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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주간, 신앙 성숙의 길로 삼자
       매년 맞이하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자기 십자가’를 체험하는 기간이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셨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고난과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이란 말은 성경 속에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고난주간이 교회의 절기로 자리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형식화되고 관습화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은 고난주간을 맞아 ‘자기 십자가’를 지는 분명한 체험이 필요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셨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고난주간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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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4-03-13
  • [사설] 해외선교사의 현실과 성경적 선교지원
      선교는 세속적 경제구조와 맞물려 진행되지 않는다.   2010년을 전후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특별히 중국 공산당의 박해로 인해 철수하는 선교사들이 많았고, 인도나 터키 등 자신들의 종교가 분명한 나라들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일이 많았다. 그 국가들은 주로 비자를 연장 해주지 않던가, 정부 정책에 반하는 일들을 했다는 이유를 근거로 진행한 일종의 박해였다. 이런 일들이 최근 한국인 선교사의 수가 줄어든 원인 중에 하나가 됨은 분명하다. 또 그런 박해는 예상된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인 선교사 감소의 원인 중, 큰 이유는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 저하라는 것은 자명하다. 선교사들의 사역과 생활은 교회의 지원과 성도들의 후원으로 유지된다. 이러한 한국적 선교시스템에서, 교세의 감소로 지원이 약해지고 또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개인성도 감소로 개인 후원금이 줄어들고 있다. 이 현실적인 문제들과 싸우는 현장의 선교사들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믿음에 의지한다.  우리의 선교는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란 말씀, 또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라는 말씀에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든 세상 끝까지 전파해 한 영혼이라도 구하기를 애써 왔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현재 교회의 경제상황과 인적 상황에 기반하지 않는다. 오직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큰 언약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근거한다.  교회는 먼저 우리의 것을 떼어 놓기 전에, 내 쓸 것을 것을 줄이고 양보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고 헌신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과 열방에 가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세상 경제의 논리가 아닌, 하늘 경제의 풍성함과 기적을 전해 주어야 한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선교하고 있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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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2
  • ‘퀴어 축제’, 반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올해도 이른바 ‘퀴어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를 두고 한국교회는 한목소리로 우려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우리는 동성애, 근친상간, 소아성애 등을 옹호하는 퀴어신학을 반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퀴어신학이 지지하는 낯설고 이상한 동성애는 창조섭리인 양성질서에 반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결국, 동성애는 성경의 주제가 아니고 부차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금기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게 신학의 보편적 주제가 될 수는 없다. 퀴어신학의 주제는 동성애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 동성애가 신학의 핵심이 돼야 하고 동성애에 대한 모독과 억압은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창조자 하나님과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향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의미한다.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과 인류 보편의 성 윤리와 맞선다. 비도덕적이고 괴기한 성적 관행이다. 남성 동성애의 경우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의 비정상적 접촉이 반복된다.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의학적 질서와도 맞지 않는다. 동성애는 결국 괴기한 행위일 뿐이다.   결혼과 가정은 동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결혼과 양성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생산되며 사회와 국가와 인류는 존속될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결혼, 즉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양성결혼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복이요 인류 생존의 조건이요 기반이다. 따라서 동성애 반대는 이 시대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 교회는 바른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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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모범이 되는 기독교가정이 되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전통적으로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관계로 얻은 자녀들로 구성된 혈연공동체인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의식주를 함께 나누는 생활공동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는 이런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이해와 가정의 형태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독신과 혼전동거의 증가와 더불어 결혼율의 감소, 동성애와 성전환 그리고 동성결혼 등 세태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정에 대한 이해와 형태들이 나타남으로 전통적 가정관과 가정형태가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다.   먼저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질서로 제정하신 천부적 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둘이 하나가 되는 인간의 결혼제도는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명의 연합과 사랑의 사귐을 이루는 언약관계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고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은 창조의 질서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속받은 교회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관계로 하나님의 영적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신비로 이해된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함으로 영적인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 온전한 부부간의 사랑과 연합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구속에서 나타나는 결혼과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결혼언약의 영적신비를 기억함으로 반드시 영적 생명을 함께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 곧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결혼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이혼과 재혼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에 모범이 되는 기독교 가정을 이뤄가는데 온 힘을 기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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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를 우려한다
    지난 2020년 6월 29일 자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은 그 안에 전통적인 기독교윤리와 배치는 되는 조항이 있어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동법 2조 1항에서 성별을 남성, 여성, 그리고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 이는 성을 인식, 표현, 인지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이 의미는 생물학적 인체구조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인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이는 남성과 여성 외에 다른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입장이다.   성적지향에 대해 차금법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감정적, 호의적, 성적으로 깊이 이끌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차금법의 취지와는 달리 레위기 18:22, 20:13에서 동성애를 윤리적인 악한 행위로 간주하여 명확히 금지하고 있다. 이것들은 정언명령으로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는 서술법으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준수해야 할 명령이다.   또 동법 제3조 가항에서 모집과 채용을 포함하는 고용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차금법이 법제화되면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에서 교수나 교수지원자가 동성애자로 밝혀지게 될 때 채용을 거부하는 것이 불법이 된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가 요구하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을 때에도 채용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이러한 경우 기독교 학교는 학생 구성에 있어 기독교 학교의 특수성이 희생될 수 있고, 신학교는 교회의 목회자 양성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독소조항으로 인해서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심각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대응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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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1
  • 주일학교 교사양성에 힘쓰자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미래의 근간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주일학교가 무너진다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으며, 또 많은 통계들은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너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데서 출발한다.   주일학교 교사는 먼저 학생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관심과 고민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며 친구라고 불렀다.   좋은 교사는 좋은 상담자이다. 세익스피어는 “13세부터 20세 사이의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만큼 청소년 시기에 고민과 갈등이 많다는 증거이다. 교사는 상담자로서 학생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주일학교교사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신앙성숙을 돕는 자다. 교사는 성경지식을 주입시키는 자가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자신이 먼저 배운 지식과 경험을 학생들이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주변 환경, 학습 환경, 생활환경의 장애물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특별히 예배시간에 교사들이 먼저 진지한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모범이 되도록 한다. 예배시간 엄수, 지각?결석 등을 하지 않고, 예배시간에 교사들 간의 잡담을 삼가야 한다. 이러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일 때 주일학교에 미래가 있는 것이다. 스승의날, 스승의 주일을 보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인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해 좋은 교사의 야육에 모두가 힘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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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5-11

실시간 사설 기사

  • ‘코로나 세대’를 전도할 프로그램 시급하다
    끝이 보일 것 같지 않던 코로나 팬데믹이 수습단계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전망이 나오고 있다. 물론 아직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러나 지난해와 달라진 것은 백신접종이다. 대다수 국민들이 순조롭게 백신을 맞아서 집단면역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교회도 코로나시대에 맞는 주일학교 여름행사를 준비해야 한다. 아이들이 없다고 절망하고 실망할 것이 아니라 ‘코로나 세대’를 전도하고 양육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행해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경험한 코로나 세대는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사고와 행동을 보인다는 사실을 먼저 교회는 알아야 한다. 특히 초등학교 저학년 이하의 세대는 그야말로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장에서 놀고, 부모와 함께 여행을 하는 기억은 이들에게 별로 없다. 마스크를 쓰고 집에서 화면을 통해 지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러한 코로나 세대를 어떻게 교회에서 양육할 것인가에 전면적인 대비를 해야만 한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집단면역을 이루면서 코로나가 ‘관리상태’에 들어갔다 해도 일상이 전면적으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여기에 변종이라는 또 다른 리스크도 상존한다.    이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함께 가는 ‘올라인’으로 가야한다. 무엇보다 온라인 예배 혹은 온라인 프로그램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미 코로나 세대는 온라인에 익숙해져 있다. 이를 인정하고 온라인에서 소통해야 하고 동시에 오프라인에서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계발해야 할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백신접종률이 높아지면서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조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제한적이지만 여름성경학교 강습회 등을 재개하는 교단이 나오고 있다. 물론 코로나 이전처럼 되돌아 갈 수 없겠지만 온라인환경에 맞추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작은 노력들이 모아져 다시 한 번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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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7
  • 맥추감사절기에 감사와 기쁨 되찾자
    코로나19 팬데믹기가 장기화되면서 한국교회 성도들마저 웃음을 잃어가고 있다. 또한 입술에서 감사의 찬양 소리가 사그라들고 있다.   오는 7월 4일이면 맥추감사주일이다. 맥추감사절을 오순절과 연관해서 본다. 오순절은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부활절기의 맨 끝에 위치한다.   맥추감사절은 출애굽기 23장 16절 구절에서 유래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3대절기라고 해서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을 지켜 왔다.   맥추절은 유월절 제2일로부터 50일째 지난 날이다.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서 첫 농사를 짓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지켰다.   이후 신약시대에 성탄절, 부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이라는 네 가지 명절을 지킨다. 절기마다 영적 의미가 있다. 신구약을 연결하면 유월절은 어린양 예수의 십자가사건과 연결된다. 또한 맥추절은 성령과 연결된다. 그리고 수장절은 재림과 연결되어 있다. 맥추절은 보리를 거두었다는 뜻이고, 맥추절은 칠칠절(34:22), 초실절(출34:22), 오순절(행2:1)이라고 불리워졌다.   칠칠절이란 의미는 유월절 후 49일이 지나서 맥추절을 지키게 되므로 7곱하기 7은 49이므로 “7.7절”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오순절이란 50이란 뜻으로 순(旬)은 10일이라는 의미이기에 유월절 이후 50일에 지키는 절기라고 해서 오순절이며, 초실절이란 이스라엘이 농사를 지어 처음으로 거두어 드린다는 뜻에서 초실절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맥추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라는 것이다. 즉 농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일년에 두 번 수확했다. 즉 5월부터 6월까지, 그리고 9월에서 11월까지이다. 첫 번째 수확을 하여 첫 열매 드리는 절기가 맥추절이다. 보리 추수 후 하는 감사절이다. 이는 첫 열매에 관심을 가지라는 의미이다. 1년 동안의 수입을 대표하는 첫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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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7
  •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기본소득에 접근하자
    기본소득에 대한 찬반의견은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에 걸쳐 분포하는데, 이를 반대하는 측은 노동과 관계없는 소득의 비윤리적 측면, 노동자들의 이탈로 인한 사회 전체의 생산성 저하, 기본소득의 재원 확보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다.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부의 대부분이 나눔이 필요한 공공재라는 사실, 개인의 인권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 확보, 소비진작을 통한 수요 확대 및 불평등 완화, 그리고 자산조사와 관련한 행정비용의 경감과 낙인효과방지라는 측면에서 기본소득을 긍정적으로 본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기본소득 자체가 아니라 기본소득이 지향하는 개인의 가치 존중과 사회통합에 대하여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그리스도 구속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는 인간의 죄성이라는 측면을 고려하여 균형 있게 추구되어야 한다. 이는 기본소득과 관련한 논의 과정 및 기본소득 지급의 절차에 대한 모니터링을 요청한다. 그러한 균형 및 점검과 관련하여 예수께서 제시하신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인류를 향한 보편적 은혜 및 분배의 정의를 강조하며, 단순히 실업을 개인의 문제로 보지 않고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통해 통전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또한, 희년의 정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은총이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일반은총의 차원으로 확장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    그러므로 교회는 포도언품꾼의 비유에서 예수께서 제시한 보편적인 인류에 기초해 기본소득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무엇보다 이웃을 배려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나눔과 섬김은 우리 시대에 기본소득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음을 기억하자. 기본소득은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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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0
  • 남북간 ‘이데올로기’를 만들지 말자 - 호국보훈의 달, “상기하자 6.25”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후 남북정상회담을 하면서 남북 교류를 위해 힘써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진척이 없자 북한은 다시 대치 국면을 선택했다. 이러한 남북 대치 현상은 우리 민족의 힘으로 독립을 하지 못하고 얄타회담, 포츠담회담,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거쳐서 외세의 역학 관계에 의해서 독립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셈법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피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서로를 죽이고, 죽임을 당한 아픔을 갖게 되니까 서로에 대한 보복 심리를 갖게 된 것이다.    성경에도 이러한 역사는 이미 있어 왔다. 솔로몬이 죽자 그 아들 르호보암에게 여로보암을 비롯한 10지파가 찾아와 “르호보암의 아비 솔로몬처럼 백성들에게 고역을 치르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했다. 그래서 르호보암은 소년들과 의논한 후 “더욱 고역을 치르게 하겠다”고 전했다. 그래서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10지파가 북쪽지방에 새로운 정권을 세웠다.    급기야 분단 이후 종교마저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체계화했다. 여로보암이 가만히 보니까 북이스라엘 사람들의 사상 가운데 아직도 남유다의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는 모습이 남아 있어서 위기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세 가지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이는 △금송아지를 벧엘과 단에 세우고 이는 자기들을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한 것 △레위지파가 아닌 다른 보통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운 점 △절기마저도 7월에서 8월 15일로 바꾸어 버린 점 등이다.    이처럼 국가적 이데올로기의 창출은 저항과 헤게모니라는 것이 배후에 숨어 있는 것이다. 피맺힌 한을 가진 사람들이 신념화 되면 피비린내나는 역사가 이어지고 만다. 헤게모니를 쥐려는 국제적 역학 관계와 국내 분파들의 역학 구도는 급기야 자기 나름대로의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갈등의 절정이 6.25한국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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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0
  • 남북화해의 길을 모색하자
    남북화해는 매우 어려운 길이다. 한국전쟁 종전 68주년을 맞는 올해에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대한민국 국민들은 평화에 대한 열망과 기대감이 높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국정 우선순위가 ‘평화’라고 했다. 문제는 평화의 실체다. 우리는 이념적인 위장된 평화, 뒤에 총구를 숨긴 허울뿐인 평화도 평화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오히려 북한의 핵무장으로 대립과 갈등으로 악화일로에 치닫고 있으며 군사적 충돌을 염려해야 하는 긴장감마저 한반도에 감도는 등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도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한 가운데 종교계가 앞장서 남북화해의 물꼬를 터야 한다는 기대감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왜냐하면 독일통일의 지렛대 역할을 한 것도 동·서독 교회라는 사실을 세계인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많은 노력을 해 왔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발표 이후, 그간 경색되었던 남북 간 정치 환경에 훈풍이 일기 시작했다. 이듬해 당시 교회협(NCCK) 관계자들이 북한을 방문했다. 이는 정부의 승인을 받은, 공식적인 첫 민간인 방북이었다. 김일성 주석과의 면담이 이뤄지면서 큰 기대를 가졌다. 그리고 1993년, 보수와 진보 할 것 없이 통일에 뜻있는 이들이 모여 ‘통일만큼은 교회가 통일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당위로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나눔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후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을 계기로 교계가 일제히 환영하고 나섰으나 한반도 주변 환경의 악화로 남북화해는 다시 어려움을 맞고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역할은 분명하다. 예수님은 천국 백성의 본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하나님의 아들들은 싸우고 헐뜯는 대신에 우리와 관계된 사람들과 화평을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남북화해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 따라서 시대와 환경이 변한다고 해도 화해와 협력의 북한선교에 적극 나서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06-17
  • 전자화폐로부터 교회 청년들 보호 절실
    인터넷이 생긴 후 달러나 원화를 대체할 전자화폐를 만들려는 노력은 늘 있었다. 즉 전세계 어디든지 손쉽게 송금하고 금융기관이 추적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화폐이다. 하지만 위조차단 기술을 개발하는 단계에서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 문제를 해결한 최초의 전자화폐로 비트코인이 등장했다.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비트코인은 돈이라고 규정해야 할지, 혹은 단순한 디지털 부호로 제작된 가상 이미지에 불과한지 정의내리지 못하는 상황에 있다. 그런데도 최근 갑자기 비트코인 거래 가격이 뛰기 시작하면서 한국교회 젊은이들도 비트코인 투자에 나섰다. 무서울 것 없이 치솟은 가격에 거품을 경고하는 우려가 나온다.   비트코인이 등장하게 된 기원은 지난 2008년 10월, 일본인 나카모토 사토시가 ‘비트코인: 개인간 전자화폐 시스템’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멧츠다우드라는 온라인 암호학 커뮤니티에 공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는 자신이 만든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을 통해 중앙 통제 없는 완전히 투명한 금융거래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는 비트코인의 원시 단계서 손을 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2009년 3월. 이 기술을 통해 최초의 비트코인 제네시스블록을 채굴했다.   비트코인은 비트코인 개발에 필요한 코드를 완전히 공개해 누구나 개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완전한 공개 소스 화폐를 추구한다. 그런데 문제는 화폐로서 비트코인의 가치를 의심하는 전문가들이 많이 있지만, 현재 많은 한국교회 청년들이 비트코인 투자에 몰려들고 있다.   그래서 투자 변동 상황을 계속 주시하다 보니까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당연히 토요일에 일찍 취침하지도 못하고, 주일예배도 참석할 수가 없다. 친구 영향을 크게 받는 청년들의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는 물질의 신 마몬을 섬기는 것이요, 모세의 십계명을 무시하고 금송아지에게 경배하는 것이다. 세월이 흘렀어도 인생 광야 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비트코인 금송아지에게 정신 팔려 있는 인간들의 군상이 이어진다. 대책 수립이 시급하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06-17
  • 그리스도인이 나라 사랑에 앞장서자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고 순국선열 및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위훈을 추모하는 달이다. 오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호국영령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마도 모든 주권 국가는 이러한 역사를 갖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1948년 정부수립 후 2년도 채 못 되어 6·25전쟁을 맞았고, 이에 40만 명 이상의 국군이 사망하였으며, 백만 명에 달하는 일반 시민이 사망하거나 피해를 입었다. 이어 1953년 휴전이 성립되고, 1955년 매년 6월 6일을 현충기념일로 지키다가 1975년 12월 오늘의 현충일로 개칭하기에 이르면서 금년이 66주년 현충일을 맞이하는 나라 사랑의 달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나라 사랑의 특별한 날을 본다. 민족의 7대절기 외에 2대기념일로 지키고 있는 절기가 부림절(푸림, 에9:18-32)과 수전절(하누카, 성전봉헌절, 요10:22)이다. 부림절은 BC538년경 페르시아 제국에서 아하수에로 왕이 통치할 때 두 번째 권력을 가진 하만이 유대 민족을 전멸시키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승리함으로 유대인들이 죽음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일 년 중 가장 기쁜 절기다. 그리고 수전절은 BC165년 시리아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에 의해서 더럽혀진 성전을 마카비 형제들의 저항으로 다시 깨끗하게 정화시킨 것을 기념하는 절기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호되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매년 이 날을 성대하게 기념하면서 나라 사랑의 정신을 이어감으로써 오늘의 강대한 이스라엘을 이루고 있다.   우리 대한민국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로 시작되었다. 애국가에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기록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을 향한 놀라운 섭리이자 역사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06-08
  • 성경 잣대로 목사·장로 정년 연장 절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장=소강석목사) 정년연구위원회(위원장=김진하목사)는 지난 5월 27일, ‘총회 정년 연구를 위한 공청회’를 갖고 전국교회가 총회에 헌의한 ‘기존 획일적 정년제’에 대한 문제점 분석을 했다.   이러한 문제가 제기된 이유는 세계 최대 교단인 합동 노회들에서 총회에 수년간 계속 초고령화 사회에 걸맞는 목사와 장로 정년 연장 헌의안을 계속 청원했기 때문이다. 지난 2019년 합동 16개 노회에서 목사·장로 시무정년 연장 헌의안을 총회에 상정했다. 이에 따라 특별위원회로 정년연구위원회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날 양현표교수(총신대 신대원)는 주제발표를 하면서 “10여년만 지나도 목사 부족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며 “8천여명의 목회자가 정년에 이르게 되는 시점에 은퇴자 수 보다 새로 유입되는 목사 수의 부족이 현실화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교단의 미래를 위해 정년 상향을 포함한 목사 수급을 위한 교단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오택균교수(총신대 신대원)는 “농어촌교회와 미자립교회로 제한해 정년 연장을 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사회적으로 볼 때, 인간 수명 연장으로 인해 사회구조상 연령별 취업구조가 변화되고 있다. 이에 발맞춰 지난 2018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여의도측), 2019년 예장 백석교단에서 공청회를 거치지 않고 목사의 시무 정년을 75세로 상향했다. 사실 농어촌교회의 경우 은퇴 후 삶에 대해 불안해 정년 연장안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목사들의 은퇴 후 삶이 준비돼야 한다.   정년 연장안에 대해 기준을 세우려면 목회신학자 토마스 오덴(Thoms.C.Oden)은 목회현장 다루는 방법론에 준해야 한다. 오덴은 “성경이 뭐라고 말하느냐, 전통, 즉 역사 속에서 이슈가 어떻게 다뤄졌는가? 이성을 사용한 지혜와 합리성으로 이슈를 판단했는가? 경험, 즉 현장 상황을 고려했는가?”라고 말했다.   이번 세계 최대 교단 총회에서 정년 연장이 가결될 경우 교단 목회자 수급 및 중장기 발전계획도 수립돼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06-08
  • 아시아주일 예배에 적극 참여하자
    1974년부터 아시아교회협의회는 성령강림주일 전 주일을 ‘아시아주일예배’로 정해서 지금까지 드려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가 주관이 돼 진행한다. 그럼에도 교회협 회원 교단에서도 참여가 저조한 상황이다.   아시아는 지구에서 가장 넓은 곳이고 가장 많은 인구가 있다. 세계4대 종교라고 하는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가 아시아대륙에서 나왔고, 아시아인들의 노력으로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아시아는 18세기부터 시작된 서구의 제국주의 확장으로 대부분의 나라와 민족이 식민지를 경험했고, 20세기에 독립했지만 식민지의 어두운 영향력을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미얀마는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식민화 과정 속에서 성장한 군부는 정권을 잡은 이후 미얀마의 모든 영역을 장악해 독재를 이어갔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군부의 탄압과 학살은 서구 식민지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 가운데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모범적인 선교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20세기 초 일본 군국주의에서 어렵게 독립을 쟁취했고, 이어 한국전쟁의 참담한 상황도 슬기롭게 극복했다. 또한 이어진 군부독재에서도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뤄냈다. 여기서 한국교회는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이제 대한민국은 모든 영역에서 세계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미얀마를 위해 기도하고 협력해야 한다. 지금까지 780명이 학살됐고, 그중 52명이 어린아이다. 5천명이 체포 구금돼 있고, 수천의 시민들이 태국과 인도로 피난했다고 한다. 우리 역시 광주의 아픈 경험이 있다. 미얀마에 민주화가 이뤄지고, 이를 통해 아시아교회가 복음화와 정의를 위해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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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05-28
  • 한국교회에 봄이 온다
    봄은 사계절의 시작이며 한 해의 시작으로 중요하다. 개나리와 진달래부터 시작하는 봄은 변덕스럽다. 꽃샘추위로 겨울이 다시 왔나 착각하기도 한다. 명자나무는 무르익은 봄을 알린다. 붉으면서 앳된 꽃의 생김새로 아가씨 꽃이라고도 한다. 강남에 갔던 제비도 봄이 되면 마음씨 좋은 사람의 집을 찾아가 박씨를 물어다 준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란 봄에 잠깐 낮잠을 잘 때 꾸게 되는 꿈으로 ‘덧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봄은 기대가 되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올해 봄은 얄궂다. 코로나19 재유행 조짐이 보이면서 동시에 한국교회 방역 준칙 준수 노력이 돋보여 참석 인원 완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면서 전국 교단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전국 연회들이 회무를 마쳤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과 통합측, 그리고 전국 장로교 총회 산하 노회들 봄 정기회를 마무리하면서 총회임원들 추천을 마쳤다.   한국교회 교단들은 각각 봄 정기노회에서 임원과 총회총대들을 선출하며 노회를 새롭게 시작한다. 1년을 위한 새로운 사업도 있지만 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예장 합동교단은 노회 내 분쟁이 심하고, 분열도 많다.   대부분 노회 분쟁이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법과 절차는 지키지 않은데서 시작된다. 물론 이런 불법적인 일들은 개인이 아니라 항상 배후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배후는 노회를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左之右之) 하려는 기득권세력들에 의해서 자행된다. 노회가 분열되고, 분립되는 가장 큰 이유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자들과 기득권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의 다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무기명 투표와 전형위원이라는 불완전하고 불합리한 방법으로 새로운 시작의 봄을 열고 있다.   인구의 감소와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한국교회는 위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위기는 개인주의와 개교회주의라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봄을 기다린다.
    • 오피니언
    • 사설
    2021-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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