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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투고) 제106회 예장합동 정기총회를 바라보며
예장합동(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총회)는 매년 9월 총회에서 부총회장 선거를 한다. 올해는 9월 13일에 개최되는 제106회 총회에서 부총회장 선거가 실시될 예정이다. 부총회장에 당선되기 위해서는 총대들(매년 구성되며 약 1,500명 내외)의 과반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 한다. 금권선거가 문제다 2000년대 이후에 부총회장 선출과 관련하여 예장합동에서 회자되고 있는 것은 후보자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총대들에게 돈을 많이 쓴 사람이 당선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총회사무실에 근무하는 사람들이나 총회 임원 등의 관련자들에 의해서 쉽사리 확인될 수 있다. 올해 제106회 총회에서 선출될 부총회장 후보자는 예수인교회의 민찬기 목사와 주다산교회의 권순웅 목사(교회 이름의 가나다 순서를 따름)로 결정되었다. 국민일보는 예수인교회의 민찬기 목사는 서울의 20개 노회가 지지를 하고, 주다산교회의 권순웅 목사는 30여 개 무지역 노회에서 지지한다는 보도를 하였다.(국민일보 2021. 5, 21.) [좋은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합동F신문]에서는 “제106회 총회 임원 후보들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 등록 마쳐”라는 제하에서 부총회장 후보등록 자 중 한 사람과 관련된 사람들을 집중하여 기사화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를 작성한 F기자는 두 후보자 중 한 사람과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는 소문이다. (좋은신문 2021. 7.27.) 사정이 이렇다면 예장합동은 더 이상 장자교단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종교집단이라 하더라도 할 말이 없다. 이러한 편법과 불의를 당장 도려내야 한다. 바른 선거는 칼빈주의의 사상과 교회론을 바르게 아는 데서 시작된다 예장합동은 칼빈주의 사상을 신조로 한다. 그것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과 그 내용은 모두 진리다. 성부 하나님의 거져 주시는 은혜와 예정, 그리고 성자 그리스도의 의와 대속의 죽으심으로 인생들이 의롭다함을 입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성령님은 이 사실을 깨우쳐 믿게 하시고 우리를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인도하신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은혜 안에서 품으시고 양육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어려서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르침 받으며 자라가고 서로 교통하는 은혜의 연합체다. 세계 열방의 온 교회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서로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룬다는 것 역시 말할 필요가 없다. 교회의 표지는 말씀과 성례와 권징이다. 말씀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선포되고 실천되며 성례가 성경대로 지켜지다면 권징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성례는 성찬식의 참여는 물론이고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여 그와 함께 연합하여 살아가는 삶 자체로 실천된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대로 진리로 선포되고 실천된다면 성례와 권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래서 말씀의 선포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부총회장은 금권이 아니라 자신의 교회 안에서 어떻게 말씀을 선포하며 모든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연합되게 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중심으로 선택되어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필자는 두 후보자의 4편의 설교(2021년 7월 4일에서 7월 25일까지의 4주간의 주일설교)를 비교하면서 후보자의 선택기준에 대하여 논하기로 하였다. 예수인교회 민찬기 목사의 설교는 자연스럽고 성도와 교감적이다. 민찬기 목사는 7월 4일 주일에 “맥추절을 왜”(출 23:16), 7월 11일 주일에는 “신앙의 경주를 위하여”(히 12:1-2), 7월 18일 주일에는 “영혼의 거울인 성경”(약 1:22-25), 7월 25일 주일에는 “역전의 명수”(단 6:19-23) 등의 설교를 하였다. 민찬기 목사의 설교는 매주 1부, 2부, 3부의 설교가 주제는 같으나 그 내용은 서로 달랐다. 그래서 성도들 중에는 1부 말씀이 더 은혜가 되었다거나 2부 예배가 더 은혜가 되었다고 말하곤 한다는 것이다. 같은 본문을 다양하게 보고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은 민 목사가 어떤 위급한 상황을 만나도 A플렌 , B플렌, C플렌 등의 계획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민 목사의 설교는 정형화되어 있지 않고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 자유롭다. 민목사는 7월 한 달간의 설교에서 부총회장 출마와 관련하여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동영상 화면에 헌금을 안내하는 계좌가 나타나지 않았다. 주다산교회 권순웅 목사의 설교는 강해식으로 정형화되어 있고 훈육적이다. 권순웅 목사는 7월 4일 주일에 “맥추감사와 부흥”(신 16:9-17), 7월 11일 주일에는 “시대재앙과 리바이벌 새기비(기)”(시편 91편), 7월 18일 주일에는 “가둘 수 없는 사람”(행 16:19~34), 7월 25일 주일에는 “역사(history)는 하나님의(His Story) 역사다”라는 제목의 설교들을 하였다. 권순웅 목사의 목사의 설교는 학문적이었다. 설교가 조직화되어 있고 충실하다. 그는 설교 도중에 자신이 총신신대원 원우회장이었으며 원우회장으로써 했던 일들을 증언하였다. 권목사 자신이 중심이 되어 복음운동(스파크)를 주도하였다. 이런 점들이 권목사의 설교를 훈육적이게 했다. 7월 11일 주일설교에서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총회장과 부총회장이 중요하다고 하였고, 7월 25일 주일설교에서는 자신이 부총회장에 출마했으며, 내년(2022년)이 주다산교회 30주년이어서 부총회장 출마와 교회행사를 위해 동영상 촬영을 많이 한다고 하였다. 설교하는 동안 오른쪽 상단에 헌금을 위한 계좌가 게시되고 있었다. 이번 부총회장 선거는 가난으로 고생하며 기도하던 민찬기 목사와 총학생회장과 원우회장 출신의 권순웅 목사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예수인교회 민찬기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과 75학번 출신이다. 민 목사는 총신 75동기생들 에게는 기도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가난했기에 기숙사생활이 힘들어서 친구의 기숙사 방 한 켠에 자기 짐을 맡겨(?) 놓고는 총신 뒷동산(사당동)의 기도굴 등에서 지내곤 하였다. 일산에서 목회하는 동안에는 가난한 교회 살림으로 인해 여유 있는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검소한 생활이 필수였고 세월이 가면서 이러한 태도가 습관이 되었다. 40여 년의 목회를 통해 현재 3천여 명 이상의 성도가 출석하고 있는 예수인교회는 모든 성도가 가난 속에서 이루어온 기도와 눈물과 땀의 결실이다. 부총회장 입후보도 많이 망설이다 결정되었다. 그는 자신이 헌신해서 전국의 성도들과 함께 총회 산하 모든 교회를 섬기고 그 연합을 이루기를 꿈꾸며 입후보하였다. 주다산교회 권순웅 목사는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출신이다. 권목사는 총학생회장 출신이라는 유혹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혹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종이 되기로 작정하고 복음에 헌신하는 목회자다. 서울 송파구에서 목회하다 현재의 동탄으로 옮겼으며 이곳에서 8 가정을 중심으로 주다산교회를 시작하였다. 말씀에 따른 헌신으로 주다산교회는 현재 5천여 명의 성도가 출석하는 대형교회로 성장되었다. 권목사의 스파크(SPARK)운동은 타교회의 귀감이 될 만한 복음운동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러한 조직과 운영은 총학생회장과 원우회장의 수행경험에서 온 것일 것이다. 학생회장의 경험은 권목사 자신이 직접 수고해서 마련한 자산이 아니기에 그것을 사용함에 있어 과감하고 대범하게 해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예장합동 부총회장을 선택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총대원들의 믿음에 선 결단이 중요하다. 바라기는 교단에 혁신을 불어넣을 수 있는 분이 되었으면 한다. 이를 계기로 향후 예장합동교단이 하나님 앞과 민족 앞에서 그들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선거혁신을 위해 다음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부총회장 선거, 이렇게 해보자. 첫째로, 입후보자의 조건으로서 자신이 속한 교회 성도들이 공동의회를 통해 과반 이상의 찬성을 받게 하는 것이다. 총회장으로 섬긴다는 것은 후보자 목사 개인이 아니라, 그가 속한 교회의 모든 성도의 몫이다. 그래서 부총회장 입후보자는 성도들의 승낙을 먼저 받는 것이 우선이라고 본다. 둘째로, 현행 총대제도는 그대로 두되, 투표방식에서는 비대면 온라인 투표제도를 채용하여 총회 소속된 모든 교회의 목사들과 장로들이 전체 투표인단을 대폭 확대하는 것이다. 투표인을 늘림으로서 금권에 의한 선거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본다. 셋째, 부총회장 입후보자들의 공개토론회(1회 이상)을 실시하는 것이다. 패널리스트를 활용한 질의응답, 입후보자 개개인의 정책과 비전 발표, 또는 후보자들끼리의 자유스러운 질문과 토론 등을 실시하는 것이다. 넷째, 3권역으로 나누어 각 권역에서 한 번 씩 직접 설교하게 하는 것이다. 지역별 순회 설교(각 1회)와 함께 지역별로 후보자와 공식적으로 공개된 자리에서 다수가 참여하여 자유스러운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이런 선거운동 방식은 지역 간의 유대형성에도 유익할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부총회장 선거를 예장합동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서로 신뢰하고 화합하는 일종의 잔치로 만들자는 것이다. 새로이 부총회장과 총회 임원이 되신 분들이 전국의 성도들에게 소정의 선물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자유기고가: 문노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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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 돌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어려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방도는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14세기 초반에 대유행했던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절반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참혹한 질병이었다. 20세기 초반의 스페인독감, 20세기 중반의 홍콩독감 등도 지구촌을 괴롭혔고, 2000년도에 들어서서도 사스, 신종플루엔자, 메르스, 코로나19 등의 바이러스가 인간을 병들게 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전염병을 통하여 인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 전염병을 히브리어로 ‘데베르’라고 하는데 이는 ‘다바르’에서 유래된 말이다. 다바르는 ‘말하다, 선언하다, 경고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전염병(데베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다바르) 계신다는 뜻이다. 어떤 말씀일까요?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의 은혜 아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셔서 죄의 삯인 ‘사망의 속전’을 지불하셨다. 죄인이 속전을 지불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겸손히 나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어 이 ‘속전’을 지불한 자에게는 결코 전염병이 임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간음을 행하고, 불평, 원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두기 싫어하는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주변국인 앗수르, 바벨론, 메데, 바사를 통하여 그들을 징계하셨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과 짝할 때, 예수 안에 있지 않고, 밖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는 전염병으로 우리에게 ‘다바르’하고 계신다.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격동시켜 죄를 범케 했다고 돼 있다. 범죄한 다윗은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했다. 오늘날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이다. 그곳만이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곳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피난처요. 안식처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에는 어떤 질병도 전염병도 죽음까지도 이기는 권세와 능력이 있음을 알고, 믿고 그분께 돌아가자. 그런 사람에게는 전염병이 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로 돌아가는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바이러스는 힘을 잃고 물러갈 것이다. 코로나 질병이 창궐한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발라져 있는 자들에게는 질병도 재앙도 넘어간다. 그러나 예수 피가 뿌려져 있지 않은 곳, 예수 피가 묻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재앙은 피할 수 없는 전쟁과도 같다. 코로나를 통하여 예수 십자가로 돌아 온자에게는 놀랍게도 전염병은 오히려 축복이다. /분당벧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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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축시
다시 찾은 크리스마스카드 지형은 크리스마스카드를 잃어버렸다 수많은 소식이 바쁘게 오갔는데 크리스마스카드는 없었다 하얀 겨울 사랑으로 꾹꾹 눌러 그린 고운 꿈의 크리스마스를 언제 놓쳤을까 아랫목 앉은뱅이책상에서 머리 맞대고 그린 산타의 크리스마스를 어디서 잃어버렸을까 그렇게, 동화와 전설의 시간은 멈추고 시계의 시간에 매여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 어젯밤 꿈 창밖의 높은 하늘에 흐르던 별 하나 멈추며 오래 잊었던 소년이 보였다 그 옛날의 크리스마스카드가 떠올랐다 아, 참 다행이다 언젠가부터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여기면서 더 이상 내가 올라가지 않은 다락방, 앉은뱅이책상 서랍에서 빛바랜 카드를 찾았다 꿈과 사랑과 캐럴이 담긴 그 카드에 동화를 잊은 시간의 회한이 눈물로 떨어질 때 다락방 창으로 별빛이 내려앉았다 아, 갑자기 모든 게 다시 살아나고 소년과 소녀가 밝게 웃으며 춤춘다 다시 찾은 크리스마스카드에 쌓인 시간들이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를 노래한다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한다 (2013. 12. 24 늦저녁, 크리스마스의 축복을 전하며. 2020. 12. 17. 다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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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라(2)
2) 하나님은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는 사랑입니다. 요1서 4:9-1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요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보내어 주시고 십자가 선상에서 그 사랑을 확증하여 보이셨습니다. 롬 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 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은 한없이 용서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마18:21-22에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는 사랑, 끝까지 용서를 베푸는 사랑이십니다. 4)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신7:13-14에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 네가 복을 받음이 만인보다 우승하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복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시작이요, 방편이며,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그것은 번성케 하는 복이요, 후손의 복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환경을 축복으로 충만케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성경 본문은 두 계명을 사랑으로 일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13:10에서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사랑이 율법의 내용이요, 목적이요(롬10:4) 전부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부족을 풍성하게 채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랑은 율법의 종결이요, 성취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율법에서의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그래서 상담하실 때 율법의 끈으로 다시 속박시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고용인이 있습니다. 이 고용인은 법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계약된 대로 책임을 다하고 임금을 받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 고용인은 처녀이고 주인은 총각이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두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서 결국 결혼을 하기로 되었습니다. 부부가 되었습니다. 아내가 되는 순간 그녀는 이제 종으로서 끝을 맺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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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 진단과 전망
1992년 한중수교 이후 37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의 중국선교를 다시 진단해보 면서 향후의 중국선교는 어떤 방향으로 진행 되어야 할것인지 전망해 본다. 그동안의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조직 적이지 못하고 우후죽순 무분별하며 무계획적이라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개신교의 특성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중국이 개방되자 북방선교를 위해 교단과 선교단체 교회와 개인이 연합전선을 구축하지 못하는 개신교의 특성상 무조건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모습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조선족이란 매개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시작된 중국선교는 조선족교회가 밀집한 연변지역을 중심으로한 동북삼 성(흑룡강성,길림성, 요녕성)이 선교집중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언어와 문화 공산권 사회주의의 특성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열정만으로 출발한 준비 되지않은 선교이기에 기회비용의 부담이 컷으며 조선족 중심의 건축선교에 한국교회가 서로 경쟁구도로 가시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선교방식 즉 제자양육 보다는 가시적인 기준이 우선 하였다. 서로 협력하는 조화와 균형의 원리가 아닌 한국인 특유의 사고체계의 원리가 선교현장에 작동되었다고 볼수 있다. 중국 14억이 넘는 인구 가운데 200만 (0.001%)밖에 안되는 조선족 선교에 한 국교회가 전방위적으로 올 인한 것은 언어문제였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환율과 당시의 중국 경제상황도 선교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중국선교에 뛰어들 수 있는 선교적 생태계가 형성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의 중국선교의 환경은 사회주의 특성상 종교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데서 더 이상 선교가 불가능하기에 선교의 패러다임을 체인지할 때라는 사실이다. 이제는 매스미디어의 발달에 이어 SNS의 새로운 도구가 선교할 수 있는 최적의 생태계가 조성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2000년 들어 유학생이 교과부의 핵심정책이 되면서 빠른 속도로 유학생 수가 증가하고 있다. 특히 한류열풍과 함께 한국문화를 습득하고, 한국 대학과 대학원 진학, 취업을 목표로 한 한국어 연수 숫자가 증가추세에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들어와 있는 100만명이 넘는 국내 체류자는 물론 7만 유학생들 그리고 매일 유입되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선교문화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에대한 대비책이 시급하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선교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적용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 온 유학생들은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가 높고, 한국어가 용이할 뿐 아니라 선교가 제한되고 닫힌 본국에서보다 복음에 개방적이다. 한국 선교사들이 아직가지 못한 65개국 출신 유학생도 들어와 있어 주한 유학생 사역이야말로 소중하다. 현재 중국의 디아스포라는 전세계에 8,000만명을 넘고 있으며 유형 무형의 중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는 무궁무진 하다고 볼 수 있다. 유학생 선교사역의 성공과 실패는 교회의 투자에 좌우된다. 대형교회 유학생 사역자는 한국사회 전체에 선한 영향력과 선교목회역량, 종의 리더십을 가지고 큰 틀에서 사역에 투자하고, 중형교회 유학생 사역자는 차세대 일꾼을 잘 준비시키며, 소형교회도 신속한 목회철학과 프로그램 도입으로 유학생 사역이 가능하다. 목회생태학적으로 모든 교회가 연결된 것을 기억하고 각 교회 규모와 은사에 따라 서로 협력하는 선교문화 확립이 시급하다. /세계선교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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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절대적 중요성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창세기 첫 구절에서부터 시작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창1:1). 기독교인들은 이 구절을 통하여 태초에 창조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의 행위자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호세아 선지자에 의하면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매우 강력하게 요구하신다. 현대에 이르러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자들이 적지 않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인간들이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할 뿐이니, 땅에는 피가 피를 뒤이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호세아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호4:1-2)고 한탄하셨다. 서로 잘 아는 관계에선 쟁변할 필요가 없다. 창조주 하나님과 이 땅의 인간들이 쟁변하는 관계를 벗어나려면, 인간들이 진실하게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잊어버리겠노라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이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호세아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고 대언하였다. 그럼에도 현대에 이르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들이 제사장 직위를 차지하여 그 자신은 물론 일반 신자들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하고 있음은 통탄할 일이다. 하나님은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라 내가 그 소행대로 벌하며 그 소위대로 갚으리라”(호4:9)고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뜻에 따랐던 다윗은 이스라엘 12지파를 묶어 하나의 통일왕국을 세웠다(BC. 1010).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던 그의 아들 솔로몬은 세상에서 지혜가 가장 뛰어난 왕이었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해서 하나님에게 봉헌했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주변 국가에서 다수의 왕비들을 맞아들이고, 그들이 제 나라의 풍습대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홀히 하여 점차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되었다. 하나님은 직접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홀히 함에 경고하여, 솔로몬의 사후에 나라를 빼앗아 솔로몬의 신하에게 주시겠다고 선포하셨다. 현대사회에서 기독교의 문제는 성경 66권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전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 주장 때문에 기독교는 과학적 지식을 왜곡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거대한 현대문명을 구축한 과학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연구하는 과학을 통해서도 습득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과학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과학적으로 습득하고, 과학적 무신론자들과 쟁변하여 승리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여 과학적 무신론자들에게 패배한다면, 그들은 곧 하나님의 진노에 의하여 멸망될 것이다. /신학박사·케리그마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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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 돌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
-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어려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방도는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14세기 초반에 대유행했던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절반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참혹한 질병이었다. 20세기 초반의 스페인독감, 20세기 중반의 홍콩독감 등도 지구촌을 괴롭혔고, 2000년도에 들어서서도 사스, 신종플루엔자, 메르스, 코로나19 등의 바이러스가 인간을 병들게 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전염병을 통하여 인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 전염병을 히브리어로 ‘데베르’라고 하는데 이는 ‘다바르’에서 유래된 말이다. 다바르는 ‘말하다, 선언하다, 경고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전염병(데베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다바르) 계신다는 뜻이다. 어떤 말씀일까요?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의 은혜 아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셔서 죄의 삯인 ‘사망의 속전’을 지불하셨다. 죄인이 속전을 지불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겸손히 나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어 이 ‘속전’을 지불한 자에게는 결코 전염병이 임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간음을 행하고, 불평, 원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두기 싫어하는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주변국인 앗수르, 바벨론, 메데, 바사를 통하여 그들을 징계하셨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과 짝할 때, 예수 안에 있지 않고, 밖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는 전염병으로 우리에게 ‘다바르’하고 계신다.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격동시켜 죄를 범케 했다고 돼 있다. 범죄한 다윗은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했다. 오늘날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이다. 그곳만이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곳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피난처요. 안식처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에는 어떤 질병도 전염병도 죽음까지도 이기는 권세와 능력이 있음을 알고, 믿고 그분께 돌아가자. 그런 사람에게는 전염병이 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로 돌아가는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바이러스는 힘을 잃고 물러갈 것이다. 코로나 질병이 창궐한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발라져 있는 자들에게는 질병도 재앙도 넘어간다. 그러나 예수 피가 뿌려져 있지 않은 곳, 예수 피가 묻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재앙은 피할 수 없는 전쟁과도 같다. 코로나를 통하여 예수 십자가로 돌아 온자에게는 놀랍게도 전염병은 오히려 축복이다. /분당벧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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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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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 돌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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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
- 20세기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크게 영향을 준 선교 운동을 꼽는다면, 빌 브라이트박사의 대학생 선교운동·빌리 그래함박사의 대중전도운동·맥 가브란박사의 교회성장운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가지 운동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크게 성장되고 세계선교의 큰 부흥의 불길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세계 현실은 어둡고 암울하기만 하다. 세계 도처에서 기근과 굶주림, 영양실조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살인과 방화, 강간, 테러, 에이즈, 전쟁 등의 문제가 산적해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교회는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 나는 10단계의 교회운동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 한국교회가 각 단계별 운동들에 최선을 다할 때 우리 사회에 산적한 문제들을 치유할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줄로 믿는다. 1단계는 교회에 모이기를 우선 힘쓰는 운동이다. 성경에는 오순절의 예를 비롯해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구절이 여럿 나온다. 우선 우리가 모이기를 힘써야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 2단계는 온 교인들의 뜨거운 합심기도 운동이다. 성경에는 기도운동에 관한 말씀이 여러 번 강조되었다. 헨리 위드비쳐목사는 아침의 기도는 하나님의 자비와 축복의 보화 창고문을 여는 열쇠요, 저녁의 기도는 그의 보호와 안전의 날개라고 말했다. 하나님께 대한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3단계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읽기 운동이다. 지금부터 우리 모든 교인들이 매일 성경을 읽자는 것이다. 가령, 새벽기도회에서 성경 3장씩 읽고 합심기도하고, 개인기도시간을 갖고 자유롭게 헤어지는 방법도 있겠다. 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의 핵심을 깨닫고 구원받는 감격이 있어야 한다. 4단계는 흩어져 전도하는 훈련을 시킨다. 교회에서는 전도이론과 실제현장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과 사명을 깨닫고 전도에 임하게 한다.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전도와 말씀이 바로 훈련인 것이다. 5단계는 교회주차장과 장막터를 넓히는 운동이다. 로버트 슐러목사는 교회가 성장하려면, 살아있는 말씀선포·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넓은 주차장과 아름다운 교회 모습이어야 한다고 했다. 모두 힘을 합하여 주차장을 확보하고 장막터를 넓힌다면 교회성장에 큰 힘이 될 것이다. 6단계는 가정마다 ‘성경선물하기 운동’을 벌인다. 개교회 성장을 위해 성경보내기 선물운동을 조용하면서도 힘차게 펼쳐나간다면 과거 전도방법보다는 훨씬 더 나은 결과를 얻으리라 확신한다. 7단계는 내 이웃을 내 가족처럼 돌보기 운동을 한다. 현대의 모든 개인과 가정은 무엇인가 불안하고 쫓기는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역시 주님의 사랑이요, 돌봄이다. 성경을 보낸 그 가정에서도 성경을 받은 그 가정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내가족처럼 사랑하고 돌본다면 반드시 주님께로 구원될 것이다. 8단계는 강권하여 교회로 인도하기 운동을 한다. 교회는 여러 절기들을 이용해 교인들을 교회로 초청할 수 있다. 9단계는 국내 여러 곳을 답사하여 배우고, 돕는 운동을 한다. 아직도 국내에서는 선교하고 교회를 세워야하기 때문에 우리는 준비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 10단계는 세계 여러 곳을 현지 답사하여 배우고 돕는 운동을 한다. 이제 우리 모든 교인들은 앞장서서 국내선교뿐 아니라 국외선교에도 열심을 내야 한다. /성경국제후원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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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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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한국영해의 닻
- ▲ 정성구목사 1964년 나는 외국 유학의 꿈이 있어서, 종로에 있는 시사영어학원에 등록해서 영어강의를 들었다. 타임지를 읽고 해석하는 과목이었다. 그때 강사는 변영태씨였다. 그는 고려대 영문학과 교수와 서울대 교수, 외무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아서인지 만년에 영어학원 강사로 겨우 생활을 하였다. 마침 변영태선생의 가족이 내가 일하던 동산교회에 출석했다. 동산교회는 박윤선목사와 김성환목사가 목회했고, 나는 당시 교육전도사로 봉사했었다. 변영태선생은 영어의 달인인 데다가 중국어도 능통했기에,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발탁되어 외무장관으로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외무장관으로서 제네바 회의를 비롯해 6, 7차 U.N. 총회 한국대표로서 이승만대통령의 명을 따라 ‘한미방위조약’을 만들어 서명한 탁월하고 진실한 외교관이었다. 그가 얼마나 올곧고 정직했으면 외국 출장에서 돌아오면 남은 출장비를 반드시 국고에 넣었다. 친척들이나 자녀들의 불평은 그렇게 높은 직책에 있으면서 그들을 도와주지 않자, 모두 그를 배신하고 욕을 했다. 그래도 그는 가난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직과 진실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살았고, 만년에는 병든 아내를 위해서 직접 연탄불을 갈 정도였다. 그는 건국 초기에 한국외교의 기초를 튼튼히 했지만, 특히 독도 문제에 대해서 철저하게 일본의 침략적 계획을 물리친 일이다. 1954년 10월 28일 우리 외교부에서 반박 구상서를 작성했다. 즉 분쟁을 국제 사법재판소에 부탁하자는 일본정부의 제안은 사법적인 가장으로서 허위주장하는 확인을 국제사법재판소에 구하여야 한다는 이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무런 분쟁이 없는데도 유사적, 영토적 분쟁을 조장하는 것은 바로 일본이다. 변영태선생은 독도가 영토 문제가 아닌 역사 문제라는 논리를 폈다. 1954년 9월 24일 구상서에서 “한국은 40년 이상이나 제국적 일본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그의 권리가 약탈당하였다는 사실을 일본에게 환기시키는 바이다. 일본정부가 분명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침략은 차차로 진행되다가 1910년 한국의 일본병합으로서 그 정점에 도달 하였다 … 시네마 현청이 독도를 자칭하여 그의 관할권에 포함시킨 것은 이러한 협정의 1년 후이다”며, “과거에 있어서 일제 침략의 최초로 희생된 독도를 또다시 점유하려 함은 대일강화조약을 파기하고 한국을 재침하려는 의도적 발로이다”고 했다. 변영태선생은 그의 꼬장꼬장하면서도 능숙한 외교로 이승만대통령의 오른팔이 되어 독도를 지켜냈다. 그는 구체적으로 1954년 독도에 독도 등대를 설치하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로태극기와 한국령 표지석을 설치하여 독도가 한국땅인 것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역사가들이 자유당과 이승만 대통령을 폄하하고 독재의 화신이니, 친일이니 하는 오명을 덮어씌우고 있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변영태 외무장관 겸 국무총리의 나라사랑과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 한미방위조약을 만들어 미국의 우산 아래 오늘의 번영된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기초를 놓았고, 독도를 확실히 지켜낸 것을 오늘의 세대는 알는지 모르겠다. 나라사랑을 위한 변영태선생의 애국심과 그의 하나님 중심 사상과 정직과 진실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70여년의 세월이 흘러서 오늘날은 자칭 애국자가 많지만, 그 시대에 자유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외교적 노력과 하나님 앞에서 양심과 정직으로 살려는 지도자가 그립다. /총신대·대신대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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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한국영해의 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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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정하여
- 감사하게도 빈부, 귀천, 남녀, 노유, 유무식을 막론하고 공평하게 일 년은 365일, 한 달은 30일, 하루는 24시간, 한 시간은 60분, 차별이 없다.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사용자에 따라서 출발은 같이 하여도 십 년 후, 이십 년 후의 결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생긴다. 결심이 쉽게 무너짐으로 실망하여 주저앉게 된다. 다음부터는 아예 계획조차도 세우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결심이 삼 일 후에 무너진다 하여도 삼 일이라도 안 한 것 보다 낫다. 그리고 반복하여 삼 일이 지난 후 또 결심하고 또 결심을 한다면 매우 효과적일 것이다. 공자의 삼계도에 이르기를 인생의 계획은 어릴 때에 있고 일 년의 계획은 봄에 있고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다고 했다. 어렸을 때 공부하지 않으면 늙어서 아는 것이 없게 되고 봄에 밭 갈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으며 새벽에 일어나지 않으면 그 날의 할 일이 없는 것이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였다. 첫 번째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 두 번째 기도하며 살겠다. 세 번째 하나님만 섬기며 살겠다. 그대로 실천하며 살았다. 슈바이처박사는 21세 때 결심하기를 30세까지 학문과 실력을 준비하여 30세 이후부터는 남을 위하여 봉사하며 살겠다고 했는데 그대로 아프리카에 가서 일평생을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섬기며 살았다. 미국의 재벌이 된 킴슨에게 가난한 친구가 성공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킴슨은 네 가지 수칙을 말해주었다. 첫 번째 주일을 성수했고, 두 번째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고, 세 번째 술을 마시지 않았고, 네 번째 십일조를 온전히 드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가난한 친구도 그대로 실행에 옮겼는데 십년 후에는 크게 성공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김유신장군이 기생집에 자주 드나든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네가 우리집 가문을 빛내고 나라를 위하여 큰 일을 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기생집이나 출입을 하고 주색잡기에 빠져서야 되겠느냐고 엄히 꾸짖었다. 김유신장군은 어머니에게 다시는 안가겠다고 약속을 하였는데 타고 다니는 말이 기생집으로 습관적으로 가니 기생 천관이 반가이 맞이했으나 장군은 말에서 내려 칼을 빼어 말의 목을 베고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사람은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위인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결단력이 대단했다. 신앙생활 하는데도 지조가 있어야 한다. 금년에는 후회할 것 없는 알차고 보람되게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이웃에게는 덕을 세우고 모든 면으로 성장하고 성숙한 한해가 될 수 있도록 또 결심하고 또 결심하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린도전서 15:58) /월드부흥사협의회 총재·희락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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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정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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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무엇을 전할 것인가
-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다. 1919년 3월 1일을 전후로, 시기는 그해 5월 말까지 또는 그 이듬해 3월 말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물론 해외에 이주해 있던 동포들에게까지 확산되었던 운동이다. 50명 이상이 참여한 시위만 1,500여 회를 넘었고, 참여 연인원은 202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1천 800만 정도였으니 총인구의 10%가 넘는 참여는 우리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고, 우리 민족이 역사적 사건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 근대화를 여는 시민혁명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3·1운동은 이런 기독교적 ‘애국’, ‘애민’의 기초에 기인(起因)하였다. 한국교회는 만세운동 이전에도 독립운동의 싹은 트고 있었던 최초의 독립선언이라 할 수 있는 2·8학생 독립선언을 후원하였고, 3·1독립선언의 기초자인 최남선이 고백한대로 3·1독립선언의 기초이념도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3·1운동은 한국교회가 동력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3·1운동 전개과정에서 보면 교역자들뿐만 아니라 의식 있는 평신도들에 의해서 조직화되어 만세 시위를 벌인 경우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운동의 초기단계에서부터 모든 흐름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였으며, 전국적으로 확산과정에서도 교회는 전국의 조직과 지도자를 제공하였다. 3·1운동으로 인해 한국교회가 지불한 대가는 참으로 컸다. 교회는 평신도들 포함한 목사, 장로, 전도사, 교사 등 교역자들까지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동하였으므로 일제의 주목을 받아 그 핍박과 피해도 매우 많았다. 탄압과 학살, 파괴, 방화 등 만행의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그 대표적 사례가 1919년 4월 15일 일어난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방화사건이다. 3·1운동 당시와 지금의 한국교회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그러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 당시 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고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그 의무와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민족화합을 이루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우리 민족의 공공성에 대한 의무를 감당하는 일에는 교파를 초월하여 물론 타 종교인과도 연대하고 협력하였다. 그렇게 하며 복음과 정의를 위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진정한 축복으로 여겼다. 이런 점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한국교회는 개인주의와 개교회주의로 변질되어 분열된 모습을 극복하고, 어떤 이유로도 하나된 모습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 하겠다. 3·1운동의 바람을 다시 불어오게 한국교회가 나서야 한다. 아니, 3·1운동의 정신을 함양하고 고취시키고 계승하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3·1운동의 정신은 단순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을 갈망하던 신앙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며 지킨 정신이다. 민족의 독립과 자유, 정의와 평화 그리고 후손들의 행복을 위하여 과감히 일어섰던 신앙의 선배들, 한국교회의 3·1운동 참여와 역할은 우리 민족 모두에게, 특히 기독인들에게 민족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봉사한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기념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와 연합기관, 그리고 각 교단이 하나된 모습으로 100주년대회를 치뤄 8천만을 섬기며 통일시대를 열고 다시 도약하는 기념비적 사건이 되기를 기대한다. 거룩한 교회로,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다짐하는 원년이 돼야 한다. /한국교회건강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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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무엇을 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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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혼자 0시 예배 드려요
- ▲ 전태규목사 나는 평소 기쁘게 살자, 열심히 살자, 낙심하지 말자. 이 세 가지를 품고 살아간다. 특별히 낙심하지 말자는 마귀가 좋아하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명이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귀를 기쁘게 할 수는 없다. 우리교회가 성전으로 사용하는 건물을 매각할 때는 나는 절대로 이단한테는 건물을 매각하지 않겠다는 말을 지난 20년 동안 성도들에게 이야기해 왔다. 우리교회 옆에도 그런 단체가 거주해 있기에 나는 더욱 그러했다. 오래전 인천 성서 신학원에서 영성부흥사역대학원이 시작될 때 입학생중에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조용히 생각해 보니 기독교 언론에서 가끔 보았다. 그와는 이렇게 만남이 이뤄졌다. 내가 보아온 강 목사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열심히 있고 긍정적이다. 남에게 대접을 잘하고 늘 남편을 높여준다. 남편을 호칭 할 때 언제나 사부님 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런 말을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다. 또한 축복도 많이 받았다. 먼저는 남편을 잘 만났고 자녀들이 훌륭하다. 1남 2녀를 두었으니 요즘 말로하면 금메달감이다. 물질의 복도 많이 받았다. 시흥에 가면 목사님 집이 여러 채 보인다. 나는 평생을 주의일해도 내 이름으로 된 집이 하나 도 없으니 가끔씩 그가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를 보면 욥이 떠오른다. 축복 받은 부분은 같으나 강 목사에게 시련이 왔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아마도 욥보다 복을 더 받았나 보다. 영성 모임을 가질 때 모인 집에 감사의 표시를 조금씩 한다. 드린 헌금으로 쓰면 남는 것이 없다. 그럴 때 그는 개인적으로 그것을 부담한다. 얼마나 요긴한 그릇인가! 누구 말대로 물질 내는 거짓은 없다는 말이 있다. 모든 시험은 거의 다 물질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나도 살아오면서 부지런하다. 열심 있다는 소리를 제법 들었다. 모임에 더러 못나가도 늘 바쁘게 사는 사람이라 이해하여 주는 편이다. 그렇지만 내 자신을 내가 알기에 말하기는 좀 부끄럽다. 나는 글을 쓰다가 또한 텔레비전을 보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해 그 자리에서 잠이 들기도 하고 여름이면 새벽에 교회서 기도하다가 잠이 들 때도 있다. 내 주변에는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다. 한 세대를 내가 모신 어느 감독님도 어느 때나 전화를 받으신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연세가 드시면서 약간은 알게 되었다. 중앙교회서 목회하시다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도 여의도에서 시내교회까지 왕래를 하셨는데 부목들도 그가 언제 주무시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내 친구 고신일 감독도 연락을 하면 곧 바로 답이 온다. 강 목사는 아침마다 오늘의 말씀을 보내주면 언제고 즉시 할렐루야! 아멘 이라고 답을 보내온다. 늦는 법도 없고 군더더기도 없다. 잠을 자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가끔씩 내가 묻는다. 목사님은 언제 주무세요? 저 혼자 0시 예배 드려요 감사합니다. 편히 쉬세요. 이렇게 답이 온다. 기도하는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아직은 이 나라가 희망이 보인다.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 7천 명을 예비하셨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실감이 든다. 이사야를 통해 야곱에게 주신 이사야 40장 28~31절 말씀이 떠오른다. 오늘날 피곤한 사람들이 세상에 참 많다. 여러 가지 운동이나 보약으로 풀어보지만, 몸의 유익보다는 부작용이 더 많다. 하나님 안에서의 숨어있는 능력을 깨닫는다. 오 주님, 새해에는 더욱 주의 여종의 기도를 들으시고 더 크고 귀하게 사용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기도드린다. /서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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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역설
- ▲ 서충원목사 종교개혁의 영성은 깨어짐의 영성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며 나의 의는 더러운 옷이며 나는 절망적이라는 처절한 자기인식에서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과의 조우가 일어난다.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겸손한 자는 높아진다. 의인이 되기 위해 먼저 죄인 되어야 하고 건강한 자 되기 전에 먼저 병든 자 되어야 한다. 잃은 자가 찾을 수 있고 가난한 자라야 부요케 하는 은혜를 입는다. 영성은 무엇보다 영혼의 밤의 경험이며 십자가의 저주의 경험이다. 모든 것에 형통한, 고통의 깊이를 모르는 인생만큼 영적으로 피상적이고 천박한 인생은 없다. 가난을 모르고 절망을 낯설게 여길 만큼 잘 나가는 인생이 부러울까? 어불성설이다. 인생의 고난과 좌절이야말로 영적인 보화의 광맥이 아닐 수 없다. 탕자의 타락과 심연의 경험이 없었어야 할까? 탕자가 아버지의 큰 사랑의 경험을 맛본 것이 그의 이전의 타락과 절망 없이도 가능할까? 탕자의 타락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가는 길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우연한 것일까? 잃음 없이는 찾음도 없고, 떠남 없이는 돌아옴도 없다. 찾음이 잃음을 전제한다고 해서 잃음의 찾음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잃은 자들 중 찾지 못한 이들은 무수하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해서 떠남의 악이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다. 떠났다 돌아온 자에게 떠남은 악이며 돌아옴은 선이다. 악이 선을 낳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악이 선을 위해 한 퍼즐이 된다는 것이 십자가의 역설이다. 후회할 수밖에 없는 실패인데 그 안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하나님의 숨겨진 계획이 있었다는 것은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신비이다. 이 역설을 알기에 우리는 이제까지의 인생의 실패와 심연에로의 전락의 경험을 은혜의 빛 아래서 본다. 그 전락이 이 고결한 사랑의 발견을 위한 준비였다니 이해할 수 없는 역설과의 마주침이다. 그런데 의인이면서 어찌 탕자의 감각을 유지하는가? 역설적인 사실은 바로 의인이기에 탕자일 수 있는 것이다. 의인은 하나님의 긍휼의 빛 가운데 사는 자이고 그는 자신이 더욱 의인이 될수록 자신의 더러움과 탕자임을 절감한다. 외적으로는 더 의로워지나 내적으로는 자신의 죄인 됨을 더 깊이 느낀다. 여기에 주 가까이 가면서 더욱 탕자로서의 자기인식이 깊어지는 역설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 함은 우리의 의의 불완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로 인해 완전한 의인보다 더 깊이 사랑 안으로 들어감을 의미하기도 한다. 전적 부패의 종교개혁의 가르침은 자신의 불완전한 삶에 대한 정당화로 쓰이지 않고 죄인을 향한 무한한 사랑 안에 사는 자녀의 기쁨을 말해준다. 아 놀라운 사랑의 신비여! 어메이징 그레이스여! 의인이 자신의 의로써 누리지 못할 사랑의 신비를 절망적인 죄인인 우리가 받아 누리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나 같은 죄인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다 안다 할 수 있을까? 더 깊이 그 사랑 안으로 들어가리라. 그 사랑의 깊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더 깊은 영혼의 밤의 경험으로 주께서 이끄시길 기도한다. 더 낮아져야 하고 더 산산히 깨어져야 하고 더 탕자처럼 무너져야 한다. 위로 받기보다 먼저 슬픈 자 되어야 한다. 낮은 자들과 같아지고 죄인들과 더 많이 만나고 그들의 슬픔과 낮아짐에 동참해야 하리라. 우리는 지금 너무 행복하고 너무 부요하고 너무 자족하다. 탕자의 가련함이 먼 과거의 추억으로 희미하지 않은가? 위기의 신호이다. 오히려 탕자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형의 떳떳함과 분노보다 더 하나님의 나라에 가깝다. 더 낮아져야 하리라. /샬롬누리영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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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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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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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신앙과 부활의 삶
- ▲ 이경욱목사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고난주간을 보내고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는 기쁨의 부활절이 다가왔다. 모진 고난과 고초를 겪으신 그리스도께서 사흘만에 무덤 문을 열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날이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죄를 모두 지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삯인 죽음을 이기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의 굴레와 사슬을 끊어주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부활절이 되면 교회에서는 서로 달걀을 주고 받는다. 거리에서 부활절 달걀을 시민들에게 나누어주는 모습은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기독교 풍습이라 할 수 있다. 달걀을 나누는 것은 죽은듯이 보이는 달걀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부화하여 병아리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통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달걀은 부활절의 상징이 되었다. 달걀은 그냥 가만히 놔두면 생명을 느낄 수 없고, 생명이 탄생 할수도 없다. 어미닭이 오랫동안 따뜻하게 알을 품어주어야만 그 속에서 생명이 자라고 병아리가 탄생할 수 있다. 어미닭의 품을 벗어난 달걀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죄로 인해 이미 죽은 달걀과 같은 상태의 인간은 혼자서는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어미닭의 품 안에 있어야 병아리가 태어날 수 있듯이, 인간도 주님의 품 안에 머물러야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신 것을 의미한다. 죄인인 우리를 부르시고 자녀 삼아주시며 의인이라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이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우리 믿는자들의 부활인 것이다. 부활은 단순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몸을 가지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 바로 부활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기록은 예수님이 전혀 다른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셨음을 말해주고 있다. 빈 무덤에서의 여인들과 엠마오 도상에서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알아보지 못했고, 제자들은 홀연히 나타나신 예수님을 유령이라며 두려워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던 스승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몸을 가진 새로운 사람이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며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기독교인의 삶은 부활의 삶이 되어야 한다. 죄된 과거와 결별하고 완전히 변화된 인간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불완전하기에 홀로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달걀이 어미의 품 안에 있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 있어야만 새로운 생명을 얻는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 “나의 안에 거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그 분의 품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가 가진 부활의 신앙이 부활의 삶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부활절을 맞아, 우리 모두 부활의 신앙을 부활의 삶으로 승화시키는 기독교인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예장 대신측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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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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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신앙과 부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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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도산선생을 기억하다
- ▲ 이효상목사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한말 일제하에서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밤낮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던 위대한 애국자이자, 민족의 지도자요 큰 스승이다. 한국교회는 그의 정신을 계승하며 민족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고 화해와 협력에 기반한 통일조국을 이룩하는 데에 힘써야 할 때이다. 도산이 기독교에 들어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나름대로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것은 늦어도 1895년으로 보인다. 복음을 받은 이후 도산은 곧 기독교의 진리를 전도하고 교회를 건립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강서군 탄포리교회는 도산이 평양에서 이곳으로 와서 전도하여 믿게 된 이들이 설립한 것으로 그들이 안창호의 집에 모여 교회를 성립시켰다. 도산은 190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상항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피선되어 교민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에 비난받던 한인사회가 몰라볼 정도로 정화되고 미국인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었다. 1907년, 29세의 나이로 일본을 거쳐 귀국한 도산은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성학교와 마산도자기회사 및 태극서관을 일으키는 등 국내민족운동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대성학교 학생들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지도하였다. 1910년 4월 중순 중국 청도에 이르러 ‘청도회담’을 개최하고 다시 러시아 행 비자를 받기 위해 북경에 갔다가 상해·연태·청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니콜리스크의 최관흘 목사를 방문, 그와 함께 국민회 확장과 기독교 전도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3·1운동이 발발했을 적에 도산은 1919년 3월 13일 북미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위원회 석상에서 〈3·1운동을 계승〉이라는 제목으로 연설 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지휘명령 아래서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이라는 의지를 표명하는 한편 종교계(기독교계)가 한국 기독교도의 참상을 널리 고하고, 위하여 기도하며 비인도적인 일본인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해야 할 것을 당부하였다. 도산은 ‘우리 2천만 동포가 모두 손에 신약전서를 한 권씩을 가지는 날에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외쳤는가 하면, 민족의 희망을 기독교에서 발견한 선각자이며 기도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특히 도산의 독립운동은 다른 어떤 독립운동 지도자들보다 큰 틀과 구체적 계획을 갖춘 뛰어난 경륜이 담겨 있었다. 그는 좌우파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통일단결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그는 사랑의 보편적인 가치를 갈구했던 기독교인이였다. 순국 80주기를 맞아 도산 선생은 조국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의 본보기이자 국가 지도자의 귀감으로 선생의 신앙인격과 교훈은 시대성을 초월해 우리 속에 현존하고 있다. /한국교회건강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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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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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도산선생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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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기준은 성경에 있다
- ▲ 문성부 목사 물질 문명이 발달한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사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기준을 잘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한번 정해놓은 법칙을 모르고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제도를 정해놓고 불완전한 인생을 살아가다 보니온갖 병패와 스트레스 우울증 암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은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이 법칙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결코 자신이 죽음에도 억울하거나 손해 본다는 생각을 하지는 안을 것이다. 왜 못 받아들이는가? 여기서는 믿음을 요구 한다. 내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고 그 분께서 삶과 죽음을 주관하심을 믿을 때 인생이 평안을 누린다. 오늘 날 기독교인을 보자 봉사를 많이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했어도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비방을 받는 것은 잘 한 일을 비방하지 않고 그 다음에 행동이 잘 못 되는 것 때문이라고 본다. 성경에 기준으로 살지 안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을 기준으로 바른 삶을 성도들이 살아주고 본이 되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때 좋은 영향력을 반드시 끼치게 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사람은 많이 있다. 기독교 인 이라면 공감을 한다. 어떠한 방법으로 하여야 되는 가 방법이 나와야 됩니다. 저에게 이런 마음을 주셨다. 말씀에 반응하여 전적인 순종이 필요한데 그 점이 잘 안 되고 있음을 본다. 그 문제는 온전히 하나님의 원하는 믿음의 기준치 안으로 못 들어왔기 때문에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동일하다. 우리 각자는 성경에 기준으로 성령을 받았는가? 확인하고 확증하는 삶을 매일 해야한다. 성도가 변화가 없고 인도자가 변화가 없다면 한번 돌아보고 나에게 성령이 있는지 확인하고, 구분이 잘 안되면 먼저 성경을 기준으로 100%로 하나님은 성경대로 이루시는데 나는 잘 모르고 안일하게 믿음생활하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는지 뒤돌아 봐야한다. 나도 27년 전에는 성경에 기준을 두지 않고 믿음생활을 했다. 그 결과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로 믿기는 했는데 15년을 헛되게 교회를 다닌 결과가 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천국 가는 믿음이 확신이 없었기에 기도가 이루어 졌다. 그때부터 성경이 믿어졌다. 그때에야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역사 하시고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을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전에는 믿음이 확신이 없으니까 술도 즐기고 세상에서 즐겁게 사는 것이 낙이었다. 그런데 성령님의 임재 후에는 삶이 180도 바뀌었다. 성령 임재 후에 첫 번째 생각이 이제는 죽어도 좋다는 것이었다. 내 죄가 머리털만큼도 안남기고 다 나를 대신해서 갚아주신 것이 믿어 진 것이다.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이 내 마음에 100%로 의심없이 믿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이루어지고 온전히 믿어 졌다. 머리로 아는 믿음이 마음으로 믿는 믿음이 되어 졌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천국 가는 백성이 됐다니 너무나 기뻤다. 눈앞에 부러운 대상이 다 사라졌다. 성경이 기준이 된 것이다. 영혼을 살리는 일 외에는 가져갈게 없구나 확신이 왔다. 나처럼 15년을 다녀도 확신이 없이 성령을 받지 못한 분들에게 알려야 되겠다고 결심하는 용기를 하나님이 주셨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하신 말씀대로 내 영혼도 귀하다면 다른 사람에 영혼도 하나님은 너무도 귀하게 여기고 계심을 알기 때문에 천명 앞에서 인도하든 한 영혼 앞에서 인도하든 동일한 심령으로 전하고 있다. 사경회 끝나고 간증을 들을 때는 말씀의 역사 하셔서 변화 받은 모습을 보며 너무나도 감사가 넘친다. 바른 믿음은 성경을 성경답게 전하여 줄때 하나님의 원하는 기준안에 들어오도록 인도 할 때 영혼이 변화를 받아 개인이 변화되고 교회가 변화되고 대한민국이 변화되고 세계가 성경을 기준 삼을 때 각 나라에 복음이 임하고 평안을 누리는 축복된 삶을 전해준다. 부활의 믿음이 지구촌에 이루어 질 줄 믿고 기도한다. /기감연합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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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기준은 성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