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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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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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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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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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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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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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심을 기뻐함으로 각종 아름다운 꽃들을 나열하여 축하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이요 미래의 소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토록 주님의 부활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가질 수 있는 참 소망인 것이다. 여기의 십자가도 피 묻은 십자가가 아니라 황금색의 십자가로 표현한 것이 승리의 상징으로 잘 부합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 작가는 재치 있고 활달한 터치를 구사하여 감동을 주는데 이는 마치 누가복음 24장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동행하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들의 집에 가서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하는 장면과 유사한 기쁨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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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실시간 칼럼 기사

  • 행복신앙세미나 20
    (행복신앙연구소장 제임스강 목사 www.bog.or.kr) 사랑의 희생과 그리스도의 대속      “내가 왕위를 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뒷받침 없이는 왕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 또한 여러분께서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위는 1936년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8세의 이임사로 그는 왕위에 오른 지 채 1년이 안되어 미국 출신의 이혼녀인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내놓았습니다. 당시 영국법상 이혼한 여인이 왕비가 되는 것을 금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위해 국왕의 자리를 포기한 그의 이야기는 세기의 사랑이라 일컬어집니다.   오래 전 한 왕이 백성들의 풍기가 날로 문란해져가는 것을 매우 걱정하며 고심하다가 국법을 만들고 가장 먼저 어기는 사람에게는 눈을 빼내는 벌을 내리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때부터 백성들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속에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드디어 법을 어긴 사람이 나타났는데, 다름 아닌 왕이 사랑하는 하나밖에 없는 왕자였습니다.   “왕자라 할지라도 국법을 어긴 이상 마땅히 형벌을 받는 것이 도리이니라. 왕자를 끌고 와라! 내가 직접 벌을 내리리라!”   추상같은 왕의 명령에 신하들이 왕자를 결박시킨 채 끌고 왔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이 보는 자리에서 왕은 왕자 앞에서 칼을 치켜들었습니다. 차마 왕자의 눈을 빼내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신하들과 백성들은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곧 비명이 들려 눈을 떠보니 왕의 눈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위는 사랑의 희생에 대한 이야기들인데, 성경은 인류를 사랑하셔서 인류가 죄로 인한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생명을 희생시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는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래와 같이 인류의 모든 죄를 해결하기 위해 희생해야 되는 담당자로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한 사랑의 희생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위핑보이란 영국 왕조에서 왕자의 훈육을 위해 도입한 방법이며 튜더 왕조 시대에 왕실에서 그 직무를 담당하는 사람을 일컫는 공식 명칭이었다. 이는 또 왕자가 잘못을 저지른 경우 그의 충실한 신하이자, 벗인 위핑보이를 대신 체벌해 그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다시는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는 교육법이었다.”(여성신문, 2016.11.3.)   위는 ‘대신 매 맞는 소년’이란 의미의 ‘위핑 보이(whipping boy)’에 대한 기사입니다. 왕이 사랑하는 왕자의 몸에 손을 대지 않으면서도 죄에 대해 합당한 심판을 행하는 법을 지키기 위해 왕자의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는 소년이 있었던 것입니다. 본래 프랑스 왕실에서 시작됐던 이 관습을 영국 왕실도 본받았는데, 마크 트웨인의 동화 ‘왕자와 거지’에도 위핑 보이가 등장합니다. 이 관습은 명예혁명 이후 자연적으로 소멸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위핑 보이와 같은 희생양(scapegoat)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500여년 전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온 뒤부터 백성들이 범죄하면 심판이 뒤따랐는데 이 희생양을 통해 심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범죄를 하면 그 죄로 인해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했지만, 자기 대신 흠 없는 양을 끌고 와서 양의 머리에 손을 얹고 죄를 전가한 후 그 양을 죽임으로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속죄양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불하기 위해 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위와 같이 그리스도는 어느 개인을 위한 희생양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죄를 영원히 대속하는 희생양으로 이 땅에 임했습니다. 인류의 죄를 넘겨 받고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생명을 드려 인류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함으로 인류를 영원한 속죄의 행복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길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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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1
  • [‘그 사랑’ 율법의 요구 4화] 이방인들을 주님과 화목케 하는 종
        주님을 본받아 계명 지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주 안의 그리스도의 사신   성경 해석은 영이요 생명의 말씀으로 구속사적인 관점에 입각한 규범으로 지혜를 얻게 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은 주께서 본을 보이신 것과 같이 그 자취를 좇는 지체들의 몫의 행함에 성령이 동행하심으로 이루어 가신다. 고린도후서 5장15~21절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으로 앎을 주셨다. 거듭난 지체들의 행함에 대한 말씀이다. 곧 주와 합하여 한 영을 이룬 자는 자신을 살리신 그리스도의 사신의 삶임을 확증해 준다. 죄사함을 입어 의에 이른 새로운 피조물이기에 자신의 육체는 이미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죽었다는 출발이다.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구속사역에 참예를 위한 삶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믿음의 증거처럼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져야 하는 마땅함의 몫을 새기게 한다. 살아도 주를 위함이고 죽어도 주를 위함이 되어 살리는 일에 참예이기에 이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심이다. 곧 누구든지 주와 합하여 한 영을 이룰 수 있도록 진리를 사수하며 전파하고 지키게 하는 제자 화에 존재 목적임을 강조한다.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한 일들이 되어질 수 있도록 새피조물로 몫에 성화이다. 자신이 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면 그 자취를 좇아 이웃을 살리는 영적인 구속사역에 성령과 동행하는 존재임을 확증케 하신다. 다시말해서 바른 지혜를 주시어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주의 나라 확장하는 이웃 사랑의 몫에 자신을 드리게 하시는 계명지킴이다.   요한일서 2장 2절~6절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하심에서 대속제물이 되어주셨다는 목적을 제시하여 연계시켜 주셨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라고 하시어 주의 영으로 거듭난 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자임을 확증해 주신다. 곧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는 말씀을 하시어 하나님의 의가 된 자에 충성과 주님의 자취를 좇는 일에 순복임을 확증케 한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주를 믿고 좇아 죄사함 받는 일에 자신을 힘써 드리는 구속사역의 자취를 좇는 주의 뜻에 순복이다. 주를 사랑함에 충성하는 앎에 믿음과 행함의 마땅함임을 확증케 한다. 전도로 주의 제자화를 하는 자는 진리가 그 안에 있는 자요 주 안에 살며 주를 본받는 자임을 확증해 준다. 주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새 생명을 얻게 하심과 같다. 곧 주께서 우리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어주신 이유와 목적이며, 그 뜻에 충성으로 온유케 하심을 확증하는 바이다. 주께 사랑 받은 종의 존재 목적은 이방인을 주의 백성되게 하는 선함이기에.../ 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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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1
  • 보이는 소망은?
      로마서 8장 22절부터 25까지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신음하며 성령의 첫 열매들을 가진 우리들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오직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느니라.(롬8:22~23) 왜 모든 피조물들이 신음하는가? 이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여 처음에 아담에게 주시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스리라(창1:26)고 하셨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 계명을 어기고 옛 뱀인 마귀에게 넘어가 곧 그의 종이 되고 말았다.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니라 하심과 같이 모든 피조물들을 아담으로부터 마귀가 넘겨 받았다. 즉 마귀가 세상 임금이 되어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은 마귀에 의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이 되었다. 이것이 피조물이 고통스럽고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또 성령의 첫 열매들을 가진 우리들, 즉 오순절에 강림하신 보혜사 성령 받은 우리들도 이 세상에서 성령으로 순종하며 열매맺으며 산다. 그러면서 이 세상 임금과 싸우며 고난, 핍박 받으며 결국 순교까지 하게 된다.   즉 예수안에서 고난 속에 신음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무한정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이 이뤄질 때까지만 신음할 뿐이다. 여기서 양자 될 것은 원문 휘오데시아로서 곧 아들이 되는 때다, 우리 몸의 구속이 이뤄질 때이다, 즉 우리 몸의 부활의 때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산 소망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 되는 것이다. 베드로의 경우를 보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서 거듭나게 됐고 유대인의 사도로서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다. 예루살렘 교회를 세웠고 마침내 순교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는 그가 부활의 주님이 주신 사명, 하늘의 순교자의 영광의 산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산 소망에 의해 구원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했다 (롬:24). 육의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소망이나 또는 육신을 위한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따라서 주님은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셨다(요일2:15-17).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육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 즉 영적인 하늘 나라의 영생의 기업이 우리의 소망이다. 이는 영원불변한 참 소망이요, 즉 살아 있는 소망이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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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31
  • 사랑과 정의, 그 변증법적 통일의 명제(5) -이청준의
      고(故) 김현 평론가는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에 대하여 말하기를 “표면적인 구조만으로는 <당신들의 천국>은 조백헌이라는 야심 많고 정열적인 한 인물의 무용담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진정한 의도는 그 조백헌의 단순한 제시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인물에 대한 복합적 비판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복합적 비판’의 역(役)을 맡은 이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이상욱(병원 보건과장)이란 주요인물을 지명하였다.   그리고 이상욱이 그 자신의 비판적 안목으로써 행한 일 중의 하나가 “조백헌이 소록도에 천국을 세운다는 미명하에 그가 실제로 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명예욕이나 과시욕을 충족시키자는 것이었다.”는 판단을 하고서, 조백헌이란 사람은 결국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는 인물”이라고, 달리 말해 일종의 위험분자라고 하는 혐의를 두고 늘 감시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 결과, 조백헌이 매사에 그(李)에 의해 브레이크가 걸리고 자기 뜻(욕망)대로 일을 추진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는 의미로 풀이하였다. 그렇게 볼 때 이 인물(이상욱)의, 이 작품 가운데서의 위치가 남다르다는 점을 우리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런데 김현 평론가는 이상욱이란 인물과 관련해 또 이렇게도 바라보았다. 즉 작가 이청준은 그의 소설 속에서 대개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데, 그때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회의나 불안을 통해 그가 비평하고자 하는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더 정확히 말해, 모순 그 자체가 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당신들의 천국>에서도 그런 지식인 유형에 꼭 일치되는 한 인물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이상욱이란 인물이라고 콕 짚어 말하였다. 그리고는 이어서, 영광과 오욕이 점철된 그[李]의 과거를 상기시키면서, 그런 그가 식민지 시대의 한 작가를 염두에 두고 작가가 구성한 인물이 아닌가, 추측해 보기도 하였다.   김 평론가는 조심스럽게 그가 ‘식민지 시대의 한 작가’가 아니겠는가 추측할 뿐이라고 했지만, 필자의 판단으로는, 김 평론가가 암암리에 지목했던 작가가 바로 춘원 이광수였다고 생각된다. 일제 강점기에 영광과 오욕이 점철된, 대표적인 불운한 지식인 작가로 이광수를 든 것에 반대할 독자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상욱의 모델이 이광수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게 본의는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밝히면서, 이와 관련해 다른 문제(사례)로 넘어가 보고자 하는 것이다.   김 평론가가 이상욱의 모델이 이광수가 아니겠는가, 하고 조심스럽게 제기한 바 있지만, 필자는 여기서 주인공 조백헌의 모델은 실제로 사도 베드로가 아닌가, 하고 개연성 있는 제의를 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기서 즉흥적으로 하는 제의가 아니란 점을 밝혀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미 1999년에 펴낸 어느 저서에서 필자는 그 문제와 관련해 이렇게 운을 떼었다. “작가 이청준은 <당신들의 천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구약 창세기(11장)에 나타난 바벨탑의 교훈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아래와 같이 써 나갔다.   “고넬료가 세례받기 직전까지, 베드로는 예루살렘교회 할례자의 무리 속에서 히브리파 신도들 주도의 ‘교권주의 바벨탑’을 쌓아올리던 장본인이었다. 그는 이청준 소설 가운데의 조백헌 원장과도 같은, 그 집단의 명실상부한 수장이었다. 그러나 그가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동상에의 욕망이 ‘우리들의 천국’ 건설보다는 ‘당신들의 천국’ 건설에 더 열을 올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을 보게 된 스데반의 헬라파 신도들이 베드로의 바벨탑 축조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스데반은 이 소설 속의 황희백 장로의 위치에 처해 있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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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31
  • 요한 '선포의 복음'
        신약은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기쁜 소식, 복음서로 시작한다. 요한복음은 예루살렘이 함락된 AD70년 이후 20여 년이 지나 복음서 중 가장 늦게 요한과 그의 공동체에서 기록했다. 갈릴리에서 자신의 배를 소유하고 종들도 있었던 부유한 어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대사제와도 잘 아는 사이여서 예수님 재판 중에 사제의 저택 안뜰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두 형제는 성격이 불같아서 예수님께서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고 별명을 주셨는데 형 야고보는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였던 것 같다. 예수께서 왕이 되시면 두 아들을 좌·우 정승이 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제자들은 모두 다 도망갔고, 요한만은 골고다 십자가 밑에 있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 모실 것을 요한에게 부탁하셨으나, 실은 천방지축 번개 돌이 요한을 마리아에게 부탁하셨음이라. 불같은 요한은 밧모 섬에 유배되어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요한 1·2·3서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사도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에베소에서 와석종신(臥席終身)했다고 전해진다. 새 중에 가장 높이 나는 독수리로 상징된다.   요한복음은 첫 줄부터 확신함으로 선포한다. *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요1:1) *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요1:1) *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요1:2)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짐을 받았다. (요1:3) * 그 안에 생명이 있다. (요1:4) *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요1:4) * 영접하는 자에게 권세를 주신다. (요1:12) *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요1:14) * 그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시다. (요1:18)   믿음은 신념이고 확신이다. 믿는 대로 이루어지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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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31
  • [건강교실] 만성피로증후군의 재활치료
        만성피로증후군은 현재까지 특별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과로나 스트레스, 감염이나 면역체계 이상, 내분비 이상 등 여러 요인이 관련돼 생긴다. 정신적으로는 신경불안이나 우울증, 육체적으로는 만성적인 피로와 통증 등을 야기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끼치는 질환이다. 이에 대한 치료에는 약물치료 외에 운동이나 행동요법 등의 다방면적인 접근이 필요한데, 적절한 스트레스 조절법을 익히고, 피로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는 과도한 운동이나 업무를 삼가는 규칙적인 생활에 의해서 치유될 수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육체적인 운동이 만성피로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지나친 휴식도 오히려 질병에 매달리게 해, 현재는 ‘점진적으로 강도가 증가되는 꾸준한 운동’이 운동치료의 원칙으로써 추천된다.   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운동종목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급격한 운동피로를 유발하지 않는 스트레칭, 요가, 태극권, 걷기, 등산 등을 권할만 하다. 개인에 따라 특별한 금기사항이 없다면 본인의 취미와 관련된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 만성피로증후군의 치료 측면에서 중요한 점은 규칙적이고도 꾸준히 시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일주일에 3일 이상, 1회에 20~30분정도의 유산소 운동을 하는 것이다. 유산소 운동은 조깅, 속보, 에어로빅, 줄넘기, 자전거, 수영, 등산 등 호흡을 충분히 하면서 할 수 있는 운동을 말한다. 이러한 규칙적인 유산소 운동은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해 스트레스 해소나 체력의 증진, 그리고 만성 질병의 조절에 큰 도움을 준다.   그렇다면 운동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 운동강도는 가장 보편적인 심박수 측정으로 정하는데, 가장 알맞은 심박수는 자신의 최대 능력에 50~80% 되는 심박수로 하는 것이 좋다. 정확한 강도 설정을 위해서 운동부하 검사를 받는 것이 좋지만, 간편한 방법으로는 220에서 자신의 나이를 뺀 최대심박수 수치의 60~85%의 강도가 추천된다. 이렇게 계산한 목표심박수 하에서 자신의 1분간 심박수를 측정해서 운동의 강도를 맞추면 된다. 심박수 측정 위치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부위가 목과 손목의 혈관이다. 그러나 목의 경우는 너무 세게 누르면 심박수가 낮아질 수 있어, 흔히 손목을 권장한다. 운동을 하면서 피로를 느끼면 해소해야 할 만성피로가 오히려 악화될 수 있기 때문에, 피곤감을 느끼기 전에 운동을 중단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만성피로증후군 환자에겐 정리운동이 중요하다. 운동을 하면 우리 몸에는 피로 물질이 쌓인다. 이때 정리운동으로 이러한 물질들이 빨리 분해, 제거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리운동으로는 간단한 마무리 스트레칭 체조, 심호흡을 원래대로 정상화시키도록 천천히 시행하는 제자리 걷기, 많이 사용한 근육에 얼음찜질, 가벼운 마사지 등이다.    덧붙여, 만성피로증후군의 심리적인 면을 다스리지 못하게 되면 치료효과가 부족할 수 있으므로 심리적인 안정을 가져올 수 있는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법과 긍정적인 사고방식, 낙천적인 생활태도 등의 행동요법 등을 병행하는 것이 관건이다. /한양대학교병원 재활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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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8
  • 묵상과 정신건강(3)
        한 연구자가 피험자의 뇌 속 세타파 발생을 촉진시켰더니 하루에 새로운 외국어 단어를 500개를 가르칠 수 있었고, 또 이렇게 학습한 단어를 6개월 후까지 평균 88%를 기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학습능력이 증가하는 이유는 세타파가 기억응고 과정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매번 정보에 노출될 때마다 기억이 산술적으로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숫자적으로 덧붙여진다. 이것은 기억통로가 트여서 세타파가 활성화됐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같은 정보를 다섯 번 보았다면 그 정보를 다섯 배를 잘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스무 배 정도 더 잘 기억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묵상이 세타파를 발생시켜 인지 기능을 향상시켜주는 것 외에도 신체적 운동 능력도 탁월하게 높여준다. 스포츠 경기에서 대기록을 수립한 사람들은 운동 경기 도중 묵상 상태에 이른다고 한다. 운동 도중 세타파가 발생하게 되면 고통, 피로감, 실패에 따른 공포감 등은 사라지고 최상의 쾌감이 동반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묵상 상태에서는 강력한 정신적, 신체적 힘을 얻게 된다. 이 힘은 스트레스를 무력화시키면서 정신적, 신체적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묵상은 심신의 기능을 크게 향상시켜주며 삶의 적응과 건강에 유익하게 작용되는 것으로 확신할 수 있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 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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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8
  • 어두운 통계를 밝혀줄 거룩한 통찰의 빛
        기독교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통계들이 그야말로 파도처럼 밀려온다. 뉴스와 설교는 물론이고, 학계에서도 통계의 인용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올해 한국교회 6대 주요 교단 교세가 작년(703만 8298명)보다 19만 4862명(2.8%)이나 감소했다는 통계를 최근 접했다. 정점 대비 줄어든 수치나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가나안 성도의 증가는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수많은 통계의 거센 물결에 휩싸여 이리저리 표류하는 느낌이다. 어느 날 집으로 오는 길에 엉뚱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교회의 급성장이 숫자와 그래프로 나온다면 어떨까? 정말 엄청나겠다!” 상상해보라.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하나의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하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기독교에 귀의했을까? 기독교공인(주후 313년)으로부터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표(주후 380년)하기까지 70년이 걸리지 않았으니 현기증을 일으킬만한 고속성장이었을 것이다.   정작 문제는 그 이후에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발생했다. 교회 건물은 바실리카와 고딕으로 그 위용을 과시하게 되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로마의 시의원들과 견줄 만큼 존경과 권세를 누리게 된다. 교회의 성장에 따라 세례자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겠다는 세례자들의 결기는 찾기 힘들게 되었다. 지하교회의 처절한 신앙고백도, 가정교회에서 이루어진 성별과 신분을 초월한 환대의 정신도 그 빛을 잃게 되자 안토니우스와 같은 이는 주님의 빛이 사라진 교회를 뒤로하고 아예 사막에 자리를 잡았다. 기독교인의 수가 늘어났지만 생명의 복음을 담았던 수많은 고귀한 흔적들은 가리어지거나 자취를 감추었다. 통계는 숫자일 뿐이며 복음적인 삶은 성도의 수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음을 교회의 역사는 이렇듯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온갖 부정적인 예측이 난무하는 요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현상을 바라보는 거룩한 통찰이요 안목이다. 지금이 한국교회의 허수와 허상이 가져온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가시적인 성장에 취해 진지한 내면의 성찰이 부족했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규모와 업적의 강박 속에 갇혀있지 말고 참된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교회로 갱신되고 회복하는 시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부흥(Revival)은 다시(re) 생명을 회복하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주님의 찬란한 빛을 드러낼 시간이며 신앙인의 참모습을 보여줄 때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꿈을 나의 꿈으로 삼고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일 것이다. 생명의 복음이 우리의 일상을 통해 오롯이 번역돼 낱낱이 전달되길 소망한다. 그 옛날 믿음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완전히 다른 수준의 삶의 방식으로 존경과 경이, 동경의 대상이 되어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기도한다.   통계는 우리를 암울하게 만들지만 거룩한 통찰은 그것을 회개와 성숙을 위한 유익한 자료로 만들어주고 우리를 주님의 찬란한 빛으로 인도해준다. 부정적인 통계를 마주하며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자. 주님의 밝은 빛으로 나아가자. 빛의 자녀로 힘차게 소망의 발걸음을 내딛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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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8
  • 행복신앙세미나 19
    (행복신앙연구소장 제임스강 목사 www.bog.or.kr)  죄 사함의 복을 통한 참된 쉼과 평안       “단지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주장을 했다면 그는 위대한 도덕적인 선생이 전혀 아닐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입니다.”(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중)   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스승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정신병자’ 이거나 ‘하나님의 아들’ 중 한 존재로 선택해야 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번은 암행어사가 어느 고을을 지나다가 용한 점쟁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백성을 속이는 자라는 의심이 들어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사주를 봐달라고 요청하자 점쟁이는 글자가 적힌 종이 묶음을 내밀면서 하나를 잡아보라고 했습니다. 어사는 죽 보다가 점 복(卜)자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점쟁이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는 “어사또 나리!”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어사는 극구 부인했지만, 계속 어사임을 주장하는 점쟁이에게 어떻게 자신의 신분을 알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점쟁이는 “나리가 잡은 점 복 (卜)자는 사람에게 쇠붙이가 하나 달려 있다는 의미인데, 그 쇠붙이가 마패가 아니고 뭐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기가 막힌 어사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거기를 떠나 거지 한 명을 불러 선비 행색으로 꾸미고 점쟁이 집으로 보내면서 역시 ‘점 복(卜)자를 잡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거지가 점 복(卜)자를 잡자, 점쟁이는 “이 거지가, 당장 안 꺼지면 맞아죽을 줄 알라.”고 하면서 몽둥이를 찾는 게 아닙니까!   부리나케 도망 나온 거지의 이야기를 듣고는 어사가 다시 찾아가 어떻게 그 사람이 거지인 줄 알았냐고 묻자, “점 복(卜)자는 마패가 아니면 깡통을 찬 사람인데, 글자를 거꾸로 잡는 것을 보고 거지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인류 역사에 많은 스승이 있었지만, 위와 같이 이야기한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분은 행복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위기를 통해 한류 산업이 새롭게 각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승리 게이트’가 알려지고 엔터테인먼트 주가가 폭락하면서 엄청난 금전적 손실을 봤기 때문에, 기획사와 연예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선택이 산업 전체에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지 제대로 목격했다. 과거처럼 죄를 덮는 것은 어려워졌고 연예인으로서의 커리어가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앞으로 더 조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한국경제, 2019.3.25.)   위는 2019년 한국 사회를 들썩이고 있는 ‘승리 게이트’에 대한 기사 내용 중 한 독일 기자의 논평입니다. ‘승리 게이트’는 2018년 11월 말에 발생한 클럽 버닝썬 폭행 사건에서 시작된 연예계와 유흥가의 게이트로, 처음에는 평범한 연예산업 종사자가 클럽 가드들로부터 단순폭행을 당한 사건으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클럽과 경찰의 유착 의혹, 마약 투약 의혹, 탈세 의혹으로 번지다가 버닝썬 실소유주로 알려진 전 빅뱅 멤버 승리의 성매매 알선 및 성접대 의혹으로 1차 폭발했고, 이후 그의 절친이었던 정준영의 불법 촬영 동영상 공유 사건으로까지 번지며 2차 폭발 후 5명의 연예인이 동시에 은퇴 또는 퇴출 수순을 밟게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일부 경찰뿐만 아니라 대형 연예 매니지먼트사까지도 연루되면서, 마침내 ‘승리 게이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불행한 사건입니다. 이처럼 죄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 즉 피해자나 가해자에게나 불행을 주는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죄가 늘어날 때마다 우리의 슬픔도 늘어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매튜 헨리)   위의 언급처럼, 죄는 반드시 불행을 가져다주기에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의 짐을 해결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성경과 찬송가도 다음과 같이 죄 사함의 복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 4:7,8)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새찬송가 43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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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6
  • 행복신앙세미나 18
    (행복신앙연구소장 제임스강 목사 www.bog.or.kr)  행복의 의식 전환     “모든 가족에게는 크고 작은 비밀이 존재한다. …비밀의 유형은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에서 자신의 DNA를 체크해보는 테스트가 인기를 끌면서 가족 내 비밀이 더 이상 숨을 곳을 잃고 있다.”(중앙일보, 2019.2.14)   위의 기사처럼, 현재 미국에서는 100달러 정도의 가격에 DNA 테스트 업체 50여개가 성업 중이라고 합니다. 특히, 과학저널인 ‘지놈 바이올로지’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2021년까지 자신의 DNA를 테스트했거나 해보겠다는 사람의 수가 1억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DNA는 각 생명체의 특성에 대한 정보들이 입력되는데, 그 정보가 후손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유전 물질입니다. 그래서 DNA를 통해 생명과 유전에 관한 여러 테스트가 가능합니다.   한 번은 미국의 애틀랜타 에몰리 대학에서 벚꽃 향기를 추출해서 쥐들에게 풍겨주는 실험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벚꽃 향기만 맡게 하면서 쥐들의 DNA 검사를 해보았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벚꽃 향기를 풍겨주면서 고양이 울음소리와 함께 전기를 바닥에 흘려보냈습니다. 그러자 쥐들이 엄청나게 놀라며 큰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10일 간을 계속 시행한 후 쥐들의 DNA를 검사해 보니 DNA가 변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DNA가 변해 있는 수컷 쥐들과 그 실험을 받지 않은 암컷 쥐들과 교미를 시켜서 새끼가 나왔는데, 고양이와 전기에 대해 아무런 경험이 없는 새끼 쥐들도 벚꽃 향기를 풍겨주니 깜짝 놀라며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조사를 해보니 그 새끼 쥐들도 수컷 쥐들의 DNA를 물려받았던 것입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후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는데, 그 후 태어난 수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죄와 불행의 DNA가 유전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죄와 불행의 DNA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만날 때 변화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   “고통에 대한 의식을 바꾸지 않는 한 행복은 없다. ... 의식을 바꾸면 고통은 반드시 행복이 된다.”(스카이데일리, 2019.3.7)   위의 기사는, 행복은 고통에 대한 의식의 전환에서 비롯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불행에서 행복으로의 전환은 의식의 전환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한 왕이 큰 상을 주겠다면서 백성들에게 꽃씨를 받아 잘 가꾸어보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왕궁에서 주는 꽃씨를 받아 화분에 심고 온 정성을 다하여 가꾸었습니다.   그 중에 한 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 역시 정성껏 꽃씨를 돌보았지만 싹조차 트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고민하던 아이는 혹시 흙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싶어 흙을 바꿔보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왕이 지정한 날이 다가왔습니다. 온 백성이 형형색색의 고운 빛깔과 향기를 품는 꽃들을 예쁜 화분에 들고 왔습니다.   왕은 천천히 백성들 사이를 지나다녔는데, 이상하게도 아름다운 꽃들 앞에서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왕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푹 숙이고 빈 화분을 들고 있는 아이 앞에 오자 왕의 얼굴이 펴지며 “어째서 빈 화분을 들고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임금님, 정말 죄송합니다. 꽃씨를 화분에 심고 아무리 정성껏 가꾸었어도 싹조차 나지 않아서...”   아이의 답변을 듣자 왕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봐라, 이 아이에게 큰 상을 내려라! 이 아이만이 진실의 꽃을 아름답게 피웠도다!”   사실 왕이 백성들에게 준 꽃씨는 이미 삶은 것이었습니다. 왕이 상을 주고 싶었던 사람은 꽃을 아름답게 피우는 거짓된 사람이 아니라, 아무 꽃도 피우지 못하는 진실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마 12:34)   예수님은 선(善)의 꽃을 피우려는 사람들에게 위와 같이 충고하신 반면, 선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죄 사함의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이 없는 모습이,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인간의 진실된 모습임을 받아들이는 행복의 의식전환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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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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