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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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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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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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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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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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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심을 기뻐함으로 각종 아름다운 꽃들을 나열하여 축하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이요 미래의 소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토록 주님의 부활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가질 수 있는 참 소망인 것이다. 여기의 십자가도 피 묻은 십자가가 아니라 황금색의 십자가로 표현한 것이 승리의 상징으로 잘 부합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 작가는 재치 있고 활달한 터치를 구사하여 감동을 주는데 이는 마치 누가복음 24장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동행하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들의 집에 가서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하는 장면과 유사한 기쁨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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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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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9] 기후 위기 시대 교회의 사명, 창조 세계의 보전
    연세대학교 대학교회 곽호철 목사  기후 위기는 올여름 기록적인 장마를 통해 우리에게 가슴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극한 기후’라는 말을 남기며 인간의 예측을 넘어서는 재해로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도 고지대로 혹은 위도가 높은 지역으로 이동하며 기후 위기의 고통 가운데 있다.     이처럼 창조세계의 신음과 고통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자녀인 우리에게 큰 도전이다. 이는 외면하거나 방임할 수 없는 숙명적으로 대처할 과제이다.      창조세계의 회복과 보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지구를 위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꼭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급변하는 지구 생태계 위기는 비단 우리 시대, 우리 교회만의 도전과 관심사가 아니었다.     6세기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사들도 파괴된 숲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20세기 초에 창설된 시토 수도회도 다른 영적인 일도 중요하지만, 삼림복구를 위해 나무 다시 심기 운동을 벌였고, 훼손된 땅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힘썼다. 우리 시대의 주 관심사인 생태운동(生態運動)은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 역사에서 진행되었던 일이다.    현재 인류의 주소는 423이라고 한다. 423은 무슨 숫자일까?   지구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이다. 마리아와 요셉, 모차르트가 살던 시대에는 이산화탄소 농도가 약 275ppm이었다.   2020년에는 415.49ppm, 2021년에는 423.1ppm, 그리고 그 숫자는 계속 늘어가고 있다. 우리 다음 세대에는 450ppm을 초과할 것으로 예측한다. 450ppm 하에 살아가야 할 우리 후손들이 감당해야 할 극한 기후와 재난은 상상하기 어렵다.    어떤 신앙인은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철수계획(Evacuation Plan)으로 이해한다. 철수계획은 창조세계에 대한 포기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포기하는 것은 창조의 원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 만물과 지구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시며 우리에게 맡기시고 선한 청지기가 되어 잘 보전하길 부탁하셨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신앙의 선조들은 그 사명을 감당해 왔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환경을 사랑하고 생태 보전을 위해 힘썼다면 더 악화하는 생태계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더욱 각성하고 선한 청지기로서의 사명에 힘써야 할 것이다.    창조의 목적은 우리가 하는 노동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하나님께서 일하셔서 창조세계를 주신 것은 타자인, 우리와 생명세계를 위함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는 다른 이웃들과 생태계 모든 구성원에게 봉사하고 협력하는 차원으로 일을 해야 한다. 우리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태계 훼손을 지속한다면 그것은 창조 목적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신성모독이고 하나님께서 뜻하신 이 땅에서의 청지기로서의 사명에 대한 방기이다.    오래전부터 시작된 창조 세계의 보전, 그것은 기독교인들에게 맡겨진, 하나님께서 주신 근원적 사명이다. 이전에는 소수의 신앙인이 산발적으로 그 사명을 감당했다면, 이제는 이 땅의 교회와 기독인이 모두 함께, 전방위로 그 사명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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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2
  • 정성구박사 칼럼
      <단식(斷食)>은 특정 목적을 위해서 일정 기간 음식과 음료를 자발적으로 끊는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금식(禁食)>은 일정 기간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개인적인 결심으로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절식>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건강을 위하거나 다이어트를 위해서 일정한 기간 또는 간헐적 단식을 하기도 한다. 우선 금식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금식은 이스라엘 종교의 중요하고 경건한 삶이었다. 그래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같은 종교가들은 일주일에 며칠을 금식하는가에 따라서 신앙의 성숙도를 나타내기도 하고, 금식을 많이 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금식도 형식적이거나, 보여 주기 위한 의식적 종교로 전락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보면 금식에 대해 아주 명쾌한 지침을 주었다. 즉 금식할 때는 외식하는 자들처럼, ‘내가 지금 금식 중이다!’라고 티를 내거나, 일부러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금식한다는 사실을 일부러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거나, 동정을 받으려는 행위는 금식이 오히려 위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금식하는 자는 사람의 눈길을 의식하지 말고, 오히려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금식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이다.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뒤돌아보면, 진실한 성직자들과 성도들이 금식한 예가 수도 없이 많다. 지난봄에 필자는 그리스의 14세기에 세워진 마테오라 수도원을 다녀왔다. 메테오라 수도원은 하늘 기둥 즉 깎아지른 수직 바위 위에 세워진 이상적 수도원이다. AFC 일행들과 마테오라 수도원을 오르는데 억수로 쏟아지는 빗 사이를 뚫고 꼭대기까지 올라가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는 꼭 죽는 줄만 알았다.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 제국을 무너뜨리자, 정교회 수도사들은 도피처로 마테오라 수도원에 둥지를 틀고 생활했었다. 그들의 삶은 경건한 생활 즉 성경 묵상, 기도, 그리고 금식 등으로 공동생활을 하면서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기독교를 크게 3가지로 보면 동방교회 즉 <희랍정교회>와 서방교회 즉 <로마 카톨릭>과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세워진 <개신교>가 있다. 그리고 모든 기독교에는 금욕과 금식이 있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연약과 죄악을 깨닫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려는데 공통적인 목표가 있다. 우리 한국교회에도 금식기도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특히 오산리 금식기도원과 여러 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분들도 있다. 대부분의 금식을 하는 분들은 삶의 결정적 순간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문제 해결을 얻으려고 결사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한다. 그래서 금식기도는 몇 주 또는 40일 금식 기도하는 분들도 많이 보았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상당한 훈련을 받고 해야 하기에, 40일 금식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금식이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생사(生死)를 걸만한 중대한 문제를 앞두고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간구하는 것은 한국교회에 흔한 일이다.   나는 천마산 기도원에서 기도 생활을 해 보았지만, 금식기도는 하지 못했다. 기껏 42일 동안 먹어가면서 맑은 정신으로 기도원에서 기도 생활을 해 봤는데, 당시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체험하기도 했었다. 교수 생활이란 영적으로 참 메마르기 쉽고,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에 익숙해 있었지만, 총신대학교회를 개척하고서부터 이론으로만 아는 기독교가 아니라, 생명 살리는 영적인 능력을 얻으려면 기도 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줄 알기에 천마산에 올라가 40여 일 동안 뒹굴고 묵상하며 기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최근에 야당(野黨) 대표가 단식 투쟁을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은 절대다수의 의석을 갖고 정책을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는 야당 당수가 무슨 일 때문에 단식 투쟁을 하는지 국민들은 별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단식하는 대표의 주변에는 야당에서 일찍이 내로라하는 투쟁 경력이 많은 의원님들이 옹위하고 있었다. 사실 단식하면 김영삼 대통령이 야당 시절 단식 투쟁으로 병원에 실려 갔고, 황교안 전 총리의 열흘간 단식도 있었다.   단식이란 말 그대로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 금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텐트 안에서 지지자들을 만나면서 싱글싱글 웃는 모습에 진정성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지지하는 열성 당원들은 그와 악수 하면서 ‘악수한 손은 씻지 않겠다’하고, 어떤 사람은 넙죽 엎드려 절을 했고, 그 대표는 지지자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단식하는 사람이 출퇴근도 하고, 여러 모임에 참석해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까지 했단다. 이뿐만이 아니다. 카메라에 잡힌 그는 텐트 안에서 뭔가를 오물오물 먹으면서 영양보충을 하는 것이 보였고, 심지어 파운데이션으로 화장하고 있는 것까지 보였다. 그러니 그의 단식은 검찰의 소환을 피해가려는 꼼수라는 것이 다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술수(術數)에 능한 사람이다. 다수당의 대표가 무슨 꼼수를 부리려고 국회 앞에 텐트를 치고 자리를 깔고 그 짓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열흘 단식이면 몸을 가눌 수 없는 것이 통상적인 예인데, 그는 지지자들에게 손을 번쩍 들고 입장 문까지 읽고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찬송가에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라는 가사가 있다. 남자답게, 사나이답게, 떳떳하게 검찰의 조사를 받아드리고, 재판받고 후일을 기약함이 어떨는지! 그러나 그는 끝내 검사의 진술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람을 꺾을 수 있는 분들은 조병욱과 신익희를 이은 야당 의원들이 아닐까 한다. /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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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1
  • [칼럼]물가에 심겨진 나무
      예레미야 17장 5절부터 8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신뢰하고 육신을 무기로 삼고 마음이 주로부터 떠난 자들은 결국 저주를 받으리라. 주님도 산상보훈의 결론에서 ‘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자요, 결국 무너지고 말리라.’ 말씀 하셨다. 하나님 말씀을 들었지만 이를 믿음으로 받지 아니한 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지 아니한 자가 자신의 행함이나 육신으로 맺은 열매는 주님과 아무 상관 없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렘 17장 5~8절은 사람을 신뢰하고 육신을 자랑하는 자는 광야 마른땅, 소금 땅에 사는 자와 같다. 열매 없는 영적으로 죽은 자요. 또 이들은 좋은 일이 오는 때를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의 좋은 날은 주님 재림의 그날이요, 그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좋은 일의 날을 보지 못하리라. 구원에서 떨어진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주를 신뢰하고 그의 소망을 주께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는 주를 믿는 자요, 이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구주가 되신다.   또 은혜, 능력을 베푸시고 특히 성령까지 주셔서 하늘나라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해주시는 은혜의 주님이 되신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고난을 통해서 하늘나라 영광을 더해주시는 영광의 주님이 되신다. 이 영광의 주님은 장차 7년 대환란날에 나를 순교시켜 주시는 재림하실 신랑 예수님이시다. 이것이 가장 복된 자이다. 이처럼 우리가 이 주님을 신뢰하고 그에게 소망을 두며 사는 자가 되십시다.   또한 주님은 우리를 물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택정하여 가나안 땅으로 옮기고 그 율법인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 은혜로 살게 하신 것을 가리켜 심겨진 나무라고 했다(시편1:3). 이는 그림자요, 그 실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는 복음과 진리로 물가에 심겨진 나무이다. 즉 마귀의 종노릇하던 우리를 복음으로 불러 교회로 나오게 하신 것이요, 교회에서 늘 하나님 말씀으로 살게 하셨으니 물가에 심겨진 나무가 된 것이다.   이 나무는 하나님 은혜와 평강으로 충만케하시는 진리의 말씀으로 사는 자이다. 이들은 잎이 시들지 않고 사철 푸르르며 열매를 풍성히 맺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를 일곱 금 촛대 교회로 옮겨 첫째 부활의 진리 말씀의 생수의 강에 뿌리를 박고 살며 그리스도의 신부되게 해주시니 곧 더 좋은 물가에 심겨진 나무가 된 것이다.    이 심겨진 나무가 된 우리들은 어떤 극심한 더위나 가뭄의 때에도 항상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않으리라. 장차 7년 대 환란의 날에도 너끈히 승리하는 자가 되리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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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1
  • [칼럼 8] ESG 측면에서 본 교회의 기후 위기 대응
    박희정 한국조정협회 ESG위원장  사단법인 한국교회총연합이 주최하는 2023 한국교회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탄소중립 '나부터 실천’ 사업이 시작되었다.   회개와 회복 그리고 행동이 필요한 시기에, 생존과 공존을 위한 '나부터 실천’ 다짐은 이미 변화의 시작이다.     기후 위기 ‧ 탄소중립의 환경적 요소(Environment)를 포함한 사회적 책무(Social) ‧ 지배구조(Governance) 등 비재무적 요소를 기업경영이나 투자 결정에서 재무 수익과 함께 적극 고려하자는 전 세계적 움직임이 ESG로 표현된다. 환경(E) ‧ 사회(S) ‧ 지배구조(G)에 대한 논의는 효율성뿐만 아니라 회복력(resilience)과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국제기구는 2050년까지 연간 2~5조 달러, 현재보다 2~6배의 추가 기후금융 수요를 전망하고 있다.   우리나라 기후금융 수요도 2050년까지 누적 1,722~2,471조원, 연간 57조~82조원으로 추정되고, 향후 기후금융 부족이 심각할 것으로 전망한다.   정부는 지난 4월 탄소중립 ‧ 녹색성장 기본계획을 선포한 바 있다. 골자는 올해부터 5년간 90조원의 예산으로 청정에너지 확대와 저탄소 산업구조 전환에 투자하며 범국민 실천 운동을 전개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 ESG 흐름으로 국가와 기업은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한 의무적인 영역을 만들고 있다. 막대한 재정이 투입될 예정이며 보다 강력한 법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수출이 대부분인 우리나라는 ESG 법제화에 더욱 신경이 곤두설 수 밖에 없다. 좋은 상품을 만들었더라도, 기후변화 ‧ 탄소중립에 맞지 않게 생산되었다면 그 나라 ESG법에 따라 수출이 어렵게 될 수도 있다. 기후변화 ‧ 탄소중립은 국제기구와 정부 정책에서 그만큼 중요해졌다. 따라서 법으로 기업과 개인의 활동을 옥죄기 전에 먼저 대비하고 변화된 행동을 보여야 한다.   요한복음 20장 21절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하시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 명령하셨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향한 세상에서의 보다 적극적인 사명과 참여를 강조하는 말씀이다.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와 저출산, 불평등과 양극화의 문제는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를 취하는 인간의 욕망과 탐욕으로 인한 무책임과 무질서의 모습이 투영된 듯하다. 이러한 때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올바른 기후 위기 인식을 통하여 개인은 친환경 제품 애용, 냉난방 적정온도 유지, 쓰레기 재활용 분리배출, 이면지 재활용, 절전형 조명, 개인용 텀블러 이용 등으로 탄소중립을 실천할 수 있으며, 교회는 정기적으로 기후환경 교육을 실시하여 교인들의 인식개선에 앞장서고, 교회 내 전기충전소와 자전거 거치대 설치, 인터넷 전자 주보 이용, 자가용 차량 대신 교회버스나 대중교통 이용 등을 통해 탄소중립을 실천할 수 있다. 이제 한국교회와 성도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인 지구환경을 회복키시고 지속가능하도록 변화된 돌봄의 행동을 적극 실천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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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8
  • [칼럼]재림이 늦다고 하는 자
      마태복음 24장 48절부터 51절에서 그 주인이 와서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리니 그가 복이 있도다. 주님이 재림 후 복 있다고 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정한 때에 따른 양식 나눠주는 자이다. 또 신실하고 현명한 자라고 말씀하신다. 특히 오늘날 종말의 때에 하나님이 금촛대교회를 세우시고 그의 사자를 통해 환란 날 이기는 자들을 배출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는 자이다. 이들은 정한 때에 따른 양식을 나눠주는 자들이니 이는 곧 요한계시록이 그 핵심이다. 계10:2의 펴 놓인 작은 책을 먹고 다시 예언하는 자이다.   이들은 자기 목숨을 다하기까지 충성하는 자요, 이들이 신실한 종이다. 또 재림하실 주님이 그 지혜와 그 능력으로 구원하시는 것을 잘 깨닫고 인도 받는 자가 곧 현명한 종이다. 이들을 주님은 ‘복 되도다.’ 라고 하신다. 반면에 주님은 악한 종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그들은 속으로 내 주인이 오시는 것이 늦어지리라 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종말에 조롱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정욕대로 행하며 말하기를 그가 온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의 시작부터 그대로 있다고 하는 자들이다(벧후3:3-4). 이들은 주일학교 때부터 주 재림이 가까웠다 했으나 지금 50살이 됐는데도 똑같이 주 재림이 가깝다 하고 있으니 내 생전에 주님 재림이 있겠는가? 없다고 하는 자들이 곧 악한 종들이라고 하신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겔12:25과 같이 말씀하신다. 네 생전에 내가 말한 것을 다 이루리라. 더이상 늦지 아니 하리라. 아멘이다. 또 악한 종은 자기 동료 종들을 때리며 술주정뱅이들과 먹고 마시는 자라고 하신다. 왜 동료 종들을 때리는가? 주 재림이 속히 오리라 전하기 때문이다.   또 금촛대교회에 주신 요한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열렬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때린다. 악한 종들은 주 재림이 속히 오리라는 것을 믿지 아니한다. 또 장로교 시조 칼빈 신학자도 요한계시록을 다루지 않고 인봉한 책이라 했거늘 어찌 함부로 계시록을 말하는가? 라고 논쟁하고 결국 이단이라 정죄하며 때린다.   그리고 ‘술주정뱅이들과 먹고 마신다.’ 했다. 이는 일반 술 취한다는 것이 아니다. 어찌 하나님의 종들이 술을 먹을 수 있는가? 이는 암6:6에서 이를 잘 깨닫게 하신다. 포도주를 대접으로 마시는 자, 즉 예수의 속죄구원의 복음으로만 만족하고 있는 자를 가리킨다. 또 온 몸에 기름을 바르는 자, 즉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주장하는 자이다.    그러나 주님은 요셉의 고난을 대비하라는 것이다. 첫째는 7년 환란날 양식을 대비하라. 둘째는 일곱영으로 충만하라. 그러면 승리하리라. 또 그런 자가 복 있도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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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7
  • [칼럼 7] 기후 위기에 대한 창조신학과 기독인의 역할
      아신대 조직신학 한상화 교수  오늘날 전 인류가 맞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정의상 단순히 극단적인 날씨의 변화뿐만이 아니라 물 부족, 식량 부족, 해양 산성화, 해수면 상승, 생태계 붕괴 등 인류 문명에 치명적 위험을 초래하는 전 지구적 위기의 상태를 의미한다.      많은 인자가 계속해서 기후에 영향을 주고 있지만, 과학자들은 지난 50년간 관측된 지구온난화가 그 주요 원인이고 이는 대부분 인간 활동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지구 온도 상승을 가능한 섭씨 1.5℃ 이내로 제한하도록 노력하고 이를 위해 향후 2050년도까지 탄소중립의 사회를 이루도록 노력한다는 계획이다.      탄소중립이라 함은 인간 활동에 의한 탄소 배출량을 최대한 감소시키고, 흡수량을 증대하여 순 탄소 배출량이 제로가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국가와 기업이 녹색 경영과 녹색 성장을 꾀함으로 미래를 향한 지속가능성을 추구해야 함은 물론이고 온 국민이 모두 생태 친화적인 삶의 양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위기의 때에 교회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이 기후 위기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우리의 홈(home)인 지구를 잘 다스리고 보존해야 할 본질적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우리는 순종함으로 그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환경 문제는 일부 환경 보호 단체나 운동가들의 몫이라 여기며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머나먼 남의 이야기로 치부하며 무사안일주의에 빠진 것은 아닌지 참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이켜야 할 때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교회 예배와 설교에 하나님의 창조 세계 돌봄(creation care)에 대한 메시지와 자연 친화적 삶의 양식에 대한 강조는 거의 부재하고 성도들의 교회 생활 안에서도 그와 같은 실천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여기서 환경주의나 자연보호라는 말이 아니라 창조 세계 돌봄이라고 표현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 자연 세계를 이해할 때 기계적인 체계로서가 아니라 이 세계의 주인 되신 창조주 하나님을 우선으로 고려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재 인류가 당하고 있는 기후 위기의 문제는 신학적 문제요 신앙의 문제라는 것이다. 즉 이 문제는 단순히 성경과 복음을 떠난 인본주의적 사회 윤리 사상이나 해방신학의 고유 주제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 돌봄(creation care)”이라는 성경에 명시된 하나님의 명령이자 언약 백성의 순종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을 약속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변화된 삶의 양식은 생태 친화적 삶의 양식이어야 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기독교 신앙 진리의 일부인 것이다.     오늘날 기후 위기의 문제는 각 로컬 교회 공동체에 속한 기독인들의 구체적 삶의 변화에서부터 그 해결의 열쇠가 있으므로 한국교회는 성경대로 믿고 행하는 신행일치의 생태 윤리 실천 운동을 펼쳐가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09-07
  • 1주기가 오기 전에
    툭 - 투둑 - 아침부터 하늘이 꾸무럭 거리더니 흙냄새가 올라온다. 비가 올 것이라는 기상청 예보가 제발 빗나가길 바랐건만. 빗줄기나 햇볕을 피하기 위해 모자를 쓰고 물을 챙겨온 사람들 사이에 무릎 보호대와 목장갑을 착용하거나 피켓을 챙겨드는 이들도 보인다. 하얀 베일과 회색빛의 긴치마를 입은 수녀님들은 우의 위로 입은 보라색 조끼를 서로 묶는다. 그 뒤로 우산을 든 손에 십자가를 쥔 이들이 있다. 자세히 보니 나무결이 보이는 손십자가다. 이름들이 새겨있다.   탁! 하나 , 두울, 세엣 , 탁! 둥둥-두두두두두둥…딱! 북 소리에 맞춰 함께 기도하고 기도하는 길고 긴 행렬이 앞을 향해 나아간다. 앞선 이들은 목사님, 신부님, 스님, 교무님 그리고 ‘10.29이태원 참사 진실규명 특별법 제정하라’는 흰색 글씨가 쓰인 보라색 티셔츠를 입은 유가족들이다. 빵 빠아앙! 빵빠앙! 경찰이 행진신고에 따라 안전을 위해 합법적으로 도로교통 정리와 안내를 이어가지만 간혹 울리는 감정이 실린(것 같은) 경적소리에 행렬을 따라가는 이들의 고개가 돌아가곤 한다. 희생된 아이를 기억하며 간절히 기도의 걸음을 이어가다 유가족의 발언이 이어졌다. 그 중 두 분의 발언 일부를 풀어 싣는다.   “지난 6월에도 여기에 왔었습니다. 초여름이었죠. 8월입니다. 가로수에 벌써 낙엽이 지려고 합니다. 우리 유가족의 가슴에는 가슴이 없습니다. 속이 뻥 뚫렸습니다. 어느 때는 너무 꽉 차있습니다..! 앞에서 걷는 분들 절하실 때 보면 다리가 전부 제 다리가 아닙니다. 너무너무들, 다들 아픕니다. 이렇게 한자리에 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 제 아이를 영안실에서 마주했을 때 형사 두 분이 있었습니다. 아이의 흰 천을 벗기려고 손을 내미는데, 아이의 손을 잡아보려고 내미는데 눈빛들이 너무 분주합니다. 무언의 압력입니다. 내리지 말라고 보지 말라고. 여기 계시는 시민 여러분..! 다음에 어떤 참사가 있으면 절대로, 절대로 장례를 먼저 치르지 마세요..! 흰 천을 꼭 거둬보세요..! 아이의 손을 꼭 잡아보세요..! 아이를 마지막으로 보낼 때 꼭 한 번 안아주세요. 저는 그걸 못 해 너무나, 너무나 아이한테 미안합니다. 너무나 큰 죄인이 되었습니다 …”   “눈에서 피눈물이 나옵니다. 국가는 왜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고 예방할 수 있었던 참사를 외면하고 있을까요. 그때도 국가는 없었고 지금도 국가는 없습니다. 왜 우리 아이들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그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아야 했을까요. 왜 응급처치 한번 제대로 못 받아보고 왜 희생 되었을까요. 왜 다목적체육관에서 시신을 확인하고 신원을 확인하게 됐음에도 유가족들에게 신속히 인계하지 않고 그 먼 서울 각 지역으로 흩트려 놓고 우리 유가족들을 두 번이나 죽였을까요 …”   유가족들은 ‘희생자 이송 및 조치’에 대해서만도 수많은 질문을 던졌지만 책임있는 진실된 답변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 “누가 용산다목적체육관으로 희생자를 옮기라 지시 했는가? 그리고, 거기서 전국의 병원으로 희생자를 다시 옮기라고 지시했는가? / 왜? 우리 아이들이 서울 외곽 영안실에 있었나요? / 왜? 우리 아이가 영안실에서 모두 옷이 벗겨져 있었나요? / 왜? 아이 핸드폰이 용산경찰서에서 주웠다고 했는데 보호자가 주라고 하는데 수사중인 물건이라고 안주었는지? / 왜? 압사사고가 분명한데 마약검사를 진행하자고 하였는지? / 왜? 아이가 지금도 구급일지를 달라고 하는데도 확인이 안되는지? / 왜? 영안실에서 아이를 빨리 데리고 나가라고 재촉을 하였는지? / 신원확인 한 구급대원의 구급일지를 순천향병원에 아이를 인계할때 함께 인계 했음에도 변사체 처리한점 / 친구가 보호자로 구급차를 탔었고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었고 부모가 구급대원의 연락을 받고 병원밖에 있었는데도 다시 신원조회를 한 점 / 부모보다 연고지 공무원이 더 먼저 마지막 안치된 곳을 알게 된 점 / 나체로 부모에게 인계된 점 / 검안과 검시를 두번씩 한 점 / 마지막 검안 당시 부모에게 동의를 얻지 않았고 참여시키지 않은 점”(생명안전시민넷 최희천 교수-“10.29 참사의 경험을 통해 본 생명안전기본법의 의의와 필요성”중에서)   심지어 참사에 대한 책임으로 물러났던 실권자들은 복귀했다. 8월초 시민분향소 앞에서 진행된 추모와 연대기도회에서 고난함께 전남병 목사는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의 문제다. 내가 아니었어도 누군가 당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면 그것이 사회적 재난”이라 하였다. 또 “우연한 사고라 할지라도 그것을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시키느냐, 사회 전체가 숙고해야 하는 사건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수준이 결정된다. 그렇기에 10.29 이태원 참사는 우리 사회의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가늠자가 된다”고 하였다. 왜 내 가족이, 사랑하는 이가 목숨을 잃었는지 알아야 그때서야 애도가 시작될 수 있다. 부디 1주기가 오기 전에 온전한 애도를 시작할수 있도록, 다양한 그리스도인들께서 함께 기도하며 동행해 주시기를 간곡히 요청 드립니다/목사·NCCK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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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09-06
  • [칼럼 6] 지구 없이 교회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한국교회생명신학포럼 총무 이박행목사  지금은 지구 비상사태이다.  매우 이례적으로 극단적인 이상기후 현상의 빈도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살인적인 폭염, 엄청난 폭우와 대홍수, 통제 불능의 태풍, 빈번한 산불, 극심한 가뭄 등 지구 조절 시스템이 붕괴 직전이다.   지금 우리는 매우 긴박한 ‘기후 비상사태’에 처해 있다. 이 같은 위기의 원인은 산업화 이후 인간이 내뿜는 '탄소'다.   그래서 전 세계는 지금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고 2050년까지 탄소 순 배출량을 '제로'로 만들자며 탄소중립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회(IPCC)가 최근 발표한 제6차 보고서에서 보듯, 전 세계적으로 탄소 감축을 위해 합의한 행동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더구나 무한 경쟁과 무한 성장을 추구하며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 폐기를 반복하고 있는 탐욕의 악순환은 끊어내기가 쉽지 않다. 지금 당장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 사회적 지위, 행복감을 확인하는 소비지향적 삶을 끊어내고 기후 위기에 비상하게 대처해야 한다.   함께 지속 가능한 경제적 책임을 다해야!  전 세계 과학자들은 2028∼2034년에 지구 평균 온도가 산업화 이전보다 1.5℃ 높아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예상 시기보다 10년이 앞당겨졌다. 1.5℃를 넘어서면 기후재앙이 일상화하고, 상황을 돌이킬 수도 없게 된다. 1.5℃는 인류 생존을 위한 일종의 마지노선이다.   이를 지키기 위해, 온실가스 배출과 자연 파괴를 최소화하는 생태적 경제체제로 바꿔야 한다. 즉,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로 인해 자원이 고갈되고 온실가스와 쓰레기는 한없이 늘어나는 단선형 경제에서 벗어나, 생산 소비 폐기의 과정이 순환되는 순환 경제로 전환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화하는 생태적 삶을 실천하여 에너지 수요를 줄이고, 재생에너지 생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육류보다는 곡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며, 일회용품과 플라스틱, 과포장 등의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대중교통을 즐기며 전기차로의 전환에 힘쓸 것을 호소한다.   생태사회로 전환을 촉구하는 정치 윤리적 책임을 수행해야!  전 세계가 2030년까지 2019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을 43% 감축하고, 2050년까지 배출량을 제로화하는 탄소중립을 목표로 노력하고 있다. 이 일은 각국의 정부와 기업이 힘든 희생을 각오하면서 실행하려고 할 때 비로소 이룰 수 있다.   이에 정부와 기업은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노력을 획기적이고도 과감하게 축소하여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산업체계에서 지속 가능한 재생에너지에 기반한 산업체계로 구축할 것을 촉구한다.   과연 지구 없이 교회가 존재할 수 있을까?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떻게 올 것인가? 종말에 이 세상은 불타 없어지지 않고 총괄 갱신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기억하며, 모든 생명과 더불어 공생 공존하는 삶을 살아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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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5
  • [변두리 소수자③] 참 떡 믿음
    ◇무교병 2015년 4월, 케냐에 도착 한 후, 전임 선교사로부터 사역을 인계 받고 거의 1년 동안, 신학교 설립을 위해 부지를 매매하는 중이었다. 주일 오후에 갑자기 미국에서 전화를 받았다. 우리 부부를 파송한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는 것이었다. 혼신을 다해 충성한 종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셨는지, 60회 생일 새벽에 주님께서 데려가신 것이다. 그 목사님은 신학교 시절부터 함께 기도하며 동역해 오던 나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 일로 인해 나는 큰 충격을 받았고, 함께하던 선교 정책에도 갑자기 공백이 생겼다. 당시 케냐의 교회 지도자들을 육성하기 위해 신학교를 설립하자고 합의하여, 나는 다른 곳에 담임목사로 청빙 받은 것도 사양하고 아프리카에까지 들어 왔건만, 갑자기 혼란스러운 처지가 된 것이다.   우리의 선교 베이스캠프는 나이로비에서 서북쪽으로 약 10시간 운전 거리에 있는 해발 4,321m의 엘곤 산 중턱에 있었다. 그리고 차로 6시간 반경 안에 있는 23개의 마을에 각각 교회와 학교를 세워서 후원하고 있었다. 주중에는 현지 지도자들을 만나 공부하고 후원 사역을 하다가, 주일에는 한 교회씩 순방하며 말씀을 전하곤 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파송교회 담임목사의 유고 후 사역 방향을 위해 기도하던 중, 그 주일에는 내가 아프리카에서 처음 방문했던 티티맷마을(Titimet)에 가서 예배하기로 하였다. 당시 그 교회는 교회 건물이 없어서, 그 지역의 유일한 공공건물인 초등학교의 한 교실을 빌려 예배하던 상황이었다. 그 날 좁은 교실에 빽빽이 서서 찬양을 하는 중에, 찬양지도자가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먹먹한 내 마음에, 주님께서 요한복음 6장의 말씀과 함께 단순하고 명확하게 사역에 대한 개념을 새로이 세워주셨다. 그 날 말씀을 전하며 그 내용을 유쾌하게 선포했다.   ‘오병이어’의 기적적인 음식 공급을 체험한 사람들이 돌아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떡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배부른 떡’, ‘모세의 떡’, 그리고, ‘생명의 떡’이었다. 이는 육신에 필요한 양식,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보고 모이는 무리, 그리고, 참 구원자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알아보는 참 믿음! 나는 이 세가지를 ‘CCC’, 즉, ‘Corn, Church, Christ’ 라 부르고, 이후 사역 기간 동안 선교 활동의 지침으로 삼았다.   먼저, ‘배부른 떡’으로는 양식과 의료 지원, 신발 보급 등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물리적 공급을 했다. ‘모세의 떡’으로는 교회 지도자들의 헌신과 훈련, 청소년들의 건강한 영성과 위생교육, 어린이들을 위한 복음주입을 위해 프로그램화 하였다. 그리고 그 모든 공급과 사역 활동을 통해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어 구원 받고, 주님으로 믿어 따라가는 삶, ‘참 떡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목표를 계속 상기했다.   케냐 인구의 84%가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한다. 이는 구교를 포함한 수치이지만 어느 시대에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그렇게 높은 나라는 없었고, 국제WEC(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 같은 선교단체에서도 케냐를 ‘미전도 지역’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런 곳에 왜 이렇게 많은 선교사들이 필요할까?   신앙의 고백과 표현, 찬양은 많으나, 교회 밖에서 참된 믿음 생활이 없어 혼탁한 사회에 참 복음을 ‘재계몽’시키는 선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북쪽과 동쪽은 이슬람, 내부에는 이단들의 도전들이 극심하고, 아프리카 대륙의 기독교 경계선으로서 타 종교화를 사수하는 방어 지역이기 때문이다. 또, 과거 식민지 역사와 ‘선심성’ 선교의 영향 속에 뿌리내린 기복적 신앙과 의존성을 퇴치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속 문화와 혼합된 형태의 신앙에서 ‘탈 무속화’하여, 참된 ‘예수 신앙’을 갖도록 도와줘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에게도 익숙한 모습이지 않은가? 우리와는 먼 다른 나라, 남 이야기로만 생각되지 않는 현상이다. 역사가 토인비는 “기독교인이 국민의 12%이면 그 사회를 기독교화 할 수 있다. 그러나 25%가 되어도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면, 그 나라에서의 기독교는 썩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미국은 신앙의 생활화를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한때 기독교인이 1~2%에 불과했을 때, 배가 그렇게 고픈 시절, 교회는 민족과 함께 성장을 이끌지 않았던가? 특별한 박해가 있었던 시절에 그랬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시기를 지나 부흥의 전성기를 이뤘다.   그런데 ‘배부른 떡’을 체험한 후, 세상에서 필요한, 세상 사람들이 먹어야 할 ‘생명의 떡’의 맛이 약해졌다. 기독교를 종교적인 문화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배고프고 목말랐던 시절에 먹었던 무교병이 이전처럼 감격된 눈물의 빵이 아니다. 그동안 열심히 달려왔던 교회들이 팬데믹과 전쟁 등 세계적 진통으로 위축되고, 각 사회의 대립 현상 속에 방어벽을 치며, 세대 간 갈등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동안, 교회들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교회들이 지난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신 것이다. 성도들에게 ‘생명의 떡’을 갈망하는 마음을 부어주셨다.   종교적인 ‘모세의 떡’ 맛에 질린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 하나님은 이토록 사랑하시는 세상에서, ‘생명의 떡’, 독생자 예수를 전심으로 다시 구하는 성도를 찾으신다.   ‘종교성’으로 배부를수록 하나님의 백성들은 허전하다. 무교병이 다시 맛있게 느껴지도록, 광야에 앉아, 배고픔을 느껴 보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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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1
  • [당신의 뇌] 유아 디지털증후군과 정신건강(1)
      뇌 발달의 결정적 시기에는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풍요로운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된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말하는 오감의 반응이 극대화돼야 한다. 텔레비전에 대고 아무리 ‘우유’라고 외쳐도 텔레비전은 아이 말에 반응할 수 없고 일방적이기 때문에 상호관계로 연결될 수 없다. 그래서 아이들이 TV를 많이 보게 되면 사회적 관계 형성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그리고 기분변화가 심해지고 짜증을 많이 부리는 등 정서조절 능력에도 많은 문제를 보이게 된다. 언어 이해력이나 표현력에도 문제가 생기게 된다.   요즈음 유아 자폐증의 아이들에게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바로 영상물을 과도하게 시청했다는 사실이다. 뇌가 급진적으로 발달하는 이 시기에 텔레비전이나 영상물에 직접 노출되면 뇌는 그대로 그것들을 흡수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발생시키기 시작한다.   어떤 3살 된 남자아이가 생후 8개월부터 영유아 디지털기기를 접하면서 병이 들기 시작한 사례이다. 이 엄마는 영어 영상물을 접하면서 남다른 열정을 갖게 되었는데 어릴 때부터 영어교육을 시키면 자연스럽게 외국인처럼 영어를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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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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