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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유옥합] '희년'오늘,다시
     이 소영       “오랫동안 꿈을 그리던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13년 전에 처음으로 페이스북을 시작하면서 적어 놓은 글귀이다. 20세기 프랑스 작가인 앙드레 지드(André Gide)가 남긴 명언이다. 그 당시 좋아했던 문구였는데 오랫동안 잊고 지내다 문득 생각이 났다. 이 글을 페이스북에 처음 남긴 그 날의 나를 기억해 보면, 지금 내가 ‘희년함께’라는 단체에서 간사로 일하고 있는 것이 꿈같이 여겨진다. 나는 왜 이런 글을 적었을까? 그때가 아마 나의 꿈의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저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이 신앙이라 믿었던 나에게 새로운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아는 지인의 소개로 여러 기독교 단체와 공동체를 알게 되었고, 성경의 희년 정신을 바탕으로 토지정의를 위한 실천운동을 하고 있는 ‘희년함께’를 만나게 되었다. 사적인 믿음에서 공적인 믿음(공동체, 하나님의 나라)으로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참여한 독서 모임에서 내 인생의 책들을 마주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예수원 설립자인 故 대천덕 신부의 《토지와 경제정의》와 19세기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진보와 빈곤》이었다. 희년 강의가 너무 좋아서 한 번도 빠지지 않으려, 한 구절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트에 적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성경을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공부하며 읽기 시작했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뜨겁게 공부하고 훈련하며 배움의 열정과 기쁨이 있던 시절이었다.   “나팔 소리가 울리고 또 울려서 드디어 듣는 사람의 가슴이 끓어오른다. 지금 세계에는 강한 정신과 고결한 노력이 필요하다. 아름다움은 감옥에 갇혀있고, 인생에서 피어나는 진선미를 철의 수레바퀴가 깔아뭉개고 있다.” - 헨리조지 《진보와 빈곤》 中 -   그 이후로 오랫동안 희년함께 회원의 자리에 머무르다 지난 2022년 2월부터 정식으로 희년함께 실무자의 자리로 오게 되었다. 희년함께/희년은행 사무와 행정을 담당하며 간사로 근무한 지 어느덧 2년이지나 두 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다. 올해는 특별히 13년 전에 처음 참여했던 독서 모임을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다. 지난 주부터 ‘헨리조지와 함께 기도하기’라는 주제로 희년함께 실무진뿐만 아니라 단체회원들도 함께 《진보와 빈곤》 책 읽기 모임을 시작했다. 13년 만에 인생의 책을 다시 만나니 처음 이 책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있다. 그동안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것들이 새로움과 깨달음으로 다시 채워지고 있다. 특별히 “왜 사회가 진보할수록 빈곤이 생기는가”에 대해서 사회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시 그 시대가 지닌 과거 경제사상을 깨뜨리고 자신의 논리를 펼쳐가는 헨리조지의 노력에서 뜨거운 열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책의 곳곳에서 헨리조지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멋진 글들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었다. 《진보와 빈곤》이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함께 읽고 대화하고 나의 인생 구절을 만나기도 하면서 서로의 기도가 되어 지금 우리 시대에서 제2의 헨리조지를 새롭게 그려가고 있다.   “땀의 가치는 땀 흘린 이에게, 땅의 가치는 모두에게”   올해는 특별히 희년함께가 출범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희년함께가 걸어온 역사를 돌아보고 다가오는 미래를 바라보며 새롭게 그려갈 그림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 내가 희년함께에서 일하고 있는 자리는 2년 전 하나님 품으로 떠난 남편이 오랫동안 담당했던 일이었다. 육체적인 고통을 견디며 아픈 몸에도 꾸준히 성실하게 자신의 숨이 다할 때까지 희년의 사역을 감당해온 남편의 자리였다. 그리고 내가 남편의 자리를 대신 이어받아 일하고 있는 ‘희년함께’는 40년 동안 희년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분들의 땀과 열정이 담겨 있는 곳이다. 이 땅의 문제 해결을 위해 어려운 숙제들을 잘 감당하며 풀어가고 어려운 위기 속에서도 서로를 이끌어주고 배려해주는 헨리조지의 마음을 닮은 사람들 틈에서, 올해부터 새로운 멤버로 합류하게 된 사역팀장과 함께, 단체의 역사를 배우고 책 모임을 하면서 새롭게 알아가며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희년함께의 사역 활동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가며 공부하는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다. 13년 전 내가 희년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마주했던 기쁨과 열정으로 한 구절 한 구절 놓치지 않으려 노트에 빼곡히 적었던 것처럼, 헨리조지가 가진 열정과 따뜻한 마음으로 희년함께가 땀 흘려 걸어왔던 길을 희년의 사람들과 함께 오늘도 힘차게 나아가려 한다. 천천히 오래 꼭꼭 씹으면서.. / 희년함께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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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9
  • [향유옥합] 구원은 하나님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4)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또한, 기복신앙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고난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공중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필연적인 단계이자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나아갈 힘을 주고, 우리가 해야 할일들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온전히 진리로 살아갈 motivation을 줍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모든 불순물들을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여, 오히려 그것을 제거하여 우리의 영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며, 우리 삶의 앞에 놓였던 길들을 정리해서 하나의 direction으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고난은 우리 인생에 대한 온전하고 명확한 분별력을 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한편, 사탄에 속한 사람들은 사탄의 일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많은 크리스천들도 이 일에 무지불식간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이 땅에서 기복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일에 동참하게 됨을 목도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재정을 추구하는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일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소통과 교제가 안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영적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악한 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속한 자들이라고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의 영적분별력의 부재로 인해, 또한 그들의 이 땅에서의 재정과 축복을 바라는 세상적 욕심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저 내가 축복을 받고 사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삶을 전적으로 걸고,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영적전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전쟁의 삶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저 기복적인 신앙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변화되어야 할 많은 영역들이 있고, 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진리로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일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그러한 진리와 그에 따른 변화를 말씀으로 선포하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길러내고 양육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실질적으로 세상의 그 땅으로 강력히 나아가서 변화를 일으킬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충만이 강력히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은 16:15)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이루어내야 하는 구원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재정구축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서 이 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으로부터 오는 축복보다는, 재정구축으로 오는 축복이 더욱 명확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을 통치하는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통치하게 되는 과정까지도, 주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하고 거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이것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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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는 형형색색의 고무풍선을 자전거에 매달고 달리는 이색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그의 형편을 알게 되면 충분히 그의 마음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에 온 인물로 지금은 법무부 위촉 사회 통합 이민자 멘토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쟁과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은 작가는 한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지난 3월 12일 KBS의 이웃집 챨스 프로그램에 출현하여 알려지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우리가 알듯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탈레반이 있는 나라로 특히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무역 센터 알카에다 테러공격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16년 전에 한국에 왔지만 20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동신교회 집사로 봉사하고 있다. 고통을 겪은 그는 이 풍선들처럼 서로 어우러져 사랑하고 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조국의 봄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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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에레모스 영성10] 광야를 닮은 소리(1)
    광야로 일컬어지는 곳을 연상할 때 떠올려지는 첫 이미지는 ‘거칠다’일 것이다. 영어표현 그대로 와일드(wildness)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약간의 의미를 덧붙여 야성(野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광야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거칠고 투박한 채로 남아 있기에 자연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문명이나 문화는 사람의 인위적 행위가 더해지게 된 결과물인데 이에 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추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창조의 세계 저 편의 암울한 파괴 현장을 목도하게도 한다.   구약 신명기는 ‘다듬지 않은 돌’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도록 하고 그러한 돌들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가르친다. 자연석에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인류의 문명사가 이어져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결코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 즉 하나님께 대한 충직한 신앙 그 자체를 성경은 ‘자연석’으로 상징하고자 했다. 곧 벧엘 야곱의 돌 그리고 요르단 강 길갈의 12개의 돌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돌, 변하지 말아야 할 돌 그래서 신앙은 그러한 돌과 함께 대대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나는 ‘광야를 닮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광야의 그 자연스러움, 꾸밈없음, 있는 그대로의 모습, 다소 거칠게 느껴지고 세련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말하면서 그 배경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과는 대조되는 순박한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우리는 광야의 풍미(風味)와 광야의 야성(野性)을 닮은 영성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이른바 광야의 소리가 주는 울림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울림을 전하고 싶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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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 성서와 생활 [22]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만찬의 영성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지성소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림을 받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주님이 구원의 영원성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성만찬을 행함으로 구원의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기를 원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주님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갓 죽임을 당한 것”계5:6같아야 한다.    예배의 현장 속에서 성만찬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들의 축복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태도에 있다.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 자리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세상에 속하여 죄의 유혹에 빠져 의심 많은 자들을 온전케 하는 것은 십자가를 기념할 때이다. 흔들리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안전한 구원의 피난처가 된다.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십자가의 구원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어린양이 있다. 계시록이 보여주는 놀라운 사실은 어린양에 대한 영성이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원한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십자가의 새로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에서 매일 밝히 보이는 사실이 되어야만 한다. 십자가를 잃어버린다면 영적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3:1십자가를 통해 항상 감동을 받는 믿음이라야 한다. 우리의 영과 마음과 생각 속에 십자가의 사역은 살아 역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항상 새로운 길이 되어야 한다. 항상 살아 있는 영원한 십자가의 계시를 통해 감동받는 영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영성이 있다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날마다 십자가의 이상을 새롭게 볼 때 죄에 대하여 영원히 죽은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죽는 믿음의 체험을 매일 새롭게 가지게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함께 함으로 그 피가 우리를 옛 창조의 근거를 제거해 버린다. 혈과 육이 제거되니 화를 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로써 성만찬의 예식은 예배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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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4) 나로 네 용모를 보게하라
    우리는 앞서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자 꽃이 피고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린다. 이를 영적으로 잘 깨달았다. 즉 장차 있을 환란과 주 재림과 천년왕국의 신비한 비밀들이다.    2:13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들이 구원의 열매를 내는 것은 무화과나무로서 푸른 무화과 열매를 내는 것이다. 또 포도 넝쿨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참 포도나무에 붙은 넝쿨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또 제자와 같은 신앙인 순교한 자들을 가리킨다.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재림하신 주께 찬송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 떠나자’는 ‘함께 떠나자’고 말씀하심과 같다. 앞의 10절에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는 신부에게 ’일어나서 함께 떠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단계를 거쳐 온 것이 13절이다. 본문에 ‘함께 떠나자'는 영적으로 계속해서 성도의 신앙을 진전시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계시한다. 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곳으로 주님과 함께 떠나자는 말씀이다.    2:14 바위틈과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 있는 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고 나로 네 음성을 듣게 하라. 네 음성은 달콤하고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오 나의 비둘기야'는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를 부르는 호칭이다. 여기서 신부 성도 될 자의 호칭이 바뀐 것은 신앙이 더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마10:16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했다. 즉 비둘기는 신부의 신앙 정절을 가리킨다. 주님이 사랑하는 신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정절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중심이 되면 ‘오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바위틈과 가파를 산 은밀한 곳에서는 깎아진 절벽 밑의 검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틈 은밀한 곳은 악한 들짐승과 바다의 짐승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써 안성맞춤이다. 이와 같은 피난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 자는 풀무 불이나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끝까지 신앙 정절을 지킨다. 우리의 피난처가 어디인가? 참 피난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라 하심은 신부의 용모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신부 얼굴에 면사포를 쓴 것과 같이 가리워서 오직 신랑 예수에게만 보여준다. 신랑 예수님만이 신부의 얼굴 위에 있는 베일을 벗겨서 보실 수 있다. 그럼 왜 신랑 예수님이 신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온몸으로 열매 맺고 이긴 것의 결과는 얼굴에 영광이 나타난다. 사람의 인격의 대표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신부의 용모를 보기 원하시는 것은 네 자신의 온몸(인격)이 변화된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도의 신앙 변화의 마디마디가 있었다.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던 때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던 때도 있었다.      앉은뱅이처럼 신앙의 침체기도 맞았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일으켜주셨다. 주님과 한 몸 되어 주님의 사랑을 채워주셨다. 계속하여 변화시키는 역사를 해주셨다. 이제 얼마나 변화됐는지 신부의 모습을 보려고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인격으로 변화된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또 주님은 신부의 음성 듣기를 원하신다. 음성은 사상을 의미한다. 주님 없이는 못산다고 울고불고하던 상사병이 고쳐진 것이다. 즉 인본적인 신앙에서 신본적인 신앙으로 바꿔진 것이다. 그 신부의 사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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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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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유옥합]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첫째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자 중에 작은 자’입니다.  신약 시대에 가장 뛰어난 사람을 꼽는다면 사도 바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에베소서 3장 8절을 통해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소개했습니다. 사도 바울만큼 혈통이 뛰어나고 많은 지식과 많은 헌신을 하는 사람은 당대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 중에 작은 자라고 소개했을까요. 그것은 다른 이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며 더 낫고 낮은 것을 따질 필요조차 없는, 오직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동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여기며 많은 헌신을 했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자기 열심과 자기 신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교성과 자기 열심과 신념이 무너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 어떤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을 때, 그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지극히 작은 자 중에 작은 자’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말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없이 아무 쓸모없는 존재임을 인식한 자는 주님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하나님 앞에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워지고 아주 작은 것들도 세세히 하나님께 묻게 됩니다. 사소한 것조차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묻고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무조건 순종하며 따르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되어 갑니다. 그렇게 지극히 작은 일도 주님의 뜻을 묻고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그에게 더 큰 것을 맡기십니다.     셋째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시는 더 큰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하나님은 소외된 자들, 가난한 자들, 핍박과 멸시를 받는 자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섬기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에 대해 사람들은 대부분은 장애인, 노숙인, 고아, 미혼모들을 꼽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작고, 더 멸시받고, 죽음의 위협에 까지 놓여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죽임을 당해 죽어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죽어가는 태아들입니다. 하루에도 수백여 명의 아기들이 죄 없이 낙태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부모에게 조차 버림받은 가난한 자들이며, 사회에서도 멸시를 받는 자들으며, 교회의 침묵 속에 외면을 받는 자들입니다.      태아 생명 존중 사역은 낙태 유경험자들을 정죄하는 사역이 아닙니다.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용서와 치유를 전하는 사역이며, 태아의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며 낙태를 예방하는 사역입니다. 많은 교회와 크리스천들은 낙태의 심각성과 태아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낙태’라는 핑계로 그동안 낙태 문제에 침묵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중에 작은 자 ‘태아’의 생명을 지키는 일은 가장 작은 하나님의 형상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섬기는 일인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아름다운 피켓 대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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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1-30
  • [당신의 뇌] 뇌를 알면 기억이 보인다(4)
    군 생활한 사람은 군번을 자꾸 외우다 보니 잊지 않고 장기기억이 된다. 주민등록번호도 늘 외우다 보니 장기기억이 된다. 이러한 장기기억은 측두엽의 기능이다.   장기기억 중 절차기억은 암묵기억, 신체기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릴 때 배운 자전거 타는 법이나 수영하는 방법 자동차 운전, 악기 연주, 피아노 치는 것 등은 몸으로 기억되어 5년, 10년의 공백이 있어도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다.   몸으로 하는 기억을 절차기억이라고 말한다. 시험공부, 수학공식이나 화학기호를 외울 때는 지식(머리)으로 기억하는 느낌이 드는데, 이러한 것은 서술기억 또는 외현기억이라고 해서 장기기억에 저장한다. 기억의 뇌인 해마의 신경세포가 감소하면 기억장애가 시작되고 치매의병이 진행될 수 있으므로 중·장년기에 있어서는 더욱더 운동이나 충분한 수면으로 뇌를 보호하는 일이 중요하다. 결국 기억은 뇌로 하는 것이다.   장기기억은 측두엽의 기능이다. 장기기억 중 절차기억은 암묵기억, 신체기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릴 때 배운 자전거 타는 법이나 수영하는 방법, 자동차 운전, 악기연주, 피아노 치는 것 등은 몸으로 기억되어 5년, 10년의 공백이 있어도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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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9
  • [변두리 소수자13] 바깥 뜰 지성소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과 중동, 유럽의 특정 지역을 ‘성지’(聖地, Holy Land)라 여긴다. 그런데 이는 ‘거룩한 터’라는 뜻의 ‘성지’(聖址, Holy Place)가 우리말에서 같은 발음이다 보니, 비슷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즉, 거룩한 ‘곳’을 가리킨 성지(聖址, Holy Site)는 ‘예수님의 생애와 직접 관련된 곳’만을 지칭했었다. 그런데 성경과 기독교의 역사,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관련된 모든 지역이 ‘성지(聖地 Holy Land)’가 된 것이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은 그래서 거룩한 곳을 '성역’(聖域)이라 구분했다.   하나님은 사람과 만나는 장소를 거룩하게 구별해 주셨었다. 대제사장과 일년에 한 번 만나는 지성소(Holy of Holies), 하나님과 제사장이 만나는 성소(Holy Place),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안 뜰(Court of Israelites), 그리고, 이방인들의 바깥 뜰(Court of Gentiles)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 막힘을 없애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신분과 절차와 장소의 구분이 없어졌다. 우리를 직접 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집트의 동쪽과 시내 반도의 서쪽에 ‘시내(Sinai),’ 혹은, ‘호렙(Horeb)’이라는 산이 있다. 몇 해 전부터는 고고학자들 중에 사우디아라비아 안에 있는 ‘아발 마클라(Jabal Maqla)’가 성경의 그 산이라고 주장하고, 그러한 내용의 <떨기나무>라는 책도 출판되었다. 하지만 주류 유대교와 기독교계에서는 그동안 알고 있던 산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소명과 십계명 돌판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만난 곳으로 믿는다. 또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고 싶어 하는 성지이기도 하다.   ◇시내산   그곳을 가려면 카이로에 도착 한 후, 다음날 아침에 출발하여, 차 편으로 반나절 정도를 이동하게 된다. 저녁에 그 산 아랫마을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하고 취침한다. 이튿날 새벽 2시 즈음에 등정을 시작하는데, 혼자라면 더 빠르게 올라 갈 수도 있겠지만, 보통 3시간 정도를 잡는다. 굳이 그렇게 어두운 새벽에 출발하는 이유는 일출 전에 도착하기 위해서이다. 성지 ‘순례’이기보다, 명소 ‘관광’이라 할만하다.   그 곳을 재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이집트에 도착 한 후부터 갑자기 마음이 공허하며 답답해졌다. 배정된 숙소에서 합숙자와 인사를 나눈 후, 나는 밤새도록 기도를 했다. “주님… 무슨 일이지요?” 잠을 설치다가 일어났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숙소를 나서며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교회와 가정의 형편도 좋고, 아무 불안함도 없는데,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마음이 힘듭니다.”   어두움 속에 가파른 길을 오르는 동안, 나는 아무와도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산 위에 모세와 하나님이 만난 곳을 기념하여 지은 판자집을 생각하며 기도했다. “하나님, 거기서 뵙지요…. 주님만 만나고 싶습니다.” 산 위에 도착해 보니, 어젯밤에 미리 와 있던 사람들과 계속 올라오는 이들이 다함께 모여 해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지나 비탈 언덕의 뒤로 돌아, 판자집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 그런데, 문이 잠겨 있다니! 때마침 떠오르는 해를 보는 사람들의 탄성 소리가 들렸다. 햇빛 때문에 더 진해진 그늘 속에서 나의 마음은 처절한 듯 했다. 거룩한 만남을 기대했던 ‘성지’의 잠긴 문을 두드리며 “아버지! 아버지!” 외치며 통곡했다.   잠시 후, 사람들이 하산하기 위해 다가오기 시작할 때, 나는 얼굴을 닦으며 집의 다른 편으로 피했다. 그리고 곧 나도 그들과 함께 내려 걷기 시작했다. 내 마음은 답답하지는 않지만, 평안해지지도 않았다. 허탈한 마음에 “하나님, 하나님…”만 되풀이 하며, 터벅터벅, 한 발 한 발 내어 던질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공허하던 가슴에 너무 분명한 음성이 채워지더니, 순식간에 갑자기 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높은 산의 가파른 길에서, 나는 하마터면 튀어올라 전속력으로 질주 할 뻔 했다. 너무 생생했다. “네가 나를 그렇게 사모하는 마음이 내가 너와 함께하는 증거이니라.”   나는 그 날 이후, 누가, 언제, 어디에 있든지, 그 곳이 성역(sacred site)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성지의 역사성과 가치를 믿지만,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모하는 간절함이 더 소중해졌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 8:17).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 (요 4:23) /목사·새빛다문화센터장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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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6
  •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
    “하나님의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삼상7:2) “여호와의 궤는 언덕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 두고 오랫동안 안치되어 있었다.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 이스라엘 온 족속은 모두 야훼께로 마음을 돌렸다.”(공동번역)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온다. 시간이 쌓이며 역사가 이루워지며 일직선으로 흘러간다.  사람의 일생도 태어나고 장성하고 생의 끝자락에 서게 된다.  지나온 인생을 회고하며 우리는 그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스라엘은 역사의 고비마다 뒤를 돌아볼 줄 알았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온 족속을 미스바에 모이게 하고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신을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모든 백성이 종일 금식하고 회개하며 온전한 번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큰 우레를 발하여 블레셋을 패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세우고 그곳을 ‘에벤에셀’이라 불렀다.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라는 뜻이고,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라는 의미이다.  삶의 고비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에벤에셀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셔서 도와주고 힘이 되어 주심을 믿고 의지함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가 사는 날 동안에 언제나, 항상 동행해 주실 것을 믿으며 고백하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든든한 성벽일까.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면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시며 자녀 삼아 주신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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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4
  • [향유옥합] 향기로운 회초리
      애들이 모두 다 자라서 지금은 저들이 나의 대화상대가 되어주고, 가끔 매니저 노릇도 해준다. 나름대로 힘을 들여 애를 쓰던 지난날들을 돌아 볼 때마다 깨닫는 게 있다. 엄마인 내가 아이에게 쏟았던 그 정성들은 그간 나에게 쏟아주신 하나님의 정성에서 비롯했음을.   요즘 내가 나가고 있는 교회에 새로운 신자들이 꽤 많이 등록해 오고 있다. 그 중 한사람은 과거에 나와 매우 가깝게 지내던 친구이다. 그 당시 이 친구를 전도해서 내가 출석하던 교회로 안내했고,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나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는 부득이한 일이 생기면서 나는 집 가까운 교회로 옮기게 됐고, 그와도 헤어지게 됐다. 그 후 그는 다른 교회를 전전하다 믿음이 식어졌고, 나도 그를 돌보지 못하고 말았는데,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고 우리교회에서 만나자는 나의 권고를 받아준 그가 곧바로 우리 교회를 찾아왔다.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장거리 운전을 괘념치 않고 줄곧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그 친구의 예쁜 믿음이 지속되도록 우리 하나님께서 팔 벌려 저를 축복해주십사 하고 요즘 기도한다. 마치 나 자신이 피난길에서 등짐 봇짐에 떠밀려 손잡고 있던 자식을 놓친 엄마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영적자식을 외면하고만 이 못난 부모를 잊지 않고, 지난 인연을 다시 잇고자 찾아온 그녀가 참 귀하다.   말씀과 기도가 부족해 죽어가던 한 영혼을 되살리기 위해 애쓰시는 우리 하나님의 애틋한 사랑과 정성이 그녀를 나 있는 곳으로 돌려주셨다고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에 굶주려 있던 그녀의 절박함에 감동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의 등을 내 쪽으로 한껏 떠밀어 주셨다는 생각도 한다. 나도 이제 그런 하나님의 사람 사랑, 그녀의 하나님 사랑을 새롭게 배우고 실천하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와의 재회로 인해 내게는 생각지 못한 즐거움이 생겨났다.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일이 전보다 몇 배 달가워졌기 때문이다. 한 주 동안 그는 뭘 하며 지냈을까? 오늘은 어떤 모습으로 교회에 나올까? 그런 호기심과 기대감을 갖고 교회를 가기 때문이다.   교우들이 날더러 얼굴모습이 무척 좋아졌다고 말한다. 나는 서슴없이 이 친구덕분이라고 말한다. 여러 해의 방황 끝에 그립던 엄마와의 만남을 가진 이 친구도 외모 뿐 아니라 마음까지 날로 해맑아 진다.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 교회 갈 것만 생각하면 너무 기뻐요. 말씀 듣는 것도 행복하고, 지금 모든 게 너무나 감사해요!”   그간 의례적인 예배를 드리곤 하던 내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향기로운 회초리를 휘두르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보다 더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회개로 씻기워진 맑은 행복감이 내 속에 흐른다. 예배 도중 들려오는 그녀의 ‘아멘~’ 소리는 나를 깜짝 놀라게 하고 흐뭇하게 만든다.   그녀의 믿음으로 인해 내 믿음이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 늦둥이를 낳고서 어쩌다 손 놓은 후 뜻밖의 상봉으로 누리는 이 기쁨, 이 모든 기쁨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한 사람을 끝까지 되찾으시고 건져내시는 우리 하나님의 치열한 정성을 본받아, 나도 손놓아버린 영혼들을 정성껏 찾아다니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짐한다. /전 나사렛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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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3
  • 성서와 생활[12] 그리스도인의 영성-연합의 영성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기초이며 출발은 주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롬6:5 말씀에 근거한다.주님의 죽으심과 연합한 자임을 믿는 믿음에서 출발할 수 있는 성령의 보증과 도우심이 필요하다. 육에 속한 것은 십자가로 처리되었음을 아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오직 주님의 부활의 생명안에서 역사하는 힘으로 만이 주님을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분리가 에덴 동산에서의 원죄의 출발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믿음은 주님과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임을 인지하는 것이다. 머리되신 주님을 통해 각 지체들은 한 몸을 이루는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라게 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골로새서2장 9절이 이 사실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독단적인 믿음이 아무리 큰 능력을 소유해도 주님의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지체의 연합을 통해서만이 그리스도의 충만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시편에서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의 선함’을 노래하고 있다. 형제가 연합하는 결과는 영생을 명하시게 되는 놀라운 하나님께 이르는 차원이 되게 하신다, 성도가 연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도 놀라운 하나님의 회복이 숨겨있다.     성도의 연합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통로이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대적을 물리치는 승리가 되어준다. 연합의 길을 간다는 것은 매우 힘들지만 주님께서 그의 영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능히 이루실 것이다. 이를 위해 사도바울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 매우 수고했음을 알 수 있다. 갈2:2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그리스도를 알게한다.    하나님과 연합한 히스기야에 관한 기록을 통해 우리가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게 한다.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왕하18:7 그 결과는 하나님께 그와 함께 하시고 히스기야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된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연합하였다. 이사야선지자는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의 연합을 위해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킴으로 그의 성산으로 인도하신다.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으로 하나의 연합의 길을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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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3
  • 이기선작가의 「버려지지 않는 기도-긍휼」
       이기선작가의 「버려지지 않는 기도-긍휼」도 같은 상을 받은 작품인데,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한 기도의 편린들이 여러 모양으로 각색 되고 있다. 작가는 이를 영적으로 추상적으로 형상 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 기도한 것들이 헛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모두를 기억하고 계시며 결코 지나쳐 버리지 않으시고 때가 되면 이를 이루어 주심을 작가는 체득한 것이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 하셨다. 물론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거나 자신의 욕심으로 구하는 것은 들어주지 않으시겠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 거두실 일이라면 틀림없이 이루어 주시니 이를 믿고 기다리면 반드시 이루어 주심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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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3
  • [당신의 뇌] 뇌를 알면 기억이 보인다(3)
    해마는 생존에 필요한 정보인가 아닌가를 판단해서 생존에 필요한 것만 기억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버린다. 그래서 공부를 할 때 이것이 생존에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공부는 훨씬 쉬워지는 것이다.   해마는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 옆에 있기 때문에 서로 긴밀한 교류를 하고 있다. 좋아하는 것을 판단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편도체이다.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든가, 연애를 하거나, 좋아하는 그림을 그린다든가 하는 일은 이른바 정서교육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해마는 공간정보에 의해 쉽게 자극을 받는다. 해마는 머릿속으로 상상만 해도 공간자극을 받는다. 방 한쪽 구석으로 옮겨지는 것만으로도 해마는 자극을 받는다. 그래서 여행을 많이 하게 되는 것만큼 해마에 좋은 자극은 없다.   뇌는 자극을 원한다. 아무런 자극이 없는 방에 2~3일 동안 방치하면 뇌는 환각이나 환청을 만들어낸다. 또한 항상 고정된 시각으로 같은 것을 보는 일도 뇌는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새로운 자극이 없는 곳에서 살기 어렵다. 뇌는 보는 것으로, 자극이 있는 쪽으로 향하기때문이다.    인간은 어제 먹은 것을 잊어버려도 오래 전에 기억으로 축적되어 있는 추억은 잊지 않는다. 예컨대 자주 가는 거래처의 번호는 자기도 모르게 외워져 장기기억이 된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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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2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4) 여인들중의 가장 어여쁜 자야
      재림하실 예수와 입맞춘 자는 아내되는 영광으로 행복       정오에 양 떼를 먹이고 안식하는 그곳으로 가면 재림 예수를 만나리라.  1:8 오 너 여자들 중에서 가장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가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네 염소 새끼들을 먹이라. 모든성도들 가운데 재림하실 예수님의 신부 되는 자가 가장 어여쁜 자이다. ‘여자들 중에서’는 ‘예루살렘의 딸들’과 ‘내 어머니의 자녀들’이 포함된다.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가’라 함은 무엇인가? 이는 양떼를 먹이는 곳을 찾지 못했으면 역으로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양들은 목자인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가기 때문에 양떼를 따라가면 된다. 어떻게 하는가? 이는 내 지혜와 내 힘으로가 아니다. 반드시 주님의 말씀이 내게 주어져야 한다. 또 그 말씀을 믿어야 한다. 또 주님이 따라가게 해 주셔야 한다. 그러나 오라비의 포도원 지기로 매여 있으면 이렇게 따라갈 수가 없다. 그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먼저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된다. 그 다음은 목자들의 장막들 곁에서 네 염소새끼들을 먹이라고 했다. ‘네 염소 새끼들을 먹이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하신후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먹이라”고 하셨다. 그에게 주의 일을 하라는 것이다. 내 양들을 먹이라. 그러면 최종적으로 순교하리라고 하셨다. 내 양들을 먹이지 못하면 순교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주님의 심정을 알려면 주님이 하셨던 일을 해보아야 하리라.    1:9 오 내 사랑아, 내가 너를 파라오의 병거의 준마 무리에 비교하였노라. 재림하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자, 신부의 신앙으로 세워지길 사모하는 자를 가리켜 8절에 '오 너 여자들중에서 가장 어여쁜 자야'라고 하셨다. 9절에는 이러한 자를 예수께서 파라오의 병거의 준마에 비교하신다. 이집트에서 가장훌륭한 말은 파라오가 타는 병거의 말이다. 말의 입장에서는 이집트의 최고 높은 파라오를 태우는 것이 가장 영광되고 복된 것이리라. 파라오의 준마는 그 영광으로 인해 더 힘 있고 용맹스럽게 천리마같이 달린다. 이와같이 재림하실 예수님과 입맞춘 자는 그분의 아내가 되는 영광으로 인하여 기쁘고 행복하다. 그래서 파라오의 준마보다 더 빨리 달리되 지치지 않는다. 세상의 영광인 파라오의 영광보다 하늘나라의 영광인 재림하실 예수님의 영광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애굽 사람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기를 더 많이 낳았다. 왜 그런가? 비록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노예생활 이지만 하나님이 더욱 뜨겁게 사랑하게 했기 때문이다. 고통도 피곤도 다 녹아지고 애굽사람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아기를 많이 낳은 것이다.      1:10 네 두 뺨은 보석 줄로, 네 목은 금 목걸이로 아름답도다. 신랑 예수님의 아내가 될 여인의 두 뺨에 보석 줄같이 흘러내려져 있는 것은 바로 긴 머리카락이다. 이는 그리스도 신부의 영적인 모습을 말씀한다. 두 뺨에 길게 흘러 내려져 아름답다. 주께서 신부성도의 머리카락을 보석 줄같이 아름답게 보신다. 왜 그런가? 머리카락은 지혜를 상징한다. 재림하실 예수가 주실 행복과 영화를 깨닫고 기뻐하고 있는 네 모습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재림하실 예수님을 깨닫는 지혜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어떤 좋은 것도 다 초월하고 오직 그분이 주시는 행복과 영광으로만 기뻐하는 네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구나. 이렇게 주님께서 칭찬하신다. 목은 목숨을 상징한다. 신부성도가 살아가고 있는 목숨은 금 면류관을 받는 순교 신앙이다. 그들은 장차의 순교를 아주 기쁘게 여기며 살고 있다. 주께서 그런 성도의 중심을 보시고 참으로 “네 목은 금목걸이로 아름답구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들의 목숨이 바로 이와같이 되자/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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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7
  • 연초부터 연말까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신 11:12) 여호와께서 돌보시는 땅에 사는 것이 축복이다.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는 자가 행복하다.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에서 연초부터 연말까지 거한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이며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감사는 행복의 뿌리이며, 감사하므로 행복이 쌓인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더 많아진다.  감사는 기적과 축복을 가져온다. 누가복음에 나병 환자를 고쳐주신 이야기가 있다.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 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 17:12~19) 나병이 고침을 받은 것 이상의 복이 영혼 구원의 축복이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임하는 하늘의 곱셈법 축복이다.  자녀를 길러본 부모들은 다 안다.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어도 자녀의 목소리를 구분한다.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아듣고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다. 하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이심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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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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