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뉴스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 오피니언
    • 칼럼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 오피니언
    • 칼럼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4-03-26
  •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백석대 이사장 박요일목사
    백석대 이사장인 박요일목사는 말씀과 기도중심의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지난 세월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고 감사한 시간이었음을 고백했다.   박목사는 고려대 법대 졸업후 총무처 문화공보부에서 공직으로 5년간 일하다가 총신대 신대원에 진학했다. 또한 성결대, 백석대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강성교회를 설립하여 41년간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16년간 백석총회 유지재단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왔다.   197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으로 출발한 강성교회는 1996년 백석총회에 가입했고, 강성교회 재산을 총회에 기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2007년 유지재단을 세웠다. 유지재단은 영안교회와 흰돌교회, 그리고 강성교회가 함께 세웠고, 박목사는 초대 이사장부터 다섯 번 연임하며 총회와 재단을 위해 봉사했다.   박목사의 설교에는 한결같은 원칙이자 철칙이 하나 있다. 설교주제를 목사의 재량으로 정하지 않고, 성경에 쓰여진 순서와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목회철학이다. 강성교회는 매 주일 새벽 5시 30분 예배, 그리고 오전 9시와 11시 예배, 오후 찬양예배가 있다. 예를 들어, 성경본문 1~5절을 새벽에 전하고, 6~10절은 오전예배때 전하고, 11~15절을 오후에 전하는 방식이다. 매 주보에는 그날 설교문이 그대로 담겨있다. 수요예배 설교는 지난 주일예배 설교를 복습하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주중에 교인들은 주보에 쓰인 지난 설교문을 읽고, 한주간 말씀 속에 살아가도록 권면한다. 또한 구역예배 인도자에게는 다음 주일 설교문을 보내주어 말씀을 예습하도록 한다.   이 원칙을 지난 40여년간 한결같이 지켜왔다. 그동안 설교가 생뚱맞거나 엉뚱한 주제가 아닌, 때마다 필요한 말씀이었다는 것. 그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고 박목사는 고백한다.   박목사는 “하나님은 고정된 말씀인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오래된 말씀이지만 그것을 전할 때 말씀은 생명력이 있고 운동력이 있어 사람을 먹이고 살리는 힘이 발휘된다”고 말한다. 그만큼 목사의 설교준비는 마치 ‘어머니가 밥을 준비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100% 무공해는 어렵지만, 저공해로 영양가 있는 밥을 지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목사는 신약과 구약을 골고루 섞어야 한다며, 어느 한쪽을 편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박목사는 “세상의 법은 오심을 방지하기 위해 3심 재판제도를 둔다. 설령 사형이 선고되더라도 사면복권이나 재심의 기회가 있다”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한번 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잘못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언제나 옳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심판을 두려워하며 평소에 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한국교회를 향해 말씀중심으로 가야할 것을 권면했다. 그는 “목회자가 깨어있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말씀중심으로 가야 한다. 성경에 모든 답이 있고, 길이 있다”고 말했다.  
    • 오피니언
    • 인터뷰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4-03-26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당신의 뇌] 뇌를 알면 기억이 보인다(2)
    그래서 해마를 기억의 제조공장이라고 부른다.   해마의 신경세포는 증가하며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뇌의 신경세포는 갓난아기 때 그 수가 가장 많고, 성장해가면서 그 수는 감소하는데 1초에 1개 정도 줄어든다.   반면에 해마에서는 끊임없이 신경세포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나이가 70세가 지나는 노년기에도 해마의 신경세포는 만들어진다. 물론 세포가 죽어가는 속도가 훨씬 빠르긴 하지만 새로운 신경세포가 만들어져 교체된다. 해마의 신경세포가 죽는 속도보다 새로 만들어지는 속도가 더 빠르면 해마는 커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죽는 속도가 더 빠르면 오므라들기 때문에 뇌는 쓰지 않으면 죽는다는 원리처럼 해마를 쓰지 않으면 작아지게 된다.   해마는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해마의 신경세포가 많으면 많을수록 대량의 정보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다. 해마는 기억을 보존하고 축적하는 장소가 아니다. 그러나 해마가 커지면 기억력이 향상될 수 있는 까닭은 동시에 많은 판단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해마가 발달하면 기억력이 상승된다. 신경세포의 수는 사람에 따라 10~20%정도 차이가 있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 오피니언
    • 칼럼
    2024-01-15
  • [변두리 소수자12] 절망 위를 나는 나비 인생
      '주변국들과의 충돌이 빈번하다. 사상과 정치, 그리고, 체제 대립이 살벌하다.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주가 활발하여 도시화가 가속화 된다. 감정 표현과 본능 추구의 자유로운 로맨티시즘이 예술, 문학, 가치관 등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 그런데 개인들은 더욱 외롭다. 교통과 통신 기술이 놀랍도록 발전하며 새로워지지만, 사람들의 간극은 더해지고, 삶은 더 절망적이다. 기독교에 대한 의문과 분노가 더욱 제기되며, 거부한다.'   오늘의 세상을 말한 것이 아니다. 19세기 유럽 사회의 현상이다. 그렇게 혼란한 시대를 고민하며 살던 청년 키르케고르(1813~1855)에게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셨다. 사람들을 위하는 사명감도 주셨다. 그 후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42세에 건강 악화로 죽기까지 헌신하며, 기독교 사상을 다시 정립하게 된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간극으로 인해 불안과 절망을 벗어 날 수 없으며, 절망은 곧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며, 곧 자기 상실이라 했다. 이는 죄와 죽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선 구원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신앙은 추상적 교리나 규범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 근거하는 것이며, 존재와 행동이 통일된 것이다”고 했다. 영성과 실행이 일치하는 실천 신앙과 실존 철학을 명확히 세워 준 것이다. 그 당시 못지않은 이 시대에 우리도 다시 서서, 강건하기를 소원한다.   키르케고르는 삶을 세 모습으로 구분했다(‘이것이냐 저것이냐: 삶의 단상’). △감각과 충동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미적(美的) 존재 (aesthetic existence) △도덕적으로 살지만 신앙 세계에는 미치지 못하는 윤리적인 존재(ethical existence) △종교적 가치로 살면서 신앙을 통해 본래적 자기를 찾으려는 종교적인 존재 (religious existence)이다. 인생은 또한 ‘다이브’(dive)와 ‘점프’(Jump)의 선택을 반복하는 것이라 했다.   ‘다이브’가 목표와 계획을 위해 뛰는 행위라면, ‘점프’는 예측과 보장이 없이, 뛰어내리는 모험적 선택이다. 안정과 불안, 예측 가능성과 무작위성 사이에서, 선택하고, 만들어진 결과가 인생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다이브’와 ‘점프’ 하는 삶의 모습 외에, 요즘에는 ‘레이드’(laid; 안주)를 선택하는 생활 모습도 있다. 그렇게 다르게 선택하며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신앙 생활을 거미와 개미, 나비로 비유해서 생각해 본다.   거미는 거미줄을 쳐 놓고, 그 망에 걸리는 것을 잡아 먹고 산다. 누구나 거미처럼 ‘레이드’하며 사는 시절이 있다. 특별히 갓 태어난 생명은 다른 사람들을 통한 도움을 받으며 산다. 그러나 거미줄을 한번 쳐 놓고 앉아서, ‘다이브’도 ‘점프’도 안 하며, 들어오는 것만 먹고 산다면 어떨까? 더 이상 자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생과 함께 시작된 의미는 ‘안정’ 속에 녹아 버린다. 예수 믿고, 구원 받고, 물세례를 받은 것은 새로 태어난 생명의 ‘시작’이지, 완성품이 아니다. 복음에 위배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을 계속 받아들이며, 계속 나아가야 한다.   개미는 열심히 일한다. 항상 바쁘다. 부지런하다. 좋다고 하는 것을 취하는 즐거움으로 산다.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 열정적인 것이 거미보다는 훨씬 낫다. 예수를 믿고 성령의 맛을 보고, 성령 세례를 받은 후, 안정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 열심히 ‘다이브’한다. 그러나 그 열정이 또 다른 ‘레이드’를 위한 것이라면, 부자 거미가 되기 위한 노력이다. 이미 얻은 것들을 쌓아 놓고, 더 찾기 위해 부지런 할 뿐이다. 세워놓은 목표와 계획을 위해, 열심히 뛰느라, 주님과 주님의 마음을 알아 볼 수 없다. 주님의 뜻을 보고 ‘점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나비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는다. 꽃가루를 찾아다니지만, 자기의 것을 모으기 위한 열심이 아니다. 자신과 자신의 안정을 위한 부지런함이 아니다. 나비가 날아다닐 때마다 다른 꽃들은 생명을 시작하고, 살아난다. 나비가 이런 모습이 되기까지는 거듭나는 과정이 있다. 그동안 안전하게 지켜준 고치 속에서 생명이 자라고, 성장했지만, 새로워지기 위해서, 껍데기를 깨고 나온다. 연약한 애벌레가 부서지는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며, 두꺼운 껍질을 깨느라 찢기는 살에서 날개가 나온다. 그리고 넓고 높은 세상을 날아다니며 꽃가루를 전한다.   최근 세바시 강연에서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세대는 시간과 노력을 바치기 전에, 당장 주어질 보상과 결과를 먼저 확인한다”고 말이다. 생존과 안정, 축적과 목표, 이러한 것들을 좇는 것일까?   유대인의 지도자 A.J.헤셀은 “인간이 절망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데 있다”고 했다. 절망하는 이들이 많은 이 시대에 신앙을 세워 주는 한국의 키르케고르가 많이 나타나길 기대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 오피니언
    • 칼럼
    2024-01-12
  • 기성 문창국총무, 정책과 방향을 제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무 문창국목사는 총회본부의 본질을 회복하는 한 해가 되고자 한다고 밝혔다       교회부흥위한 다각도의 방법을 시급히 마련하는 것이 우선 정확하고 신속한 교단행정 기틀 마련해 행정누수 제거 주력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무 문창국목사는 신년을 맞아 교단의 정책과 방향을 제시했다. 2022년 교단총무로 취임하고 지난해 연임에 성공해 사역하고 있는 문총무는 지난 사역에 대해서 “총회본부에 처음으로 출근했을 때 총회본부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직원들의 모습도 그랬다. 그래서 총회건물을 보수하는 일에 힘썼다. 총회본부를 방문하는 모든 분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해 드리고자 노력했지만 오래된 건물이 주는 한계를 여전히 느끼고 있다”면서, “총회본부 각국의 업무특성을 이해하고 국장들과 실제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을 파악하는 기초적인 일부터 총회 각 항존위원회와 의회부서 소위원회가 진행하는 사업들에 대한 판단과 예측, 그리고 대안제시까지 그야말로 총무라는 명칭에 걸맞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올해 진행되는 사역에 대해서 문총무는 “117년차 총회 표어는 「한 성도, 한 영혼 주께로」이다. 교회의 본질이자 우리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잘 표현하는 표어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2024년은 총무와 총회본부의 본질을 회복하는 한 해가 되고자 한다”면서, “무엇보다 교단 발전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 계획을 세우며 교회의 부흥을 위한 다각도의 방법을 시급히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다”고 말했다. 또 “정확하며 신속한 교단행정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많은 재정과 인력이 투자되어야 하지만 분명한 목표지점을 정하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 행정누수가 없게 하겠다”면서, “2024년 한 해에도 총무와 총회본부는 사랑하는 성결가족과 3000교회와 함께 말씀 안에서 더욱 수신하며 사명완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문총무는 교단내 각 위원회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사역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우선 해외선교위원회에서는 선교사들을 지원하고, 현지 사역자의 목사안수와 교회개척 그리고 교육과 복지를 비롯한 많은 사역들에 전념할 예정이다. 국내선교위원회에서는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경기도 광주에 있는 소망수양관에서 부흥키워드를 진행할 예정이다. 그동안 부흥키워드가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면, 이번 부흥키워드는 교단 내 부교역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총회교육위원회에서는 2월 29일에서 3월 1일까지 제9회 교사대회를 열어서 교회학교 교사들을 격려할 예정이다. 올해 백주년을 맞는 유지재단은 재단명의 재산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많은 불편함과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재산관리 매뉴얼을 준비하고 있다. 매뉴얼을 통해 기본재산과 관련된 청원 서식을 간소화하고, 지교회에서 손쉽게 작성할 수 있도록 개선할 예정이다. 북한선교위원회에서는 △분단 전 82개 북한성결교회 재건 프로젝트와 재건대회 △통일선교훈련원을 통한 북한선교 일꾼양성 △통일기도회 △북한 선교대회 △DMZ기도회 등 다양한 사역들을 지속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교회진흥원은 다음달 19일 「되어지는 목회원리」란 주제로 신길교회에서 오픈세미나를 진행한다. 또한 OMS와의 협력관계의 발전도 추구할 예정이다. 문총무는 “올해도 교단에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게 된다. 사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단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으면 한다”면서, “무엇보다도 성결교단의 사명인 복음전파에 힘쓰는 한해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 오피니언
    • 인터뷰
    2024-01-12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3) 내가 검어도
      말씀에 사로잡히면 자기 그림자가 없어지고 주 안에서 안식  입맞추고 또 입맞추다. 첫 번째 입맞춤은 초림 주님을, 두 번째는 재림주님을 맞는 것이다.  1:5 내가 검어도,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케달의 장막들처럼 솔로몬의 휘장들처럼 나는 아름다우니라.   나는 하나님 앞에 죄성과 부패성으로 죄가 가득한 자이다. 이것이 검은 자이다.  오직 예수의 피로 죄 사함받은 은혜와 그의 의로 칭의 받아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반면에 자기가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써, 사람의 의로 의롭다 여기는 신앙이 예루살렘의 딸들이다. 내가 케달의 장막 같아도(창25:13), 즉 검은 염소털로 만든 장막같이 검을지라도 오직 예수, 초림 예수에 입맞춘 나는 그분의 의로 의롭게 되어 아름답다. 또 나는 솔로몬의 휘장들처럼 아름답다. 이는 솔로몬 궁전의 휘장이 아니다. 이는 그의 육체의 휘장 같다는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 검은 죄의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하시니 나는 아름다우니라.   1:6 햇볕이 내게 내리쬠으로 내가 검게 되었다고 나를 흘겨보지 말라. 내 어머니의 자녀들이 내게 노하여 나를 포도원 지기로 삼았으나 나는 내 포도원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햇볕’은 하나님 말씀(시84:11,요1:4-5)을 상징한다. 하나님 말씀이 내 심령 안에 비취면 나의 추악하고 더러운 것들이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검은 것이다. 바로 이토록 죄인인 나이지만 주님께서는 나로 두번째 입맞추게 하신다. 즉 재림하실 예수님의 신부되게 세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흘겨보지 말라는 것이다. 포도원은 교회요, 또 성도의 심령성전을 상징한다. 오라비의 포도원은 5절의 예루살렘의 딸들과 같은 율법교회이다. 믿음이 아닌 행함으로 치우치는 교회이다. 두번째 입맞춤을 한 성도의 포도원은 재림하실 주님과 영교하는 교회이다. 즉 신부되는 심령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두번째 입맞춤을 한 성도가 오라비의 포도원지기가 되었도다. 오라비의 포도원은 행함으로 치우치고 사람의 의로 사는 신앙이다. 이런 신앙에 매어 버렸다는 것이다. 즉 믿음이 아닌 자기 힘으로 열심히 일하고 복 받는다는 신앙에 매어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재림하실 예수님과 깊은 영적교제가 이뤄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신부성도 자신의 포도원을 지키지 아니한 것이다.  1:7 오, 내 혼이 사랑하는 당신이여, 정오에 당신의 양떼를 어디에서 먹이며 어디에서 쉬게할지 내게 말해주소서. 어찌하여 내가 당신의 동료들 양떼에서 벗어난 한 마리처럼 되어야 하리이까?   신부성도가 자기 포도원을 지키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래서 두 번째 입맞춘 주님을 찾기 위해 ‘오 내 혼이 사랑하는 당신이여’하며 찾는다. 재림 예수를 맞이할 신부신앙, 즉 자기의 포도원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그 주를 찾고있다. 신부성도로 인도받다가 이처럼 영적침체 상태로 빠졌도다. 어찌해야 다시 신부신앙 차원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 이는 당신의 양떼를 이끄는 목자를 만나면 해결되리라. 바로 정오에 양떼를 먹이는 곳을 알면 찾으리라. 정오 낮12시는 그림자가 없는 시간이다. 사마리아 여인(요4:6)이 정오에 예수님을 만났다. 나의 영적상태가 정오가 됨은 내 그림자가 없는 상태이다. 즉 예수로 100% 충만하여 그분만을 의지하면 내 모습이 없어진다. 자기 그림자가 생길수록 그만큼, 이는 자기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말씀에 사로잡히면 자기 그림자가 없어지고 주 안에서 안식한다. 그런데 자신이 장차 순교할 때 주를 부인하지 아니할까? 불안해하면 아직 정오에 쉬는 곳을 알지 못함이다. ‘당신의 동료들’이 누구인가? 먼저 초림예수의 동료는 열두 사도이다. 이들을 통해 초림예수를 맞이했었다. 이들이 양떼를 이끄는 예수님의 동료들이었다. 두 번째 입맞춤을 한 재림하실 예수님의 동료는 바로 두 증인이다(계11;3). 두증인이 증거하는 말씀을 통하여 재림예수를 신랑으로 맞이할 수 있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4-01-12
  •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성결대 초대·2·3대 총장역임한 성기호목사
      성결대학교의 초대 및 2,3대 총장을 지낸 성기호목사(사진)는 한국복음주의 신학회장까지 역임한,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며 목회자요 탁월한 설교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가 총장으로 재직할 당시 성목사의 성경 본문에 집중하는 명료하고 위트있는 설교는, 채플시간을 기대하고 있을 정도로,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또 난해한 신학내용도 쉽게 풀어 설명하는 그의 수업 역시 청강생이 넘쳐날 만큼 인기였고, 그의 명저인 「이야기신학」은 당시 신학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다. 최근에는 「알기쉬운 신학 에센스」란 새로운 책이 출판되기도 했다.   성목사는 은퇴 이후에 미국에 거주하며 계속 설교와 강의 또, 글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섬기고 있다. 미국 필라델피아 은퇴목사회 증경회장으로서 정기모임을 통해 회원들과 교제를 나누고 있으며, 격주 발행되는 미주선교신문에 ‘종말론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발행인을 맡고 있는 월간 「한국인선교사」에 격월로 발행인의 글을 싣고 있기도 하다. 또 필라델피아 은퇴목사회에서 캄보디아와 파라과이 순회선교사로 파송받아 기도는 물론 후원자들과 연결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교 현지방문을 하고 있다.   성목사는 여전히 많은 활동 속에서도 자신에게 최근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일들에 대해 “성결대학교의 후배이자 제자들에게서 받는 위로와 사랑이 크다. 카톡과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 받는데 그것이 큰 격려가 된다”고 말한다. “또 어떤 곳을 방문하게 될 경우 그 지역에 사는 동문들과 얼굴을 대하여 교제하며 사랑을 나누는 보람이 크다”고 전한다.  그리고 “지역교회를 목회할 때 함께 교회를 섬기던 교우들로부터 신앙생활과 가정 형편에 대한 현황을 들으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기도하는 보람도 감사함으로 누리고 있다”며 이전에 섬겼던 성도들과의 지속적인 교제에 큰 기쁨이 있다고 한다.       성목사는 새로운 한해를 맞이한 한국교회에 “치열하게 지난 한 해를 살아내느라 수고가 많았다.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서 또 다시 한 해를 허락하셨으니 감사한 일이다”며,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과 지진 그리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것을 보며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날이 가까워 옴을 느끼게 된다. 깨어 기도하며 어린 양의 신부로서의 준비 즉 성결한 삶을 살아가는 일에 더욱 힘쓰는 복된 한 해가 되기 바란다(히12:14)”고 인사의 말을 전했다.
    • 오피니언
    • 인터뷰
    2024-01-10
  • 성서와 생활[10] 그리스도인의 영성-구제의 영성-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에는 찬송의 제사임을 알고 있다. 히13:15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영적인 제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선을 행함이요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않는 제사인 것이다. 히13:16 예배와 구제는 나눌 수 없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인 새예루살렘성을 약속으로 받은 자녀들은 이 지상에서 이런 영적 예배의 길을 가게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성도마다 이런 삶을 살기를 배워야 한다. 구약시대부터 축복의 절기마다 이방인들과 나그네들에게 축제의 음식을 공궤하게 하였다.    구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을 경험하게 하신다. 어려운 자들을 돌보는 마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길이며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자녀의 길을 가르치며 배우게 하셨으니 이 계명을 영적인 인격으로 삼아야한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잠11:25 이와 같은 계명으로 살지 못한다면 다음의 계명을 통해 순종할 수 있어야 하겠다 .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 잠28:27.    구제를 하지 않는 삶은 저주에 이를 뿐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구제와 예배, 구제와 기도, 구제와 선행은 같은 짝이다. 구제할 마음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모시지 못한 것이다. 카톨릭 신자들은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래도 그 숫자는 줄어들지 않는 이유는 사회에 선한 일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구제를 은밀히’ 하라는 말씀을 잘못 적용한다면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빛을 발하는 문이 닫히게 될 것이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고전13:3    구제가 얼마나 중요한 영적가치인지를 알 수 있는 성경말씀이 있다. “너희 소유를 다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눅12:33-34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구제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의 마음은 천국을 사모할 수도 볼 수도 없다는 의미와 같은 맥락이다. 그리하여 구제는 영적인 자녀라면,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녀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이며 가장 소중한 신의 성품이라 할 수 있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 오피니언
    • 칼럼
    2024-01-09
  • [사랑의 실천] 인생의 커다란 밑거름
         1977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여 입학식을 한지 벌써 46년의 세월이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고 김연준 총장님의 훈화의 말씀과 교훈(校訓)인 ‘사랑의 실천’이 가슴에 뜨겁게 와닿았습니다. 그해 1학년 1학기말 종강파티를 마치고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한 달 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병석에서 신음했습니다. 그러다 아픔 속에 있던 저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을 읽고 죽을병에 걸려 고생했던 것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기적적인 치유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오게 되었습니다.     행당동산을 떠난지 46년이 흘렀지만 그 때의 ‘사랑의 실천’은 그 후로도 저의 일생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야간신학교(성서침례신학교)와 함께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수도경비사령부 군종사병)에 다녀와서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과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에 가서 공부할 때도 ‘사랑의 실천’은 저의 학업의 기초가 되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을 따라 치유상담을 연구하고 치유목회에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전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서 26년 째 가르치다가 정태기총장님의 뒤를 이어 총장이 되고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총회장까지 되어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저의 신앙과 삶의 기초가 된 행당동산에서의 ‘사랑의 실천’ 덕분이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려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다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9~17)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09
  • [당신의 뇌] 뇌를 알면 기억이 보인다(1)
    우리의 모든 정보는 일차적으로 해마에 의해 기억 작업이 시작된다. 해마의 신경세포가 작동되면 기억이 시작된다.   그러나 해마는 기억의 최종 저장장소는 결코 아니다. 기억은 오감을 통해 받은 외부의 정보를 해마에서 받아 전기 신호를 통해 대뇌피질에 저장되는 것이다. 해마는 단기기억의 저장고이며, 우뇌와 좌뇌 사이의 안쪽에 변연계가 위치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기억과 감정을 다스리는 뇌이다.   변연계는 시상과 대뇌반구를 연결해 주는 중간역할을 하는데 변연계의 가장 중요한 중추가 바로 해마이다. 기억은 해마에서 만들어지는데 기억은 가까운 신경섬유를 타고 대뇌피질로 간다. 쉴 새 없이 정보가 쏟아지는 가운데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인다.   해마는 기억을 만들고 기억을 분류하는 구조물이다. 해마에서 기억을 분류하여 장기기억으로 보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해마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개입되면 기억을 한다. 이것은 해마가 편도체의 감정을 참조하면서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것이다. 평소에 기억을 만들기 위해서 즐겁고 슬픈 감정의 자극을 받게 되면 해마의 기억능력을 늘려주는 것이다. 해마는 정보의 필요와 불필요를 판단 해서 다른 부위에 기억을 저장한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 오피니언
    • 칼럼
    2024-01-0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2) 입맞추고 또 입맞추다.
      포도주 마시고 기뻐했던 때보다 예수사랑이 황홀함을 고백    앞서 솔로몬이 성도의 자리에서 하나님 사랑을 깨닫고 노래한 것이 아가서임을 깨달았다.1:2 그로 그의 입맞춤으로 내게 입맞추게 하소서. 이는 당신의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니이다. 1절에 솔로몬이 하나님께 노래하는 것이므로 2절의 ‘내게’는 솔로몬을, ‘그’와 ‘당신’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로 그의 입맞춤으로 내게 입맞추게 하소서.’는 ‘입맞추고 또 입 맞추게 하소서’로 하는것이 원문에 의한 표현이다. 성도인 솔로몬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의 시작이 첫 입맞춤이다. 입맞춤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또 입맞추고 또 입을 맞춘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노하실 것이요, 그가 조금만 격분하셔도 너희가 그 길에서 망하리라.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은 복이 있도다(시2:12).     ‘그 아들’은 시2:7의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너를 낳았노라.”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가리킨다. 모든열방이 ‘그 아들’을 학대하고 죽였지만 너희는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즉 초림하신 예수, 하나님아들을 믿고 영접하라는 말씀이다. 이와같이 처음 입맞춤이 이루어진 자는, 또 그 아들에게 두번째 입맞춘다. 이는 재림하실 예수를 맞이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는 그 아들 예수를 믿음으로써 사랑이 시작되며 그것이 첫 입맞춤이다. 또 재림하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맞이하는 것은 두 번째 입맞추는 것이다. 즉 신부가 신랑을 맞는 것이다. 이는 당신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니이다. 포도주를 마시고 기뻐했던 때보다 지금 당신의 사랑이 더 황홀하다고 고백한다. 이는 두 번째 입맞춤이요. 재림후 신랑으로 맞는 그 사랑이 더 크다. 이 포도주는 예수께서 잔을 가지고 축사 후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새 언약의 피(마26:27-28)라고 하신 그것이다. 즉 속죄 복음을 계시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초림 하셔서 세우신 이 새 언약보다 더 지금의 당신의 사랑이 크다는 것이다. 즉 재림하실 주님의 엄청난 은혜와 사랑이 더 크도다.    1:3 당신의 좋은 향기름 냄으로 인하여 당신의 이름이 쏟아 놓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당신의 좋은향기름’은 예수께서 부어준 성령을 말한다. 예수님과 두번째로 입맞춤한 성도는 이제 재림하실 예수께 초점이 맞춰진다. 재림하실 예수를 맞이할 수 있게 부어주는 ‘당신의 좋은 향기름’은 곧 일곱 영(계1:4)이다. ‘당신의 이름이 쏟아 놓은 향기름’은 예수이름으로 죄 사함 받고, 기도하고 예배한다. 그리고 더 깊은 그분 이름이 곧 쏟아 놓은 향기름이다. 이는 재림하실 예수의 새이름이니 ‘만왕의 왕 만주의 주’를 가리킨다(계19:16). 성도인 솔로몬이 신부의 자리에 서 있으면 그는 ‘만왕’중에 속하게 되고 재림하실 예수는 이 만왕을 다스리는 만왕의 왕이 되신다. ‘만왕의 왕’의 이름을 가지신 예수가 나를 ‘만왕’이 되게 하신다. 이들에게 일곱 영을 부어주셔서 순교케 해주시니 만왕이 되게 하신다. 이러하니 너무 좋고 너무 황홀한 일이다. 이것이 처녀들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말씀이다. ‘처녀들’은 한밤중에 신랑을 맞이하는 슬기로운 처녀(마25:2)와 같다.    1:4 내게 다가오소서. 우리가 당신을 따라 달려 가리이다. 왕이 나를 그의 방들로 이끌어 들이셨으니 우리가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 하리이다.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포도주보다 더 기뻐하리이다. 정직한 자들이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여기 ‘왕’은 물론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계시한다. 키스하므로 사랑이 시작됐고, 이제 이끌어 그의 깊은 침실로 들이어 깊은 사랑을 나눈다. 우리가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 하리이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신부성도가 이같이 노래하는 것이다. ‘정직한 자들’은 2절의 처녀들이요, 이들이 재림하실 신랑 예수님을 사랑하며 기뻐 노래하는 것이다. 할렐루야./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4-01-08
  • 사랑의 언약
      구약은 옛 약속이고 신약은 새 약속이다.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약속하고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한다. 그 약속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신앙이다. 내일의 약속이 있는 사람은 오늘 행복하다. 어제의 서러움과 힘들었던 모든 일들을 이겨낼수 있는 힘은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약속이 신실할수록 우리의 인내는 오히려 기쁨이고 소망이고 살아가는 힘이다.   옛 약속이나 새 약속의 내용은 오직 하나이다. 영원한 사랑이 오실 것을 믿고 그리고 다시 오실 것을 믿으며 사랑을 기다리는 것이다. 약속을 믿으면 기다릴 수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다림은 주께서 이 땅에 임하셨음으로 이루어졌다. 수천 년의 구약이 이날을 기다리며 신약의 첫날을 기다렸다. 이날을 준비하기 위하여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하시고 선택한 사람들을 곳간에 들이신다.   오늘날 세상이 자꾸 어두워진다. 전쟁과 기근과 재앙이 끊이지 않는다. 구약의 약속이 첫 번째 성탄으로 이루어졌듯이 신약의 약속이 재림으로 이어질 것이므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의 언약을 믿으며 우리는 환란 중에도 기뻐할 수 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요즈음, 새로운 마음의 설레임으로 새날을 준비 해야겠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 오피니언
    • 칼럼
    2024-01-0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