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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순절 기간 ‘십자가의 도’를 실천하자.
       사순절(四旬節, Lent)기간이란 2025년 4월 20일 부활절로 부터 46일 전의 기간으로서 주일을 제외한 40일간(四旬)에 십자가의 고난을 체험하는 시간을 말한다. 그 의미는 부활절을 기다리면서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훈련의 시기이며,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로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사순절기간을 지키는 문제를 두고 찬•반의 양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순절을 거룩하게 지켜야 된다는 찬성측은 모든 교회의 오래된 일반적인 관행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반대측은 주로 미국의 거듭난 복음주의자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체험은 일정기간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일상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순절 기간을 특별하게 지키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사순절 기간이라도 ‘십자가의 도’(고전1:18)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영적성장을 지키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세상 끝날까지 전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책망하며 교회의 설립과 통합의 유일한 기반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먼저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그들의 결여된 영적 분별력으로 인해 미련한 것으로 취급되는 반면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이중성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지혜로 된 절대 유일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면 언제나 분열과 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든지 단점과 실수와 잘못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지나치게 믿거나 따르지 말고,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을 중심으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하며 그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자기 계획, 자기주장, 자기 고집, 자기 욕망, 자기 의지, 자기 이상, 자기 행복을 버려야 비로소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사순절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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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25
  • 캠퍼스 이단대책위한 활동에 앞장서자
     새학기를 맞이해 각 선교단체의 전도활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그런데 정통 기독교에 속한 선교단체가 이닌,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단체에서도 다양한 포교활동을 진행하고 있어 유의를 요망한다. 신천지 등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단체들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학생들에게 접근을 하고 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단들의 포교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도 고심해야 한다. 기독교대학들의 경우는 이단들이 교내에 포교를 할 수 없도록 막고 있다. 하지만 학교 밖에서 진행되는 포교에는 제지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법적으로 학교 밖에서의 활동은 막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기 때문에 학생들을 위한 교육이 활발하게 진행해 이단에 빠지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다. 각 교회에서는 매년 새로 입학하는 새내기를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해야 하며, 선교단체에서 사역시 교회의 감독도 필요하다.     기독교대학에 경우 교목실 등을 통해 이러한 교육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학생들이 참여하는 채플 등의 시간을 통해 이단의 위험성을 알려야 한다. 실제로 백석대학교의 경우 이단 경계주일을 정하고, 이단의 위험성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기독학생 연합회의 경우 SNS를 활용해 이단경계 활동하고 있다.       건강한 선교단체를 소개하는 일도 필요하다. 선교단체들의 연합체인 학원복음협의회는 안전한 선교단체의 목록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선교단체에서 학생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권면해야 한다.    이단에 대한 교육과 함께 같이가야하는 것은 올바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비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학생들에게 알려서 이단에 빠지지 않게 할 뿐 아니라 더 성숙한 신앙의 길로 가게 해야 한다. 대학생시기는 신앙에 전념할 수 있는 좋은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를 통해 학생들의 신앙이 더 성숙해질 수 있도록 한국교회의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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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25
  • 한국교회 신뢰회복을 위해 힘써야 한다.
         예장통합 ‘목회자윤리강령’(2011.10.29)을 보면 한국교회의 세속화의 모습을 밝히고 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못지않게 세속화되었다. 성경에 대한 무지, 강단의 세속화, 교권주의, 공명(功名)주의, 분파주의, 미신적 사고, 교회의 기업화, 성적(性的)부도덕, 목회자의 독선, 물신(物神)숭배 그리고 지나친 개인주의와 개교회주의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처음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랑의 본체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집을 만드시고, 우리가 사랑 안에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됨으로서 교리와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교회생활을 위해 우리 속사람 안으로 강건해야만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갖게 된다.    따라서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속화를 극복하고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상처받은 자들의 모임이기에 서로가 영혼의 상처를 치료하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내가 새롭게 되는 곳이다. 또한 교회의 위치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교회는 만물 곧 모든 창조물보다 최상위에 있다(엡1:22). 만물 안에는 세상이 있고 교회는 만물 위에 있기에 교회를 함부로 여겨서는 안된다. 더욱이 교회는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 곧 천사들을 가르치는 엄청난 곳이다.(엡3:10). 뿐만 아니라 교회는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게 한다(엡4:16).    세상에는 완전한 교회란 없다. 천국에 가서야 완전한 교회가 있다. 이 땅의 교회는 함께 지어져 가는 과정(엡2:22)에 있다. 그러기에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새 계명을 주신 것이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에서 바로 처음사랑을 잊었을 때에 모든 교회가 타락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 세속화는 바로 주님의 처음사랑을 떠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의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은혜와 진리’로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듬고, 끼리끼리 당을 짓지말며, 모든 교회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일(롬8:28)에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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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11
  • 다음 세대위한 ‘성경’으로 자리매김 - 『새한글성경』 출판에
       「새한글성경」의 번역은 2011년 9월 대한성서공회 이사회에서 "디지털 매체 시대의 젊은이들이 성경을 더 쉽게 이해하고 삶 속에 더 널리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경을 번역하기로 결의하면서 시작되었다. 2011년 12월 27일 '성경번역연구위원회'가 조직되어 1년 동안의 번역원칙 연구를 거쳐, 2012년 12월 14일부터 각 교단의 성서학자 36명이 함께 본문을 번역하고, 국어학자 3명이 이를 읽으면서 본문을 다듬었다. 2021년 11월에는 「새한글성경 신약과 시편」을 먼저 발행한 후, 2024년 12월에 「새한글성경」 완역본을 발간하게 되었다.    「새한글성경」은 ‘새한글’이란 책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한국어 어법에 어긋나지 않는 새롭고 참신한 용어와 방식’을 사용하고, ‘성경’으로서 ‘원문’에 최대한 충실한 번역이 되도록 했다.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어휘와 쉽고 간결한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원문의 문법적 구조뿐 아니라, 어원적 특성과 어순의 강조점까지 최대한 반영하여 원문에 가깝게 번역되었다. 그리하여 강단용인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이나 다른 역본들과 함께 읽을 때에 원문의 의미와 분위기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기존의 성경은 젊은이들이나 교회학교 학생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구절들이 많았다. 대부분 관념적인 언어나 구어체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젊은 세대들에게는 고전처럼 여겨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젊은이들의 삶 속에서 성경읽기기를 생활화하기에는 쉽지가 않았다. 이러한 기존 성경에서 벗어나 젊은이들과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필요한 성경을 발간한 것이다. 화면이 작은 스마트폰이나 다른 디지털매체로 성경을 읽을 때에도 이해에 어려움이 없도록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번역한 것이다. 원문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바탕으로 참신한 우리말 표현을 찾아 새롭게 번역 되었다. 이러한 것은 다음세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출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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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4
  • 선교140주년, 한국교회 연합에 매진하자
         올해는 아펜젤러선교사와 언더우드선교사가 조선에서 사역을 시작한지 140년이 되는 해이다. 14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해인만큼 다양한 곳에서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특히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과 합동 그리고 기독교대한감리회가 14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이 연합예배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행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선교 140주년을 맞이해서 우리는 초창기 선교사들의 정신을 기억해야 한다. 초창기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이권과 권리를 버리고 사역을 했다. 또 많은 선교사가 젊은 나이에 순교를 했다. 그들이 조선 땅에 교회를 세웠으며 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는 데는 선교사들의 공도 무시할 수가 없다. 특히 선교사들은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사역을 했다. 자신의 교단을 위해서 경쟁적으로 사역한 것이 아니라 조선 땅에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사역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선교사들의 정신을 토대로 사역해야 한다. 각자의 이권과 권리를 내려놓고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사역에 앞장서야 한다. 이러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서 사역해야 한다. 각자 다른교단과 교회에 속해 있을 지라도 하나님나라 백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신뢰도 하락은 오래된 일이 되고 있다. 한국교회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회의 분열이 사라져야 한다. 서로의 이권과 권리 때문에 수 많은 교단이 생겨났다. 같은 교단 안에서도 파벌로 나누어지는 경우도 있다. 여러가지 이유로 생기는 갈등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고 진정한 연합의 길로 나가야 한다. 특별한 행사에서 함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만남과 교류를 지속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교회는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나라를 위한 사역에 매진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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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4
  • [사설] 시국의 엄중함을 깨닫고 기도해야 한다 - 대통령의 비상계엄에 따른 탄핵과 수사에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의 느닷없는 비상계엄은 뇌란죄수사와 ‘탄핵’이란 절차로 심판을 받게 됐다. 12일 제2차 탄핵투표에서 가결되므로써 헌법재판소로 넘어가 심의절차에 들어 갔다. 이에 앞서 국회는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위기를 155분 뒤 계엄해제 결의안을 가결시켰다. 탄핵문제는 찬성과 반대로 국론이 분열된 가운데 가결된 것이다. 그리고 경찰과 검찰, 공수처에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제는 국민 모두가 겸허한 자세로 헌법재판소의 심의와 수사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국회의 신속한 대응으로 해제와 탄핵,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탄핵심의 등은 대한민국이 헌법에 기초한 법치국가임을 보여 주었다. 민주화이후 44년만에 선포된 비상계엄을 6시간 만에 해제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들의 견고하고 성숙한 민주주의 의식의 결과이다. 대한민국은 그동안 국민들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성취해온 나라로 평가해 왔다. 이번 대통령의 반헌법적 계엄시도가 6시간만에 끝난 것도,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헌신으로 다져진 민주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테러나 재난으로 인한 국가의 위기상황이 아닌 상태에서 단지 정치적인 이유로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은 누구나 납득하기 어렵다. 이는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를 지키라고 대통령으로 선출해준 국민들에 대한 배신행위이며, 헌법정신에 반하는 독재적인 발상이다. 정치적인 문제는 정치적으로 풀어야 하는 데도, 비상계엄으로 해결하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정치의 파트너인 야당과 대화하고 협치하려는 노력도 없이, 야당 때문이란 이유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한국교회는 대통령의 잘못된 판단을 직시하고 예언자적 사명에 따라 잘못된 현 시국을 바르게 이끌어가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잘못과 부패를 막고, 하나님의 공의를 확립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나라와 민족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가야 하고, 시국의 엄중함을 깨닫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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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16

실시간 사설 기사

  • 한국교회, 지금의 광야를 피하지 말아야
      예수는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 즉위 15년에 공적 신분으로의 행보를 시작했다. 첫 행보는 스프링 캠프를 통해 수세(水洗)시의 영광이라는 온탕과 광야에서의 시련이라는 냉탕을 경험하는 것이다. 예수는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고 몸소 실천했다. 세례요한 공동체는 유다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종교그룹이다. 그에게 세례를 받는 행위는 도래할 새 질서를 인정하고 대망한다는 비언어적 표현이다.   세례요한의 세례행위의 여파는 당시의 정치권과 종교 기득권층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였으며 염려의 진원지였다. 예수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겸허한 자세는 종교적 의례뿐 아니라 나중에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요한공동체와 예수공동체 간의 불협화음을 사전에 차단하는 의미도 있었다. 이러한 세심한 배려의 결과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를 경쟁 관계에 있는 종교그룹의 수장으로 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된다.   다른 보편적인 사람의 수세 시와는 달리 예수의 수세 시에는 하늘에서 예사롭지 않은 신비한 현상이 동반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를 신적 존재로 세상에 선포하며 공증하는 진지한 현상이다. 하나님은 공개된 장소에서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언급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왕정시대에 새로 즉위한 왕에게 하나님이 “너는 내 아들이라”하는 정형화된 표현을 통해서 정권의 정통성을 인준하는 사례를 연상하게 해준다. 그리고 하늘에서의 신비한 현상은 교의학의 삼위일체교리에 대한 성경적 토대를 제공해 주며, 천지가 소통한다는 뜻이다.   수세 후 예수는 혹독한 시련의 기간을 가진다. 그것은 광야 체험을 통해서 임박한 사역을 위한 담금질을 한다. 십자가상에서의 수난 만큼 광야에서의 시련은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 역사를 추적해보면 광야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는 곳이다. 내용성 있는 강인한 스프링 캠프를 경험한 자에게 고귀한 과제가 주어진다. 혹 우리가 지금 광야를 가고 있는가? 하나님께 도리어 감사를 드리자. 광야는 곧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지금의 광야를 피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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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14
  • ‘사랑’과 ‘감사’전하는 절기를 기대한다
      11월 셋째주일은 교회력으로 추수감사절이다. 많은 교회들이 이날을 기념하며 감사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일부교회들은 추수에 대한 본래 의미를 살리고자 추석 전후로 감사예배를 드리고 있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구원의 감격과 더불어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해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은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정신을 지키는 절기로 이어지고 있다. 여러 대내외적 여건으로 인해 현재 대한민국은 경제적 한파로 인해 감사절의 따스함을 느끼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러한 시기일수록 소외된 이웃들은 더욱 빈곤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부유한 사람들도 지갑을 여는데 인색하게 된다. 교회들도 추수감사절을 맞아 지난해만큼 감사헌금이 쌓일지 모르는 상황이다. 감사절의 헌금은 그래서 더욱 가치있게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에 대해 감사하며 우리주변의 이웃들을 다시한번 돌아보는 것이 감사절의 참된 의미에 부합하는 행동일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타 종교에 비해 우리사회의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데 앞장서왔다. 그러나 일부 교회와 개인들의 일탈로 인해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으며 나눔과 사랑의 실천이라는 고귀한 행동이 많이 위축됐다. 올해 추수감사절은 그래서 더욱 이웃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감사주일이 기독교 절기 중 하나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은혜를 이웃과 함께하겠다는 정신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가 전하는 감사의 기쁨이 우리사회를 따뜻하게 적실 때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힘이 더욱 빛이 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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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14
  • 안보 무임승차가 ‘양심’인가?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 오모씨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9대4로 정당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가 병역거부 사유로 내세운 신념이 ‘양심적’이라며 병역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판결하면서 묵묵히 나라를 위해 군복무를 하며 헌신했던 일반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특히 14년만에 나온 이번 판결로 인해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문의도 온라인상에서 급증하고 있다. 현재 법원에서 심리중인 병역거부자 대부분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다. 대체복무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서 이들에 대해 사실상 면죄부를 주면서 여호와의 증인 교인증은 사실상 병역 면탈의 ‘허가증’이 됐다.   여호와의 증인 한국지부는 논평에서 대법원의 판결을 환영한다며 대한민국 인권 의식의 성숙함을 보여준 역사적인 판결로서 오래 기억될 것이라고 자평하는 등 나라를 위한 헌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국가안보의 혜택을 그대로 누리겠다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말하는 소위 양심을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대법원은 “피고인이 소명자료를 제시하면 검사는 자료의 신빙성을 탄핵하는 방법으로 진정한 양심의 부(不)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밝혔다. 즉 검사가 양심을 판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 종교 신자가 아니라도 신념을 근거로 병역을 거부한 사람은 어떻게 진정성을 가릴 것인가에 대한 대안도 마땅치 않다. 온라인에서는 이들에게 휴전선 일대의 지뢰제거 임무에 투입하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진짜 평화를 위해 집총을 거부하는 양심적 평화주의자라면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지뢰제거나 위험임무에 먼저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온라인상의 주장이지만 실제로 이들은 국방과 관련된 분야에서의 복무는 전면 거부하고 있다. 순수 민간단체에서만 ‘봉사’하고 싶다는 것이다. 자칭 ‘양심적’이라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국가안보에 무임승차 하는 모습이 어디가 ‘양심적’인지 되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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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8-11-06
  • 불의가 정의의 주인 된 모습 ‘통탄’
      국권이 침탈되어 왕조가 와해된 유다사회에서 민족을 견인하는 것은 성전과 율법체계였다. 대제사장이 국가원수의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비참하고 침통한 시대였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성전 체계의 탈선과 율법에 있어서 법 제정 당시의 법 정신이 실종되어 왜곡 현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제사장들은 민중의 죄를 먹고 사는 자들이다. 제사물의 등급과 양은 죄의 심각성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민중이 범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제사장들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구조였다. 율법은 울타리 율법의 추가로 분량이 비대해지고 방대해졌다. 율법준수 만이 구원의 혜택을 받는다는 당시의 시대정신은 무식한 민초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사항이었다. 율법을 준수하려면 알아야 지키는데 무식하면 못 지키게 된다. 따라서 유다사회는 “무식하면 구원 못 받는다”는 등식의 명제가 보편화 된 사회였다. 이러한 절망감이 일상이 된 민초들에게 상식을 전복시키는 예수는 희망이 된 동시에 보수 세력에게는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헤롯당과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손을 잡았다. 그들은 앙숙이었으나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재야인사 제거라는 공통분모가 생겼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은 대형 소요 사태가 발생할 시에는 분봉왕의 경질·교체를 단행했다.   따라서 헤롯 정권은 촌 동네 출신의 예수를 요주의 인물로 규정하고 요원들을 보내 계속 추적해 왔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성전과 율법체계를 기반으로 먹고 사는 자들 이다. 자기들의 가면을 벗기고 종교적 영향력을 무력화시키는 갈릴리 청년을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헤롯당과 바리새파의 결탁으로 예수 제거 음모는 시작되었고 얼마 가지 않아 예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가 부활했다. 예수 당시의 유다 사회는 불의가 정의의 주인된 사회였다. 완전한 세상은 지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작금의 대형교회들을 보면 유다 사회와 다를 바 없는 불의가 정의의 주인 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제발 바로 서는 한국 교회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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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06
  • 기독교인은 회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의 ‘아우라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로망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아우라(Aura)’라는 용어는 독일의 문학비평가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예술이론에서 유래됐다.     ‘아우라’라는 용어를 ‘구별’이라는 기독교적 정서를 담은 용어로 호환(互換)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에게 아우라가 있기를 요청한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과 구별된 자이기 때문이다. 구별된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나 거기에는 선행적으로 전제되고 감수해야 될 조건이 발생하며, 불편함과 분골쇄신(粉骨碎身)이 동반된다. 즉 그것은 인간이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회개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과오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왜곡된 과거의 습관과 결별하는 데는 인격적 노력이 필수적이다. 과도기의 예언자 세례요한은 임박한 현실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염두에 두고 회개라는 개념을 구체화했다.   당시에 얼마나 구원에 대한 열망이 보편화됐는지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왔다는 사실로 이를 알 수 있다. 세례요한은 기성정치·종교권에 독설을 양산하는 재야종교지도자였으며, 그들은 유대사회 민중들의 의식을 재편하고 관리하는 기득권이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긍심 하나로 외세 지배의 수치스러움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는 선언을 통해 유대인들의 ‘배타적 선민사상’을 부정한다. 인간은 선천적 회개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인박히고 습관화되고 체질화된 것을 청산해야 되는 절실한 불편함이 예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과정이 전제되지 않으면 주님 안에서의 ‘아우라(Aura)’는 기대할 수 없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0-30
  •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에 동참하자
      지난달 28일 한국교회일천만기도대성회가 마무리되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회개와 회복이라는 공통의 과제를 제시했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이제야 제시한 것은 어쩌면 늦었다고도 할 수 있다. 분열된 한국교회와 비판받는 기독교 등 사회적 환경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시기에 이러한 한국교회가 하나되는 장을 마련했다는 것은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여 문화·교육·사회 등 대한민국을 근대화시키고 한국사회 전반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해 왔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관들이 분열과 이단논쟁, 교권싸움 등으로 분열되면서 매일 끊임없이 터지는 사건 속에서 한국교회가 하나될 수 있겠는가에 대해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도 회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교회는 이번 성회를 통해 더욱 하나되는 일에 힘쓰고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주님의 명령이자 시대적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사명을 등한시한다면 더 이상의 희망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나라와 민족을 부강하게 만들었던 기독교의 현재는 위태롭기 그지없다. 추락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고 회복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모두 함께 앞장서고 밀어주며 하나가 되어야 한다. 모든 교회와 기독교단체, 연합기관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이것이 전제가 되어야만 교회와 사회가 함께 발전하며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연합 기관이 하나로 합쳐지기 어려우면 연합기관 전체 대표를 돌아가면서 기관이 맡고 대 사회적 목소리에 대표성을 인정하여 창구로 삼으면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한 목소리로 의논하여 통로가 하나로 정리되면 대 사회적 위상도 찾게 될 것이다.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의지가 문제다.   앞으로 각 교단과 연합기관이 연합하여 한국교회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시도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한국교회만의 과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과제임을 깨닫고 동참해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0-30
  • 성도들을 그만 실망시키세요!
      대형교회들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기여한 바도 크지만 일부 대형교회들은 교회의 역기능으로 인해 성도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도는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이다.     요즘 명성교회 교인들이 하남시 성안교회로 많이 이동한다고 한다. 이들 중에는 광성교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은혜스럽다며 명성교회로 이동한 교인들도 있다. 광성교회에서 명성교회로 그리고 다시 성안교회로 이동한 교인들도 있다는 말이다.    이들 교인들에게 목회자는 상처를 주는 존재(?)다. 주님의 양을 잘 인도해야 할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교인들을 이동하게 만든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그리고 일부 교인들은 신앙생활에 매력을 잃고 아직 출석은 하고 있으나 역동성을 상실한 교인들도 있다.    어느 교회는 목회 대물림으로, 어느 교회는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갈등으로 등등 이유도 다양하다.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회개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일반인의 사는 방식이 전혀 다를 바가 없어서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에 우리는 목회자의 자격 요건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 적으로도 실력 있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이 시대는 더욱 그런 인재를 요구하고 있다. 더 이상 교회가 문제 집단으로 인식되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광교회는 이명증서 없는 타 교인은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교회의 사명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해서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지 타 교인이 이동해 부흥하는 곳이 참다운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도들을 그만 실망시켜야 한다. 목회자들이 각성하고 회개할 것을 권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0-23
  • 개혁을 빙자한 자해는 멈춰야 한다
      종교개혁기념일은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 논제를 공포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를 비판했고 교황의 권위보다는 오직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다.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 이신칭의를 주장하여 종교 개혁을 시작한 역사적인 날이다.   종교개혁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선언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를 추구하는 운동의 결과가 기독교(개신교)의 시작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상은 어떠한가? 지난 18일 문재인대통령은 교황청을 방문하여 교황을 면담하면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방북초청 의사를 전달했다.   어느 종교보다 대한민국의 근대화에 기여했으며, 3·1만세운동과 독립운동, 6·25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대한민국의 재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기독교가 ‘평화의 사도’로 불리는 가톨릭 교황의 권위에 기대어 우리민족의 통일 염원을 부탁하고 있는 실정이다. 501년 전 루터가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며 교황보다 성경을 강조하며 개혁정신으로 탄생했던 기독교의 모습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현실이다.   북한동포의 자유와 신앙을 위해 헌신했던 기독교의 역할은 사라지고 한국교회는 세속화와 부패의 이미지로 덧칠되어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이러한 기독교의 영향력 상실과 사회적 이슈화의 배경에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자리잡고 있다. 교계 지도자들이 일반 언론을 통해 교회의 문제를 폭로하고 비판하면서 교회개혁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자정능력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교회의 갱신을 요구하기보다 기독교의 치부를 드러내며 비판하기만에 열중하는 언론과 여론의 뭇매에 한국교회를 고스란히 내어주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제 새로워져야 한다. 교회의 문제는 교회에서 해결하는 것이 성경적인 방법이다. 교회 밖에서 교회를 비판할수록 타 종교는 반사이익을 얻고 기독교는 자멸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불신만 초래하고 영향력을 실추시키는 개혁을 빙자한 자해는 멈춰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0-23
  • 비판을 위한 연대는 독이다
      한국교회가 반 기독교세력의 무차별적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일명 ‘가짜뉴스’로 촉발된 기독교에 대한 전방위적 공격은 사실 여부를 떠나 기독교 이미지를 크게 훼손시키고 있다. 오늘날 난무하는 ‘가짜뉴스’란 프레임으로 기독교 전체를 부도덕한 단체로 몰아가려는 시도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기독교 이념과 반대되는 세력들은 자신들이 정치적이나 사회적으로 소수의 위치에 놓여 있거나 역량이 낮을 때 여론을 이용하여 세력을 모으고 기독교를 고립시키는데 앞장서 왔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이용하여 기독교를 공격하고 있는 두 집단은 이슬람과 동성애 세력이다. 이들은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미지 조작에 열을 올린다.   실제로 자신들이 저지르는 부도덕성과 범죄성을 숨기고 선한 이미지를 부각시켜 국민적 동정론을 일으킨다. 현재 한국사회는 누구나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유토피아적 사상이 정의로 인식되고 있어 이를 반대하는 집단이나 세력은 적폐로 규정되어 사회적 탄압에 직면해야 한다.    문제는 기독교를 공격할 때 목표를 고립시키기 위해 이해관계가 같은 세력과 정치적인 연대를 하는데 상대편이 대결과 분열로 자멸할 때까지 지속적인 공격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들 뿐 아니라 타 종교들도 반 기독교세력들을 규합하여 고도화된 언어 선동으로 기독교를 분열시키고 있다. 분열되어 싸우는 한쪽 편을 들면서 대외적으로는 기독교의 정상화를 위한 연대임을 외치지만 이들은 기독교 정상화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분열과 가치관의 혼란을 일으키고 의도적으로 기독교와 상반되게 자신들의 이미지를 선하게 포장한다.   이처럼 반 기독교세력의 전략·전술은 지능적이다. 일반 국민들은 일부 기독교 단체, 혹은 목사 개인의 향한 비난을 기독교 전체로 확대시키는 선동에 상당수가 넘어가 부화뇌동하고 있다. 진정 한국교회를 위한 길이 어디인지 방향타를 잃은 배처럼 표류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더 이상 외부세력에 흔들려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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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8-10-17
  • 이 시대 일부 교회, 역기능 노출 심각
      마태복음서는 제도화된 교회에 특정화된 복음서다. ‘교회의 제도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의 직제가 완성된 시기로서 교회 내부의 구조적 발전을 뜻한다. 제도화를 통해 교회의 체계화와 모양새를 구비했다는 순기능이 있는 반면, 기독교에 우호적인 사회 분위기로 인해 신앙의 진지함과 열심이 해이해졌다는 역기능도 있었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자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증명할 방법이 없어져 공황상태에 빠졌다. 기존에는 ‘박해받음’, ‘순교’라는 상황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가시적이고 구체적으로 증명해 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구도자들은 신앙을 증명하고자 ‘봉쇄수도원’에 들어가 금욕 속에서 노동과 말씀, 기도에 증진했다. 그러나 산 아래의 교회는 비단 옷과 산해진미에 취해 가기 시작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는 40일 금식 후 사탄의 제의를 물리쳤다. 사탄은 풍요와 영광의 삶을 제의했다. 사탄은 떡 섭취·고공낙하·경배 받음으로 상징되는 물질·명예·권력을 제의했다. 인간의 물질에 대한 욕구는 끝이 없다. 물질이 충족되면 명예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든 질서를 자기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해 권력을 염원하게 된다.   마귀의 첫 제안은 물질에 관한 것이다. 물질은 인간의 편리·안락·용이함을 담보한다. 물질적 토대가 너무 완벽하면 부대상황으로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이론적으로 배제된다.   둘째는 과시욕으로 대변되는 명예욕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물질을 충족하고 나면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대중적 확신을 받고 싶어 한다. 신자는 자신에 대한 인증 샷을 하나님께만 올리면 된다.   셋째, 인간의 최종적 욕망은 권력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섬김’을 제의하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며 사셨다. 교회의 그릇됨은 개개인의 안이함과 신앙적 일탈이 조립되어 만들어 진다. 예수께서는 사탄이 제의한 물질·명예·권력이라는 것이 교회를 이루는 치명적 부품이 되지 않기를 촉구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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