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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레모스 영성10] 광야를 닮은 소리(1)
    광야로 일컬어지는 곳을 연상할 때 떠올려지는 첫 이미지는 ‘거칠다’일 것이다. 영어표현 그대로 와일드(wildness)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약간의 의미를 덧붙여 야성(野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광야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거칠고 투박한 채로 남아 있기에 자연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문명이나 문화는 사람의 인위적 행위가 더해지게 된 결과물인데 이에 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추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창조의 세계 저 편의 암울한 파괴 현장을 목도하게도 한다.   구약 신명기는 ‘다듬지 않은 돌’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도록 하고 그러한 돌들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가르친다. 자연석에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인류의 문명사가 이어져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결코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 즉 하나님께 대한 충직한 신앙 그 자체를 성경은 ‘자연석’으로 상징하고자 했다. 곧 벧엘 야곱의 돌 그리고 요르단 강 길갈의 12개의 돌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돌, 변하지 말아야 할 돌 그래서 신앙은 그러한 돌과 함께 대대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나는 ‘광야를 닮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광야의 그 자연스러움, 꾸밈없음, 있는 그대로의 모습, 다소 거칠게 느껴지고 세련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말하면서 그 배경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과는 대조되는 순박한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우리는 광야의 풍미(風味)와 광야의 야성(野性)을 닮은 영성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이른바 광야의 소리가 주는 울림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울림을 전하고 싶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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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 성서와 생활 [22]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만찬의 영성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지성소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림을 받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주님이 구원의 영원성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성만찬을 행함으로 구원의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기를 원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주님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갓 죽임을 당한 것”계5:6같아야 한다.    예배의 현장 속에서 성만찬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들의 축복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태도에 있다.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 자리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세상에 속하여 죄의 유혹에 빠져 의심 많은 자들을 온전케 하는 것은 십자가를 기념할 때이다. 흔들리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안전한 구원의 피난처가 된다.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십자가의 구원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어린양이 있다. 계시록이 보여주는 놀라운 사실은 어린양에 대한 영성이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원한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십자가의 새로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에서 매일 밝히 보이는 사실이 되어야만 한다. 십자가를 잃어버린다면 영적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3:1십자가를 통해 항상 감동을 받는 믿음이라야 한다. 우리의 영과 마음과 생각 속에 십자가의 사역은 살아 역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항상 새로운 길이 되어야 한다. 항상 살아 있는 영원한 십자가의 계시를 통해 감동받는 영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영성이 있다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날마다 십자가의 이상을 새롭게 볼 때 죄에 대하여 영원히 죽은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죽는 믿음의 체험을 매일 새롭게 가지게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함께 함으로 그 피가 우리를 옛 창조의 근거를 제거해 버린다. 혈과 육이 제거되니 화를 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로써 성만찬의 예식은 예배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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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4) 나로 네 용모를 보게하라
    우리는 앞서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자 꽃이 피고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린다. 이를 영적으로 잘 깨달았다. 즉 장차 있을 환란과 주 재림과 천년왕국의 신비한 비밀들이다.    2:13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들이 구원의 열매를 내는 것은 무화과나무로서 푸른 무화과 열매를 내는 것이다. 또 포도 넝쿨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참 포도나무에 붙은 넝쿨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또 제자와 같은 신앙인 순교한 자들을 가리킨다.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재림하신 주께 찬송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 떠나자’는 ‘함께 떠나자’고 말씀하심과 같다. 앞의 10절에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는 신부에게 ’일어나서 함께 떠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단계를 거쳐 온 것이 13절이다. 본문에 ‘함께 떠나자'는 영적으로 계속해서 성도의 신앙을 진전시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계시한다. 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곳으로 주님과 함께 떠나자는 말씀이다.    2:14 바위틈과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 있는 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고 나로 네 음성을 듣게 하라. 네 음성은 달콤하고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오 나의 비둘기야'는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를 부르는 호칭이다. 여기서 신부 성도 될 자의 호칭이 바뀐 것은 신앙이 더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마10:16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했다. 즉 비둘기는 신부의 신앙 정절을 가리킨다. 주님이 사랑하는 신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정절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중심이 되면 ‘오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바위틈과 가파를 산 은밀한 곳에서는 깎아진 절벽 밑의 검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틈 은밀한 곳은 악한 들짐승과 바다의 짐승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써 안성맞춤이다. 이와 같은 피난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 자는 풀무 불이나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끝까지 신앙 정절을 지킨다. 우리의 피난처가 어디인가? 참 피난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라 하심은 신부의 용모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신부 얼굴에 면사포를 쓴 것과 같이 가리워서 오직 신랑 예수에게만 보여준다. 신랑 예수님만이 신부의 얼굴 위에 있는 베일을 벗겨서 보실 수 있다. 그럼 왜 신랑 예수님이 신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온몸으로 열매 맺고 이긴 것의 결과는 얼굴에 영광이 나타난다. 사람의 인격의 대표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신부의 용모를 보기 원하시는 것은 네 자신의 온몸(인격)이 변화된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도의 신앙 변화의 마디마디가 있었다.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던 때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던 때도 있었다.      앉은뱅이처럼 신앙의 침체기도 맞았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일으켜주셨다. 주님과 한 몸 되어 주님의 사랑을 채워주셨다. 계속하여 변화시키는 역사를 해주셨다. 이제 얼마나 변화됐는지 신부의 모습을 보려고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인격으로 변화된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또 주님은 신부의 음성 듣기를 원하신다. 음성은 사상을 의미한다. 주님 없이는 못산다고 울고불고하던 상사병이 고쳐진 것이다. 즉 인본적인 신앙에서 신본적인 신앙으로 바꿔진 것이다. 그 신부의 사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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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성서와 생활 [21] 그리스도인의 영성-십자가 생명의 영성
       십자가는 주님의 사역으로 끝나지 않고 믿는 자들의 길이 되어야한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뜻은 인간 죄를 대속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을 십자가의 역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십자가는 체험을 통해 우리의 일상의 삶이 되기를 원하신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면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서 생명을 전달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2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며 예수님의 생명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자랑했다.갈6:14‘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사도 바울을 주님을 위해 모든 고난을 견디셨다. 십자가를 최고의 능력으로 여기고 주님을 위해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십자가가 바울의 삶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요 정신으로 충만하였다. 그 결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도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던 사울 바울의 삶을 배워야 한다. 주님을 위해 언제라도 죽음에 넘겨질 각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다른 사람에게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모든 말을 체험적으로 알아 성령의 통로가 될 것이다. 전하는 말과 함께 행할 능력도 줄 수 있는 십자가 생명의 삶을 살게 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8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몸에 계속 적으로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했다. 우리의 생명도 십자가의 생명을 가진 자라야 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사도 바울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는 날마다 경험하는 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들을 주님의 정신으로 견딜 수 있어야한다. 바울처럼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는 십자가의 생명으로 성령의 통로가 되어야만 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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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0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3)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으니
       주님의 음성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달콤한 말씀은 나를 신부로 데리러 오신다는 말씀이다. 2:10 나의 사랑하는 이가 내게 일러 말하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 자.” 9절에서 발생된 문제점들을 10~12절에서 고쳐주시면서 신앙을 바르게 세워 가신다. ‘일어나 떠나자’ 하는 것은 주님이 주저앉아 있는 자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앉은뱅이는 다윗성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다(삼하 5:8). 다윗성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셔서 세우시는 천년왕국의 그림자로 계시한 것이다. 신부로 세우시는 과정에서 영적 상태가 주저앉아 있는 자이나 그 중심은 어여쁜 자이다.   재림 주님을 신랑으로 맞이하고 그분과 함께 천년왕국의 기업을 받는 자가 되려면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으키신다.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말씀하신다. 9절에서 보여준바 뭉개고 앉아있는 신앙에서 탈피해 첫째부활의 영광의 자리로 함께 나아가자는 것이다.   2:11 보라.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쳐 사라졌으며 2:12 땅에는 꽃들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는 때가 왔도다. 산비둘기의 소리가 우리의 땅에서 들리는도다. 11~12절의 내용은 장차 될 일을 예언한 것이다. 9절에서 주님과 함께 일어나 떠난 자에게 해당된다. ‘보라’는 영적인 눈으로 보고 깨달으라는 말씀이다. ‘겨울도 지나고’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봄에는 복음의 씨를 받아서 예수를 믿게 된다. 여름에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 계속 열매를 맺어간다. 가을에는 결실이 되고, 겨울에는 결실된 것을 저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름과 같은 지금의 은혜시대 때 결실하여 순교의 신앙에 세워진다.    그리하여 대환란의 겨울에 순교케 되어진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그 핵심이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을 뗄 때에 전개되는 일들이요, 곧 환란 날의 사건들이다. 이 계시록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때가 곧 겨울이다. 비도 그쳐 사라졌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 심판의 때가 끝났다는 의미이다. 노아 홍수 때 내린 비는 심판의 비였다. 이윽고 7년 환란과 하나님의 심판이 끝난 후 땅에는 꽃들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는 때가 왔도다. 주의 재림으로 세워지는 새 하늘 새 땅, 즉 천년왕국의 때를 가리킨다.    모든 것이 꽁꽁 얼고 푸르른 것이 전혀 없는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이 겨울의 7년 환란이 지나면 에덴동산 같이 새롭게 회복되는 때가 오리라. 땅에는 꽃들이 핀다. 바로 이 땅에 꽃이 피는 것이 나와 직접 관계됨을 믿고 깨달아야 한다. 꽃이 피는 것은 내가 영광을 입은 존재가 될 것을 계시한다. 그리고 새들이 노래하는 것은 내가 새처럼 노래하는 자가 될 것을 계시한다.    즉 내가 입게 될 영광으로 인해 새와 같이 노래하리라. 두 날개로 날개 짓하며 찬송하며 감사드리는 것을 말한다. 산비둘기의 소리가 들린다. 이는 주님이 재림하신 이후에 천년왕국에서 기뻐하는 소리를 가리킨다. 비둘기같이(마10:16) 신앙의 정절을 끝까지 지켜 순교함으로써 천년왕국의 복을 받게 됐으니 기뻐하며 찬송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땅’의 우리는 아1:11의 ‘우리’와 같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 아버지가 이미 영광, 즉 천년왕국의 분깃을 내게 주려고 예비하신 그대로 다 이루어졌으니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땅이다. 또 예수님 안에서 이루셨다. 주님의 피로 우리의 죄들을 사해 주셨다. 또 주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부어주시고, 일곱 단계까지 성령 충만케 하시어 일곱 영까지 부어주신다. 환란 날에 이 일곱영으로 순교케 해서 천년왕국의 복을 받게 해주셨으니 주님의 땅이 된 것이다. 또 성령인 일곱 영으로 순교케 하여 구원해 주셨으므로 성령 하나님의 땅이 된 것이다. 이와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땅, 즉 우리의 땅이 되었다. 천년왕국의 복을 받게 된 자가 곧 우리의 땅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 · 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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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0
  • [에레모스 영성9] 광야를 길 삼아 (3)
    우리가 무심코 걷는 길이지만, 그 어떤 길이든 처음으로 길을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30여 년 전에 장락산 기슭의 ‘가락재’라는 터를 구입했다. 평생 처음 내 이름으로 된 땅을 얻었을 때의 그 기분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러나 지적도상으로도 맹지였기에 집을 지으려면 길을 넓혀야 했다. 몇 개의 개울에 건널 다리를 놓고 높은 구릉을 낮추고 낮은 골은 메우면서 길 닦는 그때의 경험은 그 이후 이어지는 수십 년의 가락재 세월을 암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라 하더라도 그곳까지 이르는 길이 없다면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들은 다 창조하셨으나 길은 예외였으며 그것은 우리의 몫이었다. 아니 하나님은 사람들과 함께 길을 내고 싶으셨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길은 여행이나 관광의 의미를 넘어서 인간의 삶과 죽음에 이르는 그 모든 과정을 예시하는 메타포(metaphor) 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태어나면서 처음 숨길이 트여 인생이 시작되고 꿈길을 걸으며 내일을 준비하고 등판 길을 통해 그 꿈이 이루어진다. 그리고는 인생 다 살고 나면 저승길이다.   구약 성경의 출애굽기와 민수기와 신명기에 자주 나오는 ‘광야 이야기’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구속사의 여정 곧 길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은 선택된 어느 한 민족의 40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 이야기는 우리들 이야기이며 그들의 광야 여정은 우리 믿는 이들의 신앙 여정이며 그들의 순례기는 우리의 순례기이다. 우리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걸었던 둘레길, 지름길, 덤불길, 벼랑길, 자드락길, 뒤안길, 벼룻길, 굽잇길, 샛길이 다 영성의 순례 길이었다. 시골의 오솔길, 고샅길, 논두렁길, 둑길 그리고 도시의 골목길, 가로수길, 가로등길 그리고 오대양을 넘나드는 항해로와 육대주를 가르는 육로, 우주를 달리는 항공로 또한 그렇다. 이 모든 길에 첫 발을 내딛은 사람이 있다. 길이 삶이고 길이 곧 영성이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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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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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3] 성경을 통해 본 기후 위기와 교회의 역할
    강성열 교수 (호남신학대학교 구약학)  예전에 없던 무더위와 폭염에 지구 공동체가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는 엘니뇨 현상과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위기가 기후재앙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러한 기후재앙이 출애굽 당시에도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출애굽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다. 그 재앙은 생태학적인 재앙들이요, 기후재앙이었다.     실제로 재앙의 희생물이 되는 자연계의 질서는 한결같이 자신의 정상적인 궤도로부터 이탈한다.     생명 부양의 가장 기초적 재료인 물이 피로 변하여 모든 물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며 사람들은 강물을 마시지 못하게 된다. 개구리들이 이집트 전역을 뒤덮고, 개구리의 사체로부터 생겨난 악취가 자연계의 질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이나 파리, 메뚜기 등이 이집트 전역에 몰려와서 땅과 그 안에 있는 사람과 짐승 및 초목 모두를 파멸 상태에 빠뜨리며, 악질과 독종 등의 무서운 질병과 우박 등이 사람과 짐승 모두에게 밀어닥쳐 많은 생명을 해친다.     이렇듯 이집트 파라오의 반창조적인 생명 파괴 행위에 대한 심판으로서의 열 가지 재앙은 한결같이 모든 피조물, 곧 물, 땅, 각종 동식물, 공기 등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물은 더는 물이 아니며 빛과 어둠은 더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곤충들과 양서류들이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며, 모든 짐승과 사람의 건강한 몸에 무서운 병원균들이 생겨나고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들 위에 덮인다. 그리고 기상이변으로 인해 생겨난 우박은 모든 식물을 치고 모든 나무를 꺾으며, 메뚜기 떼는 우박을 피해 남은 모든 것들을 파괴함으로써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가 된다.    참으로 그 재앙들은 그 시기나 범위, 강도 등에 있어서 자연계의 기본 질서를 훨씬 넘어서는바, 이는 지금 지구 공동체가 겪고 있는 기후 위기 상황을 훨씬 넘어설 미래의 기후재앙을 예견케 한다. 미래의 기후재앙이 현실화하면 자연계의 모든 요소가 피조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한계를 깨뜨리게 될 것이요, 온 세상이 마치 노아 홍수 시대와 마찬가지로 혼돈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 까닭에, 오늘의 한국교회는 기후 위기가 기후재앙으로 발전하여 지구 공동체를 파멸에 빠뜨리는 대재앙으로 그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지금 우리에게 닥친 지구 온난화의 현실적인 재앙을 막기 위해서라도 지구 온도가 더는 1.5°C를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탄소 중립적인 삶의 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며, 인간의 잘못된 행동이 자연계의 질서를 혼란에 빠뜨림으로써 행위 주체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종의 ‘부메랑’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피조물 전체가 사람들이 구속받을 날을 고통 중에 기다리고 있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로마서 8:19~22)을 늘 마음에 새겨두고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사랑으로 보살피고 돌보는 일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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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 [칼럼 2] 한국교회,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탄소중립, 나부터 실천
    김주헌 목사(한국교회총연합 기후환경위원장)  오늘 우리는 심각한 기후 위기 시대를 살고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 세계인 지구 환경을 돌보는 사명에 무관심하거나 소홀하였고, 전 세계인과 함께 지구의 평균온도를 상승하도록 하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기후 위기에 둔감하고 탄소 등 온실가스를 배출하며 지구의 기온을 높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올봄 이상고온으로 봄꽃 개화 순서와는 달리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한꺼번에 개화하였고, 지구촌에는 올여름 슈퍼 엘니뇨가 발생하여 폭염과 홍수, 가뭄 등 기록적인 기상이변이 예상된다.    이러한 기후 위기는 인류 생태계에 재앙이 되어 거주와 생존 불능의 지구를 경고하고 있다.    이렇게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로 인한 지구 생태계 파괴는 정부와 지자체와 기업이 감당할 대응 과제를 넘어 이제 국민의 과반을 차지하는 종교계가 힘을 보태야 할 과제가 되었다. 특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 환경을 돌보고 회복시킬 사명을 띤 우리 한국교회의 최우선 사명이며 성도의 실천할 과제이다.     세계는 인류 모두의 생존을 위해 2015년 파리기후협정에서 지구 평균온도 상승 폭 1.5℃를 목표로 하는 탄소배출 최소화를 약속하였다. 우리 정부도 지난 4월 11일, 2050 탄소중립과 녹색성장 실현을 위한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달성 ‘제1차 국가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을 확정하였다.     기후 위기에 처한 지구 생태계를 살리려면 온실가스를 감축하고 온실가스 흡수량을 늘려 순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탄소중립으로의 전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탄소중립 실현을 위해 정부의 정책적 노력에 더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 환경을 돌보고 회복시킬 사명을 띤 우리 한국교회의 실천과 국민 모두의 동참으로 완성할 수 있다.    기후 위기에 영향을 주는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원인은 화석 연료, 산업 프로세스, 폐기물 처리 등이 있지만, 인간의 일상생활의 영역에서도 발생한다. 그러므로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탄소중립 실현은 국민 모두의 관심과 일상생활에서의 변화된 실천이 있어야 한다.     이에 한국교회총연합 기후환경위원회는 2023년 중점사업으로 모든 교단과 교회와 함께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탄소중립 ‘나부터 실천’ 공동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6월 4일부터 10일까지 ‘한국교회 기후환경주간’으로 정하고 예배를 위한 공동설교문과 공동기도문, 실천 매뉴얼과 포스터, 영상과 캠페인 노래를 배포하였으며, 인식개선을 위한 칼럼을 공유하고, 신학자와 환경전문가를 통한 연구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지구를 생명의 땅으로 회복시키는 도전,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탄소중립, 우리 교회부터, 가정과 나부터 실천하자. 한국교회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내일이 달라질 수 있다.     나부터, 우리 교회부터 동참하면 내일은 희망으로 바뀔 것이다. 교회와 가정, 생활 현장에서 모범을 보이는 우리의 작은 실천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 사회에 큰 보람을 만들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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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7
  • 사도 바울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와 사도들을 중심으로 복음의 기쁜 소식들이 전파되었다.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뽑을 때 사도의 자격을 정했는데 (행1:21~22) 첫째, 요한의 세례로부터 주께서 승천하신 날까지 항상 함께 다니던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 예수 부활하심의 증인이어야 한다.  바울은 사도로서 자격 미달이었다. 다메섹 사건 이후 3년을 아라비아에서 체류하고 (갈1:17)  AD 37년,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으나 (행9:26)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를 제외하고 다른 제자들은 모두 바울의 회심을 믿지 않았고, 두려워하여 죽이려 하니 바나바가 고향 다소로 보냈다.  바나바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드렸으며(행 4:36~37) 바울의 믿음의 동역자가 되어 AD 46년 안디옥으로 바울을 불렀다.  이듬해 바울이 회심한지 14년 만에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하였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으며, 또 교회의 기둥같이 여기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갈2:1~9)  유대인 남자는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고 이를 구원의 징표로 굳게 믿었다.(창17:10)  바울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복음을 전파하였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합2:4)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오직믿음”은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중심 기둥이 되었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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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0
  • 정성구박사 칼럼
      사교육(私敎育)은 공교육의 반대다. 과거 우리나라는 공교육이 없었고, 학생들은 일인 교사격인 서당 훈장에게 교육을 받았다. 나의 외조부는 안동의 도산서원 근방의 온혜리에서 평생 서당 훈장을 하시다가, 말년에는 도산서원 원장을 두 번이나 지내셨다. 그러니 이조 시대는 그것이 공교육이자 사교육인 셈이다. 그런데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우리를 황민화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국민학교>, <중등학교 5년 과정> 그리고 <전문학교> 즉 대학을 만들었다. 이것이 공교육의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공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인테리라불렸고, 전문학교 즉 대학생들은 사각모를 쓰고 망토를 휘날리며 지도자들의 반열에 올랐다. 그 외에도 한글을 깨우치는 <공민학교>, <야간학교>는 주로 교회를 통해서 세워졌고, 1900년 전후로 선교사들이 와서 기독교 중·고등학교와 대학들을 많이 세웠다. 1948년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의해서 안호상 박사를 초대 문교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홍익인간>의 기치를 세우고, 공교육의 틀을 잡아 왔다.   우리나라는 말 그대로 교육입국(敎育立國)의 나라다. 자유대한민국은 자원이 없는 나라기에, 사람을 교육시켜 새로운 문물을 깨우치고,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 최상의 길이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기술 입국>, <과학입국>의 틀을 세워 서양에 교육받은 자들이 대학들과 연구소에 속속 돌아와 우리나라는 세계 6위의 <기술 강국>이라는 자리를 얻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 사람들의 인식은 성공하는 사람들은 교육받은 자요, 그 중에도 최고의 명문대학 출신이어야 높은 지위와 출세가 보장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좀 더 좋은 점수를 받아 좀 더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학생들의 꿈이어서, 학부모들은 아예 생명 걸고 자녀들의 입시에 매달리게 되었고, 공교육이 중심이 아니고 사교육에 사활을 거는 사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기는 1960년대에도 필자는 가정교사를 했다. 필자의 경우는 집안이 가난해서 고등학생 때도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를 해봤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도 원효로에서 청와대 옆 동네까지 전차를 타고 다니면서 가정교사를 한 적이 있다. 그때는 모든 대학생들의 알바는 대부분 가정교사였고, 명문대학교 학생들은 아예 부자 집이나 권력 있는 집에 가정교사로 입주해서 하숙비를 해결했다. 그것이 오늘날 사교육이다.   그렇다고 사교육이 나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옛날 서양의 국왕들 또는 세자들은 반드시 왕사(王師)가 있었다. 훌륭한 왕사 밑에서 훌륭한 왕이 나왔다. 예컨대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 나중에 영국에 제임스 1세(James Ⅰ)의 왕사는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신학자이자 언어 학자였고, 존 낙스와 함께 스코틀랜드 개혁의 인물인 조지 부카난(George Buchanan)이었다. 부카난은 제임스에게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가르쳤고, 분명한 성경적 세계관을 가르쳤던 왕사였다. 우리나라에도 고려 시대나, 이조 시대에도 왕사가 있었고, 특히 왕세자에게는 덕망이 높은 학자들이 왕재를 만들었다. 최근 우리나라에는 김호중이라는 세계적인 테너가 있다. 한때 불행했던 김호중을 걸출한 테너로 만든 분은,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 음악 교사였다. 그의 눈물의 기도와 그리스도의 사랑과 헌신이 김호중이라는 인물을 키워냈다.   그런데 요즘 기업화된 입시학원은 대대적으로 허위광고를 하거나, 마케팅 전략을 통해서 자녀를 명문대학에 보내려는 학부모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거대한 기업형 입시학원이 세워졌다. 특히 강남과 대치동 일대를 거점으로 서울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 학부형들의 마음을 움직여 입시학원에 등록해서 공부 안하면 아예 명문대학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런데 들리는 말로는 여기에 가르치는 강사들은 사회서 적응이 되지도 않고 공직에도 나갈 수 없는 문제의 사람들로서, 과거 반정부 데모 주동자들이 많다는 소문이다. 어떤 신문에는 거의 90% 이상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학부모와 학생들의 불안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여, 그 학원에서 과외를 못 받은 학생들은 대학도 갈 수 없고, 아예 명문대학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을 광고지를 통해 선전하고 있다.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이들이 이른바 <킬러 문항>을 가르치고는 일선 전교조 교사들에게, 은근슬쩍 문제를 흘려서 강남학원 등에 교육 못 받은 사람은 답도 못쓰게 했다는 것이다. 사실이 이런데도 그들의 항변은 입시 문제는 자기들이 내는 것이 아니고, <평가원>에서 내는 것이기에 억울하단다. 그렇지만 강남학원 강사들은 이른바 <수능킬러 문항>을 만들고, 그 연결고리가 어떤 경로든지 유출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웃기는 것은, 4살 된 아이를 <영어 유치원>에 입학시키려고 <레벨테스트>를 한단다. 또 <초등 의대반>도 있다. 아예 의과대학교에 갈 아이들을 초등학교 때부터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위기가 이러다 보니 거기에 못 보내는 학부모들은 자기 자녀만 <부진아>가 될까봐 두렵단다. 그러나 사실 강남학원은 <선행학습>을 하는 것뿐이다.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뛰어넘어 중학교 교육을 단숨에 시켜버리고, 고등학교 때 과외받는 학생은 몇 개월 만에 고등학교 전 과정을 다 배우는 선행학습을 하고 있다.   나는 평생을 대학교수로, 총장으로 일해왔다. 일류대학 나왔다고 인생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으로서 지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성(人性)과, 영성(靈性)이다!. 때마침 윤석열 정부가 공교육을 무너뜨리는 <사교육 카르텔>을 뿌리 뽑겠다고 했다. 사교육의 문제를 바로 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교육(私敎育)은 사교육(死敎育)이 될 것이라는 염려가 있다. /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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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9
  • [칼럼]사랑의 실천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시요, 예수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장점을 보고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롬 5:8) 우리를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아버지께 간청하실 만큼 고통의 길이지만 우리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이처럼 사랑의 실천은 희생이 뒤따르고 고통이 뒤따른다.   필자는 여기서 거창한 사랑의 실천을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의 실천인지를 나누고 싶다. 필자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 3초의 여유를 갖는다.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기 전 3초의 여유를 가지고 혹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오는 사람이 있는지 기다리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사랑의 실천이라 믿는다.    필자는 공중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손에 젓은 물을 닦기 위해 근처에 마련된 손 닦는 종이를 하나만 뽑아 사용하고 사용한 종이를 가장 작은 크기로 말아 쓰레기통에 버린다. 이런 행동은 작게는 종이를 절약하고 크게는 산림을 보호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용한 종이를 가장 작은 크기로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은 청소하시는 분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이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화장실에서 손을 씻은 후 가능한 종이 한 장만 사용하고 손을 닦은 종이를 작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릴 것을 부탁한다.   이 역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요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다. 지면상 이제 한 가지만 더 나누려고 한다. 필자는 운전을 할 때 도로의 형편상 차가 겨우 두 대 지나갈 수 있는 도로에서 신호등을 기다리게 되면 의식적으로 도로의 왼쪽에 정차하여 오른쪽 길을 열어둠으로 우회전하는 차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필자가 사는 아파트 출구의 도로가 이와 같은 상황이어서 거의 매일 이런 경험을 하곤 한다. 많은 경우 어떤 운전자는 직진을 하려고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도로 전체를 점령하고 서 있기 때문에 우회전하는 차들도 기다릴 수밖에 없고 결국 원활한 교통을 방해하는 일을 하는 것을 목격한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운전의 습관도 사랑의 실천이라고 사료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배려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특히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본 받아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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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7
  • [변두리 소수자①] ‘방구석 선교사’가 되는 법
      한국교회는 그동안 많은 나라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후원 해 왔다. 선교사들은 땅끝까지 마다치 않고 나서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려고 노력하며 복음을 전파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움을 감수하며 나가서 만나려던 피선교인들을 하나님께서 이제 한국으로 보내 주신다. 250만명. 우리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의 수이다. 이 숫자는 우리나라 인구의 5% 정도이며, 또한 미국 내 아시아인 비율(6%)에 맞먹는 인구수이다. 그동안 선교사로 임명 받거나, 선교사로 산다는 것을 전혀 생각 해 보지 않았던 성도들이, 내 나라에서 어느 날 갑자기 선교사가 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정부의 많은 노력과 지원으로 교회와 선교단체들은 국내 외국인을 위한 다양한 봉사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국가와 기관들의 조직적인 활동은 규모적 측면에서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미치는 ‘선교적 영향’은 성도들의 삶에 더 효율적일 수 있다.   교회에서 외국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들에게 다가갈 기회가 많지 않은데, 어떻게 평신도의 입장에서 선교의 도구가 될 수 있을까? 전문적인 선교 훈련을 받은 적도 없는 일반 교인이 무슨 역할로 외국인 가족들에게 선교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세상 권세와 권력이 대단했던 로마 제국 시대에, 대부분 시민들은 그 시대에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세속문화에 젖어 살고 있었다. 현세적 합리주의와 지적인 인본주의로 ‘균형’을 잡은 로마의 법치사회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아주 유용한 체제였다. 더욱이 다민족과 타 종교까지 포용하는 관용 정책은 다양성 속에 조화를 이루는 ‘환상적인’ 운영 방식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어울리지 못하고 유별나게 구별되어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믿는 그들은 로마의 관용정치에는 독선적인 이미지의 종교인들이었고, 유대인들에게는 자기들의 종교성을 멸시하는 이단자들이었다. 그래서 300여 년동안의 기간 동안, 그들은 늘 변두리 소수자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성도들을 사용하여 로마를 변화시키셨다. 말 한마디도 마음껏 할 수 없는 그들의 조용한 삶을 하나님이 쓰신 것이다. 잔잔히 순종하는 성도들의 삶에서 생명과 복음의 힘을 본 로마는 서기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나 공회에서 우뚝 서서 외치거나,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공공장소에서 전도와 선교 활동을 하지 않았다. 어디에 있든지 주님을 위하여, 주님 앞에, 주님을 향한 마음을 지키며 살았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은 성실하고 정직한 삶으로 나타났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저들은, 왜, 누구를 위하여,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로마의 시민들은 기독교인들의 삶에서 그 ‘무엇’을 발견했다. 그들이 주님을 생각하며, 마음과 믿음을 지키며 산 ‘주님 앞에’ (코람데오; coram Deo) 삶을 본 것이었다.   사사기는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고 마지막 장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룻기는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며 시작된다. 세상이 혼란하고, 하나님의 백성들도 믿음을 저버리며 살던 사회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이방의 천한 과부를 찾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여인을 특별히 들어 세우셔서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믿음의 본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참 지도자를 갈망하는 혼란한 현대사회, ‘믿음을 보겠느냐?’고 물으시는 이 마지막 때. 풍요 속에 가난한 세대, 군중 속에 외로운 개인들 속에 하나님은 오늘도 자기의 삶을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을 찾고 계신다. 세상의 지위도, 권세도, 재산도, 영향력이 없어도 괜찮다. 말 한마디 안 해도, ‘무엇이 저렇게 살게 할까?’하는 관심과 ‘누구 때문일까?’하는 궁금한 삶을 보여 주는 성도가 필요하다. 사사시대의 룻처럼, 대세에 휘둘리지 않았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각각 이 사회 속에 증인으로 살도록 하셨다.   이제는 아무도 ‘하나님, 내가 언제 선교사였습니까?’라고 반문할 수 없게 됐다. 지금, 우리 옆에 와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는 모습이 나를 양과 염소로 만든다. 한국사회의 시민들과 외국인들이 화목하기 위해 서로 포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외국인과 소수자의 이기적인 요구, 그리고, 군중 심리에 휩쓸리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믿음, 가치를 지키며 살아내야 한다. 우리 속에 특별히 넣어 주신 생명의 힘, 복음의 진수가 사랑과 친절로 퍼져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막 9:50). /목사·새빛다문화센터장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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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4
  • [‘주 예수’를 닮는 복음의 일꾼 6회]주 닮은 지체, 한 목표에 화답하는 선
    긍휼을 베푸시는 주로 인해 종들의 착한 행실은 장성하는 성화의 경주   성경의 착한 행실은 주의 자비와 긍휼을 덧입게하여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함임을 발견케 한다. 주께서 댓가를 치루시고 덧입히신 사랑의 은혜이다. 그 누구도 뺏을 수 없는 언약된 생명과 영원히 내주하시는 주의 전이다. 오직 주께서 함께 하시는 여호와의 전이 되어 피스메이커들의 서로 사랑으로 이루어가는 한 몸, 한 공동체이다. 이 집은 도둑이 구멍을 뚫을 수도 도적질을 할 수도 없는 견고함과 무엇과도 바꾸거나 비교될 수 없는 보물들의 곡간이다. 그 집에는 기도와 긍휼이 풍성하여 누구나 그리로 들어오는 자는 구원을 받게하는 영생이 있다. 이 땅에 살면서 영생을 맛보며 살게 하는 진리요 생명되신 주님의 피값으로 세워 놓으신 주의 몸, 전이다. 새로운 피조물들은 서로 사랑하며 더 많은 이들이 주의 자녀로 회복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둔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 덕을 세우고 남의 유익을 위한 일들로 선을 이루어간다. 착한 행실을 본받는 자들로 오직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가 없음을 확증케 한다. 곧 주께서 지신 십자가의 희생으로 하나님되심을 나타내 본을 보이시며 ‘너희도 이와같이 행하라’ 말씀하심의 화답이다. 이는 말씀의 전도로 죄사함 받을 수 있도록 하신 이유이며 목적임을 찾는다. 다시 말해서 가르쳐 지키게 하는 제자화의 길이다. 거듭난 주의 자녀들만이 영광의 문에 다다를 수 있는 거룩이다.    더불어 지체들이 각각 짐을 나눠지는 선함이 가득한 길이다. 그러면서도 각각 자기의 짐을 지고 주님의 구속 사역에 참예하는 착한 행실의 경주자들로 풍성한 생명의 나눔이다. 이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그 영광의 길이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주의 뜻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로 견디며 기쁨의 소망을 갖고 달려가는 화답이다. ‘너는 내 것이라’ 인치시는 주님의 사랑이 나타나도록 사명에 순복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주님의 선하심에 소망이 가득하다.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있는 기쁨으로 영원히 여호와의 집에 거할 수 있는 길이요 진리임을 확증해 준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신 목적이다. 곧 주 안에 형통은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영적인 주의 나라 흥왕으로 세워지는 제자화이다. 이에 당연히 믿는 자들의 육적인 환난과 고난은 승리로 가는 좁은 길이기에 마땅함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많은 선진들이나 제자들 역시 육적으로는 배고픔과 매 맞음과 억울함과 추위와 더위를 복음을 위해 견뎌야 하는 고난이 있었음을 성경은 확증해 준다. 주의 말씀은 영생을 얻게하는 영적인 생명의 말씀이기에 이를위한 육체의 고난은 마땅함을 지혜로 얻는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주로 주의 전이 된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이웃을 사랑하여 복음을 전하고 지키게 하는 자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주께서 본을 보이심은 그 자취를 좇게 하려 하심이라’는 그 이유와 같다. 곧 다섯달란트를 남긴 자처럼 구속사역에 참예하여 주의 자녀들로 회복케 하는 선한 열매 맺는 선함임을 확증케 한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그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하신 그 말씀의 섬김이며, 화답이고 응답의 제자화이다. 오직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주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주를 좇는 이유와 결과이다. 곧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소금과 빛의 직임을 감당하는 빛의 자녀들로서 나는 죽고 오직 주만 살아 나타나는 여정이다. 그러기에 성화를 위해 자기부인과 제 십자가 지는 새날의 일군들로 부르심에 몫이며, 내주하시는 성령의 전임을 확증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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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4
  • [건강교실] 침묵의 병, 간암 (중)
      그 외에 간암이 발생할 수 있는 전구 질환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비 알코올성 지방간은 간세포 손상의 정도에 따라 여러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즉, △지방만 끼어있는 가벼운 단순 지방간 △간세포 손상이 심하고 지속되는 지방간염 △복수나 황달을 동반하는 진행된 간결변증까지 병의 정도는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초기 단계의 비 알코올성 지방간은 적당한 운동과 체중관리를 하면 정상으로 회복될 수 있다. 하지만 관리하지 않으면 약 1%에서 많은 경우 3%까지 간 경변으로 진행하고 간암으로도 발전 할 수 있다.   간암 치료에는 크게 완치를 목적으로 하는 치료법과, 비록 완치는 못하지만 환자의 수명을 연장하고,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고식적 치료 방법이 있다. 완치를 목적으로 하는 대표적인 치료 방법은 ‘간 절제술’과 ‘간 이식’이 있다. 크기가 작은 간암의 경우에는 ‘고주파열치료술’이라는 방법으로 간암을 완치할 수 있다. 고식적인 치료방법으로는 ‘간동맥화학 색전술’이라는 방법이 있고, 이 치료법은 간암의 진행을 막는 방법이며, 일부 환자에서는 이 방법만으로 완치되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는 부작용이 매우 적은 먹는 항암제가 개발됐다. 또, 수술이나 이식이 불가능한 환자에서도 치료가 가능할 때가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방사선 치료가 많이 개발됐고, 일부 환자에서 잘 선별해서 치료하면 좋은 결과를 보일 때가 있다.   각각의 치료법을 살펴보면 간 기능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환자라면 적극적인 수술적 치료가 완치를 이룰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된다. 수술이 가능한 경우는 일단 전신상태가 양호하고 간 기능이 유지되는 것이 기본이다. 또한, 복수 및 황달이 없고 종괴의 크기가 작고 개수가 적으며 비교적 경계가 분명한 경우이다. 혹여 종괴가 여러 개가 있는 경우에 우엽 혹은 좌엽의 한 쪽에만 존재하는 경우에 수술을 시행하는 경우에 완치를 기대할 수 있다.   간 절제술 후에 대략적인 생존율은 점차 호전되고 있다. 최근 보고들을 종합하면 수술이 잘 되었을 경우에 1년 생존율이 90% 이상이고, 완치라고 판정이 되는 5년 생존율도 50% 이상이다. 예후에 영향을 미치는 인자들은 종양의 크기, 다발성종양여부, 문맥침윤여부, 간경변증 동반 여부 등이 예후와 관계가 돼 있다.   수술 후 재발 보고는 관찰기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첫 3년까지의 재발률이 대략 50% 정도 된다. 5년까지 가면 70% 정도의 재발률을 보이고 있어 상당히 많은 환자가 재발을 경험한다. 수술 후 1-2년 이내에 재발하는 경우에는 수술 당시에 이미 존재하던 병소가 수술 후에 발견되거나 수술도중에 전이된 것일 가능성이 높으며, 수술 후 3-6년 후에 재발하는 경우는 다발성으로 생긴 간암일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치료법은 간동맥 항암화학색전술이다. 이 수술은 간암으로 가는 간동맥을 차단하여 간암의 영양 공급을 막아 간암을 괴사시키는 색전 효과와, 또한 간암으로 가는 혈관에 항암제를 주입하여 간암에 항암 효과를 나타나게 하는 항암화학 요법을 한번의 시술로 시행하는 치료법이다. 간동맥화학식전술은 원칙적으로 완치를 목적으로 하는 치료는 아니지만 이 치료법으로 인해 환자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일부 환자에서는 이 치료법만으로도 완치되는 경우가 있다.   고주파열치료란 간암 내로 주사바늘을 통해 전극을 삽입하고 전류를 통하면 이 전극에서 발생되는 고주파열에 의해 간암조직을 파괴하는 비교적 새로운 치료법이다. 크기가 비교적 작고 1-3개의 간암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효과적이다. /한양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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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3
  • [칼럼]기독교 신앙의 세 가지 갈등 양태③-김원일 중편소설
      지금은 고인이 된, 성문규의 모친 윤 권사는 이 작품 속에서 과거(회고의 대상) 인물로만 등장한다. 일인칭 회고자 시점의 설정을 가능케 하는 인물로서 엄연한 세 복수주인공들 중의 한 사람이다. 하근찬 작가의 <슬픈 장난감>에 등장하는 일본의 요절시인 다쿠보쿠와 함께 망자 주인공 설정이 가능하다고 하는 사례를 만들어놓은 특이한 인물이라고 하겠다.   문규의 모친이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은 이 소설의 첫머리가, 작가인 화자에 의해 써진 다른 한 소설에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스토리를 전개시키고 있다는 데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그 소설의 주인공인 어머니가 화자 자신의 어머니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문규 자신이 애써 확인시키려는 편이지만, 독자가 보기에는, 그러면서도 두 어머니가 서로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어찌 보면 이렇게 해서라도(곧 두 여인을 일치시켜서라도) 어머니 윤 권사가 이 소설의 엄연한 주인공임을 애써 강조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그가, 예의 그 소설이 잘 풀리지 않는 이유가 자기의 게으름 때문이라기보다는 심적으로 압박해온 자기 ‘어머니의 잔영’ 탓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여기서도 자기 모친의, 유형무형의 믿음의 영향력을 그가 크게 의식하고 있음을 암암리에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모친의 믿음은 한국 여성 신도들 대부분의 보편적인 신앙, 다소 맹목적이라고도 할 기복적이고 보수적인 신앙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일이다.   신주엽은 이 소설 속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필자가 전에 엔도 슈사쿠의 <침묵>(1966)을 읽었을 때 받았던 당혹감 못지않은 충격을 이 인물을 대하면서 받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은 겉으로 드러나는 면만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목자란 호칭을 지닌 신주엽을 관찰하는 문규의 처지가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그 면으로만 관심을 기울일 때는 이 작품의 주제를 파악하는 일에 결과적으로 방해를 받을 우려도 없지 않다고 보겠다.   대학생 시절에는 현실에 저항하며 급진적인 기독학생 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는 석방된 후 신학대학으로 다시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면서 착실한 복음주의자로 전신하고, 후엔 부흥목사로 활동하다가 종교다원주의적인 설교로 인해 교단에서 제명까지 당하고서는 새로이 ‘말씀의 집’이라는 일종의 무교회주의운동을 해 가며 동분서주하는 목회자 신주엽에 관한 이야기가 독자들을 상당히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무교회주의운동이 욕지도(쑥섬; 봉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가운데 사십일 금식기도에까지 돌입하고, 이어서 남성제거 수술을 자청하고서 그 작업을 진행하는 목자 신주엽의 다소 엽기적인 신앙 행태가 독자들을 당혹감에 휩싸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 소설은 다중적 복합 시점을 사용해 3인의 복수주인공을 등장시키고, 그 각각의 인물들로 대표되는 한국인의 신앙 유형을, 성문규로 대표되는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신앙, 그의 어머니(윤 권사)로 상징되는 정열적이고 보수적인 신앙, 그리고 신주엽으로 대표시킨 체험적이고 신비적인 신앙 등으로 나누어 제시하고, 그 세 유형의 신앙이 성문규에게서 보듯이 한 사람의 영역 안에서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킬 수 있으며, 또한 한국 교회 전체 역시 유사한 방향으로 확대 해석될 수도 있는 일임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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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3
  • [칼럼]믿은 여자의 복
      ‘네가 임신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하나님이 가브리엘 천사장을 요셉의 정혼녀 마리아에게 보내서 수태고지를 한다. 이스라엘에 많은 경건한 여자와 믿음 좋은 처녀들이 있을 텐데 왜 하필 마리아에게로 보내셨을까요? 마리아는 다른 유대인들처럼 메시야를 대망하며 그 예언의 말씀을 믿었다(사11:1).    메시야가 유다지파 다윗 가문에서 오실 것이니 그녀 자신이 여기에 쓰임 받기를 사모했다. 마침내 하나님이 다윗 집안 요셉과 정혼 하도록 허락하시기에 이른 것이다. 또 그녀가 정혼한 지금 결혼할 때까지 자신 몸의 순결을 지켜야 함을 잘 알고 있음에도 자신이 임신하게 된다면 그 당시 율법으로 자신은 돌 맞아 처형될 것임을 또한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임신하게 될 것을 기뻐한다.   이는 순교의 믿음에 서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아브라함의 처 사라의 경우도 똑같다. 90세에 여인의 경수가 끊어져 石女 같이 됐음에도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다. 그 믿음으로 잉태하여 이삭을 낳았고 만민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또 처녀가 믿음으로 잉태하여 임마누엘하시는 하나님의 길에 쓰여진 복된 마리아가 됐다. 이같은 중심과 신앙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합당히 여기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재림 주님을 대망, 그 주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한다면, 즉 순교 신앙에 올라선다면? 마리아같이 우리를 하나님이 합당히 여기실 것이다.    천사의 말을 들은 마리아는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거늘 어찌 이런 일이 있나이까?’ 놀라서 묻자 천사가 대답한다. 남자가 아니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너를 덮으리라. 하나님은 전혀 불가능이 없으시니라. 바로 성령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신하여 출산하리라. 원래 임신은 남자·여자가 동침하여 보통생육 법으로 잉태된다. 이 법칙을 초월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성령으로 처녀가 임신하듯 우리 같은 죄인들, 부족한 자들을 하나님은 의로운 순교 제물로도 되게 하시리다.   또 장관도 안 해본 우리들을 장차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일천 년간 왕으로 통치하도록 임명도 하실 수 있으리라. 주의 여종이오니 당신 말씀대로 이뤄지이다. 나는 주님의 도구요, 노예요, 주님이 전부이니 주님 뜻대로, 주님 말씀대로 이루시라는 것이다. 이것이 마리아의 진정한 중심과 믿음이다. 그래서 믿은 여자에게 복 있다(눅1:45). 이미 믿은 마리아에게 잉태됐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니 이것이 믿은 여자의 복이다. 오늘 우리들도 그녀같이 복된 자가 됩시다./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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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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