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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주간, 신앙 성숙의 길로 삼자
       매년 맞이하는 고난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자기 십자가’를 체험하는 기간이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셨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고난과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이란 말은 성경 속에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고난주간이 교회의 절기로 자리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형식화되고 관습화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은 고난주간을 맞아 ‘자기 십자가’를 지는 분명한 체험이 필요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셨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주인은 주님이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하는데, 육신을 부인해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고난주간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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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4-03-13
  • [사설] 해외선교사의 현실과 성경적 선교지원
      선교는 세속적 경제구조와 맞물려 진행되지 않는다.   2010년을 전후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특별히 중국 공산당의 박해로 인해 철수하는 선교사들이 많았고, 인도나 터키 등 자신들의 종교가 분명한 나라들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일이 많았다. 그 국가들은 주로 비자를 연장 해주지 않던가, 정부 정책에 반하는 일들을 했다는 이유를 근거로 진행한 일종의 박해였다. 이런 일들이 최근 한국인 선교사의 수가 줄어든 원인 중에 하나가 됨은 분명하다. 또 그런 박해는 예상된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인 선교사 감소의 원인 중, 큰 이유는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 저하라는 것은 자명하다. 선교사들의 사역과 생활은 교회의 지원과 성도들의 후원으로 유지된다. 이러한 한국적 선교시스템에서, 교세의 감소로 지원이 약해지고 또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개인성도 감소로 개인 후원금이 줄어들고 있다. 이 현실적인 문제들과 싸우는 현장의 선교사들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믿음에 의지한다.  우리의 선교는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란 말씀, 또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마28:19)라는 말씀에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든 세상 끝까지 전파해 한 영혼이라도 구하기를 애써 왔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현재 교회의 경제상황과 인적 상황에 기반하지 않는다. 오직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큰 언약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근거한다.  교회는 먼저 우리의 것을 떼어 놓기 전에, 내 쓸 것을 것을 줄이고 양보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고 헌신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과 열방에 가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세상 경제의 논리가 아닌, 하늘 경제의 풍성함과 기적을 전해 주어야 한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선교하고 있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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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2
  • ‘퀴어 축제’, 반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올해도 이른바 ‘퀴어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를 두고 한국교회는 한목소리로 우려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우리는 동성애, 근친상간, 소아성애 등을 옹호하는 퀴어신학을 반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퀴어신학이 지지하는 낯설고 이상한 동성애는 창조섭리인 양성질서에 반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결국, 동성애는 성경의 주제가 아니고 부차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금기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게 신학의 보편적 주제가 될 수는 없다. 퀴어신학의 주제는 동성애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 동성애가 신학의 핵심이 돼야 하고 동성애에 대한 모독과 억압은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창조자 하나님과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향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의미한다.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과 인류 보편의 성 윤리와 맞선다. 비도덕적이고 괴기한 성적 관행이다. 남성 동성애의 경우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의 비정상적 접촉이 반복된다. 창조질서에 어긋난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의학적 질서와도 맞지 않는다. 동성애는 결국 괴기한 행위일 뿐이다.   결혼과 가정은 동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결혼과 양성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생산되며 사회와 국가와 인류는 존속될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결혼, 즉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양성결혼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의 복이요 인류 생존의 조건이요 기반이다. 따라서 동성애 반대는 이 시대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 교회는 바른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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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모범이 되는 기독교가정이 되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전통적으로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관계로 얻은 자녀들로 구성된 혈연공동체인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의식주를 함께 나누는 생활공동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와 자녀들로 구성되는 이런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이해와 가정의 형태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독신과 혼전동거의 증가와 더불어 결혼율의 감소, 동성애와 성전환 그리고 동성결혼 등 세태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정에 대한 이해와 형태들이 나타남으로 전통적 가정관과 가정형태가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다.   먼저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질서로 제정하신 천부적 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둘이 하나가 되는 인간의 결혼제도는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명의 연합과 사랑의 사귐을 이루는 언약관계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고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은 창조의 질서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속받은 교회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관계로 하나님의 영적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신비로 이해된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함으로 영적인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 온전한 부부간의 사랑과 연합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구속에서 나타나는 결혼과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이러한 결혼언약의 영적신비를 기억함으로 반드시 영적 생명을 함께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 곧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결혼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이혼과 재혼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에 모범이 되는 기독교 가정을 이뤄가는데 온 힘을 기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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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를 우려한다
    지난 2020년 6월 29일 자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은 그 안에 전통적인 기독교윤리와 배치는 되는 조항이 있어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동법 2조 1항에서 성별을 남성, 여성, 그리고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 이는 성을 인식, 표현, 인지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이 의미는 생물학적 인체구조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인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이는 남성과 여성 외에 다른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입장이다.   성적지향에 대해 차금법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감정적, 호의적, 성적으로 깊이 이끌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차금법의 취지와는 달리 레위기 18:22, 20:13에서 동성애를 윤리적인 악한 행위로 간주하여 명확히 금지하고 있다. 이것들은 정언명령으로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는 서술법으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준수해야 할 명령이다.   또 동법 제3조 가항에서 모집과 채용을 포함하는 고용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차금법이 법제화되면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에서 교수나 교수지원자가 동성애자로 밝혀지게 될 때 채용을 거부하는 것이 불법이 된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가 요구하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을 때에도 채용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이러한 경우 기독교 학교는 학생 구성에 있어 기독교 학교의 특수성이 희생될 수 있고, 신학교는 교회의 목회자 양성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독소조항으로 인해서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심각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대응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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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1
  • 주일학교 교사양성에 힘쓰자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미래의 근간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주일학교가 무너진다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으며, 또 많은 통계들은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너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데서 출발한다.   주일학교 교사는 먼저 학생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관심과 고민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며 친구라고 불렀다.   좋은 교사는 좋은 상담자이다. 세익스피어는 “13세부터 20세 사이의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만큼 청소년 시기에 고민과 갈등이 많다는 증거이다. 교사는 상담자로서 학생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주일학교교사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신앙성숙을 돕는 자다. 교사는 성경지식을 주입시키는 자가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자신이 먼저 배운 지식과 경험을 학생들이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주변 환경, 학습 환경, 생활환경의 장애물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특별히 예배시간에 교사들이 먼저 진지한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모범이 되도록 한다. 예배시간 엄수, 지각?결석 등을 하지 않고, 예배시간에 교사들 간의 잡담을 삼가야 한다. 이러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일 때 주일학교에 미래가 있는 것이다. 스승의날, 스승의 주일을 보내면서 한국교회의 미래인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해 좋은 교사의 야육에 모두가 힘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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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05-11

실시간 사설 기사

  • 꾸준한 독서로 출판위기 극복하자
    기독교출판이 갈수록 축소되고 있다. 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기독교출판의 축소로 기독교출판사의 매출이 전년 대비 10%에서 25%까지 매출이 감소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기독교출판이 축소되는 것은 한국교회가 책 읽는 일을 등한시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출판은 본질적으로 문서사역을 통한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1889년에 국내에서는 최초로 배재학당 안에 현대식 인쇄소가 설치되어 문서선교를 위한 기독교 서적들과 신문 등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한글로 번역되어 보급된 성경과 찬송가는 대한민국 복음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한국은 미국에 이어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세계 2위의 선교대국이 되었다.   다행스러운것은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기독교출판은 위기극복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기독교출판협회는 매년 코엑스에서 개최되는 서울국제도서전 내에 기독교문화거리를 조성하고 일반 독자들과의 소통을 시도하며 문서선교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출판협회를 비롯해 두란노서원, 토기장이, 요단출판사 등 20여개 기독출판사들이 10개 부스를 마련해 참가하고 있다. 여기에 변화되는 디지털환경에도 효과적인 대응을 펼쳐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꾸준히 기독교 서적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서를 통해 신앙의 내용을 바르게 채워야 한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게 지금 이 세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물론 스마트폰 같은 디지털기기를 이용해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을 사서 정독하는 것은 단지 정보만이 아니라 경건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출판은 이렇게 신앙의 내용을 채우고, 성도들에게 경건을 주는 사역이다.    독서의 계절에 함께 기독교서점으로 달려가 신앙서적을 사서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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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09
  • 한국교회의 분열을 우려하며
    한국교회 분열은 항상 있는 일인가? 최근 예장 백석대신측 교단 내부에 균열이 일어나면서 많은 안타까움을 갖게 한다. 한국교회의 분열은 1951년 신사참배문제를 시작으로 분열이 계속되어 왔다. 2006년 종무실 자료에 따르면 한국교회는 약 290개 교단에 이른다. 그 가운데 장로교단이 114개 정도였으니 분열의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이뿐만 아니라 종무실에서는 그 이후 현재까지 종교통계를 집계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실제 얼마나 분열되고 있느냐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수많은 교단 난립과 분열은 한국교회의 현실이요 부끄러움이다. 분열은 그리스도의 몸을 지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분열이 계속되고 있는가? 한국교회의 지나친 세속화에 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신앙노선과 지역 갈등, 교회연합기관의 난립과 정체성의 한계, 목회자 우상화 등 지도자의 교만과 도덕성 문제, 신학교 난립으로 무임·무자격 목회자 양산, 교회기관의 재정 불투명, 정치권과의 부화뇌동, 기독교 NGO활동 미흡. 안티 기독교 확산, 교계언론의 영세성과 사이비 기자 폐해 등은 믿음의 근본을 떠난 세속화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임을 깨닫고 자백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에 한국교회는 분열과 다툼을 해결하는 데에 하나 된 목소리를 내도록 갱신의 길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하나 되는 길은 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이 교인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말씀하고 있다.   교회 지도자는 특별한 은사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동역자로서 그 책임이 막중하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이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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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09
  • 동성애 반대운동에 지속적으로 나서야
    동성애는 고대 근동지방에서 많이 있었는데, 동성애자라는 영어 단어 가 약 4,000년 전의 소돔에서 유래됐다. 소돔은 사해 남서쪽에 있는 성읍 으로 고모라와 함께 타락과 부패의 대명사로 불리면서 소돔은 유황불 심 판으로 결국 잿더미가 되어 신약시대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심판 의 경각심을 주는 곳이다. 특히 아브라함과 롯이 살았던 가나안은 삼각 모양의 경계 안에 있었다. 갈대아 우르는 우상의 도시요, 애굽은 세상적 인 부와 쾌락의 도시이며, 소돔은 동성애 등 죄가 가득한 악한 성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교인들은 갈대아, 애굽, 소돔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경고의 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기독교는 어느 때이건 세상의 정욕과 동성애를 반대해 왔다.   그러나 동성애론자들은 21세기 세계화가 진전되고 다양성이 중시되 면서 동성가족도 다양성 중에 하나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인권문제와 더불어 법적인 문제는 물론 국민으로서 받을 사회적 보호조 차 받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그들은 수없이 많은 잘못된 정보로 선 입견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면서 한 인격체로서 법적인 인정과 더불어 사 회적 시선 또한 개방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교회가 동성애 반대운동을 왜 지속적으로 나서야 하는가? 그동 안 동성애자들의 퀴어축제,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의 소수자의 성평등 합법화와 특정 정치인들의 부화뇌동으로 인해 자신들의 주장과 이론적 인 체계까지 마련하면서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오늘날의 상황은 롯 이 살았던 소돔의 상황보다도 나은 것이 없기에 대책이 필요하다. 첫째 롯은 삼촌인 아브라함에 의하여 수동적인 교인였다. 믿음이 강한 적극적 인 성도가 되지 못했다. 둘째 롯은 믿음보다는 물질적인 풍요를 선택했 다. 셋째 롯의 아내와 자녀들은 도덕성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속적으로 교인들을 온전케 하고, 교회를 세우는 데에 주력해야 할 것이 다. 교인의 믿음이 온전할 때에 동성애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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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05
  • 신앙중심의 가족문화를 회복해야 한다
    민족의명절추석을가족과함께하기위해여느때와다르지않게긴 귀성행렬이 대한민국의 전 도로망을 가득 채울 것이다. 그 힘든 귀성길 을 우리는 단지 관습과 의무감에 따라 감내하며 고향으로 향하는 것일 까? 아니면 가족을 만난다는 설레임으로 귀성길에 오르는 것일까?   이미 우리사회는 핵가족화 된지 오래고, 그 가족조차도 여러 가지 이유 로 개인화되어 버렸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개인들을 묶어 공동체로 만들 어가는 일에 철저히 무기력해 보인다. 부모들은 돈 버는 일에 지치고, 자 녀들은 학업 활동에 정신이 없다.   기독교신앙은 우리사회의 유대감을 회복시킬 수 있다. 가족을 다시금 묶을수있는힘이있다.과거에기독교가정들은명절때면언제나함께 예배를 드리고 축복기도를 해주는 훌륭한 전통을 만들어 지켜나가곤 했 다. 서로의 삶을 이야기하며 가족의 유대감을 형성했다.   기독교인들이라면 명절에 반드시 가정예배를 드려야만 한다. 만남의 시 작과 끝, 말씀과 기도로 함께 해야 한다. 그러한 모습을 보며 자란 아이들 은 결코 엇나갈 수가 없다. 자기의 부모를 존경하며, 부모가 전해주는 말씀 에 순종하는 부모를 본 자녀는 반드시 그런 모습을 본받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인스턴트 문화에 익숙한 나머지 진지한 대화와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신앙을 통해 먼저 가정에서부터 깊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정해진 시간이 있는 교회들의 공예배보다 오히 려가정예배를통해더욱더진솔한예배를드릴수도있다.평소예배에 소홀했던 기독교가정은 가정예배 문화를 다시금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다시금 반복되어 지친 일상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 기독교 인들에게추석과설명절이그런축제가될수있길바란다.세속화된사 회에서 심신이 지친 우리 기독교인들이 설레임을 갖고 고향으로 향하길 바란다. 보고 싶은 가족을 다시 보고, 가정의 유대감을 회복하며, 영적 재 충전의 시간을 도모하는 이번 명절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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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05
  • 이단·사이비 대책은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기독교의 이단·사이비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초대교회부터 있었다. 다만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의 세속화에 비례해서 이단·사이비도 더욱 발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이단 연구자들은 한국의 이단·사이비 인물이나 단체를 총 55개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중에 핵심단체로는 통일교와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여호와의 증인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사도행전 10장 36절)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정통교단 속에서 남몰래 숨어든 이단·사이비는 제외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들 모두가 가정 파괴와 경제적 착취, 반인륜적 범죄 등을 저지르며, 반사회적 행태를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먼저 세속화를 극복하는 초교파적인 운동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가 유대교와 금욕주의와 영지주의 등 너무 많은 사상이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경계했다. 이러한 사상은 유대인과 헬라, 로마 등 이방인 문화의 높은 산물이었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보기에 좋은 것들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대치물이 되었다. 특히 골로새서에서는 철학, 헛된 속임수, 유전, 세상의 초등학문과 더불어 먹는 것, 마시는 것, 절기, 월삭, 안식일 등과 자의적인 겸손, 천사숭배 등으로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강조한다. 이 말씀의 상이란 우리의 전부가 되신 그리스도이다. 이것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합된 문화 즉 세속화가 교회에 밀려 들어왔기 때문에 이를 철저히 경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교회는 사람들로 구성된 것이므로 교회를 문화로 구성된 사회로부터 분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분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 충만하시다.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인 그리스도 몸이다. 이를 실천할 때에 이단·사이비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하실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8-27
  • 분열을 극복하는 장로교총회 되자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1회 총회가 평양신학교에서 열렸다. 이후 장로교회는 부흥에 부흥을 거듭하며 장족의 발전을 이뤄서 전체 한국교회의 70%를 차지한 지 꽤 됐다. 유럽이나 미주에서 장로교는 소수인데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니 장로교가 한국에서 꽃을 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장로교의 이러한 급성장이 교단분열에서 비롯됐다는 분석도 있다. 그래서 장로교회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였다. 1952년 신사참배문제의 여파로 고신측이 분열했고, 1953년 ‘자유주의신학’ 문제로 기장이 갈라져 나왔다. 그리고 1960년에는 WCC문제로 통합측과 합동측이 분열했다. 이후 통합측은 교단으로서 통일성을 잘 유지했지만, 합동측은 계속해서 사분오열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지금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쓰는 교단이 200개가 넘는다. 이제 한국의 장로교회는 분열이 아닌 소통하고 통합하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서로 반목하고, 비난하고, 갈등하는 구습에서 서로 이해하고, 쉬운 것부터 함께하려는 연합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주요 장로교단의 이번 총회를 살펴볼 때 아쉽게도 이러한 노력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여전히 교단 내부의 크고 작은 문제를 처리하는데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더욱이 한 중형교단은 무리하게 합병·통합을 시도하다 그 후유증으로 오히려 교단이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임원들 사이에 세상법정에 고소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이 보였고 결국 총회가 두 곳에서 진행될 위기이다. 만일 또다시 교단이 분열한다면 이는 장로교회를 넘어 한국교회 전체에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장로교단은 분열이라는 오욕된 역사를 청산하고 ‘형제가 연합하는’ 교회연합의 모습을 보여줄 역사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자기 교단의 이익만 생각하는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의 모습이 다시 한번 장로교회 안에 펼쳐지기를 기대하고 기도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8-27
  • 청교도 정신을 회복하자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경제보복을 가한 현 시점을 경제적 위기라고 많은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분명 맞는 말이다. 우리 산업계와 일본의 산업계가 지난 수십년간 맺어 온 협력관계를 급작스럽게 변경하는 것에는 분명 기회비용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회비용이 아무리 클지라도 이번만큼은 경제적·심리적 일본 의존도를 극복해야만 한다는 국민들의 정서와 의지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다.  우리 기독교는 그 누구도 적으로 돌리지 않고 훌륭히 작금의 경제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소중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영국에서 시작한 청교도 정신은 말 그대로 청빈한 삶을 하나님께서 명하신 소명으로 간직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무절제와 방종한 삶이 아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내려는 기독교인들의 노력은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에 하나의 중요한 빛을 던져줄 수 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큰 은혜로 지금까지 경제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더불어 우리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명을 따르려는 피나는 노력과 절제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 기독교는 다시금 한국사회와 경제를 이끌어야 한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각자의 생업에 충실하며 기독교적 청빈의 신념을 간직하고 절제하며 이 경제적 위기상황을 극복해야만 한다.  우리 기독교는 세속의 논리와는 구별되어 살아간다. 소비의 논리가 아닌 기독교 청빈의 논리로 이 위기국면을 타개하자. 일본을 이겨야 한다는 경쟁의 정신이 아닌 기독교인 고유의 소명의 정신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자. 기독교는 세계사 속에서 분명 많은 죄과를 가지고 있지만, 또 인류에 기여해온 바도 적지 않다. 그 중에 청교도 운동만큼 우리 시대에 빛을 던져주는 예도 없을 것이다.      청교도 정신을 회복하자. 소명의식을 갖고 각자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고, 어려울 때일수록 절제하자. 급작스런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 이웃들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나서서 돕자. 기독교인들의 청교도적 삶은 지금과 같은 위기에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8-12
  •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다
    명성교회 담임목사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쟁점으로 부각하고 있다. 지난 6일 예장 통합측 총회 재판국은 명성교회 목사 청빙안이 교단 헌법 조항을 위반한 무효라고 판결을 내림으로써 교회는 물론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현재 담임목사인 김하나목사는 2015년 12월 정년퇴임을 한 김삼환목사의 아들이다. 명성교회는 2017년 3월 아들을 위임목사로 청빙하기로 결의하면서 교회 부자세습 논란에 휩싸였다. 이에 관하여 교회에서는 김하나목사 취임은 세습이 아닌 ‘정당한 승계’라며 반박하고 있다. 원로목사가 은퇴하고 2년이 흘러 김하나목사가 취임했으니 세습이 아니며, 장로교 법에는 교회의 자율권이 최우선인데 이번 결정은 이를 무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명성교회 내 반대세력과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 등 개신교 시민단체들은 명성교회 세습에 대해 일부 세력이 교회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개신교 전체의 공공성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명성교회 세습무효판결은 교회 세습관행에 대한 강한 제동의 성격은 있을지 모르나, 갈등을 계속될 것이다. 특히 일부 언론과 정치세력들까지 부화뇌동하는 현상이 있는 한 갈등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 명성교회 재판내용이 반기독교 세력은 물론 언론의 쟁점화가 이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담임목사 세습은 명성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타 교단 등 개신교 대형교회들이 그동안 이뤄져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왜 지속되는가이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잘 못된 이해와 교회의 지나친 세속화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에베소서 1장 23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은 인간들이 세운 조직체가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표현과 활동을 위해 거듭난 교인들로 구성된 유기체이다. 교인이 10만 이상 된다는 명성교회는 거듭난 체험을 가진 성도들이 얼마나 되는지의 문제부터 점검해야 한다. 기복신앙의 종교인들이 아닌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왜냐하면 분열은 교회의 참모습이 아니다. 참 교회는 성령이 하나 되는 교회이다(에베소서 4장 3절). 이 말씀은 교회가 분열되고 있다면 교회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실 정도로 크신 분이기 때문에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갈라디아서 1장 18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새 창조물인 교회의 가장 먼저 부활하신 분으로서 교회 안에서 으뜸이시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이것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새것이 되었기에 인간적인 옛것들은 지나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느 특정 목사의 사유물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큰 문제는 미국의 CEO신학을 쫓아 마치 기업을 운영하듯 물량주의라는 세속화에 매몰됨으로써 대형교회만이 최고의 교회로 오해하고 있다. 우리는 참교회의 모습을 찾아서 세속화의 길에서 벗어나는 방향을 찾아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8-12
  • 기독교 진리의 신뢰를 회복하자
    근 한국교회가 세상에 대한 소금과 빛의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심지어 교회가 사회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고 있다는 말까지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복음 5장 13절). 원래 소금은 부패시키는 균들을 죽이고 제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부패한 땅이 완전히 부패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요소이다. 그리고 빛은 어두워진 세상을 맑혀주는 것이다. 빛이 빛이면 깨닫게 하며, 깨달음은 생명과 지식과 지혜를 가져온다. 우리는 생명을 통해서 성결, 사랑, 겸손, 온유, 인내 등 생명의 풍성함을 갖는다(골로새서 3장 16절). 이 풍성함은 소금과 빛의 역할이다. 그러면 신뢰 회복의 세속화 대책은 무엇인가. 이것은 진리에 대한 분명한 믿음으로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 먼저 진리를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다. 진리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진리이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요한복음 14장 6절)하시면서,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다(요한복음 17장 17절)고 하셨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요한복음 1장 1절). 교인들 중에는 ‘무신론자’들 곧 종교인들이 많이 있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교인들은 교회의 역할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늘의 교회생활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로마서 14장 17절).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분의 영광을 표현하는 곳이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곳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 그리고 성령 안에 있는 희락이 중요하다. 의는 옳고 합당한 것이다. 교인들은 다른 사람에게나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올바르고 합당해야 함으로써 자신을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 평강은 의에 결과이다(히브리서 12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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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08-06
  • 한·일갈등 해소와 남북화해를 기대한다
    올해 74주년 광복절은 더 큰 역사적, 현실적 무게로 다가오고 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 이상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자는 종전과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요구도 높아지고 있다. 우리는 먼저 한일 사이의 무역 갈등이 조속히 해결되기를 촉구한다. 무엇보다 경제문제는 경제논리로 해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상품을 생산하고, 그 상품을 거래하는 것은 수요와 공급, 환율과 무역원리이라는 경제법칙에 따라 돌아가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통치 기간에 일어났던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같은 일본의 전쟁범죄를 묻어두자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인권과 국제법이라는 보편적 규범에 따라 우리가 마땅히 일본에 요구하는 것이고, 일본은 합당하게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이슈가 한·일 ‘무역전쟁’을 일으키고 확대시키는 원인이 돼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36년의 식민지지배를 통해 우리민족에게 큰 고난과 아픔을 남긴 일본은 이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한다. 한반도의 분단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우리의 자주적 힘이 아닌 주변강대국을 통해 왔다는 점에 기인했다. 그래서 강대국의 이익에 따라 분단이 됐고, 결국 민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이 발발했다. 한반도에 다시는 이러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광복절을 맞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공동기도문을 발표해 종전과 평화협정, 남북교류와 남북공존공영을 위해 기도했다. 참으로 귀하고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종전과 평화협정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땅에서 살고 싶다’는 한반도 모든 백성들의 절절한 요구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꿈꾸던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드는’ 비전을 실현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목표는 오로지 정치군사적 전략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없다. 쓸쓸한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외쳤던 세례요한처럼 평화와 화해의 소식을 전하는 한국교회가 돼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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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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