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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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바른 후보를 뽑는 선거가 되자.
       윤석열 대통령 파면으로 인한 21대 대통령 보궐선거가 6월 3일로 정해졌다. 선거에 관심을 갖고 투표에 적극 참여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책무이다. 나의 투표권 행사를 위해 우리 현실의 정치, 사회, 경제가 성경의 원리에 맞는지를 평소에도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라의 주권자인 국민이 나랏일에 무관심할 수는 없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마6:10)기도하며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투표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우리의 투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력을 바르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선거는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딤전2:2)을 위한 민주주의의 척도다. 올바른 선거는 한 국가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킴은 물론 경제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선거가정치적 제도지만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파급력은 엄청나다. 역사는 선거가 바꾼다. 선거의 주인공은 유권자다. 깨어 있는 유권자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국가의 부(富)를 키운다. 정의, 법치, 자유, 배려 등 사회의 미덕이 자라나는 토양도 결국 유권자가 가꾼다. 단순히 당선을 위해 외쳐대는 구호, 국가보다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정책, 국가의 지속적 번영을 해치는 현혹적 수사 등을 구별하는 혜안을 갖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유권자가 자신들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대중의 어리석음’이라는 함정에 빠진다. 다수결이 민주주의를 이끄는 기본원리지만 다수결이 중요한 진짜 이유는 수의 많음보다는 다양함 때문이다. 현혹적 구호에 매몰된 다수는 자칫 국가의 백년대계를 흔든다. 또한 공명한 선거는 또 하나의 과제다. 자유 보통 비밀 직접이라는 선거의 4대 원칙이 지켜지는 공정한 룰을 만드는 것은 정치권의 몫이지만 우리는 6·3대선을 대한민국을 정치·경제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깨끗하고 공명한 선거는 대한민국의 얼굴이기 때문에 기독인들의 바른 자세가 중요하다. 이를 위하여 기도하자.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다(롬13:1). 하나님은 국가와 가정, 그리고 교회를 세우셨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태어날 때 한 가정에 속하게 되며 동시에 한 국가에 속한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던 시대에, 사도 바울은 로마에 굴복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세상 권세도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하지만 육신이 사는 동안에는 국가의 법과 제도와 관원들을 거스리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우리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 한다. 따라서 대선 후보자들이 하나님의 통치 원리와 방법에 얼마나 합당한가를 살펴봐야 하겠다. 만약 자신의 이익이나, 집단주의에 매몰되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후보를 선택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길은 오직 올바른 투표밖에 없다. 이념과 우상에 매몰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책임질 후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판단하여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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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2
  • [사설] 이 세상에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자.
      ‘2025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가 4월 20일 오후 4시 서울 강남구 광림교회에서 개최됐다. 특별히 올해는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오전 인천 제물포항에 언더우드·아펜젤러 선교사가 공식 입항해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가 시작된 지 140주년을 맞는 해다.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담아, 한국 71개 교단과 전국 17개 지역 기독교연합회도 동일한 주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 정신을 되세겼다. 부활절(復活節)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부터 3일째 되는 주의 첫날인 일요일에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최대 축일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느 때부터 인가 절기로서 관습화되고 형식화 되고 있다는 우려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교회사에서 부활절이 언제냐는 문제를 두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간의 논쟁이 계속되다가 서기 325년 니케아회의에서 춘분이 지난 뒤 최초의 보름달이 지난 첫 주일을 부활절로 지키기로 결정하여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으나 부활의 의미가 절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짜는 성경에 기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지키는 성탄절인12월 25일은 예수님 탄생하신 날과는 상관없는 날이다. 성경에 그런 기록이 없다. 그러나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달력으로 니산월 정월 14일,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사흘 후에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달력 니산월 14일의 3일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양력으로는 3월 하순에서 4월 초에 항상 연결이 된다. 그래서 이때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때가 확실하다. 바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봄을 영어로 'SPRING'이라고 그러는데 그 의미는 ‘확 튀어 오른다’ 즉 봄에는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이기 때문에 'SPRING'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자연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그 부활을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이만큼 확실한 사실이기에 이를 증거 해야 한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인이 믿는 모든 것이 허사(虛事)가 된다. 우리의 구원도 헛것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은 역대의 모든 사람들의 삶도 헛것이 된다(고전15:17-19).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있어야 우리의 믿는 모든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구약에 예수님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있었고, 그분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더욱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사도들의 행적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이 잡힐 당시 뿔뿔이 도망치던 그 비겁자들이 부활을 직접 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의 믿음을 일상화해야 한다. 우리는부활절을 맞아 절기로서 외형적인 모습에 치중하기보다는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 안에서 ‘하나 됨’으로 많은 영혼들이 부활을 체험하여 부활의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세상에 증거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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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2
  • 아동돌봄을 위한 사역에 매진하자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심각한 상황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하 상황에서 기독교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란 성경말씀을 기억하고 출산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성도들에게 출산을 하는 것을 권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사람들이 출산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여건을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아동돌봄이다. 이러한 아동돌봄에 교회가 앞장을 서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사역에 동참을 하고 있다. 특히 학생들의 학교 후부터 부모들의 퇴근까지의 돌봄공백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자식들을 학원으로 보내는 부모들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2021년에 발표된 교회의 돌봄사역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둘째 출산 계획이 없는 워킹맘 중 41%가 돌봄 문제가 해결된다면 둘째 출산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교회가 아동돌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큰 이유이다.동일한 조사에서 교회 운영의 돌봄기관 이용 의향률을 보면 기독교인 어머니는 84%가 의향률을 밝혔다. 그리고 비기독교인 어머니도 29%가 이용을 원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교회가 이러한 사역을 해야할 필요성이 보인다.    꼭 출산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교회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섬길 필요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야 한다. 또 많은 성도와 시민들이 이러한 부분에 필요를 느낀다. 교회가 이러한 필요를 체움으로써 사랑을 흘려내보낼 필요가 절실하다.    위 조사에서 돌봄 사역을 하지 않는 목회자 중 앞으로 돌봄 사역을 할 의향이 있는 목회자는 74%에 달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돌봄사역에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돌봄사역은 작은교회부터 큰교회까지 모든 교회가 할 수 있는 사역이다. 한국교회가 돌봄사역을 하기 원하는 교회들이 사역을 잘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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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2
  • 산불피해 복구에 교회가 힘을 모으자.
      경북 의성과 안동 등 경상권에서 발생한 대형산불이 빠르게 인근 지역으로 확산하면서 그 피해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3.28 06시 기준 사망 28명, 중경상 65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주택 117동을 포함한 시설물 3481곳과 이재민은 2407가구 8079명에 이르고 있으며 산림 4만8150ha의 피해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행안부는 이재민들이 재난트라우마로 불안해 하지 않도록 심리회복 지원도 적극 실시하고 있으며, 구호협회 등 민간단체는 기부금 모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매년 우리나라는 연평균(15-24년)546건의 산불이 발생하여 4,003ha의 산림이 소실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기후변화 등의 원인으로 전 세계적으로 초대형 산불이 자주 발생하여 산불이 범국제적인 재난으로 부각되고 있다. 또한 산불은 큰 피해에 비해 원인은 사소한 부주의로 발생하고 있으므로 사전 예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대형산불 등 큰 재난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하는 일이니만큼 정치권은 당리당략적 시각보다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협조해야 할 것이다. 특히 국민생명과 안전과 직결되는 재난 상황에 대해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교회도 예외일 수 없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복구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재난의 극복은 정치인이나 특정인들의 가시적인 보여주는 복구가 아니라 국민 전체가 나서야 되는 상황이다. 다행스럽게 우리 국민은 위기 앞에 강한 민족적인 저력이 있다. 그러나 현실이 너무 어렵다. 정치적 갈등이 심화된 속에서 경제적인 위기까지 겹치고 있다. 우리는 7년의 임진왜란, 36년의 일제강점, 6.25의 폐허는 물론 금모우기운동 등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 나라를 바로 세웠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견인했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재난은 우연한 것이 아님을 믿고 있다.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주관하에있기 때문이다.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온역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전 앞과 주의 앞에 서서 이 환란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대하20:9). 우리가 재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모든 재난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자 경고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그의 선한 뜻을 이루는 역사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임을 깨닫고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말씀이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경고하는 목적은 재난에 앞서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며, 재난 중에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앞장서서 이 재난을 극복하는데 ‘사랑의 행함’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교회마다 긴급재난이 발생할 경우 특별한 절차 없이 바로 집행할 수 있는 재정을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때에 한국교회는 피해지역 교회들은 몰론 일반 재해민들에게 숙소와 식자재를 지원하는 등 이재민을 위한 사역을 적극적으로 나서는데 힘을 모아 ‘고난과 함께하는 교회’가 됨으로써 이 땅에 복음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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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2
  • 한국교회, 갈등 조정자의 역할을 감당하자
      지난해 12월 3일 있었던 윤석열대통령의 계엄선포 이후로 한국사회는 양극화 현상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도 양극화 현상이 심각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가 분열을 멈추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로 나가야한다.    예수님은 팔복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서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히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로마서 12장 18절도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과 19절에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화평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화평함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화목하게 하는 조정자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 상임대표이자 기독교학술원 원장인 김영한박사도 이러한 사실을 잘 지적하고 있다. 김박사는 ”우리 뜻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기독교는 사회혼란을 부추기기보다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교회가 사회적 갈등을 키우기보다는 통합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분열로 인한 피로도가 상당하다. 특히 상대진영을 악마화하는 모습이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타파하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목하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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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5
  • 사순절 기간 ‘십자가의 도’를 실천하자.
       사순절(四旬節, Lent)기간이란 2025년 4월 20일 부활절로 부터 46일 전의 기간으로서 주일을 제외한 40일간(四旬)에 십자가의 고난을 체험하는 시간을 말한다. 그 의미는 부활절을 기다리면서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훈련의 시기이며,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로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사순절기간을 지키는 문제를 두고 찬•반의 양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순절을 거룩하게 지켜야 된다는 찬성측은 모든 교회의 오래된 일반적인 관행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반대측은 주로 미국의 거듭난 복음주의자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체험은 일정기간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일상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순절 기간을 특별하게 지키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사순절 기간이라도 ‘십자가의 도’(고전1:18)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영적성장을 지키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세상 끝날까지 전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책망하며 교회의 설립과 통합의 유일한 기반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먼저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그들의 결여된 영적 분별력으로 인해 미련한 것으로 취급되는 반면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이중성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지혜로 된 절대 유일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면 언제나 분열과 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든지 단점과 실수와 잘못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지나치게 믿거나 따르지 말고,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을 중심으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하며 그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자기 계획, 자기주장, 자기 고집, 자기 욕망, 자기 의지, 자기 이상, 자기 행복을 버려야 비로소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사순절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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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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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활을 시대적 가치로 부활시키자
    부활은 인간의 이성이나 지혜로 알 수 없다. 부활을 바로 알고, 부활의 사람이 바로 되고, 부활한 자의 삶을 바로 살아가는 것은 전적인 성령 하나님의 계시적 은총이다. 부활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이요, 기독교인의 삶의 돌쩌귀요, 기독교윤리와 문화의 코드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믿음도 헛것이요, 기도도 헛것이요, 예배도 헛것이요, 그 어떤 사랑과 헌신도 헛것이다. 부활신앙은 기독교신앙의 본질이요 생명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의 시작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는 생명의 부활로 영생하고, 그리스도 밖에서 죽은 자는 사망의 부활로 영생한다. 석가도, 공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부활은 기독교인의 소망이다. 만일 부활의 소망 없이 이 땅의 것만 바라고 산다면 기독교인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고전 15:19). 부활의 그 날 하나님이 주신 시간, 재물, 재능에 대한 상과 벌의 계산이 있음을 기억하고 오늘을 살아내야 한다. 우리가 현재 받는 고난을 족히 이길 수 있음은 장차 받을 부활의 영광 때문이다. 설교란 죽음으로 끝나는 땅의 꿈을 몰수하고 부활로 시작되는 천국의 꿈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맹목적이고 무책임한 천국에로의 도피가 아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그러나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부활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낼 책임이 있는 것이다. 부활의 그 날 신랑 되신 주님 앞에 서게 된다는 불타는 소망이 우리의 삶을 성결한 신부로서 살아가게 할 것이고 영원한 저주로 떨어질 우리의 형제들을 긍휼히 여기어서 구원코저하는 선교의 열정으로 살아가게 할 것이다. 부활신앙을 지구촌 신유목민사회의 시대정신으로 부활시키자. 주님은 다시 오신다. 심판주로 오신다. 그 날 역사의 막이 내릴 것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이 열릴 것이다. 그 날을 준비하자. 부활, 교회 안에서 교회 밖으로, 지구촌에서 천국으로 부활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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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18
  • 우리 주위에 있는 장애인을 사랑하자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제5차 장애인종합대책안에 따르면 ‘모두가 누리는 포용적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비장애인과 격차 없이 자립생활을 할 수 있는 장애인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장애인이란 신체 일부에 장애가 있거나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어서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장애인복지법 제정을 통해 장애인들도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지원을 하고 있으며, 장애인 복지와 장애인 인권이 중요해지고 있다. 동 대책에 따르면 장애인은 전체인구의 5%인 251만 명 수준을 2010년부터 유지하고 있으며, 고령화로 장애 노인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사회적 돌봄이 더 필요한 발달장애인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의 장밋빛 대책은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장애인 문제는 범정부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범사회적인 모두의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전체인구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따라서 기독교인 천주교와 개신교에서 각자의 실정에 맞는 장애인 주일 등을 제정하고, 이웃의 장애인을 비롯한 소외계층을 돌아보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 속에서 장애인 문제를 더욱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장애인을 구분할 때에 육신적인 부자유에서 오는 육신적인 장애인과 영적인 미숙에서 오는 영적장애인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 육신적인 장애나 영적인 장애는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장애인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종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요한복음 1장 14절)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사역은 장애인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능력의 모습들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4-09
  • 사순절 기간 영성 향상을 도모하자
    사순절은 부활절로부터 46일 전의 기간으로서 주일을 제외한 40일간에 십자가의 고난을 체험하는 시간을 말한다. 그 의미는 부활절을 기다리면서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훈련의 시기이며,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로 지켜지고 있다. 그러면 이 기간에 기독교 영성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사순절 기간을 지키는 문제를 두고 찬·반의 양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순절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찬성 측은 모든 교회의 오래된 일반적인 관행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순절 시작은 주후 6세기의 그레고리 1세 교황 때부터이다. 처음 1세기에는 단 40시간으로 지켰는데, 이는 예수께서 무덤 속에서 40시간 동안 있었던 것과 일치시키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3세기에 이르러서는 부활주일 전 한 주간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지키다가, 나중에 30일간으로 연장되었으며, 마침내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처음 ‘40일’로 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40일간의 절기는 7세기 이후부터 40일간의 사순절을 철저히 지키는 교회의 절기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반대 측은 주로 미국의 거듭난 복음주의자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체험은 일정 기간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을 살아야 한다(갈라디아서 2장 20절)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그 근거로서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한다(갈라디아서 4장 10~11절)”는 말씀을 제시하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이 안식일 등 종교의식을 지키는 데로 돌아간다면 그들에 대한 바울의 수고가 헛됨을 지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절기에 연연한다면 종교인이 될 것을 염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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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04-09
  • 동성애반대는 ‘설득’으로
    동성애문제에 대해 대다수 한국교회는 반대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기독교신앙의 근거인 성서가 동성애를 죄악이라 명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윤리적으로나 국민정서 상으로도 남자와 남자 또는 여자와 여자가 서로 성행위를 벌이는 동성애는 정상적인 것 또는 바른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특히 교계는 일부 정치권에서 추진하고 있는 ‘차별금지법’에 대해 가장 앞장서서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교회의 최대 연합기관인 한국교회총연합은 성명서를 통해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동성애는 ‘가증한 죄악’이라고 천명했고, 차별금지법은 또 다른 역차별을 낳을 수 있기에 반대한다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차별금지법이 내포하고 있는 가장 큰 위험은 동성애 비판과 반대를 법으로 처벌하겠다는 발상이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비판과 반대를 법으로 처벌하겠다는 것은 과거 나치와 공산당 일당독재를 연상시킨다. 동성애자들의 인권만 있는 게 아니라 동성애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양심과 인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애 비판이 혐오와 증오와 폭력이라는 방식으로 진행돼서는 결코 안 된다. 동성애 반대 집회를 하면서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동성애를 찬성하는 사람들에게 욕설을 하는 것은 기독교적 반대가 아니다. 비판은 감정에 치우쳐 싸움을 하는 게 아니라 이성과 논리로써 상대방을 설득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퀴어축제반대운동본부 측이 오는 6월 1일 예정된 동성애자들의 퀴어축제에 대해 “우리도 축제의 방식으로 반대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계속해서 동성애반대집회가 벌어질 것이다. 그 자리가 혐오와 증오와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 아닌 설득과 승리의 노래가 가득한 축제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될때 일반 시민들도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계의 목소리에 더 많은 지지를 보낼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4-03
  • 사순절 ‘절제’의 의미를 되새기자
    사순절은 부활절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을 말한다. 이 기간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다리며 신앙을 성장시키고 영적 훈련을 통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이다. 처음 사순절은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서 40시간동안 있었던 것과 일치시키기 위해서 40시간이었다가 부활주일 전 한 주간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늘어났다. 또 나중에 30일간으로 연장되었고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사십일로 정하게 됐다. 과거 사순절 기간에는 각종 오락행위가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는 것,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등 호화 생활 등을 자제하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기간으로 지켜졌다.    그러나 오늘날 이 절기에 대한 중요성을 많이 놓치고 있다. 행위보다는 의미를 중요시하는 합리적인 세상으로 변하며 절제보다는 기념에 중점을 두며 지내지고 있다. 하지만 삶 가운데 절제를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을 애통해하고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끼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부활절과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 큰 절기를 성대하게 지키는데 반해, 성령강림주일이나 사순절 같은 절기는 간과하고 지내왔다.   사순절 기간동안 뭔가를 자제하거나 또는 절제를 하는 것은 이 기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참회의 기간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기독교인들은 이 기간 중에는 오락을 멀리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등 경건한 삶을 스스로 실천해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걸었던 십자가의 행진에 동참하고 고난의 길을 체험해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그리스도의 교훈과 복음을 묵상하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사순절 기간에는 우리 자신의 욕구를 절제하고 주님을 더욱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길 바란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4-03
  • 다음세대가 사라지고 있다
    선진국의 문턱에서 허덕이고 있는 대한민국은 결혼 기피증과 저출산으로 경제활력 저하를 비롯해 전통적 가정의 시스템 파괴에 이르는 홍역을 앓고 있다. 여기에다 급속한 노령화로 인해 다음세대에 대한 희망적 기대도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한국교회도 이같은 문제에서 예외가 아니다 젊은이들이 사라져가는 것은 농어촌의 문제가 아닌 사회전반의 문제로 인식된지 오래다. 결혼기피와 저출산은 우리의 사회를 어렵게 만드는 중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극심한 저출산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판에 미래 세대까지 결혼을 기피하고 자녀 출산을 꺼리는 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미래 우리사회를 책임질 다음세대들의 생각도 희망적이지 않다. 현재 고교에 다니는 청소년들이 결혼을 기피한다는 연구보고서는 비관적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내놓은 ‘저출산·고령사회 대응 국민 인식 및 욕구 모니터링’ 보고서를 보면 조사대상 중·고교생 가운데 52.7%가 ‘결혼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별 문제가 없다’고 답변했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나 일을 하기 위해 결혼을 안 할 수도 있다’고 대답한 청소년도 63.6%에 달했다. 과거 가부장적 세대의 인식에서 벗어나 청소년들이 결혼을 의무가 아닌 선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확산된 탓도 크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더라도 직업을 얻기 힘들고, 결혼과 일 또는 학업을 병행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상황이 미래의 사회구성원인 다음세대들로 하여금 결혼과 자녀기피 의식을 키우는 것은 아닌지 고민할 일이다. 결혼기피와 저출산 문제는 더 이상 국가와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결혼 기피와 저출산은 우리 경제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중요 요인이다. 이제는 교회도 청소년을 대상으로 결혼 출산 양육 등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에 나서야 한다. 청년들과 다음세대들이 책임 있는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3-26
  • 이단의 기준은 ‘십자가의 도’이어야 한다
    한기총 전광훈 대표회장이 새로 취임하면서 지난 3월 6일 그동안 교계의 현안의 하나였던 변승우 목사의 이단성 문제를 전임대표회장이었던 길자연·이광선 목사 재임 시에 검토되었던 내용을 그대로 추인하는 형식을 들어 과감하게 해제하였다. 그러나 2010년 당시에 제기된 교계의 찬반의 문제는 지금도 여전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른바 변목사의 이단성을 끝까지 주장하는 측에서는 대형교단들이 이단으로 정죄한데다가 독선적인 선교의 문제를 제기하는 반면에 찬성하는 측에서는 한번 이단은 영원이 이단일 수 없으며 충분한 검증을 통하여 이단해제는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그동안 이단성 논란의 문제는 다른데 있다. 이단성의 중심기준이 소위 정통교단의 교리와 헌법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라면 구교인 천주교에 비하여 신교인 개신교는 이단이다. 이것은 자신들의 교권을 지키기 위한 꼼수였음이 2000년 교회사에서 많이 들어났다. 또한 이단을 연구하고 주장하는 세력들의 전문성이다. 특정세력들이 자신들의 생존의 수단으로 이단으로 매도하는 현상이 너무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라고 하는 사역자들의 자질의 문제가 더해지고 있었다. 그러면 그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이 말씀 속에 그 기준이 있다. 여기서 ‘십자가의 도’라고 할 때에 ‘도(道)‘는 영어성경에서 말씀이요, 메시지로 표현하고 있다. 십자가의 말씀은 십자가를 표현하고, 말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바로 ’십자가의 도‘가 이단판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유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진 어린양(요1:29)으로서, 사탄을 심판하는 놋 뱀(요3:14)으로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갖는 한 알의 밀알(요12:24)로서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임을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3-26
  • 신학기 대학가 이단포교를 경계한다
    신학기를 맞아 대학가에서는 종교마다의 포교의 현장이 되고 있다. 기독교라고 하는 천주교와 개신교는 물론 불교와 유교, 심지어 이슬람과 민족종교까지 다양한 모습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저해하는 이단포교에 대하여 올바른 경각심을 갖고 경계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학가의 이단포교의 수단은 다양하다. 이단·사이비 단체들이 회원 모집을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먼저 개인적인 친분을 쌓고 신뢰가 생기면 자신들의 단체로 인도하는 형태다. 예컨대 미술치료나 성격검사, 동아리(영어, 악기, 운동), 스터디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학생들과 접촉하고 있다. 또한 유명 교회와 신학교, 단체를 사칭해 설문조사를 하며 설문지에 기록된 연락처를 통해 집요하게 연락을 시도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성경공부에 참여하게 한 후 강의를 시키며 자연스럽게 포교한다.  이러한 이단의 발흥은 마지막 때가 될수록 더욱더 활발하다. 예수님께서는 “그때가 되면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한다.”(마24:23-24)고 말씀하고 있다. 이들은 양의 옷을 입고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마7:15)라고 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요(요일2:22), 거짓 선지자이다. 이 문제는 사이비·이단뿐만 아니라 정통교회 속에서도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단포교에 현혹되지 않은 길은 성도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이단을 경계해야 된다고 강조하지만은 성도들이 이단을 분별할 수 있는 올바를 믿음을 갖지 않으면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색다른 얘기를 할 때에 미혹되기 마련이다. 목회자들의 임무는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이다. 온전한 성도는 어떤 유혹에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고전2:5)이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3-14
  • 새 학기 신학교육 개혁을 위한 제언
    지금 한국교회는 안팎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신학교육의 미래는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사회 발전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인인데도 불구하고 매년 새 학기가 되면 신학교육의 방향이 흔들리고 있다면서 개혁의 목소리만 있을 뿐이다. 무인가 신학교까지 합하면 매년 목사 후보생으로 적게는 7천 명에서 많게는 1만 명 이상이 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 많은 목회자를 소화할 수 있는 목회현장이 더욱 좁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열악한 조건으로 인하여 신학생 지원자가 감소할 뿐 아니라 일반대학을 갈 수 없는 학생들이 어쩔 수 없어서 택한 곳이 신학교라는 자조적인 여론까지 있다. 여기에 신학교의 부실한 경영은 물론 군소교단의 난립으로 무인가 신학교에서 배출하는 목회자가 교회 숫자를 늘리는 수단으로 전략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신학교는 일반대학과 분명하게 달라야 한다.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학생은 물론 학부모와 교수들에게 특별한 소명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고린도전서 2:5)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 학기를 맞아 한국교회의 신학교육 방향과 관련하여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신학생은 분명하게 ‘거듭난 체험’을 가진 학생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바리새인 니고데모를 향하여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한국교회는 어느 때부터 거듭남의 진리를 잃어버리고 그냥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는 율법을 중시하는 잘못된 종교인의 믿음을 갖고 있다. 신학교육에서는 거듭남의 진리를 가장 기본으로 해야 만이 교육의 방향이 제대로 설 수 있다. 둘째로 신학생들에게 목회자의 분명한 사명의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목회자의 사명은 ‘성도를 온전케 하고, 교회를 바로세우는 것”(에배소서 4:12)이다.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대사(고린도후서 5:20)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그리스도를 올바로 가르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경륜 안에 있는 유일한 길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3-10
  • 부활의 희망 속에서 고난에 동참하자 - 사순절을 맞으며
    사순절을 맞았다. 교회의 가장 큰 절기는 부활절과 성탄절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두 절기 앞에 기다림의 기간을 뒀다. 성탄절 앞에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있고, 부활절 앞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다리는 사순절이 있다. 교회사적으로 엄밀히 볼 때 초대교회에는 사순절이 없었다. 부활을 기념하는 날 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념하며 부활을 준비하는 몇 날을 가졌을 뿐이다. 이러한 짧은 기념은 중세교회에 접어들면서 40일이라는 기간을 정하여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부패와 죄를 애통해 하는 절기가 되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사순절은 비성경적인 절기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순절의 본질은 부활을 기다리는 것과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인간의 공로를 위한 금욕과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낮아짐과 기다림과 고난은 기독교 복음의 정수이다. 사순절을 기간을 지나면서 그리스도인 개인은 십자가의 의미를 삶 속에서 되새기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요즘에는 여러 교회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으니 여기에 참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순절은 개인을 넘어서 한국교회 전체에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자신의 부패와 부족함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낮은 자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극히 일부이지만 몇몇 대형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이 한국교회 전체에 부정적인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를 어떤 범죄 집단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바벨론 포로’와 같은 치욕을 당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순절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낮아짐과 회개가 지금 한국교회에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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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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