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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만종(晩鐘)의 감사
       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만종(晩鐘)이라는 그림의 주제는 ‘감사’이다. 밀레의 만종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감사의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첫째로, 고개 숙인 감사이다.만종의 화폭에 저녁기도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감사를 아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다. 반면에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다. 사람은 가진 지식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높은 지위 때문에, 또는 종교적 경력 때문에 교만해질 수 있다.    만종에 나오는 사람들은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니고 종교적 고위층도 아닌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 하루의 삶을 감사하고 있다. 열심히 일할 터전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건강을 주셔서 활동하게 하심도 감사하고 있다. 고개가 숙여지면 고난을 당해도 감사할 수 있고, 시련을 만나도 감사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로, 말 없는 감사이다. 만종의 그림에서 우리는 고개 숙인 채, 입도 다문 채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말이 없다는 것은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감사이다.    가슴 저미는 감사의 마음이 있다면, 오히려 할 말이 없게 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9장 15절에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할 말을 잃었다는 것이다. 진정한 감사는 입에서 나오지 않고 마음에서 나온다.    셋째로, 함께 하는 감사이다.만종에는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고개 숙인 모습이 있다. 나 혼자가 아닌 이웃과 함께, 한마음으로 드리는 공동체적 감사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웃이 보여야 한다. 남의 불행을 나의 감사의 조건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고, 함께 복 받고, 함께 누리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도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수직적인 문화만이 너무 강조되고 있다. 즉 나와 하나님밖에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수평적인 생각, 즉 이웃이 보이고 귀하게 여겨지는 신앙이 아쉽다. 불신자들은 교회의 몸집을 불리는데 동원되는 수단이 아니다. 그들 자신이 교회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넷째로, 고난 속에서의 감사이다. 만종이라는 그림의 배경은 가난한 부부의 감사의 모습이다.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의 감사의 모습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이는 물질이나 명예가 주어질 때 하는 감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무엇 때문에 하는 감사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어도 근원적인 감사를 드리는 귀한 감사의 모습을 배워야 하겠다.    일부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만종은 원래의 그림에서 수정된 것이라고 한다. 즉 가난한 부부의 앞에 놓인 바구니에는 본래 감자가 아니라 죽은 아기의 시체가 그려졌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그림 속의 부부의 모습은 슬픔이 아닌 감사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아이를 잃은 슬픔조차도 그들의 감사의 마음을 빼앗지 못하였다. 그 슬픔조차도 가슴에 묻고 두 손 모아 조용히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에서 참 신앙인의 자세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 속에서도 감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요, 다니엘과 세 친구의 감사요, 바울의 감사였다. 만종이 가르쳐주는 진정한 감사의 자세를 배우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다./한국찬송가개발원 원장·서울장신대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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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1-05
  • 잘못된 감사, 잘못된 기도
       올해도 추수감사의 절기를 맞았다. 이 계절에 감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추수감사’는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지상의 양식에 대한 감사만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오히려 내 영혼을 먹이고 입히시며 무시로 생명의 양식을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함을 잘 안다. 그러면서도 이 종은 오늘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세상을 구하며 걱정하는 부끄러운 죄인이다.    예수님이 나의 창조주요 나의 구원주이심으로 감사하기보다는 나의 현실의 문제를 들어주시는 해결사이심으로 감사하는 한심한 종이다. 잘못된 기도를 들으시거나 잘못된 감사를 받으시는 주님이 아님을 뻔히 알면서도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성경은 감사의 책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감사’를 가르치고 언명하시는 책이 성경이다. 감사를 권면하는 성경 말씀이 많지만, 시편 136편은 1절부터 26절까지 전체가 “감사하라”는 명령을 반복하고 있다. 이 시편은 매 절을 “여호와께 감사하라...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는 반복법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감사(感謝)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에서 인자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그 사랑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노래하면 더 실감나고 더 피부에 와 닿는다. ‘헤세드’는 인자의 의미도 있지만, ‘은혜’, ‘은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은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모궁에서 나온다. 은혜는 어머니의 사랑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젖이다. 그 구체적인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죄인(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그런데, 인류 최고의 감사시인 시편 136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른바 ‘먹고 마시는 문제’로 감사하라는 언명은 딱 한 번밖에 없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5절) 그 외에 모든 절들이 “하나님이 참 신이심으로 감사하라”(1절~3절),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으로 감사하라”(4절~9절),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주이심으로 감사하라”(10절~24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이 언명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봐야 한다. 우리의 감사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진정 참 신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가? 하나님이 진정 내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가? 하나님이 진정 내 구원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가? 아니면 오늘도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며 그것이 충족됨으로 감사하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도 마찬가지다(마태복음 6장 9절~13절).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 사함과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기도하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구하는 감사의 계절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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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1-04
  • [정론] 종교개혁과 변화 그리고 경건
       2024년은 종교개혁 507주년이 되는 해이다. 종교개혁은 비진리에 대한 저항과 개혁이 개신교회의 본질임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선언한 이후 신학운동은 16세기와 17세기를 거쳐 유럽 전역에서 꽃을 피웠고, 칼뱅의 『기독교강요』는 프랑스와 영국, 스위스를 비롯한 전 지역에 영향을 주었다. 종교개혁은 프랑스의 위그노와 영국의 청교도 신앙의 토대를 구축하여 영적 부흥을 이끌었다. 또한 근대 자유민주주의와 경제 자본주의의 기반을 구축하는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여, 중세의 봉건적 전통과 구전문화의 잔재를 제거하고 새로운 시대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기독교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이루었으며, 산업혁명은 물론 유럽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를 변혁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특히 성도들에게 영적문화의 충격과 함께 성도들의 세계관과 예배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일으켰다. 종교개혁은 교회내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형성하면서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 경건한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종교개혁을 통한 교회의 변혁은 크게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교회 예배 문화의 변화이다. 교회의 예배가 단순해지면서 성만찬 중심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말씀 중심 곧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메시지 전달에 초점이 맞추어 졌다. 종교개혁을 바탕으로 평신도들이 이해하기 힘든 라틴어가 교회 내에서 사라지고 일상적인 언어들이 사용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사제와 성가대원의 전유물이었던 교회음악의 보편화이다.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인식하에 회중들은 찬송을 부르게 되었고, 성전 예배 중심에서 삶의 영역을 중심으로 한 예배로 예배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었다. 두 번째는 교회내의 비성경적인 요인들을 제거하고 성경에 기초한 기초신앙교리 교육과 예배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교회 내의 신과 성인의 상이 우상숭배임을 적시하고, 이러한 것들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됨을 비판하고 제거하였다. 종교개혁을 통해 변혁이 일어난 교회에서는, 개혁교회의 기초인 성경을 중심한 신앙과 생활이 강조되고 교회안의 거룩한 공동체와 믿음의 형제들로 채워지면서 다양한 상처들이 치유되기 시작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함으로 자유와 평등사상을 일으켜 종교, 사람의 의식을 평등화하고 민주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칼빈은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더 발전시켜 예정설을 주장하였고, 성속이원론과 사제주의에 반대하여 모든 노동이 거룩하다는 직업소명론을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은 새로운 사회질서를 정착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루터와 칼빈에 의한 종교개혁은 많은 성과를 이루어냈지만, 개신교와 가톨릭의 전쟁과 종교가 공적영역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적영역으로 밀려나는 한계도 드러냈다.    종교개혁 507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와 성직자, 교회 공동체는 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고 다음의 부분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첫째, ‘하나님 말씀의 묵상과 현실화’에 힘써야 한다. 성직자는 매일 성경 40장 이상 읽고 묵상하고, 묵상한 바를 실천할 때 신비의 계시가 능히 너희를 견고하게 함을 믿어야 한다(롬 16:26). 둘째, 하나님의 메시지, 타인과의 대화에서 ‘경청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셋째, 삶의 현장에서 ‘찬양과 기도가 현실화’되어야 한다. 넷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가르치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한다(행 28:30-31). 다섯째,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며 용서운동이 있어야 한다(욥 42:6, 10).   한국 교회가 종교개혁이 제시한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 경건한 삶의 방향을 기억하고 주님의 길을 따라간다면, 모든 이들이 구원에 이르는 역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한국칼빈학회 회장·아프리카미래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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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0-22
  • [정론] 하동 이병주문학관에서
       이병주 대하실록소설 <지리산>의 주인공 박태영은 공산주의자이면서도 그 규칙에 순응할 수 없는 체질적 회의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적 성향을 죽는 순간까지 버리지 못했다. 박태영에게 내연된 휴머니즘이란 인간의 생명과 가치와 존중의 정신이다. 이를 억압하는 모든 권력과 반인간적인 것과의 진실을 찾아가는 행렬인 것이다. 나는 이병주의 <지리산>을 읽으면서 <지리산>의 서사는 사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림 이병주(1921-1992)의 대표작 <지리산> 과 그 외 80여 권에 이르는 작품을 모두 모으면 동시대를 살아간 국민의 서사가 된다. 이병주에게 소설은 허구이기보다는 현실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기에 <지리산> 은 기록문학의 한계를 뛰어 넘는 증언소설로서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역사의 그물이 놓치고 있는 삶의 모습, 역사에서 소외된 삶을 기록한 것이다.    작가 이병주의 소설과 그의 작품에 나타난 삶의 실체적 진실로서의 역사의식이 여전한 분단체제에서 우리 사회의 한 인식 지표가 되어졌다고 할 것이다. 이병주는 분단 시대의 교사로서 그의 소설을 좌우의 갈등과 대립이 여전한 지금도 방향성을 제시한 풍향계라 할 것이다.    필자가 문학지에 게재한 원고지 430매에 달하는 문학비평문 ‘이병주의 지리산, 또는 회색의 군상’을 평론하여 이병주국제문학상 연구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하루 일찍 시간을 내어 2024년 9월 27일 시상식 전날, 가족과 더불어 기차를 타고 진주를 찾았다. 이병주가 걸었던 소설의 주요 공간인 진주의 중앙시장 골목에 있는 1915년 개업한 천황식당에서 진주비빔밥을 시켜 먹었다. 1936년 진주공업농림학교에 입학한 이병주도 천황식당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는 진주에서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을 가꾸었고, 지리산을 휩쓴 파란을 겪는 가운데 역사와 정치와 인간이 엮어내는 운명에 대해 나름대로의 지혜를 익혔다.    거북이의 걸음을 닮은 기차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고, 그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학병이 되어 중국으로 떠난 것도 진주역에서였고, 사지에서 돌아와 도착한 곳도 진주역이었다. 진주는 이병주 문학의 요람이고 향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나는 진주성 촉석루에 올라 시간의 무상을 담아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내려다 보았다.    렌트카를 빌려 하동군 북천면 이명산 자락에 있는 이병주문학관을 찾아갔다. 길에는 코스모스, 메밀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병주는 지리산의 자락이자 다도해의 안뜰이며 섬진강 베갯머리와 같은 하동에 태를 묻고 생애를 시작했다. 하동은 박경리 <토지>와 김동리 <역마>의 무대이다. 소설가 이병주, 김병총, 시인 정공채와 정호승, 수필가 강석호, 아동문학가 남대우의 출생지 하동은 한국문학사 속의 불멸하는 문향이라 하겠다. 이병주는 하동이란 문학적 토양에서 자라나 그의 문학은 진주로,부산으로, 일본과 세계로 뻗어 나갔다. 나림이 타계한지 32년이 지났지만 하동에 세워진 이병주문학관은 세월따라 퇴색한 채 찾아오는 내방객을 맞아 나림의 71년 유정한 삶과 문학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림의 전시실에서 한국기독교 140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연합해 서울 외곽에 한국기독교문학관을 지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겼다. 한국기독교 문학사에서 불멸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마주할 수 있는 기독교문학의 서정과 서사를 담은 공간이 세워졌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보았다./문학평론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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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0-15
  • 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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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0-08
  • [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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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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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순절에 마음속에 새기는 십자가의 길
      사순절이 되면 십자가의 길을 묵상한다.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는 십자가 고난의 길이다. 많은 순례자가 성지를 갈 때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과연 예수를 믿고 축복을 받으려는 일에는 앞을 다투면서도, 정작에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등한시하는 것이 성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철저하게 새로운 공동체 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자녀들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다음으로 부모들에게 “아들과 딸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어에서 ‘미워하다’란 단어는 사네이이다. 미움이라기보다는 사랑을 덜 주는 것으로 예수를 더 사랑하기 위해 가족을 덜 사랑하는 뜻 이다. 초기교회에서 한 가정의 구성원 전체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초기에 당연히 가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미움을 받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대표적인 표상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수의 제자가 먼저 져야 할 십자가는 그 무엇보다도 가정사이다. 예수를 따라나서는데 선행되어야 할 것이 부모가 십자가이고 자녀가 십자가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생명을 걸고 예수를 따른 제자들에 의해서 복음은 전파되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다. 생명을 걸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따르면 반드시 보상이 주어진다. 예수께서는 “나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신다.   생명은 히브리어에서 바 레하임이란 단어이다. 이 세상보다는 장차 오는 세상인 저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잃어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과 같은 개념이다. “육신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 언급할 정도로 생명은 결코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주장할 수 없다. 오는 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과는 반대로, 같은 보상이지만 악인에게도 주어지는 보상을 뜻하는 히브리어 헤레크는 악인에게 내려지는 저세상의 심판이란 의미가 강하다. 오는 세상에서 선인에게는 바 레하임인 생명이 주어지지만, 악인에게는 헤레크라는 심판이 반드시 뒤 따른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 형제가 있는데, 요한과 야고보이다. 놀랍게도 이 형제들에게 닥친 위기는 예수께서 변모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산에서 내려온 직후에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들의 어미가 예수에게 두 아들을 위해 최고의 두 자리를 부탁한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은 마시려니와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대답하신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세베대의 두 아들과 그 어미 그리고 모든 제자에게 주시는 핵심내용이다. ‘대속물’은 헬라어로 뤼트론인데, 영어 단어 lutron으로 음차 되거나 ransom이란 의미로 몸값을 대신 내는 속전이나 보석금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대신 몸값을 지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길이 곧 순교의 길이다. /장신대 교수·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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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3-30
  • 사순절에 마음속에 새기는 십자가의 길
    사순절이 되면 십자가의 길을 묵상한다.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는 십자가 고난의 길이다. 많은 순례자가 성지를 갈 때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과연 예수를 믿고 축복을 받으려는 일에는 앞을 다투면서도, 정작에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등한시하는 것이 성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철저하게 새로운 공동체 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자녀들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다음으로 부모들에게 ‘아들과 딸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부모를 ‘미워하고’ 자녀를 ‘미워한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히브리어에서 ‘미워하다’라는 단어는 사네이곧 미움이라기보다는 사랑을 덜 주는 것으로 예수를 더 사랑하기 위해 가족을 덜 사랑하는 것이다. 초기교회에서 한 가정의 구성원 전체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예수도 그 가족들로부터 미움받지 않았던가?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초기에 당연히 가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미움을 받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미움은 덜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이 식은 증거이다. 가족들이 미워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은 증거이다. 형제들이 미워하는 것은 덜 사랑하는 증거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진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면서 십자가형을 공공연하게 시행해왔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부모와 자녀를 덜 사랑하고 예수를 더 사랑하여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일이기에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사생결단을 내리고 따라야 하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건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죽음을 불사하는 길일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박물관에 십자가에 못이 발목에 박힌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대표적인 표상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수께서는 가정에서 먼저 자녀가 부모를 미워하고, 또 부모는 자녀를 미워하고 예수를 따라나서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자기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제자가 먼저 져야 할 십자가는 그 무엇보다도 가정사이다. 예수를 따라나서는데 선행되어야 할 것이 부모가 십자가이고 자녀가 십자가이다. 굉장한 도전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 먼저 가정사를 정리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는 가정의 일로 십자가를 지는데 어떤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생명을 걸고 예수를 따른 제자들에 의해서 복음은 전파되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다. 지난 2천 년 동안 예수의 제자들이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박해와 순교로 얼룩진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다. 이제 이 길을 당신도 걸어가려는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부모를 덜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자녀를 덜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세상을 미워할 준비가 되었는가? 세상을 덜 사랑하고 십자가를 지고 갈 준비가 되었는가?   생명을 걸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따르면 반드시 보상이 주어진다. 나자라 예수께서는 “나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신다. 죽음으로써 찾는다는 말씀이기에 예수의 제자는 이 땅에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면, 반드시 영원한 생명을 다시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죽음으로써만 보장되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걸어가는 길이다.   생명은 히브리어에서 바 레하임이란 단어이다. 이 세상보다는 장차 오는 세상인 저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잃어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과 같은 개념이다. ‘육신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 언급할 정도로 생명은 결코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주장할 수 없다. 오는 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과는 반대로, 같은 보상이지만 악인에게도 주어지는 보상을 뜻하는 히브리어 헤레크는 악인에게 내려지는 저세상의 심판이란 의미가 강하다. 오는 세상에서 선인에게는 바 레하임인 생명이 주어지지만, 악인에게는 헤레크라는 심판이 반드시 뒤 따른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 형제가 있는데, 요한과 야고보이다. ‘우뢰의 아들’(히브리어로 베네이 레고쉬)이란 별명을 얻은 그들의 아비는 세베대 곧 히브리어로 자브다이로 요한은 예수의 제자 중에 최연소이고, 그의 형 야고보는 예수에게 회장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일등공신 역할을 하고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순교를 당하였다. 놀랍게도 이 형제들에게 닥친 위기는 예수께서 변모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산에서 내려온 직후에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들의 어미가 예수에게 두 아들을 위해 최고의 두 자리, 곧 조선 시대로 말하자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곧 정3품 이상의 당상관 자리를 부탁한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은 마시려니와..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대답하신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세베대의 두 아들과 그 어미 그리고 모든 제자에게 주시는 핵심내용이다. ‘대속물’은 헬라어로 뤼트론인데, 영어 단어 lutron으로 음차 되거나 ransom이란 의미로 몸값을 대신 내는 속전이나 보석금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대신 몸값을 지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길이 곧 순교의 길이다./장신대 교수·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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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9
  • “우리의 메시아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
    역대 대통령의 직무수행평가를 조사한 통계 수치에는 공통점이 있다. 집권초기 지지율은 매우 높지만 집권 마지막 분기에는 최저점에 이른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대통령을 단순한 정치 영역의 지도자를 넘어선 우리 삶 전체를 바꾸어줄 메시아로 생각하게 된 배경을 따져 보자. 우선 권력 집중적 대통령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단순한 행정부의 수장이 아니라, 정당의 지도자로서 입법에도 영향을 미치며,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 추천을 통하여 사법부 영역에도 간섭한다. 대통령은 나의 안전을 지켜주고, 살 집을 마련해 주고, 코로나19 시대 교회 문을 닫고 열게 하고, 탈모를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시에, 북한 핵을 억제하고, 미·중 갈등에서 균형을 잡으며, 기후변화 대책을 세우기도 한다.   우리 국민들의 국가중심주의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열강의 침략, 일제강점기,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애국심이 국민의 심성에 내재되었다. 이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고,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면서, 국민적 자부심(이른 바 ‘국뽕’)은 하늘을 찌른다. 더욱이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국가는 국민 안전을 책임지는 주체임이 확인되었고, 동시에 국가가 국민 개인을 통제할 정당성까지 확보되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크리스천이라면 의당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속해야 한다는 것을 믿으며, 정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대통령은 정치라는 인간 삶의 한 영역의 지도자일 뿐이다. 메시아는 고사하고 그 역시 구원 받아야 할 죄인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물론 대통령은 정의를 시행하기 위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종이다. 그래서 그를 존경하고 법에 복종하며 세금을 바치는 것이 크리스천의 마땅한 도리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통령 감이 누구인지 깊이 숙고하고, 선거에 임하는 것이 성숙한 크리스천이 가져야 할 자세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영역주권론은 성경에 기반을 둔 정치철학으로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온 세상을 다스리는 최고 주권자는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세상을 다스릴 때 세상을 여러 영역들로 나누어 다스리신다. 국가, 교회, 가족, 학교, 기업, 학문, 예술 등이 그 영역들로서, 하나님은 그 영역들에 각기 다른 임무와 법과 통치자를 주셨다. 각각의 영역들은 내적 성격과 자체의 법체계에 따라서 그 권위를 행사하고, 하나님께 대해 책임을 진다. 통치자는 정치의 영역에서, 가장은 가정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에서, 교사들은 학교에서, 고유 영역에 주어진 하나님의 법에 따라 그 영역에 기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현하는 길이다.   어느 한 영역에 절대 권력이 주어지는 것은 그 사회가 재앙으로 가는 길이다. 정치가 자신의 영역을 넘어 인간사의 유일한 조직처럼 행사해서도 안 되고, 기업가 정신이 온 사회를 지배하여도 안 되며, 교회가 정치적 과제와 국가의 영광을 취하여서도 안 된다. 모든 인간은 부패하였기에 한 사람, 한 영역에 권력을 몰아주는 것은 위험하다. 교회는 진보/보수라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분열되는 정치의 하부기관이 아니라, 정치가와 권력자, 그리고 국민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기관이다. 우리의 교제는 분열과 차별과 혐오의 세상을 십자가 안에서 끌어안아 통합을 선포하고 실현하는 교제다. 신앙인은 하나의 이념과 자신을 동일시할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안목으로 그 이념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메시아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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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7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 공격했다. 전세계는 이를 러시아의 약소국 침공으로 보면서 규탄하고 있으며, 전쟁 중단과 평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세를 현상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파악하고 문제 해결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전쟁이라는 극단적 현실, 즉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현실에서 본질문제를 따지는 것은 한가한 노릇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을 마주한 엄중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더더욱 본질적으로 파악해야 이 상황을 올바로 볼 수 있고, 이후 올바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감성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지나간다면 더 큰 문제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1차세계대전의 잘못된 해결이 2차 세계대전을 이미 배태하고 있었듯이 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냉전 이후 반러시아 정책을 계속 추구하는 나토와 미국의 동진정책과 러시아의 국가적 안전 확보라는 이해관계가 부딪혀 나온 전쟁이다. 즉 제국과 대국의 이해관계 대립이 전쟁의 원인이다. 나토와 미국, 그리고 당시 소련은 독일의 통일을 허용하면서 독일 넘어서 동유럽으로 나토를 확대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것도 문서로 약속됐지만 법적 조약은 맺지 않았다.   소련 붕괴 이후 나토와 미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폴란드, 발트3국, 발칸국가 등 동유럽 거의 모든 국가를 나토에 가입시켰다. 이제 마지막 남은 국가가 우크라이나이다. 우크라이나는 넓은 지역에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나토의 발길이 국경선까지 다가온 것이다. 러시아는 미국에 대해서는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우크라이나 정부에게는 나토 가입 중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두 나라가 이를 거부하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러시아는 중간지대를 만들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비군사화(Demilitalization)를 목표로 하고, 친서방 극우 정권을 통제하기 위해 탈나치화(Denazification)를 세부 목표로 하고 있다. 지금 벌이는 휴전 협상의 본질이 이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지 않고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크라이나 정권이 거부하면 전체를 점령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은 오만한 제국의 쇠퇴이다. 제국의 오만과 쇠퇴, 그것이 이번 전쟁의 본질이다. 미국은 소련 해체 이후 세계의 유일 패권국이 되었다. 유일 제국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를 침략하고, 아프카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쫓아내고, 리비아 가다피를 제거했다. 신자유주의 글로벌리즘으로 미국의 부자는 이제 슈퍼리치가 됐다. 미국이 중심에 유럽-일본 부자는 주변에 섰다. 빈익빈 부익부는 극단적 수준이 됐고 그 현실은 한국사회에서 흔하게 경험하고 있다. 유일 패권국 - 제국화된 미국이 지난 30년 동안 만든 세상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이후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달러의 지위가 흔들린다. 헬리콥터 머니로 전세계에 풀린 달러는 세계 인플레-대공황을 예고하고 있다. 군사적으로 미국은 시리아에서 실패했고, 아프카니스탄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도망하며, 이라크에서는 매일 미군 그린존에 민병대의 로켓이 날아가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핵무기를 완성한 북과 힘겨운 대치를 계속하고 있다. 그사이 성장한 중국과 천연가스를 유럽에 공급하며 경제를 회복하고 현대화한 핵무기로 무장한 러시아가 미국과 대결하고 있다. 그 대결의 반영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나토의 동진을 저지하고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세계 제국의 오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제국의 오만이 무너지고 진정한 평화의 체계가 서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시2:1-3). 한국교회는 표면에 나오는 뉴스에 좌우되지 말고 현상을 넘어 진정한 평화의 세계를 보아야 한다. 진정한 평화는 제국의 공포를 넘어서 그들의 오만 보며,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을 믿고 행동하는데서 다가오는 것이다./ 평화의 교회 목사·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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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3-10
  •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일은 한국교회의 커다란 숙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이 추락하는 시점에서, 교회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면에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매우 중요한 선교적 과제이기도 하다. 사실 최근에 와서 연합의 논의가 활발한 것 같지만, 교회 연합과 일치를 향한 한국교회의 노력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래 한국교회의 연합체는 1924년 설립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NCCK)가 유일했다, 그러다가 1989년 교회협의 활동과 지향에 이견을 가진 복음주의 계열 교회들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CCK)을 설립했다. 이때부터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라는 지형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11년 한기총의 이단 해제 문제와 금권선거 등의 문제로 주요교단들이 한기총을 탈퇴하고 한국교회연합(한교연, CCIK)을 설립했다. 이후 2017년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을 위해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UCCK))이 생겼는데, 이 과정에서 내홍을 겪으며 대부분의 교단들이 한교총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한교총은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단이 참여한 최대 교회연합기구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작년부터 한교총·한기총·한교연의 기구 통합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었고, 최근 한교총과 한기총이 통합을 위한 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 통합 논의는 앞서 기술한 교회연합의 역사에서 보듯이 보수교계의 통합이란 한계를 가진다. 실제 1990년대 말부터 제한적이지만 당시 교회협과 한기총에 소속된 교단 간에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진보와 보수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강한 시대적인 요청도 있어서 교회협과 한기총은 ‘연합과 일치’를 위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한기총은 한국교회일치위원회(위원장:최성규 목사)를, 교회협은 교회연합운동추진특별위원회(위원장:전병금 목사)을 구성하고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단일기구 탄생을 위해 깊숙한 논의를 진행했다. 물론 이 논의가 구체적인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이 논의의 중심에는 교회협과 한기총이라는 기구 외에 故 옥한흠목사가 초대대표회장이었던 한국교회목회자협의회(한목협)의 역할이 있었다. 실제 한목협은 2012년 한국교회 986명의 목회자가 연서명하여 ‘연합과 일치를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의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를 향한 열망은 진지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현재 한국교회 연합의 논의는 한교총 중심의 보수 교계의 연합 논의라는 측면이 있다. 전통적인 교회 연합기구인 교회협을 배제한 연합 논의여서 제한적인 데다. 특별히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연합기구는 정부는 물론 시민사회와 소통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지금의 통합논의는 한계가 분명하다. 한교총이 공동대표회장 체제에서 1인 대표회장 체재로 전환한 것도 시대정신과 부합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연합과 일치의 문제는 한국교회의 집단지성이 작동하고, 시스템이 작용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다.”(엡 4:5-6)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를 존중하며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지혜이다. 연합과 일치를 꿈꾸는 한국교회는 우선 현존하는 연합기구들이 복음의 정신에 충실한 지를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고자 하는 더 넓은 선교의 현장에서 만나야 한다. /성북교회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일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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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8
  • ‘코로나 시대’와 한국 신학교육의 미래
      현금 한국 사회의 변화는 교회가 대응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고 급격하다. 어쩌면 196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 사회가 변해온 과정보다도 더 빠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신학교육의 현장도 다르지 않다. 선교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한 한국교회, 피 선교 국가에서 선교 국가로 성장하여 세계 각지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교회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한국교회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 한국교회에 대한 걱정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 소리들이 조금씩 다른 입장이기는 하지만, 교회 안팎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신학교육의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전해진 바와 같이 각 신학대학원의 금년도 신입생 지원현황을 접하면서 느끼게 되는 위기감은 더 하다. 1970~80년대에 우수죽순처럼 신학교들이 생겨났고, 1990년대에는 정원 확대는 물론 신학교들이 종합대학교로 개편하는 것을 경쟁적으로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입학정원을 줄이거나 타 학과로 정원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렇게 했음에도 현실은 정원 미달 정도가 아니라 학사운영이 어려운 정도로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무엇을 걱정해야 하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신학교육의 미래를 생각하면 참담한 심정이 아닐 수 없다.    절박한 심정으로 몇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먼저 한국교회는 국민적인 신뢰와 존경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학교육과 함께 전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교회가 사회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전도는 물론 교회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이상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적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신학교육은 더 이상 신학교만의 역할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 교단은 전체 교회가 신학교육을 위해서 뜻을 모아야 한다. 단지 신학교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차원이 아닌, 목회자나 선교사 등 교회의 사역자로서 미래를 꿈꾸게 해야 한다. 교회 내적으로 그러한 꿈을 갖게 하지 못한다면, 후보생 부족사태로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셋째, 조금 획기적인 제안일 수 있지만,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으로서 6~7년의 수업연한의 단일한 제도로 교회 지도자를 양육하는 프로그램으로 개편하고, 그에 따른 비용은 전부 교단이 감당하도록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그 기간 동안 후보생은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목회자, 선교사, 혹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게 하여 준비된 사역자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이 그 과정에서 후보생으로서 결격사유가 보인다면, 확실하게 걸러내야 한다. 더 이상 신학교육을 제도와 형식에 적당히 맞추는 수준으로 해서는 안 된다.    끝으로, 수업연한 내내 교수와 후보생들이 수도원적인 환경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신학과 신앙을 전수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서 양성하도록 개편해야 할 것이다. 단지 재능 있는 사람, 경영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닌, 지도자로서 신실하고,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사역자로서 자신의 섬김의 삶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신학교육이어야 한다. 철저하게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먼저 자신의 삶을 찾고, 그것을 나누면서 이루어 가는 한 사람으로서 목회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신총회신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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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2-18
  • 개혁주의생명신학, 회개 용서운동과 연합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130여 년간 한국교회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성장을 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과 수많은 순교자들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성장시키시는데 사용하신 도구였다. 한국 기독교는 한민족의 계몽과 발전, 독립에 크게 기여했다.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만이 자유와 독립을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는 사경회마다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새벽마다 차가운 교회 마루바닥에 꿇어앉아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기도가 있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녔던 열정적인 전도자가 있었다. 빈부격차와 사농공상 차이가 교회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한국교회는 나라를 잃은 슬픔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붙들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기셔서 큰 부흥성장을 허락하셨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미약한 한국교회를 들어 세계교회의 모델이 되게 하셨다. 하지만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은 법이다. 한국교회는 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교단과 교파로 나누어졌다.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교회 분열의 배후에는 인간의 연약함과 욕심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본질적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이단으로 배척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 등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리와 신학을 둘러싼 비본질적이고 사소한 차이에 집착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지향하는 기관들조차도 아직 분열되어 완전히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부끄럽다.   교회의 속성 중 하나인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말하는 하나 됨은 일차적으로 제도적 하나 됨보다는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을 뜻한다. 하지만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은 제도적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 비록 교단 통합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교단 간의 연합과 협력, 일치는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이룰 방법은 무엇일까?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방안을 여러 가지로 제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방해하는 인간의 욕심과 죄악을 넘어서는 것이다. 옛 자아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내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 이웃 중심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기에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죄와 잘못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국교회 분열의 잘못을 서로에게 돌리지 말고 나 자신에게 돌리는 회개운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회개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만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듯이,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이웃의 잘못을 넉넉히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교회 분열의 역사에서 서로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서로 용서하지 못했던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한국교회의 밝은 미래를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한다. /백석대 부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2-02-11
  •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의 방안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130여 년간 한국교회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성장을 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과 수많은 순교자들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성장시키시는데 사용하신 도구였다. 한국 기독교는 한민족의 계몽과 발전, 독립에 크게 기여했다.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만이 자유와 독립을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는 사경회마다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새벽마다 차가운 교회 마루바닥에 꿇어앉아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기도가 있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녔던 열정적인 전도자가 있었다. 빈부격차와 사농공상 차이가 교회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한국교회는 나라를 잃은 슬픔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붙들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기셔서 큰 부흥성장을 허락하셨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미약한 한국교회를 들어 세계교회의 모델이 되게 하셨다. 하지만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은 법이다. 한국교회는 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교단과 교파로 나누어졌다.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교회 분열의 배후에는 인간의 연약함과 욕심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본질적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이단으로 배척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 등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리와 신학을 둘러싼 비본질적이고 사소한 차이에 집착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지향하는 기관들조차도 아직 분열되어 완전히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부끄럽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우리 사회 앞에서 회개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속성 중 하나인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말하는 하나 됨은 일차적으로 제도적 하나 됨보다는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을 뜻한다. 하지만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은 제도적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 비록 교단 통합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교단 간의 연합과 협력, 일치는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이룰 방법은 무엇일까?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방안을 여러 가지로 제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방해하는 인간의 욕심과 죄악을 넘어서는 것이다. 옛 자아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내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 이웃 중심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기에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죄와 잘못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국교회 분열의 잘못을 서로에게 돌리지 말고 나 자신에게 돌리는 회개운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회개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만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듯이,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이웃의 잘못을 넉넉히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교회 분열의 역사에서 서로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서로 용서하지 못했던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한국교회의 밝은 미래를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회개용서운동은 말로는 쉽지만 실천하기 어렵다.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죄의 뿌리가 너무나 깊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회개용서운동을 실천할 수 없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 없이는 회개용서운동이 불가능하다고 밝힌다. 참된 회개와 용서는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분열을 딛고 연합과 일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령충만을 강하게 구하는 기도성령운동이 불일 듯 일어나야 한다. / 백석대학교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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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2-08
  • 위드 코로나시대 한국교회의 방향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아쉽게도 한국교회는 코로나라는 위기의 시대에 선교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몇몇 교회들의 부적절한 대응으로 한국교회 전체 이미지가 실추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잘 대처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제 한국사회는 위드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위드 코로나라고 해서 코로나가 끝난 것은 아니다. 의학계에서는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더 강한 전염병이 올수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앞으로 한국교회의 목회방향은 전염병이 돌고 있는 상황에서도 성도들의 영적 생활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교회중심/교제중심의 목회를 해 온 것 같다. 교회에 자주 나와 얼굴이 보이면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평가했고, 성도들과 잘 어울리고 다양한 공동체 활동을 하는 사람을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교회의 문은 닫아야만 했고 성도들과의 교제는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그렇게 믿음(?) 좋았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교회의 부흥이 곧 개인 영성의 부흥으로 연결하는 목회를 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는 성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성도들과 만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홀로서기 영성훈련을 해야 한다. 말씀묵상(QT)이나 성경읽기, 성경쓰기 등이 좋은 예일 것이다. 필자 교회는 오히려 코로나 상황에서 성경읽기(10독 이상 15명)와 온라인 성경공부(80여명)가 더 활성화가 되어 많은 성도들이 즐겁게 참여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을 만날 수 없게 되면서 개인 영성훈련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이 주어진 것이다.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 방향은 숫자로 평가하는 교회 부흥보다는 가장 기본이 되는 개인 영성 훈련을 통해 혼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성도로 세워야 할 것이다.   필자 교회는 매달 첫 주는 어른들과 교회학교(다음세대) 어린이들이 함께 드리는 세대통합예배를 드렸다.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더 이상 세대통합예배를 드리진 못하지만 세대통합 목회에 대해 강조점을 두고 목회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가정 안에서의 신앙교육은 사라졌다. 자녀를 교회학교에 맡기고, 교사들에게 자녀의 신앙을 책임지라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교회학교는 문을 닫았고 교사들 역시 교회에서 다음 세대들을 만날 수 없게 되니 이들의 신앙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유일하게 서로 만날 수 있는 곳은 가정이다. 부모와 자녀들이 가정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렇기에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는 가정 중심의 세대통합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담임목사의 메시지로 부모들은 설교를 듣고, 교회학교에서는 이 메시지로 공과를 만들어 현장과 온라인으로 교육을 한다. 주중에서는 이 메시지로 부모님과 자녀들이 앉아 가정예배를 드리며 고백과 간증을 나누고,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 축복 안수기도를 한다.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는 기본이 충실한 목회여야 한다. 교인 숫자 늘리기 목회가 아닌 성도 개개인이 험한 시대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도록 개인 영성을 강화하는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교회는 가정에서 신앙교육이 일어나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가정이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예배하는 곳이 되도록 목회해야 할 것이다. “위드 코로나” 목회에 “위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실 것이다. /기감 중부연회 감독·효성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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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2-03
  • 생명을 치유하고 회복케 하는 새해
    코로나 19가 한창이지만, 우리나라는 2021년에 선진국 지위로 올라섰고, 여러 가지 면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일으켰다. 넷플릭스 덕분에 오징어 게임이라는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지만, 반대로 오징어 게임 덕분에 넷플릭스는 비 영어권 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서로 윈윈하는 좋은 사례가 된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세상은 재빠르게 재편되고 있는데, 특별히 온라인으로 접속하고 활동하는 가상 세계의 변화가 눈에 두드러진다. 컴퓨터 상에서 활약하는 가상의 인물인 인공 인간이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가상공간에서 무한히 펼쳐지는 메타버스의 세계 속에서 대체 불가능 토큰(NFT)인 가상 자산을 이용해 경제 활동을 하고, 디지털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창작자들은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 세계는 기후 위기라고 하는 매우 심각한 위협 앞에 놓여 있고, 특별히 한국 사회에서는 지속적인 저출산 고령화와 지방의 소멸이라고 하는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들도 있다. 이런 세상의 변화와 과제 앞에서 우리의 중장기 계획은 어떠해야 하며, 또 2022년은 어떻게 보내야 할까?    앞으로 우리 모두가 가야하는 길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씀이 시편에 있다. “너희는 힘 있는 고관을 의지하지 말며,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본이나 물질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 희망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며,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시켜 주시며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나그네를 지켜 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주님이 누구이신 줄 정확하게 알고 그 분을 따르며 그 분께 희망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서 살고 늙고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지만, 급작스런 죽음은 살아남은 이들을 당황하게 한다. 동시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한 사람의 삶을 기억하고 그를 주님의 품으로 보내는 예식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삶도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 앞으로 불려갈 우리들의 마지막은 과연 어떨까? 준비 없이 당하고야 마는 죽음, 삶의 끝일까? 아니면 충실한 일상을 살았기에 도달하는 삶의 완성일까?   우리 고유의 전통에 따라 새해가 되면 서로에게 덕담을 한다. 가슴 설레며 새해를 맞이하며 서로의 계획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새해 아침을 맞아 설렘만이 아니라 두려움도 나눠야 할 것 같다. 산맥을 뚫고 나오는 뜨겁고 뭉클한 더 빨간 햇덩이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지만, 추운 겨울 깊은 산속에 무겁게 내리누르는 폭설과 깊은 울음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감정에 더하여, 우리의 삶 한구석에서 늘 우리를 떨게 만드는 불안에 대해서도 속 터놓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새해를 여는 날들이지만 푸근하고 편안한 말씀만이 아니라, 걱정스런 말들도 나누어야 한다.   이 모두가 생명을 치유하고, 모든 것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 과정들을 통해서 서로의 신뢰가 두터워지고, 믿음이 굳세지고, 사랑이 깊어지며, 주님을 향한 열정이 타오르게 될 것임을 믿는다. 2022년도 오로지 주님을 의지하여 날마다 구원을 이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북한다./생명사랑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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