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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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원은 하나님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4)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또한, 기복신앙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고난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공중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필연적인 단계이자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나아갈 힘을 주고, 우리가 해야 할일들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온전히 진리로 살아갈 motivation을 줍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모든 불순물들을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여, 오히려 그것을 제거하여 우리의 영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며, 우리 삶의 앞에 놓였던 길들을 정리해서 하나의 direction으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고난은 우리 인생에 대한 온전하고 명확한 분별력을 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한편, 사탄에 속한 사람들은 사탄의 일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많은 크리스천들도 이 일에 무지불식간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이 땅에서 기복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일에 동참하게 됨을 목도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재정을 추구하는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일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소통과 교제가 안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영적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악한 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속한 자들이라고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의 영적분별력의 부재로 인해, 또한 그들의 이 땅에서의 재정과 축복을 바라는 세상적 욕심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저 내가 축복을 받고 사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삶을 전적으로 걸고,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영적전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전쟁의 삶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저 기복적인 신앙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변화되어야 할 많은 영역들이 있고, 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진리로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일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그러한 진리와 그에 따른 변화를 말씀으로 선포하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길러내고 양육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실질적으로 세상의 그 땅으로 강력히 나아가서 변화를 일으킬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충만이 강력히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은 16:15)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이루어내야 하는 구원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재정구축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서 이 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으로부터 오는 축복보다는, 재정구축으로 오는 축복이 더욱 명확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을 통치하는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통치하게 되는 과정까지도, 주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하고 거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이것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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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는 형형색색의 고무풍선을 자전거에 매달고 달리는 이색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그의 형편을 알게 되면 충분히 그의 마음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에 온 인물로 지금은 법무부 위촉 사회 통합 이민자 멘토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쟁과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은 작가는 한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지난 3월 12일 KBS의 이웃집 챨스 프로그램에 출현하여 알려지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우리가 알듯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탈레반이 있는 나라로 특히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무역 센터 알카에다 테러공격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16년 전에 한국에 왔지만 20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동신교회 집사로 봉사하고 있다. 고통을 겪은 그는 이 풍선들처럼 서로 어우러져 사랑하고 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조국의 봄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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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에레모스 영성10] 광야를 닮은 소리(1)
    광야로 일컬어지는 곳을 연상할 때 떠올려지는 첫 이미지는 ‘거칠다’일 것이다. 영어표현 그대로 와일드(wildness)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약간의 의미를 덧붙여 야성(野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광야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거칠고 투박한 채로 남아 있기에 자연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문명이나 문화는 사람의 인위적 행위가 더해지게 된 결과물인데 이에 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추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창조의 세계 저 편의 암울한 파괴 현장을 목도하게도 한다.   구약 신명기는 ‘다듬지 않은 돌’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도록 하고 그러한 돌들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가르친다. 자연석에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인류의 문명사가 이어져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결코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 즉 하나님께 대한 충직한 신앙 그 자체를 성경은 ‘자연석’으로 상징하고자 했다. 곧 벧엘 야곱의 돌 그리고 요르단 강 길갈의 12개의 돌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돌, 변하지 말아야 할 돌 그래서 신앙은 그러한 돌과 함께 대대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나는 ‘광야를 닮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광야의 그 자연스러움, 꾸밈없음, 있는 그대로의 모습, 다소 거칠게 느껴지고 세련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말하면서 그 배경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과는 대조되는 순박한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우리는 광야의 풍미(風味)와 광야의 야성(野性)을 닮은 영성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이른바 광야의 소리가 주는 울림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울림을 전하고 싶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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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 성서와 생활 [22]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만찬의 영성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지성소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림을 받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주님이 구원의 영원성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성만찬을 행함으로 구원의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기를 원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주님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갓 죽임을 당한 것”계5:6같아야 한다.    예배의 현장 속에서 성만찬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들의 축복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태도에 있다.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 자리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세상에 속하여 죄의 유혹에 빠져 의심 많은 자들을 온전케 하는 것은 십자가를 기념할 때이다. 흔들리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안전한 구원의 피난처가 된다.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십자가의 구원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어린양이 있다. 계시록이 보여주는 놀라운 사실은 어린양에 대한 영성이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원한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십자가의 새로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에서 매일 밝히 보이는 사실이 되어야만 한다. 십자가를 잃어버린다면 영적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3:1십자가를 통해 항상 감동을 받는 믿음이라야 한다. 우리의 영과 마음과 생각 속에 십자가의 사역은 살아 역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항상 새로운 길이 되어야 한다. 항상 살아 있는 영원한 십자가의 계시를 통해 감동받는 영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영성이 있다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날마다 십자가의 이상을 새롭게 볼 때 죄에 대하여 영원히 죽은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죽는 믿음의 체험을 매일 새롭게 가지게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함께 함으로 그 피가 우리를 옛 창조의 근거를 제거해 버린다. 혈과 육이 제거되니 화를 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로써 성만찬의 예식은 예배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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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4) 나로 네 용모를 보게하라
    우리는 앞서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자 꽃이 피고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린다. 이를 영적으로 잘 깨달았다. 즉 장차 있을 환란과 주 재림과 천년왕국의 신비한 비밀들이다.    2:13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들이 구원의 열매를 내는 것은 무화과나무로서 푸른 무화과 열매를 내는 것이다. 또 포도 넝쿨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참 포도나무에 붙은 넝쿨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또 제자와 같은 신앙인 순교한 자들을 가리킨다.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재림하신 주께 찬송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 떠나자’는 ‘함께 떠나자’고 말씀하심과 같다. 앞의 10절에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는 신부에게 ’일어나서 함께 떠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단계를 거쳐 온 것이 13절이다. 본문에 ‘함께 떠나자'는 영적으로 계속해서 성도의 신앙을 진전시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계시한다. 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곳으로 주님과 함께 떠나자는 말씀이다.    2:14 바위틈과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 있는 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고 나로 네 음성을 듣게 하라. 네 음성은 달콤하고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오 나의 비둘기야'는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를 부르는 호칭이다. 여기서 신부 성도 될 자의 호칭이 바뀐 것은 신앙이 더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마10:16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했다. 즉 비둘기는 신부의 신앙 정절을 가리킨다. 주님이 사랑하는 신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정절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중심이 되면 ‘오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바위틈과 가파를 산 은밀한 곳에서는 깎아진 절벽 밑의 검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틈 은밀한 곳은 악한 들짐승과 바다의 짐승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써 안성맞춤이다. 이와 같은 피난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 자는 풀무 불이나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끝까지 신앙 정절을 지킨다. 우리의 피난처가 어디인가? 참 피난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라 하심은 신부의 용모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신부 얼굴에 면사포를 쓴 것과 같이 가리워서 오직 신랑 예수에게만 보여준다. 신랑 예수님만이 신부의 얼굴 위에 있는 베일을 벗겨서 보실 수 있다. 그럼 왜 신랑 예수님이 신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온몸으로 열매 맺고 이긴 것의 결과는 얼굴에 영광이 나타난다. 사람의 인격의 대표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신부의 용모를 보기 원하시는 것은 네 자신의 온몸(인격)이 변화된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도의 신앙 변화의 마디마디가 있었다.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던 때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던 때도 있었다.      앉은뱅이처럼 신앙의 침체기도 맞았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일으켜주셨다. 주님과 한 몸 되어 주님의 사랑을 채워주셨다. 계속하여 변화시키는 역사를 해주셨다. 이제 얼마나 변화됐는지 신부의 모습을 보려고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인격으로 변화된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또 주님은 신부의 음성 듣기를 원하신다. 음성은 사상을 의미한다. 주님 없이는 못산다고 울고불고하던 상사병이 고쳐진 것이다. 즉 인본적인 신앙에서 신본적인 신앙으로 바꿔진 것이다. 그 신부의 사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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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성서와 생활 [21] 그리스도인의 영성-십자가 생명의 영성
       십자가는 주님의 사역으로 끝나지 않고 믿는 자들의 길이 되어야한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뜻은 인간 죄를 대속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을 십자가의 역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십자가는 체험을 통해 우리의 일상의 삶이 되기를 원하신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면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서 생명을 전달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2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며 예수님의 생명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자랑했다.갈6:14‘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사도 바울을 주님을 위해 모든 고난을 견디셨다. 십자가를 최고의 능력으로 여기고 주님을 위해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십자가가 바울의 삶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요 정신으로 충만하였다. 그 결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도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던 사울 바울의 삶을 배워야 한다. 주님을 위해 언제라도 죽음에 넘겨질 각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다른 사람에게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모든 말을 체험적으로 알아 성령의 통로가 될 것이다. 전하는 말과 함께 행할 능력도 줄 수 있는 십자가 생명의 삶을 살게 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8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몸에 계속 적으로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했다. 우리의 생명도 십자가의 생명을 가진 자라야 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사도 바울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는 날마다 경험하는 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들을 주님의 정신으로 견딜 수 있어야한다. 바울처럼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는 십자가의 생명으로 성령의 통로가 되어야만 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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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0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동성애를 과학적으로 반대하는 활동 벌인다” - 전 연세대 의대 교수 민성길 박사
      은퇴 후에도 왕성하게 활동을 펼치고 있는 민성길 전 연세대 의대교수는 용인효자병원에서 지금도 환자를 돌보고 있다. 또한 한국성과학연구협회 회장으로 세미나와 강연 등 여전히 역동적인 사역에 매진하고 있다.   민교수는 “비록 은퇴했지만 불러 주는 곳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며, “한국사회에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동성애 문제를 법적, 신학적, 특히 과학적으로 입증하려한다”라고 말했다.   동성애문제에 대해 “애초에 의학에서 병이 아니라고 하며 시작했다. 이른바 인권운동에서 동성애를 정상화하려고 시도했고, 동성애차별에 대해 기독교가 말을 못하게 하는 일로 만들었다”며, “동성애는 이렇게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교육적으로 문제가 많다. 무엇보다 엘지비티(LGBT)가 득세해서 기독교를 공격하는 논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동성애는 병적이라는 걸 입증하는 게 목표이다”고 했다. 그래서 “기초가 되는 과학적 사실을 발굴하고, 연구논문들을 밝히고, 직접연구하면 좋겠지만 연구비가 부족하다”며, “다른 외국에서 나와 있는 자료들을 발굴 종합해서 정보를 제공해드리고, 교육해드리고, 기독교 성윤리를 사회에 보급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매달 세미나, 유튜브도 재작한다. 초청받으면 강의하고, 책도 만들고 있다. 한국교회의 많은 관심과 기도를 요청드린다”고 전했다.   민성길박사는 또한 성과학콜로키움에서도 큰 활동을 전개 중이다. 이 콜로키움은 동성애를 비롯한 엘지비티의 문제를 의학적이고 과학적인 면에서 비판하는 활동을 주로 전개하고 있어 한국교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편 민성길박사는 연세대 대학원을 마치고 △연세대 의과대 의학과 정신과학교실 교수, △대한임상독성학회 회장, △대한사회정신의학회 회장, △연세대학교 의학행동과학연구소 소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 △대한정신약물학회 회장, △대한정신약물학회 이사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주임교수, △연세대학교세브란스병원 정신과 과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학술기획위원장, △보사부 중앙약사심의위원,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대한신경정신의학회 공로상, △대한정신약물학회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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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2021-05-28
  • ‘MZ 세대’를 위한 미래교회를 제안한다
    서로 사랑을 나누고 포옹을 하면서 격려를 해야 할 가정의 달이지만, 마스크를 쓴 채 5일 어린이날과 8일 어버이날을 보내면서 내년에는 밝은 얼굴을 서로 대할 수 있을지 여전히 의구심이 든다. 지치고 힘든 때일수록 가정이 회복되고 가정의 기초인 교회가 소외된 사람을 보듬어 주어야 하는데, 교회마저 코로나 상황에서 심각한 존폐 위기를 맞이하여 제대로 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코로나로 집회가 금지되는 상황이지만,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교회는 모이려고만 하지 말고 세상을 향해서 흩어지는 본래의 사명을 회복하여야 한다. 교회가 변화된 현실에서 미래교회를 준비하며 이 땅의 젊은이들과 소외된 자들에게 다시 희망을 노래하고 꿈과 비전을 심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시급한 일들이 무엇일까?   예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예수께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죄를 지은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셔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랑을 베풀었을 때,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계속된 공생애 동안에 저 멀리 시리아와 요단강 건너편과 예루살렘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움을 받았다. 코로나로 모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교회마다 재정을 걱정하는 일에 골똘하기 보다는 자기 목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적극적으로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교회 주위에서 고통당하는 강도만난 자에게 참된 이웃으로 다가가는 교회의 예수사랑을 회복하는 길이다.   MZ 세대를 품어야 한다.밀레니엄 시대의 M과 그 다음 세대인 Z의 합성어가 MZ 세대라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축복하면서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바로 이 시대의 MZ 세대를 품어야 할 것을 교회에 일깨우는 말씀이다.   교회 건물은 모든 이를 위한 공유물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가를 지는 일과 MZ 세대를 품는 일은 지금 고난 속에 있는 한국교회가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다. 미래교회가 소외된 자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젊은이들의 활동무대가 되어 미래를 향해 날개를 펼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하려면, 교회 건물을 예배나 성경공부를 위한 장소로만 한정짓는 좁다란 로마 천주교의 암흑시대인 중세의 수도원 개념에서 탈피하여 모든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유 장소로 제공해야 한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이들이 모임이라는 근본적인 원리를 중시하여 비대면 시대에 건물 가용 공간에 20%의 인원이 자유롭게 모이는 공간으로 활용하어야 한다. 미래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는 공간이 되도록 사람의 모임을 중심으로 예산을 재편성하고 공유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해야 한다.   초기 한국교회에서는 교회를 공회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직 교회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는 시대에 누구나 교회에 와서 음식도 나누고 한글도 배우면서 일제 강점기의 고통 속에서 민족이 나아갈 희망을 보여준 것이 한국교회이다. 어떤 이는 교회를 연애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청춘 남녀가 만나 사랑도 하고 가정도 꾸리고 미래의 꿈도 같이 꾼 장소가 한국교회이다.   이제 미래한국교회는 스스로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모임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교회의 공간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사실 나도 활동 범위를 넓히기 위해 공적 장소인 연구실이 필요하지만, 3남매와 사위와 며느리와 손녀를 위해 필요한 사랑을 베풀면서 어른 노릇을 하려니 마땅한 활동 공간이 없다. 어느 교회가 나 같은 학자들에게 선뜻 장소를 제공해 주면 감사할 일이 될 것이다. 더구나 MZ 세대를 끌어안는 모임을 위해 교회 시설을 내놓는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장신대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1-05-28
  • 아시아주일 예배에 적극 참여하자
    1974년부터 아시아교회협의회는 성령강림주일 전 주일을 ‘아시아주일예배’로 정해서 지금까지 드려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가 주관이 돼 진행한다. 그럼에도 교회협 회원 교단에서도 참여가 저조한 상황이다.   아시아는 지구에서 가장 넓은 곳이고 가장 많은 인구가 있다. 세계4대 종교라고 하는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가 아시아대륙에서 나왔고, 아시아인들의 노력으로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아시아는 18세기부터 시작된 서구의 제국주의 확장으로 대부분의 나라와 민족이 식민지를 경험했고, 20세기에 독립했지만 식민지의 어두운 영향력을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미얀마는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식민화 과정 속에서 성장한 군부는 정권을 잡은 이후 미얀마의 모든 영역을 장악해 독재를 이어갔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군부의 탄압과 학살은 서구 식민지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 가운데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모범적인 선교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20세기 초 일본 군국주의에서 어렵게 독립을 쟁취했고, 이어 한국전쟁의 참담한 상황도 슬기롭게 극복했다. 또한 이어진 군부독재에서도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뤄냈다. 여기서 한국교회는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이제 대한민국은 모든 영역에서 세계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미얀마를 위해 기도하고 협력해야 한다. 지금까지 780명이 학살됐고, 그중 52명이 어린아이다. 5천명이 체포 구금돼 있고, 수천의 시민들이 태국과 인도로 피난했다고 한다. 우리 역시 광주의 아픈 경험이 있다. 미얀마에 민주화가 이뤄지고, 이를 통해 아시아교회가 복음화와 정의를 위해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 오피니언
    • 사설
    2021-05-28
  • 한국교회에 봄이 온다
    봄은 사계절의 시작이며 한 해의 시작으로 중요하다. 개나리와 진달래부터 시작하는 봄은 변덕스럽다. 꽃샘추위로 겨울이 다시 왔나 착각하기도 한다. 명자나무는 무르익은 봄을 알린다. 붉으면서 앳된 꽃의 생김새로 아가씨 꽃이라고도 한다. 강남에 갔던 제비도 봄이 되면 마음씨 좋은 사람의 집을 찾아가 박씨를 물어다 준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란 봄에 잠깐 낮잠을 잘 때 꾸게 되는 꿈으로 ‘덧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봄은 기대가 되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올해 봄은 얄궂다. 코로나19 재유행 조짐이 보이면서 동시에 한국교회 방역 준칙 준수 노력이 돋보여 참석 인원 완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면서 전국 교단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전국 연회들이 회무를 마쳤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과 통합측, 그리고 전국 장로교 총회 산하 노회들 봄 정기회를 마무리하면서 총회임원들 추천을 마쳤다.   한국교회 교단들은 각각 봄 정기노회에서 임원과 총회총대들을 선출하며 노회를 새롭게 시작한다. 1년을 위한 새로운 사업도 있지만 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예장 합동교단은 노회 내 분쟁이 심하고, 분열도 많다.   대부분 노회 분쟁이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법과 절차는 지키지 않은데서 시작된다. 물론 이런 불법적인 일들은 개인이 아니라 항상 배후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배후는 노회를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左之右之) 하려는 기득권세력들에 의해서 자행된다. 노회가 분열되고, 분립되는 가장 큰 이유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자들과 기득권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의 다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무기명 투표와 전형위원이라는 불완전하고 불합리한 방법으로 새로운 시작의 봄을 열고 있다.   인구의 감소와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한국교회는 위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위기는 개인주의와 개교회주의라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봄을 기다린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05-28
  • 코로나 팬데믹 중 하나님의 은혜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실체가 된 지 벌써 한 해를 넘기고 있다. 여전히 그 기세는 꺾일 줄 모르고 있으며, 그 위세에 전 인류는 불안과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백신 개발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있지만, 변형 바이러스 형태의 팬데믹이 과연 온전히 다스려질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더욱이 코로나 팬데믹의 근본 원인은 기후변화에 있으며, 이 때문에 기후변화는 기후위기의 심각성 문제로 치닫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결과는 이미 산업화가 추진된 이래, 전 세계가 경제발전과 함께 온통 자연을 이용한 생산 활동에 집중하였고, 이에 따른 과도한 에너지 사용은 마침내 지구 기온을 상승시켰으며, 그것이 오늘날 기후위기를 초래하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   중세기 유럽에서는 페스트 팬데믹 창궐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게 되었을 때, 그 질병의 주된 원인은 하나님의 징계요, 심판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기후위기와 팬데믹은 오늘날 사람들의 인식도 대체로 천재(天災)로 인식하기보다, 인간 스스로 초래한 인재(人災)로 보는 경향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인재를 뒷받침하는 이론은 자연과학자들에게서 이미 “인류세”(Anthropocene)란 개념을 통하여 합리화되고 있으며, 생존을 위해 자연생태계를 파괴한 인간의 행위가 지구환경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 결과가 오늘의 기후위기와 팬데믹 위기초래의 원인이라는 해명이 더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유엔 산하에 설치된 ‘유엔 환경프로그램’(UNEP)과 ‘세계기후기구’(WMO)가 1988년 ‘기후변화에 관한 각 나라의 정부간 패널’(IPCC)이란 단체를 조직하면서 본격적인 기후변화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이래로 이 기구(IPCC)는 인간의 활동이 초래하는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구체적인 통계로 제시하며, 국제협력의 중요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일을 수행해왔다.   기후위기와 팬데믹은 이 시대를 향한 종말론적인 하나님 심판의 경고요, 경종과 각성으로 알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염원한다. /총신대학교 전 총장·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5-28
  •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지키며 살자
     외출을 해보면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의 일상을 바꾼 것 중에 하나는 마스크 착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코로나가 발생 초기 아시아권에 비해 서구권에서 확산이 더 커졌던 원인 중 하나는 마스크 착용 여부였다고 한다. 팬데믹 초창기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이미 마스크 착용을 매우 잘하고 있던 국가 중 하나다. 그것은 아마도 미세먼지나 황사로 인한 선행학습이 체화된 요인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지는 않았다.  지금이야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팬데믹 초창기에는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이 버스, 택시, 지하철에 승차하여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말을 듣고 승강이를 벌이는 일이 종종 있었다.  처음엔 마스크 착용이 습관화 되지 않아 불편해 했고 집을 나설 땐 깜빡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지금은 마스크 착용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고 마스크를 하지 않으면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다. 자동차 안전벨트 착용도 처음엔 답답했지만 지금은 벨트를 착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하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지키며 선한 삶을 사는 것도 비슷한 원리라고 생각한다.  죄성을 가졌기에 선한 삶을 사는게 쉽지 않다. 그러나 마스크와 안전벨트가 답답한 듯 보여도 우리를 보호하듯,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갑갑한 듯 보여도 결국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확신한다. 오늘도 이 기쁨 속에 거닐기를 소망한다.  
    • 오피니언
    • 칼럼
    2021-05-28
  • 하나님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삶으로
    코로나 블루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우울하고 힘들어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만나기를 두려워하고 예배를 꺼리고 생기를 잃고 의욕 없이 겨우 필요한 일들에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일부는 아예 주저앉아 모든 것을 귀찮게 여긴다. 이러한 모습이 이 시대에만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있는 동안 요셉을 모르는 왕이 즉위하면서 230여년을 노예로 살았다. 노예로 사는 동안 그들에게는 해방이라는 목적이 있었다. 이 목적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한 결과 하나님은 모세를 세우시고 10재앙 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셨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시키시려 하나님의 임재를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여주시며 지도자 모세까지 허락하시고 비전으로 가나안땅을 제시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목적을 잃어갔다. 어려운 일만 생기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모세를 협박했다. 이러한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에 대해 어떻게 평가 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출16:12-15에 보면 이스라엘은 굶어 죽을까봐 염려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약속 하셨다. 매일 공급받아야 할 만나를 다음날까지 두었다가 변질된 사건도 있었다. 그렇게 챙기던 만나에 대한 평가가 민11:6 에는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만나에 질려버렸다고 표현한다.   민21:5 에서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원망하며 노골적으로 싫다 표현하고 있다. 목적도 없고 의욕도 없고 그냥 먹고 사는 것이 제일인 가치관에 원망과 불평 속에 아무런 희망도 없이 얼마 전까지 애굽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잊어 버렸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잊어 버렸다. 오늘도 감사를 잊고 목적도 의욕도 없이 원망과 불평으로 나의 주어진 시간을 죽여 가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를 감사하는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매일 의도적으로 1가지 이상씩 감사를 기록해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삶이 변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표영학 성경적 상담사, 부산예제교회 협동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1-05-28
  • [삼위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 11] 현실적인 환경을 서로 수용하는 일입니다.
      빌립보서 4장 11-12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품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고 하였습니다.   어떠한 환경이든지 수용하지 않으면 원망과 불평이 뒤 따르고 다시 죄에 물들고 자살까지 이르게 마련입니다. 환경을 수용하는 자만이 감사가 나오고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현실이 어떠한 것이든지 수용하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안정된 건강한 사람입니다.   사업이 망하고 배우자가 사망하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대학에 낙방하고 말할 수 없는 병에 시달릴지라도 그러한 현실을 수용하는 사람만이 정신건강을 유지하는 첩경의 길이 됩니다.   상담을 받으러 온 수많은 내담자들은 거의 현실을 수용하지 않고 투사와 거부 등의 심리 방어기제를 사용하며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 자신을 해치고 있습니다.   현실을 수용하는 사람은 긍적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현실적인 아픔도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와 가치관의 차이를 서로 수용하는 일입니다. 부부도 서로 다른 문화와 가치관을 가지고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수용하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도 도 마다 그 문화가 다릅니다. 경상도 문화, 제주도 문화, 전라도 문화, 충청도 문화, 서울-경기도 문화가 다 다르기 마련입니다.   미국에서도 똑같은 교육을 받지만 크게 백인문화와 흑인문화가 서로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민족이지만 북한 문화와 남한의 문화가 다릅니다.   그래서 북한에서 온 동포들이 잘 적응을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다문화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문화 가족이 만들어지면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부모의 양육방식이나 교육방식에 따라 또는 매스컴의 영향에 따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서로 다른문화나 가치관의 차이를 우리 모두가 서로 이해하고 수용할 때 부부관계도 행복할 수 있고 그 사회도 안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서로 수용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본문 15:7절에서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바로 서로 수용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 많은 인류를 향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모두 수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일일이 정죄치 않으시고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우리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수용이 없이는 용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수용이 안되면 용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수용이야말로 용서의 길이요, 치유의 궁극적인 길인 것입니다. 서로 수용하는 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위대한 사역 인 것입니다. 현실적인 환경의 수요이 이루어진다면 기쁨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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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1-05-21
  • “아내 소천 슬픔 극복, 후학 교육 힘써” -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증경총회장 최건호 목사
      최건호 목사(충무교회 원로)는 지난 1974년 7월 14일에 충무로 소재 교회로 부임한 후 급격한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고, 강북에 있던 교회를 허허벌판 강남으로 이전했던 인물이다. 부임 후 2년 만에 697평 대지를 매입해 새성전 기공예배를 했고, 충무교회로 명칭 변경하면서 1979년 5월 28일 새성전으로 이전했다. 그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 교육부장, 목회자 재교육을 위해 설립한 총회교육원장으로 활약하며 교단 목회자 교육을 정착시키는데 앞장섰다. 이러한 교육열정과 공적을 인정해 총회 교육위는 성결교육대상을 시상했다. 이어 총회장을 역임한 후 지난 2005년 10월 30일에 원로목사로 추대됐다.   목회 과정에 대해 서병하 장로(증경부총회장)는 “최건호 목사가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하자고 할 당시 가난했던 성도들이 절대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라와 현재 모두 부유하게 됐다”며 “바쁜 목회 과정에서도 최 목사는 열심히 공부, 학자적 면모를 갖추고 서울신학대학교에도 출강을 했다”고 술회했다. 그러면서 최 목사가 새벽기도회 마치고 뉴스위크지를 들고 영어학원으로 향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학문에 대한 열정을 다하던 그는 목회도 성공했고, 학자로서도 부족함이 없었다는 평을 얻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교단 정치에도 헌신해 총회장까지 역임했다. 열심을 다하던 그가 은퇴를 하면서 교회에서 떠나 후임자에게 맡기고 전국적으로 강의 및 집회 설교 초청받으면서 후학들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남기고 있다.   한편 지난 3월 15일, 부인이 소천한 이후 외로움을 달래며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최건호 목사는 “아내가 소천하고 나니까 빈 공간이 너무 커 그립다”며 “하지만 후학들에게 많은 교훈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잃지 않고, 그동안 쌓은 목회경험과 신학연구의 결과물을 다 전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은퇴 후에도 후학들에게 교육을 하기 위해 애쓰는 최 목사는 “성결교회 교육목회는 성결교회 신앙유산을 지키는 일”이라며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더욱 헌신하겠다”고 말했다.   은퇴 후에도 후학들에게 좋은 영적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사명을 다하는 목회자가 있어 귀감이 되고 있다.
    • 오피니언
    • 인터뷰
    2021-05-18
  • 생명을 나눕시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은사는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은사가 없는 사람이 있다. 은사가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은사가 있으면서도 자기를 높이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받은 은사는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은사를 사용하여 내 자신을 높이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존귀하게 해한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이다. 은사는 카리스마(charisma), 즉 선물이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은사는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조건 없이 받았다. 나눔은 우리가 받은 것을 나누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나누어야 한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어야 한다.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몸된 공동체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용되어야 한다. 사랑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이다.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랑으로 해야 한다. 사랑 없는 선행은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하다. 사랑이 가장 좋은 길이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 병든 사람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는 제자들의 소유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은사들을 각자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나누어주신다. 누구에게 어떤 은사를 주시는지는 주시는 분의 마음이다. 인간의 뜻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은사들 사이에 우열이 없다. 우리가 영적으로 더 성숙해서 어떤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공적이 아니라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각기 은사를 나누어주시는 목적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품을 우리 안에 세우시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이다. 나눔은 우리가 먹고 쓰고 남은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눔운동을 하면 물질적 나눔을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 일도 중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나눔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죽어가는 영혼들이 새 생명 얻도록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영적 생명을 얻은 사람은 영적 생명을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다.    한국교회는 다음세대를 걱정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운 이 땅에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의 밝은 빛을 비추어 주셨다. 그 귀한 은혜로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은사를 받아 누리기만 하고 다음세대에 나누어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선물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그 선물을 다음세대에 전해주어야 한다. 또한 우리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 선물을 나누어야 한다. 다음세대를 겸손히 섬겨야 한다. 다음세대의 문화를 이해하고 다음세대의 눈높이에 맞추어 우리가 받은 복과 은사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그러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 다음세대를 향한 복음 전파는 진정한 나눔운동이다.  /백석대학교 기획부총장, 조직신학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1-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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