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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서선교의 중요성 재고하자
    한국교회 문서선교는 이 땅에 복음전파와 함께 시작되었다. 중국 만주의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의주 출신 백홍준·이응찬·이성하·김진기·서상륜 등과 함께 1882년에 최초의 조선어 성경인 ‘누가복음’을 번역·출판하였다. 그 후 1887년에는 우리말로 번역된 최초의 완역 신약성경인 ‘예수셩교젼셔’가 번역·출판되어 조선선교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는 전 세계 1,000여 개 이상의 언어로 된 성경을 다양한 형태로 보급하고 있으며 기독교 서적과 신문, 잡지 등 다양한 문서선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출판사의 영세성과 교인 수 감소, 경제 불황, 디지털 시대의 독서문화 축소 등으로 인해 재정이 악화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문서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전략이다.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으로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구약성경과 복음서, 서신서들을 기록하도록 하셨다. 결국 문서선교는 기록된 문자를 통해서 선교하는 전도방법이다. 성경 출판은 물론 기독교 잡지, 신문, 학술지 등의 정기 간행물과 일반 단행본 출판 등이 주된 내용이다. 따라서 성경의 번역, 출판, 보급 외에 문서선교를 가능하게 해 주는 기독교의 복음전파에 관한 연구와 그 결과물의 저술과 출판은 활성화되어야 한다. 특히 교인들의 믿음의 성장을 돕는 책들의 저술과 출판에 대해서는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문서선교 단체 지원에도 앞장서야 한다.  바울 사도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디모데후서 4장 2절). 이것은 교회들이 오늘처럼 세속화 될 때에 복음의 말씀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를 담당하는 것이 문서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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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10-17
  •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자랑하자
    백남상은 한양학원의 설립자 백남 김연준선생의 철학이자 한양학원의 건학이념인 ‘사랑의 실천’ 정신을 기리고 발전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사랑의 실천은 백남상과 한양학원의 기본 철학일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 전체의 철학이다. 예수께서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 결국 하신 일이 사랑의 실천이시니 말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아픈 이들을 치유하셨다. 이웃으로부터 소외받는 이들과는 함께 하셨고, 기득권의 거친 폭력에 시달리던 소수의 약자들을 위해서는 그들을 대신해 항변하셨다. 예수께서는 다른 어떠한 가치관도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삶지 않으셨다. ‘사랑의 실천’만이 그에게 푯대가 되었다.   이를 모를 교회가 있을까. 이를 모를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있을까. 이를 분명히 알고 있기에 수많은 교회들은 사랑을 이야기한다. 사랑을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아무리 욕을 먹어도 우리 교회들은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아픈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웃으로부터 소외받는 이들과는 함께 하고, 기득권의 거친 폭력에 대항하고 항변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 그 어디에 충분함이 있겠는가. 더구나 교회가 하고자 하는 일이, 예수가 목숨을 바쳐 했던 일은 ‘사랑의 실천’이다.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교회는 좌우충돌한다. 부족한 인간들이 전능의 하나님의 섭리를 실천하려 하니 모자란 경우는 얼마나 많겠는가.   교회가 부족한 점이 많다. 하지만 이에 실망하지 말자. 교회가 부족한 모습을 보인다고 너무 미워하지 말자. 그래도 지금까지 ‘사랑의 실천’이 제일가치임을 적어도 말이라도 할 줄 아는 곳이 교회이지 않은가. 몸으로 사랑을 살아내지 못할지라도 너무 우리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자. 충분히 잘해왔다. 교회는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우리는 기독교인임을 충분히 자랑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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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10-17
  • 한국교회 영성 회복이 절실하다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부흥역사를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회개의 역사로 경험하였다. 이는 한국교회의 중생의 체험이었고, 이 부흥의 역사는 백만 인의 구령 운동을 통하여 민족 구원 신앙으로 나아가 3·1운동에의 참여로 나아갔다. 3·1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일제에 억압받는 민족과 조국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가장 피해와 박해를 받은 종교가 됨으로써 민족종교가 되었다. 하지만 교회의 양적 성장 위주의 전도와 목회는 세속적 자기 번영, 행복, 구원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부흥회는 만사형통이란 행복 추구를 목표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무속종교적 경향은 초창기 장대현 교회의 회개 운동에서 빗나가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3·1운동 참여를 통한 조국의 독립만세와 독립운동에 큰 역할을 했으나 샤머니즘의 자기구원, 번영과 성공, 축복을 신앙의 중요 요소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을 무속적인 신앙으로 오도하는 것이었고,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적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본래의 영성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참여하는 신앙을 말한다. 신앙의 척도란 번영이나 축복의 양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하고 주님과 날마다 인격적으로 동행하는 가난한 마음의 태도를 날마다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날마다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길은 초기 선교사들이 물려준 청교도적 신앙의 전통을 계승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성경읽기, 묵상과 기도, 절제와 근면한 사람, 이웃 사랑의 실천 등이 날마다 교인의 삶 속에서 십자가 신앙을 실천하는 것이다. 청교도적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요 이 세상에서 천국을 바라보고 날마다 천국의 삶을 실천해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구원 위주의 삶이 아니라 이웃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영성 회복은 동성애와 퀴어문화 풍조를 과감히 거부하고 성경적 기독교의 성결에 이르는 것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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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1
  • ‘그리스도’ 중심의 문화에 주력하자
    매년 10월 셋째 토요일은 ‘문화의 날’이다. 문화의 날은 문화발전의 기운을 드높이고 국민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참여도를 높이며 방송·영화·연극·잡지 등 대중매체가 지닌 사회적 가치를 재인식하고 문화예술진흥에 관련된 각종 행사를 거행하는 기념일이다. 이에 따라 기독교에서도 기독교문화의 창달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문화라는 의미를 두고 논쟁이 많다. 기독교 문화란 기독교 복음정신의 표현양식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문화신학자 폴 틸리히가 “종교는 문화의 실체요, 문화는 종교의 표현양식이다”란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에서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가 문화로서 표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의 비밀이요 핵심은 ‘그리스도와 교회’라는 관점에서 문화적인 요인을 배격한다. 그 대표적인 성경 말씀이 ‘골로새서’이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를 혼란스럽게 했던 세상의 ‘혼합된 문화’ 즉 금욕주의와 영지주의와 같은 사상을 비롯해 세속적 문화를 경고하고 있다. 기독교는 ‘만유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회복해야 하는 문화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 속 순례자의 길을 가야 한다. 순례자가 ‘허영의 시장’을 지날 때 모든 상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 시장 사람들은 ‘당신들이 사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요’라고 묻는다. 그러자 ‘우리는 진리를 삽니다’라고 하자 비웃고 조롱하며 악담하는 것을 본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허영의 시장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보기 좋은 문화로 진열되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세상 문화로 대치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생명의 기독교문화를 창조해 나가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여전히 세속화의 길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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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10-11
  • ‘기독교문화’도 변해야 산다
    과거 기독교가 우리 문화 전반을 주도하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서구사회에 대한 동경과 서양의 종교로서 덧붙여진 기독교의 이미지가 함께 어울려 가능했던 일일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과거 기독교는 우리 문화 전반을 주도했다. 교회는 우리들의 어린 시절 신앙심을 키워준 곳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 감수성을 키워준 곳이기도 하다. 교회는 우리에게 성경과 공과들을 비롯한 다양한 읽을거리들을 제공했고, 세련된 교회음악을 함께 부르고 연주하며 음악적 감수성을 키워주기도 했다. 절기마다 학교보다도 더 근사하게 사람들 앞에서 서로의 장기를 드러낼 수 있는 발표시간을 마련해주었고, 친구들과는 학교에서보다 더욱 친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해주었다. 하지만 교회와 관련된 우리세대의 수많은 추억들은 마치 루비콘 강을 건넌 것 마냥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교회의 문화는 사회를 주도하지 못한다. 수많은 젊은이들과 학생들이 교회의 행사를 기다리지 않는다. 교회 밖에서도 얼마든지 악기연주를 배울 수 있고, 좋은 서적들에 대한 소개를 접할 수 있다. 작금의 시대 기독교 문화가 사회에 매력적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폐쇄성에 근거한다. 정체되어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은 기독교의 교리, 관습, 문화들은 우리들의 창조성을 옭아 멘다. 이미 나이 들어 버린 기성세대의 교회생활에 대한 추억은 ‘영원히’ 박제된 채로 젊은이들의 문화를 틀 지운다. 기독교 문화가 다시금 일어서기 위해서는 변해야 한다. 변화의 필요성 앞에서 본질을 운운하지 말자. 본질이란 그 누구에게도 본질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법이다. 과거의 나의 기억에 얽매여 다른 세대의 자유로움을 제단하지 말자. 그럼 아직은 남아있는 교회의 젊은이들이 스스로 새로운 교회문화를 창조해낼 것이다. 우리 교회의 자녀들은 우리 세대보다 더욱 더 멋지게 우리 사회 전반을 주도하는 새로운 교회문화를 만들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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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9-10-02
  • ‘교회법’의 근원인 성경으로 돌아가자
    원래 교회법의 근원은 구약시대의 율법이다. 율법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로서 십계명으로 요약된다. 신약시대는 가톨릭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 교회법에서 세속적인 사항을 제외하고 성경을 중심하여 개신교 헌법이라는 이름의 교회법을 갖고 있다. 특히 한국장로교회 헌법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를 기본으로 1907년부터 한국교회 실정에 맞도록 채택했다. 따라서 교회헌법은 교리, 정치, 권징조례 등으로 구성됨으로써 모든 교회가 금과옥조로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교단 분열이 계속된 가운데 성경이 왜곡되고 교회가 세속화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최근 목사세습 문제를 비롯하여 교역자의 양성과 독선 등과 관련하여 개교회나 교단 산하 신학교가 난립함으로써 총회 헌법이 유명무실하고 있다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교회 헌법의 근본은 성경이다.    성경 속에서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부른다. 죄악 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나온 사람들의 무리를 말한다. 교회를 구체적으로 증거 하는 말씀이 에베소서에 있다. 사도바울은 교회의 모습을 7가지로 증거하고 있다. 교회는 머리인 그리스도의 ‘몸’이요. ‘새 사람’이다. 동일한 ‘시민’이다. 하나님의 권속, 곧 가정이다.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이다. 그리스도의 아내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사랑을 나눌 짝, 곧 ‘아내’가 있어야 한다.  결국 교회의 참모습은 주님의 사랑이 어떻게 구체(실제)화 되느냐에 있으며,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한다. 반면에 교회가 ‘교만’과 ‘분열’에 빠질 때에 라오디게아(사람의 정의)교회로 쉽게 변질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교회는 성령이 하나 되는 교단 내부 질서를 확립하고, 진정한 교회를 회복하는 일에 나서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교회법의 근원인 성경으로 돌아갈 때 진정한 화목이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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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02
  • ‘공정한 사회’위해 교회가 앞장서자
    우리나라도 현재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어가 가기 위해 각계각층에서 노력 중에 있다. 우리 시대가 지향하는 바는 더 이상 성장과 경쟁이 아닌 나눔과 상생임은 분명하고 이에 따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가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기존의 사고방식을 변혁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지당한 사실이다.   교회 역시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대열에 합류하고 있음이 분명하고, 공정한 사회를 위한 진정성 있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가 내고 있는 목소리가 근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패러다임이 경쟁과 성장을 지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눔과 상생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확인해보는 일은 필수불가결 하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고 있는 작금의 시대, 사회를 선도하기는커녕 사회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간다는 평을 받고 있는 현재 교회는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가? 입으로만 기독교의 본질을 지키자고 소리낼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기독교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지 고민해볼 때이다. 교회의 본질은 경쟁과 성장의 논리에 있지 않다. 이러한 논리는 기독교에 덧붙여진 제국의 논리요, 자본의 논리일 뿐이다. 교회는 성장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목적은 교회를 키우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닌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일에 있기 때문이다.   공정함과 공평성의 가치는 결코 성장을 막지 않는다. 하지만 성장을 지향하지만도 않는다. 우리가 성장을 제일가치로 내세운다면 때론 공정함과 공평성이 훼손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두 가치를 쫓는다고 해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본질은 성장과 경쟁에 있지 않다. 잘먹고 잘사는 것에 있지 않다. 그 뜻은 ‘다함께’ 웃으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에 있다. 이 단순한 진리를 확인하기 위해 일일이 성경을 근거로 제시해야만 할 필요가 있으랴!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일에 기독교는 그 어떠한 공동체보다 앞장서야만 한다. 그것은 곧 교회의 본질과 관계된 사역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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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25
  • 기독교는 정치의 도구가 아니다
    기독교와 정치의 문제는 매번 선거철이 다가오면 쟁점화되고 있다. 교회는 사회의 거대조직이요, 교회 구성원이 유권자라는 힘을 갖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정치인은 종교인에 대한 유혹을 벗어날 수 없다. 반면에 종교인 또한 이를 계기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나타내고자 하는 세상적인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특히 이런 현상이 기독교에 강하다는 문제 때문에 사회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동안 선거 때마다 기독교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교회 지도자들이 노골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드는 모습에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기독교지도자 포럼’이니 ‘나라와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국민운동본부’ 등이 그것이다. 또한 교계 진보세력들도 자신들과 뜻을 같이하는 세력의 후보단일화 등 정치행보를 해왔다.   민주국가의 국민이면 누구나 정치활동을 할 수 있다. 종교인도 민주시민으로서 정치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인이라는 개인의 정치참여와 신념의 집합체인 종교의 정치참여는 차원이 다르다. 종교는 정치와 분리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20조는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현행 헌법상 대한민국은 세속국가다. 특정 종교가 지배하는 신국이 아니라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다종교사회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모범적인 다종교국가로 꼽혀 왔다. 하지만 기독교의 본질은 현실정치참여를 분명하게 거부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마가복음 12장 16~17절)” 성경은 현실정치와 믿음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교회를 둘러싼 사회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선지자의 사명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것이지, 정치의 장에 예속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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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25
  • 꾸준한 독서로 출판위기 극복하자
    기독교출판이 갈수록 축소되고 있다. 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기독교출판의 축소로 기독교출판사의 매출이 전년 대비 10%에서 25%까지 매출이 감소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기독교출판이 축소되는 것은 한국교회가 책 읽는 일을 등한시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출판은 본질적으로 문서사역을 통한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1889년에 국내에서는 최초로 배재학당 안에 현대식 인쇄소가 설치되어 문서선교를 위한 기독교 서적들과 신문 등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한글로 번역되어 보급된 성경과 찬송가는 대한민국 복음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한국은 미국에 이어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세계 2위의 선교대국이 되었다.   다행스러운것은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기독교출판은 위기극복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기독교출판협회는 매년 코엑스에서 개최되는 서울국제도서전 내에 기독교문화거리를 조성하고 일반 독자들과의 소통을 시도하며 문서선교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출판협회를 비롯해 두란노서원, 토기장이, 요단출판사 등 20여개 기독출판사들이 10개 부스를 마련해 참가하고 있다. 여기에 변화되는 디지털환경에도 효과적인 대응을 펼쳐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꾸준히 기독교 서적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서를 통해 신앙의 내용을 바르게 채워야 한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게 지금 이 세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물론 스마트폰 같은 디지털기기를 이용해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을 사서 정독하는 것은 단지 정보만이 아니라 경건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출판은 이렇게 신앙의 내용을 채우고, 성도들에게 경건을 주는 사역이다.    독서의 계절에 함께 기독교서점으로 달려가 신앙서적을 사서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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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09
  • 한국교회의 분열을 우려하며
    한국교회 분열은 항상 있는 일인가? 최근 예장 백석대신측 교단 내부에 균열이 일어나면서 많은 안타까움을 갖게 한다. 한국교회의 분열은 1951년 신사참배문제를 시작으로 분열이 계속되어 왔다. 2006년 종무실 자료에 따르면 한국교회는 약 290개 교단에 이른다. 그 가운데 장로교단이 114개 정도였으니 분열의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이뿐만 아니라 종무실에서는 그 이후 현재까지 종교통계를 집계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실제 얼마나 분열되고 있느냐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수많은 교단 난립과 분열은 한국교회의 현실이요 부끄러움이다. 분열은 그리스도의 몸을 지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분열이 계속되고 있는가? 한국교회의 지나친 세속화에 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신앙노선과 지역 갈등, 교회연합기관의 난립과 정체성의 한계, 목회자 우상화 등 지도자의 교만과 도덕성 문제, 신학교 난립으로 무임·무자격 목회자 양산, 교회기관의 재정 불투명, 정치권과의 부화뇌동, 기독교 NGO활동 미흡. 안티 기독교 확산, 교계언론의 영세성과 사이비 기자 폐해 등은 믿음의 근본을 떠난 세속화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임을 깨닫고 자백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에 한국교회는 분열과 다툼을 해결하는 데에 하나 된 목소리를 내도록 갱신의 길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하나 되는 길은 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이 교인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말씀하고 있다.   교회 지도자는 특별한 은사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동역자로서 그 책임이 막중하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이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1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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