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뉴스
  • [향유옥합] '희년'오늘,다시
     이 소영       “오랫동안 꿈을 그리던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13년 전에 처음으로 페이스북을 시작하면서 적어 놓은 글귀이다. 20세기 프랑스 작가인 앙드레 지드(André Gide)가 남긴 명언이다. 그 당시 좋아했던 문구였는데 오랫동안 잊고 지내다 문득 생각이 났다. 이 글을 페이스북에 처음 남긴 그 날의 나를 기억해 보면, 지금 내가 ‘희년함께’라는 단체에서 간사로 일하고 있는 것이 꿈같이 여겨진다. 나는 왜 이런 글을 적었을까? 그때가 아마 나의 꿈의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저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이 신앙이라 믿었던 나에게 새로운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아는 지인의 소개로 여러 기독교 단체와 공동체를 알게 되었고, 성경의 희년 정신을 바탕으로 토지정의를 위한 실천운동을 하고 있는 ‘희년함께’를 만나게 되었다. 사적인 믿음에서 공적인 믿음(공동체, 하나님의 나라)으로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참여한 독서 모임에서 내 인생의 책들을 마주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예수원 설립자인 故 대천덕 신부의 《토지와 경제정의》와 19세기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진보와 빈곤》이었다. 희년 강의가 너무 좋아서 한 번도 빠지지 않으려, 한 구절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트에 적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성경을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공부하며 읽기 시작했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뜨겁게 공부하고 훈련하며 배움의 열정과 기쁨이 있던 시절이었다.   “나팔 소리가 울리고 또 울려서 드디어 듣는 사람의 가슴이 끓어오른다. 지금 세계에는 강한 정신과 고결한 노력이 필요하다. 아름다움은 감옥에 갇혀있고, 인생에서 피어나는 진선미를 철의 수레바퀴가 깔아뭉개고 있다.” - 헨리조지 《진보와 빈곤》 中 -   그 이후로 오랫동안 희년함께 회원의 자리에 머무르다 지난 2022년 2월부터 정식으로 희년함께 실무자의 자리로 오게 되었다. 희년함께/희년은행 사무와 행정을 담당하며 간사로 근무한 지 어느덧 2년이지나 두 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다. 올해는 특별히 13년 전에 처음 참여했던 독서 모임을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다. 지난 주부터 ‘헨리조지와 함께 기도하기’라는 주제로 희년함께 실무진뿐만 아니라 단체회원들도 함께 《진보와 빈곤》 책 읽기 모임을 시작했다. 13년 만에 인생의 책을 다시 만나니 처음 이 책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있다. 그동안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것들이 새로움과 깨달음으로 다시 채워지고 있다. 특별히 “왜 사회가 진보할수록 빈곤이 생기는가”에 대해서 사회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시 그 시대가 지닌 과거 경제사상을 깨뜨리고 자신의 논리를 펼쳐가는 헨리조지의 노력에서 뜨거운 열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책의 곳곳에서 헨리조지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멋진 글들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었다. 《진보와 빈곤》이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함께 읽고 대화하고 나의 인생 구절을 만나기도 하면서 서로의 기도가 되어 지금 우리 시대에서 제2의 헨리조지를 새롭게 그려가고 있다.   “땀의 가치는 땀 흘린 이에게, 땅의 가치는 모두에게”   올해는 특별히 희년함께가 출범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희년함께가 걸어온 역사를 돌아보고 다가오는 미래를 바라보며 새롭게 그려갈 그림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 내가 희년함께에서 일하고 있는 자리는 2년 전 하나님 품으로 떠난 남편이 오랫동안 담당했던 일이었다. 육체적인 고통을 견디며 아픈 몸에도 꾸준히 성실하게 자신의 숨이 다할 때까지 희년의 사역을 감당해온 남편의 자리였다. 그리고 내가 남편의 자리를 대신 이어받아 일하고 있는 ‘희년함께’는 40년 동안 희년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분들의 땀과 열정이 담겨 있는 곳이다. 이 땅의 문제 해결을 위해 어려운 숙제들을 잘 감당하며 풀어가고 어려운 위기 속에서도 서로를 이끌어주고 배려해주는 헨리조지의 마음을 닮은 사람들 틈에서, 올해부터 새로운 멤버로 합류하게 된 사역팀장과 함께, 단체의 역사를 배우고 책 모임을 하면서 새롭게 알아가며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희년함께의 사역 활동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가며 공부하는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다. 13년 전 내가 희년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마주했던 기쁨과 열정으로 한 구절 한 구절 놓치지 않으려 노트에 빼곡히 적었던 것처럼, 헨리조지가 가진 열정과 따뜻한 마음으로 희년함께가 땀 흘려 걸어왔던 길을 희년의 사람들과 함께 오늘도 힘차게 나아가려 한다. 천천히 오래 꼭꼭 씹으면서.. / 희년함께 간사
    • 오피니언
    • 칼럼
    2024-04-19
  • [향유옥합] 구원은 하나님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4)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또한, 기복신앙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고난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공중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필연적인 단계이자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나아갈 힘을 주고, 우리가 해야 할일들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온전히 진리로 살아갈 motivation을 줍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모든 불순물들을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여, 오히려 그것을 제거하여 우리의 영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며, 우리 삶의 앞에 놓였던 길들을 정리해서 하나의 direction으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고난은 우리 인생에 대한 온전하고 명확한 분별력을 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한편, 사탄에 속한 사람들은 사탄의 일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많은 크리스천들도 이 일에 무지불식간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이 땅에서 기복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일에 동참하게 됨을 목도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재정을 추구하는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일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소통과 교제가 안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영적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악한 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속한 자들이라고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의 영적분별력의 부재로 인해, 또한 그들의 이 땅에서의 재정과 축복을 바라는 세상적 욕심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저 내가 축복을 받고 사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삶을 전적으로 걸고,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영적전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전쟁의 삶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저 기복적인 신앙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변화되어야 할 많은 영역들이 있고, 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진리로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일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그러한 진리와 그에 따른 변화를 말씀으로 선포하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길러내고 양육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실질적으로 세상의 그 땅으로 강력히 나아가서 변화를 일으킬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충만이 강력히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은 16:15)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이루어내야 하는 구원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재정구축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서 이 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으로부터 오는 축복보다는, 재정구축으로 오는 축복이 더욱 명확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을 통치하는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통치하게 되는 과정까지도, 주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하고 거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이것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 오피니언
    • 칼럼
    2024-04-17
  •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는 형형색색의 고무풍선을 자전거에 매달고 달리는 이색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그의 형편을 알게 되면 충분히 그의 마음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에 온 인물로 지금은 법무부 위촉 사회 통합 이민자 멘토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쟁과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은 작가는 한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지난 3월 12일 KBS의 이웃집 챨스 프로그램에 출현하여 알려지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우리가 알듯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탈레반이 있는 나라로 특히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무역 센터 알카에다 테러공격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16년 전에 한국에 왔지만 20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동신교회 집사로 봉사하고 있다. 고통을 겪은 그는 이 풍선들처럼 서로 어우러져 사랑하고 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조국의 봄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4-04-17
  • [에레모스 영성10] 광야를 닮은 소리(1)
    광야로 일컬어지는 곳을 연상할 때 떠올려지는 첫 이미지는 ‘거칠다’일 것이다. 영어표현 그대로 와일드(wildness)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약간의 의미를 덧붙여 야성(野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광야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거칠고 투박한 채로 남아 있기에 자연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문명이나 문화는 사람의 인위적 행위가 더해지게 된 결과물인데 이에 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추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창조의 세계 저 편의 암울한 파괴 현장을 목도하게도 한다.   구약 신명기는 ‘다듬지 않은 돌’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도록 하고 그러한 돌들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가르친다. 자연석에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인류의 문명사가 이어져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결코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 즉 하나님께 대한 충직한 신앙 그 자체를 성경은 ‘자연석’으로 상징하고자 했다. 곧 벧엘 야곱의 돌 그리고 요르단 강 길갈의 12개의 돌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돌, 변하지 말아야 할 돌 그래서 신앙은 그러한 돌과 함께 대대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나는 ‘광야를 닮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광야의 그 자연스러움, 꾸밈없음, 있는 그대로의 모습, 다소 거칠게 느껴지고 세련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말하면서 그 배경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과는 대조되는 순박한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우리는 광야의 풍미(風味)와 광야의 야성(野性)을 닮은 영성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이른바 광야의 소리가 주는 울림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울림을 전하고 싶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4-04-16
  • 성서와 생활 [22]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만찬의 영성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지성소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림을 받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주님이 구원의 영원성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성만찬을 행함으로 구원의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기를 원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주님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갓 죽임을 당한 것”계5:6같아야 한다.    예배의 현장 속에서 성만찬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들의 축복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태도에 있다.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 자리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세상에 속하여 죄의 유혹에 빠져 의심 많은 자들을 온전케 하는 것은 십자가를 기념할 때이다. 흔들리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안전한 구원의 피난처가 된다.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십자가의 구원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어린양이 있다. 계시록이 보여주는 놀라운 사실은 어린양에 대한 영성이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원한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십자가의 새로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에서 매일 밝히 보이는 사실이 되어야만 한다. 십자가를 잃어버린다면 영적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3:1십자가를 통해 항상 감동을 받는 믿음이라야 한다. 우리의 영과 마음과 생각 속에 십자가의 사역은 살아 역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항상 새로운 길이 되어야 한다. 항상 살아 있는 영원한 십자가의 계시를 통해 감동받는 영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영성이 있다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날마다 십자가의 이상을 새롭게 볼 때 죄에 대하여 영원히 죽은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죽는 믿음의 체험을 매일 새롭게 가지게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함께 함으로 그 피가 우리를 옛 창조의 근거를 제거해 버린다. 혈과 육이 제거되니 화를 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로써 성만찬의 예식은 예배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4-04-15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4) 나로 네 용모를 보게하라
    우리는 앞서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자 꽃이 피고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린다. 이를 영적으로 잘 깨달았다. 즉 장차 있을 환란과 주 재림과 천년왕국의 신비한 비밀들이다.    2:13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들이 구원의 열매를 내는 것은 무화과나무로서 푸른 무화과 열매를 내는 것이다. 또 포도 넝쿨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참 포도나무에 붙은 넝쿨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또 제자와 같은 신앙인 순교한 자들을 가리킨다.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재림하신 주께 찬송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 떠나자’는 ‘함께 떠나자’고 말씀하심과 같다. 앞의 10절에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는 신부에게 ’일어나서 함께 떠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단계를 거쳐 온 것이 13절이다. 본문에 ‘함께 떠나자'는 영적으로 계속해서 성도의 신앙을 진전시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계시한다. 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곳으로 주님과 함께 떠나자는 말씀이다.    2:14 바위틈과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 있는 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고 나로 네 음성을 듣게 하라. 네 음성은 달콤하고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오 나의 비둘기야'는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를 부르는 호칭이다. 여기서 신부 성도 될 자의 호칭이 바뀐 것은 신앙이 더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마10:16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했다. 즉 비둘기는 신부의 신앙 정절을 가리킨다. 주님이 사랑하는 신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정절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중심이 되면 ‘오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바위틈과 가파를 산 은밀한 곳에서는 깎아진 절벽 밑의 검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틈 은밀한 곳은 악한 들짐승과 바다의 짐승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써 안성맞춤이다. 이와 같은 피난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 자는 풀무 불이나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끝까지 신앙 정절을 지킨다. 우리의 피난처가 어디인가? 참 피난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라 하심은 신부의 용모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신부 얼굴에 면사포를 쓴 것과 같이 가리워서 오직 신랑 예수에게만 보여준다. 신랑 예수님만이 신부의 얼굴 위에 있는 베일을 벗겨서 보실 수 있다. 그럼 왜 신랑 예수님이 신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온몸으로 열매 맺고 이긴 것의 결과는 얼굴에 영광이 나타난다. 사람의 인격의 대표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신부의 용모를 보기 원하시는 것은 네 자신의 온몸(인격)이 변화된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도의 신앙 변화의 마디마디가 있었다.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던 때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던 때도 있었다.      앉은뱅이처럼 신앙의 침체기도 맞았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일으켜주셨다. 주님과 한 몸 되어 주님의 사랑을 채워주셨다. 계속하여 변화시키는 역사를 해주셨다. 이제 얼마나 변화됐는지 신부의 모습을 보려고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인격으로 변화된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또 주님은 신부의 음성 듣기를 원하신다. 음성은 사상을 의미한다. 주님 없이는 못산다고 울고불고하던 상사병이 고쳐진 것이다. 즉 인본적인 신앙에서 신본적인 신앙으로 바꿔진 것이다. 그 신부의 사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4-04-15

실시간 칼럼 기사

  • 나그네 길,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믿음의 족보는 이삭으로,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지고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7년 풍년 후, 7년 흉년을 맞는다. 야곱은 70여명의 직계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이동한다.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만나고 애굽 왕의 환대를 받으며 “바로 가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아뢰되 내 나그네 세월이 130년이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8~9) 고난은 은총의 과정인 것 같다. 믿음은 순종이고 순종은 고난을 통하여 훈련받고 은총으로 이어지고 축복의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나무를 두어 우리가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것을 원하신다. 흙으로 빚으셨으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 선한지 악한지 판단하여 자유 의지로 선을 따를 것을 간절히 소망하신다. 애굽에서 430년의 오랜 시간이 흐르고 아브라함의 자손은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남자 장정만 계수하여 60만 명 (그에 속한 가족까지 합하면 250만 명 추산) 고향 가나안으로 귀환하기 위해 애굽을 떠난다. 이미 창세기 15:13~14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이었다. “네 자손이 이방 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사백 년 동안 괴롭게 할 것이나 네 자손 4대 만에 큰 재물을 이끌고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 고센땅 숙곳에서 예루살렘까지 직선거리 열하룻길을 아랫길로 돌리셔서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시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불기둥 구름 기둥만 바라보며 따라오게 하시고 3개월 후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주시고 2년 2개월 교육과정을 마치셨다. 이스라엘 열두지파 대표를 뽑아 열두 정탐꾼으로 40일 동안 정탐하게 하셨으나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40년 광야 훈련이 시작되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 오피니언
    • 칼럼
    2022-06-08
  • 행복신앙세미나(5)
    (행복신앙연구소장 제임스강 목사, bog.or.kr)  5. 불행의 심리부검    범죄나 사고로 인해 사람이 사망하면 시신을 해부해서 종합 검사를 통해 사인을 파악하는 부검을 실시하는데, 자살 방지를 위한 심리 부검이란 것이 있습니다. 심리 부검은 자살에 관련된 정신적 요인들을 규명하는 방법으로 자살로 이끄는 마음 상태를 미리 파악하여 자살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1986년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가진 핀란드는 자살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자, 세계 최초로 5년 동안 전문가 6만 명을 동원해 자살자들에 대한 심리 부검을 시행했습니다. 그 결과, 자살자 가운데 80% 정도가 우울증을 앓았는데 단 15%만이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에 핀란드 정부는 이 결과를 토대로 자살 예방 전략을 세워 대대적으로 자살 예방 사업에 나서기 시작했고, 매년마다 조금씩 자살율을 낮추더니 마침내 지난 2009년에는 절반 정도나 떨어뜨렸습니다. 그 후 다른 나라들도 핀란드의 심리 부검 제도를 도입하면서 좋은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Why Cry’라는 아기 울음 분석기가 있는데, 아기가 울 때 왜 우는지를 몰라 엄마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스페인에서 발명을 했다고 합니다. 아기가 울 때 이 기계를 갖다 대면 ‘배고픔, 졸음, 귀찮음, 심심함, 짜증’ 등 5가지로 표시가 되어 신속히 아기의 요구를 해소해주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불행의 원인을 파악해주는 기계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살의 심리부검과 같이 불행을 겪는 사람의 마음을 분석하여 그 원인을 파악하는 불행의 심리부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불행의 심리부검을 가장 먼저 시도하셨고 우리에게 꼭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그들을 에덴동산으로 이끄셨습니다. 에덴동산은 부족한 것이 없는 낙원으로 그들을 위한 행복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8절에 보면, 어느 날 아담과 하와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는 것을 봅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래와 같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처음으로 불행을 느끼고 있는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위의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류의 불행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행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 추구해온 것은 낙원과 같은 좋은 환경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에덴동산이란 낙원 속에서도 아담이 불행했음을 통해 인간의 행복은 어떤 좋은 조건에 달려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전 2:10)라고 고백했던 솔로몬도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누려본 후 결국은 아래와 같이 고백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그렇기에 행불행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 원인을 파악하고 가르쳐주시고자 질문을 사용하셨습니다. 노벨상의 30%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연구 능력을 가진 유대인들도, 질문을 해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게 하는 하브루타라는 탁월한 학습법을 사용합니다.   아마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학습 방법을 참고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불행에 빠진 아담에게 질문을 통해 그 원인에 대해 깨우쳐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사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몸의 위치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아담도 자신의 몸의 위치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은 아담이 모르고 있는 마음의 위치에 대한 질문입니다. 불행한 사람들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 것이 마음의 위치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불행을 느끼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몸이나 주위 환경이 아닙니다.   오직 그들의 마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자신들의 마음의 변화에 대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불행의 원인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질문을 통해 깨우쳐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2022-06-08
  • 첫째와 둘째 생물
        첫째 생물은 사자 같다(계4:7). 사자는 짐승들의 왕이요, 그가 모든 산속의 짐승을 다 잡아먹는다. 우리 하나님 자녀들 속에 있는 짐승 같은 것들을 다 잡아먹듯 제거해 주는 생물 역사이다. 즉 우리속의 짐승 같은 요소 육신적인 것을 없애준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또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다(롬8:7-8).    요한계시록 6장 1절에 어린양이 첫째 인을 뗄 때 첫째 생물이 등장하여 ‘오라.’ 한다. 우리를 어디로 오라고 하는 것인가? 그곳은 바로 예수님이 죽임 당하신 그 십자가 앞으로 오라는 것이다. 그리고 역시 믿음으로 우리 속에 있는 짐승 같은 것을 그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됐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옛사람, 죄의 몸이 십자가에 죽은 자요, 그리스도의 것이 된 자이다(갈5:24).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그 육신을 정과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로마서 8장 9절에서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오직 성령을 따라 행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살리는 역사가 곧 첫째 생물의 사자 같은 역사이다. 따라서 대환란 날에도 목숨 걸고 오직 하나님께만 참된 예배를 드리게 한다. 그리고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함이 첫째 생물이다.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다고 했다. 이미 영적 생명으로 살고 있는 자들에게 두 번째 생물 역사가 따른다.    소가 아닌 왜 송아지 같다고 했을까? 바로 자라남을 계시한 것이다. 이는 복음 듣고 진리를 깨달은 자가 진리 안에서 열매를 맺는 것이다(골1:6). 이를 민수기 17장 8절에서 계시한다. 바짝 마른 지팡이 열둘을 성전에 두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오직 아론의 지팡이만 움이 돋고, 싹이 나고 꽃이 피고 결국 아몬드 열매가 맺어졌다.    오직 아론만이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대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역사로 열매 맺게 하신 것이다. 둘째 생물의 역사가 바로 이와 같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의로써 사람의 의, 거짓된 것을 이기게 하는 것, 오직 하나님의 의의 열매만 맺게 하시는 역사인 것이다. 그리고 의의 면류관을 받게 하는 역사이다. 이것이 둘째 생물 역사이다. (더 자세한 것은 유투브 ‘주사랑교회cll’로) /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2-06-08
  • 배안호선교사의 선교사를 위한 서평(3)
              박윤선, <정암 박윤선 목사 자서전.성경과 나의 생애>(영음사, 1992)     들어가기(서론)   정암 박윤선박사(朴允善, 1905-1988, 이하 ‘정암’으로도 표기함)는 한국교회에서 교파를 초월하여서 가장 많이 듣는 존귀한 이름일 것이다. 한국교회 목회자나 신학교 교수들의 설교나 글쓰기에서 계속 '박윤선'의 이름이 자주 회자(膾炙)되기 때문이다. 도대체 박윤선은 어떤 인물일까? 왜 사람들은 '박윤선 목사’, ‘박윤선 박사'을 그렇게 존경하며 사랑할까? 정암은 한국교회 최초의 신.구약성경66권 전권주석자로 일찍이 주목을 받았다. 한국교회 각 신학교 도서관과 목회자, 신학생의 서가에는 박윤선 신,구약 주석전집은 '필수도서’도서이다.   서평자(필자)는 최근에 우연히(?) 파라과이의 아순시온 한인교회 도서관에서 정암의 자서전을 만났다. 박 목사님을 직접 뵈는 것처럼 반가웠다. 단숨에 <성경과 나의 생애>을 읽었다.    ‘한국교회의 나다나엘’, 정암 박윤선 박사님! 예수님이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함 것이 없도다”(요1:47). 정암을 가장 가까이서 59년간 지켜보았던 고방지일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박 형님은 어느 면으로나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비치곤 하였다. 그의 하는 말, 그의 행동에 대하여는 “정말 그럴까?” 하고 의혹을 가져 볼 만한 여지가 전혀 없다. 그 머리로부터 발까지 드러나는 진실성은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점이다. 그는 소유욕이 없다기보다도 소유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함이 그에 대한 적절한 평가일 것이다.” ( pp. 122-23)   1987년 4월 27일, 남서울교회에서 정암의 “성역 50년”감사예배, 그 역사적 모임에 필자(총신 신대원 1학년을 ‘2번째’ 수학할 때 햇병아리 전도사로서)는 제일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날의 이런 특별한 모임은 (당사자인 박윤선 목사님 모르게) 극비리에(?)  홍정길 목사 등 애제자들이 준비하였다. 필자는 그 당시 박목사님의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리 준비한 기념 논총, <敬虔과 學問>을 받은 후, 떨리는 목사님의 음성… 지금도 생생히 들린다. 필자는 깨알같이 수첩에 이렇게 요약하였다. “나는 어린 시절에 북한 평북 철산군 시골집에서 밤에 불을 비쳐서 참새를 잡곤하였습니다. 그때 내 손안에 잡힌 참새가 두려움으로 심장이 심하게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그 참새와 같은 두려움이 있어야 하는데...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무엇인가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가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 순간 필자는 과연 하나님을 경외(敬畏)함의 의미, 곧 ‘하나님을 공경하며 두려워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히 배웠다. 정암은 이런 고백을 하시고 이듬해(1988년) 6월에 소천하셨다.   <성경과 나의 생애> 자서전은 정암이 1979년(75세)까지의 자신의 생애를 ‘아주 간략하게 쓴 자서전’에 17편의 유고원고와 방지일 목사님의 글을 모아 출판한 것이다. “박목사님이 주님의 나라로 가신 지 만 4년, 간략하나마 그의 자서전을 펴내면서, 여기에 그의 유고 중 몇 편(그의 사상과 신학이 요점적으로 나타난 글)과 방지일 목사님의 글(”우리에게 있는 나다나엘”)을 실음으로 박 목사님의 신앙의 발자취가 좀더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하였습니다”(pp. 25-26)고 영음사 편집부는 머리말에서 밝혔다.   정암은 1905년 평북 철산군 백량면 장평동에서 가난한 농가의 2남 3여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9살부터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우기 시작 사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과 오경(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를 공부하었다. 17세에 스스로 동문동에 있는 교회를 찾아가게 되었다. 18세 때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80릿길(32km) 선천 대동소학교(현 국민학교) 6학년에 편입. 평양 숭실전문학교 영문과 졸업,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미국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석사(Th.M) 졸업. 평양 장로회신학교 성경원어 강사 및 총회 표준 성경주석 편집부 근무. 제2차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유학 변증학 및 성경원어 연구. 봉천 만주신학교 교수,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 화란 암스텔담 자유대학교에서 신약학 연구. 서울 총회신학교 교수.교장, 대학원장. <성경주석 완간>(1979년) 총신대학 대학원장, 수원 합동신학원 초대원장. 명예교장. 기타 저서 <영생의 원천 > 등의 설교집 3권, <성경신학> 신학서 등이 있다.  필자는 정암의 자서전, <성경과 나의 생애> 에 나타난 평생학습자/진정한 개혁주의자/기도와 말씀연구 전무(專務)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간단히(?) 書評하고자 한다.    1. 일평생 공부하고 연구하는 평생학습자 박윤선 박사   “김선두(金善斗) 목사님이 신성중학교 교장으로 재임중이던 때에 부흥가이신 길선주(吉善宙) 목사님께서 신성중학교에 오셔서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며칠 동안 사경회를 인도하셨다. 그의 계시록 풀이는 세대주의적이었는데 내가 그 당시에는 알지 못하였다... 내가 그의 계시록 강해를 들어본 결과는 왜 그런지 허전한 느낌이었고, 요한계시록에는 무엇인가 깊고 좋은 내용이 있을 터인데 강사 목사님께서 이 책의 깊은 뜻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p. 43)    “김선두 목사님은 나의 은인(恩人) 중 한 분이다. 그는 나로 하여금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도록 밀어주셨다. 그  결과 내가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p. 43)  → 박윤선 박사는 어린 시절부터 진리를 찾는 끊임없는 질문과 호기심이 많았다. 신학생 시절부터 여러 교수들로부터 배우며 성경연구와 어학연구에 매진하였다.    “신학교 시절부터 나는 성경 연구에 다소 즐거움을 맛보며 방학 때는 교수님의 성경주석(영문)을 빌려 가지고 고향 장평동에 가서 읽은 기억도 있다” (p. 50)    “마포 삼열(馬布三悅, S. A> Moffett) 선교사는 한국 초대의 중진선교사였다. 내가 입학한 그 해에는 그가 소요리문답을 가르쳤다. 그는 그의 관대한 성품과 교부(敎父)와 같은 무게 있는 신앙 인격으로 많은 감화를 끼쳤으며, 학문보다는 성경에 대한 그의 굳은 신념과 보수적인 신학 입장이 무언중에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다고 생각된다. (p. 51)    “나는 재학중에 어학(영어, 독일어)공부도 힘썼는데, 언제나 독일어 문법책을 손에 들고 다녔던 것이 생각난다. 이처럼 어학에 치중했던 것이 후일 성경 주석 저술에 유익한 결과가 되었다. 이런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생각하여 감사하는 바이다.” (p. 58)  ‘목사는 유리집에서 산다’. ‘목사는 주일마다 새 목사가 되어야 한다’   “곽안련(郭安連, Charles A. Clark) 교수는 실천신학을 담당하시고, 설교학, 목회학, 종교교육 등 여러 과목을 가르치셨다. 그는 열정가이고 근면하였다…그는 자극성 있는 표현으로 종종 학생들을 깨우쳤다. 내가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그의 교훈을 두어 가지 소개한다. “목사는 유리집에서 삽니다” 이 말은, 교우들이나 불신자들이 목사의 생활까지도 자세히 훑어보고 있다는 것이다. “목사는 주일마다 새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목사는 기도를 힘쓰고 성경 연구도 힘써서 주일마다 강단에 나설 때에는 교우들에게 전보다 더 새롭고 영적인 사람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p. 54) →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4:15) 이 말씀대로 이 땅의 모든 목사와 선교사는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정암은 일생을 이 말씀대로 주일마다 새 목사가 되어 강단에 서신 것이다.   “박형룡(朴亨龍) 박사는 나의 1학년 시절부터 교수하기 시작하셨다. 그는 변증학 방면의 여러 과목들을 담당하였는데, 학구적으로 많은 유익을 주셨다. 나는 그에게서 고린도후서를 배웠고, 기타 몇 과정 강의를 들었다. 박 박사께서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나를 소개해 주셨다… 그는 신학적으로 한국 장로교의 기둥이었으며,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신학교 교장으로 수고하시면서 막대한 업적을 남겼다.” (p. 55)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있는 동안 틈틈이 화란어를 자습하였다. 삼대(三大) 칼빈주의 신학자 중 두 사람(카이퍼, 바빙크)이 화란 사람이니, 그들의 신학 체계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란어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화란어 주석과 교리학을 읽을 있게 되었다.” (p. 75)   2. 철저한 초지일관(初志一貫) ‘오직 성경’에 올인 한 진정한 개혁주의 신학자   “나는 신학교 재학 중에 “칼빈주의”(Calvinism)란 말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으며, 교수들로부터 “성경신학”이란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성경신학이 없었던 그 시대에 교리들을 성경적으로 단맛있게 가르쳤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p. 56)    “나는 일찍이 근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공부했으나 나의 죄인됨을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성경이 나의 죄인됨을 알려주었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게 됨을 알려 주었다” (p. 62) →   필자는 정암은 어린시절 漢學을 10년간 동양학을 깊이 공부한 것을 주목한다. 사서와 오경을 다 마쳤고 “예기와 주역 외에 사서 삼경(四書三經)을 암송할 정도로 통달하였으며, 논어와 맹자는 주해(註解)까지 다 외웠다. 저녁마다 벽을 향해 돌아앉아서 암송하곤 했던 것이 기억난다.”(p. 35) 이런 바탕위에서 특별계시인 성경을 깨닫는 기쁨 감격이 얼마나 컷을 것인가?    “나는 이 때에도 3년 동안 신학교의 커리큘럼대로 신구약 각 책에 대한 교수들의 강의를 듣는 것과 영문 성경주석을 읽는 것으로 그쳤을 뿐, 자발적으로 간절히 성경을 상고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의 권위 문제를 신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나의 영적 우둔함과 태만을 증거해 준다.” (p. 56)    “성경은 책 중의 책이 아니고 “책들 위의 책”이라고 해야 옳다. 그 이유는, 성경은 모든 책들을 심판하는 책이기 때문이며, 성경은 자증자(自證者)이기 때문이다.” (pp. 56-57)   “누구든지 “성경 말씀이 최고의 진리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만일 그렇게 말하게 되면, 성경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성경 수준에 가까운 내용이 다른 책에도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게 된다. (p. 57)  →   박윤선 박사는 미국 웨스트민스트신학교 시절 메이천 교수로부터 ‘언제나 침착하면서도 열심이 있었고, 온유하며 솔직하여 진실한 학자의 모습으로 일관하였다’고 회상하며 그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메이천 박사는 위대한 신학자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진실한 신앙가였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불철주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성경학자였으며, 모든 신학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면서 신앙적으로 지도해 주었다.” (p. 72)    “나는 신학자들의 학설에 대한 비판을 이 때부터 제대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성경의 권위도 깨닫게 되었고, 그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때에 나는 성경 해석방법도 배우게 되었다. 성경 해석을 바로만 한다면 기독교가 어디까지나 초자연주의(超自然主義)라는 사실이 나에게 명백히 알려진 것이다.” (p. 73)   개혁주의의 근본 원리는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는 주의’. 개혁주의는 곧 성경주의다.   “개혁주의(칼빈주의)의 근본 원리를 말한다면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는 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신자들이 흔히 “성경대로… 성경대로”라고 말은 하지만 누구든지 실제로 성경을 바로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그 주장에 잘못된 내용이 들어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믿되 성경을 바로 해석한 그 내용대로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국 성경주의이다.” (p. 79)   3. 일평생 엎드려 기도일관(祈禱一貫)한 기도의 사람 박윤선 박사   “신학운동은 학문운동이 아니고 하나님을 높이는 운동이다. 이 일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동시에 기도운동이 되어야 한다. 기도 없는 연구작업은 마침내 인본주의로 떨어지게 된다. 참된 기도로 뒷받침하는 신학 연구는 동시에 경건(敬虔)의 능력을 소유한다.” (p. 96)    “숭전 재학 때의 일이다. 박 형님은 언제나 성경에 열중하여 있었으니, 계속 성경을 외우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마치 새김질하는 소나 양같이 그는 성경을 계속 반복하여 읽는 것이었다.” (p. 118)  → 방지일 목사가 가장 가까이서 본 박윤선 박사의 모습이다.   “나는 성경을 주석하면서 가끔 풀기 어려운 난제를 만났을 때에 ‘이 구절 말씀에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를 캐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도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거기서도 단맛 있는 진리가 발견되곤 하였다. 그 뿐 아니라, 밤중에 잠에서 깨어 고요히 성경 말씀을 묵상하다가 그 뜻이 깨달어지면 즉시 기록해 놓고 다시 잠을 자기도 하였다.” (p.161)    “나는 산과 들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그 곳에서 기도하려는 의욕 때문이다. 산을 보든지 들을 보든지 나의 마음에는 ‘저기에 가서 기도했으면 좋겠다’하는 의욕이 일어난다. 나는 주택을 구할 때에도 산 가까이 위치한 집을 원한다. 그것은 내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기 위함이다.” (p. 167)  →   정암은 산과 들을 좋아한 것도, 주택을 구하는 것도 기도하는 한적한 장소를 찾기 위함이라고 고백한다. 요1:48의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하였던 것같이, 정암도 끊임없는 기도와 성경말씀 연구와 묵상에 올인한 일생이었음을 볼 수 있다.   “'응답된 증거가 확실하지 않은 어떤 기도들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았다’고 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기도응답은 반드시 기도자에게 다 알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된 기도는 기도자의 육체를 위한 것이 아니므로 응답여부를 알기 어렵다. 예를 들어 주기도문을 생각해 보자…개인주의적 내용이 아닐수록 참된 기도이다. 그러므로 많은 참된 기도들이 기도자 밖에서 이루어진다. 그뿐 아니라, 많은 기도들이 영적으로 이루어지며(눅11:13), 성령으로 말미암아 수정되어서 이루어진다(롬8:26-27)” (p. 168)    “나는 어떤 때에는 설교 준비를 먼저하고 그 다음에 기도한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먼저 기도하고 그 다음에 설교 준비를 한다. 내게는 이 두가지 작업이 병행한다. 경중으로 말하면 성경연구가 더 중요하지만 기도도 없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가 바친 만큼 주심에 있어서 에누리가 없으시다. 즉 성경연구와 기도 준비에 시간을 얼마나 바쳤는가에 따라서 그 설교의 성패가 좌우된다. 이 사실은 나의 평생 설교할 때 마다 체험하여 온 바이다.” (pp. 170-71) 4. 박윤선 박사의 성경66권 주석 전질은 1,000 편의 ‘주옥설교집’이다.   “나의 주석에는 전질 가운데 1,000여 편의 설교가 들어 있다. 그것은 성경을 깨달은 나의 심령에 기쁨이 있고 생명의 약동이 있어서 그 깨달은 진리를 설교로 증거한 것들이다.” (p. 81)    “설교자들이 종종 체험하는 바이지만, 나도 언제나 설교를 하고 난 후에는 마음이 유쾌하고 신령한 기쁨이 임하곤 하였다. 나는 성경 주석을 집필하면서 그 말씀의 생명력을 여러가지로 체험하였고, 그 깨달은 바 진리를 설교로 작성하여 나의 주석에 많이(1,000 편 이상) 포함 시켰다.” (p. 161)    “1961년 1월에 서울 서대문 동산교회에 부임하여 3년 동안 목회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에 굳게 서는 교회를 이루게 되었다. 이 교회는 나의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위로와 사랑의 산실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 교회가 개척 교회이니 만큼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목회하는 동안 나 자신이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동산교회를 목회하면서 탈고한 성경주석은 15권인데, 이것을 3 권으로 편집하여 발행하였다.” (p. 109)    “나는 항상 성경을 묵상하면서 이제까지 살아왔고, 내 마음은 성경을 주석할 의욕으로 언제나 불이 붙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른 일을 하는 때에도 마음속에는 속히 책상으로 돌아가 성경 주석을 쓰고 싶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마음은 인간적인 생각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사명 때문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pp. 161-62)  →   정암은 성경66권을 성경 전권 주석집필 사명완수에 전심전력(全心全力)을 경주하였다. 언제나 성경묵상과 기도로 심령은 불붙고 있었다. 하나님이  정암에게 주신 이 사명감은 온 “인류를 상대하고 발행하는 것”이라고 까지 고백하였다.   “문서 사업은 귀하다. 글은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또 언제나 말한다. 그러니만큼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 있어서 문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서를 출판한다는 것은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다.” (p. 163)    “성경말씀과 관련된 글을 쓰는 이들과 이러한 책들을 발행하는 이들은 특수한 태도로 그 작업에 임해야 된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해야 되며, 또 온 세계 인류를 의식해야 된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책을 발간하려고 힘써야 하며, 또 그 책은 온 인류를 상대하고 발행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된다.” (p. 164)    5. 내가(방지일 목사) 59년가 본 박윤선 목사; ‘우리에게 있는 나다나엘’   “필자[방지일]는 박 목사님을 “형님”으로, 그는 필자를 “형제”로 부르기를 59년간, 긴 세월이 흘렀다. 필자는 박 형님을 우리에게 있는 “나다나엘”이라고 불러왔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에게는 간사함이 없다. 그는 주님이 찿으시는 참 이스라엘 사람임에 틀림없다.” (p. 113)    “주님께서는 박 형님이 항상 엎드려 있는 그 모습을 보셨음이 틀림없다. 그는 숭실전문학교 시절에는 새벽마다 교실에 가서 엎드려 살았고, 특별한 기간에는 우단(방수 처리가 되어 있는 천) 한 조각과 미숫가루  한 병을 준비해 가지고 산으로 갔었다. 평양 모란봉 위에 가재란 곳이 있다. 주님은 그 곳에 꿇어 엎드린 박윤선을 보셨을 것이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란 이름을 얻은 나다나엘처럼 그는 참으로 기도의 사람이었다.” (p.114)    “우리 시대의 중학교 학제는 5년이었는데, 영어 교과서는 뉴 크라운(New Crown)이었다. 박 형님은 그 교본을 1권부터 5권까지 전학년분을 모두 물 흐르듯 거침없이 내리 외우곤 했다. 우리는 그의 영어 암송을 들을 때마다 어떤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이나 휼륭한 명곡을 감상하는 것 이상으로 상쾌한 기분이 되곤 했다.” (p. 118)   →   59년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방지일 목사님의 이 고백은 천만금의 무게를 갖는다. 2014년 103세로 별세한 한국교회사(史)의 ‘산 증인’이신 방지일 목사님의 증언…   “기름을 짜자.” 건성으로 말고 나의 기름을 짜내는 것이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다. 한번은 박 형님이 미국에서 필자에게 엽서를 보냈다. 엽서에는 “之一아! 오늘 강당은 네 마지막 강단인 줄 알고 유언적 설교를 할 것이다.” 이 말 뿐이었다. 실로 간단하나 항상 하던 말이기에 깊이 새겨졌다.” (p. 133)    “목사는 강단이 없으면 죽은 목숨”… 따라서, 은퇴 목사.선교사는 영성관리가 초비상이다   “나는 박 목사님께 말씀하기를, “집필에만 전념하십시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였더니, 박 목사님이 말씀이,  “목사는 강단이 없으면 죽은 목숨”리라고 하면서 도리어 필자에게 교회 강단 소개를 요청하셨다. 참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했다.” (p. 137)  →   당시 방지일 목사님은 영등포교회 담임목사로서 박윤선 박사님을 초청하여 특별집회를 갖을 때, 박목사님은 ‘교회 강단 소개’를 요청. 방지일 목사님은 ‘중립 교회’를 소개하고자 할 즈음에 박윤선 박사는 서대문 동산교회에 부임하였다.    “필자가 (제주도에서) 돌아오자 박 목사님께서 찾아오셨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박목사님의 말씀이, “교회는 중립도 좋지만 목사는 소속이 없으면 치리회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되므로 그렇게 되면 안되요. 목사는 반드시 치리회에 소속이 되어야 해요”라고 하셨다. 이 말을 듣고 목회자를 가르치는 신학자로서의 귀한 교훈이라고 생각하였다.” (p. 138) →   실제로 이 말씀대로 박윤선 박사님은 일생 신학교 교수로서 매주일 강단을 지키셨다. 필자는 생각한다. 전세계 선교현장의 선교사도 반드시 치리회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선교사의 자기관리, 영성관리를 위한 ‘안전장치’이기 때문이다.    나가기(결론)    정암 박윤선 박사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한 한국교회의 최고의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총신대원 1학년때 박 목사님과의  만남 이후, 이듬해(1988년) 2월 ‘목회자와 기도생활’ 주제의 세미나(화평교회)에도 제일 앞자리에서 참석하였다. 많이 쇠약하신 박목사님은 마지막 시간에 의자에 앉으셔서 한국교회의 “...있을찌어다” 축도가 성경적인지를 깊이 말씀하셨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축도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하신 흔적이 분명하였다. 한 마디로 ‘있을찌어다’는 우리 말 사전에서 반명령어적 표현이므로 적당치 않으며 차라리 ‘축원하옵나이다’로 축도하는 것이 맞다는 견해를 제시하셨다. (그 당시 박목사님의 축도에 대한 소연구논문 발표는 합신교단의 핵심 목회자들과 교수들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그해 6월에 박목사님은 별세하시기 직전까지도 계속 진지하게 연구하시는 모습이 너무나 귀하고 귀하였다. (필자는 그때 박윤선 박사님의 생생한 가르침을 따라 지금도 ‘축원하옵나이다’가 더 성경적인 축도라고 믿는다. 예장 합동교단의 목회자들은 지금도“.. 찌어다” 축도”가 대세이다)     “신학은 성경을 교리적으로 사색하는 학문”이다. 물론 이것은 특수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적 학문이다. 따라서 신학의 근거와 규준(規準)은 성경 뿐이다.” (p. 95)   “나의 주석 저술의 동기는, 나 자신이 먼저 성경을 바로 깨닫고 깊이 안 후에 이 성경을 올바로 증거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성경대로 믿음을 가지도록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p. 160) →   정암은 그의 일생의 사명/과업인 주석저술의 동기도 먼저 ‘나 자신이 먼저 성경을 바로 깨닫고 깊이 알기’위함이라고 고백한다. 딤후2:15의 바울사도의 권면말씀 그대로다. 별세하시는 순간까지 배우고 연구하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직하게 사신 박윤선 목사님!    “교역자는 종교업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바쳐진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롬12:1). 종교업자가 성행하는 시대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죄에 빠지기 쉽다.” (p. 173)   “목사들이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그 일에 치중하여 주님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한 줄로 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심령으로는 계속 주님을 찾아야 하겠고, 언제나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져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p. 189)  할렐루야! 
    • 오피니언
    • 칼럼
    2022-06-07
  • 공직선거 후보자 공보물 발송 온‧오프라인 병행해야 한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끝났다. 이번 지방선거는 지난 총선과 대선 때 불거졌던 부정선거 논란은 사라졌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지난 선거와 달라진 투표절차, 사전투표소 변경사항 등 유권자에게 정확한 선거정보를 적극적이며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힘썼다.  전교회가 전복음을 전시민에게 전하여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깨끗한 도시를 만드는 것으로 목표로 하고 있는 세계성시화운동본부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협력으로 투표참여 및 공명선거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번 캠페인에서는 처음으로 투표참여를 호소하는 로고송을 제작해 발표했고, “참여와 공정으로 참 일꾼을 뽑읍시다”라는 슬로건에 따라 ‘참참밴드’를 구성해 홍보 버스킹도 진행했다. 사전투표는 20.62퍼센트로 역대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본 투표율이 낮아 전체 투표율은 50.9%로 지난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율 48.8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낮았다. 그만큼 대선과 총선에 비해 유권자들의 관심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낮은 투표율만큼이나 심각하게 검토해야 할 사안이 있는데, 유권자들에게 발송하는 엄청난 양의 선거공보물의 문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하면 이번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쓰인 후보자의 선거벽보를 모으면, 79만 부이고, 후보자의 선거 공보물을 모으면 5억 7천만 부라고 한다. 또한 투표용지는 3억여 장이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사용된 종이의 총량은 1만2853t이다. 종이 1t을 생산하기 위해 30년산 나무 17그루가 필요하다고 한다. 총 21만 그루가 이번 지방선거를 위해 잘려나갔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선거 공보물로 사용된 것이 92퍼센트에 해당한다.  기후 위기, 환경보호가 전 세계 국가의 과제인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탄소흡수원인 나무를 심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수십 년 된 나무들이 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공직선거의 선거 공보물을 제작하기 위해 잘려나간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기후위기를 대처하기 위해 전 세계 국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세워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구 온난화 대처와 환경보호를 위해서는 후보자의 선거공보물의 온‧오프라인화가 필요하다. 전체 유권자에게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 등으로 후보자의 선거공보 내용을 발송하고, 집에서 후보자의 선거 공보물을 직접 받아보기를 원하는 유권자는신청을 받아 보내주는 방식으로 선거 공보물 발송 규정을 개선해야 한다. 지구촌이 빠른 속도로 사막화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기후위기와 지구 온난화를 대처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선거문화를 개선해 줄 것을 기대한다. /목사·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 오피니언
    • 칼럼
    2022-06-07
  • 일상소묘
      작년에 여신협의 자문위원이신 한 분이 평창동 단독주택에서 송파동 아파트로 이사하시게 되어 제습기와 선풍기 등을 필요한 사람이 가지고 가길 바라셨다. 마침 개척교회를 하시는 여교역자인 황목사님을 소개했고 이사 당일 차량 운전을 하는 황목사님의 아들과 나, 이렇게 함께 셋이 방문했다. 황목사님이 개척교회를 한다는 소리를 들으신 자문위원께서는 주석이며 그릇이며 챙겨주시려고 애쓰셨다. 골목길이라 주차를 오래할 수 없어 급히 물건을 싣고 황목사님은 떠났다. 이사도우미들의 분주한 동선과 비워져가는 공간들을 바라보시며 43년 동안 사셨던 집을 떠나는 두 분의 심정은 어떠실까 궁금해서 여쭤보았다. 노구의 몸으로 허리가 아프셔서 식탁의자에 앉아 계시던 김목사님께서 살날이 얼마나 되겠냐며 이제 떠날 준비를 해야지 하시며 숨이 가쁘신지 한숨처럼 날숨을 뿜어내셨다. 앞에 앉으신 중년의 장로님이 출애굽 할 때의 분위기가 이렇지 않았을까 하시며 웃으신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감나무 잎사귀들의 춤들도 이젠 보지 못하실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며 뛰놀았을 잔디밭 마당도 다시 밟아보지 못하실 것이다. 이젠 꿈에서나 만나게 될 풍경일 것이다. 많은 짐 꾸러미들을 보며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이렇게도 많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자문위원님과 도와주시러 오신 몇몇 분들이 먼저 가족들과 송파로 떠나시고 이삿짐센터 직원들을 뒤로하고 큰따님과 함께 집을 나섰다. 함께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안전하고 무사한 이사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오는 버스에 올랐다. 시간은 모든 것을 바꿔 간다.   복음송의 가사처럼 이 세상은 영원한 집이 아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한 줄로 알 것이니라는 말씀들이 떠오른다. 사라지고 없어지고 변하는 것들에 마음을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다시 준비하며 부끄러움 없이 힘쓰며 살아야겠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뭐하다가 왔느냐고 물으실 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키며 살다 왔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나는 더이상 바랄 게 없겠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할지라도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처럼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동기가 사랑이길 기도한다. 우리보다 먼저 산 사람들이 들려 준 지혜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며 삶으로 살아내고 싶다. 코로나시대에 나름 또 다른 목회를 생각한다. 수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탁구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늘 만나는 가족들과 친척들과 친지들, 그리고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단체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친구들을 품고 기도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이 아닐까. 특별한 게 없다. 그저 섬겨 주고 필요를 나누고 들어 주고 시간을 내어주고 함께 있어주는 일이다.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행하려는 것뿐이다. 그저 다 보시고 다 아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목사·한국여신학자 협의회 공동대표  
    • 오피니언
    • 칼럼
    2022-06-06
  • 주의 기뻐하시고 선하신 뜻에 온유
      계명에 대한 지혜의 앎에 선, 주의 뜻 위해 행함의 사랑으로 믿음 견고케         산 자로서의 믿음을 위해 로마서 12장과 13장을 통해 사랑의 합당한 행함을 지혜로 찾게 하신다. 주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신 이유와 주 사랑과 이웃 사랑을 요구하신 의도와 연계하여 이를 발견한다. 지혜는 신본주의 신앙에 사랑의 아름다운 결과들이 나타날 수 있도록 말씀이 앎으로 믿음을 견고하게 하여 행함으로 주와 동행하게 견인하신다.   그리하여 주의 기뻐하시고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하신 그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앎을 행함으로 나타내게 하셨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하신 요구하심에 행함으로 응답하는 지체들의 겸손이다. 곧 죄인을 위해 대신 죄를 지고 죽는 제물의 구약문화를 들어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몫을 행케 하신다.   죄사함은 오직 말씀과 기도로 되기에 복음으로 더 많은 이들이 주께 돌이켜 한 우리 안에 들어오도록 선한 몫에 사랑을 밝히게 하셨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에 안다는 것은 믿음이 되고, 믿음이 있다는 것은 실천하는 힘이 되어, 성령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의 제자화로 확산임을 확증한다. 산 자로서 주의 것이 된 이들이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주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임을 믿음 안에 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주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리라”는 말씀대로 주를 사랑하는 일로 더욱 생명의 풍성함이다. 주를 사랑하는 일은 주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의 나라가 확장되어지는 일이며 주의 뜻을 이뤄가는 부르심의 몫이다. 곧 앎의 소중성은 넓은 영역으로 확장되어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고 지켜 구속함 받을 수 있는 선을 이뤄야 합당함임을 확증한다.   다시 말해서 새 생명을 입게 하는 이웃 사랑은 말씀과 기도로 이를 지켜 생명을 덧입게 하는 순복함의 온유이다. 온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순종이다. 곧 주의 뜻을 알고 이루어 가시는 섭리를 안 지혜로 주를 사랑함이 주의 나라가 회복되어지는 이웃 사랑임을 확증케 한다.   모든 사람이 주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함을 덧입어 한 우리 안에 있는 일이다. 곧 주를 사랑하여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 이루어 가심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그러기에 주의 뜻을 이루어가는 이웃 사랑의 섭리로 마귀의 일을 멸해 가심을 확증케 한다. 이를 통해 끝내 다른 신들을 진멸한 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안식과 영생을 이긴 자의 영혼들과 함께 누리는 경륜의 마침임을 발견하게 하셨다. 오직 창조주만이 다른 신을 멸하실 수 있는 절대자임을 알고 동행하게 하신 거룩한 사랑 실천이다.   그러므로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셨으며 너희는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명명하신 본질에 순복이다. 이 몫이 죄사함을 위한 복음의 나팔수로 다른 이들이 듣고 주를 좇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주의 백성으로 회복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온 집을 다 뒤져 찾음의 기쁨에 비유처럼 주의 백성으로 회복은 주의 뜻이며 먼저 거듭나게 하신 목적이다. 이웃을 사랑한 결과 사단에서 구속하신 주의 선하신 섭리이다. 더불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목적이다. 곧 주님은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종이기에 합당한 몫을 행함으로 사랑을 나타내는 여정이 되어야 함을 확증케 하신다. 이로 인한 율법의 완성이며 생명 얻게 하는 주의 뜻이기에 사랑으로 이뤄가는 경륜임을 확증하는 바이다./오이코스대학교 객원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  
    • 오피니언
    • 칼럼
    2022-06-06
  • 조은복 작가의 생-3
          조은복 작가의 "생-3 " 이라는 작품을 한국 고유의 한지를 압축 시킨 캔버스에 그린 그림인데 동물인 나비와 꽃이 핀 식물과 돌들을 표현하여 3 이라는 의미를 붙인 것 같다. 이들은 각기 이질감이 있는 대상들이지만 같은 공간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0절 에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다고 했다.이러한 만물 중에 가장 귀하게 지음을 받은 사람은 다른 피조물에 없는 영혼이 있어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 받은 것이다.결코 다른 동식물과 동등하게 취급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인생의 영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라 했다.(전 3:21) 물론 사람은 심판 후에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게 된다./ 정재규(미술평론가·대석교회 원로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2-06-06
  • 신발에 따른 문제점과 치료예방법(4)
      그럼 발에 문제가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첫 번째로 발의 볼이 넓은 사람부터 알아보자 발의 볼이 넓은 경우에 자기의 실제 발 크기보다 더 큰 신발을 신게 된다. 모든 구두바닥에는 길다란 허리쇠가 구두 뒷굽에서부터 앞쪽으로 들어가 있다. 이 허리쇠는 구두바닥이 아래로 가라앉지 않게 받쳐주고, 스프링처럼 탄력을 주기도 한다. 이 허리쇠가 앞쪽에서 끝나는 지점이 걸어다닐 때 구두 바닥이 구부러지는 곳이다. 발에서는 엄지발가락 뿌리의 관절 부위가 구부러지는 곳이다. 자기의 발 크기와 구두의 크기가 일치하면, 아무 문제가 안 생긴다. 그러나 발 길이에 비해서 구두가 더 길면, 구두의 구부러지는 곳이 엄지발가락 중간에 위치하게 되어, 엄지발가락 위가 헐게 된다. 또 걸을 때마다 엄지발가락 끝에 힘을 주게 되어, 엄지발가락 바닥 쪽에는 굳은살과 티눈이 생길 수 있고, 엄지발가락 뿌리관절이 굳어지는 등 여러 가지 발가락 변형의 원인이 된다.   두 번째로 장시간 서 있는 사람이다. 오래 걸어다니는 사람이나 오래 서있는 사람의 발은 발의 종아치나 횡아치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따라서 건강한 사람도 발의 종아치나 횡아치를 받쳐주는 패드를 깔창에 부착시키면, 이들 아치로 가는 스트레스가 줄어들기 때문에 발이 편안하고 덜 피곤하게 된다.   세 번째로 구두 뒤축이 한쪽만 닿는 사람이다. 구두 뒤축이 안쪽이나 바깥쪽으로 많이 닿는 사람이 있는데, 이분들은 발목이 안쪽이나 바깥쪽으로 휘어진 경우가 많다. 따라서 발목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 신발 안의 깔창 뒷꿈치 안쪽 또는 바깥쪽으로 말굽모양의 쐐기를 부착시키면 걸음걸이가 편안해진다.   네 번째로 평발이다. 발의 종아치가 어떤 원인으로 인해 아래쪽으로 무너진다면 발의 안쪽바닥이 땅바닥에 내려앉아 발바닥이 편평하게 되는데, 이렇게 편평한 발바닥을 가진 발을 쉽게 말해 평발이라 한다.   평발이 생기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고, 또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태어날 때부터 기형적으로 생기는 경우도 있고, 발뒤꿈치 뼈가 부러져서 그 후유증으로 생기는 경우도 있다. 류마티스 관절염이나 다른 관절염으로 인해서 발의 아치를 이루고 있는 뼈의 관절에 염증이 생기면, 뼈들을 연결하는 인대가 늘어나 헐렁헐렁해지고, 체중을 지탱하지 못하고 아치가 주저앉게 된다. 또 아치를 위로 잡아당겨주는 힘줄이 끊어져도 아치가 무너지면서 평발이 된다. 치료는 가라앉은 발의 종아치의 아래 부분을 패드를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다시 높여 주는 것이다. 이 패드는 단계적으로 높게 대주어야 하며, 처음부터 아주 높게 대주면 이 부분이 다시 압력을 받아 발바닥이 불편하고, 때로는 이 부위가 아프기도 한다. 조금씩 두께를 증가시켜야 한다. 발목이 바깥쪽으로 휘어진 것을 교정시켜 주기 위하여 신발 깔창 뒷꿈치 안쪽으로 쐐기모양의 패드를 대준다. 대개는 발의 형태에 맞게 특수한 깔창을 제작한다. 신의 깔창만으로 교정이 잘 안되는 경우에는 보조기구두를 이용하기도 한다. /한양대류마티스병원 관절재활의학과
    • 오피니언
    • 칼럼
    2022-06-06
  • 꿈 꾸는 요셉
      요셉은 야곱에게는 11번째, 라헬에게는 첫 번째 아들이다.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다른 형제들보다 더 사랑하여 귀한 채색옷을 입혔다. 요셉은 꿈쟁이 였다. 형들의 곡식단들이 요셉의 곡식단에 절을 하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절을 하는 꿈을 꾸고 17세에 애굽으로 팔려 가게 되었으나 이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하였다는 “형통”이 창세기 39장에 5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창 39: 2, 3, 5, 21, 23) 모함을 받아 감옥에 있을 때,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고,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고, 바로 왕이 꾼 꿈을 해석해주고 대비책도 알려준다. “파리한 일곱 암소와 살찐 일곱 암소, 충실한 일곱 이삭과 마른 일곱 이삭의 꿈은 칠년 동안 풍년이 들고 칠년 후 흉년이 온다. 거듭된 꿈은 하나님께서 속히 행하실 것이니 풍성할 때 관리를 잘해서 흉년 들 때를 대비해야 한다.” 바로 왕은 그 자리에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임명하고 다스리게 하였다.  요셉의 나이 삼십세 였다.  신약의 요셉도 꿈을 꾸었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잠에서 깨어 분부대로 그 아내를 데려오고, 꿈의 지시를 받아 애굽으로 피신하고, 헤롯의 죽음을 알려주고, 갈릴리지방 나사렛 동네에서 어린 예수님이 자라게 하셨다. (마 1:20~24, 2:13~23)  동방박사도 꿈을 꾸고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 2:12) 우리도 꿈을 꾼다. “내가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며 너희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노인들은 꿈을 꿀 것이다.”(욜 2:28, 행 2:17)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에 성령님이 오시었고  마라나타~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
    • 오피니언
    • 칼럼
    2022-06-0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