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11-13(수)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사설

실시간뉴스

실시간 사설 기사

  • 종교인 과세는 편견을 해소하는 길이다
    종교인 과세란 종교인에 대한 국세청의 법적 과세이다. 정부수립 이후 종교인에 대한 과세 의무가 명문화되지 않았고 성직자에게 세금을 요구하지 않은 관행이 있었다. 그러나 국회가 종교인 과세 법안을 가결하여 2018년 1월부터 종교인에 대한 과세가 시행되었다. 이 제도에 따라 2019년 2월 말까지 연말정산을 실시한 후에 3월 10일까지 관할 세무서에 지급명세서를 반드시 제출해야 한다. 종교인 소득은 매달 원천징수 납부 또는 반기별 납부, 이듬해 5월 종합소득세 신고납부 등 세 가지 방식 중 선택할 수 있다. 이 기회에 종교인과세와 관련하여 두 가지 민감한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첫째가 목회활동비다. 종교인소득 관련법에서는 종교 활동 고유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목회활동비에 대해서는 비과세하기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관련법의 취지에 맞는 규정이 없는 경우에는 시급하게 목회활동비 지급기준을 마련해야 하며, 필요한 경우 관련된 증빙 요건을 갖춰야 한다. 둘째로 부교역자들에 대한 사례비이다. 종교기관마다 상황이 다르겠지만 최저임금에도 미달하는 사례비를 지급하면서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종교인 과세문제를 두고 찬반의 여론이 많았다. 반대 측에서는 종교인의 활동은 근로가 아니라 봉사이므로 그들의 월급이나 생활비는 소득이 아니라 봉사에 대한 사례비이며 과세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절대다수의 성직자들이 받는 월급이나 활동비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종교세를 부과해도 면세되는 종교인들이 대부분이 될 것이므로 실효성이 없다는 주장이다. 반면에 찬성 측에서는 납세의 의무는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의무로서 국민이면 누구나 지켜야할 의무라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인도 결코 성역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종교인소득의 성실한 신고를 통해 그동안에 일반인들이 갖고 있었던 편견이 해소되고, 종교기관이 더 투명하고, 더 법을 잘 준수하고, 약자에게 더 많은 사랑을 베푸는 기관으로 증명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3-04
  • 이제는 감리교 소송사태 끝내야 한다
    기독교대한감리회가 또다시 재판에 의해 공석사태를 맞았다. 법원의 판결에 따라 전명구감독이 또다시 사회법 판결에 의해 자리를 내놓게 됐다. 과거 10여 년간 기감은 감독회장 당선 후 매년 소송을 거치며 교단 수장의 자리가 공석일 때가 많았다. 이번에도 전명구감독회장의 선거무효 소송으로 인해 일선에 복귀한 전감독의 거취도 다시 불분명해지게 됐다. 재판부에서는 선거권 문제와 함께 제기된 금권문제에 관해서는 이유없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수십여 건의 소송으로 몸살을 앓아온 감리회가 마련한 ‘사회법 제소자는 출교’ 조항이다. 재판에서 시시비비를 가렸던 과거와 달리 재판결과에 따라 오히려 출교당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재판에 임해야 하는지에 관해 의견이 분분하다. 지금까지 감리교는 정상적인 총회운영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소송이 많았다. 2008년 김국도목사의 감독회장 선거부터 고수철목사와 강흥복목사 등 한 교단이 서로 다른 감독을 내세워 사회법정 앞에서 재판부의 판단을 구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이어진 전용재감독의 금권선거 논란에 총회특별재판위원회의가 당선무효를 결정했고 전감독회장은 사회법을 통해 법적으로 대응했다. 이후 고등법원에서 지위가 회복되긴 했으나 그동안 감리교 총회의 파행적 운영과 목회자들 간의 반목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유독 감리교의 감독회장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소송전은 4년 임기의 전임 감독회장제 채택으로 인해 감독 1인에게 집중된 기능과 권한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제도는 교단의 안정적 운영 등 장점에도 불구하고 감신과 목원, 협성 등 학벌 간 대립구도도 키워왔다. 10여 년간 조직의 안정성을 해치는 제도는 개선되어야 한다. 개혁적이고 혁명적인 반성과 합리적인 제도 개선을 통해 소송의 악습을 끊어내야 할 시기가 왔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2-24
  • 미·북회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소망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5일 새해국정연설에서 오는 27-28일간 베트남에서 2차 미북정상회담을 발표하면서, “내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북한과 큰 전쟁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북한은 지난 15개월 동안 핵실험을 중단하고 미사일 발사도 없었다”고 자신의 업적을 간단히 언급만 했다. 그러나 지난 3일 CBS대담에서는 강경한 어조로 자신의 본심을 얘기하고 있다. “김정은 북한은 거대한 경제대국으로 만들 기회가 있다. 그 이유는 러시아, 중국, 한국 가운데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핵을 가지고 있는 한 그리고 사회주의 길을 걷는 한 그렇게 할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라는 현실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 패권국가로서 지켜온 가치를 강조하면서 ‘사회주의는 안 된다’는 일관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신뢰를 보낸다. 그러나 지난 10~20년 동안 한국의 진보세력들은 친중·반미적인 입장을 고수해 왔다. 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인들이 이제는 미국의 시대는 저물고, 중국의 시대가 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미국의 패권은 세일석유혁명으로 21세기 초반의 미국의 패권이 앞으로 수백 년 이상 지속될 수 있다는 많은 주장들이 뒷받침하고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적극적으로 누리고 있다. 문제는 대한민국의 안보와 평화다.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그 운명을 좌지우지 해 왔다. 현재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와 긴밀한 외교적 합동작전을 펼치고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일본과 갈등관계에 있다. 미국과는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때에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이 땅에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디모데전서 2:2)을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북한 동포는 물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는(디모데전서 2:4)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2-24
  •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을 환영한다
    2019년 연초부터 한국기독교의 대표적인 연합기관인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을 추진한다는 소식에 크게 환영한다. 지난달 31일 전광훈 한기총 대표회장과 권태진 한교연 대표회장은 2월 말까지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오는 6월 말까지 통합하기로 했다. 특히 통합합의서에서 “한국교회가 나라와 민족의 희망이요 사회의 등불이었던 본연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근래에 와서 몇몇 지도자들의 이기심으로 분열돼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며, “교회가 분열된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는 데 뜻을 같이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할 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기다렸던 바램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염려가 되는 것은 두 기관이 2017년 8월 통합을 추진했지만 무산됐다. 더욱이 한교연은 지난해 한교총과도 통합을 선언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빛과 소금이라는 본연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몇몇 지도자들의 이기심과 아집으로 분열되어 지탄의 대상이 됨으로써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고 있다는 치욕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알면서도 방관해온 것이 사실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한국교회가 가장 중요한 것은 “평안이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다”(엡4:3). 평안이 매는 줄은 주님의 십자가이다. 성령이 하나 되는 유일한 길은 이 모든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서 처리하는 것이다. 성령이 하나 되는 통합의 길은 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이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엡4:12)는데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분열은 지도자들이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에 무관심한데서 비롯되었다. 봉사의 일이란 교회를 똑바로 세우는 것이다. 이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모처럼 두 기관이 통합의 결의를 한국교회 앞에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에 각자가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성령이 참으로 하나 되는 통합이 되기를 간곡히 제언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2-13
  • 3·1운동 100주년 기념예배에 적극 참여하자
    2월 24일 주일에 합동, 통합, 기장, 기감 등 주요교단은 3.1운동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자고 소속 교회들을 독려하고 있다. 큰 문제가 없는 한 대다수 한국교회는 2월 24일 주일에 3.1운동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릴 것으로 예상된다. 여러 교파와 교단으로 분열돼 있는 한국교회가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며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통합측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한국교회가 다시금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영적 부흥의 새로운 전기를 선포하고자 ‘3·1운동 100주년 기념 공동예배 안’을 마련했다”며, 2월 24일 각 지교회 예배당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공동예배 안’으로 드려줄 것을 요청했다. 기장 역시 2월 24일에 3.1운동 100주년 기념예배를 위한 자료집을 전국교회에 배포하고,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고 했다. 한국교회에서 보수로 통하는 합동 역시 총회장 이름으로 오는 24일 주일을 3·1운동 100주년 기념 공동예배로 드리자고 전국교회에 호소하고 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합동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예배를 교단 차원에서 공동으로 하자고 결의한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정치적 사안을 기념하는 예배를 극도로 꺼렸던 합동교단이 산하 교회들에게 3·1운동 100주년 공동예배를 독려하고 또 3월 1일에는 한교총이 주최하는 교회협과의 공동예배에도 참여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해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2월 24일 3·1운동 100주년 공동예배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교단별로 예배를 위한 자료집을 배포했기에 예배를 진행하는 데에 어려움을 없을 것이다. 각 교단과 연합기관별로 3.1운동이라는 민족사적 대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내 교회’만 생각하는 극단적 개교회주의를 버려야 하다. 교단과 교파라는 장벽을 넘어 한국교회 전체라는 공동체성 속에서 2월 24일 주일을 맞아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2-13
  • 지도자는 ‘그리스도의 사신(使臣)’이다
    새해를 맞으면서 기독교 연합기관들이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하는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 29일 한기총 회장을 비롯하여 새로운 지도자들이 선출됐다. 한기총은 정체성을 회복하는 연합기관의 대표로서 앞으로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선도적인 기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후보자 두 명 모두가 한국교회가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데 공감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기총 중심의 연합과 교계 정상화를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로 꼽았다. 문제의식은 맞다. 그러나 지금까지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것은 지도자들의 분명한 사명의식이 부족했다. 교회의 지도자는 그리스도의 사신(使臣)으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하나님과의 회목이다’. 사신은 대리자로 보냄을 받은 자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중대한 의미를 몇 번이고 되새겨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화목’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째는 아직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이 있다. 바로 그들에게 새 생명을 얻게 함으로써 하나님 자신과 화목케 하는 것이다(고린도후서 2:19). 두 번째는 이미 하나님과 화목했지만, 전진된 화목을 이루지 못한 어린 성도들이 너무 많다. 그리스도는 사람인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셔서 우리가 부활 생명 안에서 그분을 향하여 살도록 하셨다(고린도후서 5:14~15). 그러나 현재 연합기관들이 이런 일을 선도적으로 실행하고 있느냐는 것은 참으로 아쉬움이 많다. 지도자들이 분열과 이기심, 파벌과 탐욕, 심지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다(디모데후서 3:15)는 문제로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아 왔다.  현재 한국 기독교는 생명이 감춰짐으로써 세상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도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믿음을 지키고 있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일(에베소서 4:12)에 돌아보지 못하고 있다. 특히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시대적 사명까지 담당해야 한다면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책무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1-30
  • 소외된 이웃 돌아보는 설을 맞자
    민족의 명절인 설이 다가왔다. 설날하면 어떤 기다림이 있을까? 연휴, 고향, 부모, 친구, 차례, 성묘 등의 단어를 떠올린다. 민족의 고유 명절이기에 명절동안 국민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설은 가족이 모여 사랑과 정을 나누는 날이자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민족의 복된 절기이다. 설은 새해 첫날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음식을 마련하여 가족과 조상에 감사하는 날이다. 농경 전통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뿌리를 내리며 사는 사람들이 고향을 지키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 부모와 형제들이 바쁜 삶으로 헤어져 살다가 명절이라는 문화를 통해 만나서 정을 나누고 조상을 기리는 문화는 우리의 삶을 더욱 따뜻하고 풍성하게 만든다. 이웃과 음식을 나누는 날 또한 우리 삶의 일부분이다. 설날에는 다양한 풍습들이 있다. 차례, 세배, 떡국, 설빔, 덕담, 윷놀이, 널뛰기 등이 그것이다. 그중 설날의 대표적인 풍속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세배로 원래는 차례가 끝난 뒤에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찾아다니며 새해 인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차례가 끝나면 웃어른부터 차례로 새해 첫인사를 드리는데 이를 세배라 한다. 집안의 세배가 끝나면, 아침 식사를 한 후에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린다. 이렇게 설은 우리에게 하나의 축제로 지내왔다. 가정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참여해 웃고 즐기는 축제인 것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명절에 잊지 말하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경제적 위기로 인해 모두가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기쁨을 나눌 가족이 없거나 실업이나 폐업 등으로 직장을 잃고 어두운 명절을 보내는 이웃이 많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즐거운 설이 되기 위해서는 이웃을 위한 나눔과 사랑이 더욱 절실하다. 우리의 명절은 이웃들과 나누며 기쁨도 함께하는 축제였음을 기억하고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사랑에 앞장서는 날로 지켜지길 기대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1-30
  • 겨울캠프의 전통 되살려야 한다
    동절기에 주일학교와 청소년 및 청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영적인 훈련을 받는 ‘겨울캠프’는 한국교회 부흥과 성장의 소중한 밑거름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겨울캠프의 횟수와 참여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여기에 대한 한국교회 전체의 관심과 대응이 절실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다음세대를 신앙적으로 세우는 일이 한국교회의 명운이 걸린 중차대한 과제임을 자각해야 한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각종 지표와 통계는 지금의 상황이 상당히 심각함을 경고해주고 있다. 한 대형교단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년 사이 교회학교 학생수가 절반이나 떨어졌다고 한다. 최근 한국사회의 급격한 노령화와 출산율의 감소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킬 전망이다. 그러나 출산율 감소만 탓해서는 안 된다. 먼저 교단이나 총회 차원에서 겨울캠프의 전문가 그룹을 양성하고 지원해야 한다. 교회사역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고, 여기서 사람은 ‘전문가’이다. 지금의 시대적 특징을 잘 파악해서 거기에 맞는 효과적인 전략과 전술을 새우는 전문가 그룹을 육성하고 양성해야 한다. 그래서 이 그룹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기획과 프로그램으로 겨울캠프를 진행하게 해야 한다. 여기에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 ‘개교회주의’ 또는 ‘패배주의’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 ‘우리 교회는 크니까 자체적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식의 개교회주의는 타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이다. 또 ‘우리 교회는 너무 작아서 아예 할 수 없다’는 식의 패배주의는 한국교회를 더 깊은 침체로 밀어 넣을 뿐이다. 한국교회는 식어진 겨울캠프의 열기를 다시 살리기 위해 ‘우리는 하나’라는 운명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교회학교가 무너지면 한국교회 전체가 무너진다는 절박감 속에서 모든 교회가 겨울캠프의 전통을 회복시키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선지자 에스겔이 구약시대에 봤던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는 비전이 지금 이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줘야 할 때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1-24
  • 3·1운동 기념사업 내실있게 준비하자
    2019년 3월 1일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1세기라는 의미이다. 특히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함께하는 해이다보니 우리 민족의 지난 100년의 시간은 너무도 많은 변화와 질곡과 역경의 시간이었다. 3·1정신은 한마디로 우리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사사로운 운동이 아닐 뿐 아니라 더욱이 당파적 운동이나 이념적 운동도 아니다. 모든 국민들이 나셨다. 특히 종교인들이 앞장을 섰다. 이상규박사(고신대 명예교수)는 한 세미나에서 “3·1운동 당시 기독교 인구는 20~22만으로 전 국민의 1~1.5%에 불과했으나 신도 100만 이상의 천도교보다 더 많은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교회나 선교학교가 없는 지역에서는 천도교와 협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100주년을 맞이한 현 시점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3·1정신의 회복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지금의 모습은 3·1정신에 역행하는 허리 잘린 고난의 연속이다. 문재인 정부의 평화정책으로 한반도의 평화분위기에 잠시 취하고 있으나 남한을 핵 무력으로 지배하려는 북한의 핵은 더욱 요원한 채, 남남갈등만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정부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활동에 임하고 있다. 특히 100년 전처럼 종교계의 적극적인 협력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독교계의 기념사업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한국교회교단장회의에서도 23개 회원교단뿐 아니라 3·1운동 기념사업을 여러 해 준비해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YMCA전국연맹 등 연합기구들과 함께 하나가 되는 전체 틀을 ‘준비위원회’와 같이 만들고, 그 안에서 교단별, 기관별로 현재 추진 중에 있다. 문제는 그동안 연합활동들이 내실을 기하지 못하고 일회성의 이벤트성이 강했다는 지적을 감안하여 지난 100년의 의미를 되새기며 새로운 100년을 향한 진정한 의미의 우리민족의 하나 됨의 평화이기를 준비하자. 
    • 오피니언
    • 사설
    2019-01-24
  • ‘남북통일’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역할
    2018년 남북정상회담과 미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는 평화의 환상(幻想)에 취해 있다. 남북한 간의 화해로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왔고, 한반도의 평화는 동북아의 평화 그리고 세계의 평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꿈꾸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평화정책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현실을 더 이상 호도하면 안 된다.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가 남북한의 화해, 즉 우리 민족끼리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처절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한반도의 모든 위기는 외세에서 비롯되었다.  남북통일은 한반도에 존재하는 두 국가가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남북통일과 북남통일이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다. 더욱이 북한은 전체주의적 독제체제이다. 전체주의란 “인간의 행동을 장악하고 사상을 타락시킴으로써 인간을 서서히 파탄시켜나가는 체제다. 오직 지도자만이 의사결정을 할 권리와 책임을 가질 뿐이다”(브레진스키). 북한 핵이 존재하는 한 평화통일은 요원하다. 그렇다고 기독교에서 방관할 수가 없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요, 평화의 종교다.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보호하면서 지키고 있다. 기독교가 나서야 한다. 그러하기에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그 사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선 그동안 진보세력들이 주장했던 통일신학을 범 교단이 함께하는 북한 복음화의 구체적인 대안이 있어야 한다. 둘째 북한 바로알기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북한주민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주체사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북한에서 주체사상은 일종의 북한식 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에 김일성·김정일이 자리하고 있음을 교회에서 강조해야 한다. 셋째 탈북동포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탈북자들의 정착에 힘써야 한다.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지는 경우, 북한 선교의 선도적 역할을 다름 아닌 바로 탈북자들이 담당할 때 성과를 올리기 쉽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도덕적 우위를 앞세워 사회적 통합을 선도해가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1-2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