가슴을 뜨겁게 했던 진실이라는 열정이 나와 함께 했었기에 나는 인류희망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나를 늘 꿈꾸게 해줬던 삶의 열망은 어느새 희망의 씨앗이 되었고, 나는 어느새 절망을 극복해낸 ‘사법 독립군’ 영웅이 되어 있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사람을 우리는 영웅이라 한다.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나의 사건은 이랬다.   어떤 사람이 민.형사 사건에서 검찰과 경찰의 수사기록을 위조하고, 불법수사가 난무했음에도 대법원의 민사판결과 헌법재판소와 대검찰청의 결정이 잘 못된 것이고, 위법한 것이라면 아무리 억울해도 그것은 ‘사법 사형선고’와 다름없다. 나는 그런 절망 앞에 놓여 있었다. 그것도 변호사가 모두 패소한 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고요히 묵상을 했고, 심사숙고를 거듭해서 나 홀로 소송을 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생업을 유지 하면서도 내가 만나야할 법과 상식에 대해 고시공부를 하듯 패소했던 모든 서류를 검토했다. 그래서 동일사건, 동일인물, 동일증거로 살아있는 대법원 판결과 헌법재판소와 대검찰청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위증피의자를 불구속 상태로 기소하였고, 판사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 고등법원 확정판결을 받아냈다. (사건번호2008노41, 그런데 검찰.사법부는 재심기각과 위증수사를 다시 부인했다. 2012지불항639와 2012고불항7129등)   나는 무오류 신화의 거대 존엄, 대한민국 검찰.사법부의 썩고 부패한 영혼의 심장에 정의의 총알을 박았다. 더 이상 검찰.사법부의 불법으로 피해를 보는 선량한 국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검찰개혁, 사법개혁을 위한 길이 곧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시키는 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정의사법실천연대 준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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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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