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9-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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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립학교법 논란이 우려된다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지난 8월 31일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대한 논란과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예정된 수순이다. 핵심은 인사권 문제이다. 개정한 내용에 따르면 교원을 임용할 때 필기시험을 거쳐야 하는데, 이 시험을 시·도교육감에게 위탁하도록 한다 것이다. 사실상 정부가 인사권을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2006년 사립학교법 문제를 두고 한국교회는 선교 이래 가장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당시는 학교 설립정신과는 무관한 인사가 학교 이사로 선임될 수 있도록 이사회를 개방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개정안대로라면 신학대학교 이사에도 타 종교인이 들어 올 수도 있다는 문제가 지적됐다. 실제로 경기도 안양의 한 기독교대학에서는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기독교가 한국사회에 교육으로 기여한 부분은 일일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혁혁하다. 봉건적 조선에 기독교는 근대적 교육의 정신과 시설을 심었다. 그리고 이 뿌리에서 자주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끝내 해방과 독립을 쟁취했다. 한국전쟁이라는 비극과 어려움 속에 대한민국이 지금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교육의 힘이었다.         정부는 한국교회가 이룬 이러한 교육적 성과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결정했으니 너희는 따르라’는 식의 강압적인 자세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기독교계가 어떤 이유에서 반발하는지 열린 마음으로 경청해야 한다. 더욱이 현 정부는 소통을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진지한 대화와 협상을 전개해야 한다.      또한 한국교회는 왜 정부가 사립학교법을 개정하려는지 그 원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왜 기도교계통의 사립학교에서 교원임용을 두고 소위 ‘사학비리’가 횡횡하고, 그래서 결국 당사자들이 감옥에 가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지 반성해야 한다.      이렇게 정부의 진지한 소통과 교계의 통렬한 자기반성이 서로 함께 할 때 이번 사립학교법 개정을 둘러싼 갈등과 논란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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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09-13
  • 추석과 추수감사절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이다. 해마다 음력 8월 15일에 지키고 있으며, 중추절 또는 한가위라고도 한다. 신라시대에는 가배라고 하였다. 그 말이 변하여 ‘가위’가 되었다. 추석이라는 말은 『예기』에 「춘조월 추석월」이라고 한데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추석에는 햅쌀과 술과 떡을 빚고, 갖가지 음식과 오색과일을 갖추어 조상에게 차례를 지냈다. 또한 산소에 찾아가 성묘를 하고 효의 사상도 나타냈다.     이 추석을 맞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교회가 해마다 늘고 있다. 한국교회가 11월 셋째주일에 지켜왔던 추수감사절은 추수가 지난 후에 지켜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정에 시기적으로 맞지 않고, 우리의 실정에 맞는 시기는 추석인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추수감사절은 미국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전했다. 미국에 이민을 왔던 청교도들이 거친 땅을 개간하여 감자와 밀, 옥수수를 심고 수확해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 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 후에 미국 국회에서는 11월 제4목요일을 감사절로 정하고, 전 국민이 이날을 추수감사절로 지켰다. 미국에서는 이 추수감사절과 12월의 크리스마스, 봄의 부활절과 함께 국민의 3대 축제로 지켜 내려오고 있다.     한국교회는 미국의 선교사가 전한 추수감사절을 11월 셋째 주일로 지켜 왔지만, 일부 교회들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는 문제를 제기해 왔었다. 이에 따라 추석에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교회가 늘고 있지만, 교회에 따라 9월이나 10월의 주일을 선택해 지키는 교회도 늘고 있다. 11월 셋째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전통이 깨진 것이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절 시기를 연합적으로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교회의 실정에 따라 지키는 것보다, 어느 주일을 정해 지키는 것도 하나 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선교 이전의 전통문화를 배격하지 않고, 수용하여 접목하는 것도 바람직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이단시 말고,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해 기독교문화로 창조하여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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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09-13
  • 농어촌교회에 대한 상생정책이 시급하다
    농어촌교회가 생존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급격한 인구감소와 노령화로 새신자보다 천국에 가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 농어촌교회 목회자는 ‘장의사’라는 자조 섞인 말까지 나오고 있다.   농어촌교회는 한국교회의 모판이자 어머니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농어촌교회에서 자란 교인들이 산업화 속에서 대거 도시로 이주하면서 대형교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농어촌교회는 한국교회의 젖줄이자 어머니였다. 농어촌교회가 없었으면 지금 한국교회는 없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농어촌교회를 지원하고 도우려는 한국교회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래목회포럼은 수년 동안 명절에 고향방문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명절에는 고향 교회 가서 예배하고 헌금하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모범이 되는 일이다.   각 교단별로 농어촌선교를 강화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상비부 가운데 그냥 형식적으로 농어촌부가 있어서는 안 된다. 실제적으로 농어촌교회와 목회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책이 나와야 한다.   무엇보다 상생의 신학이 필요하고 절실하다. 농어촌교회를 단지 시혜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동반자로 바로보고 나가야 한다. 이러한 신학적 대전환이 없다면 모든 대책이라는 것이 형식적인 것에 불과할 것이다.   농어촌교회를 돕는 것은 공동체성과 개교회주의를 극복하는 첩경이기도 하다. 받았으니 돌려주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농어촌이 붕괴되고 그 교회들이 문을 닫는다면 결국 그 부정적 효과는 도시에 있는 교회들에게 밀어닥칠 것이 분명하다. 위기가 닥쳤으니 나만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공동체정신을 훼손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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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3
  • 교단총회 임원 입후보자 자정 기대
    오는 13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백석·대신측 교단 정기총회를 필두로 전국교단이 총회를 개회한다.   이번 총회에 거는 기대가 크다. 그 이유는 코로나19 팬데믹기를 기점으로 세상 전체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시점에 교단 갱신을 바라는 총대들의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역사가 바뀌어도 양지를 찾아 오랜 세월 기득권을 누리며 정착한 이들과 혁신을 부르짖는 세력이 한국기독교 내에서 물밑 접전을 벌이고 있다.   마치 고대철학에서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가 논쟁이 벌어진 것과 같다. 성경에서는 밀레도라고 기록된 밀레토스학파 이후 운동성과 존재에 대한 논쟁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존재와 생성’에 관한 논쟁이라고 볼 수 있다. 생성 혹은 운동을 강조하는 흐름 쪽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처음 주장을 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람들을 싫어해서 산 속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온갖 식물을 먹으며 살았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 보다는 조용하게 사색하며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출세한 헤시오도스, 호메로스, 피타고라스 등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먼저 만물유전설(萬物流轉說)을 주장했다고 플라톤은 분석했다. “판타 레이(panta rhei, 만물은 흐른다)”라는 설을 폈다.   이에 대한 예화로 강물을 들었는데, 흐르는 강물에 발을 담갔다가 다시 담근다면,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왜냐하면 상류에서 흘러온 강물은 발을 적시고 계속 하류를 향해 하염없는 흘러가기 때문이다. 상류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은 계속 하류로 흘러내려 간다. 이제 한국교회가 역사 물줄기 따라서 바뀌어야 한다. 과거 총회 임원 선거를 치르면서 돈 살포 의혹으로 논란을 빚었던 인물이 또 돈 살포 금권선거, 저서 표절 시비, 교회 부흥 방법의 이단성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이 정도라면, 세상 국회의원도 사퇴카드를 내밀어야 한다. 한국교회 구성원 모두가 이번 총회가 자정되고, 갱신되는 총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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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3
  •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통합에 임하라
    그 동안 정상적인 업무를 보고 있지 못하던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새롭게 임원진을 구성하고 한국교회총연합과 한국교회연합에 조건 없는 통합을 제안했다. 이에 화답하듯 한교총 소강석대표회장은 연합기관의 통합을 강조하고 나섰다. 사분오열된 한국교회의 연합기관이 다시 하나로 통합되는 것은 마땅한 일이요 축복된 일이다. 분열보다는 통합, 갈등보다는 화합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기독교의 근본진리이다. 연합기관의 통합은 분열과 갈등의 죄를 고백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가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보여주기 식 통합, 사익을 위한 통합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만일 이런 마음으로 통합을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분열, 또 다른 갈등으로 가고 말 것이다. 이러한 형식적 통합이 아닌 진정한 통합을 이루려면 가장 먼저 사익과 욕심을 버려야 한다. 한기총이 사분오열된 근본원인이 어디 있는지 깊이 반성해야 한다. 대표회장 하기 위해 금권선거를 자행했고, 이 과정에서 해묵은 이단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하나였던 단체는 쪼개져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주도권, 자리, 돈에 대한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진정한 통합에 임해야 한다.   기관의 통합을 위해서는 많은 난제들이 있다. 직원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조직은 어떻게 할 것인지 또 다른 교단에서 이단성 문제를 제기하는 단체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은 모든 기득권과 욕심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백지상태에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협상에 임해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통합이 또 다른 치명적 분열을 야기해서는 결단코 안 된다. 애써 통합해놓고 다시 분열돼는 악순환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형 교단 중심의 통합이 아닌 중소형 교단도 함께 지도부를 구성할 수 있는 배려하는 통합노력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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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5
  • 금권선거를 퇴출하자
    9월에 전국 교단 정기총회가 잇달아 개회된다. 한국교회 교계와 교단의 선거 체계가 마치 세상권력 집단의 선거와 비슷하다는 일각의 지적이 일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기독교에 선거라는 것이 왜 생겼을까? 에른스트 트뢸취가 좬기독교사회윤리좭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줬다.   에른스트 트뢸취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핍박을 당해 순교자가 속출해 숨어 다녔기에 소공동체를 이뤘고, 외형적 종교 형식이나 법보다는 성례전적 본질에 충실했다. 교회의 대표가 되면 순교를 당할 위기에 처하기에 좋아할 리가 없었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 당하기 전에 번민했고, 주기철 목사가 부인이 면회 오기 전에 타협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제비뽑기로 교회대표를 뽑았고, 뽑힌 사람이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두려움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가 4세기에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종교로 공인한 이후 중세시대로 접어 들면서 기독교 대표가 돈과 권력을 쥐고 있던 황제 주위에 다가가게 됐다.    그래서 얻어지는 이득이 많아져 대형화되기 시작했고, 지방에서 중앙으로 진출하기 위해 종파끼리 경쟁하기 시작했다.  경쟁이 너무 심해져 공정하게 중앙 진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선거제도가 생겼다. 그리고 중앙에 진출하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교회법을 강화했다. 초대교회와 중세교회는 확연히 달랐다. 중세교회는 지나친 권력으로 성경의 권위 위에 군림했다. 그래서 르네상스와 함께 종교적 본질로 돌아가려는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중세로마교회와는 다른 길을 가게 됐다.   추후 한국교회는 중세로마가톨릭교회의 수직적 상향식 선거제도에서 탈피해 초대교회 유형인 수평적 순환식 선출제도로 변화돼야 한다. 이제 전국교단 선거제도도 초대교회 회복운동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금권선거로 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돈으로 표를 사려는 매표행위로 비난을 받아왔다. 이제는 교단을 바르게 이끌고 갈수있는 정책으로 선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바른 교회상과 교단상을 정립해 갈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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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5
  •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수복, 교계 비상
    지난 15일,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반군이 수도 카불을 장악했다. 이곳은 과거 샘물교회 성도들이 살해됐던 곳이다. 이슬람국가들은 오랜 세월, 유대교인과 전쟁하면서 애꿎게 유대교인과 연결된 기독교인들을 증오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도 예외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정권을 빼앗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미국정부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다가 수복했다는 점이다. 이슬람교 원리주의에 젖어 있던 탈레반 반군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정권을 전복시킨 미국을 돕기 위해 파병을 한 한국을 적대국이자 점령국으로 간주했다. 탈레반의 눈으로 볼 때는 자신들을 침략한 나라의 국교인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러 온 선교단체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했다. 이들은 이슬람과 다른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배타적 태도를 가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이처럼 아프가니스탄에서 기독교인들이 배척받고 있는 이유는 탈레반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진행 중이었던 불안한 아프간 현지에서 미국과 보조를 맞춰왔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은 나치에 의해 심하게 학대당하던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출코자 수단을 강구했다. 이때부터 시오니즘은 더욱 격화됐고, 미국과의 연대가 더욱 공고해지면서 아랍권과는 마치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처럼 형성되어 갔다. 1970~80년대의 레바논·시리아 등 중동전을 비롯하여 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 대부분의 중동지역 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전쟁이었다.   따라서 탈레반 정권의 잔혹한 인권 유린에 대한 저항 세력과 미국과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지하자원 매장 이권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상황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텔라반의 장악으로 인권 유린과 기독교 탄압등이 자행되고 있다. 평화가 도래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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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6
  • ‘미래세대’ 세우는 ‘장로교총회’ 기대한다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각 장로교단들이 9월이면 총회를 시작한다. 이번 총회는 무엇보다 코로나 방역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대형교단은 천명이 넘는 총대들이 모인다. 확진자가 매일 2천명이 나오는 상황 가운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한 곳에 모인다면 이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각 교단별로 코로나 방역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문제는 만에 하나이다.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한다 해도 확진자가 단 1명이라도 나온다면 이는 장로교만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에 대한 비난과 비방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분산개회, 온라인 총회 등 새로운 인프라를 만들어야 한다.    거의 예외 없이 해마다 반복되는 장로교회 총회의 현실은 임원선거를 위해서 모인 듯 한 분위기다. 선거가 끝나면 현안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총대들은 썰물 빠지듯 빠져나간다. 전국에서 모인 총대들은 단지 ‘들러리’와 ‘거수기’가 된 셈이다.    물론 임원을 선출하는 것도 당연히 총회의 일 가운데 중요한 일인 것은 분명하만 총회를 위한 총회장인가, 아니면 총회장을 위한 총회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장로교단은 이제 외부의 요구와 요청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여성과 청년에게 총대권을 더 많이 부여하라는 요구, 과감한 개혁에 나서라는 요구,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정책을 펴라는 요구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여전히 이러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저 관습과 타성에만 젖어 있다면 교회의 위기는 더욱 가중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또 미래세대를 위한 실제적인 방향과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미래세대가 없는 교회, 미래세대가 없는 교단은 암울한 한국교회의 모습이 될 것이다. 선거에만 신경쓸 것이 아니라 미래세대를 위한 확고한 대책과 정책을 준비하는 총회의 모습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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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6
  • 코로나 시대, 영성회복에 나서자
    코로나 시대가 장기화되면서 우리 사회는 ‘언택트(Untact, 비대면)’ 시대가 일상화되고 있다. 교회는 비대면 온라인 예배의 현실화에 직면하였고, 이를 위해 소수의 사역자만 현장예배에 참여하는 등 교회 안에서의 활동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이다.    특히 코로나의 세기적 역병은 분명 시대적인 표적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테러)과 하늘에서 큰 징조가 있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눅21:10-11). 코로나는 큰 온역이다. 이 전의 온역인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1/3이 사망하고, 중세 봉건제도가 붕괴되는 결과를 낳았다. 스페인 독감으로 5천만 명이 사망하기도 했고, 홍콩독감, 돼지독감, 그리고 이번엔 코로나이다.    또한 이 시대는 생각이 없는 사회, 일명 ‘오락의 시대’라 한다. TV, 컴퓨터, 스마트폰, 게임, 노래방, 영화, 스포츠, 연예, 성문화, 음주 등 디지털 전자장비에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시대가 됨으로써 사람들 간에는 충동적인 불법이 성행하면서 이웃을 생각하는 사랑이 식어 간다.    따라서 영성회복을 위하여 이웃의 아픔과 영혼을 함께 사랑하자. 코로나블루로 어려운 가운데 있는 이웃들이 소외감을 갖지 않도록 교회가 나서야 한다. 이들에게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육신적인 어려움뿐 아니라 영적인 아픔을 더 크게 보듬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영원한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오셨고, 그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머지않아 다시 오신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돌아보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큰 사랑이요 선물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상황에서 대면 접촉보다는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만나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 자체가 더욱 약화되고 있다. 이런 때에 교회는 소외된 이웃에 대한 손길 곧 영성을 회복하기 위한 사랑의 실천이 더욱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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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08
  • 코로나 위기, 나눔에 더욱 힘써야 한다
    잡힐 것 같던 코로나 팬데믹이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 1차, 2차, 3차, 4차에 걸쳐 대유행이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어쩌면 5차, 6차의 대유행이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계속되는 비대면 온라인 예배로 한국교회의 어려움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일부 소수 교회는 ‘정치방역’과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대면예배를 강행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정부 당국은 급기야 시설폐쇄명령까지 내렸고, 여기에 해당 교회는 반발하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교회의 이러한 대응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대다수의 교회는 무엇보다 방역에 힘을 쏟고 있다. 취약계층을 위해 마스크를 기부하거나 방역용품을 제공하고 있다. 또 교인들이 자체적으로 방역팀을 구성해 교회 주변을 소독하며 코로나 극복에 앞장서고 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코로나를 극복하는 길은 대면예배를 강행하는 것이 아니라 방역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교회가 방역팀을 구성해 교회 주변부터 방역에 힘을 쏟아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코로나도 극복할 수 있고 잃어버린 사회적 신뢰도 다시 획득할 수 있다.   또한 나눔에 힘써야 한다. 이미 많은 교회들이 코로나 위기 가운데서도 사회적 나눔에 적극 나서고 있다. 어떤 교회는 이전 보다 더 많이 생활용품과 방역용품을 나누고 있다. 소리 소문도 없이 나눔에 힘을 쏟는 교회들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정치방역을 주장하며 당국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코로나 극복과 교회 부흥에 어떤 도움을 줄 것인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그렇게 할 힘과 에너지를 방역과 나눔에 쏟아 부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사실을 한국교회는 잊지 말아야 한다. 법원에서 소송을 벌이는 것보다는 방역과 나눔에 힘을 다할 때 사람들은 한국교회를 빛과 소금으로 볼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한국사회가 위기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앞장서서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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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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