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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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염병이 돌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어려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방도는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14세기 초반에 대유행했던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절반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참혹한 질병이었다. 20세기 초반의 스페인독감, 20세기 중반의 홍콩독감 등도 지구촌을 괴롭혔고, 2000년도에 들어서서도 사스, 신종플루엔자, 메르스, 코로나19 등의 바이러스가 인간을 병들게 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전염병을 통하여 인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 전염병을 히브리어로 ‘데베르’라고 하는데 이는 ‘다바르’에서 유래된 말이다. 다바르는 ‘말하다, 선언하다, 경고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전염병(데베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다바르) 계신다는 뜻이다. 어떤 말씀일까요?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의 은혜 아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셔서 죄의 삯인 ‘사망의 속전’을 지불하셨다. 죄인이 속전을 지불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겸손히 나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어 이 ‘속전’을 지불한 자에게는 결코 전염병이 임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간음을 행하고, 불평, 원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두기 싫어하는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주변국인 앗수르, 바벨론, 메데, 바사를 통하여 그들을 징계하셨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과 짝할 때, 예수 안에 있지 않고, 밖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는 전염병으로 우리에게 ‘다바르’하고 계신다.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격동시켜 죄를 범케 했다고 돼 있다. 범죄한 다윗은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했다. 오늘날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이다. 그곳만이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곳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피난처요. 안식처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에는 어떤 질병도 전염병도 죽음까지도 이기는 권세와 능력이 있음을 알고, 믿고 그분께 돌아가자. 그런 사람에게는 전염병이 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로 돌아가는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바이러스는 힘을 잃고 물러갈 것이다.   코로나 질병이 창궐한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발라져 있는 자들에게는 질병도 재앙도 넘어간다. 그러나 예수 피가 뿌려져 있지 않은 곳, 예수 피가 묻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재앙은 피할 수 없는 전쟁과도 같다. 코로나를 통하여 예수 십자가로 돌아 온자에게는 놀랍게도 전염병은 오히려 축복이다. /분당벧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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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31
  • 우리는 왜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
      20세기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크게 영향을 준 선교 운동을 꼽는다면, 빌 브라이트박사의 대학생 선교운동·빌리 그래함박사의 대중전도운동·맥 가브란박사의 교회성장운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가지 운동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크게 성장되고 세계선교의 큰 부흥의 불길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세계 현실은 어둡고 암울하기만 하다. 세계 도처에서 기근과 굶주림, 영양실조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살인과 방화, 강간, 테러, 에이즈, 전쟁 등의 문제가 산적해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교회는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 나는 10단계의 교회운동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 한국교회가 각 단계별 운동들에 최선을 다할 때 우리 사회에 산적한 문제들을 치유할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줄로 믿는다.   1단계는 교회에 모이기를 우선 힘쓰는 운동이다. 성경에는 오순절의 예를 비롯해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구절이 여럿 나온다. 우선 우리가 모이기를 힘써야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 2단계는 온 교인들의 뜨거운 합심기도 운동이다. 성경에는 기도운동에 관한 말씀이 여러 번 강조되었다. 헨리 위드비쳐목사는 아침의 기도는 하나님의 자비와 축복의 보화 창고문을 여는 열쇠요, 저녁의 기도는 그의 보호와 안전의 날개라고 말했다. 하나님께 대한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3단계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읽기 운동이다. 지금부터 우리 모든 교인들이 매일 성경을 읽자는 것이다. 가령, 새벽기도회에서 성경 3장씩 읽고 합심기도하고, 개인기도시간을 갖고 자유롭게 헤어지는 방법도 있겠다. 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의 핵심을 깨닫고 구원받는 감격이 있어야 한다. 4단계는 흩어져 전도하는 훈련을 시킨다. 교회에서는 전도이론과 실제현장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과 사명을 깨닫고 전도에 임하게 한다.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전도와 말씀이 바로 훈련인 것이다.   5단계는 교회주차장과 장막터를 넓히는 운동이다. 로버트 슐러목사는 교회가 성장하려면, 살아있는 말씀선포·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넓은 주차장과 아름다운 교회 모습이어야 한다고 했다. 모두 힘을 합하여 주차장을 확보하고 장막터를 넓힌다면 교회성장에 큰 힘이 될 것이다. 6단계는 가정마다 ‘성경선물하기 운동’을 벌인다. 개교회 성장을 위해 성경보내기 선물운동을 조용하면서도 힘차게 펼쳐나간다면 과거 전도방법보다는 훨씬 더 나은 결과를 얻으리라 확신한다.   7단계는 내 이웃을 내 가족처럼 돌보기 운동을 한다. 현대의 모든 개인과 가정은 무엇인가 불안하고 쫓기는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역시 주님의 사랑이요, 돌봄이다. 성경을 보낸 그 가정에서도 성경을 받은 그 가정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내가족처럼 사랑하고 돌본다면 반드시 주님께로 구원될 것이다. 8단계는 강권하여 교회로 인도하기 운동을 한다. 교회는 여러 절기들을 이용해 교인들을 교회로 초청할 수 있다.   9단계는 국내 여러 곳을 답사하여 배우고, 돕는 운동을 한다. 아직도 국내에서는 선교하고 교회를 세워야하기 때문에 우리는 준비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 10단계는 세계 여러 곳을 현지 답사하여 배우고 돕는 운동을 한다. 이제 우리 모든 교인들은 앞장서서 국내선교뿐 아니라 국외선교에도 열심을 내야 한다. /성경국제후원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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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5
  • 독도는 한국영해의 닻
    ▲ 정성구목사   1964년 나는 외국 유학의 꿈이 있어서, 종로에 있는 시사영어학원에 등록해서 영어강의를 들었다. 타임지를 읽고 해석하는 과목이었다. 그때 강사는 변영태씨였다. 그는 고려대 영문학과 교수와 서울대 교수, 외무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아서인지 만년에 영어학원 강사로 겨우 생활을 하였다. 마침 변영태선생의 가족이 내가 일하던 동산교회에 출석했다. 동산교회는 박윤선목사와 김성환목사가 목회했고, 나는 당시 교육전도사로 봉사했었다.  변영태선생은 영어의 달인인 데다가 중국어도 능통했기에,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발탁되어 외무장관으로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외무장관으로서 제네바 회의를 비롯해 6, 7차 U.N. 총회 한국대표로서 이승만대통령의 명을 따라 ‘한미방위조약’을 만들어 서명한 탁월하고 진실한 외교관이었다. 그가 얼마나 올곧고 정직했으면 외국 출장에서 돌아오면 남은 출장비를 반드시 국고에 넣었다. 친척들이나 자녀들의 불평은 그렇게 높은 직책에 있으면서 그들을 도와주지 않자, 모두 그를 배신하고 욕을 했다. 그래도 그는 가난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직과 진실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살았고, 만년에는 병든 아내를 위해서 직접 연탄불을 갈 정도였다. 그는 건국 초기에 한국외교의 기초를 튼튼히 했지만, 특히 독도 문제에 대해서 철저하게 일본의 침략적 계획을 물리친 일이다.  1954년 10월 28일 우리 외교부에서 반박 구상서를 작성했다. 즉 분쟁을 국제 사법재판소에 부탁하자는 일본정부의 제안은 사법적인 가장으로서 허위주장하는 확인을 국제사법재판소에 구하여야 한다는 이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무런 분쟁이 없는데도 유사적, 영토적 분쟁을 조장하는 것은 바로 일본이다. 변영태선생은 독도가 영토 문제가 아닌 역사 문제라는 논리를 폈다. 1954년 9월 24일 구상서에서 “한국은 40년 이상이나 제국적 일본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그의 권리가 약탈당하였다는 사실을 일본에게 환기시키는 바이다. 일본정부가 분명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침략은 차차로 진행되다가 1910년 한국의 일본병합으로서 그 정점에 도달 하였다 … 시네마 현청이 독도를 자칭하여 그의 관할권에 포함시킨 것은 이러한 협정의 1년 후이다”며, “과거에 있어서 일제 침략의 최초로 희생된 독도를 또다시 점유하려 함은 대일강화조약을 파기하고 한국을 재침하려는 의도적 발로이다”고 했다.  변영태선생은 그의 꼬장꼬장하면서도 능숙한 외교로 이승만대통령의 오른팔이 되어 독도를 지켜냈다. 그는 구체적으로 1954년 독도에 독도 등대를 설치하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로태극기와 한국령 표지석을 설치하여 독도가 한국땅인 것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역사가들이 자유당과 이승만 대통령을 폄하하고 독재의 화신이니, 친일이니 하는 오명을 덮어씌우고 있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변영태 외무장관 겸 국무총리의 나라사랑과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 한미방위조약을 만들어 미국의 우산 아래 오늘의 번영된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기초를 놓았고, 독도를 확실히 지켜낸 것을 오늘의 세대는 알는지 모르겠다. 나라사랑을 위한 변영태선생의 애국심과 그의 하나님 중심 사상과 정직과 진실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70여년의 세월이 흘러서 오늘날은 자칭 애국자가 많지만, 그 시대에 자유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외교적 노력과 하나님 앞에서 양심과 정직으로 살려는 지도자가 그립다. /총신대·대신대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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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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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뜻을 정하여
    감사하게도 빈부, 귀천, 남녀, 노유, 유무식을 막론하고 공평하게 일 년은 365일, 한 달은 30일, 하루는 24시간, 한 시간은 60분, 차별이 없다.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사용자에 따라서 출발은 같이 하여도 십 년 후, 이십 년 후의 결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생긴다. 결심이 쉽게 무너짐으로 실망하여 주저앉게 된다. 다음부터는 아예 계획조차도 세우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결심이 삼 일 후에 무너진다 하여도 삼 일이라도 안 한 것 보다 낫다. 그리고 반복하여 삼 일이 지난 후 또 결심하고 또 결심을 한다면 매우 효과적일 것이다. 공자의 삼계도에 이르기를 인생의 계획은 어릴 때에 있고 일 년의 계획은 봄에 있고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다고 했다. 어렸을 때 공부하지 않으면 늙어서 아는 것이 없게 되고 봄에 밭 갈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으며 새벽에 일어나지 않으면 그 날의 할 일이 없는 것이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였다. 첫 번째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 두 번째 기도하며 살겠다. 세 번째 하나님만 섬기며 살겠다. 그대로 실천하며 살았다. 슈바이처박사는 21세 때 결심하기를 30세까지 학문과 실력을 준비하여 30세 이후부터는 남을 위하여 봉사하며 살겠다고 했는데 그대로 아프리카에 가서 일평생을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섬기며 살았다. 미국의 재벌이 된 킴슨에게 가난한 친구가 성공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킴슨은 네 가지 수칙을 말해주었다. 첫 번째 주일을 성수했고, 두 번째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고, 세 번째 술을 마시지 않았고, 네 번째 십일조를 온전히 드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가난한 친구도 그대로 실행에 옮겼는데 십년 후에는 크게 성공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김유신장군이 기생집에 자주 드나든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네가 우리집 가문을 빛내고 나라를 위하여 큰 일을 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기생집이나 출입을 하고 주색잡기에 빠져서야 되겠느냐고 엄히 꾸짖었다. 김유신장군은 어머니에게 다시는 안가겠다고 약속을 하였는데 타고 다니는 말이 기생집으로 습관적으로 가니 기생 천관이 반가이 맞이했으나 장군은 말에서 내려 칼을 빼어 말의 목을 베고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사람은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위인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결단력이 대단했다. 신앙생활 하는데도 지조가 있어야 한다. 금년에는 후회할 것 없는 알차고 보람되게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이웃에게는 덕을 세우고 모든 면으로 성장하고 성숙한 한해가 될 수 있도록 또 결심하고 또 결심하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린도전서 15:58)   /월드부흥사협의회 총재·희락교회 목사
    • 오피니언
    2019-02-24
  • 3·1운동 100주년, 무엇을 전할 것인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다. 1919년 3월 1일을 전후로, 시기는 그해 5월 말까지 또는 그 이듬해 3월 말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물론 해외에 이주해 있던 동포들에게까지 확산되었던 운동이다. 50명 이상이 참여한 시위만 1,500여 회를 넘었고, 참여 연인원은 202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1천 800만 정도였으니 총인구의 10%가 넘는 참여는 우리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고, 우리 민족이 역사적 사건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 근대화를 여는 시민혁명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3·1운동은 이런 기독교적 ‘애국’, ‘애민’의 기초에 기인(起因)하였다. 한국교회는 만세운동 이전에도 독립운동의 싹은 트고 있었던 최초의 독립선언이라 할 수 있는 2·8학생 독립선언을 후원하였고, 3·1독립선언의 기초자인 최남선이 고백한대로 3·1독립선언의 기초이념도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3·1운동은 한국교회가 동력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3·1운동 전개과정에서 보면 교역자들뿐만 아니라 의식 있는 평신도들에 의해서 조직화되어 만세 시위를 벌인 경우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운동의 초기단계에서부터 모든 흐름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였으며, 전국적으로 확산과정에서도 교회는 전국의 조직과 지도자를 제공하였다. 3·1운동으로 인해 한국교회가 지불한 대가는 참으로 컸다. 교회는 평신도들 포함한 목사, 장로, 전도사, 교사 등 교역자들까지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동하였으므로 일제의 주목을 받아 그 핍박과 피해도 매우 많았다. 탄압과 학살, 파괴, 방화 등 만행의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그 대표적 사례가 1919년 4월 15일 일어난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방화사건이다. 3·1운동 당시와 지금의 한국교회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그러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 당시 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고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그 의무와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민족화합을 이루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우리 민족의 공공성에 대한 의무를 감당하는 일에는 교파를 초월하여 물론 타 종교인과도 연대하고 협력하였다. 그렇게 하며 복음과 정의를 위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진정한 축복으로 여겼다. 이런 점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는 개인주의와 개교회주의로 변질되어 분열된 모습을 극복하고, 어떤 이유로도 하나된 모습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 하겠다. 3·1운동의 바람을 다시 불어오게 한국교회가 나서야 한다. 아니, 3·1운동의 정신을 함양하고 고취시키고 계승하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3·1운동의 정신은 단순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을 갈망하던 신앙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며 지킨 정신이다. 민족의 독립과 자유, 정의와 평화 그리고 후손들의 행복을 위하여 과감히 일어섰던 신앙의 선배들, 한국교회의 3·1운동 참여와 역할은 우리 민족 모두에게, 특히 기독인들에게 민족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봉사한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기념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와 연합기관, 그리고 각 교단이 하나된 모습으로 100주년대회를 치뤄 8천만을 섬기며 통일시대를 열고 다시 도약하는 기념비적 사건이 되기를 기대한다. 거룩한 교회로,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다짐하는 원년이 돼야 한다. /한국교회건강연구원 원장
    • 오피니언
    20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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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태규목사  나는 평소 기쁘게 살자, 열심히 살자, 낙심하지 말자. 이 세 가지를 품고 살아간다. 특별히 낙심하지 말자는 마귀가 좋아하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명이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귀를 기쁘게 할 수는 없다. 우리교회가 성전으로 사용하는 건물을 매각할 때는 나는 절대로 이단한테는 건물을 매각하지 않겠다는 말을 지난 20년 동안 성도들에게 이야기해 왔다. 우리교회 옆에도 그런 단체가 거주해 있기에 나는 더욱 그러했다. 오래전 인천 성서 신학원에서 영성부흥사역대학원이 시작될 때 입학생중에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조용히 생각해 보니 기독교 언론에서 가끔 보았다. 그와는 이렇게 만남이 이뤄졌다. 내가 보아온 강 목사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열심히 있고 긍정적이다. 남에게 대접을 잘하고 늘 남편을 높여준다. 남편을 호칭 할 때 언제나 사부님 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런 말을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다. 또한 축복도 많이 받았다. 먼저는 남편을 잘 만났고 자녀들이 훌륭하다. 1남 2녀를 두었으니 요즘 말로하면 금메달감이다. 물질의 복도 많이 받았다. 시흥에 가면 목사님 집이 여러 채 보인다. 나는 평생을 주의일해도 내 이름으로 된 집이 하나 도 없으니 가끔씩 그가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를 보면 욥이 떠오른다. 축복 받은 부분은 같으나 강 목사에게 시련이 왔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아마도 욥보다 복을 더 받았나 보다. 영성 모임을 가질 때 모인 집에 감사의 표시를 조금씩 한다. 드린 헌금으로 쓰면 남는 것이 없다. 그럴 때 그는 개인적으로 그것을 부담한다. 얼마나 요긴한 그릇인가! 누구 말대로 물질 내는 거짓은 없다는 말이 있다. 모든 시험은 거의 다 물질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나도 살아오면서 부지런하다. 열심 있다는 소리를 제법 들었다. 모임에 더러 못나가도 늘 바쁘게 사는 사람이라 이해하여 주는 편이다. 그렇지만 내 자신을 내가 알기에 말하기는 좀 부끄럽다. 나는 글을 쓰다가 또한 텔레비전을 보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해 그 자리에서 잠이 들기도 하고 여름이면 새벽에 교회서 기도하다가 잠이 들 때도 있다. 내 주변에는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다. 한 세대를 내가 모신 어느 감독님도 어느 때나 전화를 받으신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연세가 드시면서 약간은 알게 되었다. 중앙교회서 목회하시다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도 여의도에서 시내교회까지 왕래를 하셨는데 부목들도 그가 언제 주무시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내 친구 고신일 감독도 연락을 하면 곧 바로 답이 온다. 강 목사는 아침마다 오늘의 말씀을 보내주면 언제고 즉시 할렐루야! 아멘 이라고 답을 보내온다. 늦는 법도 없고 군더더기도 없다. 잠을 자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가끔씩 내가 묻는다. 목사님은 언제 주무세요? 저 혼자 0시 예배 드려요 감사합니다. 편히 쉬세요. 이렇게 답이 온다. 기도하는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아직은 이 나라가 희망이 보인다.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 7천 명을 예비하셨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실감이 든다. 이사야를 통해 야곱에게 주신 이사야 40장 28~31절 말씀이 떠오른다. 오늘날 피곤한 사람들이 세상에 참 많다. 여러 가지 운동이나 보약으로 풀어보지만, 몸의 유익보다는 부작용이 더 많다. 하나님 안에서의 숨어있는 능력을 깨닫는다. 오 주님, 새해에는 더욱 주의 여종의 기도를 들으시고 더 크고 귀하게 사용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기도드린다. /서광교회 목사
    • 오피니언
    2019-01-20
  •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역설
    ▲ 서충원목사 종교개혁의 영성은 깨어짐의 영성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며 나의 의는 더러운 옷이며 나는 절망적이라는 처절한 자기인식에서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과의 조우가 일어난다.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겸손한 자는 높아진다. 의인이 되기 위해 먼저 죄인 되어야 하고 건강한 자 되기 전에 먼저 병든 자 되어야 한다. 잃은 자가 찾을 수 있고 가난한 자라야 부요케 하는 은혜를 입는다. 영성은 무엇보다 영혼의 밤의 경험이며 십자가의 저주의 경험이다. 모든 것에 형통한, 고통의 깊이를 모르는 인생만큼 영적으로 피상적이고 천박한 인생은 없다. 가난을 모르고 절망을 낯설게 여길 만큼 잘 나가는 인생이 부러울까? 어불성설이다. 인생의 고난과 좌절이야말로 영적인 보화의 광맥이 아닐 수 없다. 탕자의 타락과 심연의 경험이 없었어야 할까? 탕자가 아버지의 큰 사랑의 경험을 맛본 것이 그의 이전의 타락과 절망 없이도 가능할까? 탕자의 타락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가는 길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우연한 것일까? 잃음 없이는 찾음도 없고, 떠남 없이는 돌아옴도 없다. 찾음이 잃음을 전제한다고 해서 잃음의 찾음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잃은 자들 중 찾지 못한 이들은 무수하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해서 떠남의 악이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다. 떠났다 돌아온 자에게 떠남은 악이며 돌아옴은 선이다. 악이 선을 낳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악이 선을 위해 한 퍼즐이 된다는 것이 십자가의 역설이다. 후회할 수밖에 없는 실패인데 그 안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하나님의 숨겨진 계획이 있었다는 것은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신비이다. 이 역설을 알기에 우리는 이제까지의 인생의 실패와 심연에로의 전락의 경험을 은혜의 빛 아래서 본다. 그 전락이 이 고결한 사랑의 발견을 위한 준비였다니 이해할 수 없는 역설과의 마주침이다. 그런데 의인이면서 어찌 탕자의 감각을 유지하는가? 역설적인 사실은 바로 의인이기에 탕자일 수 있는 것이다. 의인은 하나님의 긍휼의 빛 가운데 사는 자이고 그는 자신이 더욱 의인이 될수록 자신의 더러움과 탕자임을 절감한다. 외적으로는 더 의로워지나 내적으로는 자신의 죄인 됨을 더 깊이 느낀다. 여기에 주 가까이 가면서 더욱 탕자로서의 자기인식이 깊어지는 역설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 함은 우리의 의의 불완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로 인해 완전한 의인보다 더 깊이 사랑 안으로 들어감을 의미하기도 한다. 전적 부패의 종교개혁의 가르침은 자신의 불완전한 삶에 대한 정당화로 쓰이지 않고 죄인을 향한 무한한 사랑 안에 사는 자녀의 기쁨을 말해준다. 아 놀라운 사랑의 신비여! 어메이징 그레이스여! 의인이 자신의 의로써 누리지 못할 사랑의 신비를 절망적인 죄인인 우리가 받아 누리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나 같은 죄인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다 안다 할 수 있을까? 더 깊이 그 사랑 안으로 들어가리라. 그 사랑의 깊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더 깊은 영혼의 밤의 경험으로 주께서 이끄시길 기도한다. 더 낮아져야 하고 더 산산히 깨어져야 하고 더 탕자처럼 무너져야 한다. 위로 받기보다 먼저 슬픈 자 되어야 한다. 낮은 자들과 같아지고 죄인들과 더 많이 만나고 그들의 슬픔과 낮아짐에 동참해야 하리라. 우리는 지금 너무 행복하고 너무 부요하고 너무 자족하다. 탕자의 가련함이 먼 과거의 추억으로 희미하지 않은가? 위기의 신호이다. 오히려 탕자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형의 떳떳함과 분노보다 더 하나님의 나라에 가깝다. 더 낮아져야 하리라.  /샬롬누리영광교회 목사
    • 오피니언
    2018-11-22
  • 부활의 신앙과 부활의 삶
    ▲ 이경욱목사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고난주간을 보내고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는 기쁨의 부활절이 다가왔다. 모진 고난과 고초를 겪으신 그리스도께서 사흘만에 무덤 문을 열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날이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죄를 모두 지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삯인 죽음을 이기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의 굴레와 사슬을 끊어주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부활절이 되면 교회에서는 서로 달걀을 주고 받는다. 거리에서 부활절 달걀을 시민들에게 나누어주는 모습은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기독교 풍습이라 할 수 있다.  달걀을 나누는 것은 죽은듯이 보이는 달걀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부화하여 병아리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통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달걀은 부활절의 상징이 되었다.  달걀은 그냥 가만히 놔두면 생명을 느낄 수 없고, 생명이 탄생 할수도 없다. 어미닭이 오랫동안 따뜻하게 알을 품어주어야만 그 속에서 생명이 자라고 병아리가 탄생할 수 있다. 어미닭의 품을 벗어난 달걀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죄로 인해 이미 죽은 달걀과 같은 상태의 인간은 혼자서는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어미닭의 품 안에 있어야 병아리가 태어날 수 있듯이, 인간도 주님의 품 안에 머물러야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신 것을 의미한다. 죄인인 우리를 부르시고 자녀 삼아주시며 의인이라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이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우리 믿는자들의 부활인 것이다.  부활은 단순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몸을 가지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 바로 부활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기록은 예수님이 전혀 다른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셨음을 말해주고 있다. 빈 무덤에서의 여인들과 엠마오 도상에서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알아보지 못했고, 제자들은 홀연히 나타나신 예수님을 유령이라며 두려워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던 스승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몸을 가진 새로운 사람이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며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기독교인의 삶은 부활의 삶이 되어야 한다. 죄된 과거와 결별하고 완전히 변화된 인간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불완전하기에 홀로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달걀이 어미의 품 안에 있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 있어야만 새로운 생명을 얻는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 “나의 안에 거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그 분의 품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가 가진 부활의 신앙이 부활의 삶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부활절을 맞아, 우리 모두 부활의 신앙을 부활의 삶으로 승화시키는 기독교인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예장 대신측 사무총장
    • 오피니언
    2018-03-28
  • 한국교회, 도산선생을 기억하다
    ▲ 이효상목사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한말 일제하에서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밤낮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던 위대한 애국자이자, 민족의 지도자요 큰 스승이다. 한국교회는 그의 정신을 계승하며 민족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고 화해와 협력에 기반한 통일조국을 이룩하는 데에 힘써야 할 때이다.   도산이 기독교에 들어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나름대로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것은 늦어도 1895년으로 보인다. 복음을 받은 이후 도산은 곧 기독교의 진리를 전도하고 교회를 건립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강서군 탄포리교회는 도산이 평양에서 이곳으로 와서 전도하여 믿게 된 이들이 설립한 것으로 그들이 안창호의 집에 모여 교회를 성립시켰다.  도산은 190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상항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피선되어 교민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에 비난받던 한인사회가 몰라볼 정도로 정화되고 미국인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었다.  1907년, 29세의 나이로 일본을 거쳐 귀국한 도산은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성학교와 마산도자기회사 및 태극서관을 일으키는 등 국내민족운동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대성학교 학생들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지도하였다.  1910년 4월 중순 중국 청도에 이르러 ‘청도회담’을 개최하고 다시 러시아 행 비자를 받기 위해 북경에 갔다가 상해·연태·청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니콜리스크의 최관흘 목사를 방문, 그와 함께 국민회 확장과 기독교 전도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3·1운동이 발발했을 적에 도산은 1919년 3월 13일 북미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위원회 석상에서 〈3·1운동을 계승〉이라는 제목으로 연설 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지휘명령 아래서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이라는 의지를 표명하는 한편 종교계(기독교계)가 한국 기독교도의 참상을 널리 고하고, 위하여 기도하며 비인도적인 일본인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해야 할 것을 당부하였다.  도산은 ‘우리 2천만 동포가 모두 손에 신약전서를 한 권씩을 가지는 날에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외쳤는가 하면, 민족의 희망을 기독교에서 발견한 선각자이며 기도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특히 도산의 독립운동은 다른 어떤 독립운동 지도자들보다 큰 틀과 구체적 계획을 갖춘 뛰어난 경륜이 담겨 있었다. 그는 좌우파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통일단결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그는 사랑의 보편적인 가치를 갈구했던 기독교인이였다.  순국 80주기를 맞아 도산 선생은 조국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의 본보기이자 국가 지도자의 귀감으로 선생의 신앙인격과 교훈은 시대성을 초월해 우리 속에 현존하고 있다.  /한국교회건강연구원 원장
    • 오피니언
    2018-03-15
  • 인생의 기준은 성경에 있다
    ▲ 문성부 목사  물질 문명이 발달한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사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기준을 잘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한번 정해놓은 법칙을 모르고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제도를 정해놓고 불완전한 인생을 살아가다 보니온갖 병패와 스트레스 우울증 암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은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이 법칙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결코 자신이 죽음에도 억울하거나 손해 본다는 생각을 하지는 안을 것이다. 왜 못 받아들이는가? 여기서는 믿음을 요구 한다. 내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고 그 분께서 삶과 죽음을 주관하심을 믿을 때 인생이 평안을 누린다. 오늘 날 기독교인을 보자 봉사를 많이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했어도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비방을 받는 것은 잘 한 일을 비방하지 않고 그 다음에 행동이 잘 못 되는 것 때문이라고 본다. 성경에 기준으로 살지 안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을 기준으로 바른 삶을 성도들이 살아주고 본이 되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때 좋은 영향력을 반드시 끼치게 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사람은 많이 있다. 기독교 인 이라면 공감을 한다. 어떠한 방법으로 하여야 되는 가 방법이 나와야 됩니다. 저에게 이런 마음을 주셨다. 말씀에 반응하여 전적인 순종이 필요한데 그 점이 잘 안 되고 있음을 본다. 그 문제는 온전히 하나님의 원하는 믿음의 기준치 안으로 못 들어왔기 때문에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동일하다. 우리 각자는 성경에 기준으로 성령을 받았는가? 확인하고 확증하는 삶을 매일 해야한다. 성도가 변화가 없고 인도자가 변화가 없다면 한번 돌아보고 나에게 성령이 있는지 확인하고, 구분이 잘 안되면 먼저 성경을 기준으로 100%로 하나님은 성경대로 이루시는데 나는 잘 모르고 안일하게 믿음생활하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는지 뒤돌아 봐야한다. 나도 27년 전에는 성경에 기준을 두지 않고 믿음생활을 했다. 그 결과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로 믿기는 했는데 15년을 헛되게 교회를 다닌 결과가 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천국 가는 믿음이 확신이 없었기에 기도가 이루어 졌다. 그때부터 성경이 믿어졌다. 그때에야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역사 하시고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을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전에는 믿음이 확신이 없으니까 술도 즐기고 세상에서 즐겁게 사는 것이 낙이었다. 그런데 성령님의 임재 후에는 삶이 180도 바뀌었다. 성령 임재 후에 첫 번째 생각이 이제는 죽어도 좋다는 것이었다. 내 죄가 머리털만큼도 안남기고 다 나를 대신해서 갚아주신 것이 믿어 진 것이다.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이 내 마음에 100%로 의심없이 믿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이루어지고 온전히 믿어 졌다. 머리로 아는 믿음이 마음으로 믿는 믿음이 되어 졌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천국 가는 백성이 됐다니 너무나 기뻤다. 눈앞에 부러운 대상이 다 사라졌다. 성경이 기준이 된 것이다. 영혼을 살리는 일 외에는 가져갈게 없구나 확신이 왔다. 나처럼 15년을 다녀도 확신이 없이 성령을 받지 못한 분들에게 알려야 되겠다고 결심하는 용기를 하나님이 주셨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하신 말씀대로 내 영혼도 귀하다면 다른 사람에 영혼도 하나님은 너무도 귀하게 여기고 계심을 알기 때문에 천명 앞에서 인도하든 한 영혼 앞에서 인도하든 동일한 심령으로 전하고 있다. 사경회 끝나고 간증을 들을 때는 말씀의 역사 하셔서 변화 받은 모습을  보며 너무나도 감사가 넘친다.  바른 믿음은 성경을 성경답게 전하여 줄때 하나님의 원하는 기준안에 들어오도록 인도 할 때 영혼이 변화를 받아 개인이 변화되고 교회가 변화되고 대한민국이 변화되고 세계가 성경을 기준 삼을 때 각 나라에 복음이 임하고  평안을 누리는 축복된 삶을 전해준다. 부활의 믿음이 지구촌에 이루어 질 줄 믿고 기도한다. /기감연합 총무
    • 오피니언
    201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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