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2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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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동돌봄을 위한 사역에 매진하자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심각한 상황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하 상황에서 기독교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란 성경말씀을 기억하고 출산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성도들에게 출산을 하는 것을 권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사람들이 출산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여건을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아동돌봄이다. 이러한 아동돌봄에 교회가 앞장을 서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사역에 동참을 하고 있다. 특히 학생들의 학교 후부터 부모들의 퇴근까지의 돌봄공백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자식들을 학원으로 보내는 부모들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2021년에 발표된 교회의 돌봄사역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둘째 출산 계획이 없는 워킹맘 중 41%가 돌봄 문제가 해결된다면 둘째 출산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교회가 아동돌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큰 이유이다.동일한 조사에서 교회 운영의 돌봄기관 이용 의향률을 보면 기독교인 어머니는 84%가 의향률을 밝혔다. 그리고 비기독교인 어머니도 29%가 이용을 원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교회가 이러한 사역을 해야할 필요성이 보인다.    꼭 출산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교회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섬길 필요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야 한다. 또 많은 성도와 시민들이 이러한 부분에 필요를 느낀다. 교회가 이러한 필요를 체움으로써 사랑을 흘려내보낼 필요가 절실하다.    위 조사에서 돌봄 사역을 하지 않는 목회자 중 앞으로 돌봄 사역을 할 의향이 있는 목회자는 74%에 달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돌봄사역에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돌봄사역은 작은교회부터 큰교회까지 모든 교회가 할 수 있는 사역이다. 한국교회가 돌봄사역을 하기 원하는 교회들이 사역을 잘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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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2
  • 산불피해 복구에 교회가 힘을 모으자.
      경북 의성과 안동 등 경상권에서 발생한 대형산불이 빠르게 인근 지역으로 확산하면서 그 피해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3.28 06시 기준 사망 28명, 중경상 65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주택 117동을 포함한 시설물 3481곳과 이재민은 2407가구 8079명에 이르고 있으며 산림 4만8150ha의 피해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행안부는 이재민들이 재난트라우마로 불안해 하지 않도록 심리회복 지원도 적극 실시하고 있으며, 구호협회 등 민간단체는 기부금 모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매년 우리나라는 연평균(15-24년)546건의 산불이 발생하여 4,003ha의 산림이 소실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기후변화 등의 원인으로 전 세계적으로 초대형 산불이 자주 발생하여 산불이 범국제적인 재난으로 부각되고 있다. 또한 산불은 큰 피해에 비해 원인은 사소한 부주의로 발생하고 있으므로 사전 예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대형산불 등 큰 재난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하는 일이니만큼 정치권은 당리당략적 시각보다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협조해야 할 것이다. 특히 국민생명과 안전과 직결되는 재난 상황에 대해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교회도 예외일 수 없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복구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재난의 극복은 정치인이나 특정인들의 가시적인 보여주는 복구가 아니라 국민 전체가 나서야 되는 상황이다. 다행스럽게 우리 국민은 위기 앞에 강한 민족적인 저력이 있다. 그러나 현실이 너무 어렵다. 정치적 갈등이 심화된 속에서 경제적인 위기까지 겹치고 있다. 우리는 7년의 임진왜란, 36년의 일제강점, 6.25의 폐허는 물론 금모우기운동 등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 나라를 바로 세웠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견인했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재난은 우연한 것이 아님을 믿고 있다.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주관하에있기 때문이다.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온역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전 앞과 주의 앞에 서서 이 환란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대하20:9). 우리가 재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모든 재난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자 경고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그의 선한 뜻을 이루는 역사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임을 깨닫고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말씀이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경고하는 목적은 재난에 앞서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며, 재난 중에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앞장서서 이 재난을 극복하는데 ‘사랑의 행함’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교회마다 긴급재난이 발생할 경우 특별한 절차 없이 바로 집행할 수 있는 재정을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때에 한국교회는 피해지역 교회들은 몰론 일반 재해민들에게 숙소와 식자재를 지원하는 등 이재민을 위한 사역을 적극적으로 나서는데 힘을 모아 ‘고난과 함께하는 교회’가 됨으로써 이 땅에 복음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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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2
  • 한국교회, 갈등 조정자의 역할을 감당하자
      지난해 12월 3일 있었던 윤석열대통령의 계엄선포 이후로 한국사회는 양극화 현상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도 양극화 현상이 심각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가 분열을 멈추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로 나가야한다.    예수님은 팔복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서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히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로마서 12장 18절도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과 19절에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화평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화평함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화목하게 하는 조정자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 상임대표이자 기독교학술원 원장인 김영한박사도 이러한 사실을 잘 지적하고 있다. 김박사는 ”우리 뜻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기독교는 사회혼란을 부추기기보다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교회가 사회적 갈등을 키우기보다는 통합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분열로 인한 피로도가 상당하다. 특히 상대진영을 악마화하는 모습이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타파하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목하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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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5
  • 사순절 기간 ‘십자가의 도’를 실천하자.
       사순절(四旬節, Lent)기간이란 2025년 4월 20일 부활절로 부터 46일 전의 기간으로서 주일을 제외한 40일간(四旬)에 십자가의 고난을 체험하는 시간을 말한다. 그 의미는 부활절을 기다리면서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훈련의 시기이며,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로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사순절기간을 지키는 문제를 두고 찬•반의 양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순절을 거룩하게 지켜야 된다는 찬성측은 모든 교회의 오래된 일반적인 관행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반대측은 주로 미국의 거듭난 복음주의자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체험은 일정기간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일상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순절 기간을 특별하게 지키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사순절 기간이라도 ‘십자가의 도’(고전1:18)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영적성장을 지키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세상 끝날까지 전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책망하며 교회의 설립과 통합의 유일한 기반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먼저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그들의 결여된 영적 분별력으로 인해 미련한 것으로 취급되는 반면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이중성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지혜로 된 절대 유일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면 언제나 분열과 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든지 단점과 실수와 잘못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지나치게 믿거나 따르지 말고,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을 중심으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하며 그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자기 계획, 자기주장, 자기 고집, 자기 욕망, 자기 의지, 자기 이상, 자기 행복을 버려야 비로소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사순절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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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25
  • 캠퍼스 이단대책위한 활동에 앞장서자
     새학기를 맞이해 각 선교단체의 전도활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그런데 정통 기독교에 속한 선교단체가 이닌,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단체에서도 다양한 포교활동을 진행하고 있어 유의를 요망한다. 신천지 등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단체들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학생들에게 접근을 하고 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단들의 포교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도 고심해야 한다. 기독교대학들의 경우는 이단들이 교내에 포교를 할 수 없도록 막고 있다. 하지만 학교 밖에서 진행되는 포교에는 제지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법적으로 학교 밖에서의 활동은 막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기 때문에 학생들을 위한 교육이 활발하게 진행해 이단에 빠지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다. 각 교회에서는 매년 새로 입학하는 새내기를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해야 하며, 선교단체에서 사역시 교회의 감독도 필요하다.     기독교대학에 경우 교목실 등을 통해 이러한 교육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학생들이 참여하는 채플 등의 시간을 통해 이단의 위험성을 알려야 한다. 실제로 백석대학교의 경우 이단 경계주일을 정하고, 이단의 위험성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기독학생 연합회의 경우 SNS를 활용해 이단경계 활동하고 있다.       건강한 선교단체를 소개하는 일도 필요하다. 선교단체들의 연합체인 학원복음협의회는 안전한 선교단체의 목록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선교단체에서 학생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권면해야 한다.    이단에 대한 교육과 함께 같이가야하는 것은 올바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비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학생들에게 알려서 이단에 빠지지 않게 할 뿐 아니라 더 성숙한 신앙의 길로 가게 해야 한다. 대학생시기는 신앙에 전념할 수 있는 좋은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를 통해 학생들의 신앙이 더 성숙해질 수 있도록 한국교회의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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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25
  • 한국교회 신뢰회복을 위해 힘써야 한다.
         예장통합 ‘목회자윤리강령’(2011.10.29)을 보면 한국교회의 세속화의 모습을 밝히고 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못지않게 세속화되었다. 성경에 대한 무지, 강단의 세속화, 교권주의, 공명(功名)주의, 분파주의, 미신적 사고, 교회의 기업화, 성적(性的)부도덕, 목회자의 독선, 물신(物神)숭배 그리고 지나친 개인주의와 개교회주의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처음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랑의 본체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집을 만드시고, 우리가 사랑 안에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됨으로서 교리와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교회생활을 위해 우리 속사람 안으로 강건해야만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갖게 된다.    따라서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속화를 극복하고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상처받은 자들의 모임이기에 서로가 영혼의 상처를 치료하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내가 새롭게 되는 곳이다. 또한 교회의 위치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교회는 만물 곧 모든 창조물보다 최상위에 있다(엡1:22). 만물 안에는 세상이 있고 교회는 만물 위에 있기에 교회를 함부로 여겨서는 안된다. 더욱이 교회는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 곧 천사들을 가르치는 엄청난 곳이다.(엡3:10). 뿐만 아니라 교회는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게 한다(엡4:16).    세상에는 완전한 교회란 없다. 천국에 가서야 완전한 교회가 있다. 이 땅의 교회는 함께 지어져 가는 과정(엡2:22)에 있다. 그러기에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새 계명을 주신 것이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에서 바로 처음사랑을 잊었을 때에 모든 교회가 타락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 세속화는 바로 주님의 처음사랑을 떠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의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은혜와 진리’로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듬고, 끼리끼리 당을 짓지말며, 모든 교회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일(롬8:28)에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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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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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단통합의 모범사례로 자리잡길
      현재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인식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고질적인 분열로 인해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는 대명제가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성경을 부인하고 복음을 왜곡시키는 각종 이단과 사이비단체, 이슬람과 전능신교 등의 발흥이 교회를 무너뜨리고 십자가 복음을 침몰시키고 있다. 심지어 동성애 등 세상의 성적 타락이 교회까지 들어와 영혼의 자유를 잠식하고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기하성 여의도와 서대문측의 통합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것은 한국교회에 더없이 기쁜 일이다. 1953년 설립된 기하성총회는 신학적 및 정치적 이유로 여러 총회로 분열되었으나 뿌리는 미국에서 1914년에 설립된 오순절교회 계통의 기독교 교단인 하나님의 성회의 선교로부터 시작됐다. 이번 통합을 통해 기하성총회가 지금 우리사회에 필요한 예수의 속죄와 삼위일체, 예수의 부활을 믿으며 중생, 성령 충만, 신유, 재림 등  교단의 정체성을 다시 확립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임시총회를 통해 통합을 결의한 양측 지도자들과 회원 목회자들에게 거는 교계의 기대가 크다. 이번 총회는 10년만에 하나로 뭉친 목회자들이 여러 현실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로 새로운 전기를 위해 대범한 결정을 한 의지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앞으로 한국교회 연합사업과 교단운영에 있어 내실있는 교단으로 바로서겠다고 하니 귀추가 주목된다.     모처럼 교계에서 모범적인 통합을 추진한 중진지도자들에게 기대를 하면서 다른 교단들과 다르게 완전한 통합을 위해 매진해주길 당부한다. 교단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오직 성경의 권위를 확실히 지켜내는 활동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세속화가 더 이상 심화되지 않도록 막아야 하며 교단목회자들의 도덕성 회복을 선도하고 개혁에 앞장섬으로써 한국교회가 사회의 공신력을 얻는데 기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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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27
  • ‘사랑의 실천’ 위해 연합하자
      연말연시에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후원과 봉사에 동참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는 매서운 겨울을 나기 힘든 이웃들이 절실히 필요한 김장과 쌀, 연탄 등 필수품들을 후원하고자 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기업과 정부 등 모두가 함께 하는 ‘사랑의 실천’ 활동이었다.   특별히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봉사와 헌신은 기독교계가 주도하여 타 종교에 비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초기 한국교회도 선교사들이 학교와 병원을 세워 어려운 이웃들을 도왔으며 교인들도 사랑을 전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모습이 사회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얻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직접 실천하는 행위가 복음전파의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사회에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절대적 빈곤은 상당부분 해소된 상태다. 과거에는 과거 선교사들처럼 절대적 빈곤에 시달린던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경제적 도움이 기독교에 대한 신뢰와 복음전파로 이어졌지만 이제는 절대적 빈곤이 아닌 상대적 빈곤문제가 더욱 커졌다.   이미 불교와 천주교 등 다른 종교들은 이웃들을 위한 봉사와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철저하게 자신들의 모습은 감추며 활동하고 있다. 재정규모나 종파 내부의 문제가 있어도 외부에는 선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통해 거룩한 성직자의 이미지로 봉사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교회는 현재 분열로 인해 개교회 차원의 사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사랑의 실천을 선도했던 한국교회가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사회는 연합적 차원의 봉사와 후원사역을 요구하고 있다. 인프라확보와 복지규모를 키우려면 단일화된 연합기구 중심의 사역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합의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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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20
  • 한국교회, 말씀의 지배를 받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라는 직함 앞에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어휘가 수식어로서 그림자처럼 동반된다. 공적(公的) 명함에 사적(私的) 수식어가 추가되는 것은 파격적이며 통상적이지 않은 사례이다.   다윗 행정부가 전제되지 않은 솔로몬의 행정부의 출범과 위상은 무리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다윗은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서 이스라엘을 명실상부한 국가로서의 면모를 정비하여 반석 위에 올려놓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세속적 시각으로 자수성가한 대표적 인물이다.   다윗에 대한 설명과 해부는 ‘수식어’로는 부족하고 영문법의 ‘관계대명사’를 활용해야 될 정도로 분량이 많고 장르도 다양하다. 물론 다윗도 인간이라는 한계상황을 살아왔기 때문에 시행착오로 인한 과오·과실과 부족하고 결핍된 부분과 후미진 취약점을 지니고 살았다. 솔로몬은 부친인 다윗의 장점을 흡수하여 계승·발전시켰으며 부친의 단점과 취약점에 대해서 비판과 외면만 하는 옹졸한 자세와 태도를 견지한 것이 아니라 그 부분을 ‘타산지석(他山之石)’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으며 좀 더 완벽한 국가수반의 위상을 획득하기 위한 진지한 행보를 이어갔다.   타인의 훈계와 조언과 충고를 수용하는 행위는 자존심을 반환하는 용기가 없이는 불가하다. 인간의 정체성은 어리석고 우둔함에 그 자리를 두고 있다. 인생의 여정에서 소용돌이치는 강과 가파른 절벽에 직면하여 자포자기적 넋두리 속에서 절망과 비탄의 나락으로 추락할 때가 있다. 여호와는 현미경적 미시적 시각과 망원경적 거시적 시각을 조화시키는 교향악단의 지휘자이다. 여호와의 신분은 ‘말씀하시는 분’이고 인간의 신분은 ‘듣는 자’ 이다. 따라서 여호와와 원탁(圓卓)에서 토론하겠다는 교만한 마음을 반납하고 청산하여 그분께 말씀하실 기회를 드리고 그분께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을 도화지에 펼쳐놓고 귀를 개방하는 현자가 되기를 바란다.   한국교회가 하나 되지 못함도 주님의 말씀에 소홀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지배함으로 연합과 일치를 이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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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8-11-20
  • 한국교회, 지금의 광야를 피하지 말아야
      예수는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 즉위 15년에 공적 신분으로의 행보를 시작했다. 첫 행보는 스프링 캠프를 통해 수세(水洗)시의 영광이라는 온탕과 광야에서의 시련이라는 냉탕을 경험하는 것이다. 예수는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고 몸소 실천했다. 세례요한 공동체는 유다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종교그룹이다. 그에게 세례를 받는 행위는 도래할 새 질서를 인정하고 대망한다는 비언어적 표현이다.   세례요한의 세례행위의 여파는 당시의 정치권과 종교 기득권층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였으며 염려의 진원지였다. 예수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겸허한 자세는 종교적 의례뿐 아니라 나중에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요한공동체와 예수공동체 간의 불협화음을 사전에 차단하는 의미도 있었다. 이러한 세심한 배려의 결과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를 경쟁 관계에 있는 종교그룹의 수장으로 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된다.   다른 보편적인 사람의 수세 시와는 달리 예수의 수세 시에는 하늘에서 예사롭지 않은 신비한 현상이 동반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를 신적 존재로 세상에 선포하며 공증하는 진지한 현상이다. 하나님은 공개된 장소에서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언급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왕정시대에 새로 즉위한 왕에게 하나님이 “너는 내 아들이라”하는 정형화된 표현을 통해서 정권의 정통성을 인준하는 사례를 연상하게 해준다. 그리고 하늘에서의 신비한 현상은 교의학의 삼위일체교리에 대한 성경적 토대를 제공해 주며, 천지가 소통한다는 뜻이다.   수세 후 예수는 혹독한 시련의 기간을 가진다. 그것은 광야 체험을 통해서 임박한 사역을 위한 담금질을 한다. 십자가상에서의 수난 만큼 광야에서의 시련은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 역사를 추적해보면 광야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는 곳이다. 내용성 있는 강인한 스프링 캠프를 경험한 자에게 고귀한 과제가 주어진다. 혹 우리가 지금 광야를 가고 있는가? 하나님께 도리어 감사를 드리자. 광야는 곧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지금의 광야를 피하지 말아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1-14
  • ‘사랑’과 ‘감사’전하는 절기를 기대한다
      11월 셋째주일은 교회력으로 추수감사절이다. 많은 교회들이 이날을 기념하며 감사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일부교회들은 추수에 대한 본래 의미를 살리고자 추석 전후로 감사예배를 드리고 있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구원의 감격과 더불어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해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은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정신을 지키는 절기로 이어지고 있다. 여러 대내외적 여건으로 인해 현재 대한민국은 경제적 한파로 인해 감사절의 따스함을 느끼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러한 시기일수록 소외된 이웃들은 더욱 빈곤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부유한 사람들도 지갑을 여는데 인색하게 된다. 교회들도 추수감사절을 맞아 지난해만큼 감사헌금이 쌓일지 모르는 상황이다. 감사절의 헌금은 그래서 더욱 가치있게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에 대해 감사하며 우리주변의 이웃들을 다시한번 돌아보는 것이 감사절의 참된 의미에 부합하는 행동일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타 종교에 비해 우리사회의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데 앞장서왔다. 그러나 일부 교회와 개인들의 일탈로 인해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으며 나눔과 사랑의 실천이라는 고귀한 행동이 많이 위축됐다. 올해 추수감사절은 그래서 더욱 이웃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감사주일이 기독교 절기 중 하나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은혜를 이웃과 함께하겠다는 정신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가 전하는 감사의 기쁨이 우리사회를 따뜻하게 적실 때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힘이 더욱 빛이 나게 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1-14
  • 안보 무임승차가 ‘양심’인가?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 오모씨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9대4로 정당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가 병역거부 사유로 내세운 신념이 ‘양심적’이라며 병역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판결하면서 묵묵히 나라를 위해 군복무를 하며 헌신했던 일반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특히 14년만에 나온 이번 판결로 인해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문의도 온라인상에서 급증하고 있다. 현재 법원에서 심리중인 병역거부자 대부분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다. 대체복무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서 이들에 대해 사실상 면죄부를 주면서 여호와의 증인 교인증은 사실상 병역 면탈의 ‘허가증’이 됐다.   여호와의 증인 한국지부는 논평에서 대법원의 판결을 환영한다며 대한민국 인권 의식의 성숙함을 보여준 역사적인 판결로서 오래 기억될 것이라고 자평하는 등 나라를 위한 헌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국가안보의 혜택을 그대로 누리겠다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말하는 소위 양심을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대법원은 “피고인이 소명자료를 제시하면 검사는 자료의 신빙성을 탄핵하는 방법으로 진정한 양심의 부(不)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밝혔다. 즉 검사가 양심을 판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 종교 신자가 아니라도 신념을 근거로 병역을 거부한 사람은 어떻게 진정성을 가릴 것인가에 대한 대안도 마땅치 않다. 온라인에서는 이들에게 휴전선 일대의 지뢰제거 임무에 투입하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진짜 평화를 위해 집총을 거부하는 양심적 평화주의자라면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지뢰제거나 위험임무에 먼저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온라인상의 주장이지만 실제로 이들은 국방과 관련된 분야에서의 복무는 전면 거부하고 있다. 순수 민간단체에서만 ‘봉사’하고 싶다는 것이다. 자칭 ‘양심적’이라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국가안보에 무임승차 하는 모습이 어디가 ‘양심적’인지 되묻고 싶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1-06
  • 불의가 정의의 주인 된 모습 ‘통탄’
      국권이 침탈되어 왕조가 와해된 유다사회에서 민족을 견인하는 것은 성전과 율법체계였다. 대제사장이 국가원수의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비참하고 침통한 시대였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성전 체계의 탈선과 율법에 있어서 법 제정 당시의 법 정신이 실종되어 왜곡 현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제사장들은 민중의 죄를 먹고 사는 자들이다. 제사물의 등급과 양은 죄의 심각성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민중이 범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제사장들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구조였다. 율법은 울타리 율법의 추가로 분량이 비대해지고 방대해졌다. 율법준수 만이 구원의 혜택을 받는다는 당시의 시대정신은 무식한 민초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사항이었다. 율법을 준수하려면 알아야 지키는데 무식하면 못 지키게 된다. 따라서 유다사회는 “무식하면 구원 못 받는다”는 등식의 명제가 보편화 된 사회였다. 이러한 절망감이 일상이 된 민초들에게 상식을 전복시키는 예수는 희망이 된 동시에 보수 세력에게는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헤롯당과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손을 잡았다. 그들은 앙숙이었으나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재야인사 제거라는 공통분모가 생겼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은 대형 소요 사태가 발생할 시에는 분봉왕의 경질·교체를 단행했다.   따라서 헤롯 정권은 촌 동네 출신의 예수를 요주의 인물로 규정하고 요원들을 보내 계속 추적해 왔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성전과 율법체계를 기반으로 먹고 사는 자들 이다. 자기들의 가면을 벗기고 종교적 영향력을 무력화시키는 갈릴리 청년을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헤롯당과 바리새파의 결탁으로 예수 제거 음모는 시작되었고 얼마 가지 않아 예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가 부활했다. 예수 당시의 유다 사회는 불의가 정의의 주인된 사회였다. 완전한 세상은 지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작금의 대형교회들을 보면 유다 사회와 다를 바 없는 불의가 정의의 주인 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제발 바로 서는 한국 교회가 되자. 
    • 오피니언
    • 사설
    2018-11-06
  • 기독교인은 회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의 ‘아우라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로망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아우라(Aura)’라는 용어는 독일의 문학비평가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예술이론에서 유래됐다.     ‘아우라’라는 용어를 ‘구별’이라는 기독교적 정서를 담은 용어로 호환(互換)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에게 아우라가 있기를 요청한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과 구별된 자이기 때문이다. 구별된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나 거기에는 선행적으로 전제되고 감수해야 될 조건이 발생하며, 불편함과 분골쇄신(粉骨碎身)이 동반된다. 즉 그것은 인간이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회개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과오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왜곡된 과거의 습관과 결별하는 데는 인격적 노력이 필수적이다. 과도기의 예언자 세례요한은 임박한 현실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염두에 두고 회개라는 개념을 구체화했다.   당시에 얼마나 구원에 대한 열망이 보편화됐는지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왔다는 사실로 이를 알 수 있다. 세례요한은 기성정치·종교권에 독설을 양산하는 재야종교지도자였으며, 그들은 유대사회 민중들의 의식을 재편하고 관리하는 기득권이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긍심 하나로 외세 지배의 수치스러움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는 선언을 통해 유대인들의 ‘배타적 선민사상’을 부정한다. 인간은 선천적 회개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인박히고 습관화되고 체질화된 것을 청산해야 되는 절실한 불편함이 예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과정이 전제되지 않으면 주님 안에서의 ‘아우라(Aura)’는 기대할 수 없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0-30
  •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에 동참하자
      지난달 28일 한국교회일천만기도대성회가 마무리되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회개와 회복이라는 공통의 과제를 제시했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이제야 제시한 것은 어쩌면 늦었다고도 할 수 있다. 분열된 한국교회와 비판받는 기독교 등 사회적 환경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시기에 이러한 한국교회가 하나되는 장을 마련했다는 것은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여 문화·교육·사회 등 대한민국을 근대화시키고 한국사회 전반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해 왔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관들이 분열과 이단논쟁, 교권싸움 등으로 분열되면서 매일 끊임없이 터지는 사건 속에서 한국교회가 하나될 수 있겠는가에 대해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도 회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교회는 이번 성회를 통해 더욱 하나되는 일에 힘쓰고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주님의 명령이자 시대적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사명을 등한시한다면 더 이상의 희망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나라와 민족을 부강하게 만들었던 기독교의 현재는 위태롭기 그지없다. 추락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고 회복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모두 함께 앞장서고 밀어주며 하나가 되어야 한다. 모든 교회와 기독교단체, 연합기관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이것이 전제가 되어야만 교회와 사회가 함께 발전하며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연합 기관이 하나로 합쳐지기 어려우면 연합기관 전체 대표를 돌아가면서 기관이 맡고 대 사회적 목소리에 대표성을 인정하여 창구로 삼으면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한 목소리로 의논하여 통로가 하나로 정리되면 대 사회적 위상도 찾게 될 것이다.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의지가 문제다.   앞으로 각 교단과 연합기관이 연합하여 한국교회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시도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한국교회만의 과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과제임을 깨닫고 동참해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0-30
  • 성도들을 그만 실망시키세요!
      대형교회들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기여한 바도 크지만 일부 대형교회들은 교회의 역기능으로 인해 성도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도는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이다.     요즘 명성교회 교인들이 하남시 성안교회로 많이 이동한다고 한다. 이들 중에는 광성교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은혜스럽다며 명성교회로 이동한 교인들도 있다. 광성교회에서 명성교회로 그리고 다시 성안교회로 이동한 교인들도 있다는 말이다.    이들 교인들에게 목회자는 상처를 주는 존재(?)다. 주님의 양을 잘 인도해야 할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교인들을 이동하게 만든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그리고 일부 교인들은 신앙생활에 매력을 잃고 아직 출석은 하고 있으나 역동성을 상실한 교인들도 있다.    어느 교회는 목회 대물림으로, 어느 교회는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갈등으로 등등 이유도 다양하다.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회개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일반인의 사는 방식이 전혀 다를 바가 없어서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에 우리는 목회자의 자격 요건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 적으로도 실력 있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이 시대는 더욱 그런 인재를 요구하고 있다. 더 이상 교회가 문제 집단으로 인식되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광교회는 이명증서 없는 타 교인은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교회의 사명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해서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지 타 교인이 이동해 부흥하는 곳이 참다운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도들을 그만 실망시켜야 한다. 목회자들이 각성하고 회개할 것을 권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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