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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전한 시민의식에 합하는 교회되자
    한 한국사 전문가는 조선 중기부터 명나라에 사대하는 문화가 형성됐고, 이로 인해 조선은 항시 약소국으로서 주변의 큰 나라에 의존해야 한다는 시민의식이 싹텄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일종의 패배주의는 급기야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과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후 우리 민족은 우리 손으로 직접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결과 해방 이후 남쪽과 북쪽 각각 미국과 소련에 의지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전락했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친일을 하지 않으면 사상검증을 받았던 시절의 악습이 그대로 남아 친미를 하지 않으면 빨갱이라는 프레임으로 민중을 억압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기독교가 이러한 프레임 놀이에 앞장섰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흑역사다.    2,000년 전의 대한민국과 2,000년 이후의 대한민국은 전혀 다르며, 시민들의 의식 수준도 전혀 다르다. 과거에는 서양에서 왔다면 무엇이든 좋은 것이 될 수 있었지만 이제 우리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 영화가 세계 시장의 중심에 서게 됐고, BTS로 대변되는 한류열풍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K-방역은 전 세계의 칭찬을 듣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대한민국의 수준은 세계 어디에서도 뒤처지지 않게 됐다.   다행히도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더이상 수동적으로 타인이 시키는 대로 사고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타인에 의존하고, 타국에 의지해 살아가지도 않는다. 우리 사회는 이제 스스로 진보하고, 스스로를 긍정하며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새로운 역사를 새겨 나가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대한민국의 발꿈치를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 사회를 막아서고 있다는 평이 자자하다. 한국교회는 반성하고 회개해야만 한다. 현대 사회에서 감히 그 누구도 주장하지 못하는 “나만 옳소”란 아집을 버리고 건전한 시민의식, 다중의식의 진보적 흐름에 스스로를 맡겨야 한다. 그럴 때 한국교회에 다시 희망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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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7
  • 성령운동 회복이 시급하다
    코로나 장기화로 인해 우리 사회는 급속하게 단절 상태가 되면서 비대면 사회로 변하고 있다. 이웃의 왕래가 막혀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지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장차 다가올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이에 따라 교회는 시대적 환경이 기존 사회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도록 해야 하며 이를 위해 앞으론 새로운 방식의 성령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먼저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도록 해야 한다. 성령은 보혜사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보혜사라는 뜻은 다른 사람을 돕거나 변호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위로자’, ‘대언자’, ‘중보자’를 말한다. 보혜사 성령은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보내신 것이다. 이것은 아들과 아버지께서 하나이실 뿐 아니라(요 10:30),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라는 것을 증거한다.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에 성령을 얻는다(고전 12:3).    그러므로 이 시대의 ‘성령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내 삶의 실제로 살아야 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2~24).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신 9가지의 성령의 열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육신과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받는 생활이어야 한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러한 삶이 성령을 중심한 생활이요, 이를 실체적으로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참다운 성령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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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10-27
  • 한국교회가 사회를 선도하길 기대한다
    한국 개신교는 이제 이념적이고 정쟁적인 문제들이 아닌 우리가 대면해 있는 실질적 문제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대면한 실질적 문제 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기후문제란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유럽연합은 탄소배출량 저감의 모범적인 사례로 알려져 있는 만큼 우리는 유럽연합의 그린딜 정책에 주목해야 한다.   유럽연합은 1990년부터 2018년까지 경제 규모가 61%나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온실가스 배출은 오히려 23% 줄었다.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노력의 결과였다. 이에 더해 유럽연합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2050년까지 유럽연합 내에서 탄소 배출 제로라는 더욱 강력한 목표를 담은 그린딜에 정책을 내놓았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일찍부터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한 경제는 언젠가 성장이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을 깨달았고, 화석연료 기반의 에너지 구조에서 재생 에너지 환경으로 전환 작업을 착수했다. 유럽연합의 그린딜은 이러한 에너지전환의 일환으로 단순한 저탄소 정책만이 아니라, ‘화석연료 이후’ 시대의 새로운 경제정책임을 인지해야 한다.   다행히 우리 정부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보수 개신교의 반-정부 성향으로 인해, 정부가 시행하는 모든 사안은 반대부터 하고 보자는 식의 억지를 부리는 일도 적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개신교의 문제는 차별금지법과 동성애 반대 등 여전히 이념·사상적 문제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점이다.   기후문제는 그 시급성에서 다른 문제들과는 그 수준이 다르다. 기후문제를 인류가 되돌릴 수 있는 임계점이 7년 앞으로 다가왔다는 소식도 들린다. 인류가 기후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찾아올 재능의 형태와 그 규모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교회가 기후문제와 관련한 사회의 몽매함을 일깨우고, 우리 시민의식을 선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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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2
  • 한국교회의 재탄생이 시급하다
    정부는 지난 12일부터 전국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로 완화됐다. 그렇지만 교회는 아직도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교회의 생명은 교인 간의 사귐에 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한일서 1장 3절).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으로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됐다. 특히 거듭난 교인 간의 교제는 십자가 밑에서 맺어진 새로운 가족관계이자 사랑이다. 그러나 코로나 장기화로 교회가 곤고한 생활을 하고 있다. 또한 교회가 사회적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장 17절, 하박국 2장 4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루터가 종교개혁의 5대 원리인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강조하면서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을 깨달은 것이다. 당시 선지자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은 먼저는 갈대아인들에 의해 이스라엘에게, 다음으로 열국에 의해 갈대아인들에게 행하여 졌음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먼저 그분의 선민의 집에서 심판하였으며(베드로전서 4장 17절).   오늘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코로나와 사람들의 교만으로 완악하게 된 것은 교인들이 초대교회의 믿음으로 돌아가기 위한 심판의 모습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는 근원과 기초라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거듭남의 근원이요 동기이며, 하나님의 은혜는 거듭남의 수단이다. 더불어 하나님의 의는 구원하시는 능력이다. 이와 같은 견고하고 확고 부동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보좌의 기초(시편 89장 14절)이기 때문이다. 그 기초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로마서 14장 17절). 더욱이 하나님의 복음 안에 계시 되는 의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따라서 믿음으로만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종교개혁의 근본을 오늘에서 철저하게 살아내는 길이 한국교회의 재탄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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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2
  • 언택트 시대를 위한 신학연구가 시급하다
    신학(新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후반부에 의하면 모든 분과 학문을 거치고,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거친 후 그래도 남아 있는 추상적 대상, 즉 제일원인으로서의 존재를 탐구하는 학과이다. 이렇게 그리스 철학사에서도 하나의 자리를 마련한 신학은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러 신플라톤주의의 등장으로 더욱 엄밀해지고, 로마시대의 기독교의 대두로 기독교 신학으로 변모된다. 주지하듯 기독교 시대의 신학은 주로 변증론으로서 당시 일반 사회에 기독교 복음을 변증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현대의 신학자들은 날로 변해가는 과학·유물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기독교 전통 사상과 성서를 우리 시대의 학문들과 대비시켜 연구해왔고, 우리사회가 자본·세속 일방으로 향하지 않고 그보다 상위의 가치를 잊지 않도록 나름의 역할을 다해왔다. 그러나 코로나19 상황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전환에는 신학이 대처하기 어려운 근본적 문제가 깔려 있다. 바로 언택트 시대의 도래가 그것인데, 신학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피조물로서의 이웃과의 관계를 그 핵심적 대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문경지교(刎頸之交), 즉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그 숭고한 정신을 몸소 보이셨는데, 우리는 나의 목숨까지도 이웃에게 내어주기 전 반드시 깊은 사귐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이념적으로가 아닌 진정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하자면 먼저 이웃과 교제하는 과정이 반드시 요청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학은 언택트 시대에도 이웃과의 깊은 교재를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사회에 제공해야만 한다.   교회와 신학이 이미 변해버린 사회 환경을 인지하지 못하고 기성의 질서에서 사유하고 신앙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신학의 미래는 없다. 철학자 포이어바흐가 기독교는 곧 종말을 맞을 것이라 200년 전 예측했지만 기독교는 변해가는 상황에 적응하며 여전히 건재하다. 근대 계몽주의 강력한 도전에도 살아남은 우리 기독교가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위기를 잘 이겨내길 기대한다. 그리고 신학이 그 위대한 도전에 앞장서주길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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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5
  • 거룩한 교회 회복하자
    오늘의 한국교회는 위기 가운데 있다. 외부로부터는 세기의 역병인 코로나로 인하여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교회의 본질이 위협받고 있다. 외부적으론 이단의 발흥과 도전에 무방비한 상태에 있고 내부적으로는 기독교가 세속화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세상을 향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이런 현상들이 교회 속에 만연하고 있음에도 한국교회는 교회의 본래의 모습인 거룩함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잘못된 가르침은 물론 순수한 복음이 사라지고 거짓 가르침이 난무하고 있기에 교회의 거룩함을 회복해야 한다.   라오디게야 교회의 상태를 보자. ‘라오디게아’라는 뜻은 ‘백성을 기쁘게 하다’는 뜻인데, 사람들의 구미에 따라 메시지를 바꾸는 현대교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육신적으로 부유했지만 영적으로는 그야말로 곤고하고 가난한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교만하여 자기들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는데 있어서 빈궁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풍요함에서 곤고하고, 가련하고, 빈궁하며, 눈 멀어 참된 영적 통찰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타락한 교회 밖에 서서 그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우리는 세속화된 교회에 대하여 주님은 충고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내가 너를 권고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여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요한계시록 3장 18절).   그리스도를 위해 나의 가정과 내 장래와 내 운명과 내 온 인생을 대가로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거룩한 교회의 길이다.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당부하신 말씀은 세속화된 교회의 미지근함과 교만을 이기는 것이요, 필요한 금과 흰옷과 안약을 사는 것이며, 주님이 들어오시도록 문을 연다는 것이 모범된 공동체로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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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5
  • 교회는 상식을 무시하면 안 된다
    최근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감독의 성명이 국내 주요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며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동 감독은 성명을 통해 기감 소속의 교회들에게 대면 예배를 강행할 것을 촉구하며 혹시 청구될지 모를 구상권은 기감 본부와 연회 차원에서 해결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실로 국내 3대 개신교단 중의 하나로 진보적 색채를 내었던 감리회에서 나온 성명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는 성명이었다. 이번 성명은 전광훈과 사랑제일교회 사태가 한국교회의 국소적 일탈이 아닌 전반적인 상황을 표면으로 드러낸 것이라는 세간의 주장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교회의 이름으로 어떻게 이렇듯 반사회적인 주장을 할 수 있는가. 개인의 이름이 아닌, 교회와 예수,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렇듯 상식을 무시한 발언을 서슴없이 할 수 있단 말인가. 대부분의 시민들은 교회가 코로나19와의 전쟁의 최전선에서 모든 사회구성원의 찬사를 받으며 희생하고, 방역에 최우선을 다해줄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한국교회를 향한 사회의 기대치는 극도로 낮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시민들은 교회가 이 정도로 상식과 대비되는 주장을 하는 단체일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었던 것 같다. 이제 교회는 극우성향의 교인들 외에는 가지 않을 곳이 되어버릴 작정인지 걱정스럽다. 모두가 어렵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관계적으로 모두들 피곤하다. 이럴 때 교회가 교인들과 시민들을 위로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입장 표명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저의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자신들이 주관하는 대면예배의 신성함을 주장하며, 다른 모든 온라인 예배는 마치 예배가 아니라는 태도는 도대체 어떠한 신학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적어도 상식의 선만큼은 지킬 줄 아는 교회를 기대하는 것조차 안 되는 것인가. 교회는 사회의 상식에 더 이상 맞서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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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6
  • 장로교 총회, 성총회를 기대하자
    매년 9월이 되면 한국교회의 대표라 할 장로교단들의 정기총회가 개최된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온라인 총회라는 불가피한 현실을 맞이했다. 그러나 매년 교단들의 총회 때마다 일반적인 기관들의 총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교단 총회가 힘과 힘의 대결 양상을 보일 뿐만 아니라 특정세력의 협잡과 모략에 의해 의사결정이나 사업 등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한국교회의 교단 총회는 세상과는 다른 거룩한 총회가 되어야 한다. 특히 경험하지 못한 온라인 총회가 진정한 성총회가 되어야 한다. 성총회란 말은 특별한 용어이다. 교회용어사전을 보면 성총회란 장로교회에서 총회를 다른 회의와 특별히 구별해서 일컫는 말이다. 즉 세상과 구별되고 속된 것과 구별되고 보통 것과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총회는 반드시 예배로 시작하고 예배로 마친다. 이뿐만 아니라 진행 도중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잠시 중지하고 기도를 한다. 이에 따라 회의 중에 폭언이나 인신공격, 폭행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악하고 불경스런 행실이 된다. 그렇듯 총회는 ‘거룩’해야 한다. 코로나의 시대는 고난의 때이다. 그동안 3~5일간의 총회가 온라인으로 몇 시간 안에 끝내야 하는 것은 교회로서 가장 큰 고난이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로 많은 교회와 교단들이 고난을 받고 있다. 성총회는 정부의 방역지침을 이행하면서도 교계 내외적으로 산적한 이슈를 슬기롭게 헤쳐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만큼 각 교단들의 총회는 엄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진실해야 하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흠잡을 데 없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합당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세상과 잘 구별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는 코로나 역병도 하나님께서 끝내실 것을 믿는다. 비록 이 시대 교회들이 외적으로는 부유할지 모르나 영적으로는 곤고하고 세속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영적회복운동에 전력을 다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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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6
  • 본이 되는 감리회가 되길 당부한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감독회장의 선거에서 선거인단의 확정과 관련해 시끄럽다. 물론 선관위 박계화위원장과 김종군직대 사이에 일종의 합의점이 도출되어 예정되로 선거를 치룰 수 있을 전망이지만 불과 지난주까지만 해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다시금 감리회 선거가 싸움으로 얼룩지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이제 감리회는 유수한 역사를 자랑하는 교단답게 스스로 선거인단과 관련해 물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다. 그렇다. 사람 사이에 안 되는 일은 없다. 결코 전진되지 못할 것 같은 수많은 난관들도 결국은 사람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쉽게 매듭이 풀릴 수도 있다. 교회가 전체적으로 어려운 시기인 이때, 선거를 맞아 이제 감리회는 진정한 일꾼을 선별해야만 할 책임이 있다. 이번 선거는 결코 부정선거가 있으면 안 될 것이다. 또한 각종 법정 공방이 있어서도 안 된다. 철저하게 겸손한 자세로 결과에 승복하며 과정에 한치의 부정도 개입하지 못하도록, 먼저 후보자들이 조심하고, 선관위가 조심하고, 감리회 전 교인이 조심해서 선거를 치러야 한다. 감리회에는 시간이 그리 많이 있지 않다. 앞으로 감리회가 바뀌지 못한다면 감리회는, 한국교회는 지리멸렬하게 될 것이다. 이번 감리회 선거와 총회를 계기로 감리회가 옛 명성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진보교단으로서 사회에 진보의 가치의 소중함을 전달하고, 기득권이 아닌 약자를 위해 언제나 헌신하는 교단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교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이때 사회에 본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기후문제의 심각성이 날로 체감되는 지금 감리회가 앞장서서 기후문제의 심각성을 사회에 알려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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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1
  • 교인 수평이동 현상 대비하자
    전문가들은 코로나 이후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 될 것을 예상하고 있다. 요약하면 비대면 접촉 증대, 공동체 의식 약화, 세계화 위기와 지역화 강화, 빅데이터의 활용, 개인주의 증가와 집합주의의 쇠락으로 보고 있다. 특히 확대된 국가권력이 국민을 철저히 통제하고 관리하는 ‘빅 브라더 사회’가 현실화될 것을 우려한다. 이는 코로나의 재확산을 국가권력의 계기로 해석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어쨌든 코로나로 인한 가장 큰 피해는 교회가 되고 있다. 첫째는 교회의 존립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교회는 세상에서 구별된 무리이다. 이들은 예배와 선교, 교육, 섬김의 기능을 있는데 모두 사귐 아래서 이루어진다. 이것을 교제라고 한다. 이를 자유스럽게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제약이다. 둘째로 교회의 활동은 무리지어 이뤄지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진정한 ‘하나’가 될 때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베소서 5장 16절)고 말씀하고 있다. 시간을 아끼라는 말씀은 모든 좋은 기회를 붙잡으라는 의미이다. 때가 악하다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는 마지막 때를 가리킨다. 이런 날들의 매일은 악한 날들이며, 해로운 것들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가능한 기회를 붙잡고 지혜롭게 행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온라인 교회활동이 불가피한 현실이 되었다. 대안은 건강한 교회로서 공동체 운동에 모두가 지혜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성도(고린도전서 1장 2절)와 교인은 구분해야 한다. 진정한 성도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다. 교인들은 복음의 말씀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한 채 교회에 오가는 종교인이다. 그러나 확실한 말씀에 의하여 거듭난 경험을 가진 성도는 환경변화에 상관없이 교회를 지키게 된다. 이제부터라도 교회는 복음을 확실하게 전하고, 교육하며 섬기는 일에 전력을 다함으로써 교회공동체를 튼튼하게 할 때에 교인들의 수평이동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한국교회는 고난 속에서도 ‘영적회복’운동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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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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