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사설

실시간뉴스
  • 고난주간, 신앙 성숙의 길로 삼자
       매년 맞이하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자기 십자가’를 체험하는 기간이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셨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고난과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이란 말은 성경 속에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고난주간이 교회의 절기로 자리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형식화되고 관습화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은 고난주간을 맞아 ‘자기 십자가’를 지는 분명한 체험이 필요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셨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고난주간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4-03-13
  • [사설] 해외선교사의 현실과 성경적 선교지원
      선교는 세속적 경제구조와 맞물려 진행되지 않는다.   2010년을 전후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특별히 중국 공산당의 박해로 인해 철수하는 선교사들이 많았고, 인도나 터키 등 자신들의 종교가 분명한 나라들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일이 많았다. 그 국가들은 주로 비자를 연장 해주지 않던가, 정부 정책에 반하는 일들을 했다는 이유를 근거로 진행한 일종의 박해였다. 이런 일들이 최근 한국인 선교사의 수가 줄어든 원인 중에 하나가 됨은 분명하다. 또 그런 박해는 예상된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인 선교사 감소의 원인 중, 큰 이유는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 저하라는 것은 자명하다. 선교사들의 사역과 생활은 교회의 지원과 성도들의 후원으로 유지된다. 이러한 한국적 선교시스템에서, 교세의 감소로 지원이 약해지고 또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개인성도 감소로 개인 후원금이 줄어들고 있다. 이 현실적인 문제들과 싸우는 현장의 선교사들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믿음에 의지한다.  우리의 선교는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란 말씀, 또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라는 말씀에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든 세상 끝까지 전파해 한 영혼이라도 구하기를 애써 왔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현재 교회의 경제상황과 인적 상황에 기반하지 않는다. 오직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큰 언약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근거한다.  교회는 먼저 우리의 것을 떼어 놓기 전에, 내 쓸 것을 것을 줄이고 양보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고 헌신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과 열방에 가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세상 경제의 논리가 아닌, 하늘 경제의 풍성함과 기적을 전해 주어야 한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선교하고 있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님의 말씀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24-02-22
  • ‘퀴어 축제’, 반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올해도 이른바 ‘퀴어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를 두고 한국교회는 한목소리로 우려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우리는 동성애, 근친상간, 소아성애 등을 옹호하는 퀴어신학을 반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퀴어신학이 지지하는 낯설고 이상한 동성애는 창조섭리인 양성질서에 반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결국, 동성애는 성경의 주제가 아니고 부차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금기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게 신학의 보편적 주제가 될 수는 없다. 퀴어신학의 주제는 동성애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 동성애가 신학의 핵심이 돼야 하고 동성애에 대한 모독과 억압은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창조자 하나님과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향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의미한다.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과 인류 보편의 성 윤리와 맞선다. 비도덕적이고 괴기한 성적 관행이다. 남성 동성애의 경우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의 비정상적 접촉이 반복된다.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의학적 질서와도 맞지 않는다. 동성애는 결국 괴기한 행위일 뿐이다.   결혼과 가정은 동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결혼과 양성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생산되며 사회와 국가와 인류는 존속될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결혼, 즉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양성결혼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복이요 인류 생존의 조건이요 기반이다. 따라서 동성애 반대는 이 시대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 교회는 바른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처해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5-19
  • 모범이 되는 기독교가정이 되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전통적으로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관계로 얻은 자녀들로 구성된 혈연공동체인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의식주를 함께 나누는 생활공동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는 이런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이해와 가정의 형태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독신과 혼전동거의 증가와 더불어 결혼율의 감소, 동성애와 성전환 그리고 동성결혼 등 세태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정에 대한 이해와 형태들이 나타남으로 전통적 가정관과 가정형태가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다.   먼저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질서로 제정하신 천부적 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둘이 하나가 되는 인간의 결혼제도는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명의 연합과 사랑의 사귐을 이루는 언약관계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고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은 창조의 질서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속받은 교회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관계로 하나님의 영적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신비로 이해된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함으로 영적인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 온전한 부부간의 사랑과 연합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구속에서 나타나는 결혼과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결혼언약의 영적신비를 기억함으로 반드시 영적 생명을 함께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 곧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결혼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이혼과 재혼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에 모범이 되는 기독교 가정을 이뤄가는데 온 힘을 기울자.
    • 오피니언
    • 사설
    2022-05-19
  •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를 우려한다
    지난 2020년 6월 29일 자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은 그 안에 전통적인 기독교윤리와 배치는 되는 조항이 있어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동법 2조 1항에서 성별을 남성, 여성, 그리고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 이는 성을 인식, 표현, 인지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이 의미는 생물학적 인체구조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인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이는 남성과 여성 외에 다른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입장이다.   성적지향에 대해 차금법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감정적, 호의적, 성적으로 깊이 이끌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차금법의 취지와는 달리 레위기 18:22, 20:13에서 동성애를 윤리적인 악한 행위로 간주하여 명확히 금지하고 있다. 이것들은 정언명령으로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는 서술법으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준수해야 할 명령이다.   또 동법 제3조 가항에서 모집과 채용을 포함하는 고용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차금법이 법제화되면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에서 교수나 교수지원자가 동성애자로 밝혀지게 될 때 채용을 거부하는 것이 불법이 된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가 요구하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을 때에도 채용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이러한 경우 기독교 학교는 학생 구성에 있어 기독교 학교의 특수성이 희생될 수 있고, 신학교는 교회의 목회자 양성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독소조항으로 인해서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심각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대응을 촉구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5-11
  • 주일학교 교사양성에 힘쓰자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미래의 근간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주일학교가 무너진다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으며, 또 많은 통계들은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너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데서 출발한다.   주일학교 교사는 먼저 학생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관심과 고민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며 친구라고 불렀다.   좋은 교사는 좋은 상담자이다. 세익스피어는 “13세부터 20세 사이의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만큼 청소년 시기에 고민과 갈등이 많다는 증거이다. 교사는 상담자로서 학생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주일학교교사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신앙성숙을 돕는 자다. 교사는 성경지식을 주입시키는 자가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자신이 먼저 배운 지식과 경험을 학생들이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주변 환경, 학습 환경, 생활환경의 장애물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특별히 예배시간에 교사들이 먼저 진지한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모범이 되도록 한다. 예배시간 엄수, 지각?결석 등을 하지 않고, 예배시간에 교사들 간의 잡담을 삼가야 한다. 이러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일 때 주일학교에 미래가 있는 것이다. 스승의날, 스승의 주일을 보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인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해 좋은 교사의 야육에 모두가 힘을 다하자.
    • 오피니언
    • 사설
    2022-05-11

실시간 사설 기사

  • 국가조찬기도회의 격을 회복하자
    국가조찬기도회는 기독교 지도자를 중심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으로서 우리나라는 1948년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임시의장의 제안으로 종교가 어떠하든지 모든 의원이 기립하여 먼저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현재 국가조찬기도회는 고 김준곤목사(한국CCC 설립자)가 1965년 2월 국회조찬기도회를 추진하여 이듬해인 1968년 3월 8일 제1회 국가조찬기도회를 시작으로 매년 개최하고 있다. 올해 제51회 국가조찬기도회는 6월 17일 코엑스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주제로 개최한다. 국가조찬기도회는 기독교가 전파된 나라들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이 모임을 갖는다. 그 대표적인 국가가 미국이다. 미국 국가조찬기도회는 1953년에 시작하였고, 매년 2월 첫번째 목요일 워싱턴 DC에서 세계 각국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과 미 연방 상하원과 정부요인들이 모이는 세계적인 행사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국가조찬기도회는 많이 왜곡되기도 했다. 그 이유는 국가권력이 국가조찬기도회를 권력유지 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개신교 목사들이 대통령과 국가지도자를 초청해 국가조찬기도회를 할 때마다 정교분리를 외쳤지만 권력에 아부하고 굴종한 역사가 더 깊기 때문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하게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심”(로마서 13장 1절)을 믿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통치자가 어떤 인물이든 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라의 평안과 안전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나라 애국가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명기하고 있듯이 세상의 빛과 생명 그리고 능력이 되는 기독교가 됨으로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고백할 때에 국가조찬기도회의 격은 높아질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6-19
  • 6·25의 판세는 변한 게 없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역사적 분쟁의 불의 고리다. 마치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대륙판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지진과 화산을 일으키는 불의 고리처럼. 이는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숙명적인 과제다. 6·25는 대륙세력을 대표하는 중국과 해양세력을 대표하는 미국의 전쟁놀이판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놀이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역사는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판이 바뀔 뿐 같은 형태로 반복한다. 지금 한반도의 판세는 무력충돌의 판이든 경제전쟁의 판이든 마치 미국과 중국이 북한과 남한을 장기판의 졸처럼 사용하는 판 놀이다. 이를 직시하고 극복해야 우리 민족의 앞날이 있다. 임진왜란도 병자호란도 결국 우리 민족은 대륙의 힘과 해양의 힘이 벌이는 장기판의 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제 보수나 진보나 정신 차리고 더는 한반도의 장기판에서 졸 노릇을 그만하자. 4·19든 5·16이든 6·10민주화운동이든 태극기 부대이든 촛불혁명이든 우리끼리 벌이는 판갈이는 그만두자. 통일이 우리의 정권교체의 판갈이로 해결될 것 같은가? 통일이 대박이든 쪽박이든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판세가 아님을 직시하자. 정신 차리자.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망한다. 6·25의 판세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이 판세를 바꾸어야 한다. 더는 강자들의 장기판에 졸이 되지 말자. 6·25의 판을 깨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을 알아야 한다. 미국은 우리에게 누구이며, 중국은 우리에게 누구인가를 배워야 한다. 알아야 한다. 우리끼리 골목대장의 자리를 걸고 싸우는 판갈이의 정치문화부터 바꾸자. 조막만 한 핵을 들고 트럼프에게 덤벼들거나, 달랑 몇 푼 손에 들고 시진핑에 맞서려는 어리석은 짓은 그만하고, 지구촌 새 시대의 새판을 짜시는 하나님의 편에 서서 우리도 한 번 장기판의 주인이 되어 보자. 우리끼리 판을 짜고 판을 깨지 말고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판에서 화해의 도구가 되어 평화의 새 판을 만들어 내자.
    • 오피니언
    • 사설
    2019-06-19
  • 한기총, 냉철한 현실인식이 필요하다
    지난 5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발표한 시국선언이 교회를 넘어 사회에 파란과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기서 한기총은 “그동안 한국교회가 이루어놓은 세계사적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하여 문재인대통령이 올해 연말까지 하야할 것과 정치권은 무너진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4년 중임제 개헌을 비롯하여 국가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자 내년 4월 15일 총선에서 대통령 선거와 개헌헌법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관해 교계는 물론이고 정치권까지 가세해서 전광훈목사의 발언을 ‘망언’으로 규정하며 맹비난을 퍼붓고 있다. 지금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한기총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한기총 대표회장을 지낸 한 원로는 전광훈목사가 그렇게 발언하게 만든 단초는 문재인대통령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좌파의 대통령도 우파의 대통령도 아닌 국민의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대표회장으로서의 발언이 지나쳤다는 점은 인정했다. 또 전광훈목사가 전체적으로 애국충정의 마음에서 발언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여러 논란을 떠나 한기총은 정치적 발언에 더욱 냉철한 현실인식이 절실히 필요하다. 자신의 신념과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것은 자유대한민국에서 합당한 행동이다.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사실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단지 문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통혁당 관련자 신영복을 존경한다는 말을 비롯해 몇몇 발언만을 가지고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간첩으로 몰아가는 것은 현실과는 큰 괴리가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국가와 교회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한기총의 입장과 맞는 정치세력과는 연대할 수 있다는 한기총의 입장이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적 발언에 있어서 한기총은 국민의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 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6-11
  • 탈북민선교와 한국교회
    통일부 자료에 의하면 남한 입국 탈북자는 2019년 3월 말 현재 32,705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성별 비율은 여성이 2002년을 기점으로 남성을 추월하여 현재 전체 71%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1990년대 중반 북한의 ‘고난의 행군’을 계기로 많은 탈북민이 발생하면서 2005년 이후 지속해서 증가 추세를 유지하다가 2012년부터는 연간 1,500여 명대로 감소하더니, 2018년에는 1,137명으로 떨어졌다. 이 같은 탈북민의 수가 줄어든 원인은 여러 가지 분석이 있을 수 있으나 그중에 김정은 정권의 강화된 탈북자 정책이 주요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그동안 북한선교나 탈북민 선교가 실패했던 이유는 북한 사람들에 관한 성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겉모습과 언어가 같은 동족이라는 인식이 앞섰기 때문이다. 북한은 공산주의 변종인 주체사상으로 70년 이상을 살아온 철저한 이방인이다. 공산주의는 사람이 완전하다고 전제하면서 평등사회를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주체사상은 김일성이 하나님과 같은 전지전능한 절대자요 봉건사회의 왕이다. 인민은 공산당 조직의 노예로서 오직 김일성은 선이고 기타 모든 것은 악이다. 바로 북한은 동물적인 인간중심의 하향평등사회이다.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체계가 붕괴함으로써 사고방식이 단순화되고, 지극히 피동적인 기본 욕구만을 가진 김일성 종교에 길들어진 이교도이다. 탈북민들이 남한 사회 적응과정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웃과의 만남을 두려워하고, 마음이 황무지로서 기경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생각지도 듣지도 못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보편적인 가치를 모른다. 심지어 죄의 기준이 다르다. 그리고 남한사회에서 새로운 우상인 돈을 지향한다. 교회는 돈 주는 곳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나 주체사상이 성경을 모방했지만 가장 중요한 ‘사랑’을 놓쳤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한일서 4장 8절).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탈북민을 염려하고 따뜻한 이웃으로 대한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발견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6-11
  •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애국
    해마다 6월의 호국보훈의 달을 맞을 때에 가장 생각나는 것이 한국전쟁이다. 8·15 해방의 기쁨에 젖기도 전에 남북은 이념 논쟁으로 갈라졌다. 북에는 소련군, 남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신탁, 반탁의 고비를 거치면서 1948년 각각 정권을 수립했다. 북한에는 소련의 사주를 받으며 김일성을 중심으로 평양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었고, 남한에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UN결의에 따라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 세워졌다. 그런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확인한다. 1948년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로 시작되었다. 애국가에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기록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을 향한 놀라운 섭리이자 역사다. 일제하에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국민에게 신앙과 함께 애국애족을 심어준 것이 큰 밑거름이 되었다. 이에 가장 대표적인 분이 주기철목사이다. 신앙인이요 독립운동가로서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고, 국가보훈처로부터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하던 새벽, 이 소식을 들은 빌리 그레이엄목사는 같은 침례 교인이었던 트루먼대통령에게 급한 전보를 보냈다. “수백만 그리스도인들이 위기를 맞은 대통령에게 지혜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음. 공산주의를 즉각 응징할 것은 강력하게 촉구함. 남한에는 비율상 세계 어느 곳보다 그리스도인이 많음. 그들을 실망시킬 수 없음”.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와 지원으로 한국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따라서 국가가 없으면 모든 것이 없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국경이 분명하다. 그것은 조국에 대한 신념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살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신앙과 더불어 애국애족의 마음을 굳게 갖는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6-04
  •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자 - 「성령강림절」을 맞아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 후 50일 되는 날을 ‘성령강림주일’로 지켜왔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성령강림’은 바른 표현은 아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오순절에 성령이 내렸다는 뜻인데, 이렇게 되면 신약의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이 오시지 않았다는 오해가 발생하기 쉽다. 그러나 창세기 1장 2절에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하는데, 이를 보면 이미 천지창조 때에 성령이 나오고 있다. 또한 구약 곳곳에 성령의 활동에 대한 많은 증거들이 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했다’는 것은 바른 표현은 아니다. 또 신학적으로 보자면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인격’이다. 정통적이고 표준적인 신조에 따르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구분돼서 역사 가운데 활동하시지만, 본질과 영광에 있어서는 ‘한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 또한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막론해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역사하고 활동한다고 봐야 한다. 오순절의 성령사건은 ‘강림’이라기보다는 ‘충만’에 그 특징이 있다. 즉 신약의 오순절 이전에는 왕이나 선지자 또는 특별한 직무를 갖는 사람들에게만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임했다. 그러나 오순절에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자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나타났고, 이제는 은혜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나타나고 있다. 오늘 교회는 성령은 ‘인격으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성경에서 연약한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성령을 ‘불’이나 ‘물’로 비유했지만 그렇다고 성령이 그런 ‘비인격적 사물’일 수는 없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령은 성도 안에 내주하며 성도를 돕고 인도하는 하나님이심을 잘 가르쳐야 한다. 한국교회의 기도와 열심히 전에 비해 확연히 줄었다는 표지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때에 한국교회는 성령의 충만을 어느 때보다 사모해야 할 것이다. 한 영혼을 거듭나게 하고 말씀으로 성장하게 하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6-04
  • 경제위기에 빠진 나라를 위해 기도하자
    재인 정부 출범 2주년을 맞아 경제학자 100명의 설문에서 ‘文정부 경제정책을 D학점’으로 평가하면서 한국 경제 위기가 현실임을 증거하고 있다.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 혁신성장으로 요약되는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경제학자들은 한국 경제에 대해 특단의 대책이 없으면 위기가 현실화할 수 있는 위기 직전 상황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청와대와 정부 일각에서 “위기론은 과장됐다”며 소득주도성장으로 대표되는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정부의 이 같은 상황 인식이 안이하다는 판단을 내린 셈이다. 실제로 국민이 느끼는 체감경제는 더욱 심각하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4월 실업률이 19년 만의 최고인 4.4%, 실업자 수(124만 명) 역시 2000년 이후 최고치이고, 청년층 체감 실업률(25.2%)은 통계 작성 후 최악이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강조한 평화문제는 진전이 있느냐. 이 역시 요원하다. 경제가 뚜렷한 내리막길을 걷고 있지만 정부는 지난 2년간 어려운 여건에도 대외건전성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국민 생활과 직결된 리스크를 안정적으로 관리했다고 자평했다. 정부 출범 직전인 2017년 1분기와 비교해 주요 지표가 일제히 추락했음에도 안이한 인식을 보인 것이다. 정부가 객관적 상황 인식보다는 총선을 앞두고 지지층을 향한 ‘홍보전’에 치중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결국 국가의 위기극복은 국민의 몫이다. 그중에서도 이 나라를 섭리가운데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편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디모데전서 2장 1~2절). 따라서 교회는 물론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어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대통령이나 총리 그리고 나라의 리더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여 영적인 영역에서 세력을 얻을 수 있고 그들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다. 그리하면 이 땅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5-21
  •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길 - 「장로교의 날」에
    오는 4일은 장로교의 날이다. 한국교회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개교회 이름보다 더 익숙한 교단명이고 모든 교회를 장로교회로 아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대표적이다. 세계적으로 큰 교파가 아님에도 감리교나 성결교 등에 비해 한국에서 가장 많은 교세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장로교의 성경적 보수신앙이 한국교회의 성장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세계적으로 성장하는데 장로교라는 큰 울타리가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장로교단은 백 수십여개로 갈라져 끝없는 분열을 이어오고 있다는 아픔도 존재한다. 예장과 기장, 합동과 통합의 분열로 시작된 부끄러운 역사가 한국교회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복음을 쇠퇴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장로교회의 분열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나누는 일을 일상화하여 교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저하시키고 이단들이 침투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또한 대형교회들의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응하는 교단총회의 행태가 비판의 도마에 오르면서 장로교단의 연합과 일치에 부끄러운 오점을 남기고 있다. 그동안 한장총은 ‘한 교단 다 체제’ 논의를 매년 제안하고 이를 성사시키기 위한 다각적 노력을 견지해 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연합총회’란 하나의 이름을 사용하되 현재 각 교단의 정치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것이다. 현재까지 이를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이 보이지 않고 있으나 연합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 장로교단들이 이러한 한국교회의 바람대로 더욱 연합하고 힘을 모아 분열보다 통합을 앞세우고 한국의 장로교단이 세계 복음화의 사명에 매진하도록 협력하고 하나되는 일에 앞장서길 기대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5-21
  • 겸손한 선교가 필요하다
    서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무장세력에게 붙잡혀있다가 프랑스군에 의해 구출된 한국여성 A씨가 여행자제 지역에서 피랍된 것으로 알려지며 온라인상에서 비판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특히 프랑스 군인 2명이 A씨를 비롯한 인질 4명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무장세력과 교전 중 사망하면서 과거 여행금지 구역에서 피랍되어 몸값을 받고 풀려난 샘물교회 선교팀 사건이 다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국내적 비판여론을 의식한 듯 올해 개교회별 단기선교 계획은 지난해에 비해 축소되거나 미뤄지는 추세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선교팀의 안전문제가 대두되면서 공격적이며 경쟁적인 해외선교에 대한 다시 한번 도마에 올랐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교회의 선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적인 선교행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슬람권 국가 등 선교 위험국가만 찾아서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보복성 테러까지 자행되는 곳에서의 선교활동은 더욱 자극적이고 홍보 효과도 극대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현지문화와 관습을 배대한 가운데 벌이는 전투적인 선교활동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시된다. 더욱이 일방적인 선교와 교세확장을 위한 무불별한 경쟁식 선교와 배낭여행과 다를바 없는 선교여행은 선교의 본연의 가치도 상실시키고 있다. 오지나 위험지역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숫자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문화까지 생기면서 오지를 먼저 점령하고자 국내교회들이 경쟁을 벌이는 등 본말이 전도된 해프닝도 벌어지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한국교회 안에서도 해외선교를 바라보는 인식이 상당부분 개선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피랍사건 이후 선교팀에 대한 안전과 외교부 권고를 주의깊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으며, 일부 교회는 위험지역을 선교대상국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공격적인 선교에서 벗어나 철저한 반성을 통해 겸손한 선교가 필요하다. 위기관리 대처능력 교육을 받고 현지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며 무분별하고 일방적인 모습을 탈피해야 한다. 화합과 일치된 현지 선교활동을 통해 연합의 모습을 보일 때 사회에서 바라보는 ‘선교’의 모습도 달라질 수 있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5-15
  • 퀴어축제는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다
    2019년 서울퀴어문화축제는 강연회, 서울핑크닷, 퍼레이드, 영화제 등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중에 퍼레이드 차량 콘셉트은 썸머 크리스마스로 칭하고 있다. 서로를 사랑하고 축복하는 크리스마스는 퀴어 축제와 가장 잘 어울리는 날 중에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퀴어연극제는 이번 차량을 퀴어들의 사랑과 행복을 위한 크리스마스 파티장으로 꾸미고 있다. 퀴어축제의 기원은 동성애에서 비롯되었다. 동성애는 고대 근동 지방, 소돔 등에 많이 있었는데, 동성애자라는 영어 단어가 ‘소돔’에서 유래되었다. 성경에는 ‘동성애’를 남색, 남창, 미동, 남자와 동침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성애는 짐승과 교접하는 ‘수간’과 함께 언급되어 있을 정도로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구약시대에 동성애는 이방신을 섬기는 신전에서 매음을 하던 남자들과 남자들끼리 성적 관계를 갖던 일이 성행하였으며 우상숭배하던 경건치 못한 사람들의 행위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염되었다. 결국 퀴어축제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다. 시위이며, 동성애 법제화를 위한 국민정서 전환을 꾀하는 ‘동성애 옹호진영의 전술’이다. 따라서 이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기에 너희는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경고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조급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시대를 향한 경고이다. 특히 일부 기독교는 물론 정치세력까지 부화뇌동하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기독교가 바른 위치를 찾지 못한 데서 비롯된 슬픈 때의 현상들이다. 또한 경건의 능력은 교회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생생한 영향력을 지닌 실재적이며 실행적인 효능을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내실을 기함으로써 경건의 능력을 회복할 때에 퀴어축제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5-1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