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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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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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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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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총회에 바란다 -한국사회를 이끄는 향도의 역할
비록 2-3년 지난 통계이긴 하지만 한국의 주요 6개교단 (합동 통합 고신 기장 기감 기성)의 교인수는 704만 여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중 범 장로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합동 통합 고신 기장의 교인수의 합은 500여만명이다.(2021.10.28. 미주중앙일보 보도) 장로교단이 한국교회의 주류교단임을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 교세만큼 막중한 책임과 의무도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런 한국 교회를 아우르는 맏형님격인 장로교단이 9월 일제히 총회를 개회한다. 년례적으로 치르는 행사에 머물지 않고 올해는 보다 전향적이고 알맹이 있는 내용과 결과를 도출하는 총회가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한 두가지 소망사항을 피력하려 한다. 한국교회 무게중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장로교단의 총회가 향도가 될 때 여타의 다른 교단도 많은 힌트를 얻어 함께 한국교회의 길을 걸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기대하는 것은 대사회적 대국민적 대정부적 영향있는 메시지가 나오는 총회이기를 기대한다. 그 위상을 미루어 볼 때 장로교는 얼마든지 한국사회 전체를 향한 메시지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정치의 혼란, 의료문제의 갈등, 교육계의 아픔, 북한과의 관계, 기후문제, 인구감소문제 등등 교계의 관점에서 얼마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큰 울림이 있는 메시지를 장로교단의 총회후에 들어본 기억이 많지 않다. 작은 토끼 하나의 외침보다 사자나 호랑이의 포효가 산 전체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이제는 사회가 교계를 염려하는 모순을 넘어 다시 한번 교회가 한국 사회를 바르게 이끄는 향도의 역할을 해야한다. 그 선봉에 장로교단이 있다. 나아가서 이번 장로교 총회는 목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제고되는 총회이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교회 아니 한국의 장로교회는 역사적으로 한국사회의 소외된 곳을 위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헌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장로교단을 통하여 사회에 끼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적 관심과 공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과업이다. 교육, 의료, 복지차원에서 그 어떤 종교집단보다도 큰 공헌을 한국교회가 해왔다. 이제 그런 대 사회적 복지차원을 넘어 교회안의 목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도를 배증시켜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의 교단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직도 여성안수에 대한 문제하나 속시원하게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부목사나 전도사 강도사등의 교회 내의 지위나 위상이 열악한 것도 사실이리라. 교회내의 목회적 약자들을 단순한 목회의 조력자를 넘어서는 협력자요 동반자로 보는 인식이 더 많이 더 널리 여울져 나가야 한다. 막중한 업무량에 비해 최저임금수준에도 미달하는 현실의 대우와 목회자로서의 예우도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총회에서 그런 목소리들이 나오면 그 당사자들이 얼마다 용기백배하겠는가? 그런가하면 줄어드는 교인수와 다음세대 교회구성원들에 대한 관심의 실제적 조직적 제고이다. 앞서 언급한 언론보도를 보면 5년전보다 통합은 14% 합동은 10% 정도의 교인수가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세대 교회 구성원인 어린이들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이에 대한 심각한 고민들이 총회를 통해 제기되고 해소 방법론에 대한 토론이 일어나고 조직적인 치유의 움직임이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장로교회는 단순한 여러 교단중의 하나가 아니다. 한국교회를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바로 장로교단에게 있다. 그것을 피해서는 안된다. 삼가 이번 9월의 총회가 성총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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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광복 79주년, 평화를 찾는 좁은 길
일본의 조건 없는 항복으로 지난했던 태평양전쟁이 종식되면서 8.15 광복을 맞이했다. 올해로 79주년이 되는 광복절의 광(光)은 빛을, 복(復)은 되찾다는 뜻으로, ‘잃었던 빛(나라)을 다시 찾은’ 것을 이른다. 해방을 맞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는 일제식민통치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토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자기 주권을 가지고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남북한은 외적 강제로 인해 각각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남북한의 정치적 이념과 체제가 달라지게 되었다. 냉전의 시작은 세계 각국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특히 한반도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정치적 대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과 북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깊은 상처인 동족상잔의 비극을 우리 민족의 마음에 새겼다. 그 트라우마는 우리 안에 이념의 모양으로 나타나 계층으로, 소득으로, 성향으로, 남녀로 우리를 가르고, 나누고 균열을 만드는데 충실했다. 79년의 분단은 우리를 그렇게 갈라놓는데 그치지 않고 교회도 분단의 영향을 받게 된다. 해방이후 한국의 기독교는 6.25 한국전쟁의 영향과 새로 들어선 이승만정부와 밀접한 관계 속에 철저한 반공의 입장을 취해 왔다. 특히 1950년대는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운동의 참여 여부를 놓고 갈등과 분열을 겪은 시기인데,1960년 3.15부정선거와4.19민주항쟁,1969년 삼선개헌 등 격동하는 한국의 상황 속에서 교계가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금년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71주년으로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을 잠시 쉬고 있는 휴전상태다. 그 긴 세월 동안 한반도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우리는 분단의 역사를 통해서, 싸움보다는 화해를, 비난보다는 대화를, 적대보다는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했던 것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이롭다는 것을 안다. 현재 남북 그리고 북남은 ‘강대 강’으로 대치하고 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연일 한쪽은 핵·미사일 고도화로 다른 한쪽은 전쟁연습으로 군사적 긴장을 최고조로 올리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도 보듯이, 전쟁은 예측할 수 없다. 서로의 오해와 작은 실수로 인해 국지전 더 나아가 전면전으로 확전될 수 있다. 한반도는 이 군사적 긴장이 어느 때보다 높다. 남북의 연락망은 끊어진 지 오래되었고, 마지막으로 전쟁의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안전핀 역할을 했던 9·19군사합의 또한 무력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를 향한 도발과 심리전은 서로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79년 전 일제로부터 해방의 기쁜 소식이 울려 퍼졌는데, 79년이 지난 2024년 오늘은 서로를 향한 적대와 비난의 소리가 가득한 광복을 맞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가 유일한 길임을 아는 자들로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야겠다. 힘으로 겨루는 전쟁은 안 된다. 시편의 시인은 “악한 일은 피하고, 선한 일만 하여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34:14) 권면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긴장을 만들고, 비난을 전파하고, 적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평화의 사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절대적 소명이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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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크리스천의 바른 휴가
바야흐로 휴가철이다. 자영업자는 휴가가 없다. 그러나 한국 직장인들의 근무시간은 OECD 연평균보다 199시간이나 길다고 한다. 그러니 내게 휴가가 주어지면 가능한 한 자연의 품으로 떠나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신 대자연이다. 휴가의 기회가 있으면 무조건 떠날 일이다. 크리스천은 더욱 그렇다. 직장에서 5일간 시달리고 주일에는 또 교회에서 봉사하느라 심신이 피곤해진 상태기 때문이다. 떠날 때 성경, 찬송은 필수라고 무거운 짐 속에 넣고 가도 되지만 불신자와 단체 행동을 할 때 시도 때도 없이 책을 꺼내어 기도하고 앉아 있으면 역전도와 꼴불견이 된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떤 농부가 너무 가물어서 소리를 내어 울면서 비를 내리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들로 나가려고 했을 때 집에 있던 어린애가 아버지에게 우산을 갖다 드렸다. “웬 우산이냐?” 이때 “아버지,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어요?”라고 아들은 말했다고 한다. “허 참, 그것은 그냥 기도지. 이 날씨가 어디 비가 오게 생겼냐?” 하고 아버지는 그냥 나갔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의례적인 기도를 크리스천은 단체행동에서 삼가야 한다. 다만 크리스찬이 지나간 자리에는 버린 쓰레기가 없어야 하고 남이 버린 쓰레기까지 수거하는 흔적을 남겨야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옛날 전보가 가장 빠른 통신 방법이었을 때 한 젊은이가 전보를 보내는 통신원 자리를 찾고 있었다. 지금은 전화, 핸드폰 등이 많아 전보를 모르는 젊은이도 많을 것이다. 그런 1950년대에 신문의 광고에 적혀 있는 주소를 따라 젊은이는 한 사무실로 갔다. 건물에 들어서서 그는 크고 넓은 대기실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소음과 말소리와 전보치는 소리로 매우 소란한 곳이었다. 접수처 카운터에는 소정 원서에 필요한 내용을 다 기록해 제출한 후 안쪽 사무실로 들어오라는 명령이 있기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씌어 있었다. 젊은이는 원서를 다 쓴 뒤 대기소에서 일곱 사람의 다른 지원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몇 분 후 그 젊은이는 일어서더니 방을 가로질러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사장이 그 젊은이를 데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와 다른 지원자들에게 말했다. “신사 여러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제 빈자리는 채워졌습니다.” 다른 지원자들은 서로 불평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한 사람이 말했다. “사장님, 이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는 맨 나중에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면접을 요청받은 바도 없습니다. 그런데 취직이 된다니요. 이건 불공평합니다.” 사장은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앉아 있는 동안 내내 전신기는 계속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송신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 내용을 이해하면 안으로 들어오시오. 자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아무도 이 전신 부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젊은이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이 젊은이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소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작업이다. 자연 생태계 파괴로 폭우가 쏟아져 집을 잃고 생활수단이 망가져 망연자실한 이웃을 차마 볼 수가 없다. 거기다 국내의 요란한 정치 소음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세계에 6위에 해당한다는 우리나라의 운명을 백척간두에 세우고 있다. 그래서 과연 크리스천이 이 순간 하나님께 기도하며 진리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한가하게 휴가를 잘 즐길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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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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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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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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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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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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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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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총회에 바란다 -한국사회를 이끄는 향도의 역할
- 비록 2-3년 지난 통계이긴 하지만 한국의 주요 6개교단 (합동 통합 고신 기장 기감 기성)의 교인수는 704만 여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중 범 장로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합동 통합 고신 기장의 교인수의 합은 500여만명이다.(2021.10.28. 미주중앙일보 보도) 장로교단이 한국교회의 주류교단임을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 교세만큼 막중한 책임과 의무도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런 한국 교회를 아우르는 맏형님격인 장로교단이 9월 일제히 총회를 개회한다. 년례적으로 치르는 행사에 머물지 않고 올해는 보다 전향적이고 알맹이 있는 내용과 결과를 도출하는 총회가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한 두가지 소망사항을 피력하려 한다. 한국교회 무게중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장로교단의 총회가 향도가 될 때 여타의 다른 교단도 많은 힌트를 얻어 함께 한국교회의 길을 걸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기대하는 것은 대사회적 대국민적 대정부적 영향있는 메시지가 나오는 총회이기를 기대한다. 그 위상을 미루어 볼 때 장로교는 얼마든지 한국사회 전체를 향한 메시지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정치의 혼란, 의료문제의 갈등, 교육계의 아픔, 북한과의 관계, 기후문제, 인구감소문제 등등 교계의 관점에서 얼마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큰 울림이 있는 메시지를 장로교단의 총회후에 들어본 기억이 많지 않다. 작은 토끼 하나의 외침보다 사자나 호랑이의 포효가 산 전체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이제는 사회가 교계를 염려하는 모순을 넘어 다시 한번 교회가 한국 사회를 바르게 이끄는 향도의 역할을 해야한다. 그 선봉에 장로교단이 있다. 나아가서 이번 장로교 총회는 목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제고되는 총회이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교회 아니 한국의 장로교회는 역사적으로 한국사회의 소외된 곳을 위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헌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장로교단을 통하여 사회에 끼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적 관심과 공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과업이다. 교육, 의료, 복지차원에서 그 어떤 종교집단보다도 큰 공헌을 한국교회가 해왔다. 이제 그런 대 사회적 복지차원을 넘어 교회안의 목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도를 배증시켜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의 교단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직도 여성안수에 대한 문제하나 속시원하게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부목사나 전도사 강도사등의 교회 내의 지위나 위상이 열악한 것도 사실이리라. 교회내의 목회적 약자들을 단순한 목회의 조력자를 넘어서는 협력자요 동반자로 보는 인식이 더 많이 더 널리 여울져 나가야 한다. 막중한 업무량에 비해 최저임금수준에도 미달하는 현실의 대우와 목회자로서의 예우도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총회에서 그런 목소리들이 나오면 그 당사자들이 얼마다 용기백배하겠는가? 그런가하면 줄어드는 교인수와 다음세대 교회구성원들에 대한 관심의 실제적 조직적 제고이다. 앞서 언급한 언론보도를 보면 5년전보다 통합은 14% 합동은 10% 정도의 교인수가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세대 교회 구성원인 어린이들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이에 대한 심각한 고민들이 총회를 통해 제기되고 해소 방법론에 대한 토론이 일어나고 조직적인 치유의 움직임이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장로교회는 단순한 여러 교단중의 하나가 아니다. 한국교회를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바로 장로교단에게 있다. 그것을 피해서는 안된다. 삼가 이번 9월의 총회가 성총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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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총회에 바란다 -한국사회를 이끄는 향도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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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광복 79주년, 평화를 찾는 좁은 길
- 일본의 조건 없는 항복으로 지난했던 태평양전쟁이 종식되면서 8.15 광복을 맞이했다. 올해로 79주년이 되는 광복절의 광(光)은 빛을, 복(復)은 되찾다는 뜻으로, ‘잃었던 빛(나라)을 다시 찾은’ 것을 이른다. 해방을 맞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는 일제식민통치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토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자기 주권을 가지고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남북한은 외적 강제로 인해 각각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남북한의 정치적 이념과 체제가 달라지게 되었다. 냉전의 시작은 세계 각국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특히 한반도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정치적 대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과 북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깊은 상처인 동족상잔의 비극을 우리 민족의 마음에 새겼다. 그 트라우마는 우리 안에 이념의 모양으로 나타나 계층으로, 소득으로, 성향으로, 남녀로 우리를 가르고, 나누고 균열을 만드는데 충실했다. 79년의 분단은 우리를 그렇게 갈라놓는데 그치지 않고 교회도 분단의 영향을 받게 된다. 해방이후 한국의 기독교는 6.25 한국전쟁의 영향과 새로 들어선 이승만정부와 밀접한 관계 속에 철저한 반공의 입장을 취해 왔다. 특히 1950년대는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운동의 참여 여부를 놓고 갈등과 분열을 겪은 시기인데,1960년 3.15부정선거와4.19민주항쟁,1969년 삼선개헌 등 격동하는 한국의 상황 속에서 교계가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금년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71주년으로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을 잠시 쉬고 있는 휴전상태다. 그 긴 세월 동안 한반도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우리는 분단의 역사를 통해서, 싸움보다는 화해를, 비난보다는 대화를, 적대보다는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했던 것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이롭다는 것을 안다. 현재 남북 그리고 북남은 ‘강대 강’으로 대치하고 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연일 한쪽은 핵·미사일 고도화로 다른 한쪽은 전쟁연습으로 군사적 긴장을 최고조로 올리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도 보듯이, 전쟁은 예측할 수 없다. 서로의 오해와 작은 실수로 인해 국지전 더 나아가 전면전으로 확전될 수 있다. 한반도는 이 군사적 긴장이 어느 때보다 높다. 남북의 연락망은 끊어진 지 오래되었고, 마지막으로 전쟁의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안전핀 역할을 했던 9·19군사합의 또한 무력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를 향한 도발과 심리전은 서로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79년 전 일제로부터 해방의 기쁜 소식이 울려 퍼졌는데, 79년이 지난 2024년 오늘은 서로를 향한 적대와 비난의 소리가 가득한 광복을 맞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가 유일한 길임을 아는 자들로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야겠다. 힘으로 겨루는 전쟁은 안 된다. 시편의 시인은 “악한 일은 피하고, 선한 일만 하여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34:14) 권면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긴장을 만들고, 비난을 전파하고, 적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평화의 사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절대적 소명이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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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광복 79주년, 평화를 찾는 좁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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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크리스천의 바른 휴가
- 바야흐로 휴가철이다. 자영업자는 휴가가 없다. 그러나 한국 직장인들의 근무시간은 OECD 연평균보다 199시간이나 길다고 한다. 그러니 내게 휴가가 주어지면 가능한 한 자연의 품으로 떠나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신 대자연이다. 휴가의 기회가 있으면 무조건 떠날 일이다. 크리스천은 더욱 그렇다. 직장에서 5일간 시달리고 주일에는 또 교회에서 봉사하느라 심신이 피곤해진 상태기 때문이다. 떠날 때 성경, 찬송은 필수라고 무거운 짐 속에 넣고 가도 되지만 불신자와 단체 행동을 할 때 시도 때도 없이 책을 꺼내어 기도하고 앉아 있으면 역전도와 꼴불견이 된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떤 농부가 너무 가물어서 소리를 내어 울면서 비를 내리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들로 나가려고 했을 때 집에 있던 어린애가 아버지에게 우산을 갖다 드렸다. “웬 우산이냐?” 이때 “아버지,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어요?”라고 아들은 말했다고 한다. “허 참, 그것은 그냥 기도지. 이 날씨가 어디 비가 오게 생겼냐?” 하고 아버지는 그냥 나갔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의례적인 기도를 크리스천은 단체행동에서 삼가야 한다. 다만 크리스찬이 지나간 자리에는 버린 쓰레기가 없어야 하고 남이 버린 쓰레기까지 수거하는 흔적을 남겨야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옛날 전보가 가장 빠른 통신 방법이었을 때 한 젊은이가 전보를 보내는 통신원 자리를 찾고 있었다. 지금은 전화, 핸드폰 등이 많아 전보를 모르는 젊은이도 많을 것이다. 그런 1950년대에 신문의 광고에 적혀 있는 주소를 따라 젊은이는 한 사무실로 갔다. 건물에 들어서서 그는 크고 넓은 대기실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소음과 말소리와 전보치는 소리로 매우 소란한 곳이었다. 접수처 카운터에는 소정 원서에 필요한 내용을 다 기록해 제출한 후 안쪽 사무실로 들어오라는 명령이 있기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씌어 있었다. 젊은이는 원서를 다 쓴 뒤 대기소에서 일곱 사람의 다른 지원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몇 분 후 그 젊은이는 일어서더니 방을 가로질러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사장이 그 젊은이를 데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와 다른 지원자들에게 말했다. “신사 여러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제 빈자리는 채워졌습니다.” 다른 지원자들은 서로 불평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한 사람이 말했다. “사장님, 이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는 맨 나중에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면접을 요청받은 바도 없습니다. 그런데 취직이 된다니요. 이건 불공평합니다.” 사장은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앉아 있는 동안 내내 전신기는 계속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송신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 내용을 이해하면 안으로 들어오시오. 자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아무도 이 전신 부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젊은이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이 젊은이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소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작업이다. 자연 생태계 파괴로 폭우가 쏟아져 집을 잃고 생활수단이 망가져 망연자실한 이웃을 차마 볼 수가 없다. 거기다 국내의 요란한 정치 소음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세계에 6위에 해당한다는 우리나라의 운명을 백척간두에 세우고 있다. 그래서 과연 크리스천이 이 순간 하나님께 기도하며 진리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한가하게 휴가를 잘 즐길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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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크리스천의 바른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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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빛을 발하는 교회
- 여러 해 전 광화문 교보빌딩 외벽에 붙었던 시구가 기억난다. “황새는 날아서 / 말은 뛰어서 / 달팽이는 기어서 /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반칠환 시인의 시였다. 짧은 시의 전문을 다시 소개하면 이렇다. “황새는 날아서 / 말은 뛰어서 / 거북이는 걸어서 / 굼벵이는 굴렀는데 /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이 시의 제목은 “새해 첫 기적”이다. 시인은 여러 동물들이 각자의 보폭으로 다다른 새해 첫 날의 장면을 기적이라고 명명했다. 2022년 8월 31일 독일 남부의 아름다운 소도시 카를스루에에 도착한 세계 각국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필자에게는 기적이었다. 서너 달 전까지 정상 개최가 불확실했던 코로나 팬데믹의 와중에서 세계교회협의회 제11차 총회 첫 날 4천 명의 참가자들이 도착했으니 말이다. 단순히 비행기와 기차와 자동차로 총회 장소에 도착했다는 뜻이 아니다. 총회의 정상 개최를 위하여 몇 달 전부터 기도하며 준비한 대표들과 참가자들, 독일 정부와 협력하며 도시를 세계교회의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낸 주최측, 총회 프로그램마다 성실하게 참석하며 풍성한 논의를 만들어낸 참가자들 모두 다양한 전통과 장소와 역할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날 한시”에 같은 장소에 도착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만들어낸 기적이라고 믿는다. 두 주간 진행된 총회에서 세계교회 대표들과 참가자들을 전쟁과 질병, 기후위기의 위협 앞에 고통당하는 인류를 위하여 기도하며 교회의 사명을 나누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을 화해와 일치로 이끄신다”는 주제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확산하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어나기 전에 정해졌다. 십자가와 비둘기, 원을 조합하여 그리스도교의 복음과 화해, 일치를 상징하고, 이 땅의 교회가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을 형상화한 포스터는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게 현대 교회의 비전을 담아냈다. 그리고 2022년 늦여름 총회가 열렸고,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한국교회는 네 회원교회가 중심이 되어 한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번 총회의 주제와 의미를 알리는 사업을 진행하며, 교회일치를 통한 복음화를 알렸다. 각 교단이 공식적으로 모집한 120명의 참가자들과 취재진, 개인 참가자들을 포함하면 200명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참가한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 어느 기사의 표현대로 이전에 열린 아홉 번의 해외 총회에 참가한 한국 대표단의 전체 인원보다 많은 규모였다. 참가자들이 보고, 듣고, 만나고, 경험한 세계교회와의 교감은 한국교회가 장차 걸어갈 에큐메니칼 운동의 토대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을 화해와 일치로 이끄신다”는 주제로 열린 총회를 마치고 발표한 총회 메시지 “A Call to Act Together"는 고린도후서 5장 14절의 말씀을 근거로 세 가지 부르심을 담았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를 따르라”("Come, follow me")이다. 두 번째는, “공동의 여정에 참여하라”(”Our journey together")이다. 세 번째는, “온 세상으로 가라”(“Go into the whole world")는 부르심이다. 여기에서 부르심은 소명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스도를 따라, 함께, 세상으로 향하는 교회로 부르는 것이다. 교회는 이미 세상에 있는데, 새삼 세상으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명하신 분명한 사명을 공동의 사명으로 행하는 것이다. 즉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세상은 지금 짙은 어둠 속에 있다. 전쟁으로 신음하고,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자연재해로 넘어지는 어두운 세상에서 교회는 사랑과 소망의 빛을 발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총회를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세계교회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믿는다./동인교회 목사·WCC 중앙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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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빛을 발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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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선한 손길 내미는 ‘예배자’ 되길
- 장로교총회는 역사적으로 지난 100여년 이상 주로 9월에 열린다. 일제강점기간 중 총독부 요구와 일부 친일 목사들에 의해 27회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 찬성을 결의했다. 그 이후 1941년 경부터 6.25전쟁 직후까지 총회가 열린 달은 11월, 10월, 4월, 5월로 유동적이다가 1956년 41회 이후부터는 9월로 확정된다. 그럼에도 총회는 일제의 핍박이 극심하던 1943년, 44년, 45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빠짐없이 개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예장통합측은 「복음의 사람, 예배자로 살게 하소서」란 주제로 총회를 개최했다. 올해 주제 표어가 나온 성경구절은 시편 50편 5절과 로마서 12장 1절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도전적인 말씀이자, 지키기 힘들지만 꼭 지켜야 하는 믿음의 행동강령이 담긴 말씀이다. ‘내 몸을 산 제물로 주님께 드리는’ 삶, 바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올바른 삶을 실천하는 ‘예배자’로의 삶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예배자 중, 아주 오랜 조상은 가인과 아벨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는 기본 조건은 ‘선을 행하면’(창4:7)이다. 아벨을 죽이는 살인죄를 저지르기 이전에 이미 가인은 선을 행하지 않았단 말씀이고, 그가 드린 예배 혹은 제사는 ‘선을 행하지’ 않은 면에서 아벨이 드린 제사와 구별된다는 의미, 다시 말해, 선을 행하지 않음으로 바로 죄에 빠졌고, 예배를 드리는 행위와 상관없이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 아니었을까? 코로나19 시대를 지나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민낯을 아주 많이 드러냈다. 목숨을 걸고 일제와 싸운 독립군의 얼굴도 아니고, 자식을 잃어가면서도 조선을 사랑해 떠나지 못한 선교사들의 얼굴도 아니며, 고아를 업어 키운 선교사이자 벽안의 간호사의 얼굴도 아니었다. 참 이기적이고, 무관심하며 무책임한 얼굴을 사회에 드러냈다. 마스크를 써서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사회는 물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예수의 제자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런데도 일부 기독교인들은 백신을 거부하고, 집회를 강행했으며, 수많은 교회들이 교권 세습을 허용했다. 그럼에도 총회는 부단히 명예를 회복하려 애써 왔다. 이번 장로교총회 이후 그리스도인 모두가 힘을 합해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삶 살기를 희망하며 선포한다. 올해 백주년을 맞은 한국 YWCA가 여성의 주체적 성장을 위해, 정의·평화·생명운동을 선포하며 1922년 창립되기 꼭 10년 전, 1912년 9월 1일은 장로교총회가 평양에서 조직된 날이다. 당연히 초대 총회장은 언더우드선교사(1859~1916)였다. 이듬해 1913년에는 남쪽인 경성 승동교회당에서 총회가 열렸으며, 총회장은 독일 출신의 엥겔선교사(1868~1939)였다. 이후, 장로교총회는 신의주, 원산, 함흥의 교회에서 열리고, 해방 후에는 남쪽에서만 열리고 있다. 속히 ‘복음’으로 통일이 돼 남북을 오가며 장로교총회를 하는 날이 오길 기다린다. 그때까지, 진정 한국의 개신교회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선한’ 일을 하는 진정한 ‘예배자’들의 공동체가 되길 기도한다. 세상 지도자들에게 바른 정치를 하라고 말하기에 앞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개신교 지도자들이, 우리 총회원들이 먼저, 선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길 기도한다. 정의로운 총회 진행을 통해 하나님께 칭찬받는 모두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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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선한 손길 내미는 ‘예배자’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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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포기하지 말아야」
- 기독교 교회가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면서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교회는 아메리카로 건너가기 전에 1,300여 년 동안 유럽의 종교였다. 유럽의 문화와 삶 전체가 당연히 기독교적이었다. 교회가 사회 제도와 삶의 모든 면에 촘촘하게 엮여 있었다. 특히 황제나 왕 또는 제후가 주도하는 정치 제도와 교회의 교권 구조는 뗄 수 없이 연결돼 있었다. 유럽이란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은 공적인 것이었다. 아메리카로 건너가면서 기독교 신앙은 구조로 보면 사회적인 제도와 공적인 틀에서 벗어나 사적인 것이 되었다. 17세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몽주의의 흐름이 이런 상황에 큰 역할을 했다. 신앙이란 것은 인간의 자유와 인격적인 존엄성에 근거한 개인의 선택 사항이 됐다. 아메리카 대륙에 세워져 이후의 세계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미국이란 나라는 계몽주의 사상의 정치 이념에 따라 정교분리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흔히 말하는 청교도 신앙의 목표는 정교분리의 사회가 아니라 성경이 곧 국가의 법이 되는 사회였다. 한국교회는 미국식 교회구조를 기본 틀로 갖고 있다. 신앙을 사적인 것으로 보는 것 말이다. 기독교 신앙이 사회 및 역사 흐름과 떨어질 수 없다는 자의식이 약한 것이 그래서다. 미국 교회는 그 신앙 구조가 사적이긴 해도 미국이란 국가 건립 때부터 사회제도와 기독교가 늘 서로 소통하고 조율했다. 교회와 국가가 분리된 구조이지만 나름으로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틀이 있다. 유럽교회는 긴 역사 유산의 영향으로 구체적인 교회제도와 신앙의 틀이 아직 상당 부분 공적이다. 유럽의 기독교가 사회적 공공선과 연관된 자의식이 강한 이유이다. 그럼 한국교회는 어떤가? 기독교 신앙이 없던 문화권에 기독교가 들어와 정착했다. 기본 구조가 미국식이다. 신앙 의식과 구조가 사적이다. 교세가 성장하면서 교회의 사회적 역할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기본 틀이 사적인 방식에 머물러 있다. 감독제 정치 형태를 가진 일부를 빼면 한국교회의 교단들은 거의 모두 개교회주의 방식으로 사역한다. 이것이 개별 교회를 성장하게 한 동인이기도 했지만 현재는 아주 심각하게 부정적인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대형 교회의 세습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장로교 총회들이 열리는 계절이다. 한국교회의 주도적 집단인 장로교 교단들의 총회가 중요하다. 여기에서 공적으로 논의하고 결정하는 사안들이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끼친다. 사회가 교회를 보는 시각도 많은 부분 여기에 걸려 있다. 위에서 살핀 유럽식과 미국식 기독교의 비교에서 보면 한국교회의 약점이 쉽게 보인다. 사회적 공공선을 위한 책임 의식이 약한 것이다. 이번 총회들에서 사회와 세계 역사 흐름의 공적인 책무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기를 바란다. 얼른 생각해도 대여섯 가지를 꼽을 수 있다. 기후 위기와 코로나19 관련 사안, 정치, 경제, 외교 등 다방면에 걸쳐 드러난 윤석열정부의 심각한 문제점들, 남북 분단과 동아시아의 상황 등이다. 교회 내적인 일이야 당연히 심도 있게 다뤄야 한다. 코로나 이후의 목회 상황 변화에 대처하며 새로운 목회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대형 교회의 세습을 막고 교회의 제도와 치리가 바람직하게 작동하도록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의 갱신이다.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일에 기독교의 존립이 걸려 있음을 깨닫고 절절한 심정으로 말씀을 묵상하며 변화되도록 공적인 계기가 마련돼야 한다. 요한복음 17장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가 사회와 역사 흐름의 책무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장로교 총회를 위해 기도하며 그 사역을 응원한다./기성 증경총회장·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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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포기하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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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시대 신학교육의 나아갈 방향
-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유행이 각 분야에 미친 영향은 크다. 그 가운데 가장 큰 현상은 관계의 단절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와 교육현장에 당면한 문제들 역시 크다. 그런데 모든 문제들의 근본으로 가면 관계 단절이라고 하는 데 집중된다. 공동체로서 교회의 문제도 다르지 않다. 또한 신학교육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학교육을 위한 특별한 묘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존경할 수 있는 선생님이 있어서 어떤 상황에서든 신학교육을 할 때, 다음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교육과 관련한 증거는 확실하다. 즉 6·25사변 당시 전선에서는 전쟁을 치르면서도 국공립학교는 물론이고 사립학교들도 피난지에서 임시로 학교를 열어서 가르쳤다. 전시하에서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쉬지 않았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신학교육도 다르지 않았다. 피난지에서 당장 하루를 살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임에도 천막을 치고 신학교육을 했고, 소명을 확인하는 이들이 천막교실을 찾아들었고, 그 이들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만들어 놓았다. 당시 신학생으로서 그들에게 하루는 절박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우선순위에서 뒤로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전국의 각 신학대학원의 지원율은 급격하게 저조해 지고 있다. 많은 신학교들이 현실을 감안하여 입학정원을 하향 조정했음에도 미달사태를 막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당면한 이 사태를 단순히 신학교육의 방법론으로 극복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질문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지 교회들에서 소명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안내와 가르침,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제시해야 하는 것이 먼저 일 것이다. 그리고 신학교육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와 신학생들 모두가 존경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신실하고 경건하며 기꺼이 따르고 싶은 신앙인력이 준비된 선생님이다. 신학교육은 단지 방법론이 아니다. 신앙인격과 성경신앙에 대한 확신, 그리고 신학의 깊은 이해와 가르침을 따를 수 있게 하는 능력을 갖춘 선생님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선생님이 신학생들과의 신뢰와 존경을 전제한 사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이 단절된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비록 비대면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신학교육은 선생님의 신앙과 함께 신학이 전수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선생님은 제자들과의 관계를 더 긴밀하게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제자들에게 단순히 신학 지식을 전달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신뢰와 존경이 전제된 관계에서 자신의 신앙과 삶으로 담아내는 신학을 전수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학교육은 단지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경건한 삶과 섬김, 신학에 임하는 신실함 등 선생님의 삶에 도반(道伴)하는 제자들에게 나눔으로써의 가르침이어야 한다. 또한 그러한 가르침에 감동하면서 그 선생님을 닮고자 하는 사모함이 있을 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할지라도 결코 신학생 됨을 포기하거나 소명에 대한 우선순위를 뒤로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동행하고 싶은 선생님이 더 필요하고 절박하게 아쉬운 것은 필연이라고 역사는 말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유행과 함께 많은 제안들이 있는 것을 접하게 된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진정 동행하고 싶은 선생님이 더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역사가 교훈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이다.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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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시대 신학교육의 나아갈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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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를 통한 다음세대 부흥
- 한국사회는 다음세대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학령인구는 40만 명대 중반으로 12년간 유지되지만, 만5세 학령인구는 35만 명이며, 만2-5세 학령인구는 30만 명, 만0세 학령인구는 20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올해는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앞질렀다. 외국 이민자 수용 등 대안이 나오지 않는 한 한국인구 전체가 급감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저출산은 영적 차원에서도 일어난다. 다음세대 복음화율이 상대적으로 더 낮기 때문이다. 다음세대의 인구 자체가 적은데다 다음세대 내에서의 복음화율은 더욱 낮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교회는 다음세대를 위한 예배와 교육을 충분히 행하지 못했다. 젊은 세대가 하나님 앞에 나와 새로워지는 여름성경학교와 여름수련회가 이뤄지지 못하면서 다음세대의 영적 교육은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맞아 한국교회는 이번 여름을 다음세대 재교육에 힘쓰고자 한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오기 전에 했던 프로그램을 반복하거나 확대하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어려울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서3:16-17)고 말씀한다. 코로나19는 우리 신앙과 삶의 거품을 걷어내는 계기가 됐다. 무엇이 우리 신앙과 삶에 꼭 필요한 것인지를 확인케 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성경이 답이다!”고 외친다. 한국교회의 다음세대 교육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갈 때 가능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우리가 연구하거나 판단하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로잡고, 의로 교육하기 위함이다. 성경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다음세대는 하나님께서 교장 되시는 ‘성경학교’를 통해 새로워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선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령께선 우리의 어두워진 눈과 마음을 밝혀주신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깨달아 겸손히 엎드리게 만드신다. 성령이 충만할 때 말씀의 생명력을 경험한다. 우리의 이성이나 경험으론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고, 말씀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없다. 우리의 처지나 상황을 들어 우리의 불순종을 정당화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쉬어선 안 된다. ‘성경이 답’이라 외치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이 기도성령운동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올 여름 한국교회는 말씀운동과 기도운동을 통해 다음세대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영적 저출산을 극복하고 영적 후손을 많이 낳아야 한다. 성령충만하여 복음을 전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코로나19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적용해선 안 된다. 예배·말씀·기도를 멀리했던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예배를 사모하여 말씀을 가까이하고 기도를 쉬지 않는 역사가 일어나길 바란다. 한국교회여, 다시 일어나라! 올 여름엔 오직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자. 그럴 때 영적으로 메마른 우리 심령에 성령의 단비를 내려주실 것이다. 영적 가뭄이 해소되고 영혼의 풍년을 맞이할 것이다. 오곡백과 만발한 추수를 기다리며 말씀과 기도의 씨를 뿌리자. /백석대 부총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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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를 통한 다음세대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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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의 순결함
- 한국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편만하게 스며든 복음에 대한 멸시와 한국교회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영역에 복음의 능력을 다시 불어넣을 수 있는 실마리는 무엇일까? 대다수가 기독교의 본질 회복을 외치고 있지만, 실상 기독교의 본질은 비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나온다는 주장은 그리 많지 않다. 본질을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교회의 내면에 도사리는 비본질을 파악하고 제거하여 삶으로 구현하는 작업은 꽤 고통스러운 자기성찰과 재습관화의 과정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힘(power)을 향해 움직이는 성향을 띠고 무언가를 숭배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삶의 목적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 대상이 무엇이든 예배하는 존재이다. 극단적 상대주의가 지배하는 현 세계에서 인간이 숭배하는 대상은 고대 신들의 재현으로서 동일본질이고 같은 목적을 추구한다. 그것은 성적 쾌락,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기본적인 욕구를 극대화하는 이 시대의 지배문화가 제공하는 다양한 형태의 우상숭배다. 우상숭배는 인간의 삶을 철저하게 황폐하게 만든다.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유일성과 보편성에 대한 확신이며, 이에 대적하는 모든 이념과 사상이 추구하는 우상과 싸움이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다양한 이방 신들을 섬기는 주변국들에 의해 둘러싸인 상황에서 유일신 야훼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연관된 싸움이었다. 바울의 선교사역은 1세기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 로마 문명을 지배하던 우상에 대항한 싸움이었다. 루스드라, 아덴, 그리고 에베소에서 바울의 사역은 신화적 우상, 철학적 우상, 그리고 경제적 우상에 대한 폭로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복음의 변증이었다. 성경 이야기의 중심에는 유일신 사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복음은 하나님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철저하게 밝히고 있다. 48년 전인 1974년, 빌리 그래함과 존 스토트 목사에 의해 출범한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운동은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자”라는 기치 아래 깨어지고 분열되고 상처로 얼룩진 세상, 끊임없이 변하며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는 공적 영역에서 변치 않는 복음의 온전함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로잔운동은 교회의 온전함과 순결함이란 야훼의 길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겸손하고 정직하며 단순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운동이다. 2024년 9월 로잔운동은 5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에서 제4차 로잔대회를 개최한다. 만일 로잔운동이 복음이 가져오는 도전과 충격 그리고 변화와 갱신의 활력을 글로벌 기독교와 한국교회에 제공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초래하는 교회의 지속적 회심과 변혁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 안에 내재한 우상들을 제거하는 예언자적 대항문화 형성과 대안적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새롭게 형성되는 길은 성경 이야기 때문에 재형성되어야 하며, 그것은 성경의 백성들이 주변 국가들의 우상에 굴복하며 좌절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헤쳐나간 그 길을 따르는 복음이 이루는 변화를 의미한다. 이 점에서 한국 사회문화 가운데 깊이 뿌리내린 우상을 타파하고 교회 안에 내재한 세속적 욕망을 극복하는 과제는 남은 자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서울신대 교수·한국로잔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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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이후 한국교회 일치운동 과제
-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계가 폭력, 팬데믹, 기아, 기후위기 그리고 수많은 다양한 고난 속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을 통해 세상에 소망을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역사 안에서 보여주신 그리스도는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으며,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다. 이 거룩한 사랑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성적 토대요, 자원이다. 교회는 분열과 차별의 세상 속에서 화해와 일치, 정의와 평화라는 복음적 가치를 담은 반문화적 증언의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세상을 화해와 일치로 이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곧 ‘마음의 에큐메니즘’의 중요성을 부각한다. 교회 간 대화에서 매우 어려운 주제들도 많이 있고, 교회들 사이의 차이와 다양성은 일치의 순례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일치를 향한 노력에는 차이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용납하고 존중하는 진정성 있는 사랑의 마음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아내는 마음이야말로, 타인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고, 형식적 관계를 넘어 신뢰를 형성하여 교회들이 가시적 일치를 이루게 하고, 또한 세상의 악·불의와 싸우는 실천적 정의를 가능케 한다. 교회는 무엇보다 ‘안전한 공간’이어야 한다. 이데올로기 혹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입장을 넘어서 대화와 소통의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는 노력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추구해야 하는 기본적인 영성적 노력이다. 또한 일치는 단순히 교단끼리 연합을 훨씬 넘어서 인류의 일치, 그리고 만물의 일치를 예시하는,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우주적 그리스도론’, ‘우주적 교회론’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고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인종·성·계급 때문에 분열하고 싸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류로서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 지향점이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정신인 것이다. 한국교회 에큐메니컬 운동의 과제는 다음과 같다. 우선, 기후비상사태 등 인류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생태적 전환과, 한반도평화에 대한 주체적 책임감을 바탕으로 한 탈분단 및 탈핵 등 그린엑소더스 운동의 확산이다. 한국교회는 21세기형 에큐메니컬 운동의 대각성과 활성화를 통해, 기후비상사태와 남북문제에 있어서 집단지혜 뿐만 아니라 새로운 동력을 제공해야 한다. 특히 기후위기 당사자 세대인 청년들의 에큐메니컬 운동 활성화를 도모해야 한다. 또한 지역과 지구촌을 함께 보는 글로컬 에큐메니즘을 건설할 필요성이 있다. 전국 단위의 단체들이 선구적으로 나서야 한다. 지역의 에너지, 먹거리 등 지역의 문제해결안에 집중해 정의로운 전환 및 돌봄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지역적 에큐메니즘을 실현하길 바란다. 이 과정에서 지역마다 여성단체와 청년단체가 함께 연대하는 일들이 활성화되어, 시민사회와 지자체가 결정하는 사항들에 도덕적 압력을 집어넣을 수 있는 프로세스가 작동되길 기대한다.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교회들이 서로 사랑하는 제자직의 기본을 다시금 확인하자. 그리스도인 개인의 관계, 교회 간 대화와 협력 관계에 특히 일치를 지향하는, 질적으로 성숙한 사랑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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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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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이후 한국교회 일치운동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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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통일의 길은 어떻게 오는가? 윤현기교수(아신대학교 북한연구원, 평화나눔재단 대표)
- 윤석열 대통령 취임후 청와대는 국민의 품에 안기고 드디어 용산시대가 열렸다. 탈북민 정착교육기관 교육 중 용산 전쟁기념관 탐방이 있다. 전쟁기념관 탐방시 문화 해설사님의 해설을 듣던 탈북민이 혼란스러워했던 기억이다. 북한에서 6·25는 북침으로 교육받은 탈북민이 문화 해설사님의 ‘6·25는 남침으로 일어난 전쟁’임을 상기할때 혼란스러워하던 기억이다. 역사왜곡으로 혼란을 겪던 탈북민은 6·25전쟁 발발 진실이 해소되어지는 듯 하지만 역사의 진실앞에 괴로움은 분명하다. 왜곡된 역사의식을 바로잡는 일은 혼란을 초래하지만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자료로 가능하다. 생생하게 기록된 전쟁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용산전쟁기념관은 전쟁의 교훈과 호국정신 배양을 목적으로, 선열들의 호국 위훈추모를 목적으로 1994년 6월 개관하였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평화를 다짐하는 평화광장 좌우로 625전쟁 참전국 기념비와 국기들, 21개국 참전국에 대한 감사와 추모의 글들이 보인다. 호국의 별이 되신 호국영령들이 한반도 대한민국을 지켜주고 있는 불빛들로 머리를 숙이게 한다. 6·25전쟁은 1950년 6월25일 북한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 38선 전역을 불법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이다. 국방부는 남침이라는 표현보다 ‘북한의 남침’을 공식용어로 사용하기로 하여 혼란과 왜곡을 차단한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분단의 아픔과 긴장관계는 지속되고 이산가족 문제 등 전쟁의 아픔과 상처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안에서의 일이다. 정원초과 되었으니 ‘나중에 타신분은 내려주십시오’라는 멘트가 정확히 나왔지만 나중에 탑승하신 노인은 내리지 않는다. 젊은 청년 한분이 아무 말없이 내렸다. 여전히 멘트가 나온다. ‘나중에 타신 분은 내려주십시오’ 여전히 노인은 내리지 않고 또 다른 젊은 청년이 내린다. 그때야 엘리베이터는 조용히 내려갔다. 언젠가 ‘나중에 타신 분은 빨리 내리십시오’ 소리치던 젊은 청년이 있었다. 오늘은 아무 말없이 젊은 청년 두 분이 내린 다음 작동하였다. 같은 상황에서 젊은 청년들의 태도가 상이하게 나타난 경우이다. 젊은 청년들의 태도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젊은 청년들의 태도가 서로 상이하게 나타난 사례로 올바른 의식과 교육은 젊은 세대에게 긍정적 요인으로 작동한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향한 통일교육 강좌에서 2021년도 00대학교 통일교육 강좌 이전, 이후의 설문 응답내용이다. 젊은 대학생들의 ‘통일은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부정적인 응답은 통일비용인듯하다. 한반도 평화통일은 통일이후 안정적 발전보다는 불안과 빈곤으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염려이다. 막연한 두려움이다. 부정적 통일관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대학생 통일교육 강좌 이전에는 통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부정적 인식으로 나타난다. 통일교육 강좌 이후 통일에 대한 긍정적 인식으로 변화됨을 확인할 수 있다. 2021년도 00대학교 통일교육 강좌이후 ‘귀하의 남북통일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요’라는 질문에 ‘여건이 성숙되기를 기다려 점진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좋다’라고 75%가 응답하고 있다. ‘귀하는 북한을 어떠한 대상으로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한민족으로 통일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87%가 응답하고 있다. 부정적 인식의 통일관이 긍정적 인식으로 변화됨을 확인하며 통일교육 강좌로 확대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북한은 미사일 발사를 십 수차례 반복하고 있으며 남북한 평화통일의 길을 멀게 느껴지게 한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비용에 대해 2022년 6월9일자 조선일보는 “올 8000억어치 미사일 쏜 북” 이라는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북한의 전 주민 백신비용과 맞먹는 수치로 북한 전 주민 2500여만명에게 화이자 백신을 접종하거나 올해 부족한 식량을 거의 모두 충당할 수 있는 금액으로 밝히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북한의 적대적 감정이 깊어지게 하며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무덤덤하게 느껴지기까지한다. 2022년 6월6일자 조선일보에서 국민대교수인 안드레이 란코프교수는 한국청년들의 통일과 북한에 대한 시각에 대해 “한국청년들은 점점 더 북한에 무관심하고 통일에 대해 적대적이기까지하다”라고 밝히고 있다. 통일에 대한 가장 큰 장애요인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적대적 태도이다. 한반도 평화통일은 독일처럼 갑자기 예기치 않게 다가올 수 있다. 한반도 평화통일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625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기억한다. 6·25전쟁으로 10만 여명이 넘는 전쟁고아와 이산가족이 발생하였고 가족과 헤어져 1000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이산가족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만날 수 없고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 무심한 세월이 흐르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행사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그리워하며 고령의 많은 사람들은 한 많은 세월을 뒤로 하고 세상을 등지고 있다. 625전쟁으로 국토는 80%기 피괴되었고 많은 문화재가 부서지고 사라졌다. 6·25전쟁으로 인한 남과 북의 불신의 벽은 높아지고 적대감으로 전쟁이 남긴 상처는 엄청나다. 서로의 상처와 아픔 속에 화해의 길은 더욱 멀어져가고 있다. 화해란 서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풀어버리고 없애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구세주이신 예수그리스도는 화해의 왕으로, 평화의 왕으로, 샬롬의 왕으로 죄인된 인간에게 생명을 바쳐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한반도 평화통일의 길은 남북이 서로 상처와 아픔을 달래며 화해하는 사역에서 구체화할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 화해사역은 남과 북의 화해로 한반도 평화통일의 길에 성큼 다가갈 수 있다. 서로를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와 사랑의 길은 화해 사역의 첫걸음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적인 엄청난 어려움으로 식량난 원유 천연가스 등 에너지 자원까지 세계의 경제상황을 재편하는 경제전쟁으로 비화하고 있음을 목도한다. 아무리 명분있는 좋은 전쟁도 나쁜 평화보다 못함을 실감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반도에도 전쟁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확인한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갈망하는 한반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쟁과 평화의 양면을 체득하며 6·25를 상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아아 어찌 우리 잊으랴 그날을’ 잊을 수 없는 6·25의 역사를 기억하며 상기한다. 역사의 히스토리아(historia)어원은 탐구 구명으로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헤로도토스의 책이름이다. 역사란 진실을 찾아내는 의미로도 사용한다. 역사는 사실과 기록이 부합함을 탐구하며 구명한다. 625의 역사탐구와 구명은 시대적 요청이다. 코로나가 창궐하고 있는 북한에 백신지원과 방역물품 지원 사역은 북한의 인도적지원의 길로 화해사역으로 다가갈 수 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화해의 왕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 사 역은 한반도 평화통일을 갈망하는 기독인들의 몫이다. 뜨거운 눈물의 기도로 절대주권을 의지하며 한반도 평화통일의 그날이 속히 도래하기를 기도하며 기대한다./아신대학교 북한연구원, 평화나눔재단 대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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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통일의 길은 어떻게 오는가? 윤현기교수(아신대학교 북한연구원, 평화나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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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열사의 민족정신과 이타주의의 필요성
- 이타주의는 프랑스의 철학자 꽁트(A. Comte)가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로서 애타주의라고 하며 도덕의 기초는 인애, 동정심이라고 하여 타인의 행복이나 복리를 행위의 목적으로 한다는 사회적 공리설이다. 즉 그에 의하면 이타주의란 ‘사랑을 주의(ism)로 하고 질서를 기초로 하여 진보를 목적으로 하는 주의’라고 한다. 이타적 성향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이익이나 복지보다는 타인을 먼저 고려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지며 자기 자신은 그러한 행동으로 인한 불이익을 감수하기도 한다. ‘이타주의’사상은 인류 역사가 시작되면서 사회가 존속하는데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윤리적 입장에서 본 이타주의는 타인의 선(good)을 이루는데 그 목적을 둔다. 이는 자신보다는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사상이다. 유관순열사는 하나님 안에서 훈련을 받아 이 나라에 독립을 위해서 순교한 한국의 에스더이다. 신사참배하는 미신의 나라인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긴 상황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만 믿고 목숨을 바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을 보면, 그 어린 18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에 나오는 열정과 자신감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19년 3월1일 정오, 탑골 공원을 시작으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유관순열사는 친구들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가 덕수궁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유관순열사는 음력 3월 1일 아오내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추진하였다. 이날 수천명의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시위 전개에서 잔인한 일본헌병의 총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아오내 만세시위 주동자로 잡혀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유관순열사는 재판에서 "나는 조선 사람이다. 너희들이 우리 땅에 와서 죄없는 우리 동포를 수 없이 죽였으니, 죄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다. 그런 너희가 어찌 재판을 하겠단 말이냐? 당치도 않은 수작은 집어 치워라!" 하고 일제법관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법정모욕의 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계속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17세의 나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이처럼 일제는 어린 학생뿐만 아니라 평화적으로 진행되는 만세 운동을 총칼로 진압하여 수 만 명을 죽이고, 10여만명의 부상자를 내었으며, 재판을 받은 사람도 만 명이 넘을 정도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시위 군중에 대한 학살뿐만 아니라 체포된 사람에 대한 고문 또한 잔인하기 그지 없었으며,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기도 하였다. 3.1운동은 교회를 중심으로 터졌던 민족운동의 거대한 흐름이었고 거국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교인들과 학생들의 동원이 가능하여 전국 조직망을 통한 의사소통과 연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1운동은 기독교의 애국운동이며 신앙운동이었다. 유관순열사는 여자의 몸이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3.1운동에 앞장서는 용맹함과 이타주의적인 마음으로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 '대한민국 독립'을 외쳤던 유관순의 애국심과 이타주의 사상을 본받아야 한다./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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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열사의 민족정신과 이타주의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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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건강한 가정
- 5월은 가정의 달이다. 1994년부터 5월을 가정의 달로 정해진 것은 그만큼 가정이 건강하게 지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한다. 그 좋은 계절 5월이 가정의 달로 지켜지면서 건강한 가정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가정은 점차로 해체의 수준을 밟아가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정의 사전적인 의미는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공동체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2명 이상의 가족 구성원으로 가정이 형성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현재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일인가구의 확대이다. 2021년 10월 행안부 조사에 따르면 주민등록상으로 일인가구가 40%가 넘었고 4인 가족은 20%이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한국사회에서 적어도 두 명 이상이 함께 사는 가정의 회복이 절실하다고 하겠다. 한국의 가정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가정을 지켜나가야할 가장 중요한 주체가 기독교인들이 되어야 하겠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물결을 따르기보다 성경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성경이 기독교 가정에 대해서 가르치는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하면서 행복한 기독교 가정을 꿈꾸어야 하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창세기 2장 18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하와를 지으셨다. 그리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룩하게 하셨다. 이것은 결혼의 제도화를 말하지만, 동시에 가정의 설립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셔서 두 사람이 한 가정을 이루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이루신 목적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기독교의 가정은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이 없이 가정이 온전하게 세워질 수 없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때에 하나님에 세우신 가정의 목적이 가장 잘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님이 가정은 만드신 목적이 바로 가정이 교회가 되어 하나님을 잘 섬기며 예배하는 가정이 되는 것이다. 가정이 하나님을 잘 섬길 때에, 하나님께서 가정의 주인이 되셔서 가정에 필요한 복을 주실 것이다.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어울려 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의 향기를 나타내야 하겠다. 기독교 가정에서 부부는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여 황혼에 더욱 행복해지는 부부가 되어야 하겠다. 부모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오늘날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서, 자녀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한 화두로 대두되고 있다. 자녀를 하나님의 기업으로 알고서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녀로 성숙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자녀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대화를 하고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부모와 자녀, 형제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이었다.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여 세상에서는 점차 단독 가구가 많아지고 있지만, 기독교가정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지켜지고 구원의 기쁨이 넘쳐나는 행복 가득한 가정이 많아져야 하겠다./안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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