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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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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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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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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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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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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
       천예숙작가의 「승리의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심을 기뻐함으로 각종 아름다운 꽃들을 나열하여 축하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이요 미래의 소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토록 주님의 부활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가질 수 있는 참 소망인 것이다. 여기의 십자가도 피 묻은 십자가가 아니라 황금색의 십자가로 표현한 것이 승리의 상징으로 잘 부합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 작가는 재치 있고 활달한 터치를 구사하여 감동을 주는데 이는 마치 누가복음 24장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동행하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들의 집에 가서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하는 장면과 유사한 기쁨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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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실시간 칼럼 기사

  • 사울이 바울되는 변화의 힘
      사울은 스데반을 돌로 친 증인들의 옷을 맡았던 자로  사도행전에 처음 등장한다. (행 7:58). 사울은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다. (행 8:1) 사울이 교회를 진멸할새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잡아 오려 함이라. (행 9:1~2) 사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직접 뵙고(행 9:3) 확실하게 방향 전환을 했지만, 유대교 전통에 열심이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한 교육을 받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 자이다” 회심한지 14년이 지난 후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바나바는 사울이 태어난 다소까지 찾아가 사울과 함께 안디옥으로 와서 일 년간 큰 무리들을 가르치매 그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행11:24~26)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는 초기에 사울이라 기록하였으나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행 13:9)” 비로소 바울이라 기록하고 그 후 모든 성경에 바울로 기록되었다. 사울은 히브리어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어 이름이다. 당시는 헬라어 중심이어서 이방인에게 헬라어가 친숙했음이라. “이 복음은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 에게로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2:8) 사울은 예수님께서 친히 가정교사가 되셔서 필요할 때마다 직접 나타나 알려주시고 확신을 주셨으며  성령의 충만함으로 바울 되게 하셨다.  역사는 그리스도를 기점으로 BC와 AD로 나뉜다. 누구에게나 생의 전환점이 있다. 사람은 예수 영접하기 전과 영접 후로 인생이 갈린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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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4
  • [칼럼] 그의 길을 지켰다
         욥기 23장 10절에서 12절에서 하나님의 길과 내가 택한 길이 나온다. 하나님 입의 명령을 준행하고 있지만 우리 모습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너무도 현격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고 정금같이 나오게 하시리라는 말씀이다. 먼저 ‘하나님의 입술의 명령과 그 말씀을 귀히 여겨 지켰다.’ 했으니 이는 과연 어떤 명령을 준행 했다는 것일까? 바로 오늘 이때에 따른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임을 특별히 가리킨다. 이는 주 재림 전에, 또 큰 환란날에 이기는 말씀이다.    재림 주님의 신부가 되게 하는 특별한 예언의 말씀인 것이다. 부활과 더 좋은 부활의 견고한 진리에 서게 하시는 말씀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시는 것과 관계된다. 그 다음 내가 그의 발걸음을 따랐다고 고백한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랐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적으로 초림하신 주님이 걸어가셨던 고난과 핍박의 생애를 가리킨다. 또 우리가 그의 고난 받으심 같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신에 교회를 위하여 채우는 것을 가리킨다. 이 과거적인 주님 발자취 따르는 것과 달리 내가 그의 길을 지키며 벗어나지 아니 하였다고 고백한다.    이는 하늘 보좌에 영광 받고 좌정하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그분의 하시는 역사를 가리킨다. 그분의 역사가 그분의 장차의 길이다. 이미 우리가 상고한바 이사야 2장 3절 ‘마지막 날들에 가장 높은 산으로 주의 전을 세우시리니 우리가 그리로 올라가자 그리하면 그가 그의 길을 가르쳐 주시리라. 그러면 우리가 그의 길을 행하리라.’ 하였다. 이는 ‘그의 길이’ 그가 지금 이때에 하시는 역사이며 이를 요한계시록 6장 9절에서 11절에서 단적으로 가르쳐주시고 있다. 즉 순교할 자들의 수를 채우시는 것이요, 또 환란날의 하나님의 종들의 수인 14만 4천을 채우시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이와 같은 주의 길을 깨닫게 되면 어찌하든 순교할 자의 그 수에 들도록 믿음으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또 더욱더 높은 경지를 향해 소망을 가지고 주님의 길을 지켜 나가게 될 것이다. 이를 가리켜 내가 주의 길을 지켜 따랐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내가 택한 길을 알고 계시니 그가 나를 연단 하시면 정금 같이 나오리라. 나의 인본적인 사상과 고집, 내 속에 있는 육적인 찌꺼기와 불순물을 빼내시리라. 하나님의 길을 끝까지 마치게 하기 위해 나를 정금같이, 다이아몬드 보석 같이 단련해 주시리라. 그러므로 주님 역사와 그의 길을 내가 가도록 해 주시리라. 아멘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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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3
  • [당신의 뇌] 성 호르몬과 정신건강(2)
      성 호르몬 분비는 시상하부와 뇌하수체에 의해 조절되는데 시상하부가 뇌하수체 전엽을 자극하면 뇌하수체에서 여포자극호르몬과 황체형성호르몬을 분비하여 남성에서는 테스토스테론을, 여성에서는 에스트라디올과 프로게스테론 분비를 촉진시킨다.   여성의 에스트로겐이라는 호르몬은 우울증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 에스트로겐이 부족하면 뇌에서 분비되는 세로토닌의 농도가 낮아진다. 세로토닌 농도가 낮아지면 여성은 우울해지거나 불안해지는 경향이 있으며 우울하고 초조감, 무력감, 수면장애, 과식, 성욕감퇴 등을 쉽게 느낀다. 그러한 이유로 에스트로겐의 농도가 낮아지면 월경전이나 폐경기 여성이 우울증이 잘 걸리는 것이다. 또 여성은 감정의 뇌인 변연계가 남성보다 더 크기 때문에 유대관계가 와해되었을 때 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남자의 뇌는 여자의 뇌보다 약 8~10% 크다. 남녀 간 뇌구조의 차이 중 하나는 전두엽을 덮고 있는 피질의 두께다. 남자의 경우 우측 전두엽피질이 좌측 전두엽피질보다 두꺼운 반면, 여자의 경우에는 양쪽 전두엽의 피질두께가 거의 비슷하다. 그리고 여자의 경우 에스트로겐 수용 기가 전두엽 전반에 골고루 분산되어 있지만, 남자는 고르지 않다. 전두엽에 있는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 통로의 분산 정도에서도 성차가 나타난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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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0
  • [건강교실] 현대인의 발과 건강(상)
      우리 몸에서 가장 학대를 받는 부위가 있다면, 그것은 발일 것이다. 온갖 지저분한 것은 다 밟고 다녀야 하고, 좁은 신 안에서 숨도 못 쉬고 땀냄새에 절어야 한다. 작은 신을 신고 한번 고생을 했으면 다시는 신지 말아야 하는데, 다음날 다시 또 발보다 작은 신을 신고 나선다. 발이 불편하다고 병원을 찾아가는 사람도 드물다. 발이 아픈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룻밤 자고나면 대개는 발이 안 아프기 때문에 병원을 안 찾는다. 병원을 찾아가도 의사선생님들도 발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별 뽀족한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냥 ‘두고 보자’든지, ‘그냥 그대로 지내시라’든지 한다.   우리가 잘못 알고 지내온 상식 중에는 ‘새 신발을 신으면 발이 아프다’라는 것이 머리 속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새 신발을 신고 나서 발이 아프다는 것은 발과 신발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싸움에서 발이 이기면 신발 가죽이 늘어나 신발 모양이 틀어지고, 반대로 싸움에서 신발에 이기면 발이 신발모양처럼 변형이 된다. 자신의 발에 맞는 신발은 처음 신는 순간부터 발이 편하게 느껴진다.   선진국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병원에서도 발에 관한 의료서비스를 활발하게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발에 관한 의료서비스는 초보적인 단계라 할 수 있다.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의학지식이 세계적인 수준과 견준다고 할지라도, 환자들에게 실제로 해줄 수 있는 보조기나 깔창, 구두 등의 제작 수준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아직 시장이 넓지 않기 때문에 경제성이 없어서 이런 것에 투자를 안 하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발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첫째로, 하이힐을 신지 말자. 하이힐은 구두 뒷굽의 높이가 3센티미터를 넘는 경우에 하이힐이라고 한다. 뒷굽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우리 몸의 무게중심은 땅에서부터 멀어져 위로 올라가게 된다.    즉, 우리 몸은 불안정해지고 넘어지지 않게 중심을 잡기 위해서 온몸의 근육들을 긴장시키게 된다. 특히 뒷굽이 뾰족하고 좁은 경우에는 발목을 삐지 않으려고 더욱 힘을 주고 걸어야 한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근육들이 긴장을 하게 되니까,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목뒤도 아프게 되며, 근육을 긴장시키느라고 힘을 다 써버리기 때문에 쉽게 피곤해진다. 뒷굽만 높은 구두는 체중을 앞쪽으로 쏠리게 한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허리를 뒤로 젖히며 걸어야 하기 때문에 요추전만증(허리 등뼈가 마치 임산부처럼 앞으로 튀어나오며 구부러진 것)이 생길 수 있다. 발뼈들은 뼈들이 좌우로 둥글게 아치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이를 횡아치라고 한다. 뒷굽이 높은 구두는 체중이 앞으로 쏠리게 되므로, 점점 횡아치가 무너지게 된다.    또한 하이힐은 앞부리가 뾰족하기 때문에 엄지발가락은 둘째발가락쪽으로 기울어지는 엄지발가락외반증이 생기게 된다. 엄지발가락 외반증은 발의 횡아치를 더욱 무너지게 만든다. 발의 횡아치가 무너지면 대개 둘째, 셋째, 넷째발가락 뿌리부위에 굳은살이 생긴다. 또한 발가락들은 좁은 앞부리 속에서 겹쳐지고 구부러지는 변형이 생기면서, 발가락 등쪽에 굳은살이 생긴다.    정리하면, 하이힐은 △허리와 어깨 및 목뒤의 통증 △전신피로 △요추전만증 △엄지발가락 외반증 △둘째, 셋째, 넷째발가락 뿌리부위에 굳은살 △발가락 등쪽에 굳은살 등을 일으키기 때문에 발의 건강을 위하여 하이힐을 신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한양대 류마티스병원 관절재활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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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0
  • [사랑의 실천] 어떻게 기뻐할까?
      전국 시대, 철인으로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맹자는 진심편에서 군자 유삼락(君子有三樂)이라 했습니다. “군자란 학식이 높고 행실이 어진 사람을 말하는데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것으로서, 첫째 즐거움은 부모구존 형제무고(父母具存 兄弟無故)로, 부모님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요, 둘째 즐거움은 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仰不傀於天 俯不作於人)으로,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 셋째 즐거움은 득천하영재 이교육지(得天下英才而敎育之)로,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추사체로 유명한 완당 김정희의 삼락은 일독, 이색, 삼주라 했는데, 一讀은, 책 읽고 글 쓰고 항상 배우는 선비 정신을, 二色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변함없는 애정을, 三酒는, 벗을 청해 술잔 나누며 세상과 인간사 얘기하며 풍류를 즐기는 것을 꼽았습니다. 기쁨에 대한 국립국어원의 정의는 “욕구가 충족 되었을 때의 흐뭇하고 흡족한 마음이나 느낌”이라고 나와 있는 것을 볼 때, 소멸 되지 않는 영원한 기쁨, 하드웨어에서 주어지는 기쁨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를 통해 주어지고 채워지는 기쁨이 필요합니다.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이든은 100곡 이상의 심포니와, 80곡 이상의 소나타를, 또 천지창조를 위시한 거대한 오라토리오를 남겼는데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작곡할 때 늘 하나님을 생각한다. 그리하면 내 마음에 기쁨이 솟아오른다. 그리고 마치 악보에 음이 춤추는 것 같고 내 마음도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다시 말하면 곡이 좋아서 내가 기쁜 게 아니고 내 마음에 기쁨을 가지니까 좋은 곡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음악공부를 위해 6살때 부터 집을 떠나 생활해야 했던 불우한 하이든이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유머를 잃지 않았던 하이든의 음악을 보면 기쁨을 표현한 것이 많습니다. 기쁨을 가지니까 악보가 춤을 추는 것 같이 보인다는 이 하이든의 고백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성경에도 기뻐하라는 말씀이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말씀도 나옵니다(시 37:4). 여호와를 기뻐한다는 것은 조금은 어폐가 있는 표현이긴 하지만 여호와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소유한다는 것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는 것이요, 내가 그분 안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될 때, 그 분이 나의 소유가 될 때, 주인이 될 때 부족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분을 소유하는 것, 그 분을 기뻐하는 것, 그 분을 송두리째 차지하는 그런 개념입니다. 그럴 때 세상 그 무엇이 부러울 수 없고, 두려울 수도 없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시기를 축복합니다./예장 합동한신측 총회장·예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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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8
  • [‘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3회]사랑은 계명을 실현 살리는 새 생명
      범사에 감사하며 강건함은 말씀에 화답하는 순복의 은혜로 확증케 됨  신본주의 자세를 갖고 주의 명령에 화답하는 자에게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요한삼서 1장 2절의 말씀을 주셨다. 주께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목적에 순복은 믿음의 성화로 충만한 장성함이다. 주님 뜻대로 모든 선한 일에 열심하는 자들에게 은혜로 인한 성화이다. 종의 몫에 화답하는 믿음은 어느 상황에서나 실족하지 아니하는 강건함을 갖는 범사에 감사로 연계이다.  곧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에 순복할 수 있는 지혜로 실현임을 발견케 한다. 말씀과 기도로 거듭난 자들은 영혼이 잘 된 자들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좁은 길의 여정에 성화이다. 사랑을 실천하여 계명을 따라 순복한 결국은 영적으로 살리는 일에 풍성한 생명으로 진리에 거하는 믿음의 강건이다.    주의 말씀에 더욱 충성하는 순복함을 결과로 확증케 된다. 곧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으로 확증해 주심이다. 말씀 안에 거하여 영원히 여호와의 집에 거하게 되는 성화된 믿음으로 참 행복의 가치관이다. 이런 자들에게 주께서 영원한 생명으로 주의 집에 거하도록 하실 것이며 또 빼앗을 자가 없는 참 행복으로 풍성함임을 확증케 한다. 그러기에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심이다. 곧 죄사함을 입고 사단에서 해방되어 주 안에 구속으로 날마다 지켜 얻는 믿음의 성화임을 확증해 준다. 주 안에 거하는 자에게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말씀에 화답으로 주의 견인이다. 이로 인한 기쁨에 대해 요한복음15장 11절은 확증해 주셨다. 주를 사랑하여 평생에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따라 선한 열매를 맺히게 되는 감사와 기쁨이다.    즉 주 말씀에 화답이 영원히 여호와의 집에 머물 수 있는 비결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살리는 영을 좇아 주님의 말씀을 지켜 영생의 유업을 이을 순복이다. 베드로에게 주를 사랑함의 실현을 말씀 하신 후 그에게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지혜를 발견케 하셨다. 믿음은 주와 복음을 위해 죽음이 온다할지라도 변개치 아니할 순복으로 성령과 동행하는 참 행복을 누리는 실현이다. 곧 십자가의 길을 좇는 주의 은혜 안에 그리스도 제자화의 삶을 좇아 얻는 참 행복을 발견케 한다. 그러므로 행복은 계명을 지켜 이웃을 사랑한 거듭난 주님의 지체들과 서로 사랑을 하는 주의 거룩함을 입은 자들의 믿음 실현의 성화이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본을 좇는 믿음의 성화가 참 행복임을 확증케 한다. 곧 이들은 영혼이 잘된 자들이며 주의 자녀가 된 부르심에 몫을 하는 영적인 좁은 길에 믿음으로 범사가 승리이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 선한 열매를 맺히며 이로 인한 기쁨과 감사의 충만된 행복임을 확증케 한다. 영적으로 이긴 자들이 되어 성화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몫에 충성하도록 범사에 지혜로 강건함이다. 곧 범사에 감사하며 말씀에 화답하는 순복의 강건함은 은혜로 주의 나라 확장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주를 위한 신령한 몫에 충성한 믿음으로 인한 참 행복이다. 곧 주의 말씀에 화답은 모든 것에 일체의 자족하는 비결을 앎으로 계명 실천이며 범사에 강건한 성화를 이루게 한다. 믿음으로 말씀에 화답한 실현이기에 구속사역에 존재의 목적을 둔 지체들의 참 행복임을 .../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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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8
  •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미리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의지와 뜻과 목적이 있다. 베드로는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고”(마4:18) 요한과 야고보는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마4:21) 마태는 “세관원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부르셨다.(마9:9)  갈릴리로 가시다가 빌립을 만나 직접 나를 따르라 하시고 (요1:43) 빌립은 단짝 친구 나다나엘에게 메시아를 만났으니 “와 보라” 전도하고,주님 앞에 온 나다나엘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이미 보았단다, 네 속에 간사한 것이 없구나” 라고 벌써 알고 계셨다.(요45~51) 열두 제자 중 열한명이 갈릴리 사람이고, 가룟 마을에서 온 유다만 유대 지방 사람이다. 사울은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으나 생전에 뵙지 못했고, 승천하신 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직접 찾아와 주셨으며 다소 지방 출신 유대인이다. 예수님은 만나자마자 이름을 바꾸어 주시기도 하고,  별명을 붙여주기도 하셨다.  시몬을 베드로라 하시고, 요한과 야고보는 보아너게, 천둥번개 돌이라 하고, 사울을 바울(행13:9)되게 하신다.   제자들은 거의 갈릴리 어촌에 사는 평범한 어부들이었고  모두 자기 일터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한가지씩 잘하는 일이 있다.  주님은 그것을 들어 쓰신다.   물고기 낚는것을 보시고  사람 낚는 일감을 맡겨주신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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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7
  • [향유옥합] ‘임신중지’의 건강보험
     창세기에 보면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그 일로 디나를 강간했던 세겜 추장과 온 종족이 몰살당한 이야기가 나온다.    천진난만한 디나가 호기심으로 구경하러 나가기엔 그 땅은 너무나 악했다. 그땅의 추장 세겜은 디나와 강제로 성관계를 가지고 그를 ‘사랑’하였지만 그 결과는 온 종족이 몰살당하는 끔찍한 결말이었다. 세겜의 아버지 하몰 역시 디나를 데리고 오기만 하면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지식이 없었다.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청혼을 하려고, 야곱을 만나러 왔다. 와서 보니, 야곱의 아들들이 이미 디나에게 일어난 일을 듣고, 들에서 돌아와 있었다. 세겜이 야곱의 딸을 욕보여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부끄러운 일 곧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였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은 슬픔과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하몰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아들 세겜이 댁의 따님에게 반했습니다. 댁의 따님과 나의 아들을 맺어 주시기 바랍니다.’”(창34:6-8, 새번역)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면 죄를 알 수가 없다. 주변 사람들처럼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죄를 죄인 줄 모르고 살아가다가 큰 고통을 겪게 된다. 롯의 딸들은 아버지와 성관계를 하고 아들들을 낳으면서도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창19:30-38). 교회가 말씀대로 살아서 빛이 되지 못하면 세상은 암흑이 된다.    작년에 이어 올해 초에도 ‘임신중지’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라는 몇몇 단체들의 집회가 있었다고 한다. 태아를 죽이지 않고 ‘임신’을 ‘중지’시키는 방법은 없다. 생명을 죽이는 낙태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겠다는 이야기이다.    단어를 바꾼다고 죄가 죄가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산아제한을 할 때 교회는 침묵했고, 많은 우리의 어머니들이 죄인 줄 모르고 낙태를 하였다고 고백하는 말씀을 들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왔을 때는 이제 막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때였다. 그렇지만 엘리사벳은 아직 인간의 눈으로는 보이지도 않을 태중의 아기를 주님이라고 고백한다. 태아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생명이고 인격이다. 말씀을 알지 못하여 우리는 끔찍한 범죄를 하고 또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옳다고 한다.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그러나 상황이 그렇지 못할 때 또 다른 악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마리아가 미혼모로 지낼 각오를 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나지 못하셨을 것이다.    딸이 강간을 당하고 아들들은 살인하여 위험에 처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그가 집을 떠나 길에서 잘 때 서원했던 곳 벧엘로 가라고 명령하신다.   야곱이 가속들을 정결하게 하고 벧엘로 가서 단을 쌓았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다시 상기시켜주시고 축복해주셨다. 어디까지 왔든지 거기서 돌아서면 된다. 회개하고 돌아설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고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주신다. 지식이 있어야 죄를 깨달을 수 있다. 죄를 깨달았을 때 속히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께 나오면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회복될 수 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 /송파가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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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7
  • [당신의 뇌] 성 호르몬과 정신건강(1)
    TV는 뇌가 필요 없는 활동임을 명심해야한다. 무엇보다도 부모나 가까운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잘 이루어지면 애착형성이 잘되고 아이의 뇌도 건강하게 발달된다. 최근에 거울 신경세포가 발견 되었는데, 이를 통해 영유아기들은 생후 8~9개월부터 오감을 통한 다양한 자극으로 아이의 뇌 발달이 촉진되고 사회성을 습득하는 사실이 더 확증 되었다. 그래서 TV나 디지털기기가 아닌 부모를 통해 사회성이나 정서, 인지 발달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한다.   요즘 이슈되고 있는 남녀의 문제에서 종종 기억과 인지가 아주 다른 양상으로 표현되어 혼란을 주고 있다. 뇌의 개인차와 관련하여 남자의 뇌와 여자의 뇌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고, 통계적인 평균치에 기초한 것이며, 실생활에서는 개인에 따라 호르몬 수준, 행동 및 뇌구조에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남자의 뇌와 여자의 뇌를 다르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성 호르몬이다. 왜 성 호르몬은 남자의 뇌를 공간정보처리에 더 능하게 만들고, 여자의 뇌를 언어정보처리에 더 능하게 만들었을까?    일반적으로 여자 아이는 언어 습득이 빠르고 어휘력이나 언어 표현력이 풍부한 데 비해, 남자아이는 언어 발달이 좀 느린 대신 모형 장난감을 조립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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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6
  • [칼럼] 말씀이 그곳에서 나리라
       미가서 4장 1절에서 2절에서 하나님이 “마지막 날들에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하신다. 이 마지막 날은 먼저 미가 선지자 그 당시 유대인들의 마지막 날, 즉 율법이 마치는 끝 날이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의 때이다. 이 때 오순절 성령 임한 때요, 요엘 선지자도 이를 마지막 날이라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 18절 또 마지막 날, 즉 말세지말을 말씀하고 있으니 이는 영적 유대인, 즉 이방인 구원 기간이 끝나는 세상 끝 날을 가리킨다. 이는 은혜시대 끝의 종말을 가리킨다. 이 때는 일곱영들을 남녀종들에게 부어주시어 재림 주를 예비하는 길을 마련하게 하시는 그때가 곧 마지막 날들인 것이다.    이때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시리니 곧 주의 전의 산이 산들의 정상에 세워지리라. 이 주의 전의 산은 무엇인가? 산은 문자적인 산이 아니고 신령한 영적 의미를 나타낸다. 특히 갈라디아서 4장 24절의 ‘시내산은 하갈로 종을 낳는 자, 육체로 난자, 육적교회를 가리킨다.’ 했다. 또 갈라디아서 4장 26절의 산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인 시온산이요. 이는 사라다. 약속으로 난 자, 성령을 따라 난 자, 즉 영적인 교회임을 말씀하고 있다. 영적 히브리인들은 이 “하늘나라의 시온산에 당도했다” 했고(히12:22-24) 이곳은 가장 높고 큰 산이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을 보는 곳이다(계21:9). 즉 주의 전의 산은 새 예루살렘인 어린양의 아내를 배출하는 곳이다.     이것은 바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계시하시는 종말의 금촛대교회를 가리킨다. 물론 유형의 건물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여기로 전민족의 기독교인들이 몰려오리라. “오라 주의 전의 산으로 올라가자, 주의 길을 가르쳐주시리라. 주의 말씀이 거기서 나오리라.” 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전민족 성경신앙박사 교육원이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아직도 전 민족에게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70명의 필리핀, 스리랑카, 미국, 캐나다, 대만등의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처음엔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창대하리라. Online Class 로 공부하며 온 세계의 남녀종들이 그리로 와서 하나님의 길을 알게 되리라. 오늘 이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가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또 주의 진리의 말씀이 거기서 나오리라. 오늘 이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리라. 가장 산들 중의 높은 산 정상위에 세워진 주의 전이 SDBF 이다. 여기에서 오늘 이때에 주시는 합당한 말씀을 받고 깨닫고 믿으리라.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신부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길을 알리라. 믿음으로 그 길로 행하리라.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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