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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정책제안에 힘쓰자
디가오는 6월 3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등 기독교단체들이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정책을 제시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의 경우는 2012년 치려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부터 이러한 운동을 벌여왔다. 지난 2022년 대선에서는 한국교회총연합과 함께 10대 공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에큐메니컬 성향의 단체에서도 기독교대선행동이라는 단체를 출범하면서 탄소중립 구현과 한반도 평화협정등을 제시한 바 있다. 정치인들에게 기독교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책무 중 하나이다. 기독교적인 정책을 정치인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이 나라에 기독교세계관을 반영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정책은 기독교인뿐 아닌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다. 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는 지난 2022년 대선에서 초저출산 극복정책으로 아동돌봄청을 신설해야한다고 했으며 이외에도 재난상황을 대비한 민관위기 관리시스탬 구축과 유사종교 피해방지를 위한 법률제정 등의 정책들이 있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일반시민들에게 큰 유익이 될 수 있는 정책들이다. 저출산 문제의 경우 국가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며, 재난상황의 극복또한 모든 시민에게 필요한 사실이다. 유사종교로 인해 피해를 보는 시민들을 구제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정책들이 일반 시민들에게도 큰 유익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차별금지법의 제정과 같은 악법반대 운동을 활발히 펼쳐왔다. 이제는 악법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좋은 법안과 정책등을 제시할 때이다. 그리고 이번 선거는 그러한 법안과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좋은 계기이다. 이러한 정책제안의 시간이 이번 선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편화가 되어서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해 모든 시민이 유익이 될 수 있는 정책과 법안을 제사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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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믿음’의 사역에 매진하자.
한국교회는 5월 5일 어린이날과 함께 어린이 주일을 지키고 있다. 미국에서는 1880년부터 예배당을 꽃으로 장식하고 '샤론의 꽃, 어린이'라는 제목으로 어린이 예배를 드린 데에서 유래하여 '꽃주일'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방정환, 마해송 등의 어린이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선각자들이 1923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해 어린이 인격보호와 바른 성장에 대한 어른들의 관심과 각성을 촉구하는 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1927년부터는 5월 첫째 주일로, 그리고 1946년에는 오늘날과 같은 5월 5일로 변경되었고, 1957년에는 어린이 헌장이 제정, 공포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교회들도 초창기에는 미국에서 처음 제정된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켜오다가 1956년부터 5월 첫째 주를 어린이 주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린이 주일이라는 절기도 성경에는 없지만 어린이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주일로 지켜지고 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에 대하여 귀하게 여기시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어린아이에 대한 특별한 가르침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잠22:6)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회초리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회초리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23:13-14). 그리고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에게 안식을 주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29:17). 이것은 교회는 물론 부모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다. 따라서 교회는 어린이를 위한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방법으로 디모데의 믿음과 유산을 가르치는 사역이 되도록 하자.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에 속에 있더니 네 속에 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5). 사도 바울은 육신적으로 디모데가 아들이 아니지만, 디모데가 신앙 성장의 합당한 인격을 갖추는데 바울이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딤전1:2)이라고 부르고 있다. 디모데의 거짓이 없는 믿음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던 믿음이 전수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올바른 가정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디모데의 가정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가정은 신앙 교육의 장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유지 발전시키는 일차 기관이며 교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자녀를 하나님의 진리로 양육하는 근본적인 책임은 가정에 있으며 교회 교육과 학교 또는 세속 사회의 교육 간에 생기는 갈등을 신앙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참된 기반이 된다. 뿐만 아니라 자녀를 신앙으로 올바르게 교육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복음 전파 사역과 유업을 물려주는 일과도 깊은 연관을 갖는다(신6:4-9). 현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가 참믿음을 가진 차세대에 대한 교육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어린이 주일을 한 번 지키고끝내는 것이 아니라 평생교육의 출발로서 교회학교의 전문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행함으로써 ‘믿음’의 사역이 부흥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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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기혼 연대하는 공동체를 세우자
작년 기준, 만 19~34세 청년 5명 중 4명이 미혼으로, 미혼율이 80%를 넘었다는 통계는 한국 사회의 결혼·가정에 대한 인식 변화와 현실적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독교인 역시 예외가 아니다. 2023년 조사에서 전체 기독교인 중 미혼 비율은 40.5%에 달했다. 교회 내 싱글 신자들의 수와 연령이 계속 증가하는 것은 이제 뚜렷한 흐름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경제적 부담, 주거난,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결혼·출산에 대한 가치관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결혼이 더 이상 ‘필수’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가족과 1인 가구가 급증하고 있다. 이는 교회가 전통적 가정 중심의 사역과 인식에서 벗어나, 미혼 신자들을 적극적으로 품고 새로운 공동체의 길을 모색해야 함을 시사한다. 교회는 미혼을 ‘문제’로 여기거나, 결혼만이 신앙적 성숙의 완성이라는 시각을 지양해야 한다. 오히려 사도 바울이 강조했듯, 결혼과 미혼 모두 각자의 소명과 가치를 지닌 삶의 방식임을 인정해야 한다. 미혼 신자들이 교회 공동체에서 소외되지 않고, 자신의 은사와 삶을 온전히 나누며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미혼 성도들이 주체적으로 신앙과 삶을 나눌 수 있는 소그룹, 멘토링, 사역의 기회를 확대하고, 결혼과 출산만을 강조하는 지원정책에서 벗어나 다양한 삶의 형태를 존중하는 포용적 사역이 필요하다. 또한 교회는 ‘올바른 가정’의 기준을 결혼 여부나 자녀 유무로 한정하지 않고, 신앙 안에서 서로를 돌보고 연합하는 공동체로 확장해야 한다. 부부의 수를 늘리는 것보다, 미혼·기혼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서로의 삶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더 본질적인 과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 교회가 미혼의 삶 역시 신앙 안에서 의미 있고,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적극적으로 선포하며, 다양한 가족과 1인 가구를 포용하는 공동체로 나아갈 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진정한 연합과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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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후보를 뽑는 선거가 되자.
윤석열 대통령 파면으로 인한 21대 대통령 보궐선거가 6월 3일로 정해졌다. 선거에 관심을 갖고 투표에 적극 참여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책무이다. 나의 투표권 행사를 위해 우리 현실의 정치, 사회, 경제가 성경의 원리에 맞는지를 평소에도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라의 주권자인 국민이 나랏일에 무관심할 수는 없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마6:10)기도하며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투표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우리의 투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력을 바르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선거는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딤전2:2)을 위한 민주주의의 척도다. 올바른 선거는 한 국가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킴은 물론 경제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선거가정치적 제도지만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파급력은 엄청나다. 역사는 선거가 바꾼다. 선거의 주인공은 유권자다. 깨어 있는 유권자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국가의 부(富)를 키운다. 정의, 법치, 자유, 배려 등 사회의 미덕이 자라나는 토양도 결국 유권자가 가꾼다. 단순히 당선을 위해 외쳐대는 구호, 국가보다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정책, 국가의 지속적 번영을 해치는 현혹적 수사 등을 구별하는 혜안을 갖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유권자가 자신들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대중의 어리석음’이라는 함정에 빠진다. 다수결이 민주주의를 이끄는 기본원리지만 다수결이 중요한 진짜 이유는 수의 많음보다는 다양함 때문이다. 현혹적 구호에 매몰된 다수는 자칫 국가의 백년대계를 흔든다. 또한 공명한 선거는 또 하나의 과제다. 자유 보통 비밀 직접이라는 선거의 4대 원칙이 지켜지는 공정한 룰을 만드는 것은 정치권의 몫이지만 우리는 6·3대선을 대한민국을 정치·경제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깨끗하고 공명한 선거는 대한민국의 얼굴이기 때문에 기독인들의 바른 자세가 중요하다. 이를 위하여 기도하자.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다(롬13:1). 하나님은 국가와 가정, 그리고 교회를 세우셨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태어날 때 한 가정에 속하게 되며 동시에 한 국가에 속한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던 시대에, 사도 바울은 로마에 굴복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세상 권세도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하지만 육신이 사는 동안에는 국가의 법과 제도와 관원들을 거스리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우리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 한다. 따라서 대선 후보자들이 하나님의 통치 원리와 방법에 얼마나 합당한가를 살펴봐야 하겠다. 만약 자신의 이익이나, 집단주의에 매몰되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후보를 선택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길은 오직 올바른 투표밖에 없다. 이념과 우상에 매몰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책임질 후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판단하여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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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이 세상에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자.
‘2025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가 4월 20일 오후 4시 서울 강남구 광림교회에서 개최됐다. 특별히 올해는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오전 인천 제물포항에 언더우드·아펜젤러 선교사가 공식 입항해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가 시작된 지 140주년을 맞는 해다.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담아, 한국 71개 교단과 전국 17개 지역 기독교연합회도 동일한 주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 정신을 되세겼다. 부활절(復活節)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부터 3일째 되는 주의 첫날인 일요일에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최대 축일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느 때부터 인가 절기로서 관습화되고 형식화 되고 있다는 우려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교회사에서 부활절이 언제냐는 문제를 두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간의 논쟁이 계속되다가 서기 325년 니케아회의에서 춘분이 지난 뒤 최초의 보름달이 지난 첫 주일을 부활절로 지키기로 결정하여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으나 부활의 의미가 절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짜는 성경에 기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지키는 성탄절인12월 25일은 예수님 탄생하신 날과는 상관없는 날이다. 성경에 그런 기록이 없다. 그러나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달력으로 니산월 정월 14일,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사흘 후에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달력 니산월 14일의 3일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양력으로는 3월 하순에서 4월 초에 항상 연결이 된다. 그래서 이때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때가 확실하다. 바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봄을 영어로 'SPRING'이라고 그러는데 그 의미는 ‘확 튀어 오른다’ 즉 봄에는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이기 때문에 'SPRING'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자연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그 부활을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이만큼 확실한 사실이기에 이를 증거 해야 한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인이 믿는 모든 것이 허사(虛事)가 된다. 우리의 구원도 헛것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은 역대의 모든 사람들의 삶도 헛것이 된다(고전15:17-19).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있어야 우리의 믿는 모든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구약에 예수님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있었고, 그분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더욱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사도들의 행적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이 잡힐 당시 뿔뿔이 도망치던 그 비겁자들이 부활을 직접 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의 믿음을 일상화해야 한다. 우리는부활절을 맞아 절기로서 외형적인 모습에 치중하기보다는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 안에서 ‘하나 됨’으로 많은 영혼들이 부활을 체험하여 부활의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세상에 증거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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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돌봄을 위한 사역에 매진하자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심각한 상황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하 상황에서 기독교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란 성경말씀을 기억하고 출산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성도들에게 출산을 하는 것을 권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사람들이 출산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여건을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아동돌봄이다. 이러한 아동돌봄에 교회가 앞장을 서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사역에 동참을 하고 있다. 특히 학생들의 학교 후부터 부모들의 퇴근까지의 돌봄공백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자식들을 학원으로 보내는 부모들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2021년에 발표된 교회의 돌봄사역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둘째 출산 계획이 없는 워킹맘 중 41%가 돌봄 문제가 해결된다면 둘째 출산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교회가 아동돌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큰 이유이다.동일한 조사에서 교회 운영의 돌봄기관 이용 의향률을 보면 기독교인 어머니는 84%가 의향률을 밝혔다. 그리고 비기독교인 어머니도 29%가 이용을 원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교회가 이러한 사역을 해야할 필요성이 보인다. 꼭 출산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교회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섬길 필요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야 한다. 또 많은 성도와 시민들이 이러한 부분에 필요를 느낀다. 교회가 이러한 필요를 체움으로써 사랑을 흘려내보낼 필요가 절실하다. 위 조사에서 돌봄 사역을 하지 않는 목회자 중 앞으로 돌봄 사역을 할 의향이 있는 목회자는 74%에 달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돌봄사역에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돌봄사역은 작은교회부터 큰교회까지 모든 교회가 할 수 있는 사역이다. 한국교회가 돌봄사역을 하기 원하는 교회들이 사역을 잘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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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정책제안에 힘쓰자
- 디가오는 6월 3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등 기독교단체들이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정책을 제시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의 경우는 2012년 치려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부터 이러한 운동을 벌여왔다. 지난 2022년 대선에서는 한국교회총연합과 함께 10대 공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에큐메니컬 성향의 단체에서도 기독교대선행동이라는 단체를 출범하면서 탄소중립 구현과 한반도 평화협정등을 제시한 바 있다. 정치인들에게 기독교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책무 중 하나이다. 기독교적인 정책을 정치인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이 나라에 기독교세계관을 반영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정책은 기독교인뿐 아닌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다. 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는 지난 2022년 대선에서 초저출산 극복정책으로 아동돌봄청을 신설해야한다고 했으며 이외에도 재난상황을 대비한 민관위기 관리시스탬 구축과 유사종교 피해방지를 위한 법률제정 등의 정책들이 있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일반시민들에게 큰 유익이 될 수 있는 정책들이다. 저출산 문제의 경우 국가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며, 재난상황의 극복또한 모든 시민에게 필요한 사실이다. 유사종교로 인해 피해를 보는 시민들을 구제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정책들이 일반 시민들에게도 큰 유익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차별금지법의 제정과 같은 악법반대 운동을 활발히 펼쳐왔다. 이제는 악법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좋은 법안과 정책등을 제시할 때이다. 그리고 이번 선거는 그러한 법안과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좋은 계기이다. 이러한 정책제안의 시간이 이번 선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편화가 되어서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해 모든 시민이 유익이 될 수 있는 정책과 법안을 제사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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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정책제안에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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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믿음’의 사역에 매진하자.
- 한국교회는 5월 5일 어린이날과 함께 어린이 주일을 지키고 있다. 미국에서는 1880년부터 예배당을 꽃으로 장식하고 '샤론의 꽃, 어린이'라는 제목으로 어린이 예배를 드린 데에서 유래하여 '꽃주일'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방정환, 마해송 등의 어린이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선각자들이 1923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해 어린이 인격보호와 바른 성장에 대한 어른들의 관심과 각성을 촉구하는 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1927년부터는 5월 첫째 주일로, 그리고 1946년에는 오늘날과 같은 5월 5일로 변경되었고, 1957년에는 어린이 헌장이 제정, 공포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교회들도 초창기에는 미국에서 처음 제정된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켜오다가 1956년부터 5월 첫째 주를 어린이 주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린이 주일이라는 절기도 성경에는 없지만 어린이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주일로 지켜지고 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에 대하여 귀하게 여기시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어린아이에 대한 특별한 가르침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잠22:6)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회초리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회초리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23:13-14). 그리고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에게 안식을 주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29:17). 이것은 교회는 물론 부모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다. 따라서 교회는 어린이를 위한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방법으로 디모데의 믿음과 유산을 가르치는 사역이 되도록 하자.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에 속에 있더니 네 속에 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5). 사도 바울은 육신적으로 디모데가 아들이 아니지만, 디모데가 신앙 성장의 합당한 인격을 갖추는데 바울이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딤전1:2)이라고 부르고 있다. 디모데의 거짓이 없는 믿음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던 믿음이 전수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올바른 가정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디모데의 가정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가정은 신앙 교육의 장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유지 발전시키는 일차 기관이며 교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자녀를 하나님의 진리로 양육하는 근본적인 책임은 가정에 있으며 교회 교육과 학교 또는 세속 사회의 교육 간에 생기는 갈등을 신앙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참된 기반이 된다. 뿐만 아니라 자녀를 신앙으로 올바르게 교육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복음 전파 사역과 유업을 물려주는 일과도 깊은 연관을 갖는다(신6:4-9). 현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가 참믿음을 가진 차세대에 대한 교육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어린이 주일을 한 번 지키고끝내는 것이 아니라 평생교육의 출발로서 교회학교의 전문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행함으로써 ‘믿음’의 사역이 부흥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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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믿음’의 사역에 매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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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기혼 연대하는 공동체를 세우자
- 작년 기준, 만 19~34세 청년 5명 중 4명이 미혼으로, 미혼율이 80%를 넘었다는 통계는 한국 사회의 결혼·가정에 대한 인식 변화와 현실적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독교인 역시 예외가 아니다. 2023년 조사에서 전체 기독교인 중 미혼 비율은 40.5%에 달했다. 교회 내 싱글 신자들의 수와 연령이 계속 증가하는 것은 이제 뚜렷한 흐름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경제적 부담, 주거난,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결혼·출산에 대한 가치관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결혼이 더 이상 ‘필수’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가족과 1인 가구가 급증하고 있다. 이는 교회가 전통적 가정 중심의 사역과 인식에서 벗어나, 미혼 신자들을 적극적으로 품고 새로운 공동체의 길을 모색해야 함을 시사한다. 교회는 미혼을 ‘문제’로 여기거나, 결혼만이 신앙적 성숙의 완성이라는 시각을 지양해야 한다. 오히려 사도 바울이 강조했듯, 결혼과 미혼 모두 각자의 소명과 가치를 지닌 삶의 방식임을 인정해야 한다. 미혼 신자들이 교회 공동체에서 소외되지 않고, 자신의 은사와 삶을 온전히 나누며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미혼 성도들이 주체적으로 신앙과 삶을 나눌 수 있는 소그룹, 멘토링, 사역의 기회를 확대하고, 결혼과 출산만을 강조하는 지원정책에서 벗어나 다양한 삶의 형태를 존중하는 포용적 사역이 필요하다. 또한 교회는 ‘올바른 가정’의 기준을 결혼 여부나 자녀 유무로 한정하지 않고, 신앙 안에서 서로를 돌보고 연합하는 공동체로 확장해야 한다. 부부의 수를 늘리는 것보다, 미혼·기혼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서로의 삶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더 본질적인 과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 교회가 미혼의 삶 역시 신앙 안에서 의미 있고,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적극적으로 선포하며, 다양한 가족과 1인 가구를 포용하는 공동체로 나아갈 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진정한 연합과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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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후보를 뽑는 선거가 되자.
- 윤석열 대통령 파면으로 인한 21대 대통령 보궐선거가 6월 3일로 정해졌다. 선거에 관심을 갖고 투표에 적극 참여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책무이다. 나의 투표권 행사를 위해 우리 현실의 정치, 사회, 경제가 성경의 원리에 맞는지를 평소에도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라의 주권자인 국민이 나랏일에 무관심할 수는 없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마6:10)기도하며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투표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우리의 투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력을 바르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선거는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딤전2:2)을 위한 민주주의의 척도다. 올바른 선거는 한 국가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킴은 물론 경제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선거가정치적 제도지만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파급력은 엄청나다. 역사는 선거가 바꾼다. 선거의 주인공은 유권자다. 깨어 있는 유권자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국가의 부(富)를 키운다. 정의, 법치, 자유, 배려 등 사회의 미덕이 자라나는 토양도 결국 유권자가 가꾼다. 단순히 당선을 위해 외쳐대는 구호, 국가보다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정책, 국가의 지속적 번영을 해치는 현혹적 수사 등을 구별하는 혜안을 갖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유권자가 자신들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대중의 어리석음’이라는 함정에 빠진다. 다수결이 민주주의를 이끄는 기본원리지만 다수결이 중요한 진짜 이유는 수의 많음보다는 다양함 때문이다. 현혹적 구호에 매몰된 다수는 자칫 국가의 백년대계를 흔든다. 또한 공명한 선거는 또 하나의 과제다. 자유 보통 비밀 직접이라는 선거의 4대 원칙이 지켜지는 공정한 룰을 만드는 것은 정치권의 몫이지만 우리는 6·3대선을 대한민국을 정치·경제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깨끗하고 공명한 선거는 대한민국의 얼굴이기 때문에 기독인들의 바른 자세가 중요하다. 이를 위하여 기도하자.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다(롬13:1). 하나님은 국가와 가정, 그리고 교회를 세우셨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태어날 때 한 가정에 속하게 되며 동시에 한 국가에 속한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던 시대에, 사도 바울은 로마에 굴복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세상 권세도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하지만 육신이 사는 동안에는 국가의 법과 제도와 관원들을 거스리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우리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 한다. 따라서 대선 후보자들이 하나님의 통치 원리와 방법에 얼마나 합당한가를 살펴봐야 하겠다. 만약 자신의 이익이나, 집단주의에 매몰되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후보를 선택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길은 오직 올바른 투표밖에 없다. 이념과 우상에 매몰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책임질 후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판단하여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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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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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후보를 뽑는 선거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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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이 세상에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자.
- ‘2025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가 4월 20일 오후 4시 서울 강남구 광림교회에서 개최됐다. 특별히 올해는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오전 인천 제물포항에 언더우드·아펜젤러 선교사가 공식 입항해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가 시작된 지 140주년을 맞는 해다.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담아, 한국 71개 교단과 전국 17개 지역 기독교연합회도 동일한 주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 정신을 되세겼다. 부활절(復活節)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부터 3일째 되는 주의 첫날인 일요일에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최대 축일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느 때부터 인가 절기로서 관습화되고 형식화 되고 있다는 우려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교회사에서 부활절이 언제냐는 문제를 두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간의 논쟁이 계속되다가 서기 325년 니케아회의에서 춘분이 지난 뒤 최초의 보름달이 지난 첫 주일을 부활절로 지키기로 결정하여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으나 부활의 의미가 절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짜는 성경에 기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지키는 성탄절인12월 25일은 예수님 탄생하신 날과는 상관없는 날이다. 성경에 그런 기록이 없다. 그러나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달력으로 니산월 정월 14일,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사흘 후에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달력 니산월 14일의 3일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양력으로는 3월 하순에서 4월 초에 항상 연결이 된다. 그래서 이때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때가 확실하다. 바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봄을 영어로 'SPRING'이라고 그러는데 그 의미는 ‘확 튀어 오른다’ 즉 봄에는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이기 때문에 'SPRING'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자연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그 부활을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이만큼 확실한 사실이기에 이를 증거 해야 한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인이 믿는 모든 것이 허사(虛事)가 된다. 우리의 구원도 헛것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은 역대의 모든 사람들의 삶도 헛것이 된다(고전15:17-19).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있어야 우리의 믿는 모든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구약에 예수님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있었고, 그분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더욱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사도들의 행적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이 잡힐 당시 뿔뿔이 도망치던 그 비겁자들이 부활을 직접 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의 믿음을 일상화해야 한다. 우리는부활절을 맞아 절기로서 외형적인 모습에 치중하기보다는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 안에서 ‘하나 됨’으로 많은 영혼들이 부활을 체험하여 부활의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세상에 증거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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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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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이 세상에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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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돌봄을 위한 사역에 매진하자
-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심각한 상황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하 상황에서 기독교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란 성경말씀을 기억하고 출산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성도들에게 출산을 하는 것을 권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사람들이 출산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여건을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아동돌봄이다. 이러한 아동돌봄에 교회가 앞장을 서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사역에 동참을 하고 있다. 특히 학생들의 학교 후부터 부모들의 퇴근까지의 돌봄공백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자식들을 학원으로 보내는 부모들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2021년에 발표된 교회의 돌봄사역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둘째 출산 계획이 없는 워킹맘 중 41%가 돌봄 문제가 해결된다면 둘째 출산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교회가 아동돌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큰 이유이다.동일한 조사에서 교회 운영의 돌봄기관 이용 의향률을 보면 기독교인 어머니는 84%가 의향률을 밝혔다. 그리고 비기독교인 어머니도 29%가 이용을 원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교회가 이러한 사역을 해야할 필요성이 보인다. 꼭 출산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교회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섬길 필요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야 한다. 또 많은 성도와 시민들이 이러한 부분에 필요를 느낀다. 교회가 이러한 필요를 체움으로써 사랑을 흘려내보낼 필요가 절실하다. 위 조사에서 돌봄 사역을 하지 않는 목회자 중 앞으로 돌봄 사역을 할 의향이 있는 목회자는 74%에 달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돌봄사역에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돌봄사역은 작은교회부터 큰교회까지 모든 교회가 할 수 있는 사역이다. 한국교회가 돌봄사역을 하기 원하는 교회들이 사역을 잘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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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돌봄을 위한 사역에 매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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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무임승차가 ‘양심’인가?
-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 오모씨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9대4로 정당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가 병역거부 사유로 내세운 신념이 ‘양심적’이라며 병역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판결하면서 묵묵히 나라를 위해 군복무를 하며 헌신했던 일반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특히 14년만에 나온 이번 판결로 인해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문의도 온라인상에서 급증하고 있다. 현재 법원에서 심리중인 병역거부자 대부분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다. 대체복무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서 이들에 대해 사실상 면죄부를 주면서 여호와의 증인 교인증은 사실상 병역 면탈의 ‘허가증’이 됐다. 여호와의 증인 한국지부는 논평에서 대법원의 판결을 환영한다며 대한민국 인권 의식의 성숙함을 보여준 역사적인 판결로서 오래 기억될 것이라고 자평하는 등 나라를 위한 헌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국가안보의 혜택을 그대로 누리겠다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말하는 소위 양심을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대법원은 “피고인이 소명자료를 제시하면 검사는 자료의 신빙성을 탄핵하는 방법으로 진정한 양심의 부(不)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밝혔다. 즉 검사가 양심을 판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 종교 신자가 아니라도 신념을 근거로 병역을 거부한 사람은 어떻게 진정성을 가릴 것인가에 대한 대안도 마땅치 않다. 온라인에서는 이들에게 휴전선 일대의 지뢰제거 임무에 투입하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진짜 평화를 위해 집총을 거부하는 양심적 평화주의자라면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지뢰제거나 위험임무에 먼저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온라인상의 주장이지만 실제로 이들은 국방과 관련된 분야에서의 복무는 전면 거부하고 있다. 순수 민간단체에서만 ‘봉사’하고 싶다는 것이다. 자칭 ‘양심적’이라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국가안보에 무임승차 하는 모습이 어디가 ‘양심적’인지 되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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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무임승차가 ‘양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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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가 정의의 주인 된 모습 ‘통탄’
- 국권이 침탈되어 왕조가 와해된 유다사회에서 민족을 견인하는 것은 성전과 율법체계였다. 대제사장이 국가원수의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비참하고 침통한 시대였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성전 체계의 탈선과 율법에 있어서 법 제정 당시의 법 정신이 실종되어 왜곡 현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제사장들은 민중의 죄를 먹고 사는 자들이다. 제사물의 등급과 양은 죄의 심각성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민중이 범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제사장들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구조였다. 율법은 울타리 율법의 추가로 분량이 비대해지고 방대해졌다. 율법준수 만이 구원의 혜택을 받는다는 당시의 시대정신은 무식한 민초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사항이었다. 율법을 준수하려면 알아야 지키는데 무식하면 못 지키게 된다. 따라서 유다사회는 “무식하면 구원 못 받는다”는 등식의 명제가 보편화 된 사회였다. 이러한 절망감이 일상이 된 민초들에게 상식을 전복시키는 예수는 희망이 된 동시에 보수 세력에게는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헤롯당과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손을 잡았다. 그들은 앙숙이었으나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재야인사 제거라는 공통분모가 생겼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은 대형 소요 사태가 발생할 시에는 분봉왕의 경질·교체를 단행했다. 따라서 헤롯 정권은 촌 동네 출신의 예수를 요주의 인물로 규정하고 요원들을 보내 계속 추적해 왔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성전과 율법체계를 기반으로 먹고 사는 자들 이다. 자기들의 가면을 벗기고 종교적 영향력을 무력화시키는 갈릴리 청년을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헤롯당과 바리새파의 결탁으로 예수 제거 음모는 시작되었고 얼마 가지 않아 예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가 부활했다. 예수 당시의 유다 사회는 불의가 정의의 주인된 사회였다. 완전한 세상은 지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작금의 대형교회들을 보면 유다 사회와 다를 바 없는 불의가 정의의 주인 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제발 바로 서는 한국 교회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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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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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가 정의의 주인 된 모습 ‘통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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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은 회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의 ‘아우라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로망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아우라(Aura)’라는 용어는 독일의 문학비평가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예술이론에서 유래됐다. ‘아우라’라는 용어를 ‘구별’이라는 기독교적 정서를 담은 용어로 호환(互換)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에게 아우라가 있기를 요청한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과 구별된 자이기 때문이다. 구별된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나 거기에는 선행적으로 전제되고 감수해야 될 조건이 발생하며, 불편함과 분골쇄신(粉骨碎身)이 동반된다. 즉 그것은 인간이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회개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과오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왜곡된 과거의 습관과 결별하는 데는 인격적 노력이 필수적이다. 과도기의 예언자 세례요한은 임박한 현실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염두에 두고 회개라는 개념을 구체화했다. 당시에 얼마나 구원에 대한 열망이 보편화됐는지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왔다는 사실로 이를 알 수 있다. 세례요한은 기성정치·종교권에 독설을 양산하는 재야종교지도자였으며, 그들은 유대사회 민중들의 의식을 재편하고 관리하는 기득권이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긍심 하나로 외세 지배의 수치스러움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는 선언을 통해 유대인들의 ‘배타적 선민사상’을 부정한다. 인간은 선천적 회개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인박히고 습관화되고 체질화된 것을 청산해야 되는 절실한 불편함이 예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과정이 전제되지 않으면 주님 안에서의 ‘아우라(Aura)’는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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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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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은 회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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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에 동참하자
- 지난달 28일 한국교회일천만기도대성회가 마무리되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회개와 회복이라는 공통의 과제를 제시했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이제야 제시한 것은 어쩌면 늦었다고도 할 수 있다. 분열된 한국교회와 비판받는 기독교 등 사회적 환경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시기에 이러한 한국교회가 하나되는 장을 마련했다는 것은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여 문화·교육·사회 등 대한민국을 근대화시키고 한국사회 전반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해 왔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관들이 분열과 이단논쟁, 교권싸움 등으로 분열되면서 매일 끊임없이 터지는 사건 속에서 한국교회가 하나될 수 있겠는가에 대해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도 회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교회는 이번 성회를 통해 더욱 하나되는 일에 힘쓰고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주님의 명령이자 시대적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사명을 등한시한다면 더 이상의 희망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나라와 민족을 부강하게 만들었던 기독교의 현재는 위태롭기 그지없다. 추락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고 회복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모두 함께 앞장서고 밀어주며 하나가 되어야 한다. 모든 교회와 기독교단체, 연합기관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이것이 전제가 되어야만 교회와 사회가 함께 발전하며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연합 기관이 하나로 합쳐지기 어려우면 연합기관 전체 대표를 돌아가면서 기관이 맡고 대 사회적 목소리에 대표성을 인정하여 창구로 삼으면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한 목소리로 의논하여 통로가 하나로 정리되면 대 사회적 위상도 찾게 될 것이다.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의지가 문제다. 앞으로 각 교단과 연합기관이 연합하여 한국교회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시도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한국교회만의 과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과제임을 깨닫고 동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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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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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에 동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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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을 그만 실망시키세요!
- 대형교회들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기여한 바도 크지만 일부 대형교회들은 교회의 역기능으로 인해 성도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도는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이다. 요즘 명성교회 교인들이 하남시 성안교회로 많이 이동한다고 한다. 이들 중에는 광성교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은혜스럽다며 명성교회로 이동한 교인들도 있다. 광성교회에서 명성교회로 그리고 다시 성안교회로 이동한 교인들도 있다는 말이다. 이들 교인들에게 목회자는 상처를 주는 존재(?)다. 주님의 양을 잘 인도해야 할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교인들을 이동하게 만든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그리고 일부 교인들은 신앙생활에 매력을 잃고 아직 출석은 하고 있으나 역동성을 상실한 교인들도 있다. 어느 교회는 목회 대물림으로, 어느 교회는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갈등으로 등등 이유도 다양하다.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회개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일반인의 사는 방식이 전혀 다를 바가 없어서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에 우리는 목회자의 자격 요건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 적으로도 실력 있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이 시대는 더욱 그런 인재를 요구하고 있다. 더 이상 교회가 문제 집단으로 인식되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광교회는 이명증서 없는 타 교인은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교회의 사명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해서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지 타 교인이 이동해 부흥하는 곳이 참다운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도들을 그만 실망시켜야 한다. 목회자들이 각성하고 회개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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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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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을 그만 실망시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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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을 빙자한 자해는 멈춰야 한다
- 종교개혁기념일은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 논제를 공포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를 비판했고 교황의 권위보다는 오직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다.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 이신칭의를 주장하여 종교 개혁을 시작한 역사적인 날이다. 종교개혁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선언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를 추구하는 운동의 결과가 기독교(개신교)의 시작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상은 어떠한가? 지난 18일 문재인대통령은 교황청을 방문하여 교황을 면담하면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방북초청 의사를 전달했다. 어느 종교보다 대한민국의 근대화에 기여했으며, 3·1만세운동과 독립운동, 6·25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대한민국의 재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기독교가 ‘평화의 사도’로 불리는 가톨릭 교황의 권위에 기대어 우리민족의 통일 염원을 부탁하고 있는 실정이다. 501년 전 루터가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며 교황보다 성경을 강조하며 개혁정신으로 탄생했던 기독교의 모습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현실이다. 북한동포의 자유와 신앙을 위해 헌신했던 기독교의 역할은 사라지고 한국교회는 세속화와 부패의 이미지로 덧칠되어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이러한 기독교의 영향력 상실과 사회적 이슈화의 배경에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자리잡고 있다. 교계 지도자들이 일반 언론을 통해 교회의 문제를 폭로하고 비판하면서 교회개혁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자정능력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교회의 갱신을 요구하기보다 기독교의 치부를 드러내며 비판하기만에 열중하는 언론과 여론의 뭇매에 한국교회를 고스란히 내어주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제 새로워져야 한다. 교회의 문제는 교회에서 해결하는 것이 성경적인 방법이다. 교회 밖에서 교회를 비판할수록 타 종교는 반사이익을 얻고 기독교는 자멸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불신만 초래하고 영향력을 실추시키는 개혁을 빙자한 자해는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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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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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을 빙자한 자해는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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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을 위한 연대는 독이다
- 한국교회가 반 기독교세력의 무차별적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일명 ‘가짜뉴스’로 촉발된 기독교에 대한 전방위적 공격은 사실 여부를 떠나 기독교 이미지를 크게 훼손시키고 있다. 오늘날 난무하는 ‘가짜뉴스’란 프레임으로 기독교 전체를 부도덕한 단체로 몰아가려는 시도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기독교 이념과 반대되는 세력들은 자신들이 정치적이나 사회적으로 소수의 위치에 놓여 있거나 역량이 낮을 때 여론을 이용하여 세력을 모으고 기독교를 고립시키는데 앞장서 왔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이용하여 기독교를 공격하고 있는 두 집단은 이슬람과 동성애 세력이다. 이들은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미지 조작에 열을 올린다. 실제로 자신들이 저지르는 부도덕성과 범죄성을 숨기고 선한 이미지를 부각시켜 국민적 동정론을 일으킨다. 현재 한국사회는 누구나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유토피아적 사상이 정의로 인식되고 있어 이를 반대하는 집단이나 세력은 적폐로 규정되어 사회적 탄압에 직면해야 한다. 문제는 기독교를 공격할 때 목표를 고립시키기 위해 이해관계가 같은 세력과 정치적인 연대를 하는데 상대편이 대결과 분열로 자멸할 때까지 지속적인 공격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들 뿐 아니라 타 종교들도 반 기독교세력들을 규합하여 고도화된 언어 선동으로 기독교를 분열시키고 있다. 분열되어 싸우는 한쪽 편을 들면서 대외적으로는 기독교의 정상화를 위한 연대임을 외치지만 이들은 기독교 정상화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분열과 가치관의 혼란을 일으키고 의도적으로 기독교와 상반되게 자신들의 이미지를 선하게 포장한다. 이처럼 반 기독교세력의 전략·전술은 지능적이다. 일반 국민들은 일부 기독교 단체, 혹은 목사 개인의 향한 비난을 기독교 전체로 확대시키는 선동에 상당수가 넘어가 부화뇌동하고 있다. 진정 한국교회를 위한 길이 어디인지 방향타를 잃은 배처럼 표류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더 이상 외부세력에 흔들려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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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을 위한 연대는 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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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일부 교회, 역기능 노출 심각
- 마태복음서는 제도화된 교회에 특정화된 복음서다. ‘교회의 제도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의 직제가 완성된 시기로서 교회 내부의 구조적 발전을 뜻한다. 제도화를 통해 교회의 체계화와 모양새를 구비했다는 순기능이 있는 반면, 기독교에 우호적인 사회 분위기로 인해 신앙의 진지함과 열심이 해이해졌다는 역기능도 있었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자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증명할 방법이 없어져 공황상태에 빠졌다. 기존에는 ‘박해받음’, ‘순교’라는 상황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가시적이고 구체적으로 증명해 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구도자들은 신앙을 증명하고자 ‘봉쇄수도원’에 들어가 금욕 속에서 노동과 말씀, 기도에 증진했다. 그러나 산 아래의 교회는 비단 옷과 산해진미에 취해 가기 시작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는 40일 금식 후 사탄의 제의를 물리쳤다. 사탄은 풍요와 영광의 삶을 제의했다. 사탄은 떡 섭취·고공낙하·경배 받음으로 상징되는 물질·명예·권력을 제의했다. 인간의 물질에 대한 욕구는 끝이 없다. 물질이 충족되면 명예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든 질서를 자기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해 권력을 염원하게 된다. 마귀의 첫 제안은 물질에 관한 것이다. 물질은 인간의 편리·안락·용이함을 담보한다. 물질적 토대가 너무 완벽하면 부대상황으로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이론적으로 배제된다. 둘째는 과시욕으로 대변되는 명예욕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물질을 충족하고 나면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대중적 확신을 받고 싶어 한다. 신자는 자신에 대한 인증 샷을 하나님께만 올리면 된다. 셋째, 인간의 최종적 욕망은 권력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섬김’을 제의하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며 사셨다. 교회의 그릇됨은 개개인의 안이함과 신앙적 일탈이 조립되어 만들어 진다. 예수께서는 사탄이 제의한 물질·명예·권력이라는 것이 교회를 이루는 치명적 부품이 되지 않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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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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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일부 교회, 역기능 노출 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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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시스템의 강화로 바른 인물 천거해야
- 문재인 대통령은 유은혜 후보를 교육부 장관 겸 사회부총리로 임명했다. 새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우려한 대로 난항을 거듭했으며 야당이 보고서 채택을 거부하고, 특정 후보자의 사퇴를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통령은 유은혜 후보자를 임명했다. 이 같은 현상은 과거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상황이라 낯설지 않다. 순탄하게 진행된 것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청문회는 영어로 히어링(hearing)이지만 대체적으로 청문위원들의 공격과 추궁성 질문이 앞선다. 후보자의 정책 소신을 듣는 분위기가 아니다. 청문회장은 여야 정치공방의 장으로 변질된 지 이미 오래다. 시비가 될 법한 인사를 굳이 후보자로 낙점하는 인사검증의 침묵, 청문회 자리를 지키고 있는 후보자의 대범함,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풍파를 일으켜왔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유 장관이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한 점에 관해서는 “현재 국회 인사청문회 절차에서 야당이 반대한 것이 일반 국민의 여론이라고 하긴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신임 유 장관은 위장전입에 아들 병역문제논란, 피감기관사무실 임대로 인한 갑질 논란, 남편 동업자의 비서관 채용 등 여러 가지 의혹을 받았다. 도덕성과 자질 문제가 지적되었다. 유 신임 장관은 문 정부 들어서 인사청문경과보고서 없이 임명된 네 번째 국무위원이 되었다. 도덕성이 요구되는 고위공직 후보자들의 의혹과 범법행위가 사과 한마디로 넘어가는 일이 계속적으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바른 인재 발탁은 백년대계의 기본이다. 대통령은 앞으로라도 인사 시스템을 강화하고,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도덕성을 갖춘 자를 찾아 나서야 한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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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시스템의 강화로 바른 인물 천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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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회개, 변화의 계기로
- 오는 28일 한국교회가 1938년 9월 9일 신사참배를 결의한 죄악에 대해 참회하는 회개기도회가 전국적으로 열린다.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 시절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 1935년을 기점으로 조선총독부의 강경책에 신사참배 용인파와 반대파로 분열되면서 큰 갈등을 겪었다. 조선총독부는 기독교계 학교에 보급된 신사참배를 교회로까지 확장시키기 위하여 압력을 행사했고,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결의를 계기로 각 교파의 목회자들이 신사참배에 나서면서 급격히 황민화 정책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기철목사와, 손양원목사 등이 순교 당하거나 모진 고초를 겪었다. 또 신사참배 거부로 2백여개 교회가 폐쇄되었고 50여명이 순교하는 등 한국교회는 큰 상처를 입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때마다 이 문제에 관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한국교회에 용서를 구하는 기회를 가져왔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과를 고백하고 잘못을 돌이키는 일이 연례적으로 반복되면서 이에 대한 신중한 접근이 요구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기도회가 연례행사처럼 치러질 경우 과거 일제 강점기에 신앙의 선배들이 저질렀던 죄를 후대에 정죄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들 뿐 아니라 교인들도 과거로 돌아가 일제의 탄압 속에 살았다면 과연 생명을 걸고 참배를 거부할 수 있을까? 실제로 신사참배는 기독교뿐 아니라 불교와 천주교 등 다른 종교인들도 함께 했으나 이들은 지금까지 이들 종교 지도자들은 지금까지 제대로 뉘우치고 잘못했다 고백하는 종교지도자들의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킨 종교지도자들은 대부분 기독교에서 나왔음에도 이러한 회개운동으로 인해 안티 기독교 세력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기도회가 그동안의 회개기도회의 틀에서 벗어나서 한국교회를 하나로 묶는 변화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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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회개, 변화의 계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