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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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정책제안에 힘쓰자
     디가오는 6월 3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등 기독교단체들이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정책을 제시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의 경우는 2012년 치려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부터 이러한 운동을 벌여왔다. 지난 2022년 대선에서는 한국교회총연합과 함께 10대 공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에큐메니컬 성향의 단체에서도 기독교대선행동이라는 단체를 출범하면서 탄소중립 구현과 한반도 평화협정등을 제시한 바 있다.    정치인들에게 기독교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책무 중 하나이다. 기독교적인 정책을 정치인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이 나라에 기독교세계관을 반영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정책은 기독교인뿐 아닌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다. 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는 지난 2022년 대선에서 초저출산 극복정책으로 아동돌봄청을 신설해야한다고 했으며 이외에도 재난상황을 대비한 민관위기 관리시스탬 구축과 유사종교 피해방지를 위한 법률제정 등의 정책들이 있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일반시민들에게 큰 유익이 될 수 있는 정책들이다. 저출산 문제의 경우 국가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며, 재난상황의 극복또한 모든 시민에게 필요한 사실이다. 유사종교로 인해 피해를 보는 시민들을 구제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정책들이 일반 시민들에게도 큰 유익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차별금지법의 제정과 같은 악법반대 운동을 활발히 펼쳐왔다. 이제는 악법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좋은 법안과 정책등을 제시할 때이다. 그리고 이번 선거는 그러한 법안과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좋은 계기이다. 이러한 정책제안의 시간이 이번 선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편화가 되어서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해 모든 시민이 유익이 될 수 있는 정책과 법안을 제사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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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9
  • 어린이를 위한 ‘믿음’의 사역에 매진하자.
       한국교회는 5월 5일 어린이날과 함께 어린이 주일을 지키고 있다. 미국에서는 1880년부터 예배당을 꽃으로 장식하고 '샤론의 꽃, 어린이'라는 제목으로 어린이 예배를 드린 데에서 유래하여 '꽃주일'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방정환, 마해송 등의 어린이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선각자들이 1923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해 어린이 인격보호와 바른 성장에 대한 어른들의 관심과 각성을 촉구하는 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1927년부터는 5월 첫째 주일로, 그리고 1946년에는 오늘날과 같은 5월 5일로 변경되었고, 1957년에는 어린이 헌장이 제정, 공포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교회들도 초창기에는 미국에서 처음 제정된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켜오다가 1956년부터 5월 첫째 주를 어린이 주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린이 주일이라는 절기도 성경에는 없지만 어린이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주일로 지켜지고 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에 대하여 귀하게 여기시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어린아이에 대한 특별한 가르침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잠22:6)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회초리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회초리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23:13-14). 그리고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에게 안식을 주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29:17). 이것은 교회는 물론 부모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다.      따라서 교회는 어린이를 위한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방법으로 디모데의 믿음과 유산을 가르치는 사역이 되도록 하자.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에 속에 있더니 네 속에 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5). 사도 바울은 육신적으로 디모데가 아들이 아니지만, 디모데가 신앙 성장의 합당한 인격을 갖추는데 바울이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딤전1:2)이라고 부르고 있다. 디모데의 거짓이 없는 믿음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던 믿음이 전수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올바른 가정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디모데의 가정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가정은 신앙 교육의 장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유지 발전시키는 일차 기관이며 교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자녀를 하나님의 진리로 양육하는 근본적인 책임은 가정에 있으며 교회 교육과 학교 또는 세속 사회의 교육 간에 생기는 갈등을 신앙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참된 기반이 된다. 뿐만 아니라 자녀를 신앙으로 올바르게 교육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복음 전파 사역과 유업을 물려주는 일과도 깊은 연관을 갖는다(신6:4-9). 현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가 참믿음을 가진 차세대에 대한 교육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어린이 주일을 한 번 지키고끝내는 것이 아니라 평생교육의 출발로서 교회학교의 전문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행함으로써 ‘믿음’의 사역이 부흥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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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9
  • 미혼·기혼 연대하는 공동체를 세우자
     작년 기준, 만 19~34세 청년 5명 중 4명이 미혼으로, 미혼율이 80%를 넘었다는 통계는 한국 사회의 결혼·가정에 대한 인식 변화와 현실적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독교인 역시 예외가 아니다. 2023년 조사에서 전체 기독교인 중 미혼 비율은 40.5%에 달했다. 교회 내 싱글 신자들의 수와 연령이 계속 증가하는 것은 이제 뚜렷한 흐름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경제적 부담, 주거난,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결혼·출산에 대한 가치관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결혼이 더 이상 ‘필수’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가족과 1인 가구가 급증하고 있다. 이는 교회가 전통적 가정 중심의 사역과 인식에서 벗어나, 미혼 신자들을 적극적으로 품고 새로운 공동체의 길을 모색해야 함을 시사한다.    교회는 미혼을 ‘문제’로 여기거나, 결혼만이 신앙적 성숙의 완성이라는 시각을 지양해야 한다. 오히려 사도 바울이 강조했듯, 결혼과 미혼 모두 각자의 소명과 가치를 지닌 삶의 방식임을 인정해야 한다. 미혼 신자들이 교회 공동체에서 소외되지 않고, 자신의 은사와 삶을 온전히 나누며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미혼 성도들이 주체적으로 신앙과 삶을 나눌 수 있는 소그룹, 멘토링, 사역의 기회를 확대하고, 결혼과 출산만을 강조하는 지원정책에서 벗어나 다양한 삶의 형태를 존중하는 포용적 사역이 필요하다.    또한 교회는 ‘올바른 가정’의 기준을 결혼 여부나 자녀 유무로 한정하지 않고, 신앙 안에서 서로를 돌보고 연합하는 공동체로 확장해야 한다. 부부의 수를 늘리는 것보다, 미혼·기혼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서로의 삶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더 본질적인 과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 교회가 미혼의 삶 역시 신앙 안에서 의미 있고,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적극적으로 선포하며, 다양한 가족과 1인 가구를 포용하는 공동체로 나아갈 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진정한 연합과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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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9
  • 올바른 후보를 뽑는 선거가 되자.
       윤석열 대통령 파면으로 인한 21대 대통령 보궐선거가 6월 3일로 정해졌다. 선거에 관심을 갖고 투표에 적극 참여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책무이다. 나의 투표권 행사를 위해 우리 현실의 정치, 사회, 경제가 성경의 원리에 맞는지를 평소에도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라의 주권자인 국민이 나랏일에 무관심할 수는 없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마6:10)기도하며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투표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우리의 투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력을 바르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선거는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딤전2:2)을 위한 민주주의의 척도다. 올바른 선거는 한 국가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킴은 물론 경제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선거가정치적 제도지만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파급력은 엄청나다. 역사는 선거가 바꾼다. 선거의 주인공은 유권자다. 깨어 있는 유권자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국가의 부(富)를 키운다. 정의, 법치, 자유, 배려 등 사회의 미덕이 자라나는 토양도 결국 유권자가 가꾼다. 단순히 당선을 위해 외쳐대는 구호, 국가보다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정책, 국가의 지속적 번영을 해치는 현혹적 수사 등을 구별하는 혜안을 갖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유권자가 자신들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대중의 어리석음’이라는 함정에 빠진다. 다수결이 민주주의를 이끄는 기본원리지만 다수결이 중요한 진짜 이유는 수의 많음보다는 다양함 때문이다. 현혹적 구호에 매몰된 다수는 자칫 국가의 백년대계를 흔든다. 또한 공명한 선거는 또 하나의 과제다. 자유 보통 비밀 직접이라는 선거의 4대 원칙이 지켜지는 공정한 룰을 만드는 것은 정치권의 몫이지만 우리는 6·3대선을 대한민국을 정치·경제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깨끗하고 공명한 선거는 대한민국의 얼굴이기 때문에 기독인들의 바른 자세가 중요하다. 이를 위하여 기도하자.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다(롬13:1). 하나님은 국가와 가정, 그리고 교회를 세우셨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태어날 때 한 가정에 속하게 되며 동시에 한 국가에 속한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던 시대에, 사도 바울은 로마에 굴복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세상 권세도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하지만 육신이 사는 동안에는 국가의 법과 제도와 관원들을 거스리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우리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 한다. 따라서 대선 후보자들이 하나님의 통치 원리와 방법에 얼마나 합당한가를 살펴봐야 하겠다. 만약 자신의 이익이나, 집단주의에 매몰되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후보를 선택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길은 오직 올바른 투표밖에 없다. 이념과 우상에 매몰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책임질 후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판단하여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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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2
  • [사설] 이 세상에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자.
      ‘2025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가 4월 20일 오후 4시 서울 강남구 광림교회에서 개최됐다. 특별히 올해는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오전 인천 제물포항에 언더우드·아펜젤러 선교사가 공식 입항해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가 시작된 지 140주년을 맞는 해다.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담아, 한국 71개 교단과 전국 17개 지역 기독교연합회도 동일한 주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 정신을 되세겼다. 부활절(復活節)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부터 3일째 되는 주의 첫날인 일요일에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최대 축일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느 때부터 인가 절기로서 관습화되고 형식화 되고 있다는 우려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교회사에서 부활절이 언제냐는 문제를 두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간의 논쟁이 계속되다가 서기 325년 니케아회의에서 춘분이 지난 뒤 최초의 보름달이 지난 첫 주일을 부활절로 지키기로 결정하여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으나 부활의 의미가 절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짜는 성경에 기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지키는 성탄절인12월 25일은 예수님 탄생하신 날과는 상관없는 날이다. 성경에 그런 기록이 없다. 그러나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달력으로 니산월 정월 14일,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사흘 후에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달력 니산월 14일의 3일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양력으로는 3월 하순에서 4월 초에 항상 연결이 된다. 그래서 이때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때가 확실하다. 바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봄을 영어로 'SPRING'이라고 그러는데 그 의미는 ‘확 튀어 오른다’ 즉 봄에는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이기 때문에 'SPRING'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자연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그 부활을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이만큼 확실한 사실이기에 이를 증거 해야 한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인이 믿는 모든 것이 허사(虛事)가 된다. 우리의 구원도 헛것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은 역대의 모든 사람들의 삶도 헛것이 된다(고전15:17-19).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있어야 우리의 믿는 모든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구약에 예수님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있었고, 그분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더욱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사도들의 행적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이 잡힐 당시 뿔뿔이 도망치던 그 비겁자들이 부활을 직접 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의 믿음을 일상화해야 한다. 우리는부활절을 맞아 절기로서 외형적인 모습에 치중하기보다는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 안에서 ‘하나 됨’으로 많은 영혼들이 부활을 체험하여 부활의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세상에 증거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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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2
  • 아동돌봄을 위한 사역에 매진하자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심각한 상황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하 상황에서 기독교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란 성경말씀을 기억하고 출산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성도들에게 출산을 하는 것을 권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사람들이 출산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여건을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아동돌봄이다. 이러한 아동돌봄에 교회가 앞장을 서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사역에 동참을 하고 있다. 특히 학생들의 학교 후부터 부모들의 퇴근까지의 돌봄공백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자식들을 학원으로 보내는 부모들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2021년에 발표된 교회의 돌봄사역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둘째 출산 계획이 없는 워킹맘 중 41%가 돌봄 문제가 해결된다면 둘째 출산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교회가 아동돌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큰 이유이다.동일한 조사에서 교회 운영의 돌봄기관 이용 의향률을 보면 기독교인 어머니는 84%가 의향률을 밝혔다. 그리고 비기독교인 어머니도 29%가 이용을 원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교회가 이러한 사역을 해야할 필요성이 보인다.    꼭 출산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교회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섬길 필요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야 한다. 또 많은 성도와 시민들이 이러한 부분에 필요를 느낀다. 교회가 이러한 필요를 체움으로써 사랑을 흘려내보낼 필요가 절실하다.    위 조사에서 돌봄 사역을 하지 않는 목회자 중 앞으로 돌봄 사역을 할 의향이 있는 목회자는 74%에 달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돌봄사역에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돌봄사역은 작은교회부터 큰교회까지 모든 교회가 할 수 있는 사역이다. 한국교회가 돌봄사역을 하기 원하는 교회들이 사역을 잘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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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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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민선교와 한국교회
    통일부 자료에 의하면 남한 입국 탈북자는 2019년 3월 말 현재 32,705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성별 비율은 여성이 2002년을 기점으로 남성을 추월하여 현재 전체 71%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1990년대 중반 북한의 ‘고난의 행군’을 계기로 많은 탈북민이 발생하면서 2005년 이후 지속해서 증가 추세를 유지하다가 2012년부터는 연간 1,500여 명대로 감소하더니, 2018년에는 1,137명으로 떨어졌다. 이 같은 탈북민의 수가 줄어든 원인은 여러 가지 분석이 있을 수 있으나 그중에 김정은 정권의 강화된 탈북자 정책이 주요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그동안 북한선교나 탈북민 선교가 실패했던 이유는 북한 사람들에 관한 성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겉모습과 언어가 같은 동족이라는 인식이 앞섰기 때문이다. 북한은 공산주의 변종인 주체사상으로 70년 이상을 살아온 철저한 이방인이다. 공산주의는 사람이 완전하다고 전제하면서 평등사회를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주체사상은 김일성이 하나님과 같은 전지전능한 절대자요 봉건사회의 왕이다. 인민은 공산당 조직의 노예로서 오직 김일성은 선이고 기타 모든 것은 악이다. 바로 북한은 동물적인 인간중심의 하향평등사회이다.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체계가 붕괴함으로써 사고방식이 단순화되고, 지극히 피동적인 기본 욕구만을 가진 김일성 종교에 길들어진 이교도이다. 탈북민들이 남한 사회 적응과정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웃과의 만남을 두려워하고, 마음이 황무지로서 기경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생각지도 듣지도 못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보편적인 가치를 모른다. 심지어 죄의 기준이 다르다. 그리고 남한사회에서 새로운 우상인 돈을 지향한다. 교회는 돈 주는 곳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나 주체사상이 성경을 모방했지만 가장 중요한 ‘사랑’을 놓쳤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한일서 4장 8절).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탈북민을 염려하고 따뜻한 이웃으로 대한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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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11
  •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애국
    해마다 6월의 호국보훈의 달을 맞을 때에 가장 생각나는 것이 한국전쟁이다. 8·15 해방의 기쁨에 젖기도 전에 남북은 이념 논쟁으로 갈라졌다. 북에는 소련군, 남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신탁, 반탁의 고비를 거치면서 1948년 각각 정권을 수립했다. 북한에는 소련의 사주를 받으며 김일성을 중심으로 평양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었고, 남한에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UN결의에 따라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 세워졌다. 그런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확인한다. 1948년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로 시작되었다. 애국가에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기록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을 향한 놀라운 섭리이자 역사다. 일제하에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국민에게 신앙과 함께 애국애족을 심어준 것이 큰 밑거름이 되었다. 이에 가장 대표적인 분이 주기철목사이다. 신앙인이요 독립운동가로서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고, 국가보훈처로부터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하던 새벽, 이 소식을 들은 빌리 그레이엄목사는 같은 침례 교인이었던 트루먼대통령에게 급한 전보를 보냈다. “수백만 그리스도인들이 위기를 맞은 대통령에게 지혜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음. 공산주의를 즉각 응징할 것은 강력하게 촉구함. 남한에는 비율상 세계 어느 곳보다 그리스도인이 많음. 그들을 실망시킬 수 없음”.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와 지원으로 한국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따라서 국가가 없으면 모든 것이 없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국경이 분명하다. 그것은 조국에 대한 신념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살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신앙과 더불어 애국애족의 마음을 굳게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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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06-04
  •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자 - 「성령강림절」을 맞아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 후 50일 되는 날을 ‘성령강림주일’로 지켜왔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성령강림’은 바른 표현은 아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오순절에 성령이 내렸다는 뜻인데, 이렇게 되면 신약의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이 오시지 않았다는 오해가 발생하기 쉽다. 그러나 창세기 1장 2절에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하는데, 이를 보면 이미 천지창조 때에 성령이 나오고 있다. 또한 구약 곳곳에 성령의 활동에 대한 많은 증거들이 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했다’는 것은 바른 표현은 아니다. 또 신학적으로 보자면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인격’이다. 정통적이고 표준적인 신조에 따르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구분돼서 역사 가운데 활동하시지만, 본질과 영광에 있어서는 ‘한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 또한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막론해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역사하고 활동한다고 봐야 한다. 오순절의 성령사건은 ‘강림’이라기보다는 ‘충만’에 그 특징이 있다. 즉 신약의 오순절 이전에는 왕이나 선지자 또는 특별한 직무를 갖는 사람들에게만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임했다. 그러나 오순절에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자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나타났고, 이제는 은혜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나타나고 있다. 오늘 교회는 성령은 ‘인격으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성경에서 연약한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성령을 ‘불’이나 ‘물’로 비유했지만 그렇다고 성령이 그런 ‘비인격적 사물’일 수는 없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령은 성도 안에 내주하며 성도를 돕고 인도하는 하나님이심을 잘 가르쳐야 한다. 한국교회의 기도와 열심히 전에 비해 확연히 줄었다는 표지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때에 한국교회는 성령의 충만을 어느 때보다 사모해야 할 것이다. 한 영혼을 거듭나게 하고 말씀으로 성장하게 하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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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04
  • 경제위기에 빠진 나라를 위해 기도하자
    재인 정부 출범 2주년을 맞아 경제학자 100명의 설문에서 ‘文정부 경제정책을 D학점’으로 평가하면서 한국 경제 위기가 현실임을 증거하고 있다.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 혁신성장으로 요약되는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경제학자들은 한국 경제에 대해 특단의 대책이 없으면 위기가 현실화할 수 있는 위기 직전 상황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청와대와 정부 일각에서 “위기론은 과장됐다”며 소득주도성장으로 대표되는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정부의 이 같은 상황 인식이 안이하다는 판단을 내린 셈이다. 실제로 국민이 느끼는 체감경제는 더욱 심각하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4월 실업률이 19년 만의 최고인 4.4%, 실업자 수(124만 명) 역시 2000년 이후 최고치이고, 청년층 체감 실업률(25.2%)은 통계 작성 후 최악이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강조한 평화문제는 진전이 있느냐. 이 역시 요원하다. 경제가 뚜렷한 내리막길을 걷고 있지만 정부는 지난 2년간 어려운 여건에도 대외건전성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국민 생활과 직결된 리스크를 안정적으로 관리했다고 자평했다. 정부 출범 직전인 2017년 1분기와 비교해 주요 지표가 일제히 추락했음에도 안이한 인식을 보인 것이다. 정부가 객관적 상황 인식보다는 총선을 앞두고 지지층을 향한 ‘홍보전’에 치중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결국 국가의 위기극복은 국민의 몫이다. 그중에서도 이 나라를 섭리가운데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편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디모데전서 2장 1~2절). 따라서 교회는 물론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어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대통령이나 총리 그리고 나라의 리더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여 영적인 영역에서 세력을 얻을 수 있고 그들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다. 그리하면 이 땅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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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21
  •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길 - 「장로교의 날」에
    오는 4일은 장로교의 날이다. 한국교회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개교회 이름보다 더 익숙한 교단명이고 모든 교회를 장로교회로 아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대표적이다. 세계적으로 큰 교파가 아님에도 감리교나 성결교 등에 비해 한국에서 가장 많은 교세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장로교의 성경적 보수신앙이 한국교회의 성장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세계적으로 성장하는데 장로교라는 큰 울타리가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장로교단은 백 수십여개로 갈라져 끝없는 분열을 이어오고 있다는 아픔도 존재한다. 예장과 기장, 합동과 통합의 분열로 시작된 부끄러운 역사가 한국교회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복음을 쇠퇴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장로교회의 분열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나누는 일을 일상화하여 교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저하시키고 이단들이 침투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또한 대형교회들의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응하는 교단총회의 행태가 비판의 도마에 오르면서 장로교단의 연합과 일치에 부끄러운 오점을 남기고 있다. 그동안 한장총은 ‘한 교단 다 체제’ 논의를 매년 제안하고 이를 성사시키기 위한 다각적 노력을 견지해 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연합총회’란 하나의 이름을 사용하되 현재 각 교단의 정치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것이다. 현재까지 이를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이 보이지 않고 있으나 연합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 장로교단들이 이러한 한국교회의 바람대로 더욱 연합하고 힘을 모아 분열보다 통합을 앞세우고 한국의 장로교단이 세계 복음화의 사명에 매진하도록 협력하고 하나되는 일에 앞장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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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21
  • 겸손한 선교가 필요하다
    서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무장세력에게 붙잡혀있다가 프랑스군에 의해 구출된 한국여성 A씨가 여행자제 지역에서 피랍된 것으로 알려지며 온라인상에서 비판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특히 프랑스 군인 2명이 A씨를 비롯한 인질 4명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무장세력과 교전 중 사망하면서 과거 여행금지 구역에서 피랍되어 몸값을 받고 풀려난 샘물교회 선교팀 사건이 다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국내적 비판여론을 의식한 듯 올해 개교회별 단기선교 계획은 지난해에 비해 축소되거나 미뤄지는 추세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선교팀의 안전문제가 대두되면서 공격적이며 경쟁적인 해외선교에 대한 다시 한번 도마에 올랐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교회의 선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적인 선교행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슬람권 국가 등 선교 위험국가만 찾아서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보복성 테러까지 자행되는 곳에서의 선교활동은 더욱 자극적이고 홍보 효과도 극대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현지문화와 관습을 배대한 가운데 벌이는 전투적인 선교활동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시된다. 더욱이 일방적인 선교와 교세확장을 위한 무불별한 경쟁식 선교와 배낭여행과 다를바 없는 선교여행은 선교의 본연의 가치도 상실시키고 있다. 오지나 위험지역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숫자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 문화까지 생기면서 오지를 먼저 점령하고자 국내교회들이 경쟁을 벌이는 등 본말이 전도된 해프닝도 벌어지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한국교회 안에서도 해외선교를 바라보는 인식이 상당부분 개선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피랍사건 이후 선교팀에 대한 안전과 외교부 권고를 주의깊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으며, 일부 교회는 위험지역을 선교대상국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공격적인 선교에서 벗어나 철저한 반성을 통해 겸손한 선교가 필요하다. 위기관리 대처능력 교육을 받고 현지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며 무분별하고 일방적인 모습을 탈피해야 한다. 화합과 일치된 현지 선교활동을 통해 연합의 모습을 보일 때 사회에서 바라보는 ‘선교’의 모습도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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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15
  • 퀴어축제는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다
    2019년 서울퀴어문화축제는 강연회, 서울핑크닷, 퍼레이드, 영화제 등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중에 퍼레이드 차량 콘셉트은 썸머 크리스마스로 칭하고 있다. 서로를 사랑하고 축복하는 크리스마스는 퀴어 축제와 가장 잘 어울리는 날 중에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퀴어연극제는 이번 차량을 퀴어들의 사랑과 행복을 위한 크리스마스 파티장으로 꾸미고 있다. 퀴어축제의 기원은 동성애에서 비롯되었다. 동성애는 고대 근동 지방, 소돔 등에 많이 있었는데, 동성애자라는 영어 단어가 ‘소돔’에서 유래되었다. 성경에는 ‘동성애’를 남색, 남창, 미동, 남자와 동침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성애는 짐승과 교접하는 ‘수간’과 함께 언급되어 있을 정도로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구약시대에 동성애는 이방신을 섬기는 신전에서 매음을 하던 남자들과 남자들끼리 성적 관계를 갖던 일이 성행하였으며 우상숭배하던 경건치 못한 사람들의 행위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염되었다. 결국 퀴어축제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다. 시위이며, 동성애 법제화를 위한 국민정서 전환을 꾀하는 ‘동성애 옹호진영의 전술’이다. 따라서 이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기에 너희는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경고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조급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시대를 향한 경고이다. 특히 일부 기독교는 물론 정치세력까지 부화뇌동하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기독교가 바른 위치를 찾지 못한 데서 비롯된 슬픈 때의 현상들이다. 또한 경건의 능력은 교회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생생한 영향력을 지닌 실재적이며 실행적인 효능을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내실을 기함으로써 경건의 능력을 회복할 때에 퀴어축제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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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15
  • 한기총의 신중한 행보가 필요하다
    한국기독교총연합은 1989년 한경직목사, 조용기목사, 최 훈목사 등 당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목회자들이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서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해 출발했다. 또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사단법인 허가를 받았다. 한국교회연합과 분열되기 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함께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연합기관으로서 사명을 감당했다. 한기총은 창립 20주년을 맞아 결의한 정관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연합기구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또 “이는 요동하는 세파 속에서 복음주의적 신앙고백의 토대에 굳건하게 서서 힘써 기도하며 정부와 사회를 향한 올 곧은 한 목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실현함으로써 한국 기독교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데 매진한 결과”라고 밝혔다. 우리 모두는 한기총이 정관에서 스스로 밝힌 대로 한국교회의 연합기구로서 또 정부와 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실현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의 뜻 있는 사람들은 한기총이 이와 같은 초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한기총이 지나치게 ‘정치화’됐다는 비판이다. 한기총은 이러한 비판과 우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거기에 귀를 닫아 버린다면 그것은 연합기관의 자세는 아니다. 또한 보다 신중한 행보가 절실히 필요하다. 교회연합기구라는 본래의 사명에 충실할 때 한기총은 지금보다 더 큰 영향력과 정치력을 발휘할 것이다.  지난 한기총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전광훈회장은 “사도바울은 복음 안에서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다 하나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오늘 대한민국도 복음 안에서 전라도니 경상도니 하는 구분 없이 하나가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한기총이 지역교회를 모으는 구심점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발언이 진심으로 실현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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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08
  • 평화와 대화는 복음의 본질이다
    지난달 27일 전쟁과 분단과 대립의 상징인 비무장지대(DMZ)에서 시민들이 평화를 염원하며 손에 손을 마주잡는 인간띠잇기 행사를 벌였다. 4·27판문점선언 1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교회총연합이 한국교회를 대표해서 참여했다는 점이다. 한교총은은 임진각에서, 교회협은 철원에서 각각 기도회를 열었다. 인간띠잇기는 비무장한 민간인들이 서로 손을 잡음으로써 자신들의 요구를 알리는 평화적인 방법이다. 이는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이 구소련 지배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1989년 시작했다. 당시 200만 명이 손을 맞잡고 620㎞를 늘어섰고, 결국 1991년 이들 국가는 독립을 이뤘다. 평화의 손이 총과 대포를 이기고 만 것이다. 지난해 4월 27일 남과 북의 두 정상은 판문점에서 만나서 비핵화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약속했다. 지금도 ‘도보다리 회담’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평화 프로세스는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원인에 대한 여러 분석이 다양한 관점 속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쟁이 아닌 평화, 대결이 아닌 대화가 기독교의 복음이 근원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뛰놀 것이다’는 선지자의 예언은 종말론적 희망으로서 기독교의 지향점이다. 우리는 독일의 통일이 니콜라이교회에서 행하던 촛불예배에서 비롯됐음을 잊지 않고 있다. 예배와 기도가 이데올로기와 무기를 끝내 이기고 만 것이다. 지금 한반도에 다시 교착상태가 시작된 것은 우리들에게 평화를 위해 더 기도하고 헌신하라는 주님의 요구임을 깨닫자. 교회협은 계속해서 평화운동에 매진하겠다고 밝혔고, 한교총 또한 교회협과 보조를 맞춰 평화를 위한 일에 나서겠다고 한다. 평화를 위해 한국의 모든 교회가 합심으로 기도할 때 평화와 회복의 날은 앞당겨질 것이다. 평화를 위한 모두의 기도에 한국교회는 하나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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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05-01
  • 어린이의 신앙교육이 필요하다
    어느새 5월을 맞는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특히 어린이날이 그 중심에 있다. 해마다 어린이날이 되면 어린이를 위한 많은 얘기가 오간다. 그러나 세상은 어린이들이 성장해 가기에 더욱더 “패역한 가운데 가시와 올무”(잠언 22장 5절)가 너무 많아지고 있다. 가장 큰 문제가 인터넷을 비롯한 스마트폰 등 현대 전자기기들이다. 어린이가 사물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온통 이런 기기들로 생명의 정상적인 사고의 길을 차단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잠언 22장 6절). 아이에게는 징계하는 회초리(잠언 22장 15절)가 필요하다. 회초리와 꾸지람이 지혜를 주지만 혼자 내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한다(잠 29장 15절). 그리고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에게 안식을 주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언 29장 17절). 이것은 부모는 물론 어른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다. 첫째 부모들은 이런 찬송을 부를 수 있는가?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찬송가 234장). 부모가 성경을 가르치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둘째 교회가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책임감 있게 지도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1905년부터 주일학교가 생겼다고 한다. 당시는 이승만 대통령도 세계 주일학교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특히 외국인으로서는 브라운, 하인즈, 언더우드 이런 사람들이 우리나라 주일학교 교육의 공헌자라고 할 수가 있다. 그 이후 주일학교가 오늘의 대한민국의 초석이 되었다. 교회들이 어린이 신앙교육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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