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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주간, 신앙 성숙의 길로 삼자
       매년 맞이하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자기 십자가’를 체험하는 기간이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셨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고난과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이란 말은 성경 속에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고난주간이 교회의 절기로 자리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형식화되고 관습화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은 고난주간을 맞아 ‘자기 십자가’를 지는 분명한 체험이 필요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셨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고난주간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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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4-03-13
  • [사설] 해외선교사의 현실과 성경적 선교지원
      선교는 세속적 경제구조와 맞물려 진행되지 않는다.   2010년을 전후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특별히 중국 공산당의 박해로 인해 철수하는 선교사들이 많았고, 인도나 터키 등 자신들의 종교가 분명한 나라들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일이 많았다. 그 국가들은 주로 비자를 연장 해주지 않던가, 정부 정책에 반하는 일들을 했다는 이유를 근거로 진행한 일종의 박해였다. 이런 일들이 최근 한국인 선교사의 수가 줄어든 원인 중에 하나가 됨은 분명하다. 또 그런 박해는 예상된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인 선교사 감소의 원인 중, 큰 이유는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 저하라는 것은 자명하다. 선교사들의 사역과 생활은 교회의 지원과 성도들의 후원으로 유지된다. 이러한 한국적 선교시스템에서, 교세의 감소로 지원이 약해지고 또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개인성도 감소로 개인 후원금이 줄어들고 있다. 이 현실적인 문제들과 싸우는 현장의 선교사들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믿음에 의지한다.  우리의 선교는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란 말씀, 또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라는 말씀에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든 세상 끝까지 전파해 한 영혼이라도 구하기를 애써 왔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현재 교회의 경제상황과 인적 상황에 기반하지 않는다. 오직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큰 언약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근거한다.  교회는 먼저 우리의 것을 떼어 놓기 전에, 내 쓸 것을 것을 줄이고 양보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고 헌신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과 열방에 가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세상 경제의 논리가 아닌, 하늘 경제의 풍성함과 기적을 전해 주어야 한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선교하고 있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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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2
  • ‘퀴어 축제’, 반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올해도 이른바 ‘퀴어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를 두고 한국교회는 한목소리로 우려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우리는 동성애, 근친상간, 소아성애 등을 옹호하는 퀴어신학을 반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퀴어신학이 지지하는 낯설고 이상한 동성애는 창조섭리인 양성질서에 반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결국, 동성애는 성경의 주제가 아니고 부차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금기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게 신학의 보편적 주제가 될 수는 없다. 퀴어신학의 주제는 동성애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 동성애가 신학의 핵심이 돼야 하고 동성애에 대한 모독과 억압은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창조자 하나님과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향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의미한다.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과 인류 보편의 성 윤리와 맞선다. 비도덕적이고 괴기한 성적 관행이다. 남성 동성애의 경우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의 비정상적 접촉이 반복된다.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의학적 질서와도 맞지 않는다. 동성애는 결국 괴기한 행위일 뿐이다.   결혼과 가정은 동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결혼과 양성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생산되며 사회와 국가와 인류는 존속될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결혼, 즉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양성결혼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복이요 인류 생존의 조건이요 기반이다. 따라서 동성애 반대는 이 시대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 교회는 바른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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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모범이 되는 기독교가정이 되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전통적으로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관계로 얻은 자녀들로 구성된 혈연공동체인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의식주를 함께 나누는 생활공동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는 이런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이해와 가정의 형태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독신과 혼전동거의 증가와 더불어 결혼율의 감소, 동성애와 성전환 그리고 동성결혼 등 세태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정에 대한 이해와 형태들이 나타남으로 전통적 가정관과 가정형태가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다.   먼저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질서로 제정하신 천부적 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둘이 하나가 되는 인간의 결혼제도는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명의 연합과 사랑의 사귐을 이루는 언약관계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고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은 창조의 질서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속받은 교회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관계로 하나님의 영적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신비로 이해된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함으로 영적인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 온전한 부부간의 사랑과 연합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구속에서 나타나는 결혼과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결혼언약의 영적신비를 기억함으로 반드시 영적 생명을 함께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 곧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결혼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이혼과 재혼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에 모범이 되는 기독교 가정을 이뤄가는데 온 힘을 기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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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를 우려한다
    지난 2020년 6월 29일 자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은 그 안에 전통적인 기독교윤리와 배치는 되는 조항이 있어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동법 2조 1항에서 성별을 남성, 여성, 그리고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 이는 성을 인식, 표현, 인지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이 의미는 생물학적 인체구조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인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이는 남성과 여성 외에 다른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입장이다.   성적지향에 대해 차금법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감정적, 호의적, 성적으로 깊이 이끌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차금법의 취지와는 달리 레위기 18:22, 20:13에서 동성애를 윤리적인 악한 행위로 간주하여 명확히 금지하고 있다. 이것들은 정언명령으로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는 서술법으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준수해야 할 명령이다.   또 동법 제3조 가항에서 모집과 채용을 포함하는 고용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차금법이 법제화되면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에서 교수나 교수지원자가 동성애자로 밝혀지게 될 때 채용을 거부하는 것이 불법이 된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가 요구하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을 때에도 채용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이러한 경우 기독교 학교는 학생 구성에 있어 기독교 학교의 특수성이 희생될 수 있고, 신학교는 교회의 목회자 양성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독소조항으로 인해서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심각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대응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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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1
  • 주일학교 교사양성에 힘쓰자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미래의 근간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주일학교가 무너진다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으며, 또 많은 통계들은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너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데서 출발한다.   주일학교 교사는 먼저 학생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관심과 고민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며 친구라고 불렀다.   좋은 교사는 좋은 상담자이다. 세익스피어는 “13세부터 20세 사이의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만큼 청소년 시기에 고민과 갈등이 많다는 증거이다. 교사는 상담자로서 학생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주일학교교사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신앙성숙을 돕는 자다. 교사는 성경지식을 주입시키는 자가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자신이 먼저 배운 지식과 경험을 학생들이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주변 환경, 학습 환경, 생활환경의 장애물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특별히 예배시간에 교사들이 먼저 진지한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모범이 되도록 한다. 예배시간 엄수, 지각?결석 등을 하지 않고, 예배시간에 교사들 간의 잡담을 삼가야 한다. 이러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일 때 주일학교에 미래가 있는 것이다. 스승의날, 스승의 주일을 보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인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해 좋은 교사의 야육에 모두가 힘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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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5-11

실시간 사설 기사

  • 공명선거에 앞장서는 한국교회가 되자
    이번 대선에서 여야의 후보들이 초박빙의 경합을 벌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어떤 결과가 나올지 초미의 관심사이다. 선거에서, 특히 대통령선거에서 교회는 무엇보다 공명하고 깨끗한 선거가 이뤄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선거과정에서 만에 하나 불상사가 나온다면 이는 국가의 이익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것이고, 이는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선거에 참여해 주권자로서 투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면서 동시에 한 국가의 시민이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의무와 권리가 있듯이 국가의 시민으로서 의무와 권리가 있다.    사도 바울은 위에 있는 권세에 순복하라고 했다. 또 조세를 바칠 자에게는 조세를 바치라고 했다. 예수님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다. 세상의 나라와 권력을 인정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전통적으로 교회는 무정부주의를 따르지 않았다. 교인은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선거에 참여하라고 교회는 전해야 한다.    교회가 직접 나서서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선택은 교인 한 사람의 자유에 맡겨야 한다. 또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특정후보를 지지하라고 설교해서도 안 된다. 교회는 정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배하고 선교하고 봉사하기위해 모이는 곳이다.    교회는 기독교적 정신이 정책에 반영되도록 기도하며 요구하는 일을 해야 한다. 예컨대 기독교의 근본정신 가운데가 이웃사랑이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사랑으로 돌보라고 했다. 이러한 정신이 구현된 정책이 지금의 사회복지제도이다.   기독교 역사가 깊은 서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국가가 사회복지정책을 실천해 왔다. 그래서 우리도 여와 야를 떠나서 소외된 이웃을 돌볼 수 있는 복지정책이 나오도록 기도하며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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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8
  • 신학교 졸업생의 사역지 문제 심각하다
    2월은 졸업식의 시즌이다. 특히 3년 동안 ‘선지동산 신대원에서 학문과 경건에 힘쓰다 졸업을 하고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는 모든 졸업생들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3년 동안의 노력과 눈물에 누구라도 박수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사역을 하고 싶어도 사역지가 없어서 겉도는 목회자들도 많다. 이들은 보통 ‘무임목사’라고 불린다. 사역지를 구하지 못한 무임목사는 결국 대리운전, 택배 같은 아르바이트로 가족들의 생계를 꾸릴 수밖에 없다. 무임목사는 개교회주의와 분열이라는 한국교회의 고질병이 만들어낸 파행적인 구조이다. 여기에 학생수 감소로 위기에 몰린 정규.비정규 신학교는 계속해서 새로운 목사들을 배출해낸다. 무임목사를 둘러싼 이러한 파행적 구조를 혁파할 근본적인 대책 수립이 절실하다.    사역지가 없는 무임목사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 전선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무임목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A목사는 2000년 대 중반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서울의 한 중형급교회에서 부목사 사역을 했다. 10년 정도 사역을 한 후 자의반 타의반으로 교회를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개척도 생각해봤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고 결국 생활전선으로 내몰렸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대리운전이었다. 이 외에도 택시운전이나 택배 같은 운전직, 편의점 같은 단순노무직도 무임목사의 아르바이트였다.    무임목사 증가의 가장 큰 원인은 목사의 과잉배출이다. 수요는 제한돼 있는데, 공급이 많다보니 무임목사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무임목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각 교단이 목회자후보생을 자율적으로 조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개선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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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8
  • 무속에 의지하는 정치를 우려한다
        야당의 유력한 대선후보 진영에서 무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교계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목회자와 평신도들은 성명을 내고 무속을 의지하는 정치는 하나님의 뜻에 반한다고 밝혔다. 또 전현직 신학대 교수들 역시 무속이 아닌 민주적 공론에 기반한 정치를 요구했다.   무속 또는 샤머니즘은 기독교의 복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한국교회는 기억해야 한다. 샤머니즘은 철저히 기복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이다. 아니 ‘신앙’이란 말을 쓰기도 부적절하다. 샤머니즘에는 자기희생, 사랑, 겸손, 용서 같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적 가치가 전혀 없다. 무속은 그저 내가 잘 되고, 돈을 잘 벌고, 병에 걸리지 않고, 장수하는 것만을 추구한다. 이러한 기복을 위해서는 비윤리적인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야당 선거캠프에 있는한 무속인은 살아있는 소의 가죽을 벗기는 엄청난 일도 서슴없이 자행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국가의 정치지도자로 매우 중요한 국가중대사를 결정하는 자리에 있다. 이 결정으로 나라의 흥망성쇠가 결정될 수도 있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대한민국 국군이 진격할 수도 후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토록 막중한 판단과 결정이 점과 사주에 의해 실행된다면 참으로 통탄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이런 상황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현대의 정치는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천명한다. 민주는 국민이 주인이라는 뜻이며, 공화국은 왕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라 국민의 대표들이 통치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성경에 영향을 받은 서구에서 만들어진 개념이자 제도이다.   이러한 21세기의 대한민국 민주정치에 무속과 샤머니즘이 개입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점괘와 사주에 의해서 인사들이 등용되고, 국가중대사가 결정된다면 이는 대한민국을 과거의 시대로 돌리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선한 정치가 되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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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1
  • 신학교육은 특별한 소명이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세속화 본질의 중심에는 신학교육의 문제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신학교의 난립에 있다. 매일 하나씩 분열된다는 교단과 그로 인한 신학교들이 난립함으로써 무자격교역자들이 양산되고 있다. 그리고 자격이 있다고 하는 신학교마저도 신학 자체가 세상의 초등학문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통 복음주의적인 신학을 벗어나서 세상 초등학문을 따라 너무도 세분화된 교육과정에 의하여 과정자체를 중시하는 신학이 되고 있다.    이들은 성경에서 가장 근본인 “거듭남”(요3:3)의 문제를 심상히 일반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며”(빌1:6),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날이 있고”(골1:6),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3) 등의 말씀들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고 목회에 임하는 것이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신학생으로서 특별한 소명이 부족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사도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유언하는 말씀으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고 말씀하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6:12).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 찌니(딤후2:3).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4-15)고 당부를 하고 있다.    따라서 신학교육은 그리스도의 ‘풍성과 충만’에 대하여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고는 목회 현장에서 복음의 진리를 온전히 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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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1
  • 한국교회, 그리스도를 힘써 알자
    이 시대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확실한 징조들이 나타나는 때이다. 처처에 기후변화에 의한 기근과 탐욕으로 인한 전쟁 그리고 세계적인 코로나 온역 등으로 너무 악한 때이다(눅21:11). 더욱이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한 것보다 더하며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부인되는 말세이다(딤후3:1-5).    특히 교회가 세속의 길에서 방향을 찾지 못함으로써 세상의 모습이 그대로 기독교 속에 투영되고 있는 간음과 변절의 현실이 오늘의 모습이다. 이때 근본에 충실하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리스도를 힘써 알아가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간음하고 변절하여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에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6:3)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에 새벽 별처럼 나아오실 것이고, 땅을 적시는 늦은 비처럼 이스라엘에 오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천년왕국에서 늦은 비인 그리스도에 의해 적셔지는 땅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는 찬송과 예배라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인 그리스도의 구원과 영광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하는 그리스도를 힘써 알아가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성막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직접 설계하신 것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죄인들이 반드시 들어가는 문을 통하여 십자가인 번제단을 시작으로 물두병에서 정결케 하고, 성소에 들어가 진설병에서 말씀의 교제를 나누고, 금등잔에서 빛 가운데 행하며, 향단에서 기도함으로 능력이 임하게 된다. 그 후에 지성소에서 내적 생명의 교제를 이루고, 그룹들이 내려다보는 피가 뿌려진 속죄소에서 온전한 안식과 화평을 누리게 된다.    한국교회는 성경을 통하여 성막의 새롭고 놀라운 사실을 더욱 열심히 그리고 더욱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여 그리스도를 힘써 알아가는 일에 더욱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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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2-03
  • 설날, 전통문화를 기독문화로 승화
    설날이 다가온다. 예부터 설날은 추석과 함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크게 생각하는 민족 최고의 명절이다. 올해에도 설날을 맞아 많은 사람들은 불편을 감수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것이고, 형제 친지들은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잔치를 열게 될 것이다.  수천 년간 설날은 조상에게 차례를 드리고 한해의 복을 비는 날이라는 의미가 강했다. 하지만 현대인이 지키는 설날은 음력을 사용하던 과거의 풍습을 따라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안부를 묻고, 화목을 나누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는 명절이 됐다. 새해를 맞이한 지 한 달 정도가 지나서 맞이하는 설날은 새해를 맞아 조상에게 복을 빌기 위함이 아니라, 잠시라도 복잡한 도시를 떠나 보고 싶은 가족과 함께 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하겠다. 물론 불신자가정에서는 가족 행사로 차례를 지내기도 하지만, 이는 차례 자체가 목적보다는 함께 모이기 위한 구심점 역할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보수교단에서 우상숭배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설날을 부담스러운 날로 생각해 스스로 소외시키기 보다는 가족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전도 활동을 하면서 가정문화를 기독교문화로 변화시키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의미도 모르고 조상을 신처럼 여기는 차례보다는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며, 조상들을 생각하고, 가족사랑을 실천하는 명절로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차례보다 부모섬김을 실천하고, 더 즐거운 기독교문화를 만들 필요가 있다. 형식적 효에 그치는 차례보다는 진정한 부모섬김과 가족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한 관심을 보임으로 유교문화를 계승하는 명절이 아닌, 기독교적 문화를 나누는 명절로 변화시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축복의 명절로 만들어야겠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2-03
  • 양질의 목회자후보생 선발 시급하다
    신학대학원 입시가 본격화되고 있다. 바라기는 영성과 실력을 두로 갖춘 목회후보자들이 많이 선지동산에 입학해 한국교회의 미래를 든든하게 만들어주기를 기대한다. 이들이 곧 한국교회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밝지 않다. 많은 신대원들이 정원에도 못 미치는 충원률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의 경우 대부분의 신학대학원 경쟁률이 0점대에 머물렀다. 서울신학대학원 0.54:1, 침례교신학대0.53대 1, 성결대0.40대 1, 아세아연합신학대 0.28대 1로 마감됐다. 그나마 주요 교단의 신학대학원은 사정이 좀 나은 편이었다. 장신대 2.41:1, 총신대 1.44:1로 간신히 정원미달 문턱을 넘었다. 이러한 사정이 올해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충원률이 갈수록 떨어지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인구감소가 가장 크다할 수 있다. 과거에 비해 학생 자체가 없는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자수가 대학정원보다 적어지는 현상이 곧 일어날 것이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문을 닫을 것이라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신대원 지원자가 줄다보니 학문적이고 인격적인 검증과정 없이 마구잡이로 학생을 모집하는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목회후보생들의 질이 떨어지면 결국 한국교회 전체의 질이 하락하는 결과가 나온다. 한국교회의 미래가 심히 걱정되는 이유다.   결국 한국교회 전체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과감한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 당장은 아프고 힘들지만 현재와 미래를 위해 결단해야만 한다.   교단의 결단이 필요하다. 각 교단이 모여 합의를 통해 신학교의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인원 감축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신학교육이 바로 서야 한국교회가 바로 설 수 있다. 이를 위해 지금이라도 감축, 통폐합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1-26
  • 한국교회 신뢰를 회복하자
    그동안 한국교회가 분열과 정쟁의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사회적 신뢰도가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특히 코로나 온역이 장기화되면서 정부나 사회 일각에서 교회발 감염에 대해 과장되게 인식되고 있었다. 지난해 1월 목회데이터연구소의 코로나 정부 방역 조치에 대한 일반국민평가 조사에서 한국교회를 약간 신뢰한다는 응답이 21%인 반면 신뢰하지 않는다는 비율은 76%로 조사되었다. 연구소측은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인 상황에서 사회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한 특별한 방법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비관적인 평가까지 나왔다. 그러나 교회의 신뢰도의 문제는 교회가 세속화를 떠나서 교회의 본연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의 한국기독교는 서구의 기독교와 같이 생명을 잃어가는 세속화의 길에서 방향을 잃고 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는 말씀을 잊어버리고 외형만 남아 있다. 다시 말해 기독교가 세상종교와 같아지고 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   교회는 세상에서 ‘구별된 무리, 빼어낸 무리(에클레시아)이다. 이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고전1:2)이다.   교회는 ‘나는 길이요’라고 하신 예수님의 길을 가는 무리들이다. 예수님이 ‘참 빛’이었듯이 그 빛을 받은 이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5:14)고 하셨다. 교회가 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이제 어둠의 세상에서 성도는 빛으로서 부패한 세상 가운데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여 세상의 부패를 막아야 한다. 따라서 코로나시대 교회는 더욱더 근본에 충실해야 한다. 먼저 세상 사람의 영혼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 가운데 있는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 일에 모든 힘을 주력한다면 신뢰회복은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1-26
  • 코로나시대, 새롭게 시작하자
    코로나 온역의 세계적인 재앙은 개인의 생활방식, 교육 환경, 문화 소비 패턴, 사회 서비스 방식, 사회 시스템, 세계 경제 구조, 국제 정세 등 우리의 일상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도 규모에 따른 양극화가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대형교회는 시스템이 갖춰져서 살아남을 것이지만 소형교회는 존립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존립 기반인 ‘성도의 교제’가 제한됨으로써 사랑의 장으로서 교회의 역할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코로나 온역이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를 주관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기”(전3:1)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코로나와 같은 온역을 비롯하여 고난을 주신 것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3:11) 곧 영생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   따라서 이러한 암울한 때에 그리스도인은 “새 힘을 얻어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사40:31). 마치 독수리가 날게 치며 올라감 같이 코로나 온역의 암담한 현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신앙생활이 필요하다. 첫째 굳건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거듭남의 비밀을 깨닫고 성령에 충만한 생활을 해야 한다. 영생의 참믿음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17:3). 둘째 영원히 주님과 함께하는 참 소망을 가져야 한다. 죽음을 결코 끝이 아니며, 또 다른 세계의 시작이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단독으로 서는 날을 맞게 될 때에 천국의 영원한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생활은 대적과의 전투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 이를 위하여 세상 죄에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위치를 지키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이어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1-16
  • 한국교회 연합기관의 통합이 절실하다
    지난 10일 한국기독교총연합, 한국교회총연합, 한국교회연합의 3 연합기관이 함께 모여 신년예배를 드리며 통합의 로드맵을 제시했다. 각 대표회장은 올해는 기필코 통합을 이루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피력했다. 참으로 다행스럽고 환영할 일이다. 제시된 통합의 로드맵이 반드시 실현되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그러나 선언이 선언으로만 끝나서는 안 될 것이다. 연합기관 수장들이 모여 이번에는 반드시 통합하겠다는 말을 들은 지가 한두 해가 아니다. 말도 있었고, 선언도 있었고, 결의도 있었지만 통합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통합을 위해서는 먼저 기득권을 포기하려는 비움의 자세가 절실하다. 내 것은 하나도 줄 수 없고, 타자의 것만 내놓으라고 한다면 어찌 통합이 되겠는가. 먼저 내 것부터 내려놓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통합이 가능하다. 또한 자리에 연연하는 태도를 버려야 통합이 가능하다. 원래 하나였던 한기총이 사분오열된 이유가 무엇인가? 대표회장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금권선거를 벌였고, 결국 거기서 분열이 일어나고 말았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자리싸움은 통합은커녕 또 다른 분열을 만들고 말 것이다. 따라서 자리에 연연하는 자세를 포기해야만 한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세도 매우 중요하다. 규모로 본다면 한교총이 가장 크다.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단이 회원으로 있기에 양과 질에서 한교총은 한기총과 한교연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통합이 아니라 한교총으로의 흡수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이렇게 된다면 한기총과 한교연의 반발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큰 단체가 작은 단체를 흡수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하나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반대로 갈라지는 것은 악령의 역사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분열이라는 고질적 병폐를 안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성령의 역사를 통해 분열된 연합기관이 다시 하나가 되는 위대한 역사가 있기를 소망해본다.
    • 오피니언
    • 사설
    202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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