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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의 가치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최근 박원순시장의 죽음으로 사회는 충격에 빠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안타까워했다. 우리에게 생명의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인류의 기술이 무서울 정도로 발전하여 수많은 상상력을 현실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생명 그 자체를 창조할 수 없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오직 그 분만이 주관하실 수 있는 영역이라 우리 기독교인들은 믿고 고백한다.   한 사람의 죽음. 하지만 그 죽음을 바라보는 일부 사람들의 매몰찬 시선에 섬뜩하다.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정치색을 드러내며 고인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에서 차마 하지 못할 행동을 하기도 했고, 또 일부 정치인들은 한 생명의 죽음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기 바쁘다. 기독교인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이미 정치화된 일부 기독교인들도 박원순 두 번 죽이기에 동참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씁쓸하다.   천공해활(天空海闊)이라 했다. 하늘과 바다가 한없이 넓음과 같이 사람의 도량이 크고 넓음을 뜻한다. 우리 기독교인들을 보며 천공해활의 품성을 볼 수는 없는 것인가. 할반지통(割半之痛)이라 했다. 우리 이웃의 죽음에 몸의 절반이라도 베어 내는 아픔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이웃의 불행으로 할반지통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정녕 이념뿐인 것인가.   오히려 우리 기독교인들은 때로 감탄고토(甘呑苦吐)의 모습을 주로 보인 것은 아닐까 걱정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들처럼, 우리 기독교의 가치도 제가 이로울 때에는 이용하고 필요 없을 때에는 괄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에게 좋은 쪽으로만 성경을 이해하고, 자기 좋은 쪽으로만 ‘이웃사랑’을 외치는 것. 많은 사람들이 박시장의 죽음에 애도했다. 한 사람의 죽음에 함께 슬퍼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또 박시장의 죽음에 슬퍼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마지막으로 박시장의 생명 그 자체를 위해서라도 잠시 침묵을 지키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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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31
  • 사회적 신뢰회복을 선도하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코로나가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음에 따라 지난 10일부터 교회에 대해 정규예배 이외의 각종 소모임·행사와 단체식사를 금지하고, 전자출입명부 시스템을 도입도록 하는 내용의 강화된 방역수칙을 시행하고 있다. 박능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1차장은 7월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정례 브리핑에서 “최근 종교시설에서의 집단감염 사례가 크게 줄어들었다”며 “지금처럼 위험도가 낮은 상태가 유지된다면 교회에 대한 행정조치를 조만간 해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한발 물러서고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6개월 이상을 정부정책에 적극 호응하면서 코로나 온역의 극복에 기여해 왔다. 그러나 교회가 마치 ‘제2의 신천지’나 되는 것처럼 교회를 정책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는 비판이 점증하고 있다. 왜냐하면 정부 기관과 식당을 비롯하여 유흥시설, 운동시설, 학원, 커피숍, PC방 등은 영업을 허락하고 있다. 심지어 정부기관이나 공공장소의 사회적 거리두기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가운데 교회에 대하여 지나치게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정부가 교회에 대한 행정조치를 조만간 해제한다고 한다. 그러나 새 방역수칙에 따르면 예배가 아닌 교회 명의의 소모임과 행사는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 존립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가 사회로부터 빛과 소금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 그동안 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세상의 조직과 같이 세상적인 기준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다는 비난을 극복해야 한다. 교회가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빛은 생명을 낳기 때문이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보존케 한다. 사람을 변화시켜서 불순물을 제거한다. 바로 자기의 희생으로 가능하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선도적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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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31
  • 정부의 행정명령은 부당하다
     7월 8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와 정세균 국무총리는 “교회 내 소모임 금지 및 단체 식사 금지를 의무화하고, 종사자(목회자)와 이용자(성도들)에게 위 사항을 위반하면 과태료 300만원 이하를 부과 하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이것은 그동안 방역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전대한 한국교회를 무시하는 처사이자 종교의 자유를 위험에 빠트리는 부당한 간섭이다.     한국교회는 지난 6개월 동안 정부가 요구하는 방역 수칙을 철저하게 준수했다. 정부 당국에서 요구하는 7대 준칙을 성실히 실천했고 심지어 여름 행사, 세미나, 수련회, 성경학교 등의 매년 해오던 행사들은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조치를 취했다.      교회소모임에 대한 중지 조치는 역차별이다. 코로나감염은 교회뿐 아니라 타 종교 모임, 게이클럽, 노래방, 식당, 카페 등의 다중 이용 시설에서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특히 교회감염의 원인이 방문판매에서 시작됐다고 알려졌다. 그렇다면 음식점, 예식장, 운동시설, 룸살롱, 콜센터, 동호회, 밀집 대중교통시설 등등 모두 금지 시켜야 될 것이다.     교회관련 확진자는 지금까지 총 550명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신천지와 이단 이중등록자도 있어 기독교에서 발생하는 전파는 매우 극소수임이 확인 되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통성기도, 큰 소리로 찬양 부르는 행위도 금지 시키는 것을 발표해고, 이를 위반하면 책임자와 이용자에게 벌금(300만원 이하)을 부과하고 집합금지 조치를 시행한다한다. 이는 명백한 기독교에 대한 차별행위이자 종교탄압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코로나19 감염 방지를 위해 정부가 요구하는 방역조치를 적극적으로 취할 것이며, 국민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해야한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역사회를 책임지며, 공동의 책임감으로 함께 지역사회의 영적인 평안을 위하여 수고해야한다. 지금과 같이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무엇보다 사회적인 안정을 위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안고 변함없이 방역조치를 철저하게 지속할 의무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평성을 잃고 부당한 강제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 지속된다면, 한국교회를 무시하고 가볍게 여기는 처사인 것으로 간주하고 적극적으로 단호한 조치로 행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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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4
  • 미자립교회 재정 추가 지원이 시급하다
    한국교회의 미자립교회들이 코로나 역병의 장기화로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회의 생명인 성도 간의 교통이 제한을 받음으로써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이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랑의 핵심인 복음전도 길이 더욱 좁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가 장기화 되면서 교단이나 일부 대형교회에서 미자립교회들에게 지원금을 전달했지만 일시적인 지원에 국한됨으로써 이 교회들이 코로나 사태를 이겨내는 데는 한계를 모이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이 계속된다면 존립의 문제까지 우려되는 상황에서 미자립교회들이 재정적인 독립을 할 수 있도록 중장기적인 추가지원책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미자립교회는 뜻 그대로 스스로 자립하지 못하는 교회이다. 미자립교회에 대해서는 교단마다 기준이 다르고 기준마저 그때그때 다르게 적용되기 때문에 정확하게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다만, 교인수나 재정 자립도, 목회자생활비 수준, 교회 건물 유무, 개척기간 등을 고려해 미자립교회로 지정된다. 많은 경우 농어촌이나 산간 마을, 도시 변두리 지역의 교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동안 교단마다 미자립교회를 후원하여 자립도를 높여주려는 시도가 많았으나 현실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각 교단 차원에서 도시 교회와 농촌 교회를 맺어주어 후원하게 한다든지, 신학교졸업자를 의무적으로 목회자 없는 미자립교회에서 일정 기간 목회하게 한다든지 하는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또한 대형 교단 중심으로 이뤄질 뿐 군소 교단에서는 개교회차원에서 개인적으로 목회자 사례비 일부를 지원하는 것이 전부라 미자립교회의 자립은 한계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운 때 일수록 ‘관용’을 갖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야 한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5-7). 관용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합리적이고, 사려 깊고, 배려하며, 자기의 권리를 엄격하게 주장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관용은 그리스도인들이 탁월하신 그리스도의 자신을 살아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기에 우리를 도우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특히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함으로써 어려운 교회를 위한 기도와 간구에 힘써야 한다.    코로나 온역의 시대는 악한 시대이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6-17).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시간을 아끼라는 의미다. 그리고 악한 시대는 매일이 악한 날들이며, 해로운 것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시간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하게 하고, 줄어들게 하고, 빼앗아 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기회를 붙잡고 지혜롭게 행하여 주님의 뜻에 부응 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관용으로 이 시대를 품고, 미자립교회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교단이나 교회가 크거나 작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님의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에 따라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지원대책이 필요한 이유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와 간구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옷’을 입어야 교회가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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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4
  • 교단 홈페이지 개선이 시급하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 네트워크가 대한민국에 본격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할 때 홈페이지 제작의 표준 도구로 활용되었던 어도비의 플래시 프로그램이 지원 종료를 앞두고 있다. 그간 플래시는 많은 이들이 인터넷을 활용하는 데에 있어 사용자의 간편한 이용을 촉진하는 등 여러 유익을 나누는 유용한 도구로 우리 사회에 젖어 들어왔다.    국가 기관이나 지자체는 물론 기업과 비영리단체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이들이 인터넷 홈페이지는 제작함에 있어 플래시를 활용해왔으며 이는 교단과 개교회를 넘어 한국교회에도 복음전파 온라인 사역을 위한 도구로서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2020년 12월을 기점으로 플래시의 지원이 종료될 예정이다. 기업이나 NGO 등에서는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국민 편익을 위해 플래시로 제작된 홈페이지를 변경하는 데에 앞장서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단순히 인터넷 사용자의 편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만이 아닌 홈페이지 보안성 강화나 홈페이지 관리 간편화 등 해당 단체의 총체적 이익을 좇는 방향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간 교단·개교회 홈페이지는 담임 목회자의 설교 영상을 게재·보관하거나 영성·목회 칼럼을 공유하여 교인들의 신앙심을 북돋아 주면서 교단 내외적인 의견을 종합하는 포럼으로 활용되는 등 한국교회 선교사역의 일익을 담당했다. 또한 코로나19라는 작금의 위기 상황에서 목회 현장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데에 활용되는 도구로 각광 받고 있다.    그러나 플래시 중심으로 구축된 인터넷 홈페이지의 지원 종료가 코앞인 현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이 남아있는 지금 플래시 프로그램과의 작별을 고하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장으로의 개혁을 동반하는 변혁이 시급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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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9
  • 교회학교 회복이 절실하다
    코로나의 장기화로 우리의 모든 환경을 변화시키고 있다. 6월 30일 현재 전 세계 확진자가 1,000만을 넘고, 사망자가 50만을 넘어서고 있다. 앞으로 계속해서 더 증가한다고 한다. 확진자의 지속적인 증가로 인하여 우리 사회가 더욱 통제사회로 변모하면서 개인의 자유는 물론 신앙생활까지 제한을 받는 사회가 되고 있다는데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교회학교까지 중단되면서 가장 중요한 어린이와 청소년의 신앙지도가 어려워짐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일들이 중단되는 위기를 맞고 있다.   교회는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고난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이는 주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명령이요, 지상 최대의 사명이자 특권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영혼이 구원받은 것을 크고 귀중히 여기는 것 같이 다른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크고 귀중히 여겨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며,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셔서 지금도 오래참고 기다리고 계신다(베드로후서 3장 9절).   바울 사도는 사랑하는 복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듯이 성경을 교육하는데 힘쓰도록 권고하고 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아는 면에서 바른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충분히 온전하게 되고, 준비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함으로써 교회를 돌볼 뿐만 아니라 교회가 심하게 변질되는 것에 대항해서 교회를 지킨 사람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교육에 절대적으로 힘써야 한다. 특히 다음세대의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하여 귀중한 사역을 맡고 있는 교회학교 사역이 하루빨리 재개되도록 개교회와 교단, 연합단체가 지원책을 강구해야 한다. 바울 사도가 강조하였듯이 교회는 생명, 진리, 성경을 중심으로 한 특별하고 체계 있는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교회학교의 회복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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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9
  • 여름행사의 의미를 기억하자
    코로나19로 인해 교계 전반의 정상적 활동이 어려워진 가운데 교회가 여름행사들을 치룰 수 있을지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여름행사는 관습적으로 의례 행해지는 것이 아닌 나름의 의미와 순기능이 있기에 많은 이들이 여름행사가 정상적으로 치러질 수 없는 상황 발생을 우려하고 있다.   바이러스로 인한 비대면 사회가 도래하고, 대부분의 부수적 행사들의 모임 공간이 온라인으로 대체되고 있는 가운데 여름행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겨보고 교회가 지켜야만 하는 가치들에 관해 반생해볼 필요가 있다. 여름행사는 우리의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우리 자신을 투신할 수 있는 시간이다. 세속에 지친 영혼을 달래고, 우리의 비워진 영혼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시간이다. 이와 더불어 여름행사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과 온전히 시간을 함께 보내는 기회도 갖는다. 여름행사를 통해 우리는 교회에서 1주일에 한번 보던 교우들과 더 깊은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바쁜 일상에서는도저히 마음 터놓고 할 수 없는 이야기들도 함께 밤 세며 이야기하고, 같은 기도제목을 두고 중보기도도 하곤 한다.   소중한 여름행사의 가치가 코로나19로 인해 그저 사라지게 나둬서는 안 된다. 우리는 먼저 여름행사의 첫 번째 의미는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혼자라도, 혹은 가족과 함께라도 조용한 기도원을 찾아 주님과 깊이 만나는 시간을 가지는 교인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현재까지 알려진 바이러스 전파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의 만남을 자제하는 것인 만큼 단체로 여름행사를 떠나는 것을 계획하는 일에는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혹여 여름행사를 기획하고 있는 교회들은 무엇보다도 방역에 최선을 다해 결코 확진자가 나오지 않을 수 있도록 조치해야만 할 것이다. 여름행사의 의미를 잃지 않을 수 있도록 한국교회의 많은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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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2
  • 소외 이웃 돌봄사역이 절실하다
    코로나19의 장기화로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커가고 있다. 정부는 코로나의 확산 방지에 주력하면서도 소외된 취약계층의 보호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특히 지역 복지관이 폐쇄되거나 공공병원, 보건소 등의 일상 업무가 제한되면서 가장 피해를 당하는 소외계층에 대한 별도의 대책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소외계층은 올여름 무더위까지 시작되면서 주변과의 교류가 제한되는 가운데 외로움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어려운 환경이 처할 때마다 교회는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사역에 함께 함으로써 이 땅의 복음전도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모든 이들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특히 위에 있는 권세자들을 비롯하여 소외된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경륜 아래 있도록 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병에 걸릴 수 있지만, 건강과 사회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감염되어 심각한 합병증으로 발전할 위험이 큰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코로나19에 감염되거나 바이러스를 전파시키지 않도록 하는 데에는 시설과 직원, 자원봉사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소외계층이 자신과 타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간단한 수칙을 알려주고, 증상이 나타날 경우 도움이 되는 방법을 안내하며, 코로나19에서 회복하도록 돕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로새서 3장 12~14절). 그리스도인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속되거나 세속적이지 않고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었듯이 그리스도인이 참 이웃으로서 소외된 이웃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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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2
  • 희망을 전하는 교회활동이 필요하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새로운 사회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그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는 계속 유지하데 마음의 거리는 가깝게 밀착해야 하고, 가벼운 운동이나 산책으로 몸과 정신의 활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소외계층과 같이 위기 상황에서 취약한 계층을 돌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만으로 불안과 우울에 취약한 현대인에게는 지금처럼 사회적으로 혼란스럽고 개인과 개인의 직접적인 소통이 자제되는 상황을 견디기 더욱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 시대가 너무 악하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고, 교만하며 감사치 아니하고, 배반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함으로써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시대이다.   이 같은 어둠의 현실 속에서도 희망이 있는 것은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다. 소금은 본성상 부패시키는 균들을 죽이고 제거하는 요소이다. 그리스도인은 부패한 땅이 완전히 부패하는 것을 막아주는 요소이다. 빛은 어둠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는 등불의 빛남이다.   따라서 교회가 희망의 산 소망을 갖게 해야 한다. 교회는 어두운 시대 속에서 고통 하는 영혼들에게 주님의 부활의 산 소망을 전하고 안식할 수 있도록 희망을 전하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신성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이 신성한 생명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이 생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소망의 실제에 이룰 수 있도록 교회가 전력을 다할 때에 빛과 소금의 희망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치료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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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4
  • 어떠한 차별·혐오도 반대해야 한다
    4대 종단의 대표들이 모여 지난 17일 기자회견을 열고 차별금지의 법제화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각 종단의 대표들은 한결같이 이 땅에서 그 어떠한 차별과 혐오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이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차별도 금지하는 강력한 법 제정이 필수라고 역설했다. 이에 더해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극구 반대하고 있는 세력이 일부 개신교인들이라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 개신교는 언제부터인가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보수 입장의 중심에 서고 있다. 정치 영역이든, 경제의 영역이든 개신교는 지속적으로 보수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문제는 보수의 핵심세력으로 인지되고 있는 보수 개신교가 정치·경제 영역을 넘어 혐오와 차별을 철폐하고자 목소리를 높이는 시대적 흐름에도 역행하여 자신들이 타종교·타문화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만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유독 보수 개신교인들은 차별금지법에 이토록 격양되게 반대하고 있는가. 그 누구도 차별과 혐오를 조장할 수 없다는 시대적 명제 앞에 그들은 어떠한 논리적 근거로 자신들의 주장을 점철하고 있는가. 모든 사람들의 판단 위에 신의 명령이 있고, 그 신의 명령은 성경 안에 계시되어 있으며, 그 신의 명령은 자신들이 ‘옳게’ 해석하고 있으니 그 어떠한 논리보다 자신들의 성경 해석이 위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인가.   우리 각자의 실존 자체는 타인과 긴밀하게 엮여 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인은 우리를 언제든 죽일 수 있지만 또 타인은 사랑의 감정을 통해 우리를 전혀 새로운 존재로 구성하기도 한다. 우리의 존재에는 이미 타인이 참여하여 ‘너 없는 나는 없다’고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기독교를 공격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다면, 준법정신을 갖고 타인을 혐오하지 않으려 노력할 때 기독교는 결코 차별금지법에 의해 공격받지 않을 것이라는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사실을 믿고 차별과 혐오를 반대하는 시대력 요구에 동참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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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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