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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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정책제안에 힘쓰자
     디가오는 6월 3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등 기독교단체들이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정책을 제시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의 경우는 2012년 치려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부터 이러한 운동을 벌여왔다. 지난 2022년 대선에서는 한국교회총연합과 함께 10대 공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에큐메니컬 성향의 단체에서도 기독교대선행동이라는 단체를 출범하면서 탄소중립 구현과 한반도 평화협정등을 제시한 바 있다.    정치인들에게 기독교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책무 중 하나이다. 기독교적인 정책을 정치인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이 나라에 기독교세계관을 반영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정책은 기독교인뿐 아닌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다. 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는 지난 2022년 대선에서 초저출산 극복정책으로 아동돌봄청을 신설해야한다고 했으며 이외에도 재난상황을 대비한 민관위기 관리시스탬 구축과 유사종교 피해방지를 위한 법률제정 등의 정책들이 있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일반시민들에게 큰 유익이 될 수 있는 정책들이다. 저출산 문제의 경우 국가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며, 재난상황의 극복또한 모든 시민에게 필요한 사실이다. 유사종교로 인해 피해를 보는 시민들을 구제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정책들이 일반 시민들에게도 큰 유익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차별금지법의 제정과 같은 악법반대 운동을 활발히 펼쳐왔다. 이제는 악법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좋은 법안과 정책등을 제시할 때이다. 그리고 이번 선거는 그러한 법안과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좋은 계기이다. 이러한 정책제안의 시간이 이번 선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편화가 되어서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해 모든 시민이 유익이 될 수 있는 정책과 법안을 제사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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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9
  • 어린이를 위한 ‘믿음’의 사역에 매진하자.
       한국교회는 5월 5일 어린이날과 함께 어린이 주일을 지키고 있다. 미국에서는 1880년부터 예배당을 꽃으로 장식하고 '샤론의 꽃, 어린이'라는 제목으로 어린이 예배를 드린 데에서 유래하여 '꽃주일'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방정환, 마해송 등의 어린이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선각자들이 1923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해 어린이 인격보호와 바른 성장에 대한 어른들의 관심과 각성을 촉구하는 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1927년부터는 5월 첫째 주일로, 그리고 1946년에는 오늘날과 같은 5월 5일로 변경되었고, 1957년에는 어린이 헌장이 제정, 공포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교회들도 초창기에는 미국에서 처음 제정된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켜오다가 1956년부터 5월 첫째 주를 어린이 주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린이 주일이라는 절기도 성경에는 없지만 어린이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주일로 지켜지고 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에 대하여 귀하게 여기시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어린아이에 대한 특별한 가르침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잠22:6)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회초리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회초리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23:13-14). 그리고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에게 안식을 주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29:17). 이것은 교회는 물론 부모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다.      따라서 교회는 어린이를 위한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방법으로 디모데의 믿음과 유산을 가르치는 사역이 되도록 하자.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에 속에 있더니 네 속에 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5). 사도 바울은 육신적으로 디모데가 아들이 아니지만, 디모데가 신앙 성장의 합당한 인격을 갖추는데 바울이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딤전1:2)이라고 부르고 있다. 디모데의 거짓이 없는 믿음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던 믿음이 전수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올바른 가정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디모데의 가정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가정은 신앙 교육의 장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유지 발전시키는 일차 기관이며 교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자녀를 하나님의 진리로 양육하는 근본적인 책임은 가정에 있으며 교회 교육과 학교 또는 세속 사회의 교육 간에 생기는 갈등을 신앙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참된 기반이 된다. 뿐만 아니라 자녀를 신앙으로 올바르게 교육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복음 전파 사역과 유업을 물려주는 일과도 깊은 연관을 갖는다(신6:4-9). 현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가 참믿음을 가진 차세대에 대한 교육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어린이 주일을 한 번 지키고끝내는 것이 아니라 평생교육의 출발로서 교회학교의 전문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행함으로써 ‘믿음’의 사역이 부흥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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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9
  • 미혼·기혼 연대하는 공동체를 세우자
     작년 기준, 만 19~34세 청년 5명 중 4명이 미혼으로, 미혼율이 80%를 넘었다는 통계는 한국 사회의 결혼·가정에 대한 인식 변화와 현실적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독교인 역시 예외가 아니다. 2023년 조사에서 전체 기독교인 중 미혼 비율은 40.5%에 달했다. 교회 내 싱글 신자들의 수와 연령이 계속 증가하는 것은 이제 뚜렷한 흐름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경제적 부담, 주거난,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결혼·출산에 대한 가치관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결혼이 더 이상 ‘필수’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가족과 1인 가구가 급증하고 있다. 이는 교회가 전통적 가정 중심의 사역과 인식에서 벗어나, 미혼 신자들을 적극적으로 품고 새로운 공동체의 길을 모색해야 함을 시사한다.    교회는 미혼을 ‘문제’로 여기거나, 결혼만이 신앙적 성숙의 완성이라는 시각을 지양해야 한다. 오히려 사도 바울이 강조했듯, 결혼과 미혼 모두 각자의 소명과 가치를 지닌 삶의 방식임을 인정해야 한다. 미혼 신자들이 교회 공동체에서 소외되지 않고, 자신의 은사와 삶을 온전히 나누며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미혼 성도들이 주체적으로 신앙과 삶을 나눌 수 있는 소그룹, 멘토링, 사역의 기회를 확대하고, 결혼과 출산만을 강조하는 지원정책에서 벗어나 다양한 삶의 형태를 존중하는 포용적 사역이 필요하다.    또한 교회는 ‘올바른 가정’의 기준을 결혼 여부나 자녀 유무로 한정하지 않고, 신앙 안에서 서로를 돌보고 연합하는 공동체로 확장해야 한다. 부부의 수를 늘리는 것보다, 미혼·기혼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서로의 삶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더 본질적인 과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 교회가 미혼의 삶 역시 신앙 안에서 의미 있고,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적극적으로 선포하며, 다양한 가족과 1인 가구를 포용하는 공동체로 나아갈 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진정한 연합과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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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9
  • 올바른 후보를 뽑는 선거가 되자.
       윤석열 대통령 파면으로 인한 21대 대통령 보궐선거가 6월 3일로 정해졌다. 선거에 관심을 갖고 투표에 적극 참여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책무이다. 나의 투표권 행사를 위해 우리 현실의 정치, 사회, 경제가 성경의 원리에 맞는지를 평소에도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라의 주권자인 국민이 나랏일에 무관심할 수는 없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마6:10)기도하며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투표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우리의 투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력을 바르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선거는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딤전2:2)을 위한 민주주의의 척도다. 올바른 선거는 한 국가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킴은 물론 경제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선거가정치적 제도지만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파급력은 엄청나다. 역사는 선거가 바꾼다. 선거의 주인공은 유권자다. 깨어 있는 유권자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국가의 부(富)를 키운다. 정의, 법치, 자유, 배려 등 사회의 미덕이 자라나는 토양도 결국 유권자가 가꾼다. 단순히 당선을 위해 외쳐대는 구호, 국가보다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정책, 국가의 지속적 번영을 해치는 현혹적 수사 등을 구별하는 혜안을 갖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유권자가 자신들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대중의 어리석음’이라는 함정에 빠진다. 다수결이 민주주의를 이끄는 기본원리지만 다수결이 중요한 진짜 이유는 수의 많음보다는 다양함 때문이다. 현혹적 구호에 매몰된 다수는 자칫 국가의 백년대계를 흔든다. 또한 공명한 선거는 또 하나의 과제다. 자유 보통 비밀 직접이라는 선거의 4대 원칙이 지켜지는 공정한 룰을 만드는 것은 정치권의 몫이지만 우리는 6·3대선을 대한민국을 정치·경제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깨끗하고 공명한 선거는 대한민국의 얼굴이기 때문에 기독인들의 바른 자세가 중요하다. 이를 위하여 기도하자.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다(롬13:1). 하나님은 국가와 가정, 그리고 교회를 세우셨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태어날 때 한 가정에 속하게 되며 동시에 한 국가에 속한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던 시대에, 사도 바울은 로마에 굴복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세상 권세도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하지만 육신이 사는 동안에는 국가의 법과 제도와 관원들을 거스리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우리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 한다. 따라서 대선 후보자들이 하나님의 통치 원리와 방법에 얼마나 합당한가를 살펴봐야 하겠다. 만약 자신의 이익이나, 집단주의에 매몰되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후보를 선택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길은 오직 올바른 투표밖에 없다. 이념과 우상에 매몰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책임질 후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판단하여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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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2
  • [사설] 이 세상에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자.
      ‘2025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가 4월 20일 오후 4시 서울 강남구 광림교회에서 개최됐다. 특별히 올해는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오전 인천 제물포항에 언더우드·아펜젤러 선교사가 공식 입항해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가 시작된 지 140주년을 맞는 해다.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담아, 한국 71개 교단과 전국 17개 지역 기독교연합회도 동일한 주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 정신을 되세겼다. 부활절(復活節)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부터 3일째 되는 주의 첫날인 일요일에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최대 축일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느 때부터 인가 절기로서 관습화되고 형식화 되고 있다는 우려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교회사에서 부활절이 언제냐는 문제를 두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간의 논쟁이 계속되다가 서기 325년 니케아회의에서 춘분이 지난 뒤 최초의 보름달이 지난 첫 주일을 부활절로 지키기로 결정하여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으나 부활의 의미가 절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짜는 성경에 기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지키는 성탄절인12월 25일은 예수님 탄생하신 날과는 상관없는 날이다. 성경에 그런 기록이 없다. 그러나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달력으로 니산월 정월 14일,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사흘 후에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달력 니산월 14일의 3일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양력으로는 3월 하순에서 4월 초에 항상 연결이 된다. 그래서 이때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때가 확실하다. 바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봄을 영어로 'SPRING'이라고 그러는데 그 의미는 ‘확 튀어 오른다’ 즉 봄에는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이기 때문에 'SPRING'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자연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그 부활을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이만큼 확실한 사실이기에 이를 증거 해야 한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인이 믿는 모든 것이 허사(虛事)가 된다. 우리의 구원도 헛것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은 역대의 모든 사람들의 삶도 헛것이 된다(고전15:17-19).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있어야 우리의 믿는 모든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구약에 예수님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있었고, 그분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더욱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사도들의 행적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이 잡힐 당시 뿔뿔이 도망치던 그 비겁자들이 부활을 직접 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의 믿음을 일상화해야 한다. 우리는부활절을 맞아 절기로서 외형적인 모습에 치중하기보다는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 안에서 ‘하나 됨’으로 많은 영혼들이 부활을 체험하여 부활의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세상에 증거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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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2
  • 아동돌봄을 위한 사역에 매진하자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심각한 상황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하 상황에서 기독교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란 성경말씀을 기억하고 출산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성도들에게 출산을 하는 것을 권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사람들이 출산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여건을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아동돌봄이다. 이러한 아동돌봄에 교회가 앞장을 서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사역에 동참을 하고 있다. 특히 학생들의 학교 후부터 부모들의 퇴근까지의 돌봄공백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자식들을 학원으로 보내는 부모들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2021년에 발표된 교회의 돌봄사역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둘째 출산 계획이 없는 워킹맘 중 41%가 돌봄 문제가 해결된다면 둘째 출산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교회가 아동돌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큰 이유이다.동일한 조사에서 교회 운영의 돌봄기관 이용 의향률을 보면 기독교인 어머니는 84%가 의향률을 밝혔다. 그리고 비기독교인 어머니도 29%가 이용을 원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교회가 이러한 사역을 해야할 필요성이 보인다.    꼭 출산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교회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섬길 필요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야 한다. 또 많은 성도와 시민들이 이러한 부분에 필요를 느낀다. 교회가 이러한 필요를 체움으로써 사랑을 흘려내보낼 필요가 절실하다.    위 조사에서 돌봄 사역을 하지 않는 목회자 중 앞으로 돌봄 사역을 할 의향이 있는 목회자는 74%에 달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돌봄사역에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돌봄사역은 작은교회부터 큰교회까지 모든 교회가 할 수 있는 사역이다. 한국교회가 돌봄사역을 하기 원하는 교회들이 사역을 잘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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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5-04-02

실시간 사설 기사

  • 소외된 이웃 돌아보는 설을 맞자
    민족의 명절인 설이 다가왔다. 설날하면 어떤 기다림이 있을까? 연휴, 고향, 부모, 친구, 차례, 성묘 등의 단어를 떠올린다. 민족의 고유 명절이기에 명절동안 국민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설은 가족이 모여 사랑과 정을 나누는 날이자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민족의 복된 절기이다. 설은 새해 첫날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음식을 마련하여 가족과 조상에 감사하는 날이다. 농경 전통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뿌리를 내리며 사는 사람들이 고향을 지키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 부모와 형제들이 바쁜 삶으로 헤어져 살다가 명절이라는 문화를 통해 만나서 정을 나누고 조상을 기리는 문화는 우리의 삶을 더욱 따뜻하고 풍성하게 만든다. 이웃과 음식을 나누는 날 또한 우리 삶의 일부분이다. 설날에는 다양한 풍습들이 있다. 차례, 세배, 떡국, 설빔, 덕담, 윷놀이, 널뛰기 등이 그것이다. 그중 설날의 대표적인 풍속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세배로 원래는 차례가 끝난 뒤에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찾아다니며 새해 인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차례가 끝나면 웃어른부터 차례로 새해 첫인사를 드리는데 이를 세배라 한다. 집안의 세배가 끝나면, 아침 식사를 한 후에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린다. 이렇게 설은 우리에게 하나의 축제로 지내왔다. 가정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참여해 웃고 즐기는 축제인 것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명절에 잊지 말하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경제적 위기로 인해 모두가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기쁨을 나눌 가족이 없거나 실업이나 폐업 등으로 직장을 잃고 어두운 명절을 보내는 이웃이 많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즐거운 설이 되기 위해서는 이웃을 위한 나눔과 사랑이 더욱 절실하다. 우리의 명절은 이웃들과 나누며 기쁨도 함께하는 축제였음을 기억하고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사랑에 앞장서는 날로 지켜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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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30
  • 겨울캠프의 전통 되살려야 한다
    동절기에 주일학교와 청소년 및 청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영적인 훈련을 받는 ‘겨울캠프’는 한국교회 부흥과 성장의 소중한 밑거름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겨울캠프의 횟수와 참여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여기에 대한 한국교회 전체의 관심과 대응이 절실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다음세대를 신앙적으로 세우는 일이 한국교회의 명운이 걸린 중차대한 과제임을 자각해야 한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각종 지표와 통계는 지금의 상황이 상당히 심각함을 경고해주고 있다. 한 대형교단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년 사이 교회학교 학생수가 절반이나 떨어졌다고 한다. 최근 한국사회의 급격한 노령화와 출산율의 감소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킬 전망이다. 그러나 출산율 감소만 탓해서는 안 된다. 먼저 교단이나 총회 차원에서 겨울캠프의 전문가 그룹을 양성하고 지원해야 한다. 교회사역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고, 여기서 사람은 ‘전문가’이다. 지금의 시대적 특징을 잘 파악해서 거기에 맞는 효과적인 전략과 전술을 새우는 전문가 그룹을 육성하고 양성해야 한다. 그래서 이 그룹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기획과 프로그램으로 겨울캠프를 진행하게 해야 한다. 여기에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 ‘개교회주의’ 또는 ‘패배주의’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 ‘우리 교회는 크니까 자체적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식의 개교회주의는 타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이다. 또 ‘우리 교회는 너무 작아서 아예 할 수 없다’는 식의 패배주의는 한국교회를 더 깊은 침체로 밀어 넣을 뿐이다. 한국교회는 식어진 겨울캠프의 열기를 다시 살리기 위해 ‘우리는 하나’라는 운명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교회학교가 무너지면 한국교회 전체가 무너진다는 절박감 속에서 모든 교회가 겨울캠프의 전통을 회복시키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선지자 에스겔이 구약시대에 봤던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는 비전이 지금 이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줘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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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24
  • 3·1운동 기념사업 내실있게 준비하자
    2019년 3월 1일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1세기라는 의미이다. 특히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함께하는 해이다보니 우리 민족의 지난 100년의 시간은 너무도 많은 변화와 질곡과 역경의 시간이었다. 3·1정신은 한마디로 우리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사사로운 운동이 아닐 뿐 아니라 더욱이 당파적 운동이나 이념적 운동도 아니다. 모든 국민들이 나셨다. 특히 종교인들이 앞장을 섰다. 이상규박사(고신대 명예교수)는 한 세미나에서 “3·1운동 당시 기독교 인구는 20~22만으로 전 국민의 1~1.5%에 불과했으나 신도 100만 이상의 천도교보다 더 많은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교회나 선교학교가 없는 지역에서는 천도교와 협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100주년을 맞이한 현 시점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3·1정신의 회복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지금의 모습은 3·1정신에 역행하는 허리 잘린 고난의 연속이다. 문재인 정부의 평화정책으로 한반도의 평화분위기에 잠시 취하고 있으나 남한을 핵 무력으로 지배하려는 북한의 핵은 더욱 요원한 채, 남남갈등만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정부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활동에 임하고 있다. 특히 100년 전처럼 종교계의 적극적인 협력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독교계의 기념사업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한국교회교단장회의에서도 23개 회원교단뿐 아니라 3·1운동 기념사업을 여러 해 준비해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YMCA전국연맹 등 연합기구들과 함께 하나가 되는 전체 틀을 ‘준비위원회’와 같이 만들고, 그 안에서 교단별, 기관별로 현재 추진 중에 있다. 문제는 그동안 연합활동들이 내실을 기하지 못하고 일회성의 이벤트성이 강했다는 지적을 감안하여 지난 100년의 의미를 되새기며 새로운 100년을 향한 진정한 의미의 우리민족의 하나 됨의 평화이기를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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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24
  • ‘남북통일’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역할
    2018년 남북정상회담과 미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는 평화의 환상(幻想)에 취해 있다. 남북한 간의 화해로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왔고, 한반도의 평화는 동북아의 평화 그리고 세계의 평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꿈꾸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평화정책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현실을 더 이상 호도하면 안 된다.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가 남북한의 화해, 즉 우리 민족끼리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처절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한반도의 모든 위기는 외세에서 비롯되었다.  남북통일은 한반도에 존재하는 두 국가가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남북통일과 북남통일이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다. 더욱이 북한은 전체주의적 독제체제이다. 전체주의란 “인간의 행동을 장악하고 사상을 타락시킴으로써 인간을 서서히 파탄시켜나가는 체제다. 오직 지도자만이 의사결정을 할 권리와 책임을 가질 뿐이다”(브레진스키). 북한 핵이 존재하는 한 평화통일은 요원하다. 그렇다고 기독교에서 방관할 수가 없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요, 평화의 종교다.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보호하면서 지키고 있다. 기독교가 나서야 한다. 그러하기에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그 사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선 그동안 진보세력들이 주장했던 통일신학을 범 교단이 함께하는 북한 복음화의 구체적인 대안이 있어야 한다. 둘째 북한 바로알기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북한주민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주체사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북한에서 주체사상은 일종의 북한식 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에 김일성·김정일이 자리하고 있음을 교회에서 강조해야 한다. 셋째 탈북동포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탈북자들의 정착에 힘써야 한다.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지는 경우, 북한 선교의 선도적 역할을 다름 아닌 바로 탈북자들이 담당할 때 성과를 올리기 쉽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도덕적 우위를 앞세워 사회적 통합을 선도해가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1-22
  • 다양성보다 정체성이다
    국내는 물론 세계의 대학들은 무한경쟁으로 이미 치열한 생존을 위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저출산 사회에서 대학의 존립을 위한 중단없는 노력의 경주를 통해 수도권을 비롯한 지방의 후발 대학들 역시 너나할 것 없이 치열한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 특히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대학은 물론 신학생 양성을 위해 운영되고 있는 대학이 다른 대학들과 현실세계에서 경쟁하여 학문적·사회적 명성을 획득하는 일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일반 대학으로서 다른 대학들과 경쟁을 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대학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는 중대한 과제를 지니게 됐다. 기독교 대학의 정체성이란 대학의 교육목적과 행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독교의 특성 혹은 기독교 학교들의 설립이념과 근본적 교육목표를 규정하는 기독교의 본질을 의미한다. 이러한 본질은 곧 복음으로, 이러한 정신과 신앙은 학교의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구성하는 일종의 내적 연결 축이된다. 이번 안양대사태를 비롯하여 각 기독교 대학들은 현재 대학 정체성 유지와 존립을 위한 강제적 변화의 기로에 서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특히 대학 이사회를 비롯하여 교원들이 다양성이라는 사회적 기류속에 비 기독교인들이 다수 참여하여 의사결정권을 행사하여 이러한 갈등이 더욱 커지고 있다. 기독교대학이 일반대학과 다른 점은 채플 뿐만이 아니라 모든 교과목을 기독교적 관점으로 접근하는데 있다. 모든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이 기독교 교육의 범주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교수들이 먼저 확고한 신앙을 바탕으로 교육에 임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 사학들의 교육 자율성이 확보되지 못하면서 부정적 요소들이 나타나면서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응도 점처 시급해지고 있다. 기독교 학교들은 실존적인 상황을 정확히 분석하고 미래를 위해 기독교학교 정체성 확립을 위한 대안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1-22
  • 이제는 한국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 ― 다시 맞는 새해의 다짐
    한국교회는 새해를 맞아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새로워진 모습으로 출발해야만 교회로써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기이다. 이미 교회 밖으로부터 신뢰를 상실한 한국교회는 고질적인 병리적 현상을 치유하고, 사회를 향해 새로워진 모습으로 가야 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물량주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워진 모습이 아니면, 사회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무엇보다는 개혁과 갱신을 통해 새로워지고, 사랑의 실천을 통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특히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된 모습으로 사회발전에 공헌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교회 밖에서 ‘사랑의 실천’을 감당해야 한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일컬어진다. 그 사랑은 댓가가 없는 무조건적인 것을 말한다. 사랑의 본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기독교에 있어서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가장 큰 계명이며, 율법의 완성이고, 예수가 주신 새계명이다. 그래서 믿음이나 소망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최우선적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교회 밖의 사회와 나라,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사랑을 실천할 때만이 한국교회가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보며 줄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땅에 사랑의 공동체를 세울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의 실천에 앞장 서야 한다. 하나님이 오늘의 한국교회에 주시는 명령임을 자각하고, 사명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개혁’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개신교가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개혁’이다. 개신교 자체가 중세의 타락상에서 벗어나 새롭게 다시 태어나려는 몸부림에 의해 탄생한 것이기 때문에 ‘개혁’은 어떻게 보면 개신교회의 존재근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개혁’이 없는 교회는 이미 그 존재의미를 상실했다고도 할수 있다. 한국교회도 이 명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더구나 한국교회는 짧은 역사 속에서 급속한 성장을 이룩하는 동안에 여러가지 부정적인 모습들을 노정시켜 왔다. 윤리적인 타락과 개교회주의, 그리고 분열 등 한국교회의 삐뚤어진 모습은 이제 일반인들에게도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한국교회는 개혁을 통해 새로워져야 한다. 만연된 고질적인 병리적 현상을 치유해야만 새로워질 수 있다.  ◆한국교회는 ‘연합’과 ‘일치’로 하나돼야 한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라고 할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분열은 그리스도의 몸을 손상시키는 동시에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교회가 끊임없이 일치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분열해 왔다.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지고, 연합기관도 하나가 아닌 여러 개로 나누어졌다. 사회를 향한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오늘이다. 이제는 교회의 다양하고 풍부한 전통과 고백은 유지하면서 신앙의 내적인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신앙을 하나로 표현할 수 있는 ‘일치의 표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한국교회가 ‘다양성 속의 일치’와 함께 ‘일치 속의 다양성’도 동시에 추구해 나가야 한다.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로 하나되어야 할 시대이다.  ◆‘교회부흥’과 ‘민족복음화’, ‘세계복음화’에 앞장 서야 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이다. 그 명령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선교초기부터 외쳐 왔던 민족복음화는 아직도 이룩하지 못했다. 또한 세계의 많은 민족이 복음의 빛을 경험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이 지상명령을 힘써 실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특히 교회의 부흥을 재점화시켜야 한다. 교회가 다시 부흥되려면 오늘의 교회마다 안고있는 고질적인 병리적 현상을 치유하고, 사회로부터 신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교회는 사회로 부터 신뢰를 상실했고,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회로부터 신뢰받는 교회로 태어나고, 그 모습으로 교회부흥과 민족복음화, 그리고 세계복음화에 앞장 서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2-31
  • ‘목회자 기본급’제도 준비해야
    한해가 바뀔 때마다 미자립교회의 문제가 화두로 떠오른다. 미자립교회는 말 그대로 아직 스스로 서지 못한 교회를 말한다. 미자립교회의 대부분은 개척교회와 농어촌교회이다. 미자립교회는 자립이 되지 않다보니 목회자에게 충분한 사례비를 주지 못한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어쩔 수없이 ‘목사의 이중직 금지’에도 불구하고 생활전선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다. 미자립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교단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의 경우 ‘교회자립개발원’이라는 총회기구를 뒀고, 기독교침례회는 총회장이 직접 나서서 미자립교회 지원에 대한 대책을 발표했다. 이렇게 지교회나 개인 차원이 아닌 교단이나 총회 차원에서 미자립교회에 대해 지원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그러나 임기응변적인 대책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대안과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몇몇 대형교회에서 미자립교회 지원을 위해 몇 억을 쾌척했다는 뉴스는 반갑고 좋은 것이다. 또 이러한 운동은 더욱 확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확고하고 장기적이며 안정적인 대책수립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런 면에서 교단이나 총회가 소속 목회자에게 일정액의 ‘기본급’을 주는 ‘목회자 기본급’제도를 마련해서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제도는 미자립교회 목회자의 문제, 한국교회 양극화의 문제 등에 대한 하나의 근본적 대책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재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와 ‘신학’의 문제이다. 모든 목사가 부름 받은 동역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라는 의식과 의지가 있다면 시행할 수 있는 제도이다.  새해에는 각 교단별 실정에 맞게 ‘목회자 기본급’ 제도를 도입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리기를 기대해본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2-27
  • 한 해를 은혜 가운데 마무리하자
    인간에게 가장 쉬운 것은 나이를 먹는 것이다. 반면에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어느새 또 한 해가 간다. 모든 사람들이 다사다망 했다지만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새 사람(엡 2:15) 이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면서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서야 한다. 무엇보다 올바른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종교인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과한 귀중한 하나님의 자녀이다(요 1:12). 십자가는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미련한 자들이 되고 있다(고전 1:18).  둘째, 우리는 새 사람으로서 새 사람답게 마무리를 잘하자.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아니라 이 땅위에는 십자가의 ‘피 흘림’에 의한 거듭난(요 3:3) 새 사람들의 평화이기 때문에 주님의 탄생은 역사 속에 계속되어 왔고, 지금도 주님의 탄생은 진행되고 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올수록 새 사람은 자기를 철저하게 관리해 나가야 한다. 셋째, 위에 있는 권세는 물론 국가안보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감사를 해야 한다. 특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물론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건과 단정함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그리스도의 은혜로 재무장하자.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생명이 되신 부활하신 주님 자신이다. 우리에게는 교회생활에서 일소되어야 할 ‘누룩’(마 16:6)이 많이 있다. 누룩은 우리의 대적인 사탄의 최대무기이다. 우리는 근신하여 깨어 있기 위하여 전신갑주를 입고 재무장하여 이들과 싸워야 한다. 우리가 한 해를 보내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곧 하늘의 시민(엡 2:19)으로서 어떻게 그 의무를 다했는가를 생각하는 시간이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2-27
  • ‘목회자 기본급’제도 준비해야
    한해가 바뀔 때마다 미자립교회의 문제가 화두로 떠오른다. 미자립교회는 말 그대로 아직 스스로 서지 못한 교회를 말한다. 미자립교회의 대부분은 개척교회와 농어촌교회이다. 미자립교회는 자립이 되지 않다보니 목회자에게 충분한 사례비를 주지 못한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어쩔 수없이 ‘목사의 이중직 금지’에도 불구하고 생활전선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다. 미자립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교단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의 경우 ‘교회자립개발원’이라는 총회기구를 뒀고, 기독교침례회는 총회장이 직접 나서서 미자립교회 지원에 대한 대책을 발표했다. 이렇게 지교회나 개인 차원이 아닌 교단이나 총회 차원에서 미자립교회에 대해 지원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그러나 임기응변적인 대책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대안과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몇몇 대형교회에서 미자립교회 지원을 위해 몇 억을 쾌척했다는 뉴스는 반갑고 좋은 것이다. 또 이러한 운동은 더욱 확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확고하고 장기적이며 안정적인 대책수립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런 면에서 교단이나 총회가 소속 목회자에게 일정액의 ‘기본급’을 주는 ‘목회자 기본급’제도를 마련해서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제도는 미자립교회 목회자의 문제, 한국교회 양극화의 문제 등에 대한 하나의 근본적 대책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재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와 ‘신학’의 문제이다. 모든 목사가 부름 받은 동역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라는 의식과 의지가 있다면 시행할 수 있는 제도이다.  새해에는 각 교단별 실정에 맞게 ‘목회자 기본급’ 제도를 도입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리기를 기대해본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2-27
  • 한 해를 은혜 가운데 마무리하자
    인간에게 가장 쉬운 것은 나이를 먹는 것이다. 반면에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어느새 또 한 해가 간다. 모든 사람들이 다사다망 했다지만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새 사람(엡 2:15) 이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면서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서야 한다. 무엇보다 올바른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종교인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과한 귀중한 하나님의 자녀이다(요 1:12). 십자가는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미련한 자들이 되고 있다(고전 1:18).  둘째, 우리는 새 사람으로서 새 사람답게 마무리를 잘하자.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아니라 이 땅위에는 십자가의 ‘피 흘림’에 의한 거듭난(요 3:3) 새 사람들의 평화이기 때문에 주님의 탄생은 역사 속에 계속되어 왔고, 지금도 주님의 탄생은 진행되고 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올수록 새 사람은 자기를 철저하게 관리해 나가야 한다. 셋째, 위에 있는 권세는 물론 국가안보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감사를 해야 한다. 특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물론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건과 단정함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그리스도의 은혜로 재무장하자.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생명이 되신 부활하신 주님 자신이다. 우리에게는 교회생활에서 일소되어야 할 ‘누룩’(마 16:6)이 많이 있다. 누룩은 우리의 대적인 사탄의 최대무기이다. 우리는 근신하여 깨어 있기 위하여 전신갑주를 입고 재무장하여 이들과 싸워야 한다. 우리가 한 해를 보내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곧 하늘의 시민(엡 2:19)으로서 어떻게 그 의무를 다했는가를 생각하는 시간이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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