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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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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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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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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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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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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심을 기뻐함으로 각종 아름다운 꽃들을 나열하여 축하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이요 미래의 소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토록 주님의 부활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가질 수 있는 참 소망인 것이다. 여기의 십자가도 피 묻은 십자가가 아니라 황금색의 십자가로 표현한 것이 승리의 상징으로 잘 부합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 작가는 재치 있고 활달한 터치를 구사하여 감동을 주는데 이는 마치 누가복음 24장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동행하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들의 집에 가서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하는 장면과 유사한 기쁨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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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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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년 국내외교회의 전망] 기후위기 해결과 평화위한 운동 활발
       WCC, 기후정의 위원회 신설로 신학적·실천적 모색 진행중 세계 각지서 일어나는 전쟁과 폭력에 관한 교회의 입장 전해야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열었던 2023년을 보내고 다시 소망 가운데 새해를 맞는다. 그러나 발발 2년을 넘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전쟁으로 세계는 양분된 가운데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하고 있다. 고통당하는 이들의 눈물과 아픔의 소식을 들으며 맞는 2024년에 이 땅의 교회는 더 많은 기도와 소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 11차 총회(2022)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와 실행위원회는 2023년 6월 스위스 제네바, 2023년 11월 나이지리아 아부자에서 모여 구체적인 정책과 조직 구성을 결정하였다. 두 회의의 논의를 기반으로 2024년에 세계교회가 기도하고 소망하는 방향을 공유한다. 한국교회가 같은 믿음과 소망으로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기 바라는 마음이다.   기후위기 시대의 교회    2022년 11차 총회에서 제안되어 2023년 6월 중앙위원회에서 통과된 새로운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신설된 “기후정의와 지속가능한 발전 위원회”(Commission of the Churches on Climate Justice and Sustainable Development)는 현재의 기후위기를 정의의 관점에서 논의하고 교회의 대응을 신학적, 실천적으로 모색할 것이다. 중앙아메리카 성공회 대주교인 훌리오 머레이(Julio E. Murray) 위원장과 회원교회에서 추천한 34명의 위원들로 조직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 역사에서 신앙과 직제위원회나 삶과 봉사위원회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기후정의와 지속가능한 발전위원회의 신설은 세계교회가 기후위기 시대를 얼마나 심각하게 보는지 알 수 있다.    새해부터 활동을 시작하는 이 위원회는 세계교회는 기후위기를 하나님의 공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창조세계를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교회의 사명과 실천 방향을 보여줄 것이다. 위원회는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명칭을 정했고, 관련 단체들과 협력하고 있다. 또한 2023년 11월 열린 유엔 기후위기협약당사국회의(COP28)에 참가한 정부 대표들에게 화석연료 사용과 그로 인한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구체적 행동을 촉구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신앙공동체로서 교회의 사명은 전 인류가 처한 기후위기를 창조세계의 위기로 받아들이며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실천하는 것이다.   폭력에 반대하는 교회    지구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하인리히 스트롬 세계교회협의회 의장은 실행위원회에서 이러한 전쟁의 결과를 지적하였다. 그는 “지구적인 경제위기와 불의, 전쟁으로 상처 입은 인류를 더욱 위태롭게 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의 결과로 나타나는 극심한 양극화”라고 지적하였다. 갈등하고 대립하는 진영의 어느 한 쪽에 서게 될 때 전체를 보지 못하고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교회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평화를 외치고 각자의 자리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한 걸음 더 나가 폭력에 반대하는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2023년 6월,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회는 네 개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한반도 화해와 평화를 위한 성명서”를 비롯하여 “유엔 인권선언 75주년 성명서”, “인공지능 개발 규제를 위한 성명서”, “필리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성명서”이다. 인공지능 개발 규제에 관한 성명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개 모두 전쟁과 폭력에 관한 교회의 반대 입장을 천명한 것이다. 같은 해 11월, 실행위원회 역시 네 개의 성명서를 채택하였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전쟁에 대하여”, “나이지리아, 아프리카 지역 상황에 대하여”,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결과에 대하여”, “기후정의를 위한 COP28 책임에 대하여”이다. 성명서들은 현재 인류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보여준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전쟁에 대한 성명서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주신 생명과 존엄성을 존중할 것”과 회원교회와 에큐메니칼 동역자들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정의와 평화,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것”을 요청하였다. 성명서들의 주제를 단순하게 평화로 해석할 수 있지만, 수동적으로 들린다. 이제 교회는 모든 종류의 폭력에 단호한 반대 입장을 보여야 할 것이다. 개인 간의 폭력도 용납할 수 없는 심각한 범죄이지만 국가 차원의 폭력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근본적으로 파괴한다는 점에서 묵과할 수 없는 불의이다. 참혹한 전쟁의 현장에서 어린이와 여성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약자들을 지키는 길은 구호와 치료를 넘어 폭력의 발생을 저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을 넘어 거부하고 파괴하는 상황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단호하고 분명하게 “안 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다시 정의와 화해, 일치의 순례로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는 우울한 소식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소망을 전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 제리 필레이 세계교회협의회 총무는 실행위원회에서 교회의 사명을 이렇게 호소하였다. “세상의 모든 격동과 혼란 속에서 우리는 낙담하고 소망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람과 피조물들에게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지속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라마에서 통곡하는 라헬에게 다음과 같이 소망을 전했다.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17).   지금 세계 여러 곳에서 기대와 소망보다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새해를 맞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소망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와 함께 하나님의 정의를 공포하고, 화해와 일치를 통하여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어가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한다./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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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30
  • [변두리 소수자11] 폭탄과 씨앗
      한국으로 이주한 외국인들이 약 5-6%가 된 때부터, 나는 한국사회 이주민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제 1년여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최근 100여일동안 그들을 위한 가을학기 강의들을 진행했다.   미래의 한국사회가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발전하려면 늘어나고 있는 이민자들의 마음이 건강한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민자와 소수자의 경험과 교육, 혜택을 나누고자 한 나의 시도가 적절했음을 다시 확신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2023년도의 활동평가와 2024년도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그동안 개인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위해 공부하며, 필요를 예비하려고 한다. 주변에서는 ‘이전의 선교사역을 할 때처럼 후원과 지원이 없는데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한다. 하지만 이 일이 하나님 나라에, 한국에, 그리고 이민 소수자들에게도 중요한 일로 나는 믿는다. 특히 이민 생활과 더불어, 사역에서 유별났던 아픔, 기쁨으로 얻은 경험들과 배움들이 나만의 고유한 재료인 듯하다.   지난 학기동안 여러 민족을 방문하고 강의를 하면서, 개인적인 부족함과 안타까운 현상들, 그리고 아쉬운 상황들을 실감했다. 우선, 개인적으로 전문적 지식의 한계가 사역에 대한 갈망으로 덮여 있었던 것이 부끄럽다. ‘블루오션’이라고 볼만한 새로운 분야에 충분한 자료가 아직 없다는 변명의 여지가 있기는 하다.   한국은 오랜 동안 단일문화(monoculturalism)에 익숙해 있었다. 차별과 배제(differential exclusion)는 많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동화(assimilation)로의 과정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과거의 독일과 일본이 그랬듯이 이민자의 영주를 막고,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자연스러웠던 사회가 한국이었다. 다수자와 합류하지 않거나, 대중 유행 기류에 편승하지 않거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면 왕따가 되거나, 유별난 입장이 되던 사회이다.   가끔은 ‘한국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결국 좋은 시민이 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류의 매력이 문화화(acculturation) 과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주자가 자신들의 민족성과 정체성 대신 한국인으로 동화(assimilation) 되거나, 한국의 제도와 시민화(incorporation)가 되게 할 수는 없다.   정치인들은 한류에 대한 자부심은 인지하겠지만, 한류 현상이 정치 수준과 상관없는 젊은 세대의 세계관과 시민의식 때문임을 모르는 것 같다. 높은 국민 수준과 새 세대의 의식이 미래 한국의 준비된 터전이다. 이민에 관계된 입법과 행정, 그리고, 집행이 모두 엇박자인 현실을 당국자들은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정부는 인권과 너그러운 포용 정책으로 함께 잘 살아가는 사회로 이끌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민 정책을 주도하는 목적으로 연구된 계획이기 보다,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상황들에 대응하는 정책들로 보인다.   예를 들면, 국내의 높은 임금 때문에 부족해진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유입된 외국인들에게도 국내인과 같은 임금을 지불하자는 ‘인권’ 주장은, 해결하려던 문제의 본질과 이치를 망각한 것과 같다. 그들이 내국인들과 같은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다면, 다음 단계의 요구와 함께 불만을 마음에 키우지 않겠는가?   이주자의 건강한 마음에서부터 새로운 사회로의 건전한 시작점이 갖춰진다. 개인의 정체성 정립, 그 정서의 조절, 즉, ‘혼의 자리 바로 매김’이 절실히 필요하다. 개인들과 가족, 그리고, 한국 국민들과의 관계에서 싹트고, 자라고 있는 마음을 주시해야 한다. 긍정적인 생명의 씨앗이 자라고 있거나, 아니면, 부정적인 폭탄이 제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99% 가량을 투자하고 있는 언어와 문화, 교육보다 시급한 문제이다.   타민족 이주자들에게 복지 혜택만 많이 베풀어 주면, 좋은 시민으로 동화 될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유럽의 각국들이 ‘다문화 정책’의 실패를 자인했다. 캐머런 영국 총리는 “영국은 서구적 가치를 거부하는 민족적 혹은 종교적 소수 집단에 대해 불접촉 관용정책을 써왔지만 이 정책은 실패했다”고 했다. 또한 메르켈 독일 총리는 “’우리는 단순히 같이 살며, 서로 행복하면 된다’는 식의 다문화적 접근을 취해왔지만, 이것은 실패했다. 완전히 실패했다. 다문화주의 정책이 무슬림 양성의 온실이 되었다”고 했다. 또 “내 대답은 확실하다. 다문화주의 정책은 실패했다”고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비난을 예상하며 발표했다.   정책이 현상을 주도하지 못하고, 그들의 요구에 대응하는 정도로는 해결 될 수 없는 문제이다. 미국은 오래 전부터, 더 긴 세월동안, 더 아량 있는 이민 정책들을 실행해 왔다. 그런 미국의 현재를 보면 알 수 있다. 한국 안에 이주자들의 마음 속에 ‘폭탄’보다 ‘생명’의 씨앗이 자라고 있기를 바란다.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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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30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 이는 솔로몬의 노래라
      솔로몬이 신부의 자리에서 신랑인 예수를 사랑하며 노래  본인이 본지의 “성경과 신앙” 칼럼을 끝낸 후 독자 여러분들과 잠시 소원했다. 그런데 이 ‘아가서 강해’란을 계기로 다시 만나니 참으로 기쁘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또 본지의 직원 여러분들, 특히 편집국장님의 큰사랑과 배려이다, 진실로 감사드리는 바이다. 아가서는 솔로몬의 노래이다(1장1절). 히브리 원문 ‘쉬르 하쉬림’이니 ‘노래중의 노래’라는 뜻이다. 하나님 지혜로 충만한 솔로몬은 1,005편의 많은 노래들을 불렀다(왕상4:32). 이 노래들 중에서 가장 깊은 영감과 신비함을 담고 있는 것이 아가서이다. 일반적으로 솔로몬이 결혼한 역사적 사실의 모형으로 해석한다. 또는 인간의 깊고 고상한 순결의 사랑을 비유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인은 이 아가서가 성령 하나님이 솔로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 즉 그리스도의 초림 뿐만 아니라 재림 하시는 예수님과의 지고지순한 아가페 사랑이라고 본다.    아가서와 함께 시편, 잠언, 전도서, 예레미야 애가 등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가서들이 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종교 행사마다 이 시가서를 낭독하여 노래한다. 그들은 성전에 이 다섯의 시가서를 비치해 놓는다. 잠언서는 성전 뜰에, 전도서는 성소 안에, 그러나 아가서는 특별히 지성소에 비치한다. 이는 아가서의 영적인 의미와 깊이가 어떠함을 가리켜 준다. 일반 백성들이 아가서를 읽고 자칫 남녀간의 육적 사랑을 자극하는 그런 책으로 오해하지 않게 함이다. 오직 하나님이 세운 종인 제사장들만이 읽게 한 아가서이다. 오늘날 신약시대의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인하여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영적으로 하나님과 깊이 영교하며 노래하는 것이 곧 아가서로 계시했다고 본다. 즉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사랑을 찬양하는 것이다. 아가서 본문에서 ‘나의 신부야’라고 주님이 여러 번 부르신다. 이 신부는 누구를 말하는가? 주 재림 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그리스도 신부로 청함을 받은 자들이라고 본다. 즉 혼인식의 주인공인 신랑 예수님과 그 신부이다. 이 신부는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자라고 하였다(계19:8). 즉 이들은 순교자를 계시한다. 주 재림 시 첫째 부활한 자들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오늘날도 이런 순교의 신앙에 올라서 있는 자는 주님이 ‘나의 신부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앞으로 이 강해는 스테판 원문 성경을 번역한 킹제임스 성경을 기준하여 강해하고자 한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아가서 1:1로 들어가 보겠다.   1:1 노래들 중의 노래니 이는 솔로몬의 노래라. 아가서는 솔로몬이 노래한 것이라고 여기서 밝히고 있다. 시편에는 다윗의 노래가 있고, 또 출애굽기의 모세의 노래, 또 요한계시록의 십사만사천의 새 노래(계14:4)들이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노래들 중에 최고의 노래가 바로 이 솔로몬의 노래요, 이 아가서이다. 아가서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이다. 신랑은 예수님이요, 신부는 솔로몬이 된다. 솔로몬이 신부의 자리에서 신랑 예수님을 사랑하며 노래하는 이 관계 설정이 바로 1절이다. 그러나 솔로몬이 신랑으로, 또 술람미 여인을 신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1절에서 정확히 답한다. 즉 솔로몬이 하나님 자리에서 노래한 것이 아니다. 신부 성도의 자리에서 하나님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이것이 1절, 곧 솔로몬의 노래다. 솔로몬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자리에 설 수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신부 신앙에 섰다면 신부의 노래가 곧 아가서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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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7
  • 성서와 생활[9] 그리스도인의 영성-용서의 영성-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에게는 특별한 생명을 얻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바로 능력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1:7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다.   이 생명은 또한 주님 안에 있으며 우리가 찾고 구해야 할 생명이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 시105:4. 우리가 찾아야 할 능력의 생명 중에는 주님 안에서 역사한 용서하는 생명이 있다. 베드로의 영성은 설교를 통해 수천 명을 회개시키며 귀신을 쫓아내며 앉으뱅이를 고치는 능력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의 영성이 이에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면 우리 믿음이 더 큰 유익이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죄 사함을 받은 용서의 능력이다. 주님은 베드로의 성향이 배신할 것을 미리 아시고 죄를 용서하는 기도를 하셨다. 베드로는 회개한 이후에 이전의 기사이적보다 더 큰 사역의 길을 간다.   그것은 고넬료랴는 이방인을 향한 교제의 길이 가능한데 있다. 용서는 놀라운 주기도문의 중요한 기도 원칙의 하나이다. 우리에게 용서하는 마음이 중요한 이유는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마6:14 용서하는 마음은 심판을 이기며 주님의 긍휼히 여김을 얻는 길이다.  ‘용서하시는 하나님’ 느9:17은 우리도 주님의 길이신 이 용서라는 진리의 길을 가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과 혐의에 대해 용서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시험을 이기고 죄를 다스리는 능력의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신다. 용서는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며 우리에게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마18:35 또한 용서는 우리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는 통로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형제를 향한 어떤 불만도 용납, 골3:13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주님의 마음으로는 가능하다. 용서는 주님이 주신 능력있는 마음이며 그리스도인이 소유한 풍성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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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7
  • 성서와 생활[8] 그리스도인의 영성-말의 영성-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삶의 척도는 그의 말에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게 되면 말씀 속에 감추인 주님의 지혜를 얻게 된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지식이 우리 마음에 있고 이 지식이 우리 마음에 보존되고 이 지식이 우리 입술에 있음이 아름다운,잠22:8 것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한다면 말에 주의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더 큰 구원을 사모한다면 반드시 말에 실수가 없는 자,약3:2의 길을 가고자 할 것이다. 말의 권세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통치하시는 날에 함께 참여하는 영광이기 때문이다.   말씀에는 모든 세계를 움직이는 신의 권세, 하나님의 권세가 들어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 이처럼 말은 하나님께로 나왔으며 ‘믿음으로만이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히1:3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 뽕나무에게 말씀하시고 파도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수아는 태양에게 멈추기를 명령했으며 그 말대로 되었다. 그러므로 더 큰 구원을 사모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에 채워 권세 있는 말의 선포자가 될 수 있는 영적인 길을 가야만 한다.    입술의 열매로 부요가 결정되기 때문에 영성있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말씀을 설교를 통해 듣고 성경을 읽고 찬양을 듣고 부르게 된다면 영적인 사람이 된다. 이러한 사람의 말은 덕스러운 말을 하게 됨으로 힘 있는 자에 앞에 서게 된다. ‘마음이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잠22:11. 미국의 포크가수 밥 딜런이 2016년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연유도 증거가 될 수 있다. 10살 때부터 시를 쓰고 가수가 되어서는 시어로 언어와 목소리와 음악의 상호작용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입술의 열매를 히13:15, 호14:2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구약의 제사보사 탁월하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말로 배부르게,잠18:20 되도록 하셨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통해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고 하셨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미14:28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듣기 원하시기에 믿음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말은 돈처럼 아껴서 힘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잠17:27을 기억하자. /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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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3
  • 일체의 비결
    “어떠한 형편에 있더라도 나는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1~12) 자족이란 “스스로 만족”함을 의미한다. 동서양 철학이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이리라. 예로부터 이를 위해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눈, 코, 귀, 혀, 몸을 위한 다섯 가지 욕망과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심 등의 일곱 가지 정욕을 다스려야 한다. 그로 인한 불행, 고통, 행복, 슬픔 등의 감정을 수양하기 위하여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초월의 경지에 이르면 도통(道通)했다고 하고 정신 수양의 최고 가치로 여겼다.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8) 더 나은 것을 위한 욕망의 목적 전환이다.  내 안에 선하신 뜻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욕망과 감정을, 수양을 통해 무조건 버리는 것이 아니고, 더 좋은 것을 사모하는 욕망으로 차원을 높이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는 내가 하는 것 아니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고, 칭찬받을 만하고,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를 생각하라”(빌 4:8)  바울은 담대하게 말한다.  “내게 배우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4:8~9)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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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9
  • [향유옥합] 빛처럼 소금처럼 사는 사람들
      온도계는 온도를 측정하여 현 상태의 기온의 변화를 액면 그대로 알려주는 기구이다. 반면 온도조절계는 더우나 추우나 한결같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주는 기구이다. 삶 속에서 우리는 많은 종류의 사람을 만나며 살아간다. 보통 어린아이들은 온도계와 같다. 자신의 감정과 상태를 그대로 표현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 상태를 고스란히 알리기 때문에 온도가 변화무쌍하다. 반면 온도조절계와 같은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상태에 지배를 받지 않고 조절을 하여 늘 같은 온도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육체적 성장과 정신적 성숙이 같이 진행이 되어야 한다. 적재적소에서 자신의 감정표현에 대해 인내와 절제를 해야 할 시점을 알아가고 그것을 행하며 온도조절계 같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 성숙된 어른이 되는 것이다. 매일 보도되는 사건과 사고 소식으로 세상이 어지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유지되는 것은 한결같이 평정심을 유지하며 묵묵하게 온도조절계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온도조절계의 삶을 살고 있는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호스피스 봉사자’들이다. 호스피스 봉사자 교육을 이수하고 병동에 배치된 그들이 마주하게 될 돌봄의 대상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신체적, 영적 고통과 죽음에 대한 불안이 매우 큰 환자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꾸준하게 한결같은 온도와 사랑으로 섬기는 봉사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 날 호스피스 봉사자와 통화를 하던 중 가슴으로 스미는 내용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최선을 다해 돌봐드려도 마음을 열지 않는 환자로 인해 마음이 상해 있었어요. 호스피스 봉사자로서 자질이 없는 것 같아 봉사를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고요. 그렇지만 꾸준히 그 분에게 다가갔고 그분의 돌봄이 끝나면 모든 짐을 내려놓는듯한 후련함을 느끼기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봉사를 위해 병원에 갔는데 그분이 보이지 않았어요. 소천을 하신거지요. 슬퍼하고 있는 중에 복지사가 소천하신 분께서 저에게 전해달라 하셨다며 상자 하나를 주었어요. 열어보니 미완성본 시편 필사노트와 손 편지가 있었어요. 내용을 보니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 동안 잘 대해주어서 감사하다’는 내용과 함께, 통증이 찾아올 때마다 필사를 하며 고통을 잊으려고 노력했다고 하며, 자신이 마무리 하지 못한 시편 필사노트를 선생님이 이어서 꼭 마무리를 해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어요.    아울러 자신이 표현은 못했지만 늘 침상에 다가와서 ‘OO님’ 하며 자신의 이름을 친절하게 불러주신 분은 선생님 한 분이었다고 하며 자신을 'OOO환자'가 아닌 이름으로 명확하게 불러주어 건강했을 때의 자신이 모습이 떠올랐다는 이야기와 함께 선생님의 한결같은 태도에 큰 감사를 드린다는 내용의 편지였어요”   그 봉사자는 이 이야기를 하며 통화 중에도 하염없이 흐느꼈다.   호스피스 환자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일은 자신의 의지와 열정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호스피스 봉사자들은 봉사를 시작하기 전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통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온도조절계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을 거울삼아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인내와 절제를 해야 가능하다.  오늘도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빛과 소금의 정신으로 온도조절계의 삶을 살아내는 날개없는 천사들이 생명 사랑의 행진곡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다. /각당복지재단 팀장    
    • 출판/문화/여성
    • 여성
    2023-12-19
  • [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12화] 세상 향한 사랑, 주께서 지신 십자가
    주의 마음 가진 자, 창조주 닮는 주의 구속사역에 기쁜 헌신으로 제자화  성탄, 복음의 시작이다. 로마서 1장 1절에서 4절은 메시야로 오신 그 예수 복음에 대한 핵심이다. 구약 예언대로 오시어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을 나타내 영생을 주시는 영혼 구원자이심을 확증시켜 하나님 되심의 증거이다. 더불어 이를 알고 좇는 자들의 부르심에 대한 사명이다. 이사야 25장 1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고 하셨다. 예언대로 행하신 예수를 믿고 좇아 새 생명을 얻어 주의 경륜이 이루어지도록 전도를 위한 사도 곧 주의 종들로 부르심의 이유를 확증한다.     디도서 2장 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시어 주께서 십자가 지신 이유와 이를 믿고 좇는 자들을 거듭나게 하신 목적을 밝히 찾게 했다. 연계하여 고린도전서 2장16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는 말씀대로 종들의 화답의 몫에 증거이다. 성령으로 내주하심은 사랑의 몫에 제자화로 화답임을 확증케 한다. 이를 위해 지체들의 서로 사랑을 새 계명으로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어 그에 지체들과 한 몸을 이루어 주를 사랑함이 서로 사랑이라고 하셨다.     이들을 그리스도의 사신이라 칭하셨고 나의 사랑하는 친구라 명명해 주시어 지체들로 복음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하는 존재 목적임을 확증해 주셨다. 서로 사랑하라는 이유와 목적을 지혜로 발견케 하신 주님의 십자가 시선이다. 주의 긍휼과 자비하심의 선한 역사이다. 십자가 지신 주께서 세상을 향해, 주 뜻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며 화답하는 종으로 주의 제자화임을 확증케 한다. 복음으로 성령과 동행하여 마귀의 일을 멸하는 존재의 목적이다. 새 가치관이다. 존재의 목적을 바꿔준 십자가의 사랑의 본임을 확증한다. 주를 사랑함이 이웃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하는 구속사임을 확증해 간다.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한 주의 섭리이다. 주의 뜻을 알게 하심도, 서로 사랑하도록 순복하게 하심도 은혜의 좁은 길로 들어가 주의 자취를 좇게 하신 주의 섭리로 견인이다.     주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 성령과 동행하여 믿음의 성화로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감이다. 즉 온 세상 사람들에게 주의 말씀을 지혜로 가르쳐 지키게 하는 제자화로 충만을 소원케 견인하신다. 새 생명을 얻도록 나누는 사랑은 전도로 선함의 충만한 역사이다. 영생에 소망을 두고 십자가의 능력이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로 달란트를 남기는 종의 몫임을 확증케 한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좇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주의 섭리로 확장케 하는 주의 나라 비결임을 찾는다.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고 더 흥왕되이 세워져야 하는 이유임을 깨닫게 한다. 곧 화평케 하는 복음을 부탁하신 이유와 목적이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에 화답은 주의 제자화로 기쁨과 감사 그리고 감격과 감동의 행복이다. 더 행복하게 더 충만한 기쁨과 보람으로 범사를 감사로 이끄시는 영생을 향한 부르심이다. 풍성한 생명의 사랑이 하나님 은혜의 제자화로 채워지는 주의 나라 확장이다. 하나님의 사람들로 주의 십자가 사랑을 체휼하며 주의 마음을 갖도록 하신 이유이다. 곧 주 안에 바꿔진 가치관은 복음을 전하여 주의 경륜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나누는 사랑으로 율법의 완성임을 확증케 한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거듭남이기에…/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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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9
  • [변두리 소수자10] 실질 문맹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유엔(UN)은 문맹률 3% 미만의 국가들을 문맹률 1위로 발표한다. 미국, 캐나다, 호주, 러시아, 한국, 일본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런데 한국 국민의 ‘실질 문맹률’이 77.4%로, OECD 가입국 중 최저라고 발표하였다(2013년). ‘실질 문맹’이란, 글을 읽을 줄 알아도 그 글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은 2017년 ‘성인문해능력 조사’ 결과에서, 약 7.2%의 성인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읽기, 쓰기, 셈하기가 불가능한 ‘1수준’이며, 5.1%의 성인이 일상생활 활용에 미흡한 문해력 수준에 해당하는 ‘2수준’이라고 발표했다. 이를 제외한 약 88%의 국민이 문해력에 문제가 없다는 것인데, 2020년에는 국민 중 약 76%가 가장 높은 단계인 4수준 이상의 문해력을 가졌다고 발표했다.   2013년의 ‘실질 문맹률’을 한국교육방송공사(EBS)가 다시 인용한 후, 반박이 심해지자, 사과를 한 일이 있었다. 이때 표현한 ‘심심(甚深)한 사과’라는 말을 몇 사람이 ‘지루하다’는 의미로 오해를 했는데, 비슷한 사례가 다시 있었다. 한 웹툰 작가 사인회의 예약 오류에 대해 “심심한 사과 말씀드린다”는 공지를 올렸는데, “심심한 사과라니 난 하나도 안 심심하다,” “제대로 된 사과도 아니고 무슨 심심한 사과?” 등의 반응을 보였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올림픽에서 대표팀이 9연패를 했다’라는 뉴스에 대해 “이겼는데 왜 ‘연패’라는 단어를 사용하냐? ‘연패’는 연속해서 졌다는 뜻이 아니냐?”는 댓글이나,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착각한 대학생이 과제를 제때 제출하지 못하여 항의했던 사례는 애교 수준이다. ‘연휴가 사흘로 늘었다’는 보도에 “3일을 왜 사흘이라고 하냐”는 항의도 있었다. 지난 대선 때는 이준석 국민의 힘 대표가 대선 출마를 선언한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대표에게 “무운(武運·전쟁 따위에서 이기고 지는 운수)을 빈다”고 말한 것을, 한 방송사 기자가 “운이 없기를 빈다”고 잘못 해석한 경우도 있었다.   문맹 퇴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유네스코는 1965년부터 9월 8일을 ‘세계 문해의 날’로 제정했다. 1989년에는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을 제정하고, 매년 문맹 퇴치에 기여한 개인과 단체를 선정하여, 유네스코 본부(파리)에서 시상한다. 한글을 문맹 퇴치의 가장 우수한 예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우수한 우리 국민의 실질 문맹률이 높은 이유가 무엇일까? 입시 위주의 암기식 교육, 지나친 디지털 기기 사용, OECD 가운데 최장 노동시간과 최저 독서율, 어려운 한자어 사용 등을 그 원인으로 제시하곤 한다.   그러나 이 사회에는 그보다 더 큰 원인이 있는 것 같다. 대화의 자세와 모습은 과거에 비해 나아졌지만, 이분법적 사고와 개인 주장은 여전한 것 같다. 양극화 현상도 뚜렷해 졌다. 나와 입장이 다르면, 내용을 이미 거부하고, 대화를 하게 되니 소통이 쉽지 않다. 진실을 서로 듣기 위한 소통이기 보다, 내가 믿고 있는 내용을 서로 주장하는 예가 허다하다. 역사의 인물에 대해서도, 내가 싫은 사람의 ‘공’은 없고, ‘과’만 있을 뿐이다. ‘공’은 듣기 싫어한다. 아니, 아예 부정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일그러진 영웅들’ 밖에 없다.   인본주의도 모두를 포용하지 못한다. 통제 사회들은 ‘민주’라는 단어를 늘 사용하며, 인민을 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인민들은 ‘1단계의 욕구’에 머물러 있도록 통제한다(매슬로의 ‘욕구단계론’에 의하면, 기본 생존-본능 단계이다). 사랑, 결혼, 관계, 존귀, 초월적 삶 등의 다음 단계로의 개인 발전이 더 어려운 사회가 되어간다. 개인의 인권을 존중한다고 서로의 유익을 주장하면, 서로의 인권을 침해하게 된다. 다툼과 방어 속에 개인들끼리 불신 사회가 되면, 통제가 더 강화된다. 자유 민주 사회에서만 자유 소통이 가능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사람들의 허물도 모두 기록하며, 살리는 은혜로 품고 있다. 사람이 자유하도록 자유를 주셨다(갈 5:1). 하나님 안에서만 만물이, 누구나 하나가 되어 자유로이 소통할 수 있다. 교회도 사람끼리의 주장이 합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하나님의 나라로 보여야 한다. 성도가 하나님과 사회의 접점이어야 한다. 기독교가 우리끼리만의 교리보다 하나님 나라의 언어로 들려야 한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 11:1-9)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 오피니언
    • 칼럼
    2023-12-13
  • [향유옥합] 아무튼, 환대
      바늘 귀에 실을 길게 꿰는 사람은 멀리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던가. 평소 실을 1미터 정도나 꿰었던 나는 사랑 따라 무려 태평양을 건넜다. 대학 졸업 후 결혼하면서 한국을 떠나 미국이라는 다양한 사회에서 30여년을 지냈다. 하나님의 딸, 부모님의 딸로 사랑받던 나는 낯선 땅, 낯선 문화 속에서 새롭게 뿌리를 내리며 나의 정체성을 깨닫는 오랜 여정을 지냈다. 겹겹이 쌓인 경험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바탕에서 나를 지탱해준 힘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맞아주고 포용해주는 환대였다. 나그네 혹은 이민자로 살아본 사람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떠남, 여정, 환대 같은 화두는 나의 삶과 신학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일상 속에서 만나는 환대는 물론이지만, 일상을 떠나 낯선 길에서 받는 환대의 경험은 때로 잊을 수 없는 선물이 된다. 화끈한 문신으로 새기지 않아도 내 피부 어딘가, 눈과 마음 속 기억의 나이테로 아로새겨진다. 길 위에서 만나는 환대는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선물처럼 놀라움과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경험한 무수한 환대의 추억은 자양분과 촉매제가 되어, 씨앗이 싹을 틔우듯 다시금 나와 타인을 환대하는 새로운 에너지로 순환한다.   얼마 전 어머니와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나의 성년기를 외국서 보내고 고향에 돌아와 체류하고 있는 이즈음, 어느새 80대 노모가 되신 나의 엄마와 함께한 몇 주간의 여행은 애틋하고 즐거웠다. 마음에 남는 따스한 기억이 여럿 있지만, 그 중 몽마르뜨 언덕을 보고 내려온 일이 생각난다. 낮에는 미술관을 보고 저녁이 돼서야 지하철로 그 곳을 향했다. 다음 날 저녁 귀국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보내는 밤, 숱한 예술가들이 살았다는 그 언덕 골목을 거닐며 파리 야경을 내려다보는 시간은 아름다웠다. 정상의 대성당에서 마침 미사를 드리고 있어 함께 기도했던 마무리 또한 더없이 뜻깊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언덕을 내려와 호텔로 가는 길을 검색해야 했는데, 하루 종일 사진도 많이 찍고 길도 헤매서 나도 올케도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었다. 우리가 의존할 방법은 광장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이었다.   대중교통 정류장 근처 거리에서 만난 젊은이들에게 길을 물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남녀 청년은 우리 일행에게 바로 주의를 집중하고 길을 찾아 주었다. 우리가 머무는 호텔을 자신들의 전화기로 검색해서 버스 한번만 타면 도달할 수 있음을 알아냈다. 젊은 여성은 자기 노트를 꺼내 타야할 버스와 열세 정류장만 가면 되는 것과 내려야할 정류장 이름을 써주었다. 남자 청년은 15분 후 버스가 올 것이고, 버스가 하차할 정류장 직전에 좌회전을 하지만 호텔은 오던 길에서 곧장 가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명료하고도 상세한 안내에 거듭 고마워하면서 우리는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얼마 후 기다렸던 버스가 오는데 저 방향에서 손 흔드는 게 느껴져 보니, 아까 길을 알려줬던 두 젊은이가 우리 일행이 버스를 제대로 타는지 그때까지 살피다가 ‘그 버스 맞아요,’ 하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혹시라도 버스를 놓칠까 눈을 떼지 않고 보고 있었던 거였다. 어둠 속에서도 돌봄과 환대의 미소는 또렷이 보였다. 나는 ‘고마워요, 이 버스 타고 잘 갈게요,’ 하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엄지를 올렸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또 지금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얼굴이 생각나곤 한다. 앞으로도 종종 몽마르뜨 언덕과 함께 소환될 것이다. 그들의 친절과 환대는 여행에서 만난 어떤 풍경과 작품보다도 내 마음에 닿은 선물이기 때문이다.   [환대(歡待):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 그리스어로 환대는 ‘필로제노스(φιλόξενος, philoxenos)’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우정 또는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philos)’와 이방인을 뜻하는 ‘제노스(xenos)’가 합쳐져 ‘이방인을 사랑함’을 의미한다. 우리라는 공동체 밖의 이방인을 맞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곧 환대라는 것이다. 헬라어 성경에서 손님(guest)으로 풀이된 ‘제노스’라는 단어는 외국인(foreigner), 낯선 사람(stranger), 이국인(alien) 등의 뜻이 있지만, 재미있게도 주인(host)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환대의 주체는 주인만이 아니고 손님도 해당되며, 일방적이 아닌 쌍방적, 상호적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주인이 환대를 베풀지만, 방문한 손님도 환대를 베푼다. 하나의 시공간에서 그렇듯, 우리 일생을 두고 영원한 주인도, 영원한 손님도 없다. 서로 베푸는 환대를 서로 주고 받는다.   환대는 특별한 대접 같아 보이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사실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모든 피조물이 이 지상에 사는 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 생존 권리가 환대다. 이러한 권리는 마땅히 존중받고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환대받을 권리를 내세운다면 타자의 환대받을 권리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환대권의 평등한 상호성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성경의 황금률 (Golden Rule)은 환대의 정신을 간명하게 요약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 7:12) 환대는 특권 행사가 아니다. 환대받을 권리의 평등성이 우리가 누리는 환대권의 기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웃을, 타인을, 창조세계의 모든 타자를 내 몸처럼 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는 사람이 사람을 반갑게 맞아 존중하고 아끼고 잘 대접하는 환대의 세상이 아니다. 제노포비아(xenophobia), 호모포비아(homophobia) 같은 혐오증이 코로나처럼 퍼져, 자신의 공동체 밖의 사람을 환대하기보다는 냉대하고 홀대하고 적대한다. 우리는 자신이 환대받는 데는 열심이지만 타인을 환대하는 데는 인색하며 서투르기 짝이 없다. 환대는 특권이 아니지만 부단히 갈고닦아야 할 특별한 능력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그런 친절함, 다정함의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 그런 사람 옆에서는 다른 사람도 더불어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호텔(hotel), 호스텔(hostel), 병원(hospital)이 다 라틴어 ‘호스피탈리타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환대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와 같은 어원에서 왔다. 고대 신성한 여행자들에게는 숙박을 제공하고 그들이 아플 때는 정성껏 치료해 주었던 환대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팍팍하고 고단한 삶의 여정을 지나는 나그네에게 먹을 것과 쉴 곳을 제공하며, 전쟁터 같은 이 세상, 상처받고 아픈 이들에게 야전침대를 펼쳐 치료의 손길을 내미는 병원 같은 존재는 얼마나 소중한가.   나처럼 오랜 시간 타국에서 나그네로, 세계 시민으로 살아가는 벗님이 얼마 전 우리 부부에게 음반을 보내주었다. <고향의 봄>이라는 뜻밖의 선물, 감동적인 환대였다. 무반주로 나직이 부르는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은 내 속에서 울긋불긋 꽃대궐을 차려주고 호수처럼 내내 출렁거렸다. 외국에서 음악 공부와 활동을 하며 나그네로 오래 산 이방인의 경험이 있는 베이스 성악가의 목소리는 그래서 내게 남다르게 들렸다. 지난 주말, 다른 벗님의 초대로 음반으로 들었던 한국 가곡을 독창회 공연으로 접하는 호사를 누렸다. 더없이 뭉클한 환대의 자리였다. 관람 중 한곡 한곡 마칠 때마다 우리 부부에게서 각기 다른 뉘앙스의 감탄이 흘러나왔다고 했다. 성악가의 목소리로 듣게 된 곡들은 그리움과 외로움 같은 나그네의 심경을 단순하고 담담하게 그려 영혼의 교감을 깊이 느끼게 했다. 가사집을 보지 않아도 마지막 절까지 속으로 따라부를 수 있는 익숙한 곡들이 대부분이어서 좋았지만, 새로운 곡들도 참 좋았다.   그 중 마음에 등불을 켜듯 따스한 불빛을 간직하고 돌아온 노래가 있다. 나희덕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산속에서>이다.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 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갖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 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성육신하신 하나님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환대하는 이 대림절, 누군가 길을 잃어버린 자에게, 깜깜한 밤을 지나는 자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는 자에게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처럼, 맞잡을 손처럼, 어깨를 감싸는 힘처럼 나그네에게 계속 걸어갈 동행이 되어준다는 것은.../ 미국장로교 세계선교부 동아시아 책임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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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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