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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후보를 뽑는 선거가 되자.
윤석열 대통령 파면으로 인한 21대 대통령 보궐선거가 6월 3일로 정해졌다. 선거에 관심을 갖고 투표에 적극 참여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책무이다. 나의 투표권 행사를 위해 우리 현실의 정치, 사회, 경제가 성경의 원리에 맞는지를 평소에도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라의 주권자인 국민이 나랏일에 무관심할 수는 없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마6:10)기도하며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투표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우리의 투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력을 바르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선거는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딤전2:2)을 위한 민주주의의 척도다. 올바른 선거는 한 국가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킴은 물론 경제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선거가정치적 제도지만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파급력은 엄청나다. 역사는 선거가 바꾼다. 선거의 주인공은 유권자다. 깨어 있는 유권자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국가의 부(富)를 키운다. 정의, 법치, 자유, 배려 등 사회의 미덕이 자라나는 토양도 결국 유권자가 가꾼다. 단순히 당선을 위해 외쳐대는 구호, 국가보다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정책, 국가의 지속적 번영을 해치는 현혹적 수사 등을 구별하는 혜안을 갖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유권자가 자신들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대중의 어리석음’이라는 함정에 빠진다. 다수결이 민주주의를 이끄는 기본원리지만 다수결이 중요한 진짜 이유는 수의 많음보다는 다양함 때문이다. 현혹적 구호에 매몰된 다수는 자칫 국가의 백년대계를 흔든다. 또한 공명한 선거는 또 하나의 과제다. 자유 보통 비밀 직접이라는 선거의 4대 원칙이 지켜지는 공정한 룰을 만드는 것은 정치권의 몫이지만 우리는 6·3대선을 대한민국을 정치·경제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깨끗하고 공명한 선거는 대한민국의 얼굴이기 때문에 기독인들의 바른 자세가 중요하다. 이를 위하여 기도하자.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다(롬13:1). 하나님은 국가와 가정, 그리고 교회를 세우셨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태어날 때 한 가정에 속하게 되며 동시에 한 국가에 속한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던 시대에, 사도 바울은 로마에 굴복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세상 권세도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하지만 육신이 사는 동안에는 국가의 법과 제도와 관원들을 거스리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우리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 한다. 따라서 대선 후보자들이 하나님의 통치 원리와 방법에 얼마나 합당한가를 살펴봐야 하겠다. 만약 자신의 이익이나, 집단주의에 매몰되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후보를 선택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길은 오직 올바른 투표밖에 없다. 이념과 우상에 매몰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책임질 후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판단하여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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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이 세상에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자.
‘2025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가 4월 20일 오후 4시 서울 강남구 광림교회에서 개최됐다. 특별히 올해는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오전 인천 제물포항에 언더우드·아펜젤러 선교사가 공식 입항해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가 시작된 지 140주년을 맞는 해다.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담아, 한국 71개 교단과 전국 17개 지역 기독교연합회도 동일한 주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 정신을 되세겼다. 부활절(復活節)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부터 3일째 되는 주의 첫날인 일요일에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최대 축일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느 때부터 인가 절기로서 관습화되고 형식화 되고 있다는 우려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교회사에서 부활절이 언제냐는 문제를 두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간의 논쟁이 계속되다가 서기 325년 니케아회의에서 춘분이 지난 뒤 최초의 보름달이 지난 첫 주일을 부활절로 지키기로 결정하여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으나 부활의 의미가 절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짜는 성경에 기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지키는 성탄절인12월 25일은 예수님 탄생하신 날과는 상관없는 날이다. 성경에 그런 기록이 없다. 그러나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달력으로 니산월 정월 14일,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사흘 후에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달력 니산월 14일의 3일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양력으로는 3월 하순에서 4월 초에 항상 연결이 된다. 그래서 이때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때가 확실하다. 바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봄을 영어로 'SPRING'이라고 그러는데 그 의미는 ‘확 튀어 오른다’ 즉 봄에는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이기 때문에 'SPRING'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자연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그 부활을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이만큼 확실한 사실이기에 이를 증거 해야 한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인이 믿는 모든 것이 허사(虛事)가 된다. 우리의 구원도 헛것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은 역대의 모든 사람들의 삶도 헛것이 된다(고전15:17-19).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있어야 우리의 믿는 모든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구약에 예수님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있었고, 그분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더욱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사도들의 행적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이 잡힐 당시 뿔뿔이 도망치던 그 비겁자들이 부활을 직접 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의 믿음을 일상화해야 한다. 우리는부활절을 맞아 절기로서 외형적인 모습에 치중하기보다는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 안에서 ‘하나 됨’으로 많은 영혼들이 부활을 체험하여 부활의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세상에 증거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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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돌봄을 위한 사역에 매진하자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심각한 상황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하 상황에서 기독교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란 성경말씀을 기억하고 출산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성도들에게 출산을 하는 것을 권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사람들이 출산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여건을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아동돌봄이다. 이러한 아동돌봄에 교회가 앞장을 서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사역에 동참을 하고 있다. 특히 학생들의 학교 후부터 부모들의 퇴근까지의 돌봄공백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자식들을 학원으로 보내는 부모들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2021년에 발표된 교회의 돌봄사역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둘째 출산 계획이 없는 워킹맘 중 41%가 돌봄 문제가 해결된다면 둘째 출산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교회가 아동돌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큰 이유이다.동일한 조사에서 교회 운영의 돌봄기관 이용 의향률을 보면 기독교인 어머니는 84%가 의향률을 밝혔다. 그리고 비기독교인 어머니도 29%가 이용을 원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교회가 이러한 사역을 해야할 필요성이 보인다. 꼭 출산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교회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섬길 필요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야 한다. 또 많은 성도와 시민들이 이러한 부분에 필요를 느낀다. 교회가 이러한 필요를 체움으로써 사랑을 흘려내보낼 필요가 절실하다. 위 조사에서 돌봄 사역을 하지 않는 목회자 중 앞으로 돌봄 사역을 할 의향이 있는 목회자는 74%에 달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돌봄사역에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돌봄사역은 작은교회부터 큰교회까지 모든 교회가 할 수 있는 사역이다. 한국교회가 돌봄사역을 하기 원하는 교회들이 사역을 잘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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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피해 복구에 교회가 힘을 모으자.
경북 의성과 안동 등 경상권에서 발생한 대형산불이 빠르게 인근 지역으로 확산하면서 그 피해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3.28 06시 기준 사망 28명, 중경상 65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주택 117동을 포함한 시설물 3481곳과 이재민은 2407가구 8079명에 이르고 있으며 산림 4만8150ha의 피해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행안부는 이재민들이 재난트라우마로 불안해 하지 않도록 심리회복 지원도 적극 실시하고 있으며, 구호협회 등 민간단체는 기부금 모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매년 우리나라는 연평균(15-24년)546건의 산불이 발생하여 4,003ha의 산림이 소실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기후변화 등의 원인으로 전 세계적으로 초대형 산불이 자주 발생하여 산불이 범국제적인 재난으로 부각되고 있다. 또한 산불은 큰 피해에 비해 원인은 사소한 부주의로 발생하고 있으므로 사전 예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대형산불 등 큰 재난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하는 일이니만큼 정치권은 당리당략적 시각보다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협조해야 할 것이다. 특히 국민생명과 안전과 직결되는 재난 상황에 대해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교회도 예외일 수 없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복구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재난의 극복은 정치인이나 특정인들의 가시적인 보여주는 복구가 아니라 국민 전체가 나서야 되는 상황이다. 다행스럽게 우리 국민은 위기 앞에 강한 민족적인 저력이 있다. 그러나 현실이 너무 어렵다. 정치적 갈등이 심화된 속에서 경제적인 위기까지 겹치고 있다. 우리는 7년의 임진왜란, 36년의 일제강점, 6.25의 폐허는 물론 금모우기운동 등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 나라를 바로 세웠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견인했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재난은 우연한 것이 아님을 믿고 있다.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주관하에있기 때문이다.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온역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전 앞과 주의 앞에 서서 이 환란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대하20:9). 우리가 재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모든 재난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자 경고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그의 선한 뜻을 이루는 역사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임을 깨닫고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말씀이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경고하는 목적은 재난에 앞서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며, 재난 중에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앞장서서 이 재난을 극복하는데 ‘사랑의 행함’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교회마다 긴급재난이 발생할 경우 특별한 절차 없이 바로 집행할 수 있는 재정을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때에 한국교회는 피해지역 교회들은 몰론 일반 재해민들에게 숙소와 식자재를 지원하는 등 이재민을 위한 사역을 적극적으로 나서는데 힘을 모아 ‘고난과 함께하는 교회’가 됨으로써 이 땅에 복음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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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갈등 조정자의 역할을 감당하자
지난해 12월 3일 있었던 윤석열대통령의 계엄선포 이후로 한국사회는 양극화 현상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도 양극화 현상이 심각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가 분열을 멈추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로 나가야한다. 예수님은 팔복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서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히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로마서 12장 18절도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과 19절에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화평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화평함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화목하게 하는 조정자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 상임대표이자 기독교학술원 원장인 김영한박사도 이러한 사실을 잘 지적하고 있다. 김박사는 ”우리 뜻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기독교는 사회혼란을 부추기기보다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교회가 사회적 갈등을 키우기보다는 통합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분열로 인한 피로도가 상당하다. 특히 상대진영을 악마화하는 모습이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타파하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목하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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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기간 ‘십자가의 도’를 실천하자.
사순절(四旬節, Lent)기간이란 2025년 4월 20일 부활절로 부터 46일 전의 기간으로서 주일을 제외한 40일간(四旬)에 십자가의 고난을 체험하는 시간을 말한다. 그 의미는 부활절을 기다리면서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훈련의 시기이며,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로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사순절기간을 지키는 문제를 두고 찬•반의 양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순절을 거룩하게 지켜야 된다는 찬성측은 모든 교회의 오래된 일반적인 관행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반대측은 주로 미국의 거듭난 복음주의자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체험은 일정기간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일상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순절 기간을 특별하게 지키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사순절 기간이라도 ‘십자가의 도’(고전1:18)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영적성장을 지키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세상 끝날까지 전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책망하며 교회의 설립과 통합의 유일한 기반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먼저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그들의 결여된 영적 분별력으로 인해 미련한 것으로 취급되는 반면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이중성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지혜로 된 절대 유일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면 언제나 분열과 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든지 단점과 실수와 잘못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지나치게 믿거나 따르지 말고,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을 중심으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하며 그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자기 계획, 자기주장, 자기 고집, 자기 욕망, 자기 의지, 자기 이상, 자기 행복을 버려야 비로소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사순절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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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후보를 뽑는 선거가 되자.
- 윤석열 대통령 파면으로 인한 21대 대통령 보궐선거가 6월 3일로 정해졌다. 선거에 관심을 갖고 투표에 적극 참여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책무이다. 나의 투표권 행사를 위해 우리 현실의 정치, 사회, 경제가 성경의 원리에 맞는지를 평소에도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라의 주권자인 국민이 나랏일에 무관심할 수는 없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마6:10)기도하며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투표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우리의 투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력을 바르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선거는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딤전2:2)을 위한 민주주의의 척도다. 올바른 선거는 한 국가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킴은 물론 경제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선거가정치적 제도지만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파급력은 엄청나다. 역사는 선거가 바꾼다. 선거의 주인공은 유권자다. 깨어 있는 유권자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국가의 부(富)를 키운다. 정의, 법치, 자유, 배려 등 사회의 미덕이 자라나는 토양도 결국 유권자가 가꾼다. 단순히 당선을 위해 외쳐대는 구호, 국가보다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정책, 국가의 지속적 번영을 해치는 현혹적 수사 등을 구별하는 혜안을 갖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유권자가 자신들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대중의 어리석음’이라는 함정에 빠진다. 다수결이 민주주의를 이끄는 기본원리지만 다수결이 중요한 진짜 이유는 수의 많음보다는 다양함 때문이다. 현혹적 구호에 매몰된 다수는 자칫 국가의 백년대계를 흔든다. 또한 공명한 선거는 또 하나의 과제다. 자유 보통 비밀 직접이라는 선거의 4대 원칙이 지켜지는 공정한 룰을 만드는 것은 정치권의 몫이지만 우리는 6·3대선을 대한민국을 정치·경제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깨끗하고 공명한 선거는 대한민국의 얼굴이기 때문에 기독인들의 바른 자세가 중요하다. 이를 위하여 기도하자.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다(롬13:1). 하나님은 국가와 가정, 그리고 교회를 세우셨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태어날 때 한 가정에 속하게 되며 동시에 한 국가에 속한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던 시대에, 사도 바울은 로마에 굴복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세상 권세도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하지만 육신이 사는 동안에는 국가의 법과 제도와 관원들을 거스리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우리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 한다. 따라서 대선 후보자들이 하나님의 통치 원리와 방법에 얼마나 합당한가를 살펴봐야 하겠다. 만약 자신의 이익이나, 집단주의에 매몰되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후보를 선택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길은 오직 올바른 투표밖에 없다. 이념과 우상에 매몰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책임질 후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판단하여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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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이 세상에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자.
- ‘2025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가 4월 20일 오후 4시 서울 강남구 광림교회에서 개최됐다. 특별히 올해는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오전 인천 제물포항에 언더우드·아펜젤러 선교사가 공식 입항해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가 시작된 지 140주년을 맞는 해다.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담아, 한국 71개 교단과 전국 17개 지역 기독교연합회도 동일한 주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 정신을 되세겼다. 부활절(復活節)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부터 3일째 되는 주의 첫날인 일요일에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최대 축일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느 때부터 인가 절기로서 관습화되고 형식화 되고 있다는 우려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교회사에서 부활절이 언제냐는 문제를 두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간의 논쟁이 계속되다가 서기 325년 니케아회의에서 춘분이 지난 뒤 최초의 보름달이 지난 첫 주일을 부활절로 지키기로 결정하여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으나 부활의 의미가 절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짜는 성경에 기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지키는 성탄절인12월 25일은 예수님 탄생하신 날과는 상관없는 날이다. 성경에 그런 기록이 없다. 그러나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달력으로 니산월 정월 14일,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사흘 후에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달력 니산월 14일의 3일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양력으로는 3월 하순에서 4월 초에 항상 연결이 된다. 그래서 이때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때가 확실하다. 바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봄을 영어로 'SPRING'이라고 그러는데 그 의미는 ‘확 튀어 오른다’ 즉 봄에는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이기 때문에 'SPRING'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자연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그 부활을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이만큼 확실한 사실이기에 이를 증거 해야 한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인이 믿는 모든 것이 허사(虛事)가 된다. 우리의 구원도 헛것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은 역대의 모든 사람들의 삶도 헛것이 된다(고전15:17-19).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있어야 우리의 믿는 모든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구약에 예수님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있었고, 그분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더욱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사도들의 행적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이 잡힐 당시 뿔뿔이 도망치던 그 비겁자들이 부활을 직접 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의 믿음을 일상화해야 한다. 우리는부활절을 맞아 절기로서 외형적인 모습에 치중하기보다는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 안에서 ‘하나 됨’으로 많은 영혼들이 부활을 체험하여 부활의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세상에 증거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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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이 세상에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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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돌봄을 위한 사역에 매진하자
-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심각한 상황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하 상황에서 기독교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란 성경말씀을 기억하고 출산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성도들에게 출산을 하는 것을 권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사람들이 출산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여건을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아동돌봄이다. 이러한 아동돌봄에 교회가 앞장을 서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사역에 동참을 하고 있다. 특히 학생들의 학교 후부터 부모들의 퇴근까지의 돌봄공백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자식들을 학원으로 보내는 부모들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2021년에 발표된 교회의 돌봄사역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둘째 출산 계획이 없는 워킹맘 중 41%가 돌봄 문제가 해결된다면 둘째 출산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교회가 아동돌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큰 이유이다.동일한 조사에서 교회 운영의 돌봄기관 이용 의향률을 보면 기독교인 어머니는 84%가 의향률을 밝혔다. 그리고 비기독교인 어머니도 29%가 이용을 원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교회가 이러한 사역을 해야할 필요성이 보인다. 꼭 출산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교회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섬길 필요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야 한다. 또 많은 성도와 시민들이 이러한 부분에 필요를 느낀다. 교회가 이러한 필요를 체움으로써 사랑을 흘려내보낼 필요가 절실하다. 위 조사에서 돌봄 사역을 하지 않는 목회자 중 앞으로 돌봄 사역을 할 의향이 있는 목회자는 74%에 달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돌봄사역에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돌봄사역은 작은교회부터 큰교회까지 모든 교회가 할 수 있는 사역이다. 한국교회가 돌봄사역을 하기 원하는 교회들이 사역을 잘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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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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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돌봄을 위한 사역에 매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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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피해 복구에 교회가 힘을 모으자.
- 경북 의성과 안동 등 경상권에서 발생한 대형산불이 빠르게 인근 지역으로 확산하면서 그 피해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3.28 06시 기준 사망 28명, 중경상 65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주택 117동을 포함한 시설물 3481곳과 이재민은 2407가구 8079명에 이르고 있으며 산림 4만8150ha의 피해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행안부는 이재민들이 재난트라우마로 불안해 하지 않도록 심리회복 지원도 적극 실시하고 있으며, 구호협회 등 민간단체는 기부금 모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매년 우리나라는 연평균(15-24년)546건의 산불이 발생하여 4,003ha의 산림이 소실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기후변화 등의 원인으로 전 세계적으로 초대형 산불이 자주 발생하여 산불이 범국제적인 재난으로 부각되고 있다. 또한 산불은 큰 피해에 비해 원인은 사소한 부주의로 발생하고 있으므로 사전 예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대형산불 등 큰 재난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하는 일이니만큼 정치권은 당리당략적 시각보다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협조해야 할 것이다. 특히 국민생명과 안전과 직결되는 재난 상황에 대해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교회도 예외일 수 없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복구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재난의 극복은 정치인이나 특정인들의 가시적인 보여주는 복구가 아니라 국민 전체가 나서야 되는 상황이다. 다행스럽게 우리 국민은 위기 앞에 강한 민족적인 저력이 있다. 그러나 현실이 너무 어렵다. 정치적 갈등이 심화된 속에서 경제적인 위기까지 겹치고 있다. 우리는 7년의 임진왜란, 36년의 일제강점, 6.25의 폐허는 물론 금모우기운동 등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 나라를 바로 세웠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견인했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재난은 우연한 것이 아님을 믿고 있다.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주관하에있기 때문이다.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온역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전 앞과 주의 앞에 서서 이 환란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대하20:9). 우리가 재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모든 재난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자 경고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그의 선한 뜻을 이루는 역사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임을 깨닫고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말씀이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경고하는 목적은 재난에 앞서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며, 재난 중에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앞장서서 이 재난을 극복하는데 ‘사랑의 행함’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교회마다 긴급재난이 발생할 경우 특별한 절차 없이 바로 집행할 수 있는 재정을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때에 한국교회는 피해지역 교회들은 몰론 일반 재해민들에게 숙소와 식자재를 지원하는 등 이재민을 위한 사역을 적극적으로 나서는데 힘을 모아 ‘고난과 함께하는 교회’가 됨으로써 이 땅에 복음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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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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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피해 복구에 교회가 힘을 모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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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갈등 조정자의 역할을 감당하자
- 지난해 12월 3일 있었던 윤석열대통령의 계엄선포 이후로 한국사회는 양극화 현상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도 양극화 현상이 심각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가 분열을 멈추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로 나가야한다. 예수님은 팔복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서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히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로마서 12장 18절도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과 19절에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화평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화평함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화목하게 하는 조정자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 상임대표이자 기독교학술원 원장인 김영한박사도 이러한 사실을 잘 지적하고 있다. 김박사는 ”우리 뜻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기독교는 사회혼란을 부추기기보다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교회가 사회적 갈등을 키우기보다는 통합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분열로 인한 피로도가 상당하다. 특히 상대진영을 악마화하는 모습이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타파하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목하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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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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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갈등 조정자의 역할을 감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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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기간 ‘십자가의 도’를 실천하자.
- 사순절(四旬節, Lent)기간이란 2025년 4월 20일 부활절로 부터 46일 전의 기간으로서 주일을 제외한 40일간(四旬)에 십자가의 고난을 체험하는 시간을 말한다. 그 의미는 부활절을 기다리면서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훈련의 시기이며,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로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사순절기간을 지키는 문제를 두고 찬•반의 양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순절을 거룩하게 지켜야 된다는 찬성측은 모든 교회의 오래된 일반적인 관행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반대측은 주로 미국의 거듭난 복음주의자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체험은 일정기간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일상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순절 기간을 특별하게 지키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사순절 기간이라도 ‘십자가의 도’(고전1:18)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영적성장을 지키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세상 끝날까지 전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책망하며 교회의 설립과 통합의 유일한 기반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먼저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그들의 결여된 영적 분별력으로 인해 미련한 것으로 취급되는 반면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이중성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지혜로 된 절대 유일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면 언제나 분열과 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든지 단점과 실수와 잘못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지나치게 믿거나 따르지 말고,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을 중심으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하며 그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자기 계획, 자기주장, 자기 고집, 자기 욕망, 자기 의지, 자기 이상, 자기 행복을 버려야 비로소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사순절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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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기간 ‘십자가의 도’를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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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화된 성탄의 문화를 갱신하자
- 성탄절은 백화점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얘기가 있다. 이 때를 맞추어 거리와 상가는 온통 예수를 맞이하는 분위기다. 성탄절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고대 로마인들의 겨울 축제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A.D.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국교로 격상된 로마에서는 기독교의 강적이던 빛의 신인 ‘미트라’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축제일인 12월 25일을 이용해 로마인들을 기독교 안으로 끌어들이는 측면들을 고심한 가운데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빛’으로 말씀하자 로마인들에게 ‘미트라’와 빛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동일시함으로써 오늘의 성탄절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 년 중에서 가장 범죄가 많은 날이 성탄절 이브라고 한다. 이것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는 별개의 모습이다. 성탄절이란 의미는 성인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성경에서 보는 그리스도는 만세 전에 땅이 생기기 전에 세움을 입은 분이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현재의 자존자이다.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다. 영원한 때 전부터 즉 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계셨다. 알파와 오메가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이다. 구유에 누운 아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 만유를 포함한 분이다. 만유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탄생일을 밝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인간을 찾아오셨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의 탄생은 하나님의 경륜의 과정일 뿐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말씀에 의지하여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성탄이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성탄절이 세속문화 속의 연말을 맞이하는 기념일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몸으로서 우리와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생활화하는 것이 이 시대의 갱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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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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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화된 성탄의 문화를 갱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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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립교회의 지원이 절실하다
- 미자립교회란 모이는 숫자나 예산이 없어 교역자 생활비나 교회 운영을 책임질 수 없는 교회라고 말하고 있다. 도시의 경우는 개척교회가 있고, 농어촌의 경우는 이농 현상과 출산율 저하, 고령화로 교인 수가 줄어들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교단마다 발표하는 숫자가 다르지만, 교회의 50~80%로 나타나 절대 다수가 미자립교회로 조사됐다. 원래 교회란 그리스도의 거룩(충만)한 몸이다(에베소서 1장 23장).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부른다. 죄악 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나온 사람들의 무리를 말한다. 성경 속에서 완전한 교회는 ‘빌라델비아(형제사랑)교회’이다(요한계시록 3장 1~13절). 빌라델비아교회는 에베소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림으로써 주님의 책망을 받았던 그 사랑을 온전히 회복한 교회로서 ‘형제가 서로 사랑’한 것이다. 결국 교회의 참모습은 주님의 사랑이 어떻게 구체(실제)화 되느냐에 있으며,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한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앞세우면서 ‘교만’과 ‘분열’에 빠질 때 ‘라오디게아’교회로 쉽게 변질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오늘에 와서 세속화로 교회들이 라오디게아로 변질되고 있다. 따라서 이른바 자립교회라고 하는 대형교회는 물론 교회연합기관들의 관심은 교회를 세우고 개척하는 일에 소홀히 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것은 주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명령이요, 지상 최대의 사명이자 특권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명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다. 교회가 먼저 탐심과 증오를 버릴 수 있도록 솔선수범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를 향하여 ‘믿음과 사랑’으로서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우선하여 혐오와 분열을 극복하고 미자립교회에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실천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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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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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립교회의 지원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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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 지도자가 바로 서야한다
- 최근 많은 교회연합 단체들의 지도자들이 새로 세워졌다. 교회만이 아니라 어떠한 공동체든 올바른 지도자를 세우는 것은 그 단체의 명운이 걸린 중대사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잘못 뽑힌 지도자에 의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큰 단체조차도 사회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리는 현실을 지켜봐야만 했다. 사회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공동체를 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고, 상황에 대한 분석력과 합리적인 판단력,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용기, 인재를 등용하고 적시적소에 사용하는 능력, 부패하지 않을 수 있는 자기반성 능력과 양심 등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반면 교회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조금은 다른 듯하다. 위에서 말한 덕목들도 필요하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교회의 지도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충만해야만 한다. 늘 깨어 있는 영성으로 항시 판단의 기준을 성서에 두고 기도하며 문제를 해결해 가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겸손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선포하고 실천하려는 예언자의 마음을 품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 선출된 단체들의 지도자들이 이와 같은 덕목을 지닌 이들이길 바란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며 항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중히 사역에 임하길 바란다. 사회적 기준과 기독교적 기준이 가치 충돌할 때면 언제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지도자가 되길 바란다. 그러면서 늘 기독교적 가치와 기준을 손에서 놓치지 않는 지도자가 되길 당부한다.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말은 이제 너무도 식상해졌다. 위기인 바로 지금이 기회가 될 수 있다. 다만 지도자가 바로 선다면 말이다. 이번에 선출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한국교회의 제2부흥기가 찾아오길 간절히 기도한다. 늘 겸손하고 청렴하며 지혜로운 우리의 지도자를 위해 한국교회가 전심으로 함께 기도하기를 촉구한다. 우리 한국교회가 2020년 부흥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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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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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 지도자가 바로 서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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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문제관해 대화가 필요하다
- 보수 기독교는 성경에 근거하여 동성애를 비판하고 있고, 진보 기독교는 인권의 개념에 기초하여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의 정의를 지키려는 노력과 성경이 쓰인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여 우리시대에 맞게 성경을 읽어내며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노력은 모두 이해할 만하다. 이 두 주장이 양립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보수·진보 기독교는 대화하며 타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동성애를 반대하든 지지하든 그것은 각자의 판단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어떠한 의견이든 존중해야만 한다는 것은 공공의 영역에 속한다. 동성애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우리는 그 의견 자체를 비난할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하며 서로의 의견을 경청해야만 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이미 우리의 민족의 역사에 깊이 체화된 것이 아닌지 걱정이다. 목소리가 크고 완력을 사용하면 실제로 이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이겨서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더구나 기독교의 이름으로 그런 방식을 사용하여 승리를 쟁취한다면 사회에 무슨 덕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행동양식에 대해 우려를 보낸다. 누구든 동성애를 반대할 자유가 있음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과 동성애자를 차별·공격하는 것은 다르다. 보수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에 관한 불확실한 정보들을 유포하고, 인신공격을 일삼으며, 바리새인들과 같이 ‘죄명’을 남발하는 방식 자체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성적지향 차별금지법’의 의미를 정확히 새겨보길 바란다. 동성애를 찬성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보수 기독교인들의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와 언사, 비난 행위들이 도가 지나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동성애 문제에 관해 일방적 주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이미 많이 들었다. 이젠 서로의 입장들을 놓고 대화를 시작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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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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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문제관해 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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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중심의 신앙회복이 절실하다
- 1990년 이후 디지털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특히 디지털기술과 인터넷이 출현하면서 사람들 간의 소통의 새로운 장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의 핵심인 스마트폰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해 생기는 다양한 부작용들이 주변에서 나타나고 있다. 거리에서 신호등도 살피지 않고 길을 건너고 운전 중 스마트폰을 하다가 사고가 나기도 한다. 어린 유치원생들부터 고등학생까지 스마트폰에 빠져 수업 시간에 집중을 못 하는 학생들도 많다. 이뿐만 아니라 이런 현상은 교회에도 일어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스마트폰 중독이나 충동이 미치는 영향을 ‘퓨빙’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스마트폰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사람들과 자신의 주변에 신경 쓰지 않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기독교인들이 스마트폰이나 성경앱으로 성경구절을 찾다가 결국 하나님과 그 말씀에서 ‘퓨빙’하게 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왜냐하면 스마트폰의 가장 강력한 힘은 ‘산만함’이라고 한다. 산만함으로써 말씀에 전적으로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특별한 책이다. 성경은 세상의 학문이나 지혜로 알 수 없는 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방법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말씀하시다가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인 아들로 우리에게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먼저 성경을 깨달은 이들이 ‘전도’라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전파하는 자와 사도’(디모데전서 2장 7절)로서 이 성경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자세히 보아야 하는 책이기에 편리함으로 대체한다면 말씀의 깊이를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스마트폰으로 성경책을 대체하는 문화는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매일 자기 옆에 두고 읽도록 교회에서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올바른 교육이며, 성경으로 돌아가 말씀으로 회복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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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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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중심의 신앙회복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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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의 의미를 되새기자
- 대림절은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이다. 예전에 우리는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과 함께 대림절을 맞이했고, 교회에서는 대림절의 시작과 함께 성탄절 준비로 바빴다. 함께 모여 찬양을 연습하고, 성극을 준비하며, 성탄 전야의 새벽송을 기대했다. 밤을 세워 함께 기도하고 교재하며 예수의 나심을 기뻐했다. 눈이라도 오면 그 날은 더 할 수 없을 만큼 낭만이 가득한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이 빠르게 변해 더는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도 없고, 교회들도 성탄절 행사를 준비하지 않는다. 성탄행사는 간소화되어 교인들은 각자 집에서 성탄 전야를 맞이한다. 새벽송도 없고, 학생들과 청년들이 모여 밤을 세던 교회 한 켠은 텅 빈 채 성탄의 아침을 맞이한다. 선악을 넘어 조용하고 쓸쓸해진 대림절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렇게 변해버린 대림절기를 맞이하며 그저 아득한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예전의 생기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도 교회학교를 부흥시켜야만 한다. 교회가 다음세대 사역에 온 힘을 다할 때 대림절은 다시금 생경해질 것이다. 예수의 나심을 기다란다는 그 의미에 걸맞게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그 기쁨을 맛보아야만 한다. 많은 교회들이 성탄행사를 축소하여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인원이 부족하고 여력이 못 미칠지라도 최고의 정성을 다해 대림절을 보내야 할 것이다. 어린이, 청소년, 청·장년, 노년층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성탄절을 보내기 위해 교회는 대림절기를 최고로 섬겨야만 할 것이다. 늘 하던 것이니 대충 해버리는 식의 성탄 준비는 안 된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그 날의 의미를 매년 되새겨 과거에 그랬듯 최선을 다해 성탄행사를 준비하자. 대림절기에는 특히 더 다음세대를 섬기는 일에 집중하자. 그들이 행복한 성탄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 기성세대가 자리를 마련해주자. 그렇게 행복한 대림절기를 보낼 수 있도록 다함께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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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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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의 의미를 되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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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시민단체, 복음전도에 투명해야 한다
- ‘21세기는 NGO의 세기’라고 한다. 시민사회단체는 우리 사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서 그 역할은 점점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에서도 시민단체를 운영할 때 분명한 목적을 밝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하여 땅끝까지 그리스도를 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세상적인 방법으로 우후죽순처럼 시민단체들이 생겨남으로써 기부금의 유용이나 고액의 연봉과 관용차를 매입하는 데에 활용하는 등 재정문제에 있어 진정성이 없다는 지적이 너무도 아쉬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사회 시민단체들은 많은 문제점을 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 시민단체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소수의 명망가와 상근운동자를 중심으로 엘리트 위주의 운동에 치중됐다. 둘째, 교회의 필요를 위한 것이 아니라 특별하고 한정된 이슈를 선점하는 것이다. 셋째, 재야운동권처럼 국가권력의 감시와 비판에 너무 치중하고 있다. 이에 기독교 시민단체가 복음전도에 투명하기 위해서 몇 가지 개선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시민단체의 활동가들이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물론 활동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습득해야 할 것이며, 관련 전문가들의 적극적인 조언과 참여를 유도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둘째, 세상의 이념을 교회 내에 가지고 들어와서는 안 된다. 셋째, 개인 회원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여 회원들의 회비와 지원금으로 재원을 충당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기독교 시민단체는 복음 전도를 위한 투명성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이러한 점은 시민단체 책임자들이 명심해야 한다. 음행보다 사람을 더 손상시키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음행이나 탐욕은 우상이기 때문이다. 우상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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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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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시민단체, 복음전도에 투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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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화신학 전통 재건을 기대한다
- 감신대학교가 지난 15일 총장선거를 통해 이후정교수를 동 대학 총장으로 선출했다. 그간 동 대학은 총장선거 관련 문제로 많은 내홍을 겪어왔던 만큼 이번에 아무 탈 없이 총장을 선출했다는 것 자체로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동 대학은 총장후보자추천위원회를 구성하여 민주적 절차에 의한 총장선거를 단행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 했다. 그럼에도 학교의 발전을 위해 동 대학과 새 총장이 가야할 길은 여전히 멀다. 과거 토착화 신학이라는 장르를 개척해 신학에 새로운 풍토를 조성했던 동 대학의 학풍을 재건하는 것과 교원확충이나 재정의 안정화 등 오랫동안 동 대학의 문제로 지적되었던 사항들을 개선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에 더해 이번 선거를 통해 드러난 교수, 이사진, 동문들의 학생에 대한 존중 부족은 반드시 개선해야만 할 것이다. 누가 뭐라해도 학교의 주인은 학생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또한 진보교단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날로 보수화되는 기감 본부를 향한 대학의 따끔한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어야만 하며, 강단 너머에 사유가 부재한 교회들로까지 신학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야만 한다. 132년 전통의 유서 깊은 동 대학은 그간 하지 못했던 사회와 교단에 대한 의무를 이제라도 충실히 이행해야만 할 것이다. 이후정총장은 사익에 눈을 돌리기보다는 항시 공익을 우선하며 예수님의 시선을 갖고자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교회가 위기이고, 신학 교육이 위기이다. 이제 더 이상 동 대학이 낭비할 수 있는 시간은 없다. 언제나 학생들과 동문들, 교직원, 동료 교수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그들을 섬기고, 이사진의 하수인은 절대로 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최근 오성주직무대행체제로 몰라보게 안정화된 동 대학에 기대를 거는 시선이 많이 있다. 항시 감시의 눈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겸허히 학교를 섬기고, 또한 항시 기대하는 시선이 가득하다는 사실도 명심하여 언제나 신선한 희망을 유지하며 총장의 역할을 갈 감당해내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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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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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화신학 전통 재건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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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 이웃 돌봄사역에 헌신하자
- 매년 연말연시가 되면 소외이웃을 돌보자는 캠페인이 정부는 물론 많은 사회단체들에서 나서고 있다. 특히 교회를 중심으로 소외이웃을 돌보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을 본받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웃사랑은 쉬워 보이지만, 막상 어렵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행할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편견과 섭입견이 강한 나머지 이웃에 관심과 사랑이 부족한 경우가 있고, 반대로 이웃사랑이 잘못 오해되는 사례도 있다. 이기심은 타인을 생각하거나 돌볼 틈을 주지 않고, 어리석음은 하나님과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이웃을 대하게 돼 진실한 사랑을 전할 수 없게 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율법사가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에 관하여 물었을 때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장 37~40절)고 말씀하셨다. 이 두 계명은 다 사랑의 문제,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참 이웃은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인가라고 물으셨을 때에, 율법사는 스스로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나 자의 이웃이라고 답을 했다(누가복음 10장 30~37절). 그러므로 우리의 참 이웃인 예수님의 사역에 따라 소외된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지나치게 세속화됨으로써 평안의 상징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저주 받은 도시인 ‘여리고’로 변질됨으로써 소외된 이웃들이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다. 특히 목회자는 제사장이 되고 있으며, 장로·집사는 레위인이 됨으로써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는 강도만난 자들에게 참 이웃의 사랑으로 보살피는 ‘선한 사마리아’인 예수님의 돌봄 사역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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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 이웃 돌봄사역에 헌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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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의 믿음을 기억하자
- 11월 17일, 올해로 22주년을 맞는 ‘순국선열의 날’은 1905년 을사늑약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가 1939년 제안·의결되어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이후 1970년 이 기념일은 간소화되기도 했지만, 1997년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다시금 정부주관의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제정된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을사늑약의 그 수치를 기억해야만 한다. 을사5적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의 사인만으로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잃고, 결국 통감부 설치를 통해 주권마저 상실했던 그 치욕 속에서 우리가 겪었던 그 아픔을 상기해야만 한다. 한 번 잃은 주권을 되찾기 위해 우리의 수많은 선조들은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했고, 때론 온갖 고문을 떨리는 마음으로 견뎌야만 했다. 기록된 역사에 의하면 고문을 못 이겨 미쳐버린 이들도 다수고, 어떤 경우는 미친 척을 하기 위해 자신의 오물을 먹어야만 했다. 또 수많은 이 땅의 여성들이 견뎌야만 했던 그 수치와 치욕은 어떠한가. 한국의 기독교는 그러한 아픔 속에서 태어났다. 우리 한국기독교는 서방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신앙을 받아드리지 않았다. 우리 선조는, 우리의 민중들은 삼삼오오 모여 기독교 정신을 스스로 익혔고, 그 결과 기독교를 통해 이 땅의 수많은 민초들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기독교를 수용했다. 초기 한국기독교는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죽음과 고문 앞에서도 당당했다. 일제와 친일파의 총칼 앞에서도, 자신의 살을 찢는 고문 속에서도, 조국의 이름과 하나님의 뜻을 당당히 외쳤다. 기독교 정신은 우리 선조들을 종교적 양심 앞에 세웠고, 육의 평안함보다 영의 승리를 갈망할 수 있는 힘을 불어 넣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갈망하는 애국선열들의 그 고백에 기독교 정신의 정수가 있다. 자신의 삶을 버려서라도 예수의 삶이 이 땅에 드러나길 소망했던 눈물겹도록 자랑스런 믿음의 선조들의 삶을 통해 우리 기독교인들이 배움을 얻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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