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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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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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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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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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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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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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심을 기뻐함으로 각종 아름다운 꽃들을 나열하여 축하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이요 미래의 소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토록 주님의 부활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가질 수 있는 참 소망인 것이다. 여기의 십자가도 피 묻은 십자가가 아니라 황금색의 십자가로 표현한 것이 승리의 상징으로 잘 부합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 작가는 재치 있고 활달한 터치를 구사하여 감동을 주는데 이는 마치 누가복음 24장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동행하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들의 집에 가서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하는 장면과 유사한 기쁨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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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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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독교적 상상력의 극단적 서사 작품②-이건숙의
      그 할아버지의 소원이란, 처자를 남겨두고 온 고향 땅 신의주를 생전에 자기 두 발로 한번 밟아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화자 ‘나’는 어느 무역회사의 과장 직분을 맡고 있었으며, 그 회사가 중국 심양 지역에 공장을 하나 차리게 된 일로 거기에 출장을 가야 했으므로, 그는 자신과 할아버지의 공통 일정을 잘 조절해서 결국 할아버지를 비행기에 동승시켜, 마침내 심양을 향해 떠났다.   화자 ‘나’가 이렇게 과중한 부담을 안고서 그 할아버지를 직접 신의주로 모시기로 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그 할아버지의 사연이 참으로 기구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독자의 처지에서 생각해 내린 판단이지만, 화자 ‘나’가 그 할아버지와 동병상련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었다. 먼저, 첫째(기구한 사연)에 관해서 보자면 이러하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신의주에서 살고 있었을 때 아내를 몹시 구박했다. 교회에 나가지 말라는 그의 요구를 아내가 거역해서였다. 가지 말라는데도 아내가 계속 교회에 나가자 그는 어느 날 부엌에서 아내의 등짝을 불로 지졌다. 어린 딸 학실이가 직접 현장을 목도하고 기겁을 해 놀라 소리 질렀다. 그 뒤로 아내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못하는) 대신, 틈만 나면 집에서 찬송가를 불러댔다.   그러나 실제로 딱 두 가지 곡만 불렀다. ‘예수 사랑하심은’과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이 두 곡뿐이었다. 아내가 하도 찬송을 불러대는 것이 귀찮았지만, 그러나 그 곡들이 그의 귀에 못이 박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두 곡의 찬송을 다 암기하게 돼버렸다. 그런데 결국 이 두 가지 찬송이 어느 때 그의 목숨을 구해주게 될 줄이야 그 자신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6·25동란 때 북군으로 동원되었던 그는 어느 전투 현장에서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미군 지휘관이, 예수 믿는 사람 외엔 다 죽이겠다며, 신자라면 다 손을 들고 앞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포로들 거의 전부가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 보려고 손을 들고 나왔다. 그들에게 신자인 증거로 찬송을 불러 보라고 하자, 많은 이들이 별수 없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학실이 아빠는, 이때다 싶게, 평소 아내가 부르던 찬송가 하나를 자신 있게 불렀다. 그러자 미군 장교가 한 곡만 가지고서는 확실치가 않으니 한 곡 더 불러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나머지 한 곡도 힘차게 불렀다. 그는 그렇게 하여 석방되었다. 자기가 평소에 그렇게도 구박했던 아내가 이 위급한 때 자기 목숨을 살려주게 될 줄이야.   미군 포로 신세에서 풀려난 그는 후에 남한에 정착한 뒤 교회에 잘 나가 장로 직분도 받게 되었고, 정년 이후 지금은 은퇴 장로의 신분이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 할아버지는 북에 남아 있는 아내에 대한 감사와 속죄의 심정이 서로 뒤엉켜 있었다. 이 이야기가 ‘나’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다음은 둘째(독자의 처지에서 판단한바)에 관해서이다.   화자 ‘나’도 할아버지와 다소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북에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학실이의 경우는 헤어진 아버지가 남에 있었다. ‘나’와 학실이는 동갑내기이며, ‘나’의 아버지가 북에 살아 계시다면, 학실이 아빠(이 할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일 것으로 보인다.    모든 정황이 어쩌면 한 가족이라고 착각될 만큼 두 가족은 서로 유사한 환경에 놓여 있다. ‘나’가 그 할아버지에 대하여 연민의 정, 다른 말로 표현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에 빠져들게 된 이유 중의 하나라고 보겠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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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9
  • [칼럼]그분은 가장 뛰어난 자라
      아가 5장 9절부터 13절에서 예루살렘 여자들, 즉 육적인 신앙인들이 영적인 성도, 즉 신부 성도를 향해 묻는다. 네가 사랑하는 자가 무엇이 더 나으냐? 이는 네가 그리스도의 신부 된 자로 그리 어여쁘고 잘났느냐? 그러면 네가 사랑하는 자가 우리가 믿는 주님보다 무엇이 더 나으냐? 도대체 무엇이 특별한지 말해 보라.    이들 말 속에는 신부 성도를 비방하며 업신여기고 있다. 또한 신부가 믿는 그 신랑 예수까지 비방하는 것이 된다. 왜요? 육적인 그들은 신랑 예수를 전혀 알지 못하고 또 그분의 사랑을 전혀 체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종말에 육적 교회가 영적교회 즉 그리스도의 신부 교회를 비방하고 정죄함도 이와 똑같다. 특히 주 재림 예언인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다. 신학적 잣대로만 보면서 무조건 잘못됐다고 정죄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신부 성도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로써 신랑 예수님을 자랑하며 증거한다.    나의 사랑하는 이는 희고도 붉어 1만명 가운데 가장 뛰어난 분이다. 희다고 함은 거룩하시고 성결하신 분이요, 붉다 함은 힘차고 왕성하신 분, 즉 생명으로 충만하신 분이시다는 것이다. 성인군자나 훌륭한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신 분이시다. 왜요? 날 구원하시고 생명으로 살린 후 계속하여 생명 충만케 해주시기 때문이다.    또 그의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 타래는 많아 까마귀처럼 검으시다. 즉 정금 같이 변함없는 사랑으로 날 인도하시는 분이요, 또 그분의 머리 타래가 많고 검으니 힘있고 전능하신 분이시오, 존귀하신 분이시다.   또 그분의 눈은 강가의 비둘기 같다. 이는 순결하신 분 그리고 온유, 겸손하고 화평케 하시는 주님이심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나로 신앙 정절을 죽기까지 끝까지 지키게 해주시는 분이요, 또한 나를 온유 겸손케 해주신다.    또한 그분의 눈은 젖으로 씻어 알맞게 박힌듯하다. 이는 주님은 나를 치료하시고 또 회개시켜 잘못된 것을 온전히 빼내어 주시며 신부되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뺨은 향나무밭 같고 향기로운 꽃 같다. 이 향기는 신랑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이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것에서 그리스도의 신부 되게 하시는 것이 곧 그가 하시는 생명의 향기이다.    그의 입술은 몰약을 떨어뜨리는 백합꽃 같도다. 주님 입술은 나와 두 번 입맞춤한 입술이니 초림 예수를 영접한 후 재림 주님을 맞이할 것을 가리킨다. 나는 몰약, 즉 주님과 똑같은 순교 제물로 드려 그의 신부가 되리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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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9
  • [칼럼 12] 기후 위기 시대, 가정-교회-마을이 함께하는 창조세계 회복운동
    목원대학교 조은하 교수  자연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생태계 구성원 전체의 것이며 아직 오지 않은 다음 세대의 것이다. 그렇기에 온전하게 보존되어야 하며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신앙고백이자 실천이다. 그러나 최근 이상기온, 미세먼지, 수질오염 등이 급속히 진행되며 전 세계적으로 산불, 가뭄, 폭염, 홍수 등 예측하기 어려운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고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의 상황까지 겹쳐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들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신학자 매튜 팍스(Mathew Fox)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을 두 가지로 이야기한다. ‘초록빛 은총’(Green Blessing, 창조 은총)과 ‘붉은빛 은총’(Red Blessing, 구원 은총)이다. 창조의 은총은 구원의 은총에 선행하여 창조세계에 내리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더불어 사는 생태적 동반자(eco-fellows)들과 온전한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붉은빛 은총’(Red Blessing, 구원 은총)에 응답하는 삶은 곧 ‘초록빛 은총’(Green Blessing, 창조 은총)의 감동을 일상 속에 구현하며 사는 삶이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초록빛 은총을 생태계 구성원 모두가 누리기 위하여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까? 개인의 일상생활의 작은 실천운동으로 시작해 생태적 삶이 가능한 마을을 만들기 위하여 가정과 교회, 교회와 마을이 함께 연대하고 협력해야 한다.     지역 주민을 위한 생태감수성 교육, 마을의 정원과 인근의 산 가꾸기, 아나바다를 통한 재활용품 사용, 녹색가게 운영, 마을 공터에 텃밭 가꾸기, 농촌교회와 연대한 농산물 직거래, 절수와 절전, 일회용품 사용절제 운동 등 가정과 교회와 마을이 힘을 합하여 할 수 있는 기후 위기 대응의 탄소중립 운동은 다양하다.     여름이면 교회마다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가 있고 이러한 행사 속에서 무분별하게 일회용품이 사용되고 아무렇지도 않게 버려지는 것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플라스틱 빨대(straw) 퇴출 운동은 미국 한 소년의 제안에서 출발했다.     2011년 “마일로 크레스(당시 9세)”는 음료를 살 때마다 나오는 빨대가 자원을 낭비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 스트로 프리(Be Straw Free)'라는 슬로건을 걸고 자신이 살던 버몬트주 식당들을 대상으로 캠페인을 벌였다. 이 운동에 동참한 식당 중에는 플라스틱 빨대 사용량을 50~80%까지 줄인 곳도 있다고 한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여 생명, 생태적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기독교인에게는 근본적 신앙고백이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첫 번째 책무이며 선교적 삶은 바로 ‘변화된 실천’이다. 초록빛 은총을 고백하고, 초록빛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함께 실천하는 것, 창조세계 회복과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 가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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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9
  • [칼럼 11] 기후 환경 보호는 크리스천의 시대적 미션이다.
    인터서브 조샘 대표  “저는 오랫동안 환경 연구와 운동을 해 온 과학자였습니다. 기독교인은 아니었고요. 이 크리스천 공동체에 온 것은 번아웃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의 기후 위기를 돌이킬 수 있을 전망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하던 행태를 바꾸려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 공동체에 와서 한 달을 지냈을 때, 이 사람들에게는 제게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치열하게 현실과 부딪히지만, 이들에게는 제게 없는 소망과 기쁨이 있었어요.”   지난 6월 첫 주, 캐나다 아로샤(A Rocha) 국제본부를 일주일간 방문했다. 아로샤는 40년 전에 시작한 크리스천 환경운동 공동체이다. 이 방문 기간 중, 알게 된 한 과학자의 간증이다.   창조 세계 돌봄(Creation Care)으로도 불리는 이 크리스천 운동에 있어서 아로샤는 중요한 사례이다. 이 전 세계적 네트워크는 영국의 한 선교사 부부로부터 시작되었다.   피터 해리스와 미란다 해리스 부부는 1980년대 초, 영국 성공회 선교사로 포르투갈에서 일하게 되었다. 북유럽과 아프리카를 지나가는 철새들이 머무는 습지가 심각하게 오염되었음을 알고, 이에 관한 연구와 개선을 시작했다. 신학자 존 스토트는 이들을 격려하였고 이 지역의 생태 보존을 미션으로 삼게 되었다.   10년이 지나며, 자연환경 보존과 신앙을 통합하려는 이들의 노력이 알려지면서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아로샤를 찾기 시작했다. 이들을 환대하고 안내하는 일이 또 다른 사역의 부분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아로샤의 환경보호 운동이 이제는 영국, 인도, 레바논, 르완다, 케냐 등등 세계 20여 곳, 수십 개의 환경 프로젝트와 공동체로 확산하였다. 우리나라 역시 이런 크리스천 환경보호 운동이 1980년 말부터 시작되어, 미약하지만 아직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6월의 아로샤 방문 일정은 외롭게 이 일을 해온 환경운동가들과 농부, 목회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진행되었다. 이 방문은 여러 가지로 유익했지만, 무엇보다 함께 간 10여 명 모두 한 마음으로 깨달은 메시지가 있었다. 그것은 환경을 보호하고 지킴이 복음의 증거요, 선교라는 것이었다.    선교란 무엇인가? 영어로 미션(Mission)은 라틴어 미씨오(Missio)에서 온 단어이며 그 뜻은 “보낸다”라는 뜻이다. 모든 성도는 세상으로 보낸 사람이다.    무엇을 위해서 보내셨을까?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전하기 위함이다. 선교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드러나는 복음의 선포이며, 증거이다.   이 망가져 가는 지구 생태계와 기후 위기 가운데,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뜻과 통치는 다르다는 것을 전하고 증거해야 할 선교적 사명이 있다. 이 소식을 전함에 있어서, 가장 큰 증거의 도구는 바로 우리의 삶이다. 이 망가진 세상으로부터 도망가지 않는다. 동시에, 현실의 어두움에 지지 않고, 미래에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과 기쁨을 우리 안에 새롭게 한다.   기후 위기의 시대, 크리스천들이 나서면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은 미션 파서블(Mission Possible)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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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8
  • [변두리 소수자④] 나만 몰랐던 세 가지
      한국에서 며칠 동안 생활해 보니, 편리하고, 좋다. 언어가 편하고, 음식도 맛있고, 무엇보다 대중교통 수단은 역시 최고 수준이다. 이렇게 좋은 고국 생활을 즐기는 동안 가끔, 10년 전에 조선일보의 김대중 칼럼니스트가 쓴 「한국인만 모르는 세 가지」라는 제목의 글이 생각난다. 개발도상국 관료들이 한국 사람들을 평한 내용인데, 그의 표현대로 ‘섬뜩한 지적’ 이다. 한국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얼마나 위험한 대치 상황에 있는지, 주변에 있는 강국들이 얼마나 두려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표현하면, 다른 나라에서 보기에 한국인들의 생활이 아주 풍요롭고, 부유한 수준인데, 국민들은 자국을 ‘헬 조선’이라 자칭한다. 붙어 사는 북한이 미사일을 자주 쏘아 올리는데도, 국민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고 있다. 다른 나라들이 모두 두려워 하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놓여 있는데, 오히려 그들을 우습게 보는 국민은 한국인 밖에 없다는 것이다.   유엔에서 발표하는 「행복 보고서」는 히말라야 산맥의 작고 가난한 나라 ‘부탄’을 배워서 시작했다고 한다. 부탄의 1인당 국내 총 생산과 평균 교육수준은 세계 최하위권이다. 그런데 이 나라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2010년 (당시에는 영국 신경제 재단 NEF 발표) 세계 1위였다. 열악한 생활 환경과 수준에 비해 이해할 수 없는 결과였다. 이는 당시의 부탄 왕의 철학 때문이었다. 그는 “부탄 국민들의 1인당 소득이 향상 된다고 해서 행복이 그만큼 더 커진다고 보장할 수 없다. 국가 총 생산 보다 국가 총 행복(GNH)이 더 중요하다”며 국민들의 행복을 경제 성장보다 더 중시했다고 한다. 이 나라의 ‘행복 국가론’을 1987 년에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가 보도하였고, 연구 끝에 2011년 유엔의 결의안이 나와, 이듬해부터 매년 발표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행복지수는 10점 만점에 5.951점이었다.    유엔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에서 발표한  「2023년도 국가 행복지수」에서 한국의 행복지수는 전 세계 137개국 중 57위이다. 금년도 통계에는 특별히, 코로나19 로 인한 ‘긍정적인 감정’ 과 ‘부정적인 감정’의 항목도 추가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소위 ‘K 방역’의 자부심도 작용한 듯, 한국의 그 순위는 작년보다 2단계 상승했다. 세계 최고 강국인 미국의 ‘독립 선언문’에는 '행복추구권'이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5위 강국인 영국과 함께 늘 10위권 밖에 있었다.   국민이 가장 행복한 핀란드의 날씨는 아주 어둡고, 추운 겨울이 매우 길다. 이런 기후 환경으로 인해, 한 시절에는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였고, 국민의 다섯 명 중 한 명이 정신 질환을 앓았다고 한다(2019년). 그 나라가 2018년 이래, 5년 연속, 행복지수 1위를 고수하는 데에는 정부와 국민에게 그 비결 세 가지가 있었다.   남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지 않으며, 주어진 환경을 즐겁게 누리며, 정부를 높게 신뢰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처지에 자족하며, 자연 그대로 환경을 즐기며, 정치인과 공무원이 신뢰를 받으니, 국민들도 의무와 책임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핀란드 국민의 정부 신뢰율은 64%라 한다.   이렇게 높은 정치 신뢰도로 인한 시너지 효과가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정부를 신뢰하니, 국민은 국가로부터 합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여긴다. 그리고 정책을 믿고 함께 노력하여, 상호적인 삶을 행복해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시민들의 결속력과 관용, 그리고 국민의 환원 습관으로 이어져서, 그에 대한 높은 세금 등을 부담스러워 하지 않고 납부한다고 한다.   한국의 안타까운 현재 행복지수도 올라갔으면 좋겠다. 변화가 필요할 것 같다. 차를 고를 때, ‘승차감’이 중요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문을 열고 내렸을 때, 사람들이 봐 주는 ‘하차감’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비교 습관과 과시욕은 어떤 차를 타고 다녀도 충족되지 못할 것 같다. 남들에게 보이려고 비싼 제품을 흔들며 살아야 한다면, 고급 명품으로도 자족할 수 없을 것이다. 인구 대비 정치인의 수와 그 누리는 보상이 세계 최고인데, 그 정책들이 정쟁의 결과들이라면, 그들의 신뢰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 결혼의 조건보다 배우자가 귀해야 행복하다. 가정의 시작이 미약할지라도 함께 노력하며 사는 과정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배고픈 시절, 굶어 죽는 사람들이 꽤 있던 형편에 아이들이 많이 태어났다. 계산을 하지 않으니 행복했었다.   우리 부부는 결혼 40 주년을 맞았다. 사역과 생활로 매일 함께 산 그 세월 후, 요즘, 알게 된다. 같은 환경과 조건 속에서 늘 함께 있었건만, 나와 아내의 행복 만족도는 전혀 다르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무엇이든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행복한 모습으로 아내는 그 믿음을 늘 증명했다.   언젠가, 어디에서, 그 무엇을 기대하느라, 지금, 여기서, 가진 것을 누리지 못 한 나의 ‘믿음지수’는 낮아졌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전 3:13).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2).   남과 비교하지 말자! 가진 것으로 감사하며 즐기자! 주님 나라를 누리며 살자!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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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5
  • [칼럼 10] 나무, 그리고 하나님의 아픔에 공감하는 교회 되길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권수영 교수  나는 지난 20년 동안 수없이 같은 주제로 강의를 해 왔다. 대학뿐 아니라, 다양한 단체나 기업, 방송에서 같은 주제로 강연을 했다.   같은 주제로 책도 여러 권 썼다. 그 주제는 바로 ‘공감’(共感)이다.   상담학자이면서 신학자인 나에게 이 ‘공감’이란 주제는 매우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공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인간을 향한 신(神)의 마음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연합하기 위해 성육신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의 밑바닥 감정까지 스스로 내려오셨다. 예수의 십자가는 소외되고 아파하는 인간이 하나님을 느끼고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곳이다.    나는 ‘공감’을 설명하기 위해 가끔 권정생 작가를 떠올린다. 그의 문학 작품은 대한민국 아동들에게 스테디셀러이다. 어린 세대가 그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공감’이었다. 그의 한 수필집 머리말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놀고 싶을 텐데, 앉아서 책을 읽으라고 하기가 참으로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정말 읽고 싶을 때만 아주 조금씩만 읽으세요.”  순간 나는 아이의 숨은 애로를 느끼는 작가의 공감에 눈물이 찔끔 났다. 분명 아이들은 그 공감의 마음에 끌려 마법처럼 그의 책에 빠질 수 있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기후재난이 난무하는 지금, 권정생 작가가 생태주의자였다는 점이 또다시 내 마음을 훔쳤다. 유명한 작가가 된 이후에도 그는 “변변치 않은 책 하나 내는 건 나무한테 참 미안한 일”이란 말을 자주 하였다. 그는 아동뿐만 아니라 나무의 아픔까지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참 어른이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그를 떠올릴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참 많이 닮은 분이었으리라고 짐작한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참 좋다 하셨던 자연이 인간의 손에 훼손되고 기후재난으로 신음하는 요즘, 나는 더더욱 권정생 작가의 유별난 공감 능력을 배우고 싶어졌다.    어느 날 문득, 난 한국교회가 이런 공감 능력을 발휘하여 종이 주보 없애기 운동을 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몇몇 교회 목회자들과 상의를 하기도 했다. 종이 주보의 전통을 갑자기 접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다행히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종이 주보를 과감하게 없애고 디지털 주보를 시작하는 첫 번째 교회가 되었다.     나는 종이 자체를 무조건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책은, 그리고 권정생 작가의 책은 계속 종이책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배를 드린 후, 두고 나오는 종이 주보는 이제 과감하게 없애도 되지 않을까? 스크린과 홈페이지에 띄우기만 해도 나무에 덜 미안해도 될 텐데 말이다.     묵상하면, 나무의 아픔은 곧 하나님의 아픔이다. 나무의 아픔을 공감한다면 곧 하나님의 아픔을 공감하게 된다. 한국교회가, 그리고 성도들이 이 공감의 자세로 생태계를 사랑하고 기후재난을 대처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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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3
  • 한 사람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 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2~19)   하나님 앞에 서면 누구나 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기까지 험한 골짜기를 헤매고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친구들을 불러 기뻐 잔치를 한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은 기쁨보다 더 기뻐하신다(눅15:3~7)   이 땅에 악이 가득하여 노아의 여덟 가족만 구원 얻어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 되게 하셨지만, 소돔 고모라는 죄인이 넘쳐서 벌하신 것이 아니라 의인 열명이 없어서 그 땅을 엎으셨다.   태양계를 승용차 핸들 크기만큼 축소하면 지구는 한 점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내가 보이시기는 하실까? 하나님은 티끌 같은 나 하나를 지극히 사랑하신다.   나 하나 위하여 하늘 땅 만드시고 나 하나 위하여 해와 달 만드시고 나 하나 위하여 시간과 역사 이루시고 나 하나 위하여 골고다 십자가 지시고 나 하나 위하여 영원한 안식을 준비하셨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전 우주만큼 사랑하신다. 나의 몸무게는 우주 전체 무게와 같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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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2
  • [건강교실] 백내장
      백내장은 안구의 수정체가 혼탁해져서 시력 장애를 일으키는 병이다. 이에 따라 눈으로 들어오는 빛이 수정체를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게 되어 시야가 뿌옇거나 침침한 증상을 호소하며, 시력이 떨어지게 된다. 백내장의 원인은 후천성이 대부분인데, 노화에 의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다만, 드물게 선천성 원인이 있을 수 있고, 이외에도 외상, 염증 질환, 장기간 스테로이드 제제 사용 등이 백내장을 일으킬 수 있다.   이 질환이 60,70대에 많이 발병하는 이유가 있다. ‘노화’에 의해 수정체의 혼탁이 발생하게 되므로 나이가 들면서 발병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보통 50세 이후 발생하기 시작해 60대 이후부터는 절반 이상에게 동반되는 질환이다. 따라서 60,70대에 이로 인한 시야 흐림 및 시력 저하를 호소하여 병원을 많이 찾고, 진닫 받아 수술을 많이 받는다.   60,70대에 백내장과 혼동되기 쉬운 질환은 바로 ‘노안’이다. 노안과 백내장을 많이들 혼동한다. 우리 눈은 가까운 물체를 볼 때 수정체의 조절이 일어나는데, 노화에 의해 수정체가 딱딱해지고 탄력과 조절력이 감소되어 멀리 잘 보는 사람이 근거리 시력에는 장애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돋보기를 착용함으로써 가까이 보는 것을 잘 보도록 할 수 있다.   하지만 백내장은 수정체의 혼탁이 있으므로, 멀리 보는 것도 뿌옇고, 가까운 것에 돋보기를 써도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거겠지’ 하면서 침침하고 불편해도 그냥 참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참다가 너무 불편한 상태가 되어서 병원을 방문하면 통상적인 수술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질환이 진행된 경우가 있다. 따라서 증상이 있다면 안과를 방문하여 백내장 여부 및 기타 안과 질환 여부를 진단받는 것이 좋다.   물론 시야 흐림이나 시력 저하는 망막의 질환에 의해서도 발생할 수 있다. 백내장을 의심하여 오는 분들 중에 망막 질환을 갖고 계신 분들을 흔하게 접한다. 노화에 의해 발생하는 흔한 망막 질환인 황반변성의 경우 시력 저하가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이외 망막 혈관 질환도 젊은 연령보다 60,70대에 더 잘 발생할 수 있고, 증상이 비슷해 감별이 필요하다. 그리고 백내장이 많이 진행된 경우, 이로 인한 합병증으로 녹내장이 발생할 수 있다. 또, 수정체 단백에 의한 포도막염 등이 발생하게 되며, 이 경우 수술도 어렵고 수술 후 회복 기간 및 부작용 가능성이 증가하게 된다.   백내장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줄만큼 진행된 경우에 보통 수술하게 된다. 여기서, 시력 저하가 치료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증상인데, 이외에도 낮에는 눈부심이 동반되는 경우가 있다. 가끔 한눈을 가려도 물체가 두 개로 보이는 증상(단안 복시) 등을 불편감으로 호소할 수 있다. 백내장 진행을 지연시키는 안약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백내장을 좋아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예방법으로는 과도한 자외선 노출을 피하며, 당뇨가 있는 경우 당뇨 조절을 잘하고, 금연은 눈을 위해서도 좋다. 하지만 이는 노화에 의한 현상인 백내장을 근본적으로 예방할 수는 없다.   수술적으로 ‘초음파 유화술’을 가장 많이 쓰이는데, 초음파 에너지를 사용하여 수정체를 깨고 흡인하여 혼탁해진 수정체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수정체와 유사하게 생긴 인공 수정체를 삽입하게 된다. 이때 인공수정체는 수술 받는 사람의 필요에 따라 가까운 곳 또는 먼 곳이 잘 보이도록 도수를 선택하여 눈 안에 삽입한다. 난시가 심한 경우 난시 교정 렌즈나, 노안에 대한 교정도 함께 원하는 경우 다초점렌즈를 인공 수정체로 삽입하는 수술도 시행하는 경우가 있다. /한양대병원 안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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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2
  • [‘주 예수’를 닮는 복음의 일꾼 11회] 앎의 힘, 말씀에 순복할 수 있는 비결
      새 생명의 가치를 알고 빈부나 귀천에 처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의 믿음  성경은 어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맡겨주신 일에 전념하며 말씀에 순복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앎의 힘에 두었음을 발견케 한다. 빌립보서4장 12절 “나는 비천에 처할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확증이다. 이처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줄 알고 종의 몫에 순복하며 지킬 수 있는 비결이 앎임을 확증케 한다. 믿음이 있는 자나 없는자 모두에게 공히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날 수 있음의 사실이다. 이를 마태복음 7장에서 반석 위에 세운 자나 모래 위에 세운 자에게 내려 부딪히고 미칠 수 있음을 확증하고 있다. 실족하지 아니하는 힘은 영혼 구원자이신 하나님에 관해 바로 알고 좇기에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연고라 하셨다. 말씀을 들었으나 지킨 자는 주를 좇으려면, 따르려면, 믿으려면의 조건에 순복을 한 자이다.    이는 “자기를 부인하고 각기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신 말씀에 화답 함이다.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영혼 구원의 도는 신본주의 자세를 갖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한다. 곧 십자가의 사역에 동참키 위한 종의 몫을 바로 배워 알고 이를 행하는 일임을 연계하여 새긴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을 구원받음이라 하신 말씀대로 영이요 생명의 말씀으로 새 가치관 정립임을 확증한다. 그러기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하셨으며 주종의 관계를 성립하고 주를 좇는 순복임을 확증케 한다. 중요한 앎으로써 하나님의 영혼 구원자이심을 연계하여 깨닫게 한다. 새 생명을 얻은 새로운 피조물에게도 똑같이 비도, 창수도, 바람도 부딪힘을 강조한다.    이를 전도서9장 2~3절은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실족하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혼 구원자로 믿음이며 성경을 상고하는 목적이 영생에 있음을 알고 좇은 반석 위에 세운 연고이다. 영생은 예언된 구원의 도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의 지킴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존재의 목적을 두 계명의 실천에 두고 충성하는 믿음이다. 그 결과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며 새 생명의 가치를 가장 소중히 여겨 보내심을 받은 자로 살리는 몫에 충성이다. 또한 죄사함의 결과는 사단이 그 영혼을 절대 헤치지 못한다는 영적인 영생의 복으로 약속이다.    그러기에 시편 23편 3~4절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함이다.  그러므로 말씀 위에 세워진 믿음은 어느 상황에서도 실족하지 아니하고 굳건한 믿음과 끝까지 인내로 맡겨주신 몫에 화답을 한다. 곧 이김의 비결이 앎의 힘이기에 빈부나 귀천에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로써 끝까지 충성할 수 있음을 확증케 한다. 주의 말씀 앎이 이길수 있는 힘임을.../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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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2
  • [‘주 예수’를 닮는 복음의 일꾼 10회]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자세의 지혜
    산다는 것은 주의 복음 전하는 일에 두 날개로 교회와 남의 유익 위한 선 전도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주의 백성들이 끝까지 지켜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이를 찾게 한다. 살아있는 동안 변개치 않는 몫 곧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일임을 발견케 한다. 주종의 관계를 성립하고 성전의 기능인 죄사함을 위해 거듭난 새 피조물로써 마땅히 행한 일만이 남는 일임을 밝힌다. 거듭난 무형교회의 기능이며 사람의 본분이다. 유형의 교회에 거듭난 자들이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으로 주의 뜻이다. 시편18편은 이를 잘 나타내 준다. 31~36절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며 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라는 말씀의 안위와 연고이다. 곧 어느 상황에서든지 주의 제자화를 위한 이웃 사랑을 위함이다. 주의 공동체를 확산시켜 주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선이다. 이를 위해 서로 사랑을 실천하여 전도하는 교회로 값진 착함의 몫을 원하신 구속사역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에게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지혜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자세의 목적을 위한 신앙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거듭나게 하신 몫을 지켜 행하는 존재 목적의 가치관이다. 더불어 연계하여 에베소 교회에 책망하신 처음 사랑의 회복을 위한 지혜를 찾게 한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는 요구이다. 이 교회의 사자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였고 또 거짓 사도들을 가려낸 분별 그리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단,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시며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하셨다. 더욱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지체들의 처음 사랑 회복을 권하시어 서로 사랑 실천을 강조하심이다. 처음 사랑은 거듭난 자들이 서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의 실천을 하여 전도로 주의 나라 확장을 위한 필연이다. 에베소 교회가 세워질 때 서로 사랑으로 하나된 교회가 형성되었다. 곧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된 자들이 연합되어 이웃 사랑을 하기위해 세워진 유형의 교회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지체들의 서로 사랑 실천을 회복하라고 하심이다. 서로 사랑의 실천이 왕성하여져 제자화가 될 수 있도록 책망하심이다. 서로 사랑은 주를 사랑하는 일에 이웃 사랑으로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한다. 이로 인한 이웃 사랑의 실천은 사람의 본분이며 주의 나라 확장이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처음 사랑 회복은 서로 사랑을 원하시는 선임을 확증케 한다.  교회를 위하여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자세로 피차 존귀히 여기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순복의 필요이다. 곧 이웃 사랑할 수 있는 서로 사랑의 중요한 요청임을 밝히 확증하는 바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기에 남의 유익을 위하여 사람에게 생명을 얻도록 자기를 부인 하며 십자가 지는 주요 두 날개이다. 즉 교회와 남의 유익을 위한 거듭난 자의 존재 목적임을 확증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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