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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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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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9
  • [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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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3
  •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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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8-27
  • 장로교총회에 바란다 -한국사회를 이끄는 향도의 역할
     비록 2-3년 지난 통계이긴 하지만 한국의 주요 6개교단 (합동 통합 고신 기장 기감 기성)의 교인수는 704만 여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중 범 장로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합동 통합 고신 기장의 교인수의 합은 500여만명이다.(2021.10.28. 미주중앙일보 보도) 장로교단이 한국교회의 주류교단임을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 교세만큼 막중한 책임과 의무도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런 한국 교회를 아우르는 맏형님격인 장로교단이 9월 일제히 총회를 개회한다. 년례적으로 치르는 행사에 머물지 않고 올해는 보다 전향적이고 알맹이 있는 내용과 결과를 도출하는 총회가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한 두가지 소망사항을 피력하려 한다. 한국교회 무게중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장로교단의 총회가 향도가 될 때 여타의 다른 교단도 많은 힌트를 얻어 함께 한국교회의 길을 걸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기대하는 것은 대사회적 대국민적 대정부적 영향있는 메시지가 나오는 총회이기를 기대한다.   그 위상을 미루어 볼 때 장로교는 얼마든지 한국사회 전체를 향한 메시지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정치의 혼란, 의료문제의 갈등, 교육계의 아픔, 북한과의 관계, 기후문제, 인구감소문제 등등 교계의 관점에서 얼마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큰 울림이 있는 메시지를 장로교단의 총회후에 들어본 기억이 많지 않다. 작은 토끼 하나의 외침보다 사자나 호랑이의 포효가 산 전체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이제는 사회가 교계를 염려하는 모순을 넘어 다시 한번 교회가 한국 사회를 바르게 이끄는 향도의 역할을 해야한다. 그 선봉에 장로교단이 있다. 나아가서 이번 장로교 총회는 목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제고되는 총회이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교회 아니 한국의 장로교회는 역사적으로 한국사회의 소외된 곳을 위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헌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장로교단을 통하여 사회에 끼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적 관심과 공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과업이다. 교육, 의료, 복지차원에서 그 어떤 종교집단보다도 큰 공헌을 한국교회가 해왔다. 이제 그런 대 사회적 복지차원을 넘어 교회안의 목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도를 배증시켜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의 교단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직도 여성안수에 대한 문제하나 속시원하게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부목사나 전도사 강도사등의 교회 내의 지위나 위상이 열악한 것도 사실이리라. 교회내의 목회적 약자들을 단순한 목회의 조력자를 넘어서는 협력자요 동반자로 보는 인식이 더 많이 더 널리 여울져 나가야 한다.  막중한 업무량에 비해 최저임금수준에도 미달하는 현실의 대우와 목회자로서의 예우도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총회에서 그런 목소리들이 나오면 그 당사자들이 얼마다 용기백배하겠는가? 그런가하면 줄어드는 교인수와 다음세대 교회구성원들에 대한 관심의 실제적 조직적 제고이다. 앞서 언급한 언론보도를 보면 5년전보다 통합은 14% 합동은 10% 정도의 교인수가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세대 교회 구성원인 어린이들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이에 대한 심각한 고민들이 총회를 통해 제기되고 해소 방법론에 대한 토론이 일어나고 조직적인 치유의 움직임이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장로교회는 단순한 여러 교단중의 하나가 아니다. 한국교회를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바로 장로교단에게 있다. 그것을 피해서는 안된다. 삼가 이번 9월의 총회가 성총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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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8-14
  • [정론] 광복 79주년, 평화를 찾는 좁은 길
     일본의 조건 없는 항복으로 지난했던 태평양전쟁이 종식되면서 8.15 광복을 맞이했다. 올해로 79주년이 되는 광복절의 광(光)은 빛을, 복(復)은 되찾다는 뜻으로, ‘잃었던 빛(나라)을 다시 찾은’ 것을 이른다. 해방을 맞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는 일제식민통치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토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자기 주권을 가지고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남북한은 외적 강제로 인해 각각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남북한의 정치적 이념과 체제가 달라지게 되었다. 냉전의 시작은 세계 각국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특히 한반도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정치적 대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과 북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깊은 상처인 동족상잔의 비극을 우리 민족의 마음에 새겼다. 그 트라우마는 우리 안에 이념의 모양으로 나타나 계층으로, 소득으로, 성향으로, 남녀로 우리를 가르고, 나누고 균열을 만드는데 충실했다. 79년의 분단은 우리를 그렇게 갈라놓는데 그치지 않고 교회도 분단의 영향을 받게 된다. 해방이후 한국의 기독교는 6.25 한국전쟁의 영향과 새로 들어선 이승만정부와 밀접한 관계 속에 철저한 반공의 입장을 취해 왔다. 특히 1950년대는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운동의 참여 여부를 놓고 갈등과 분열을 겪은 시기인데,1960년 3.15부정선거와4.19민주항쟁,1969년 삼선개헌 등 격동하는 한국의 상황 속에서 교계가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금년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71주년으로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을 잠시 쉬고 있는 휴전상태다. 그 긴 세월 동안 한반도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우리는 분단의 역사를 통해서, 싸움보다는 화해를, 비난보다는 대화를, 적대보다는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했던 것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이롭다는 것을 안다. 현재 남북 그리고 북남은 ‘강대 강’으로 대치하고 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연일 한쪽은 핵·미사일 고도화로 다른 한쪽은 전쟁연습으로 군사적 긴장을 최고조로 올리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도 보듯이, 전쟁은 예측할 수 없다. 서로의 오해와 작은 실수로 인해 국지전 더 나아가 전면전으로 확전될 수 있다. 한반도는 이 군사적 긴장이 어느 때보다 높다.     남북의 연락망은 끊어진 지 오래되었고, 마지막으로 전쟁의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안전핀 역할을 했던 9·19군사합의 또한 무력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를 향한 도발과 심리전은 서로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79년 전 일제로부터 해방의 기쁜 소식이 울려 퍼졌는데, 79년이 지난 2024년 오늘은 서로를 향한 적대와 비난의 소리가 가득한 광복을 맞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가 유일한 길임을 아는 자들로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야겠다. 힘으로 겨루는 전쟁은 안 된다. 시편의 시인은 “악한 일은 피하고, 선한 일만 하여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34:14) 권면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긴장을 만들고, 비난을 전파하고, 적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평화의 사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절대적 소명이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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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6
  • [정론]크리스천의 바른 휴가
    바야흐로 휴가철이다. 자영업자는 휴가가 없다. 그러나 한국 직장인들의 근무시간은 OECD 연평균보다 199시간이나 길다고 한다. 그러니 내게 휴가가 주어지면 가능한 한 자연의 품으로 떠나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신 대자연이다. 휴가의 기회가 있으면 무조건 떠날 일이다. 크리스천은 더욱 그렇다. 직장에서 5일간 시달리고 주일에는 또 교회에서 봉사하느라 심신이 피곤해진 상태기 때문이다. 떠날 때 성경, 찬송은 필수라고 무거운 짐 속에 넣고 가도 되지만 불신자와 단체 행동을 할 때 시도 때도 없이 책을 꺼내어 기도하고 앉아 있으면 역전도와 꼴불견이 된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떤 농부가 너무 가물어서 소리를 내어 울면서 비를 내리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들로 나가려고 했을 때 집에 있던 어린애가 아버지에게 우산을 갖다 드렸다. “웬 우산이냐?” 이때 “아버지,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어요?”라고 아들은 말했다고 한다. “허 참, 그것은 그냥 기도지. 이 날씨가 어디 비가 오게 생겼냐?” 하고 아버지는 그냥 나갔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의례적인 기도를 크리스천은 단체행동에서 삼가야 한다. 다만 크리스찬이 지나간 자리에는 버린 쓰레기가 없어야 하고 남이 버린 쓰레기까지 수거하는 흔적을 남겨야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옛날 전보가 가장 빠른 통신 방법이었을 때 한 젊은이가 전보를 보내는 통신원 자리를 찾고 있었다. 지금은 전화, 핸드폰 등이 많아 전보를 모르는 젊은이도 많을 것이다. 그런 1950년대에 신문의 광고에 적혀 있는 주소를 따라 젊은이는 한 사무실로 갔다. 건물에 들어서서 그는 크고 넓은 대기실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소음과 말소리와 전보치는 소리로 매우 소란한 곳이었다. 접수처 카운터에는 소정 원서에 필요한 내용을 다 기록해 제출한 후 안쪽 사무실로 들어오라는 명령이 있기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씌어 있었다. 젊은이는 원서를 다 쓴 뒤 대기소에서 일곱 사람의 다른 지원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몇 분 후 그 젊은이는 일어서더니 방을 가로질러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사장이 그 젊은이를 데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와 다른 지원자들에게 말했다. “신사 여러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제 빈자리는 채워졌습니다.” 다른 지원자들은 서로 불평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한 사람이 말했다. “사장님, 이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는 맨 나중에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면접을 요청받은 바도 없습니다. 그런데 취직이 된다니요. 이건 불공평합니다.” 사장은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앉아 있는 동안 내내 전신기는 계속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송신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 내용을 이해하면 안으로 들어오시오. 자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아무도 이 전신 부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젊은이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이 젊은이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소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작업이다. 자연 생태계 파괴로 폭우가 쏟아져 집을 잃고 생활수단이 망가져 망연자실한 이웃을 차마 볼 수가 없다. 거기다 국내의 요란한 정치 소음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세계에 6위에 해당한다는 우리나라의 운명을 백척간두에 세우고 있다. 그래서 과연 크리스천이 이 순간 하나님께 기도하며 진리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한가하게 휴가를 잘 즐길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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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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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세기의 교회는 시대를 거스리는 교회
      사회의 발전은 눈부시다! 너무나 말을 많이 해서 발전과 성과에 대한 말은 진부해졌다. 하지만 그 발전과 성과가 성경적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고찰이 훨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이 글도 그런 글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4차 혁명과 연관해서 교회가 유심히 살펴야 할 분야는 가상세계의 현실성 문제일 것이나 이는 차치해두고 일단 교회의 기본적인 자기 근거부터 정확하게 정립하는 일 자체도 이제는 시급한 과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야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무엇이고 성경에서 증거 되는 교회에 적합한 신학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사건의 한 순간에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와 연관된 통합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그 계시가 가져오는 전체적인 의미의 장(場)적인 변화가 어떻게 교회와 연관되며 실현되고 있을까?의 물음은 오늘날의 신학적 과제로 등장하는 것 같다. 이는 올바른 교회론은 성도의 영성생활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긴밀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성도의 삶을 주도할 수 있는 영성 이해가 교회론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성결교회의 교회론은 시의 적절하고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결교회는 사중 복음이라는 전도 표제를 갖고 있으며 이는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될 때 나타나게 될 4가지 특징적 요소들을 말해주고 있다. 즉, 중생-성결-신유-재림의 사중 복음은 우리 성결교단이 실천적으로 수행하고 지향하는 삶의 실천운동의 표지들이며 웨슬리의 복음 이해인 성결의 종말론적 특성을 드러내는 영성생활의 표지인 것이다. 마치 성례전에서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며 지향하는 것처럼 사중복음은 이제 웨슬리의 성결(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결교회가 지향하는 성도의 삶의 핵심적 지평(중생-성결-신유-재림)들은 웨슬리적 성결의 체험에서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종말론적 새로움이 우리에게서 가장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된 경험들의 단면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웨슬리의 종말론적 복음 이해인 성결론에 근거한 사중복음과 그에 따른 교회론은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일까? 성경에서 제시되는 기독교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의 원형적 신앙 형태는 무엇일까? 진지한 연구에서 밝혀진 초대 교회의 모습은 성령의 강력한 충만하심과 내주의 경험에서부터 새로운 동력을 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임재한 성령은 철저하게 종말론적 성취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선물이었고 그 종말론적 성령의 역사에 기초하여 교회가 성립된 것이다. 교회는 모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비전과 새로운 자기정체성을 정립하게 하는 그런 하나님의 가능성에 기초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이를 성결(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여 하나님의 복음의 결과가 성결이며 교회는 그 성결의 공동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하였다.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은 바로 이러한 종말론적 선교의 표지들이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종말론적 선교공동체인 것이다. 세기의 변화와 더불어 성령에 대한 관심이 더 구체화되면서 성령의 예언자적이며 계시의 역할을 통한 구속사에서의 주도적 지위에 대해서는 더 많은 관심과 이해를 갖게 되었다. 즉 구원의 내적 근거로서의 성령의 사역이 내재적 삼위일체의 근거로 이해되면서 신학의 핵심적 논의에로 발전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21세기 앞으로의 신학은 이런 점에서 성령의 신학일 수밖에 없으며  웨슬리의 성결론의 신학과 초대교회로부터 유래한 성결운동의 선배들이 가졌던 신앙의 유형은 성령의 구체적인 현실로서 이해되는 종말론적 성령 체험 신학이었고 교회는 바로 그런 그런 단체로서 시대를 거스르는 선교적 공동체인 것이다.  /서울신대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6-08
  • ‘MZ 세대’를 위한 미래교회를 제안한다
    서로 사랑을 나누고 포옹을 하면서 격려를 해야 할 가정의 달이지만, 마스크를 쓴 채 5일 어린이날과 8일 어버이날을 보내면서 내년에는 밝은 얼굴을 서로 대할 수 있을지 여전히 의구심이 든다. 지치고 힘든 때일수록 가정이 회복되고 가정의 기초인 교회가 소외된 사람을 보듬어 주어야 하는데, 교회마저 코로나 상황에서 심각한 존폐 위기를 맞이하여 제대로 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코로나로 집회가 금지되는 상황이지만,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교회는 모이려고만 하지 말고 세상을 향해서 흩어지는 본래의 사명을 회복하여야 한다. 교회가 변화된 현실에서 미래교회를 준비하며 이 땅의 젊은이들과 소외된 자들에게 다시 희망을 노래하고 꿈과 비전을 심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시급한 일들이 무엇일까?   예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예수께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죄를 지은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셔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랑을 베풀었을 때,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계속된 공생애 동안에 저 멀리 시리아와 요단강 건너편과 예루살렘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움을 받았다. 코로나로 모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교회마다 재정을 걱정하는 일에 골똘하기 보다는 자기 목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적극적으로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교회 주위에서 고통당하는 강도만난 자에게 참된 이웃으로 다가가는 교회의 예수사랑을 회복하는 길이다.   MZ 세대를 품어야 한다.밀레니엄 시대의 M과 그 다음 세대인 Z의 합성어가 MZ 세대라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축복하면서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바로 이 시대의 MZ 세대를 품어야 할 것을 교회에 일깨우는 말씀이다.   교회 건물은 모든 이를 위한 공유물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가를 지는 일과 MZ 세대를 품는 일은 지금 고난 속에 있는 한국교회가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다. 미래교회가 소외된 자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젊은이들의 활동무대가 되어 미래를 향해 날개를 펼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하려면, 교회 건물을 예배나 성경공부를 위한 장소로만 한정짓는 좁다란 로마 천주교의 암흑시대인 중세의 수도원 개념에서 탈피하여 모든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유 장소로 제공해야 한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이들이 모임이라는 근본적인 원리를 중시하여 비대면 시대에 건물 가용 공간에 20%의 인원이 자유롭게 모이는 공간으로 활용하어야 한다. 미래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는 공간이 되도록 사람의 모임을 중심으로 예산을 재편성하고 공유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해야 한다.   초기 한국교회에서는 교회를 공회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직 교회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는 시대에 누구나 교회에 와서 음식도 나누고 한글도 배우면서 일제 강점기의 고통 속에서 민족이 나아갈 희망을 보여준 것이 한국교회이다. 어떤 이는 교회를 연애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청춘 남녀가 만나 사랑도 하고 가정도 꾸리고 미래의 꿈도 같이 꾼 장소가 한국교회이다.   이제 미래한국교회는 스스로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모임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교회의 공간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사실 나도 활동 범위를 넓히기 위해 공적 장소인 연구실이 필요하지만, 3남매와 사위와 며느리와 손녀를 위해 필요한 사랑을 베풀면서 어른 노릇을 하려니 마땅한 활동 공간이 없다. 어느 교회가 나 같은 학자들에게 선뜻 장소를 제공해 주면 감사할 일이 될 것이다. 더구나 MZ 세대를 끌어안는 모임을 위해 교회 시설을 내놓는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장신대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1-05-28
  • 생명을 나눕시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은사는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은사가 없는 사람이 있다. 은사가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은사가 있으면서도 자기를 높이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받은 은사는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은사를 사용하여 내 자신을 높이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존귀하게 해한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이다. 은사는 카리스마(charisma), 즉 선물이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은사는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조건 없이 받았다. 나눔은 우리가 받은 것을 나누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나누어야 한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어야 한다.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몸된 공동체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용되어야 한다. 사랑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이다.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랑으로 해야 한다. 사랑 없는 선행은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하다. 사랑이 가장 좋은 길이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 병든 사람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는 제자들의 소유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은사들을 각자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나누어주신다. 누구에게 어떤 은사를 주시는지는 주시는 분의 마음이다. 인간의 뜻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은사들 사이에 우열이 없다. 우리가 영적으로 더 성숙해서 어떤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공적이 아니라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각기 은사를 나누어주시는 목적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품을 우리 안에 세우시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이다. 나눔은 우리가 먹고 쓰고 남은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눔운동을 하면 물질적 나눔을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 일도 중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나눔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죽어가는 영혼들이 새 생명 얻도록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영적 생명을 얻은 사람은 영적 생명을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다.    한국교회는 다음세대를 걱정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운 이 땅에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의 밝은 빛을 비추어 주셨다. 그 귀한 은혜로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은사를 받아 누리기만 하고 다음세대에 나누어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선물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그 선물을 다음세대에 전해주어야 한다. 또한 우리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 선물을 나누어야 한다. 다음세대를 겸손히 섬겨야 한다. 다음세대의 문화를 이해하고 다음세대의 눈높이에 맞추어 우리가 받은 복과 은사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그러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 다음세대를 향한 복음 전파는 진정한 나눔운동이다.  /백석대학교 기획부총장, 조직신학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1-05-18
  • ‘효’를 넘어 ‘HYO’이어야 한다
      『역사의 연구』라는 명저를 저술한 세계적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가 6.25전쟁 직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3대가 어우러져 사는 한국의 효(孝)사상과 가족제도를 관찰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비록 한국이 지금은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이 나라는 머지않아 선진국가로 도약할 것이다.   효행이라는 아름다운 미덕을 지녔기 때문이다. 장차 한국이 인류에 기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바로 가족제도와 효사상일 것이다. 만약 지구가 멸망하고 인류가 새로운 별로 이주해야 한다면 지구에서 꼭 가지고 가야할 제일의 문화는 한국의 효문화이다.”    그로부터 세월이 반세기 이상이 흘렀다. 2019년 현재의 상황을 살펴볼 때, 우리 사회에 과연 효행(孝行)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우리나라가 가진 5천년 역사의 찬란한 정신 유산인 경천애인(敬天愛人)과 홍익인간(弘益人間) 사상에 기초한 효사상에 대해 얼마나 많은 국민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가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찍힐 수밖에 없다.    심심치 않게 신문 지면에는 생활고와 가족부양의 부담 때문에 존속살인까지 벌어지는 데에야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된다. 우리 사회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 각박해진 인심과 메마른 인성으로 인해 사회의 기초가 흔들리는 위기감을 느끼고 국회에서는 지난 2014년 인성교육진흥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교육부가 인성교육종합계획을 5년마다 짜야하고, 교육청이 매년 인성교육시행계획을 추진해야 하며, 일선 교사들은 매년 4시간 이상의 인성교육 연수를 받을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교육을 통해 인성을 함양하려는 취지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문제해결 방향은 우리 국민이 가지고 있는 뿌리의식을 되살리는 데 있다고 본다. 부족하지만 나는 1995년부터 “효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고 외쳐왔다. 1998년 인천에 성산효대학원대학교를 설립했고, 같은 해 한국효학회를 창립하여 2003년부터 공청회와 방송토론 등을 거쳐 2007년 7월 2일 ‘효행 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결실을 맺었다.  이 법률을 근거로 하여 한국효문화진흥원, 하모니효인성교육원 등이 세워졌다. 이 같은 나의 열정은 ‘효’는 성경에 있는 것이고(딤전5:4)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효자로 길러내는 ‘효경’이어야 한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효운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 중의 하나는 일부 여성과 젊은이들이 ‘효’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과 오해를 갖고 있는 부분이었다. 과거 왕조 시대에 체제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효를 이용해왔기 때문이다. 군주제의 효는 일방적이고 불평등하며 가족이기주의를 바탕으로 할 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의 권익이 철저히 소외되고 박탈되었었다.    이처럼 ‘효’라는 단어가 상당수 사람들의 의식 속에 부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한 효문화를 중흥시키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경을 다시 읽었고 시편 133편에서 ‘하모니’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개역한글에는 ‘연합’으로 번역되었지만 NLT 영어성경에는 시편 133편에  ‘harmony’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온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하모니’이다. 사람과 하나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모니해야 하는 데 그 출발은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의 하모니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효를 영어로 ‘Harmony of Young and Old’의 줄임말인 ‘HYO’라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HYO의 효는 과거의 효와 달리 자유로운 개인, 민주적 절차, 쌍방적, 관계적이며 평등한 인간관계, 이타주의와 애경(愛敬)을 바탕으로 하는 성경적 효이며 대한민국의 건국사상인 경천애인과 홍익인간을 구현하는 현대적 효이다. 그러므로 ‘효(孝)’를 넘어 ‘HYO’이어야 한다. /성산효대학원대학교총장·인천순복음교회 원로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05-12
  • 코로나, 가정이 친밀해질 수 있는 역설적 기회
      ‘홈트’ ‘집콕’ ‘확찐자’ 코로나 신조어다. 홈트는 ‘홈 트레이닝’, 집콕은 ‘집에만 콕 박혀 있음’의 약어다. 확찐자는 살이 급격히 찐 사람. 확진자에서 파생한 신어다. ‘언택트’는 ‘접촉’을 의미하는 ‘contact’ 앞에 부정을 뜻하는 ‘un’을 넣어 만들어진 콩글리쉬다. 파생어로 ‘온택트’도 등장했다. ‘온라인을 통한 적극적인 비대면 소통’을 의미한다. 한국만이 아니다. 미국은 코비드디보스(covidivorce)란 단어가 등장했다. 코로나(covid)와 이혼(divorce)를 합성시킨 ‘코로나 이혼’을 의미한다.    코로나는 혁명가다. 혁명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엄청난 변혁을 곳곳에 일으키고 있다. 사고체계의 변화만이 아니다. 일상을 바꾸었다. 가정생활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재택근무가 빈번해졌다. 기회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다. 누구에게는 ‘기적의 해’로 기억된다. 라틴어로 ‘아누스 미라빌리스(Annus Mirabilis)’라 불린다. 또 어떤 이에게는 ‘끔찍한 해’가 된다. ‘아누스 호리빌리스(Annus Horribilis)다.    실제로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자 가족갈등이 늘기 시작한다. 세 끼 밥을 ‘집 밥’으로만 해결하려 들다보니 아내는 지친다. 명절 가사노동이 코로나 가사노동으로 전환된 꼴이다. 잔소리 시간이 는다. 간섭을 받는다고 여기는 순간 자존감에 상처가 생긴다. 예민해진 성격으로 끝내 고성으로 이어진다. 서로의 꼴을 못 본다. 모욕적인 언사가 쏟아진다. 정서적 폭력에 신체적 폭력이 나부낀다. 끔찍한 가정의 등장이다. 반대로 기적의 가정도 출현한다. 그동안 못다 했던 정성을 쏟는다. 아이들을 숙제를 돌봐준다. 말 그대로 ‘부모 챤스’다. 자기개발의 시간을 가족단위로 확장한다. 악기를 배운다. 가까운 산을 찾는다. 남편의 요리솜씨가 는다.  미국은 뉴욕 9·11 테러 후 이혼율이 32%나 줄어들었다. 재난을 말해준다. ‘가족이 답’이라고. 모자랐던 사랑을 쏟는다. 삶의 의미를 다시 성찰한다.   2011년 시카고 대폭설, 2012년 허리케인 샌디도 마찬가지였다. 정전과 단전·단수로 고립된 집안의 부부사이에는 사랑이 깊어졌다. 수많은 아기들이 태어났다.    코로나19의 상황에서 두 번째 맞이하는 가정의 달은 뭔가 달라야 한다. 2020년 긴가민가하다가 어정쩡하게 보내고 말았다. 우선 코로나의 명령에 귀 기울여야 한다.    “가정으로 돌아가라” 이 말을 뒤집으면 ‘부모의 시간’이 다가왔다는 말이다. 그동안 우리는 자녀들을 학원과외에 맡겼다. 부모는 돈 벌어다 주는 기계에 불과했다. 인격적 접촉이 부족했다. 아이들의 신앙교육도 마찬가지다. 주일학교에 집어넣으면 아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정작 내 아이가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 점검해 볼 여유조차 없었다. 앞서 이를 ‘부모챤스’라고 했다. 이제는 부모가 커리큘럼을 짜야 한다.   버드대 탈 벤 샤하르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성공한 사람은 평생 배우는 사람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묻고 경이로운 세상을 탐험한다. 나이가 15세이든 115세이든, 지금 시련을 겪고 있든 최고의 전성기에 있든, 당신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있든 상관없이 자신을 위한 교육 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가족만의 품격을 갖추기 위한 커리큘럼을 만들어야 한다. 생존전략이라고 해도 좋다. 이전에 하던 방식으로 선물 사주고 회식하고 놀러가는 가정의 달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 가정의 헌법을 제정하고 공표할 때다. 가족사명서의 작성도 좋다.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수련계획을 짜보자. 코로나시기에 맞은 가정의 경제교육도 필요하다. 자연학습은 또 어떤가? 집 밖을 조금만 벗어나 보라. 천지가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노래하고 있다.    안네의 일기까지는 아니라도 가족이 공동으로 생활일기도 써 보자. 가정예배나 저녁기도로 영성훈련을 다시 시작하자.  머지않아 우리는 2021년을 ‘기적의 해’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회가 왔다. 다시 시작하자. 송길원목사/ 가족생태학자, 하이패밀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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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5-07
  • 2030세대와 한국교회의 미래
      지난 4월 7일 대한민국은 한국을 대표하는 두 도시 서울과 부산의 시장을 보궐 선출했다. 그 결과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여당 소속의 두 전 시장들의 잘못으로 치러진 선거였기 때문에 민심과 판세는 이미 반(反) 여당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데 선거 이후 정치권은 무엇보다 2030세대의 표심의 변화로 화들짝 놀랐다. 현재 양 당은 이들 세대에 대한 재분석과 대책을 마련하느라 허둥대고 있다. 그러면 교회는 이 2030 세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들이 교회의 현재이며 미래가 아닌가? 혹시나 교회는 이들을 알려고 한 적도 없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알려고 다각도로 노력하고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20년 뒤의 한국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다. 교회가 이런 의식조차 없다면 거의 무대책으로 지난 20년 동안 시간을 허송하다가 현재 문을 닫을 지경에 처한 수많은 지방 사학들처럼 될 지도 모른다   논객 진중권은 2030세대가 능력주의에 기반하고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것을 정의로 이해하는 세대라고 분석했다. 2030의 서사는 이 능력주의, 즉 “개별적 경쟁의 이데올로기”다. 4050세대들은 2030세대의 현재 모습을 진보에서 보수로 이동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4050은 자신들의 민주화라는 서사를 통해 2030을 바라보고 재단하기보다는 2030의 서사와 삶의 정황에서 이해하는 작업을 선행해야 한다는 진중권의 지적은 정확한 일침이다.   1980년대 서구에서는 개인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이 시기에 개인주의가 출현하게 된 기저에는 시대적 ‘불안’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았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과 핵무기 경쟁이 치열했던 시기에 핵전쟁의 공포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서구 사회의 청년들과 시민들에게 적잖게 드리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다른 성격이지만, 2020년 현재 한국의 2030 젊은이들에게도 불안과 두려움이 매우 강하게 억누르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직장, 연예, 결혼, 주택 등을 거의 포기한 4포세대로 살아오고 있는 2030세대는 설상가상으로 현재 코로나19가 덮쳐 최악의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암담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이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단어이다.   현재 2030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불안에서의 탈출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하지만 안전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와 개인주의가 만날 때 때로는 극단적 개인주의로 흐를 개연성을 안고 있다. 테일러 교수는 불안에 기원하는 개인주의는 개인의 안전을 위해 타인의 안전까지도 위협하고 빼앗는 약육강식의 삶의 방식을 택하고 정당화하는 정글의 법칙을 조장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였다. 각자도생의 삶의 방식은 능력이 없는 자들은 도태시키고, 능력있는 자만 살아남는 것을 정당화하는 정글의 윤리를 배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인주의와 능력주의는 서로 연결될 개연성을 안고 있음을 인식하고 조심할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를 지배했던 공로주의를 거부하고 은혜의 공동체인 교회의 참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샌델(M. Sandel) 교수의 말처럼 중세의 공로주의는 현대에 능력주의라는 옷을 입고 이 세대를 지배하고 있다. 샌델 교수는 이 시대의 불안과 능력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을 『공정하다는 착각』의 마지막 문단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분이지 우리 업적 덕분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종교 개혁가들의 언어로 표현하면 “오직 은혜(Sola Gratia)”이다. 불안이 지배하는 현대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자기 힘으로 자신을 지탱할 수 없는 약한 자들을 돌봐주는 교회의 역할이 필요한 때이다. 교회는 사냥개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불안해하는 2030세대의 서사 속에 들어가 이들과 소통하고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서사, 즉 은혜의 복음의 서사를 들려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 주고, 그 피난처로 불러들이고, 그 피난처의 서사를 함께 만들어 가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선거를 치르고 난 현재 한국교회가 시급히 고민해야 할 화두이다. /고려신학대학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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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22
  • 온 몸으로 진리를 살아내는 ‘존재의 울림’
      나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최소한 다음 네 가지 사실을 포함하여야 한다고 본다. 첫째로, 영적인 측면에서 그는 거듭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진 사람이다. 둘째로, 정신적인 측면에서 그는 회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사상적 관점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지성에 벼락을 맞은 사람이다. 셋째로, 성향적인 측면에서 그는 자기사랑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변화된 성향을 마음에 부여받은 사람이다. 비록 잔존하는 죄성과 여전히 갈등하지만 말이다. 넷째로, 생활적인 측면이다. 그는 믿음과 순종으로 언약 생활에 죽도록 헌신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종말론적 소망 안에서 세상에서의 노동과 문화변혁에 헌신하며 살도록 부름받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무시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한다. 그래서 교회는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갖고 있는 나쁜 인상을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러나 그 고민 끝에 나온 교회의 노력들은 비리로 얼룩진 기업이 경영의 위기를 타개해 보려는 대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물론 나는 세상의 비난을 참착해서 자신을 개선하려는 교회의 노력들에 대해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길을 잃었는지를 성경에 물어야 한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택하신 족속”이라고 부른다(벧전 2:9). 초대교회를 생각해 보자. 물론 그 시대가 모든 것에 있어서 완벽한 표준을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에 위대한 각성이 일어날 때마다 초대교회의 신앙은 표준으로 회자되었다. 13세기 가톨릭의 개혁운동의 시대가 그러했고, 16세기 종교개혁의 때도 그러하였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기독교가 보편화 되어 있던 종교개혁 시대보다는 이방문화에 에워싸였던 초대교회 시대와 흡사하지 않는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가?”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캅은 로마가 기독교를 핍박하던 시기에 교회를 보살폈던 인물로, 소위 속사도 교부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폴리캅의 순교〉라는 책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방인들의 평가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족속들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이방인들에게〉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스트로마타〉라는 글에도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소개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을 ‘제3의 족속’이라고 불렀다(6.5.41). 이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이나 이방인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사는 족속이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 사람들이 당시 그리스도인에게서 받은 독특한 인상이었다. 이는 오늘날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받는 인상과 얼마나 다른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들에게 있는 무엇인가가 우리에게는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현대교회의 선각자인 프란시스 쉐퍼(F. Schaeffer)가 당시 미국교회의 복음주의에 대해 외친 것은 오늘날 조국교회에서도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이름만 복음주의일 뿐, 맛 잃은 소금이며 빛 잃은 등불이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분명히 존재의 울림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인으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비기독교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이 던져주는 울림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는 〈보편교회 교인의 생활방식과 마니교인의 생활방식〉에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들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한 변화된 삶의 방식 뒤에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있었다(행 20:21).  /열린교회 목사, 총신대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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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22
  • 보수 대 진보, 이보다 높은 기준
    우리 사회의 갈등이 심하다. 보수와 진보, 세대, 사회적 성취에 따른 계층, 지연과 학연, 혈연 등이 그 현상들이다. 이 중 보수와 진보는 사회 갈등을 총칭하는 통속적인 표현이다. 사실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는 그 본디 개념에 부합되지 않는다. 정치 현장을 중심으로 정당의 이익을 위한 도구인 경우가 더 많다. 우리 사회가 성숙해지려면 보수와 진보의 틀을 넘어서는 상위 가치의 틀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세 단어의 뜻을 먼저 정의한다.   ‘사실(事實)’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을 뜻한다. 우리 사회에서 언론을 중심으로 많이 쓰이는 표현으로 하면 ‘팩트’다. 언론 보도의 유형으로 말하면 이른바 스트레이트 기사의 내용이다. 언론의 기획 기사나 심층 보도에서는 취재 기자나 기자 팀의 시각과 주견이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스트레이트 기사는 언론 보도의 일반적인 준칙에 따라 사안 자체의 사실을 보도해야 한다. 사실을 의도적으로 꺾거나 비트는 것은 언론을 병들게 한다.    ‘진실(眞實)’은 거짓이 없는 사실 또는 마음에 거짓이 없이 순수하고 바름을 뜻한다. 이 단어의 개념에서는 사람의 자의식 곧 마음에 인식하고 있는 거짓이 있느냐가 중점이다. 거짓 정보를 진짜라고 굳게 믿고서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면 마음의 자의식에 거짓은 없으니 진실이다. 그러나 사실에서는 틀렸다. 인격이 훌륭하고 윤리도덕으로 수양이 깊은 사람은 진실성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에서 실수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올바른 정보가 차단되고 거짓 정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사실에서 실수한다.   ‘진리(眞理)’는 참된 이치 또는 참된 도리를 뜻한다. 특히 종교에서는 본질적이고 영원한 가르침을 말한다. 기독교 신앙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복음인데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내용을 가리킨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쉽지 않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끊임없이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묵상에서 깨달은 바를 인격적인 결단으로 행동하지 않고는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진리는 정보 습득 차원의 지식과 다르다. 삶의 처신이나 처세의 성숙함을 뜻하는 지혜와도 다르다. 근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이들이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기독교 신앙인들까지 보수냐 진보냐를 물으면 안 된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질문이 요한복음 18장 38절에 있다. “진리가 무엇이냐?”   위에서 살핀 세 단어를 사용해서 세심하게 표현해보자. 먼저 아주 분명한 것, ‘진실’에서 벗어나는 사람 곧 마음에 거짓을 품은 사람은 결코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보수든 진보든 거짓은 하나님 앞에서 죄다. 다음으로, ‘사실’을 알려는 노력과 수고가 없이는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실을 파악하는 데 힘을 쏟는다. 보수든 진보든 사실에서 어긋나면 잘못이다. 진리는 그 안에 진실과 사실을 포함한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가치는 진리다.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가치는 사실과 진실의 본디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회적인 갈등 상황에서 사실의 규명이나 이른바 진실 게임 같은 것들을 놓고 논쟁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공적인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진리를 중심에 놓고 이를 근거로 사실과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해야 한다. 이로써 교회는 현재의 갈등을 넘어서는 더 높은 기준을 갖고 보수와 진보를 끌어안는 어머니 역할을 할 수 있다. 소통하고 공감하는 열린 보수와 열린 진보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두 축이다.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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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5
  • ‘춘래불사춘’과 교회
       서울의 벚꽃이 100년 만에 가장 일찍 피었다는 꽃소식과 함께 그 어느 때보다 봄이 빨리 우리 곁에 찾아왔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춘래불사춘’이다. 봄이 와도 봄이 아닌 것이다. 그동안 교회는 욕을 먹어도 너무 많이 먹었다. 세상 사람들이 무지막지하게 욕을 하고 싸잡아 비난을 해도 교회는 묵묵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코로나 펜데믹의 가장 큰 희생자가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 2021년 부활절을 맞았다. 화창한 봄과 더불어 찾아온 부활절이다. 하지만 교회는 조용하고 잠잠하다. 기독교 최대의 축일인 부활절을 앞두고 냉냉하기만 하다. 교회의 사회적 위상과 권위가 크게 떨어지고, 교회에 대한 불신과 비난의 소리가 드높아도 숨을 죽이고 있다. 자칫 말 한마디라도 꺼내면, 세상 사람들이 온통 달아오른다. 어쩌다 교회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단순히 코로나 때문일까?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 때문일까? 아니면, 교회에 대한 매스컴의 부정적 보도 때문일까? 혹은 일부 정치인들의 반기독교적인 정서 때문일까? 물론 이런 저런 나름대로의 그럴듯한 이유를 우리는 찾을 수 있고, 그러한 것들이 교회의 불신을 조장하는 여건이 되기도 한다는 것은 일면 수긍이 간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일부 교회지도자들의 이같은 의혹들은 오늘의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들은 코로나 사태를 맞이하면서, 여러 학자들과 전문가들을 통하여 코로나 이후의 교회에 대하여 심도있게 논의하며, 다양한 대안과 해법을 모색하였다. 그 중에서 특히 ‘교회의 공공성’의 이슈가 집중적으로 부각되었다. 대한민국 교회가 사회적 위상과 영적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현실은 “과연 교회가 세상에서 대안이 될 수 있는가?”를 직시하게 하고, 교회로 하여금 심각한 자기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공공성은 “교회가 진정으로 섬김의 공동체가 되느냐?” 라는 물음과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갈 것인가?” 라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물론 이 두 가지 물음은 새로운 물음이 아니다. 이미 2천년전 초대교회부터 끊임없이 물어왔던 질문이다.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신선한 삶의 충격과 새로운 변화의 도전이 되었다. 곧 교회가 세상에서 ‘대안공동체’가 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이질적이고 배타적인 종교집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그들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면서 교회의 공공성이 절실한 이 때, 교회는 이 물음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가져야 한다. 과연 교회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한 해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사람이 달라져도 교회는 ‘다른 복음’ ‘다른 십자가’를 전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를 종교적 표상과 기복의 도구로 삼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금 십자가, 은 십자가’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큰 십자가, 작은 십자가’를 말해서도 안 된다.    교회는 이기적인 욕망과 탐욕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주저하지 말고 십자가를 져야 하며, 섬김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야 한다. 그렇다. 교회가 진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가 살고, 교회가 세상을 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께서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부하신다. “너희는 부활의 능력으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에 나아가라.” /동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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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2
  • 찬송가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며 감격하여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곡조 있는 성도의 고백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으로 부터 40여 년전 한국교회는 합동찬송가와 새찬송가, 개편찬송가란 이름으로 여러 찬송가가 혼재되어 연합집회를 비롯한 초교파 모임이 있을 때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1981년 4월 9일 한국찬송가위원회(통합, 기감, 기성, 기침, 기장, 고신)와 새찬송가위원회(합동, 예감, 루터)가 교계의 뜻을 따라 한국찬송가공회란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의 통일찬송가를 제작 보급하게 되었다.   통일찬송가를 사용한지 23년이 지나고 시대의 변화와 교계의 요망과 한국인의 창작찬송 필요성에 따라 새 찬송가 발행을 추진해 오던 중 200여명의 전문가가 참여하여 400여회의 회의와 토론회를 거치고 해외에서 3차례(뉴욕, LA, 토론토)의 공청회를 거쳐 통일찬송가 중에서 481곡 외국 찬송 중에서 53곡 창작 한국찬송가(공모 곡 포함) 1만여 곡 중에서 엄중 심사한 후 111곡을 선정하고 645곡의 21세기찬송가를 발행하여 2006년 9월 30일에 백주년기념관에서 출판감사예배를 드리고 오늘 까지 초교파적으로 통일된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찬송가공회는 2006년 12월 4일에 일반찬송가를 2007년 9월 10일에는 해설찬송가를 2008년 2월 5일에는 한영찬송가를 한국찬송가공회 명의로 저작권등록을 마쳤다.   그 후 한국찬송가공회는 교계의 요구와 원활한 사업 추진을 꿈꾸며 재단법인을 설립키 위해 노력해 오던 중 충청남도에서 재)한국찬송가공회를 설립하였어나 재)한국찬송가공회 설립에 관한 문제와 출판권 문제, 저작권 문제 등으로 인해 많은 소송을 접하면서 7~8년 동안 막대한 소송비용과 이해 충돌로 인해 3개 교단에서 이사 파송을 중단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바라는 교계의 간절한 소망과 이해 당사자들이 한 마음 되어 상호 양보하는 차원에서 모든 재판을 합의로 종결(2016년 2월 5일)하고 재)한국찬송가공회(공동 이사장 서정배, 강무영)와 5개 교단대표(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전용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 유동선,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 채영남,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장 박무용,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최부옥)와 비공회 대표들이 프레스쎈타에서 만나 (2016년 2월 11일) 많은 교계 언론사와 기자들 앞에서 그동안 여러 가지로 불미스러웠던 일들을 종식하고 재)한국찬송가공회는 출판계약 당사자인 기독교서회와 예장출판사와의 계약을 존속하며 성서원,아가페,생명의 말씀사,두란노등 4개사와는 반제출판을 하도록 하고 이해 당사자들의 일보양보와 상호연합과 일치를 도모하는 정신으로 합의되었음을 확인하고 각 교단도 재)한국찬송가공회가 한국교계에 연합과 일치의 본이 되는 연합 가관이 되도록 함께 협력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어렵고 힘들었던 과정을 지나 오늘에 이른 재)한국찬송가공회는 교단의 이해를 넘어 명실상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는 넓고 큰마음으로 하나 된 찬송가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많은 성도들에게는 은혜로 기쁨이 충만한 찬송을 부르며 더 발전된 찬송가 제작과 보급으로 교회의 부흥과 발전에 이바지 하는 기관이 되길 간절히 소원해 본다.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대표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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