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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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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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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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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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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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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심을 기뻐함으로 각종 아름다운 꽃들을 나열하여 축하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이요 미래의 소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토록 주님의 부활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가질 수 있는 참 소망인 것이다. 여기의 십자가도 피 묻은 십자가가 아니라 황금색의 십자가로 표현한 것이 승리의 상징으로 잘 부합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 작가는 재치 있고 활달한 터치를 구사하여 감동을 주는데 이는 마치 누가복음 24장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동행하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들의 집에 가서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하는 장면과 유사한 기쁨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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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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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강교실] 뇌졸중의 재활적 치료 (하)
      뇌졸중 환자에게 집중적이고 포괄적인 재활치료를 시작하는 시기에 대해선, 48시간 이상 신경학적 진행이 더 이상 없고, 두 단계의 명령수행이 가능하면 시작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뇌졸중 발생 후 직접적인 사망의 90% 이상이 대부분 1주 이내에 일어나고, 병변의 재발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므로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재활치료의 시작은 전형적인 편마비 환자의 경우 최소 1주 경과 후가 바람직하다.   현실적으로 뇌졸중 급성기에 해당하는 1주 이내의 재활치료는 주로 신경과나 신경외과에 입원해 있는 상태에서 이뤄지고 따라서 신경학적 및 내과적 치료와 분리되기 어렵다. 따라서 이 시기의 재활치료의 목적은 침상안정 및 부동, 감각자극의 부족으로 인한 각종 합병증을 예방하는 것이다. 침상안정에서 중요한 것은 올바른 침상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발바닥을 발받침대에 똑바로 붙이고, 무릎이 천장을 향할 수 있도록 대퇴골 전자 받침을 사용하고, 견관절은 외전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관절 구축을 예방하기 위해서 적어도 하루에 2회 이상 수동적 관절 운동을 실시하고, 욕창예방을 위해서 적어도 2시간 간격으로 자세를 바꾸어 주며 피부를 청결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뇌졸중의 초기에는 많은 환자들이 삼킴 장애를 보이며 따라서 흡인성 폐렴의 위험을 지니고 있다. 기면 상태이거나 의식이 명료하지 못한 환자는 경구 식이를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의식이 명료한 환자라도 경구 식이를 시작하기 전 삼킴능력을 세심히 평가하여 흡인의 가능성이 있으면 비디오 투시 검사를 시행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 신경학적 증상이 안정되기 시작하면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이동을 시작해서 경사대를 이용한 서기 연습 등의 포괄적 재활치료를 시작해 심부정맥혈전증, 위식도역류, 흡인성 폐렴, 관절구축, 기립성 저혈압 등을 예방하고 심리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편마비 환자의 경우 마비가 있는 어깨가 빠져 이로 인한 통증으로 재활치료를 방해할 수 있으므로, 어깨 보조기가 필요할 수 있다. 뇌졸중 후 우울증은 매우 흔하며, 회복을 지연시키고 재활치료 효과를 떨어뜨리게 되므로 정신 요법, 정신 사회적 지지, 항우울제 등을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한다.   뇌졸중 환자의 약 75-85%는 재활 치료 후에 집으로 퇴원한다. 많은 뇌졸중 환자가 치료 후 이동 능력이나 일상생활 기능을 독립적 수행할 수 있으나 사회적, 직업적 결과는 기능적 회복의 정도만큼 좋지는 않다. 따라서 환자가 퇴원하면 병원에서 의료진에 의해 하던 일을 가족이 맡게 된다. 상태에 따라 장기적인 간호가 필요하므로 의료진은 가족에게 역할 분담 등의 조언을 해주어야 한다.   또한 재활의학과 의사는 뇌졸중 후 장애가 남아있는 환자에 대해 장애인 등록이나 장애연금 등을 위한 장애를 평가하며, 사회사업가는 뇌졸중 환자의 직업, 보험, 보상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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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1
  • 기독교와 샤머니즘, 그 대립과 갈등(7) -김동리 장편소설
      <을화>의 샤머니즘 세계는 기독교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인 세계이다. 즉 기독교를 마치 고래(古來)의 전통을 파괴하려는 세력쯤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구축(驅逐)하려는 대결의지를 이 샤머니즘 세계는 드러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런 강인한 의지는 고래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노력해 온 작가 김동리 자신의 평소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달리 표현해 보자면, 그것은 거의 무모한 싸움이라고도 생각되리만큼 끊임없는 대결을 벌이는 <황토기>의 주인공 억쇠와 득보의 접전처럼, 프로문학이나 문맹(文盟)에 맞서서, 또는 참여문학파나 민중·민족주의 문학에 대항하여 끊임없는 투쟁을 벌여온 김동리 자신의 일생의 역정(歷程)을 대신해서 보여주는 세계처럼도 느껴진다.   이런 역사적 투쟁에 반드시 어떤 논리가 따라야 하는 것만은 아니었듯이, 기독교와 맞붙어 싸우는 을화의 싸움에도 어떤 합리성이 꼭 밑받침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을화의 샤머니즘은 신비주의적인 베일에 싸여 있게 마련이다.   샤머니즘 특유의 법열(황홀경, 엑스터시)에 싸여서 그녀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도 딱히 인식하지 못한 채 어미 을화는 아들 영술에게 칼을 휘둘렀던 것이다. 이런 황홀경(법열)의 행위에 대해 그녀의 샤머니즘은 법적 책임을 지는 법도 없다.   영술이가 이튿날 사망했지만, 살해자인 을화 그녀가 이 사건으로 법망에 걸려들었다는 묘사나 서술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 점은 어린애를 죽인 태주할미의 범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들에게 무슨 면책특권이라도 있었더란 말인가.)   <을화>에서의 기독교는 전통 지향적 보수주의자 김동리가 편애하는 샤머니즘에 의하여 협공 당함으로써 그 자체의 우월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정체된 모습의 종교이다. 즉 샤머니즘보다 우월할 수 없도록 미리 장치된 소극적 성격의 종교로만 나타나고 있다. 결국 상대적으로, 기독교가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종교로 그려져 있음이 사실이라고 하겠다.   작가 자신이 전통 지향적 보수주의자이므로 우리 전래의 민간신앙을 옹호하려 애초에 의도했던 바이고, 그 결과 그런 샤머니즘의 상대역을 맡게 된 기독교가 활발하고 역동적인 종교로 그려질 수는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때문에 기독교를 대표하는 영술이 최후로 취할 수 있는 길은 ‘순교의 길’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순교의 길’ 그 자체는 반기독교적인 것(길)이 아니므로 영술이에게 있어 조금도 부끄러울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나이 젊은 영술이가 기독교 선교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여러 길(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런 경지의 개척에는 눈을 뜨지 못하고 오직 가정이란 울타리 안에서만 맴돌다가 결국은 불행한 마지막을 장식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영술이가 아직 살아 있었을 때도 그가 관심 두었던 것은 소위 말씀 전도의 수준 그것을 넘지 못하였다. 70년대 말(1978)에 산출된 소설이라면 그동안 교회 신학이나 선교 방법 등에서 엄청난 변화와 발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30, 1940년대에 <무녀도>를 쓸 때의 기독교 그 수준에 머물고 만 것도 작가 자신이 샤머니즘을 옹호한 나머지, 그것의 대역(對役)인 기독교의 우월성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보겠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점은, 영술이란 기독교도에게 삶의 고뇌라든가, 도스토옙스키식 죄의 번민 같은 심리적 기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독교도로서의 고통과 번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을화> 속의 기독교는 너무 단순하고 평면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비판도 물론 그 책임은 작가 자신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으리라.)/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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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0
  • 믿음이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8장 22절에서 25절까지 낮에 호수건너는 사건이 계시됐다. 일반적으로 주님은 저녁이나 밤에 바다를 건넜다. 이와 달리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오늘 말씀은 낮에 어느 날이다. 또 바다가 아닌 호수이다.    또 먼저 말씀한 후 배를 타신 것과 달리 주님이 먼저 배를 탄 후 함께 배에 있는 제자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했다. 그 순서가 다르다. 주님이 배에 탄 그 후에 말씀한 그 배는 곧 주님이 세운 교회를 상징한다.   즉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이 한 몸 된 성도들인 제자들을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게 하는 것을 계시한다. 이는 호수요 바다가 아니다. 바다는 죄악 세상을 상징한다. 즉 짠물이다. 죽이는 역사를 하는 곳이다.    그러나 호수는 단물이요, 먹는 물로 살리는 역사를 가리킨다. 주님이 생명의 말씀을 주어 가르치고 양육해 가는 역사를 말한다. 이것이 호수를 건너가는 과정과 같다. 그 목적지인 호수 저편은 성도들의 최종 목표지이다.   즉 이는 하늘나라 하나님 보좌 우편의 주님 계신 곳이다. 따라서 호수에 폭풍이 일어나 배가 위험하게 됐다는 것은 바로 성도들의 불같은 시련과 연단을 가리킨다. 물론 이는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연단을 거쳐 소망을 이뤄주시려는 것이다.    즉 악한 영들을 도구로 하여 불같은 연단을 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두려워하거나 멸망할까 무서워하면 안된다(벧전4:12-13). 더욱이 더 큰 폭풍이 일어남은 더욱 큰 고난인 종말의 7년 대환란이다. 이 큰 환란을 거쳐 더 큰 하늘의 영광을 주시려는 주님의 복된 역사인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믿음이 없음을 가리킨다. 주님이 이미 구원해주었고 또 친히 지금 함께 하고 있는데 어찌 두려워하는가? 이는 물이 삼킬 수 없도록 주님이 지켜줌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사43:1-2). 주님이 폭풍을 잠잠케 하신 후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책망한다. 이 폭풍은 허상이요,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주님이다.    또 너희 믿음이 이 세상의 금생에 있느냐? 아니면 하늘나라의 영생에 있느냐? 오늘 우리 신앙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주님만을 바라보자(히12:2)./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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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7
  • 행복신앙세미나 10
             (행복신앙연구소장 제임스강 목사 www.bog.or.kr)  “가장 큰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나온다.”(빅토르 위고) “가장 큰 행복이란, 사랑하고 그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앙드레 지드)   위와 같이 인간에게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랑임을 명사들은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의 심리학자 라이스(Reis)와 게이블(Gable)도 수많은 연구 후, 행복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사랑이라고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명사들의 언급이나 연구 결과가 아니더라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사랑이 가장 큰 행복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을 모두 시인할 것입니다. 즉, 사랑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행복을 위하는 성경 역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고 사랑을 최우선으로 두었습니다. 사랑이 인류에게 가장 큰 행복을 주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즉, 사랑은 타인에게 악을 행하지 않음으로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기에 모두의 행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 역시 완전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면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래와 같이 확증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어떤 해나 불행도 있을 수 없기에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해하는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들조차도 이 온전한 행복을 누리지 못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이유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는 구절처럼,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사랑이 쉬운 게임 같았어. 이제는 내가 어딘가 도망칠 곳이 필요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리메이크가 많이 된 곡이자 BBC 선정 ‘20세기 가장 위대한 명곡’으로 선정된, 세계 최고의 밴드인 비틀즈의 히트곡 의 가사를 보면, 위와 같이 사랑이 결코 쉽지 않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언어가 다르면 소통되지 않는다. 외국어를 배우듯 사랑의 언어는 배워야 한다.”   그래서인지 뉴욕타임스 130주 초장기 베스트셀러이자 40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사랑에 관한 도서들 중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5가지 사랑의 언어>에서는 위와 같이 사랑도 배워야 됨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란 대중가요 및 영화의 제목처럼, 인류가 존재해온 이래 사랑으로 인해 아픔을 겪은 이야기나 사례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사랑은 가장 큰 행복의 원천인데, 왜 사랑 때문에 불행을 겪는 걸까요? 이는 사랑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단어 중 하나가 사랑일 정도로, 실제로 사랑은 인류의 다양한 분야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명확히 답변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반면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사랑의 정의를 명확히 내리고 있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즉, 사랑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이자 본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을 이해해야 됩니다. 사랑에 서툰 이유는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이해하면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알면 사랑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사랑을 오해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오해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오해하면 결국 불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가장 큰 행복인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을 이해해야 되며,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이해해야합니다. 즉,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과 행복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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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2
  • 「찬양」
        천예숙의 「찬양」은 평범한 제목의 작품이지만 한국화의 사군자를 연상하게 하는 내용들이 담겨지면서 고결하게 여기는 식물들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 진가를 나타낼 수 있다는 인식으로 찬양의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전통적인 한국화의 형태를 벗어나 자유분방한 이미지로 사물들을 조합 시켜 하모니를 이루게 하고 있다.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마땅히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외치고 있다.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라 땅 끝에서부터 찬양하라" (사 42:10) 이 작가는 많은 작품 활동을 통해서 얻어진 자신감과 실력을 인정받아 필치가 거침이 없고 작품의 조형미가 전통을 뛰어넘는 새로움을 인정받고 있다./정재규(미술평론가·대석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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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2
  • 이 땅을 너희에게 주리니 올라가 정복하라
    하나님께서 “ 택하신 민족의 훈련 과정 ” 기간은 원래 2년 2개월 계획이었다. 출애굽 한지 2년 2개월 첫째날 (민1:1) 시내광야에서 모세에게 명하시어 모든 종족과 가문에 따라 전쟁에 나갈 20세 이상 남자의 수만 계수하라 하시니 이는 가나안 정복을 위함이다.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라 ”( 신1:8 ) 이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니 주저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올라가 정복하라 하셨으나 이 백성은 정탐꾼을 보내어 먼저 살펴보자 주장하여 각 지파에서 12명을 택하여 40일간 정탐하게 하였다. 결론은 열 명과 두 명으로 나뉘었다. 다수의 의견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온 회중이 소리 높혀 부르짖고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며 우리가 애굽에서 죽었거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 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자 (민14:1~4) 백성들은 후렴처럼 반복하여 원망하며 “스스로 보기에도 우리는 메뚜기 같았다”는 존귀한 하나님백성의 말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 “내가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걱정하는 너희의 처자와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려니와 너희 중에서 20세 이상 계수된 자 전부가 정탐한 40일의 날수데로 하루를 일년으로 쳐서 사십년간 광야에서 모두 소멸하리라.”(민14:28~35) “내 영광과 내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10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니 결단코 맹세하거니와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민14:21~23) 오직 여호수와와 갈렙만이 그들의 믿음데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갈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니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그들은 장대하나 우리의 먹이라,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니라.”(민1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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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0
  • 한국교회여, 평화를 수호하자
       얼마 전에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대만과 한국 일본을 다녀갔다. 특히 대만 방문을 앞두고 중국은 크게 반발했고 지금은 대만을 포위하고 비행금지구역을 선포한채 군사훈련을 벌이고 있다. 펠로시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부정하고 미중간의 공동성명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미국 행정부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고 중국을 달랬지만 펠로시는 대만의 입장을 두둔하고 중국 인권 문제를 비판하고 반도체 공조를 강조했다. 그에 크게 반발한 중국은 대만을 상대로 군사훈련을 벌이는 것이다. 거센 정세의 파도가 동아시아를 흔들고 있다.      이제는 한반도 차례가 됐다. 지난해 아프카니스탄의 전격적 미군 철수로 예고편을 쏘아올린 21세기 정세의 대변화는 올해 들어서자마자 우크라이나에서 포성이 울리더니, 대만을 거쳐 한반도에까지 대격변의 정세가 다가왔다. 오는 8월과 9월 한미연합군사훈련이 그것이다.    중국과 미국은 국교라도 있지만 한미연합훈련을 하는 미국과 한국은 북을 적으로 규정하고 대규모 군사가 실제로 움직이는 실기동훈련을 비롯해 상륙훈련, 북의 지도부를 제거하는 참수작전훈련, 선제기습훈련 등 전면전을 상정한 대규모 훈련을 예고했다. 그 날짜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이에 대해 북은 지난 전승절(7.27 정전협정 체결일) 기념행사 연설에서 김정은 총비서가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에 대해 경고하고 "미제와는 사상으로써, 무장으로써 끝까지 맞서야한다"고 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미국과의 그 어떤 군사적 충돌에도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확언한다"고 천명했다.    특히 남쪽 정권에 대해서는 "군사적으로 우리와 맞서 볼 궁리를 하고 그 어떤 특정한 군사적 수단과 방법에 의거하여 선제적으로 우리 군사력의 일부분을 무력화 시키거나 마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천만에! 그러한 위험한 시도는 즉시 강력한 힘에 의해 응징될 것이며 윤석열 정권과 그의 군대는 전멸될 것이다"고 경고했다.    '전멸'까지 언급한 김정은 총비서의 말은 입으로 할 수 있는 말로는 더이상의 표현이 없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북은 전술핵미사일 사용과 관련한 작전계획 수립을 지난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마쳤으며, 향후 전술핵미사일 위력 검증을 위한 핵시험을 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전술핵미사일이란 히로시마 핵폭발의 15분의 1정도인 1천톤급 폭발위력으로 티엔티(TNT) 1천배의 위력이다. 이는 2~3개 군단을 단 한발로 전멸시킬 수 있는 위력이라고 전문가는 말하고 있다. 실제 사용가능한 핵무기가 등장한 것이다.    이런 정세 아래 오는 8월 중순에서 9월까지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시작된다. 한반도의 평화가 그 어느때 보다 위협받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는 지난 1994년 전쟁위기를 기억하고 있다. 전쟁30분전에 카터-김일성주석의 회담으로 멈추어진 사건이다. 사재기가 남쪽을 휩쓸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북마저 핵무기를 보유하고 실제 사용가능한 전술핵무기까지 갖고 있다. 선제타격, 참수작전에 맞서 북의 핵선제타격과 전면전 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한국의 제도 언론은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보도하지 않고 있으며, 정권은 미국만 바라보고, 정작 미국은 갈팡질팡하고 있다. 지금은 사재기할 시간 조차 없을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평화를 수호할 유일한 세력은 교회의 평화양심 세력 뿐이다. 깨어있는 교회의 예언자 역할이 절실하다. 작은 충돌로도 핵전, 전면전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한반도 평화 위기의 본질인 것이다. 정치가들의 허세와 무책임한 말만으로도 수십 수백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것이 한반도의 현실이다. /기독교평화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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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9
  • 목숨을 다하여 계명을 지킨 주 사랑
      사망이라도 끊을 수 없는 견고한 믿음으로 주 경외하는 이웃 사랑 실현   성경기록의 목적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새 생명을 얻고 얻게 하는 제자화가 본질이다. 믿음의 대상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앎이 먼저이기에 이적과 표적의 기록이다. 표적은 하나님이 구원자 되심을 알도록 나타낸 수단이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적도 다니엘의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알도록 나타낸 사건임을 찾게 된다.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겠노라는 하나님 사랑의 계명을 지킨 그들의 믿음은 풀무 불에 던져짐을 당하는 데까지 목숨을 다한 믿음이었음을 제시해준다. 이로 인하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는 참 신이신 하나님에 대한 앎을 주신 증거이다.   이들이 지킨 믿음의 사랑은 열국이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절대자 하나님으로 알게 된 일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한 믿음의 예이다. 곧 믿음은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여 풀무 불에 던짐을 당하는 것까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지킴이며 이웃 사랑의 본이다. 곧 목숨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킨 믿음임을 확증한다.   이적과 표적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신중의 신이심을 나타내 열국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절대자로 알고 좇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다. 다시 말해서 이적과 표적을 통해 하나님 되심을 믿는 자들이 교훈을 좇아 새 생명을 얻어 주의 백성으로 제자화의 목적이다. 이 일은 마귀의 일을 멸하는 섭리로써 마귀를 진멸한 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감이다. 주를 좇는 자들에게 주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주신 이유와 이를 위한 존재의 목적임을 확증케 한다.   주께서 오시어 표적을 행하심도 예언된 메시야임을 믿도록 함이 먼저이며 주를 좇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생명을 얻게 하여 주의 나라 확장이 본질임을 확증케 한다. 곧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을 나타내 보이셔서 그리스도되심을 확증시켜 주셨으며 예수를 주로 믿는 자들에게 이웃 사랑의 실천을 하여 영생에 이를 수 있도록 행하라 명하심이다. 더불어 예수의 구주되심을 전하다 순교를 당한 스데반 집사의 주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본을 사도행전 7장 51로 60절에서 증거 한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 하였도다 ~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는 증거와 함께 믿음의 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주와 복음을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청중들이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몫에 사랑 실천이다. 이는 구원자이신 주를 사랑하기에 예수의 복음을 전하여 주의 제자가 되도록 목숨을 다하여 주의 자취를 좇는 것이다. 주를 사랑함이 계명을 지켜 이웃을 사랑함이기에 제자화를 위해 목숨을 다하여 주와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써 믿음을 지키는 성화의 사랑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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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8
  • 기독교와 샤머니즘, 그 대립과 갈등(6)-김동리 장편소설
      일부 평론가에 의해 ‘반문화주의’의 작품으로 규탄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작가 김동리의 전작(前作) <무녀도>(原1936, 改1947)는 다수의 평론가들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럴 때 흔히 쓰인 용어들이 ‘패배의 미학’ 또는 ‘소멸의 미학’이란 것들로서, 말하자면 단편소설 <무녀도>가 소설미학적인 면에서 성공하고 있다는 평이다.    그런데 이럴 때의 ‘패배’니 ‘소멸’이니 하는 용어들은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비극’이란 말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비극의 미학 원리를 끌어들여 비교적 성공적인 경지에 이르도록 만든 작품이 바로 <무녀도>란 뜻이다.   필자 역시 이에 대해서는 별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없는 것으로 안다. 문제는 이러한 <무녀도>가 장편소설 <을화>로 확대 개작되는 과정에서 파생된 문제점들이 없지 않다는 데 있다. 이들의 중심 테마가 ‘전통적 샤머니즘’과 ‘외래의 기독교’ 사이의 갈등관계란 공통점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두 작품의 차이점이 천이두평론가의 적절한 표현처럼, ‘동굴의 미학’으로부터 ‘광장의 신학’으로 바뀐 데서 비롯되었으며, 이러한 차이점의 발생은 특히 <을화>의 경우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게 됐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무녀도>는 ‘짙은 소멸의 분위기’를 드러낸 ‘동굴의 미학’만으로써도 성공적일 수 있었지만, <을화>는 ‘광장의 신학’을 작품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샤머니즘에 관한 신학의 문제점을 노정시키고 작품 자체의 소설미학상의 성공 여부에도 문제점을 제기해 놓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분위기 소설로서의 단편 <무녀도>는 샤머니즘에 관한 신학에 대해선 별로 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됐지만, 사상소설 내지는 본격 종교소설로 탈바꿈한 작품이라고 내세워진 <을화>의 경우에서는 작가 자신이 그것에 대하여 큰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지금껏 <을화> 속의 샤머니즘 문제를 기독교와의 상관관계 속에서만 논의하려 했고, 또 그러한 논의조차도 ‘샤머니즘의 구원의 긍정가치’ 여부라는 국한된 관점에서만 취급하려고 했다. 이재선에 의해 적절히 구사된 이 용어는 결국 작가 김동리 자신의 “잡초에 묻혀 있는 샤머니즘 속에서 새로운 인간종교를 발견하려고 했다”는 말과 관련 되는데, 김동리가 샤머니즘을 ‘새로운 인간종교’로 봤다는 것은 곧 그것의 ‘종교로서의 구원의 긍정가치’를 인정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도 계속 강조했듯이 <을화>가 작가의 창작 의도대로 샤머니즘의 구원의 긍정가치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게 지금까지의 필자의 기본 논조였다. 그러나 필자가 이렇게 주장했다고 하여, 흠이 많은 무당들은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이 될 수 없다는 뜻은 물론 아니며, 또 그런 인물들이 등장하여 작품의 미학적 성공이 저해된다는 뜻도 아니다. 이는 이미 <무녀도>가 익히 증거해 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무녀도>에서 거둔 앞서의 예술미학적 성공과,    또 새 작품 <을화>에서 거두게 될 사상소설(본격 종교소설)로서의 성공이란 양면의 종합적 결실을 작가가 <을화> 속에서 거두어내지 못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신비의 세계는 <무녀도>에 비해 <을화>에서 많이 약화됐고, 사상 내지 종교의 세계는 설득력을 잃고 만 셈이다.    <을화>는 실로 샤머니즘의 철학(신학)적인 주장을 매우 헐겁게 전개함으로써 ‘창작 의도’와 ‘문학적 형상화’가 상호 일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괴리를 드러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창작의 ‘의도의 오류’란 실례를 여기서 확인하게 된 셈이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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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8
  •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마가복음 4장35부터 41절에서 주님이 바다를 건너서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한다. 주님이 이 말씀을 믿는 제자들로 바다를 건너가게 한다. 그들은 노를 저어서 주님을 배에 태운 채로 간다. 자기들이 어부 출신이니 자신만만하게 노를 젓고 바다를 자기들 힘으로 건너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 전혀 아니다.   믿음은 주님이 바다를 건너가자는 말씀을 믿고 따랐을 때 주님이 제자들을 도구로 하여 주님이 바다를 건너는 것을 가리킨다. 자신들이 주님을 위해 충성하며 수고한다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또한 그러한 생애는 멸망인 것이다. 이를 사무엘상하 6장 3절부터 7절에서 확실하게 계시해 주었다.   하나님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궤를 웃사와 아히오가 몰고 간다. 아히오는 한술 더 떠 하나님의 궤 앞에서 끌고 간다. 소들로 인해 하나님의 궤가 흔들리자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잡으며 돌본다.    그러자 하나님이 진노하사 웃사는 하나님의 궤 옆에서 즉사했다. 이와 똑같이 마가복음 4장 36절에 제자들이 주님을 위하여 애쓰며 잘 모셔간다. 이는 웃사 같이 멸망하는 길이요, 믿음이 전혀 없는 것임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큰 폭풍우와 파도가 일어나 배를 덮었다. 그들이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있는 주님을 깨웠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개의치 아니하시나이까?” 주님이 베개 베신 것은 누가 가져다드렸는가? 제자들이 마련하여 주님을 편안히 주무시도록 드린 것이다.    자기들의 힘으로 주를 위해 노를 저었는데 폭풍우와 파도로 더 이상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제자들은 “이렇게까지 주님을 돌봤는데 어찌 우리가 죽게 됐는데도 우리를 돌봐주지 않습니까?”라고 원망하고 있다. .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드려 되돌려 받으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롬11:35). 주님께서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아주고 폭풍을 일으키신 것이다. 그러나 무서워하고만 있는 제자들이다. 주님이 폭풍과 파도를 잠잠케 하신 후 “어찌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라고 책망했다. 그들은 주님이 아닌 선생님으로 부르고 있다.   그들은 행함으로 빠진 것이요. 전혀 믿음이 없음을 오늘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잘 살펴야 될 것이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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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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