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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열을 극복하는 장로교총회 되자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1회 총회가 평양신학교에서 열렸다. 이후 장로교회는 부흥에 부흥을 거듭하며 장족의 발전을 이뤄서 전체 한국교회의 70%를 차지한 지 꽤 됐다. 유럽이나 미주에서 장로교는 소수인데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니 장로교가 한국에서 꽃을 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장로교의 이러한 급성장이 교단분열에서 비롯됐다는 분석도 있다. 그래서 장로교회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였다. 1952년 신사참배문제의 여파로 고신측이 분열했고, 1953년 ‘자유주의신학’ 문제로 기장이 갈라져 나왔다. 그리고 1960년에는 WCC문제로 통합측과 합동측이 분열했다. 이후 통합측은 교단으로서 통일성을 잘 유지했지만, 합동측은 계속해서 사분오열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지금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쓰는 교단이 200개가 넘는다. 이제 한국의 장로교회는 분열이 아닌 소통하고 통합하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서로 반목하고, 비난하고, 갈등하는 구습에서 서로 이해하고, 쉬운 것부터 함께하려는 연합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주요 장로교단의 이번 총회를 살펴볼 때 아쉽게도 이러한 노력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여전히 교단 내부의 크고 작은 문제를 처리하는데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더욱이 한 중형교단은 무리하게 합병·통합을 시도하다 그 후유증으로 오히려 교단이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임원들 사이에 세상법정에 고소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이 보였고 결국 총회가 두 곳에서 진행될 위기이다. 만일 또다시 교단이 분열한다면 이는 장로교회를 넘어 한국교회 전체에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장로교단은 분열이라는 오욕된 역사를 청산하고 ‘형제가 연합하는’ 교회연합의 모습을 보여줄 역사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자기 교단의 이익만 생각하는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의 모습이 다시 한번 장로교회 안에 펼쳐지기를 기대하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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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27
  • 청교도 정신을 회복하자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경제보복을 가한 현 시점을 경제적 위기라고 많은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분명 맞는 말이다. 우리 산업계와 일본의 산업계가 지난 수십년간 맺어 온 협력관계를 급작스럽게 변경하는 것에는 분명 기회비용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회비용이 아무리 클지라도 이번만큼은 경제적·심리적 일본 의존도를 극복해야만 한다는 국민들의 정서와 의지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다.  우리 기독교는 그 누구도 적으로 돌리지 않고 훌륭히 작금의 경제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소중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영국에서 시작한 청교도 정신은 말 그대로 청빈한 삶을 하나님께서 명하신 소명으로 간직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무절제와 방종한 삶이 아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내려는 기독교인들의 노력은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에 하나의 중요한 빛을 던져줄 수 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큰 은혜로 지금까지 경제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더불어 우리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명을 따르려는 피나는 노력과 절제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 기독교는 다시금 한국사회와 경제를 이끌어야 한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각자의 생업에 충실하며 기독교적 청빈의 신념을 간직하고 절제하며 이 경제적 위기상황을 극복해야만 한다.  우리 기독교는 세속의 논리와는 구별되어 살아간다. 소비의 논리가 아닌 기독교 청빈의 논리로 이 위기국면을 타개하자. 일본을 이겨야 한다는 경쟁의 정신이 아닌 기독교인 고유의 소명의 정신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자. 기독교는 세계사 속에서 분명 많은 죄과를 가지고 있지만, 또 인류에 기여해온 바도 적지 않다. 그 중에 청교도 운동만큼 우리 시대에 빛을 던져주는 예도 없을 것이다.      청교도 정신을 회복하자. 소명의식을 갖고 각자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고, 어려울 때일수록 절제하자. 급작스런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 이웃들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나서서 돕자. 기독교인들의 청교도적 삶은 지금과 같은 위기에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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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12
  •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다
    명성교회 담임목사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쟁점으로 부각하고 있다. 지난 6일 예장 통합측 총회 재판국은 명성교회 목사 청빙안이 교단 헌법 조항을 위반한 무효라고 판결을 내림으로써 교회는 물론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현재 담임목사인 김하나목사는 2015년 12월 정년퇴임을 한 김삼환목사의 아들이다. 명성교회는 2017년 3월 아들을 위임목사로 청빙하기로 결의하면서 교회 부자세습 논란에 휩싸였다. 이에 관하여 교회에서는 김하나목사 취임은 세습이 아닌 ‘정당한 승계’라며 반박하고 있다. 원로목사가 은퇴하고 2년이 흘러 김하나목사가 취임했으니 세습이 아니며, 장로교 법에는 교회의 자율권이 최우선인데 이번 결정은 이를 무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명성교회 내 반대세력과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 등 개신교 시민단체들은 명성교회 세습에 대해 일부 세력이 교회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개신교 전체의 공공성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명성교회 세습무효판결은 교회 세습관행에 대한 강한 제동의 성격은 있을지 모르나, 갈등을 계속될 것이다. 특히 일부 언론과 정치세력들까지 부화뇌동하는 현상이 있는 한 갈등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 명성교회 재판내용이 반기독교 세력은 물론 언론의 쟁점화가 이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담임목사 세습은 명성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타 교단 등 개신교 대형교회들이 그동안 이뤄져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왜 지속되는가이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잘 못된 이해와 교회의 지나친 세속화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에베소서 1장 23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은 인간들이 세운 조직체가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표현과 활동을 위해 거듭난 교인들로 구성된 유기체이다. 교인이 10만 이상 된다는 명성교회는 거듭난 체험을 가진 성도들이 얼마나 되는지의 문제부터 점검해야 한다. 기복신앙의 종교인들이 아닌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왜냐하면 분열은 교회의 참모습이 아니다. 참 교회는 성령이 하나 되는 교회이다(에베소서 4장 3절). 이 말씀은 교회가 분열되고 있다면 교회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실 정도로 크신 분이기 때문에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갈라디아서 1장 18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새 창조물인 교회의 가장 먼저 부활하신 분으로서 교회 안에서 으뜸이시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이것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새것이 되었기에 인간적인 옛것들은 지나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느 특정 목사의 사유물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큰 문제는 미국의 CEO신학을 쫓아 마치 기업을 운영하듯 물량주의라는 세속화에 매몰됨으로써 대형교회만이 최고의 교회로 오해하고 있다. 우리는 참교회의 모습을 찾아서 세속화의 길에서 벗어나는 방향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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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12
  • 기독교 진리의 신뢰를 회복하자
    근 한국교회가 세상에 대한 소금과 빛의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심지어 교회가 사회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고 있다는 말까지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복음 5장 13절). 원래 소금은 부패시키는 균들을 죽이고 제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부패한 땅이 완전히 부패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요소이다. 그리고 빛은 어두워진 세상을 맑혀주는 것이다. 빛이 빛이면 깨닫게 하며, 깨달음은 생명과 지식과 지혜를 가져온다. 우리는 생명을 통해서 성결, 사랑, 겸손, 온유, 인내 등 생명의 풍성함을 갖는다(골로새서 3장 16절). 이 풍성함은 소금과 빛의 역할이다. 그러면 신뢰 회복의 세속화 대책은 무엇인가. 이것은 진리에 대한 분명한 믿음으로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 먼저 진리를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다. 진리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진리이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요한복음 14장 6절)하시면서,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다(요한복음 17장 17절)고 하셨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요한복음 1장 1절). 교인들 중에는 ‘무신론자’들 곧 종교인들이 많이 있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교인들은 교회의 역할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늘의 교회생활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로마서 14장 17절).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분의 영광을 표현하는 곳이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곳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 그리고 성령 안에 있는 희락이 중요하다. 의는 옳고 합당한 것이다. 교인들은 다른 사람에게나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올바르고 합당해야 함으로써 자신을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 평강은 의에 결과이다(히브리서 12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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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6
  • 한·일갈등 해소와 남북화해를 기대한다
    올해 74주년 광복절은 더 큰 역사적, 현실적 무게로 다가오고 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 이상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자는 종전과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요구도 높아지고 있다. 우리는 먼저 한일 사이의 무역 갈등이 조속히 해결되기를 촉구한다. 무엇보다 경제문제는 경제논리로 해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상품을 생산하고, 그 상품을 거래하는 것은 수요와 공급, 환율과 무역원리이라는 경제법칙에 따라 돌아가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통치 기간에 일어났던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같은 일본의 전쟁범죄를 묻어두자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인권과 국제법이라는 보편적 규범에 따라 우리가 마땅히 일본에 요구하는 것이고, 일본은 합당하게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이슈가 한·일 ‘무역전쟁’을 일으키고 확대시키는 원인이 돼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36년의 식민지지배를 통해 우리민족에게 큰 고난과 아픔을 남긴 일본은 이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한다. 한반도의 분단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우리의 자주적 힘이 아닌 주변강대국을 통해 왔다는 점에 기인했다. 그래서 강대국의 이익에 따라 분단이 됐고, 결국 민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이 발발했다. 한반도에 다시는 이러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광복절을 맞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공동기도문을 발표해 종전과 평화협정, 남북교류와 남북공존공영을 위해 기도했다. 참으로 귀하고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종전과 평화협정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땅에서 살고 싶다’는 한반도 모든 백성들의 절절한 요구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꿈꾸던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드는’ 비전을 실현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목표는 오로지 정치군사적 전략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없다. 쓸쓸한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외쳤던 세례요한처럼 평화와 화해의 소식을 전하는 한국교회가 돼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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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6
  • 복음 중재적 기독교문화를 만들자
    종교는 문화의 토양에서 자란다. 따라서 종교는 피선교지의 전통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종교는 문화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피선교지의 문화를 종교적 색깔의 문화로 만들어가야 하는 선교적 사명이 있다. 반대로 피선교지문화가 종교를 흡수함으로써 종교의 본질을 훼손하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종교와 문화, 이는 치열한 영적전쟁의 원인이고 결과다.  한국인의 사상적 원형은 무당사상이다. 여기서 무속사상 대신에 무당사상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무당사상이 한국의 풍류문화에서 유래된 독특한 샤머니즘이기 때문이다. 샤머니즘은 첫째, 보수적이다. 둘째로 맹목적 의타성이다. 셋째로 현세중심사상이다. 이것이 세계 모든 샤머니즘의 특성이다. 그런데 한국의 샤머니즘에는 풍류문화에서 온 흥의 문화, 신바람의 문화가 첨가된 오락성이 있다. 이 네 번째의 오락성이 한국적 샤머니즘의 무당사상이다. 한국인의 삶의 중심에는 신바람 나는 흥의 문화가 있다. 모든 굿판에는 신들린 무당의 신바람나는 흥이 있다. 이 신명나는 굿판을 만들어 내는 것이 무당이다. 여기에서부터 한국적 판의 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한국인의 역사의 질곡에서 만들어지는 고난의 한을 신바람나는 한마당 굿판을 통해 풀어내놓고 흥겨운 잔치마당놀이로 승화시키는 카타르시스가 삶의 에너지가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신접한 무당의 역할이다.  여기서 한국기독교의 피선교지 문화를 통해 기독교의 순수성을 변질시키려는 사탄의 간계를 물리쳐서 복음 중재적 기독교문화를 만들어야 하는 사명이 있다. 그래야 중국의 유교와 도교, 인도의 불교, 중동의 이슬람교, 예루살렘의 유대교를 복음 중재적 문화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여름수련회를 통해 이런 선교사명의 훈련을 하는 계기로 만들자. 한국기독교의 통일된 복음 중재적 문화 창조의 선교지침서 같은 것을 만들어서 한국의 무당사상을 기독교문화로 만들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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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30
  • 한·일교회, 양국갈등 해소에 기여하자
    일본 수출규제조치로 한일 간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다. 양국의 정치지도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심지어 양국 시민단체들마저 나서서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 지난 7월 17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YMCA, 한국YWCA 등 기독교 연합단체와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가 만나서 한일 관계 개선에 관하여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동 성명서는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는 정당하지 않으며, 한일 양국의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해서도 안 될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함으로써 평화와 공존의 보편적인 인류애의 실현을 지향하는 양국 시민들의 연대를 통해서 막아내자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양국 기독교단체들이 한일 정부의 강대강 대결구도가 아닌 사랑과 화합을 위해서 기독교가 나서야함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왜냐하면 비록 사회일각의 미미한 목소리이지만 나라를 염려하는 기독교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기상예측 모델에서 나비효과란 것이 있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작은 변화가 폭풍우와 같은 커다란 변화를 유발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브라질에서 나비의 날갯짓이 텍사스에서 토네이도를 일으키고, 중국 북경에서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서 폭풍을 일으킨다는 내용이다. 미세한 변화나 작은 사건이 추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로 이어진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일 양국 기독교의 사랑과 화합의 나비효과를 기대한다. 한일 기독교계와 민간단체가 힘을 합쳐 한일관계 개선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은 이 시대의 소명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친일은 악이고, 반일은 애국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기독교계의 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우리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장 7절)는 말씀을 많이들 하고 있다. 이 말씀에 의지하여 화해와 용서를 기독교에서 적극 나서야 한다. 따라서 이 나라의 평안과 안전을 위하여 더욱 기도할 때다. 양국 기독교가 비록 미미한 출발이지만 종국적으로는 창대해지는 나비효과를 얻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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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30
  • 거룩은 교회의 본질이다
    거룩은 세속으로부터의 분리며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분리가 먼저가 아니고 연합이 먼저다. 빛과 연합하면 어두움은 물러간다. 이것이 교회가 세속에 물들지 않고 거룩하게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거룩은 교회의 본질이며 거룩함은 교회의 제일의 사명이다. 요즘 몇몇 교회가 세속적인 비리에 얽혀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일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일생 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위해 그토록 헌신하시던 목사님들이 한순간에 파렴치한 범법자로 전략해 사회적 비난의 표적이 되는 것을 보면서 왜 예수님께서 그토록 거룩하기를 당부하셨는지를 깨달을 것 같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베드로전서 1장 16절). 한국교회가 문화에 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하여 교회의 본질인 거룩함을 회복하자. 그러기위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첫 번째 물질 문제든 세습 문제든 교회 내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법정에서 해결해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적어도 교인들에게는 교회법이 세상법 위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이미지시대이다. 교회의 치부는 바로 교회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이는 선교의 장애를 위한 마귀의 궤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교회지도자들이 세상법정에 서서 심판받을 때 교인들이 먼저 돌을 던질 수가 있을만큼 거룩한가하는 신앙의 기본문제를 생각하고 회개하는 풍조가 교계 내에서 일어나야 한다. 두 번째 대형교회를 적폐청산의 대상인 재벌개혁의 잣대로 보는 시각을 경계해야 한다. 더군다나 교회개혁이라는 구실로 교회의 와해를 노리는 불순세력들의 계획된 공작일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대형교회의 장단점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고 대형교회를 이끌어온 지도자들을 함부로 단죄함으로써 한국교회의 큰 자산을 잃을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 모두 정죄하지 말고 회개하면서 용서하고 관용하면서 교회문제는 교회 안에서 은혜로 해결하는 전통을 세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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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4
  • 한·일 갈등의 화해와 평화를 촉구한다
    한·일 무역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 7월 4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3가지 부품의 한국 수출규제 조치를 단행했다. 아베 총리는 “한국과의 신뢰관계로 행해온 조치를 수정한 것으로서 세계무역기구의 규칙에 적합하므로 자유무역과는 관계가 없다”라며 정당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부당한 경제 보복임을 단언하고 있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일본 기업은 강제징용 피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문재인정부가 지지해온 것에 대한 보복 조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부의 행태는 국민의 반일감정에 호소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순신의 배 12척’이나, ‘국채보상운동’이나, ‘동학의 죽창가’, 이제는 ‘경제침략’ 수준으로는 일본이 두려워할 것은 아니라는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심지어 청와대와 여당은 7월 16일 일본에 맞서 범정부적으로 가용 자원을 총동원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청 수뇌부가 만났지만, 단기적이고 구체적인 조치는 별로 없이 구호성 발표만 있다. 그동안 문재인 정부는 거꾸로 가는 소득 재분배, 포퓰리스트적 환경 정책, 기업도 노조도 반대하는 어정쩡한 노동 정책, ‘민족’을 앞세운 평화 프로세스 그리고 대한민국 전체를 양분한 이념 전쟁이 핵심이 되고 있다. 그 결과 모두가 피해자가 되고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고 말았다. 외교도, 국방도, 이념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업들은 정부가 속 모르는 큰소리로 상황을 악화시키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과거가 현재를 재단하면 미래는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은 양국 정상의 화해와 평화의 특단의 외교여야 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갈등의 화해와 평화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진리만이 가능하다.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보호하고 있다. 한 나라의 통치자가 어떤 인물이든 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라의 평안과 안전을 위임을 받은 자로 인정하고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디모데전서 2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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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4
  • 내실있는 단기선교이어야 한다
    매년 여름 방학이 되면 많은 교회에서 단기선교에 나선다. 특히 청년들을 비롯하여 중·고등학생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단기선교는 기간이 짧고 그로 인한 제한적인 활동 때문에 내실 있는 선교를 기대하기가 힘들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해외 단기선교 명목으로 출국해서 선교활동은 하지 않고 현지 관광이나 쇼핑 등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는 단기선교를 준비하는 교회가 내실화하지 못하고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단기선교하면 아직도 2007년 7월 19일 분당 샘물교회 봉사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게 납치되어 나라가 발칵 뒤집힌 사건이 생각난다. 특정교회나 단체 그리고 특정인을 위한 보여주는 선교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러나 단기선교는 그 나름의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첫째 비록 기간은 짧지만 세계선교에 대한 안목은 물론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갖는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사도행전 1장 8절). 이것은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하여 땅끝까지 즉 신약이 완성되기까지 그분 자신을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확산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대해 증인으로서 선교사의 자질이 절대로 중요하다. 둘째로 국내·외 복음전도를 회복할 수 있다. 이른바 디지털시대를 맞아 청소년의 복음전도는 더욱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교회들이 너무도 세속화되고 있다. 청소년들이 해외의 다양한 선교현장 방문을 통하여 자신들의 위치와 목적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며, 나아가 자체적인 교회부흥의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내실 있는 해외단기선교가 되기 위해서는 짧은 기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치밀한 계획이 필수적이다. 현지인에게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선교일꾼이 필요하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들은 단기선교의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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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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