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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주간, 신앙 성숙의 길로 삼자
       매년 맞이하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자기 십자가’를 체험하는 기간이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셨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고난과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이란 말은 성경 속에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고난주간이 교회의 절기로 자리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형식화되고 관습화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은 고난주간을 맞아 ‘자기 십자가’를 지는 분명한 체험이 필요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셨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고난주간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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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4-03-13
  • [사설] 해외선교사의 현실과 성경적 선교지원
      선교는 세속적 경제구조와 맞물려 진행되지 않는다.   2010년을 전후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특별히 중국 공산당의 박해로 인해 철수하는 선교사들이 많았고, 인도나 터키 등 자신들의 종교가 분명한 나라들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일이 많았다. 그 국가들은 주로 비자를 연장 해주지 않던가, 정부 정책에 반하는 일들을 했다는 이유를 근거로 진행한 일종의 박해였다. 이런 일들이 최근 한국인 선교사의 수가 줄어든 원인 중에 하나가 됨은 분명하다. 또 그런 박해는 예상된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인 선교사 감소의 원인 중, 큰 이유는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 저하라는 것은 자명하다. 선교사들의 사역과 생활은 교회의 지원과 성도들의 후원으로 유지된다. 이러한 한국적 선교시스템에서, 교세의 감소로 지원이 약해지고 또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개인성도 감소로 개인 후원금이 줄어들고 있다. 이 현실적인 문제들과 싸우는 현장의 선교사들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믿음에 의지한다.  우리의 선교는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란 말씀, 또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라는 말씀에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든 세상 끝까지 전파해 한 영혼이라도 구하기를 애써 왔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현재 교회의 경제상황과 인적 상황에 기반하지 않는다. 오직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큰 언약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근거한다.  교회는 먼저 우리의 것을 떼어 놓기 전에, 내 쓸 것을 것을 줄이고 양보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고 헌신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과 열방에 가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세상 경제의 논리가 아닌, 하늘 경제의 풍성함과 기적을 전해 주어야 한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선교하고 있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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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2
  • ‘퀴어 축제’, 반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올해도 이른바 ‘퀴어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를 두고 한국교회는 한목소리로 우려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우리는 동성애, 근친상간, 소아성애 등을 옹호하는 퀴어신학을 반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퀴어신학이 지지하는 낯설고 이상한 동성애는 창조섭리인 양성질서에 반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결국, 동성애는 성경의 주제가 아니고 부차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금기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게 신학의 보편적 주제가 될 수는 없다. 퀴어신학의 주제는 동성애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 동성애가 신학의 핵심이 돼야 하고 동성애에 대한 모독과 억압은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창조자 하나님과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향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의미한다.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과 인류 보편의 성 윤리와 맞선다. 비도덕적이고 괴기한 성적 관행이다. 남성 동성애의 경우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의 비정상적 접촉이 반복된다.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의학적 질서와도 맞지 않는다. 동성애는 결국 괴기한 행위일 뿐이다.   결혼과 가정은 동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결혼과 양성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생산되며 사회와 국가와 인류는 존속될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결혼, 즉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양성결혼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복이요 인류 생존의 조건이요 기반이다. 따라서 동성애 반대는 이 시대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 교회는 바른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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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모범이 되는 기독교가정이 되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전통적으로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관계로 얻은 자녀들로 구성된 혈연공동체인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의식주를 함께 나누는 생활공동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는 이런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이해와 가정의 형태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독신과 혼전동거의 증가와 더불어 결혼율의 감소, 동성애와 성전환 그리고 동성결혼 등 세태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정에 대한 이해와 형태들이 나타남으로 전통적 가정관과 가정형태가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다.   먼저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질서로 제정하신 천부적 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둘이 하나가 되는 인간의 결혼제도는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명의 연합과 사랑의 사귐을 이루는 언약관계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고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은 창조의 질서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속받은 교회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관계로 하나님의 영적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신비로 이해된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함으로 영적인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 온전한 부부간의 사랑과 연합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구속에서 나타나는 결혼과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결혼언약의 영적신비를 기억함으로 반드시 영적 생명을 함께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 곧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결혼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이혼과 재혼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에 모범이 되는 기독교 가정을 이뤄가는데 온 힘을 기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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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를 우려한다
    지난 2020년 6월 29일 자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은 그 안에 전통적인 기독교윤리와 배치는 되는 조항이 있어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동법 2조 1항에서 성별을 남성, 여성, 그리고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 이는 성을 인식, 표현, 인지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이 의미는 생물학적 인체구조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인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이는 남성과 여성 외에 다른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입장이다.   성적지향에 대해 차금법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감정적, 호의적, 성적으로 깊이 이끌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차금법의 취지와는 달리 레위기 18:22, 20:13에서 동성애를 윤리적인 악한 행위로 간주하여 명확히 금지하고 있다. 이것들은 정언명령으로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는 서술법으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준수해야 할 명령이다.   또 동법 제3조 가항에서 모집과 채용을 포함하는 고용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차금법이 법제화되면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에서 교수나 교수지원자가 동성애자로 밝혀지게 될 때 채용을 거부하는 것이 불법이 된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가 요구하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을 때에도 채용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이러한 경우 기독교 학교는 학생 구성에 있어 기독교 학교의 특수성이 희생될 수 있고, 신학교는 교회의 목회자 양성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독소조항으로 인해서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심각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대응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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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1
  • 주일학교 교사양성에 힘쓰자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미래의 근간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주일학교가 무너진다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으며, 또 많은 통계들은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너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데서 출발한다.   주일학교 교사는 먼저 학생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관심과 고민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며 친구라고 불렀다.   좋은 교사는 좋은 상담자이다. 세익스피어는 “13세부터 20세 사이의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만큼 청소년 시기에 고민과 갈등이 많다는 증거이다. 교사는 상담자로서 학생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주일학교교사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신앙성숙을 돕는 자다. 교사는 성경지식을 주입시키는 자가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자신이 먼저 배운 지식과 경험을 학생들이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주변 환경, 학습 환경, 생활환경의 장애물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특별히 예배시간에 교사들이 먼저 진지한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모범이 되도록 한다. 예배시간 엄수, 지각?결석 등을 하지 않고, 예배시간에 교사들 간의 잡담을 삼가야 한다. 이러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일 때 주일학교에 미래가 있는 것이다. 스승의날, 스승의 주일을 보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인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해 좋은 교사의 야육에 모두가 힘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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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1

실시간 사설 기사

  •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을 환영한다
    2019년 연초부터 한국기독교의 대표적인 연합기관인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을 추진한다는 소식에 크게 환영한다. 지난달 31일 전광훈 한기총 대표회장과 권태진 한교연 대표회장은 2월 말까지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오는 6월 말까지 통합하기로 했다. 특히 통합합의서에서 “한국교회가 나라와 민족의 희망이요 사회의 등불이었던 본연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근래에 와서 몇몇 지도자들의 이기심으로 분열돼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며, “교회가 분열된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는 데 뜻을 같이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할 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기다렸던 바램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염려가 되는 것은 두 기관이 2017년 8월 통합을 추진했지만 무산됐다. 더욱이 한교연은 지난해 한교총과도 통합을 선언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빛과 소금이라는 본연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몇몇 지도자들의 이기심과 아집으로 분열되어 지탄의 대상이 됨으로써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고 있다는 치욕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알면서도 방관해온 것이 사실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한국교회가 가장 중요한 것은 “평안이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다”(엡4:3). 평안이 매는 줄은 주님의 십자가이다. 성령이 하나 되는 유일한 길은 이 모든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서 처리하는 것이다. 성령이 하나 되는 통합의 길은 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이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엡4:12)는데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분열은 지도자들이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에 무관심한데서 비롯되었다. 봉사의 일이란 교회를 똑바로 세우는 것이다. 이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모처럼 두 기관이 통합의 결의를 한국교회 앞에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에 각자가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성령이 참으로 하나 되는 통합이 되기를 간곡히 제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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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13
  • 3·1운동 100주년 기념예배에 적극 참여하자
    2월 24일 주일에 합동, 통합, 기장, 기감 등 주요교단은 3.1운동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자고 소속 교회들을 독려하고 있다. 큰 문제가 없는 한 대다수 한국교회는 2월 24일 주일에 3.1운동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릴 것으로 예상된다. 여러 교파와 교단으로 분열돼 있는 한국교회가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며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통합측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한국교회가 다시금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영적 부흥의 새로운 전기를 선포하고자 ‘3·1운동 100주년 기념 공동예배 안’을 마련했다”며, 2월 24일 각 지교회 예배당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공동예배 안’으로 드려줄 것을 요청했다. 기장 역시 2월 24일에 3.1운동 100주년 기념예배를 위한 자료집을 전국교회에 배포하고,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고 했다. 한국교회에서 보수로 통하는 합동 역시 총회장 이름으로 오는 24일 주일을 3·1운동 100주년 기념 공동예배로 드리자고 전국교회에 호소하고 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합동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예배를 교단 차원에서 공동으로 하자고 결의한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정치적 사안을 기념하는 예배를 극도로 꺼렸던 합동교단이 산하 교회들에게 3·1운동 100주년 공동예배를 독려하고 또 3월 1일에는 한교총이 주최하는 교회협과의 공동예배에도 참여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해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2월 24일 3·1운동 100주년 공동예배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교단별로 예배를 위한 자료집을 배포했기에 예배를 진행하는 데에 어려움을 없을 것이다. 각 교단과 연합기관별로 3.1운동이라는 민족사적 대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내 교회’만 생각하는 극단적 개교회주의를 버려야 하다. 교단과 교파라는 장벽을 넘어 한국교회 전체라는 공동체성 속에서 2월 24일 주일을 맞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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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13
  • 지도자는 ‘그리스도의 사신(使臣)’이다
    새해를 맞으면서 기독교 연합기관들이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하는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 29일 한기총 회장을 비롯하여 새로운 지도자들이 선출됐다. 한기총은 정체성을 회복하는 연합기관의 대표로서 앞으로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선도적인 기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후보자 두 명 모두가 한국교회가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데 공감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기총 중심의 연합과 교계 정상화를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로 꼽았다. 문제의식은 맞다. 그러나 지금까지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것은 지도자들의 분명한 사명의식이 부족했다. 교회의 지도자는 그리스도의 사신(使臣)으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하나님과의 회목이다’. 사신은 대리자로 보냄을 받은 자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중대한 의미를 몇 번이고 되새겨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화목’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째는 아직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이 있다. 바로 그들에게 새 생명을 얻게 함으로써 하나님 자신과 화목케 하는 것이다(고린도후서 2:19). 두 번째는 이미 하나님과 화목했지만, 전진된 화목을 이루지 못한 어린 성도들이 너무 많다. 그리스도는 사람인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셔서 우리가 부활 생명 안에서 그분을 향하여 살도록 하셨다(고린도후서 5:14~15). 그러나 현재 연합기관들이 이런 일을 선도적으로 실행하고 있느냐는 것은 참으로 아쉬움이 많다. 지도자들이 분열과 이기심, 파벌과 탐욕, 심지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다(디모데후서 3:15)는 문제로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아 왔다.  현재 한국 기독교는 생명이 감춰짐으로써 세상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도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믿음을 지키고 있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일(에베소서 4:12)에 돌아보지 못하고 있다. 특히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시대적 사명까지 담당해야 한다면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책무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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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30
  • 소외된 이웃 돌아보는 설을 맞자
    민족의 명절인 설이 다가왔다. 설날하면 어떤 기다림이 있을까? 연휴, 고향, 부모, 친구, 차례, 성묘 등의 단어를 떠올린다. 민족의 고유 명절이기에 명절동안 국민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설은 가족이 모여 사랑과 정을 나누는 날이자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민족의 복된 절기이다. 설은 새해 첫날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음식을 마련하여 가족과 조상에 감사하는 날이다. 농경 전통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뿌리를 내리며 사는 사람들이 고향을 지키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 부모와 형제들이 바쁜 삶으로 헤어져 살다가 명절이라는 문화를 통해 만나서 정을 나누고 조상을 기리는 문화는 우리의 삶을 더욱 따뜻하고 풍성하게 만든다. 이웃과 음식을 나누는 날 또한 우리 삶의 일부분이다. 설날에는 다양한 풍습들이 있다. 차례, 세배, 떡국, 설빔, 덕담, 윷놀이, 널뛰기 등이 그것이다. 그중 설날의 대표적인 풍속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세배로 원래는 차례가 끝난 뒤에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찾아다니며 새해 인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차례가 끝나면 웃어른부터 차례로 새해 첫인사를 드리는데 이를 세배라 한다. 집안의 세배가 끝나면, 아침 식사를 한 후에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린다. 이렇게 설은 우리에게 하나의 축제로 지내왔다. 가정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참여해 웃고 즐기는 축제인 것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명절에 잊지 말하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경제적 위기로 인해 모두가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기쁨을 나눌 가족이 없거나 실업이나 폐업 등으로 직장을 잃고 어두운 명절을 보내는 이웃이 많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즐거운 설이 되기 위해서는 이웃을 위한 나눔과 사랑이 더욱 절실하다. 우리의 명절은 이웃들과 나누며 기쁨도 함께하는 축제였음을 기억하고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사랑에 앞장서는 날로 지켜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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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30
  • 겨울캠프의 전통 되살려야 한다
    동절기에 주일학교와 청소년 및 청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영적인 훈련을 받는 ‘겨울캠프’는 한국교회 부흥과 성장의 소중한 밑거름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겨울캠프의 횟수와 참여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여기에 대한 한국교회 전체의 관심과 대응이 절실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다음세대를 신앙적으로 세우는 일이 한국교회의 명운이 걸린 중차대한 과제임을 자각해야 한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각종 지표와 통계는 지금의 상황이 상당히 심각함을 경고해주고 있다. 한 대형교단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년 사이 교회학교 학생수가 절반이나 떨어졌다고 한다. 최근 한국사회의 급격한 노령화와 출산율의 감소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킬 전망이다. 그러나 출산율 감소만 탓해서는 안 된다. 먼저 교단이나 총회 차원에서 겨울캠프의 전문가 그룹을 양성하고 지원해야 한다. 교회사역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고, 여기서 사람은 ‘전문가’이다. 지금의 시대적 특징을 잘 파악해서 거기에 맞는 효과적인 전략과 전술을 새우는 전문가 그룹을 육성하고 양성해야 한다. 그래서 이 그룹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기획과 프로그램으로 겨울캠프를 진행하게 해야 한다. 여기에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 ‘개교회주의’ 또는 ‘패배주의’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 ‘우리 교회는 크니까 자체적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식의 개교회주의는 타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이다. 또 ‘우리 교회는 너무 작아서 아예 할 수 없다’는 식의 패배주의는 한국교회를 더 깊은 침체로 밀어 넣을 뿐이다. 한국교회는 식어진 겨울캠프의 열기를 다시 살리기 위해 ‘우리는 하나’라는 운명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교회학교가 무너지면 한국교회 전체가 무너진다는 절박감 속에서 모든 교회가 겨울캠프의 전통을 회복시키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선지자 에스겔이 구약시대에 봤던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는 비전이 지금 이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줘야 할 때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1-24
  • 3·1운동 기념사업 내실있게 준비하자
    2019년 3월 1일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1세기라는 의미이다. 특히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함께하는 해이다보니 우리 민족의 지난 100년의 시간은 너무도 많은 변화와 질곡과 역경의 시간이었다. 3·1정신은 한마디로 우리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사사로운 운동이 아닐 뿐 아니라 더욱이 당파적 운동이나 이념적 운동도 아니다. 모든 국민들이 나셨다. 특히 종교인들이 앞장을 섰다. 이상규박사(고신대 명예교수)는 한 세미나에서 “3·1운동 당시 기독교 인구는 20~22만으로 전 국민의 1~1.5%에 불과했으나 신도 100만 이상의 천도교보다 더 많은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교회나 선교학교가 없는 지역에서는 천도교와 협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100주년을 맞이한 현 시점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3·1정신의 회복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지금의 모습은 3·1정신에 역행하는 허리 잘린 고난의 연속이다. 문재인 정부의 평화정책으로 한반도의 평화분위기에 잠시 취하고 있으나 남한을 핵 무력으로 지배하려는 북한의 핵은 더욱 요원한 채, 남남갈등만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정부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활동에 임하고 있다. 특히 100년 전처럼 종교계의 적극적인 협력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독교계의 기념사업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한국교회교단장회의에서도 23개 회원교단뿐 아니라 3·1운동 기념사업을 여러 해 준비해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YMCA전국연맹 등 연합기구들과 함께 하나가 되는 전체 틀을 ‘준비위원회’와 같이 만들고, 그 안에서 교단별, 기관별로 현재 추진 중에 있다. 문제는 그동안 연합활동들이 내실을 기하지 못하고 일회성의 이벤트성이 강했다는 지적을 감안하여 지난 100년의 의미를 되새기며 새로운 100년을 향한 진정한 의미의 우리민족의 하나 됨의 평화이기를 준비하자. 
    • 오피니언
    • 사설
    2019-01-24
  • ‘남북통일’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역할
    2018년 남북정상회담과 미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는 평화의 환상(幻想)에 취해 있다. 남북한 간의 화해로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왔고, 한반도의 평화는 동북아의 평화 그리고 세계의 평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꿈꾸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평화정책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현실을 더 이상 호도하면 안 된다.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가 남북한의 화해, 즉 우리 민족끼리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처절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한반도의 모든 위기는 외세에서 비롯되었다.  남북통일은 한반도에 존재하는 두 국가가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남북통일과 북남통일이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다. 더욱이 북한은 전체주의적 독제체제이다. 전체주의란 “인간의 행동을 장악하고 사상을 타락시킴으로써 인간을 서서히 파탄시켜나가는 체제다. 오직 지도자만이 의사결정을 할 권리와 책임을 가질 뿐이다”(브레진스키). 북한 핵이 존재하는 한 평화통일은 요원하다. 그렇다고 기독교에서 방관할 수가 없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요, 평화의 종교다.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보호하면서 지키고 있다. 기독교가 나서야 한다. 그러하기에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그 사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선 그동안 진보세력들이 주장했던 통일신학을 범 교단이 함께하는 북한 복음화의 구체적인 대안이 있어야 한다. 둘째 북한 바로알기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북한주민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주체사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북한에서 주체사상은 일종의 북한식 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에 김일성·김정일이 자리하고 있음을 교회에서 강조해야 한다. 셋째 탈북동포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탈북자들의 정착에 힘써야 한다.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지는 경우, 북한 선교의 선도적 역할을 다름 아닌 바로 탈북자들이 담당할 때 성과를 올리기 쉽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도덕적 우위를 앞세워 사회적 통합을 선도해가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1-22
  • 다양성보다 정체성이다
    국내는 물론 세계의 대학들은 무한경쟁으로 이미 치열한 생존을 위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저출산 사회에서 대학의 존립을 위한 중단없는 노력의 경주를 통해 수도권을 비롯한 지방의 후발 대학들 역시 너나할 것 없이 치열한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 특히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대학은 물론 신학생 양성을 위해 운영되고 있는 대학이 다른 대학들과 현실세계에서 경쟁하여 학문적·사회적 명성을 획득하는 일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일반 대학으로서 다른 대학들과 경쟁을 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대학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는 중대한 과제를 지니게 됐다. 기독교 대학의 정체성이란 대학의 교육목적과 행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독교의 특성 혹은 기독교 학교들의 설립이념과 근본적 교육목표를 규정하는 기독교의 본질을 의미한다. 이러한 본질은 곧 복음으로, 이러한 정신과 신앙은 학교의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구성하는 일종의 내적 연결 축이된다. 이번 안양대사태를 비롯하여 각 기독교 대학들은 현재 대학 정체성 유지와 존립을 위한 강제적 변화의 기로에 서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특히 대학 이사회를 비롯하여 교원들이 다양성이라는 사회적 기류속에 비 기독교인들이 다수 참여하여 의사결정권을 행사하여 이러한 갈등이 더욱 커지고 있다. 기독교대학이 일반대학과 다른 점은 채플 뿐만이 아니라 모든 교과목을 기독교적 관점으로 접근하는데 있다. 모든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이 기독교 교육의 범주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교수들이 먼저 확고한 신앙을 바탕으로 교육에 임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 사학들의 교육 자율성이 확보되지 못하면서 부정적 요소들이 나타나면서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응도 점처 시급해지고 있다. 기독교 학교들은 실존적인 상황을 정확히 분석하고 미래를 위해 기독교학교 정체성 확립을 위한 대안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1-22
  • 이제는 한국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 ― 다시 맞는 새해의 다짐
    한국교회는 새해를 맞아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새로워진 모습으로 출발해야만 교회로써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기이다. 이미 교회 밖으로부터 신뢰를 상실한 한국교회는 고질적인 병리적 현상을 치유하고, 사회를 향해 새로워진 모습으로 가야 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물량주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워진 모습이 아니면, 사회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무엇보다는 개혁과 갱신을 통해 새로워지고, 사랑의 실천을 통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특히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된 모습으로 사회발전에 공헌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교회 밖에서 ‘사랑의 실천’을 감당해야 한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일컬어진다. 그 사랑은 댓가가 없는 무조건적인 것을 말한다. 사랑의 본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기독교에 있어서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가장 큰 계명이며, 율법의 완성이고, 예수가 주신 새계명이다. 그래서 믿음이나 소망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최우선적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교회 밖의 사회와 나라,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사랑을 실천할 때만이 한국교회가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보며 줄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땅에 사랑의 공동체를 세울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의 실천에 앞장 서야 한다. 하나님이 오늘의 한국교회에 주시는 명령임을 자각하고, 사명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개혁’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개신교가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개혁’이다. 개신교 자체가 중세의 타락상에서 벗어나 새롭게 다시 태어나려는 몸부림에 의해 탄생한 것이기 때문에 ‘개혁’은 어떻게 보면 개신교회의 존재근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개혁’이 없는 교회는 이미 그 존재의미를 상실했다고도 할수 있다. 한국교회도 이 명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더구나 한국교회는 짧은 역사 속에서 급속한 성장을 이룩하는 동안에 여러가지 부정적인 모습들을 노정시켜 왔다. 윤리적인 타락과 개교회주의, 그리고 분열 등 한국교회의 삐뚤어진 모습은 이제 일반인들에게도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한국교회는 개혁을 통해 새로워져야 한다. 만연된 고질적인 병리적 현상을 치유해야만 새로워질 수 있다.  ◆한국교회는 ‘연합’과 ‘일치’로 하나돼야 한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라고 할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분열은 그리스도의 몸을 손상시키는 동시에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교회가 끊임없이 일치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분열해 왔다.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지고, 연합기관도 하나가 아닌 여러 개로 나누어졌다. 사회를 향한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오늘이다. 이제는 교회의 다양하고 풍부한 전통과 고백은 유지하면서 신앙의 내적인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신앙을 하나로 표현할 수 있는 ‘일치의 표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한국교회가 ‘다양성 속의 일치’와 함께 ‘일치 속의 다양성’도 동시에 추구해 나가야 한다.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로 하나되어야 할 시대이다.  ◆‘교회부흥’과 ‘민족복음화’, ‘세계복음화’에 앞장 서야 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이다. 그 명령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선교초기부터 외쳐 왔던 민족복음화는 아직도 이룩하지 못했다. 또한 세계의 많은 민족이 복음의 빛을 경험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이 지상명령을 힘써 실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특히 교회의 부흥을 재점화시켜야 한다. 교회가 다시 부흥되려면 오늘의 교회마다 안고있는 고질적인 병리적 현상을 치유하고, 사회로부터 신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교회는 사회로 부터 신뢰를 상실했고,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회로부터 신뢰받는 교회로 태어나고, 그 모습으로 교회부흥과 민족복음화, 그리고 세계복음화에 앞장 서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2-31
  • ‘목회자 기본급’제도 준비해야
    한해가 바뀔 때마다 미자립교회의 문제가 화두로 떠오른다. 미자립교회는 말 그대로 아직 스스로 서지 못한 교회를 말한다. 미자립교회의 대부분은 개척교회와 농어촌교회이다. 미자립교회는 자립이 되지 않다보니 목회자에게 충분한 사례비를 주지 못한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어쩔 수없이 ‘목사의 이중직 금지’에도 불구하고 생활전선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다. 미자립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교단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의 경우 ‘교회자립개발원’이라는 총회기구를 뒀고, 기독교침례회는 총회장이 직접 나서서 미자립교회 지원에 대한 대책을 발표했다. 이렇게 지교회나 개인 차원이 아닌 교단이나 총회 차원에서 미자립교회에 대해 지원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그러나 임기응변적인 대책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대안과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몇몇 대형교회에서 미자립교회 지원을 위해 몇 억을 쾌척했다는 뉴스는 반갑고 좋은 것이다. 또 이러한 운동은 더욱 확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확고하고 장기적이며 안정적인 대책수립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런 면에서 교단이나 총회가 소속 목회자에게 일정액의 ‘기본급’을 주는 ‘목회자 기본급’제도를 마련해서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제도는 미자립교회 목회자의 문제, 한국교회 양극화의 문제 등에 대한 하나의 근본적 대책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재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와 ‘신학’의 문제이다. 모든 목사가 부름 받은 동역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라는 의식과 의지가 있다면 시행할 수 있는 제도이다.  새해에는 각 교단별 실정에 맞게 ‘목회자 기본급’ 제도를 도입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리기를 기대해본다.
    • 오피니언
    • 사설
    2018-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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