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12-0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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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성애 문제관해 대화가 필요하다
    보수 기독교는 성경에 근거하여 동성애를 비판하고 있고, 진보 기독교는 인권의 개념에 기초하여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의 정의를 지키려는 노력과 성경이 쓰인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여 우리시대에 맞게 성경을 읽어내며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노력은 모두 이해할 만하다. 이 두 주장이 양립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보수·진보 기독교는 대화하며 타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동성애를 반대하든 지지하든 그것은 각자의 판단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어떠한 의견이든 존중해야만 한다는 것은 공공의 영역에 속한다. 동성애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우리는 그 의견 자체를 비난할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하며 서로의 의견을 경청해야만 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이미 우리의 민족의 역사에 깊이 체화된 것이 아닌지 걱정이다. 목소리가 크고 완력을 사용하면 실제로 이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이겨서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더구나 기독교의 이름으로 그런 방식을 사용하여 승리를 쟁취한다면 사회에 무슨 덕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행동양식에 대해 우려를 보낸다. 누구든 동성애를 반대할 자유가 있음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과 동성애자를 차별·공격하는 것은 다르다. 보수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에 관한 불확실한 정보들을 유포하고, 인신공격을 일삼으며, 바리새인들과 같이 ‘죄명’을 남발하는 방식 자체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성적지향 차별금지법’의 의미를 정확히 새겨보길 바란다.   동성애를 찬성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보수 기독교인들의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와 언사, 비난 행위들이 도가 지나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동성애 문제에 관해 일방적 주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이미 많이 들었다. 이젠 서로의 입장들을 놓고 대화를 시작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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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4
  • 성경중심의 신앙회복이 절실하다
    1990년 이후 디지털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특히 디지털기술과 인터넷이 출현하면서 사람들 간의 소통의 새로운 장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의 핵심인 스마트폰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해 생기는 다양한 부작용들이 주변에서 나타나고 있다. 거리에서 신호등도 살피지 않고 길을 건너고 운전 중 스마트폰을 하다가 사고가 나기도 한다. 어린 유치원생들부터 고등학생까지 스마트폰에 빠져 수업 시간에 집중을 못 하는 학생들도 많다.   이뿐만 아니라 이런 현상은 교회에도 일어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스마트폰 중독이나 충동이 미치는 영향을 ‘퓨빙’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스마트폰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사람들과 자신의 주변에 신경 쓰지 않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기독교인들이 스마트폰이나 성경앱으로 성경구절을 찾다가 결국 하나님과 그 말씀에서 ‘퓨빙’하게 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왜냐하면 스마트폰의 가장 강력한 힘은 ‘산만함’이라고 한다. 산만함으로써 말씀에 전적으로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특별한 책이다. 성경은 세상의 학문이나 지혜로 알 수 없는 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방법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말씀하시다가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인 아들로 우리에게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먼저 성경을 깨달은 이들이 ‘전도’라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전파하는 자와 사도’(디모데전서 2장 7절)로서 이 성경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자세히 보아야 하는 책이기에 편리함으로 대체한다면 말씀의 깊이를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스마트폰으로 성경책을 대체하는 문화는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매일 자기 옆에 두고 읽도록 교회에서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올바른 교육이며, 성경으로 돌아가 말씀으로 회복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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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4
  • 대림절의 의미를 되새기자
    대림절은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이다. 예전에 우리는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과 함께 대림절을 맞이했고, 교회에서는 대림절의 시작과 함께 성탄절 준비로 바빴다. 함께 모여 찬양을 연습하고, 성극을 준비하며, 성탄 전야의 새벽송을 기대했다. 밤을 세워 함께 기도하고 교재하며 예수의 나심을 기뻐했다. 눈이라도 오면 그 날은 더 할 수 없을 만큼 낭만이 가득한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이 빠르게 변해 더는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도 없고, 교회들도 성탄절 행사를 준비하지 않는다. 성탄행사는 간소화되어 교인들은 각자 집에서 성탄 전야를 맞이한다. 새벽송도 없고, 학생들과 청년들이 모여 밤을 세던 교회 한 켠은 텅 빈 채 성탄의 아침을 맞이한다. 선악을 넘어 조용하고 쓸쓸해진 대림절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렇게 변해버린 대림절기를 맞이하며 그저 아득한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예전의 생기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도 교회학교를 부흥시켜야만 한다. 교회가 다음세대 사역에 온 힘을 다할 때 대림절은 다시금 생경해질 것이다. 예수의 나심을 기다란다는 그 의미에 걸맞게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그 기쁨을 맛보아야만 한다.   많은 교회들이 성탄행사를 축소하여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인원이 부족하고 여력이 못 미칠지라도 최고의 정성을 다해 대림절을 보내야 할 것이다. 어린이, 청소년, 청·장년, 노년층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성탄절을 보내기 위해 교회는 대림절기를 최고로 섬겨야만 할 것이다.   늘 하던 것이니 대충 해버리는 식의 성탄 준비는 안 된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그 날의 의미를 매년 되새겨 과거에 그랬듯 최선을 다해 성탄행사를 준비하자. 대림절기에는 특히 더 다음세대를 섬기는 일에 집중하자. 그들이 행복한 성탄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 기성세대가 자리를 마련해주자. 그렇게 행복한 대림절기를 보낼 수 있도록 다함께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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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28
  • 기독교 시민단체, 복음전도에 투명해야 한다
    ‘21세기는 NGO의 세기’라고 한다. 시민사회단체는 우리 사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서 그 역할은 점점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에서도 시민단체를 운영할 때 분명한 목적을 밝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하여 땅끝까지 그리스도를 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세상적인 방법으로 우후죽순처럼 시민단체들이 생겨남으로써 기부금의 유용이나 고액의 연봉과 관용차를 매입하는 데에 활용하는 등 재정문제에 있어 진정성이 없다는 지적이 너무도 아쉬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사회 시민단체들은 많은 문제점을 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 시민단체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소수의 명망가와 상근운동자를 중심으로 엘리트 위주의 운동에 치중됐다. 둘째, 교회의 필요를 위한 것이 아니라 특별하고 한정된 이슈를 선점하는 것이다. 셋째, 재야운동권처럼 국가권력의 감시와 비판에 너무 치중하고 있다.    이에 기독교 시민단체가 복음전도에 투명하기 위해서 몇 가지 개선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시민단체의 활동가들이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물론 활동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습득해야 할 것이며, 관련 전문가들의 적극적인 조언과 참여를 유도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둘째, 세상의 이념을 교회 내에 가지고 들어와서는 안 된다. 셋째, 개인 회원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여 회원들의 회비와 지원금으로 재원을 충당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기독교 시민단체는 복음 전도를 위한 투명성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이러한 점은 시민단체 책임자들이 명심해야 한다. 음행보다 사람을 더 손상시키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음행이나 탐욕은 우상이기 때문이다. 우상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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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28
  • 토착화신학 전통 재건을 기대한다
    감신대학교가 지난 15일 총장선거를 통해 이후정교수를 동 대학 총장으로 선출했다. 그간 동 대학은 총장선거 관련 문제로 많은 내홍을 겪어왔던 만큼 이번에 아무 탈 없이 총장을 선출했다는 것 자체로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동 대학은 총장후보자추천위원회를 구성하여 민주적 절차에 의한 총장선거를 단행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 했다.   그럼에도 학교의 발전을 위해 동 대학과 새 총장이 가야할 길은 여전히 멀다. 과거 토착화 신학이라는 장르를 개척해 신학에 새로운 풍토를 조성했던 동 대학의 학풍을 재건하는 것과 교원확충이나 재정의 안정화 등 오랫동안 동 대학의 문제로 지적되었던 사항들을 개선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에 더해 이번 선거를 통해 드러난 교수, 이사진, 동문들의 학생에 대한 존중 부족은 반드시 개선해야만 할 것이다. 누가 뭐라해도 학교의 주인은 학생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또한 진보교단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날로 보수화되는 기감 본부를 향한 대학의 따끔한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어야만 하며, 강단 너머에 사유가 부재한 교회들로까지 신학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야만 한다. 132년 전통의 유서 깊은 동 대학은 그간 하지 못했던 사회와 교단에 대한 의무를 이제라도 충실히 이행해야만 할 것이다.   이후정총장은 사익에 눈을 돌리기보다는 항시 공익을 우선하며 예수님의 시선을 갖고자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교회가 위기이고, 신학 교육이 위기이다. 이제 더 이상 동 대학이 낭비할 수 있는 시간은 없다. 언제나 학생들과 동문들, 교직원, 동료 교수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그들을 섬기고, 이사진의 하수인은 절대로 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최근 오성주직무대행체제로 몰라보게 안정화된 동 대학에 기대를 거는 시선이 많이 있다. 항시 감시의 눈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겸허히 학교를 섬기고, 또한 항시 기대하는 시선이 가득하다는 사실도 명심하여 언제나 신선한 희망을 유지하며 총장의 역할을 갈 감당해내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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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9
  • 소외 이웃 돌봄사역에 헌신하자
    매년 연말연시가 되면 소외이웃을 돌보자는 캠페인이 정부는 물론 많은 사회단체들에서 나서고 있다. 특히 교회를 중심으로 소외이웃을 돌보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을 본받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웃사랑은 쉬워 보이지만, 막상 어렵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행할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편견과 섭입견이 강한 나머지 이웃에 관심과 사랑이 부족한 경우가 있고, 반대로 이웃사랑이 잘못 오해되는 사례도 있다. 이기심은 타인을 생각하거나 돌볼 틈을 주지 않고, 어리석음은 하나님과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이웃을 대하게 돼 진실한 사랑을 전할 수 없게 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율법사가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에 관하여 물었을 때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장 37~40절)고 말씀하셨다. 이 두 계명은 다 사랑의 문제,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참 이웃은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인가라고 물으셨을 때에, 율법사는 스스로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나 자의 이웃이라고 답을 했다(누가복음 10장 30~37절).    그러므로 우리의 참 이웃인 예수님의 사역에 따라 소외된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지나치게 세속화됨으로써 평안의 상징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저주 받은 도시인 ‘여리고’로 변질됨으로써 소외된 이웃들이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다. 특히 목회자는 제사장이 되고 있으며, 장로·집사는 레위인이 됨으로써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는 강도만난 자들에게 참 이웃의 사랑으로 보살피는 ‘선한 사마리아’인 예수님의 돌봄 사역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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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9
  • 순국선열의 믿음을 기억하자
    11월 17일, 올해로 22주년을 맞는 ‘순국선열의 날’은 1905년 을사늑약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가 1939년 제안·의결되어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이후 1970년 이 기념일은 간소화되기도 했지만, 1997년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다시금 정부주관의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제정된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을사늑약의 그 수치를 기억해야만 한다. 을사5적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의 사인만으로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잃고, 결국 통감부 설치를 통해 주권마저 상실했던 그 치욕 속에서 우리가 겪었던 그 아픔을 상기해야만 한다.   한 번 잃은 주권을 되찾기 위해 우리의 수많은 선조들은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했고, 때론 온갖 고문을 떨리는 마음으로 견뎌야만 했다. 기록된 역사에 의하면 고문을 못 이겨 미쳐버린 이들도 다수고, 어떤 경우는 미친 척을 하기 위해 자신의 오물을 먹어야만 했다. 또 수많은 이 땅의 여성들이 견뎌야만 했던 그 수치와 치욕은 어떠한가. 한국의 기독교는 그러한 아픔 속에서 태어났다. 우리 한국기독교는 서방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신앙을 받아드리지 않았다. 우리 선조는, 우리의 민중들은 삼삼오오 모여 기독교 정신을 스스로 익혔고, 그 결과 기독교를 통해 이 땅의 수많은 민초들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기독교를 수용했다.   초기 한국기독교는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죽음과 고문 앞에서도 당당했다. 일제와 친일파의 총칼 앞에서도, 자신의 살을 찢는 고문 속에서도, 조국의 이름과 하나님의 뜻을 당당히 외쳤다. 기독교 정신은 우리 선조들을 종교적 양심 앞에 세웠고, 육의 평안함보다 영의 승리를 갈망할 수 있는 힘을 불어 넣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갈망하는 애국선열들의 그 고백에 기독교 정신의 정수가 있다. 자신의 삶을 버려서라도 예수의 삶이 이 땅에 드러나길 소망했던 눈물겹도록 자랑스런 믿음의 선조들의 삶을 통해 우리 기독교인들이 배움을 얻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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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4
  • 주님께서 주신 추수의 기쁨을 찾자
    추수감사절은 성경 속에는 없는 절기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지키던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과 비슷하다면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인정하고 서로 함께 나누자는 절기로 지켜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 속에 나타나는 모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명절을 맞을 때마다 지혜롭게 생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과 행위를 경계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린도전서 5장 11절)고 전했다.   원래 교회의 절기로서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청교도들이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에 정착하기 위하여 가져온 씨앗을 심었으나, 기후와 환경에 맞지 않아 첫해에 질병과 기아로 102명 중 47명이나 사망했다. 이듬해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옥수수와 콩, 보리를 재배할 수 있었고, 이렇게 거둔 곡식들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감사예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다가 미국이 독립 이후 위싱턴 대통령이 11월 26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한데 이어, 링컨 대통령은 11월 마지막 목요일로 바꾸면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성경에서는 추수와 관련하여 특별한 내용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4장 35~36절). 하나님의 독생자인 그리스도께서 한 알의 밀과 같이 땅에 떨어져 죽으심으로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아 영생에 이르는 추수의 열매가 되게 하셨다. 따라서 교회는 이 일에 전념해야 한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진정한 의미요, 이웃사랑과 나눔의 가장 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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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4
  • 교회는 진리 편에 서야한다
    한국교회가 정치이슈에 휘말려 국론분열의 중심에 서고 있다. 물론 교회들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교회가 정치적 갈등의 중심부에 위치할 때도 있을 수 있다. 허나 교회가 정치적 행동을 하고, 갈등의 중심에 설 때는 정당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하다. 힘 있는 자들의 폭력에 항거하고 약한 자를 지켜내기 위한 정치적 행동들은 애매하지 않다.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분명히 교회의 정치적 행동을 응원하고 권력에 맞서는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줄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쏟아내고 있는 정치적 행동들이 이러한 종류의 것인가. 예수가 유대·로마 권력층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통 받는 약자들을 위해 강자와 싸우고 있는 것인가.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이라면 과거 군부독재 시절 교회가 어떻게 처신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극우 보수당과 연합하여 거리에서, 각종 온라인상에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과거 독재의 총칼 앞에서 어떻게 처신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진리는 아무리 호도하려 해도 호도될 수 없다. 진리란 너무도 청명하고 단순하여 그 어떠한 어두움과 공작으로도 결국 환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아무리 소수의 교회지도자들이 진리를 호도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현명한 기독교인들은 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필요하다면 정치적 갈등의 한복판에 설 수도 있다. 공익을 위하고 약자를 지킨다는 명백한 진리를 교회가 붙잡고 있다면 교회의 정치적 행동들의 타당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품고 있는 교회들의 정치적 행동은 약자들을 모으고 이 땅의 소외계층을 연대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언제나 진리의 편에 서고 있길 바란다. 정치 자체가 목적이 아닌 복음의 실현을 목적으로 행동하는 교회의 모습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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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07
  • 교회가 장애인사역에 앞장서자
    UN 장애인권리선언에 의하면 장애인을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신체적·후천적 능력이 불완전함으로 인하여 일상의 개인적 또는 사회적 생활에서 필요한 것을 자기 자신으로서는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확보할 수 없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장애인 서비스 지원 종합조사를 도입하여 장애인이 독립생활을 위해 필요한 서비스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전달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나 지자체의 대책만으로는 성과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를 보완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교회를 비롯한 각종 사회단체의 지원이다. 안타깝게도 교회의 장애인지원은 사실상 미흡한 실정이다. 장애인 인권이 떠오르면서 장애인을 위한 복지시설이라는 이름 아래 시민사회에서 격리하는 일이 문제로 지적되지만, 한국교회가 펼친 장애인 사역은 시설 운영 중심으로 해당 문제로 논란이 일기도 했다. 따라서 이제는 교회가 나서서 사랑의 실천을 위한 돌봄 사역에 주력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곳이다. 모든 사람은 장애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속성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을 담는 살아있는 그릇이며 용기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기 거절함으로써 죽을 수밖에 없는 장애인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장애인을 치료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모든 인간은 장애인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긍휼과 은혜에 따라 장애인을 치료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장애인을 고치고 회복하고 살리고 구원하는 의사로서 사역하신 것은 그들을 하늘의 새로운 시민으로서 사랑의 짝이 되게 하시려는 원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교회는 특별한 사명감을 품고 모든 장애인 돌봄 사역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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