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6-05(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사설

실시간뉴스

실시간 사설 기사

  • 설날, 고향교회 방문하자
    설날은 우리민족의 큰 명절이다. 해마다 설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간다, 고향은 정겹고 추억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고향의 의미도 많이 변하고 있다. 특히나 탈농어촌화에서 비롯되는 인구감소와 노령화는 고향다운 포근함이 없어져 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향의 교회는 한국교회의 복음의 못자리였다. 그런 교회들이 이제는 자립의 기반이 무너지면서 복음 전도는 물론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자면서 일부 교계 단체에서는 매년 설날과 추석을 맞아 각 교단의 고향교회 방문을 권유하고 있다. 특히 고향교회 방문을 교단적 차원으로도 전개해 나갈 수 있도록 협력해주시길 당부하고 있다. 더욱이 고향교회 방문의 뜻을 계속적으로 이어 갈 수 있도록 각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협력하는 사역도 권유하고 있다. 따라서 명절을 맞아 고향에 갔다 온다는 단순함 보다는 교향의 어려운 교회를 찾아 어려운 교역자를 돕는 물질적인 지원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환난 가운데서 풍성한 연보를 통해 고난 받는 교회들을 지원하는 교제가 활발했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은 “환난의 많은 사련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에서 마게도냐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적인 소유에 붙잡히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많은 왕래가 있어야 한다. 나라의 번영은 교통수단이 원활해야 한다. 경부속도로가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는데 중심이 되었다. 교회 간의 교제는 많을수록 좋다. 우리가 모일 때마다 교통이 있어야 한다. 교통이 없으면 교회들은 고립된다. 교회 간의 교통이 끊긴다는 것은 혈관을 끊으려는 사탄의 교활함이다. 피의 흐름이 끊길 때 그 결과는 죽음이다. 설날을 맞아 어려운 농어촌교회를 방문해서 교인들의 진정한 교통이 시작되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 사설
    2020-01-14
  • 한국교회는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한국교회는 새해를 맞아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교회 밖으로부터 실추된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로부터 교회가 외면된 결과로 교인 수가 감소되고, 새신자가 등록하지 않는다. 이미 교회마다 헌금도 감소되어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교회도 늘고 있다. 개척교회는 찾아볼 수 없고, 미자립교회는 문을 닫고 있다. 이러한 것은 지금까지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사회가 교회를 걱정할 정도로 신뢰도가 추락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70년대 이후 경제성장과 함께 누렸던 물량주의에서 파생된 결과이다. 이제는 겸허한 자세로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태어나야만 실추된 신뢰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과 ‘갱신’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한국교회는 ‘개혁’과 ‘갱신’으로 새롭게 태어나야만, 사회로부터 실추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개신교가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개혁’이다. 개신교 자체가 중세의 타락상에서 벗어나 새롭게 다시 태어나려는 몸부림에 의해 탄생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곳곳에서 드러난 병리적인 현상은 개혁과 갱신을 통해 치유할 수 있다. 아직까지도 물량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속주의에 편승한 행태나 일부 성직자들의 윤리적인 타락, 개교회주의와 분열 등 잘못된 행태는 교회 밖에서 조롱거리가 되어 왔다. 이러한 부정적인 모습을 노정시켜 왔던 한국교회는 개혁과 갱신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개혁은 잘못된 행태를 바로 잡아 주고, 하나님이 요구한 모습으로 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추된 ‘한국교회 모습’을 ‘사랑의 실천’으로 회복해야 한다. 지금까지 사회로부터 실추된 한국교회는 사랑의 실천으로 새롭게 회복할 수 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대가가 없는 무조건적인 것을 말한다. 사랑의 본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기독교에 있어서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가장 큰 계명이다. 율법의 완성이고 예수가 주신 새계명이다. 그래서 믿음이나 소망보다 우위에 있다. 이러한 사랑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가능하게 해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본지는 54년 전 창간 당시부터 지금까지 ‘사랑의 실천’을 외쳐 왔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로서 이론보다는 실천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전도와 선교는 사랑의 실천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랑의 실천이 없는 전도와 선교란 열매를 거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연합’과 ‘일치’로 하나돼야 한다. 한국교회는 계속된 분열 속에서 성장해 왔다. 세계 어느 나라의 교회도 한국교회처럼 분열되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교파가 많다는 미국교회도 이 정도는 아니다. 이제는 동일한 명칭의 교파부터 연합하고, 교파 간에 일치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분열은 그리스도의 몸을 손상시키는 행위이고,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끊임없이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계속된 분열이 죄악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분열의 잘못을 회개하고, 연합과 일치로 하나되는 교회를 추구해야 한다. 사회를 향해서도 하나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   ◆‘다음세대’문제에 대한 대처방안은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한국교회의 ‘다음세대’문제는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과제이다. 이 문제는 무엇보다 출산율 저하에서 비롯된다. 한국의 출산율은 OECD 국가중 하위권이고, 해마다 곤두박질치고 있다. 이 출산율 저하와 함께 성적 위주의 사회요구에서 비롯된 주일학교 감소도 한몫을 감당한다. 교회보다는 학원과 과외공부에 몰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일학교 학생들이 감소되고, 중소형교회에서는 주일학교가 폐교되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출산율이 낮아져 인구가 줄고 있는 현상은 사회적인 문제로만 치부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에 대한 교회적인 대처방안이 강구되어야 하고, 저출산 고령화에 맞는 교회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12-31
  • 목회자의 권위가 존중되길 바란다
    청와대 앞에서 종교단체 지도자와 정치인들이 연일 모여 예배라는 이름으로 시위를 하며 도가 지나치는 정부비난의 여론을 조장하고 있다. 동일한 인물은 일전에 국가전복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교인들에게 전달해 고소됐고, 경찰은 이를 조사 중이다. 수차례 경찰조사를 거부하다 결국 경찰에 출석한 것으로 알려진 해당 목사는 심지어 “자신에게 까불면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는다. 다 죽는다”는 등의 도저히 기독교인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거짓된 선동의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해당 목사는 이미 과거에도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목사의 발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망언들을 여성 교인들을 향해 한바가 있으며, 그의 언행을 비판하는 다른 이들에게는 법적 고소를 통해 난장판 막장싸움을 걸어오기도 했다. 유명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는 연일 해당목사의 언사를 지적하며 교계가 왜 가만히 보고만 있는지 의아해 하고 있고, 그 말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전에 해당 목사에 관해 교회협이 상대하지 않기로 했듯이 암묵적으로 무시하는 교회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것도 사실로 보인다.   이렇듯 해당 목사에 관해서 동조할 수 있는 일이 단 하나도 없을지라도 목회자에 대한 경찰의 수사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사법질서의 유지를 위해 재판관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과 같이 사회의 종교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목회자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세속화된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가치, 기독교의 가치를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목회자의 탈선에 심히 유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목회자’이기에 그가 법적 처벌을 받지 않기를 기도한다. 목회자의 권위 실추로 인한 기독교 하나님의 질서가 세상에서 힘을 잃지 않길 기도한다.   그와 동시에 목회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성한 권위를 소중히 지키려 노력해주길 당부한다. 목회자의 권위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권위가 아니다. 목회자들이 책임감을 갖고 행실에 유의해주길 기대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12-18
  • 상업화된 성탄의 문화를 갱신하자
    성탄절은 백화점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얘기가 있다. 이 때를 맞추어 거리와 상가는 온통 예수를 맞이하는 분위기다. 성탄절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고대 로마인들의 겨울 축제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A.D.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국교로 격상된 로마에서는 기독교의 강적이던 빛의 신인 ‘미트라’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축제일인 12월 25일을 이용해 로마인들을 기독교 안으로 끌어들이는 측면들을 고심한 가운데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빛’으로 말씀하자 로마인들에게 ‘미트라’와 빛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동일시함으로써 오늘의 성탄절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 년 중에서 가장 범죄가 많은 날이 성탄절 이브라고 한다. 이것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는 별개의 모습이다.   성탄절이란 의미는 성인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성경에서 보는 그리스도는 만세 전에 땅이 생기기 전에 세움을 입은 분이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현재의 자존자이다.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다. 영원한 때 전부터 즉 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계셨다. 알파와 오메가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이다. 구유에 누운 아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 만유를 포함한 분이다.   만유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탄생일을 밝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인간을 찾아오셨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의 탄생은 하나님의 경륜의 과정일 뿐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말씀에 의지하여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성탄이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성탄절이 세속문화 속의 연말을 맞이하는 기념일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몸으로서 우리와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생활화하는 것이 이 시대의 갱신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12-18
  • 미자립교회의 지원이 절실하다
    미자립교회란 모이는 숫자나 예산이 없어 교역자 생활비나 교회 운영을 책임질 수 없는 교회라고 말하고 있다. 도시의 경우는 개척교회가 있고, 농어촌의 경우는 이농 현상과 출산율 저하, 고령화로 교인 수가 줄어들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교단마다 발표하는 숫자가 다르지만, 교회의 50~80%로 나타나 절대 다수가 미자립교회로 조사됐다.   원래 교회란 그리스도의 거룩(충만)한 몸이다(에베소서 1장 23장).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부른다. 죄악 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나온 사람들의 무리를 말한다. 성경 속에서 완전한 교회는 ‘빌라델비아(형제사랑)교회’이다(요한계시록 3장 1~13절).    빌라델비아교회는 에베소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림으로써 주님의 책망을 받았던 그 사랑을 온전히 회복한 교회로서 ‘형제가 서로 사랑’한 것이다. 결국 교회의 참모습은 주님의 사랑이 어떻게 구체(실제)화 되느냐에 있으며,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한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앞세우면서 ‘교만’과 ‘분열’에 빠질 때 ‘라오디게아’교회로 쉽게 변질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오늘에 와서 세속화로 교회들이 라오디게아로 변질되고 있다. 따라서 이른바 자립교회라고 하는 대형교회는 물론 교회연합기관들의 관심은 교회를 세우고 개척하는 일에 소홀히 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것은 주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명령이요, 지상 최대의 사명이자 특권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명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다. 교회가 먼저 탐심과 증오를 버릴 수 있도록 솔선수범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를 향하여 ‘믿음과 사랑’으로서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우선하여 혐오와 분열을 극복하고 미자립교회에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실천해야 할 때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12-12
  • 한국기독교 지도자가 바로 서야한다
    최근 많은 교회연합 단체들의 지도자들이 새로 세워졌다. 교회만이 아니라 어떠한 공동체든 올바른 지도자를 세우는 것은 그 단체의 명운이 걸린 중대사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잘못 뽑힌 지도자에 의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큰 단체조차도 사회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리는 현실을 지켜봐야만 했다. 사회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공동체를 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고, 상황에 대한 분석력과 합리적인 판단력,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용기, 인재를 등용하고 적시적소에 사용하는 능력, 부패하지 않을 수 있는 자기반성 능력과 양심 등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반면 교회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조금은 다른 듯하다. 위에서 말한 덕목들도 필요하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교회의 지도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충만해야만 한다. 늘 깨어 있는 영성으로 항시 판단의 기준을 성서에 두고 기도하며 문제를 해결해 가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겸손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선포하고 실천하려는 예언자의 마음을 품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 선출된 단체들의 지도자들이 이와 같은 덕목을 지닌 이들이길 바란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며 항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중히 사역에 임하길 바란다. 사회적 기준과 기독교적 기준이 가치 충돌할 때면 언제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지도자가 되길 바란다. 그러면서 늘 기독교적 가치와 기준을 손에서 놓치지 않는 지도자가 되길 당부한다.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말은 이제 너무도 식상해졌다. 위기인 바로 지금이 기회가 될 수 있다. 다만 지도자가 바로 선다면 말이다. 이번에 선출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한국교회의 제2부흥기가 찾아오길 간절히 기도한다. 늘 겸손하고 청렴하며 지혜로운 우리의 지도자를 위해 한국교회가 전심으로 함께 기도하기를 촉구한다. 우리 한국교회가 2020년 부흥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12-12
  • 동성애 문제관해 대화가 필요하다
    보수 기독교는 성경에 근거하여 동성애를 비판하고 있고, 진보 기독교는 인권의 개념에 기초하여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의 정의를 지키려는 노력과 성경이 쓰인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여 우리시대에 맞게 성경을 읽어내며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노력은 모두 이해할 만하다. 이 두 주장이 양립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보수·진보 기독교는 대화하며 타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동성애를 반대하든 지지하든 그것은 각자의 판단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어떠한 의견이든 존중해야만 한다는 것은 공공의 영역에 속한다. 동성애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우리는 그 의견 자체를 비난할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하며 서로의 의견을 경청해야만 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이미 우리의 민족의 역사에 깊이 체화된 것이 아닌지 걱정이다. 목소리가 크고 완력을 사용하면 실제로 이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이겨서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더구나 기독교의 이름으로 그런 방식을 사용하여 승리를 쟁취한다면 사회에 무슨 덕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행동양식에 대해 우려를 보낸다. 누구든 동성애를 반대할 자유가 있음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과 동성애자를 차별·공격하는 것은 다르다. 보수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에 관한 불확실한 정보들을 유포하고, 인신공격을 일삼으며, 바리새인들과 같이 ‘죄명’을 남발하는 방식 자체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성적지향 차별금지법’의 의미를 정확히 새겨보길 바란다.   동성애를 찬성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보수 기독교인들의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와 언사, 비난 행위들이 도가 지나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동성애 문제에 관해 일방적 주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이미 많이 들었다. 이젠 서로의 입장들을 놓고 대화를 시작할 때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12-04
  • 성경중심의 신앙회복이 절실하다
    1990년 이후 디지털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특히 디지털기술과 인터넷이 출현하면서 사람들 간의 소통의 새로운 장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의 핵심인 스마트폰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해 생기는 다양한 부작용들이 주변에서 나타나고 있다. 거리에서 신호등도 살피지 않고 길을 건너고 운전 중 스마트폰을 하다가 사고가 나기도 한다. 어린 유치원생들부터 고등학생까지 스마트폰에 빠져 수업 시간에 집중을 못 하는 학생들도 많다.   이뿐만 아니라 이런 현상은 교회에도 일어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스마트폰 중독이나 충동이 미치는 영향을 ‘퓨빙’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스마트폰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사람들과 자신의 주변에 신경 쓰지 않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기독교인들이 스마트폰이나 성경앱으로 성경구절을 찾다가 결국 하나님과 그 말씀에서 ‘퓨빙’하게 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왜냐하면 스마트폰의 가장 강력한 힘은 ‘산만함’이라고 한다. 산만함으로써 말씀에 전적으로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특별한 책이다. 성경은 세상의 학문이나 지혜로 알 수 없는 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방법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말씀하시다가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인 아들로 우리에게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먼저 성경을 깨달은 이들이 ‘전도’라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전파하는 자와 사도’(디모데전서 2장 7절)로서 이 성경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자세히 보아야 하는 책이기에 편리함으로 대체한다면 말씀의 깊이를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스마트폰으로 성경책을 대체하는 문화는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매일 자기 옆에 두고 읽도록 교회에서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올바른 교육이며, 성경으로 돌아가 말씀으로 회복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12-04
  • 대림절의 의미를 되새기자
    대림절은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이다. 예전에 우리는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과 함께 대림절을 맞이했고, 교회에서는 대림절의 시작과 함께 성탄절 준비로 바빴다. 함께 모여 찬양을 연습하고, 성극을 준비하며, 성탄 전야의 새벽송을 기대했다. 밤을 세워 함께 기도하고 교재하며 예수의 나심을 기뻐했다. 눈이라도 오면 그 날은 더 할 수 없을 만큼 낭만이 가득한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이 빠르게 변해 더는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도 없고, 교회들도 성탄절 행사를 준비하지 않는다. 성탄행사는 간소화되어 교인들은 각자 집에서 성탄 전야를 맞이한다. 새벽송도 없고, 학생들과 청년들이 모여 밤을 세던 교회 한 켠은 텅 빈 채 성탄의 아침을 맞이한다. 선악을 넘어 조용하고 쓸쓸해진 대림절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렇게 변해버린 대림절기를 맞이하며 그저 아득한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예전의 생기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도 교회학교를 부흥시켜야만 한다. 교회가 다음세대 사역에 온 힘을 다할 때 대림절은 다시금 생경해질 것이다. 예수의 나심을 기다란다는 그 의미에 걸맞게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그 기쁨을 맛보아야만 한다.   많은 교회들이 성탄행사를 축소하여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인원이 부족하고 여력이 못 미칠지라도 최고의 정성을 다해 대림절을 보내야 할 것이다. 어린이, 청소년, 청·장년, 노년층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성탄절을 보내기 위해 교회는 대림절기를 최고로 섬겨야만 할 것이다.   늘 하던 것이니 대충 해버리는 식의 성탄 준비는 안 된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그 날의 의미를 매년 되새겨 과거에 그랬듯 최선을 다해 성탄행사를 준비하자. 대림절기에는 특히 더 다음세대를 섬기는 일에 집중하자. 그들이 행복한 성탄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 기성세대가 자리를 마련해주자. 그렇게 행복한 대림절기를 보낼 수 있도록 다함께 노력하자.
    • 오피니언
    • 사설
    2019-11-28
  • 기독교 시민단체, 복음전도에 투명해야 한다
    ‘21세기는 NGO의 세기’라고 한다. 시민사회단체는 우리 사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서 그 역할은 점점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에서도 시민단체를 운영할 때 분명한 목적을 밝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하여 땅끝까지 그리스도를 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세상적인 방법으로 우후죽순처럼 시민단체들이 생겨남으로써 기부금의 유용이나 고액의 연봉과 관용차를 매입하는 데에 활용하는 등 재정문제에 있어 진정성이 없다는 지적이 너무도 아쉬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사회 시민단체들은 많은 문제점을 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 시민단체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소수의 명망가와 상근운동자를 중심으로 엘리트 위주의 운동에 치중됐다. 둘째, 교회의 필요를 위한 것이 아니라 특별하고 한정된 이슈를 선점하는 것이다. 셋째, 재야운동권처럼 국가권력의 감시와 비판에 너무 치중하고 있다.    이에 기독교 시민단체가 복음전도에 투명하기 위해서 몇 가지 개선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시민단체의 활동가들이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물론 활동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습득해야 할 것이며, 관련 전문가들의 적극적인 조언과 참여를 유도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둘째, 세상의 이념을 교회 내에 가지고 들어와서는 안 된다. 셋째, 개인 회원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여 회원들의 회비와 지원금으로 재원을 충당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기독교 시민단체는 복음 전도를 위한 투명성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이러한 점은 시민단체 책임자들이 명심해야 한다. 음행보다 사람을 더 손상시키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음행이나 탐욕은 우상이기 때문이다. 우상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11-2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